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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조, 어떻게 고를까?
    그동안 우리나라 상조의 유래와 실태, 법령 등 제도부터 명당과 풍수 등 여러 설(說)까지 살펴봤습니다. ‘그래서 어쩌자고?’라는 꾸지람 겸 나무라는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상식이라면 쓰고 읽는 수고가 부질없겠고, 전문적이라면 그렇잖아도 꺼려지는 것과 관련해 머리만 더 무거워졌다는 것이지요. 지당합니다.걱정 끝에, 흔한 안내문처럼 ‘유고(有故) 대응법’ 정도라도 말씀드리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친 글에 가벼운 마무리나마 되고, 글을 읽으신 분들의 어지러웠던 심사에 소박한 위로라도 되기를 기대합니다.상조의 특징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죠. 즉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에 대응하기가 어렵고 복잡하다. 전문적(지식이 있는)인 누군가가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 상조의 존립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상황이 발생한 다음 결정한다는 것은 ‘어떻게 되겠지’라며 방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믿고 대사(大事)를 맡길 만한 ‘누구’(단체)를 어떻게 찾고,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아야 할까요? 세상에 있는 상조 관련자(업체) 전체를 특히 그 속내까지 다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현재 우리나라 상조업체 수 75개) 또 일방적으로 퍼붓는 광고(廣告)나 달콤한 홍보를 전적으로 믿어서도 안 되겠지요. 관계된 사람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기계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형화된 대꾸에 끌려가듯 결정하는 것도 영 마뜩찮습니다. 지금 바로 주변에서 상조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세요. 그에게 조언을 부탁하고, 그 근거를 확인해 보세요. 다른 뭣보다 상식에 맞는 내용인지 따져보세요. 뜬 구름 잡는 것처럼 큰 혜택을 준다거나, 까마득한 미래 일을 눈앞에 있는 것처럼 꾸미지는 않는지 살펴보시라는 것입니다. 알 만한 업체 몇 곳의 상품 내용 등을 비교해 달라고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요.아프면 의사를 찾고 다툼이 있으면 변호사를 구하는데 '인생의 큰일(人倫之大事)'을 치르는 데도 ‘믿을 만한’ 전문가가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고요? 있을 겁니다. 있습니다. 장례가 며칠 수고하고 대충 앞뒤 맞춰 그럭저럭 치르는 요식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안타까운 마음을 다 한다면, 반드시 그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 만물이 모두 연관돼 있다는데, 사람과 그 사이를 귀하게 여기는 정성이 헛되이 그냥 스러지겠습니까. 긴 가뭄 끝 단비나 오랜 장마 뒤 햇볕처럼 ‘풍수(風水)’를 온전하게 하는 밝은 도움(明堂)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주성식=금호라이프 홍보부장 sesan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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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1
  • 민왕후 시해…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참극
    # 을미사변의 진상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민왕후(1851~1895,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경복궁 건천궁 곤녕합에서 시해된 것이다. 이는 세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참극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을미왜변’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사건의 배후와 시해 과정 그리고 시해범 등의 논란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을미사변은 은밀히 진행된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 측이 철저히 인멸·왜곡했기 때문이다. ‘고종실록’이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간행되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을미사변의 진상을 ‘고종실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먼저 1895년 8월 20일의 고종실록이다.    “묘시(卯時 아침 5-7시)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붕서(崩逝)하였다. 이보다 앞서 훈련대(訓鍊隊) 병졸(兵卒)과 순검(巡檢)이 서로 충돌하여 양편에 다 사상자가 있었다. 19일 군부 대신 안경수가 훈련대를 해산하자는 의사를 밀지(密旨)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가서 알렸으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가서 만나보고 알렸다.이날 날이 샐 무렵에 전(前) 협판(協辦) 이주회가 일본사람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함께 공덕리(孔德里)에 가서 대원군을 호위해가지고 대궐로 들어오는데 훈련대 병사들이 대궐문으로 마구 달려들고 일본 병사도 따라 들어와 갑자기 변이 터졌다.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은 광화문 밖에서 살해당하고 궁내 대신 이경직은 전각(殿閣) 뜰에서 해를 당했다. 난동은 점점 더 심상치 않게 되어 드디어 왕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되었는데, 이날 이때 피살된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기 때문에 즉시 반포하지 못하였다.” 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2개월 정도 지난 10월 15일에 고종은 왕후의 승하를 공식화했다.  그러면 을미사변의 진상을 살펴보자. 8월 19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안경수가 일본인 장교가 훈련시키고 있는 훈련대 970명을 해산한다는 밀지(密旨)를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미리 알렸다.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만나 분노를 터뜨렸다. 미우라는 우범선에게 다음날 훈련대와 함께 항의하도록 권유했다. 8월 19일 밤 궁궐에서는 사면된 민씨척족 실세 민영준(나중에 민영휘로 개명)이 궁내부 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밤늦도록 열렸다. 왕후는 고종과 함께 달 놀이까지 즐겼다.8월 20일에 일본은 작전명 ‘여우사냥’을 감행했다. 새벽 1시경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등 30명은 서울 공덕리에 가서 3시경에야 대원군을 강제로 가마에 태워 경복궁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고종실록과 1896년 1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판결문에는 이주회가 오카모토와 동행했다고 적혀 있으나 이주회는 동행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연, 기쿠지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서해문집, 2015, p44)대원군 일행은 4시 반 경에 서대문에 이르렀고, 5시 반에 광화문에 도착했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살해당했다. 광화문 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각각 100여 명의 일본군이 추성문, 춘생문을 통과해 궁궐을 공격했다. 이에 궁궐시위대 미국인 교관 다이의 지휘하에 300~400명의 시위대가 저항했으나 곧 무너졌다. 미국인 교관 다이와 러시아인 사바틴은 서양인 숙소로 몸을 숨겼고 궁궐 시위대는 도망쳤다.이후 일본군 수비대 600여명이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했다. 일본 낭인 수십명과 군인들은 곧바로 건청궁으로 돌진해 왕과 세자의 측근을 붙잡았고 일부는 왕후의 침실인 곤녕합으로 향했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왕후를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는데 이것이 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단서가 됐다.왕후는 뜰 아래로 뛰어내렸지만 붙잡혀 쓰러졌다. 낭인은 왕비의 가슴을 내리 짓밟으며 여러 번 칼로 찔렀다. 낭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살해하였는데, 그때 의녀가 앞으로 나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덮어줬다. 이내 왕후와 궁녀 몇 명의 시신은 녹원에서 불태워졌다. 시간은 6시경이었다.그런데 민왕후의 ‘능욕설’이 논란이다. 내각 고문관으로 근무한 이시즈카 에조가 일본 법제국장에게 8월 21일에 보낸 보고서 때문이다. 여기에는 “칼로 찔러 상처를 입히고 나체로 만들어 국부검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태워 버리는 등…”이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시즈카는 을미사변의 가담자가 아니었고 검증되지 않은 유언비어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연, 위 책, p 72-73) # 고종, 민왕후를 폐서인하다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틀 후인 1895년 8월 22일에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민왕후를 폐서인했다. “짐(朕)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32년에 다스림과 덕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왕후 민씨가 그 친당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어 백성을 수탈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먹고 탐학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려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해 지난해 12월에 종묘에 맹세하기를 ‘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해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씨는 구악(舊惡)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것없는 무리를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대신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며 또한 짐의 나라의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해 변란을 격발시켰다.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해 임오군란(1882년)의 지나간 일을 답습했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이 차고 넘쳐 선왕(先王)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는 것이다. 짐이 부득이 왕실의 옛 법을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廢)해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고종실록 1895년 8월 22일)그런데 고종은 조령에 서명을 거절했다. 하지만 미우라 공사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 대신들이 서명해 조령을 공포했다.한편 민씨 척족들이 세도정치를 하고 매관매직으로 백성을 수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왕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이고, 1894년에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해 청일전쟁을 자초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잘못이다.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왕비는 20년 동안 정치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해 천고에 없는 을미왜변을 당했다면서, 폐서인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실상(實相)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또한 영국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의 ‘1896년 서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때때로 비양심적인 왕비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일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자신의 신변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왕은 그의 왕조의 가장 최악의 전통으로 되돌아갔다.”(비숍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p 443)이윽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민왕후의 폐서인 사실을 각국 공사관에 알렸다. 이러자 알렌 미국 공사, 베베르 러시아 공사를 비롯한 몇몇 외교관들이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고종을 알현했다. 이때 고종은 거의 유폐 상태였다.그런데 민왕후가 폐서인(廢庶人)된 다음 날인 8월 23일에 왕태자가 상소문을 올렸다. 이러자 고종은 빈(嬪)의 칭호를 특사(特賜)했다.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이다. 이날 고종은 친일파 김홍집, 정병하 등을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고 지난 8월 22일에 내린 조령은 역적 무리들이 위조한 것이라며 민왕후의 폐서인 조치를 취소했다.※홍계훈(초명은 홍재희)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왕후를 창덕궁에서 구한 민왕후 측근이었고, 1894년 동학 농민봉기 때 초토사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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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4
  • 친러·친미파 등 ‘정동그룹’ 기용에 日 위협 느껴
    1894년 12월 12일(양력 1895년 1월 7일)에 고종은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홍범 14조’를 신령 앞에 고하였다.  “감히 황조(皇祖)와 열성(列聖)의 신령 앞에 고합니다. (중략)우리 왕조를 세운 지 503년이 되는데 짐의 대에 와서 시운(時運)이 크게 변하고 문화가 개화하였으며 우방(友邦)이 진심으로 도와주고 조정의 의견이 일치되어 오직 자주 독립을 해야 우리나라를 튼튼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짐이 어찌 감히 하늘의 시운을 받들어 우리 조종께서 남긴 왕업을 보전하지 않으며 어찌 감히 분발하고 가다듬어 선대의 업적을 더욱 빛내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다른 나라에 의지하지 말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여 백성의 복리를 증진함으로써 자주독립의 터전을 튼튼히 할 것입니다. 생각컨대 그 방도는 혹시라도 낡은 습관에 얽매지 말고 안일한 버릇에 파묻히지 말며 우리 조종의 큰 계책을 공손히 따르고 세상 형편을 살펴 내정(內政)을 개혁하여 오래 쌓인 폐단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짐은 이에 14개 조목의 큰 규범을 하늘에 있는 우리 조종의 신령 앞에 고하면서 조종이 남긴 업적을 우러러 능히 공적을 이룩하고 감히 어기지 않을 것이니 밝은 신령은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홍범(洪範) 14조는 이렇다. 제1. 청(淸)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제2. 왕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및 종친(宗親)과 외척(外戚)의 본분과 의리를 밝힌다. 제3. 임금은 정전(正殿)에 나와서 시사(視事)를 보되 정무(政務)는 직접 대신들과 의논하여 재결(裁決)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제4. 왕실에 관한 사무와 나라 정사에 관한 사무는 반드시 분리시키고 서로 뒤섞지 않는다.제5.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와 권한을 명백히 규정한다.제6.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모두 법령으로 정한 비율에 의하고 함부로 명목을 더 만들어 불법적으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제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관할한다.제8. 왕실의 비용을 솔선하여 절약함으로써 각 아문과 지방 관청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제9. 왕실 비용과 각 관청 비용은 1년 예산을 미리 정하여 재정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제10. 지방 관제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권한을 제한한다.제11. 나라 안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인다.제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법을 적용하여 군사 제도의 기초를 확립한다.제13. 민법과 형법을 엄격하고 명백히 제정하여 함부로 감금하거나 징벌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제14. 인재 등용에서 문벌에 구애되지 말고 관리들을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구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고종실록 1894년 12월 12일)홍범 14조 중 가장 주목할 것은 제1조와 제3조이다.  제1조 청(淸)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그간 고종과 민왕후는 청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을 비롯하여, 1894년에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은 고종 부부의 씻을 수 없는 과오였고 청나라는 원세개를 파견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취급했다. 제3조 임금은 정전에 나와서 시사를 보되 정무는 직접 대신들과 의논하여 재결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이 3조는 민왕후와 대원군의 정치 관여가 심각했음을 고백한 셈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홍범 14조는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기초 확립을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본의 내정간섭 강화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적이자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는 김홍집 친일 내각에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와 서광범을 내부와 법부 대신에 포진시키고 고종에게 홍범 14조를 발표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1895년 4월 17일에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했다. 그런데 조약 체결 6일 후인 4월 23일에 러시아가 주도하여 독일 · 프랑스 3국이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고 나왔다.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이었다. 4월 29일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요동 반도 반환을 결정했고 그 대신 청국으로부터 배상금 3000만 냥을 받기로 하였다. 러시아의 기침 한 번에 일본이 독감에 걸린 것을 본 영악한 민왕후는 열강의 역학관계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민왕후는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척)을 추진했다. 고종은 5월 13일(음 4월 23일)에 친일파의 거두인 군부 대신(軍部大臣) 조희연을 파면하였다. 거일(拒日)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민왕후는 인아뿐만 아니라 친미도 추구했다. 1895년 5월 28일에 총리대신 김홍집이 사직하자 고종은 친미파인 학부대신 박정양을 총리대신에, 이완용을 학부 대신에 임용하였다. 이는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의 영향이 컸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살린 선교사 알렌은 박정양 · 이완용과 함께 워싱턴의 주미한국 공사관에서 근무한 외교사의 증인이다. 그리하여 알렌은 8월에 노다지 금광인 평안도 운산 금광채굴권을 획득했다.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 p 162)  7월 6일(윤 5월 14일)에 내부대신 박영효의 역모 사건이 터졌다.  박영효는 고종의 체포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노우에가 천거한 친일파의 몰락이었다. 당시에 고종 부부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의 부인 그리고 손탁 여사 등의 세련된 외교술로 인해 ‘인아거일’이 확고해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음력 7월 3일(이하 음력이다)에 고종은 대사령(大赦令)으로 민영준,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민영순, 민형식, 이용태, 김문현, 조병갑 등 279명을 사면하였다. 민씨 척족을 다시 기용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민왕후의 입김이 컸다. 동학농민전쟁을 야기시킨 조병갑·김문현 ·이용태 등과 민영준·민형식 같은 부패한 민씨 척족을 사면하다니. 고종의 이중성이 엿보인다. 더구나 민영준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병조판서를 한 역사의 죄인이었다.  음력 7월 5일에 고종은 김홍집을 다시 총리대신에, 박정양을 내부 대신에 임용했다. 궁내부 협판 이범진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친일파는 줄어들고 친러파와 친미파 등 소위 정동그룹이 기용된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돌격형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를 주한 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7월 13일에 조선에 온 미우라는 전(前) 공사 이노우에와 함께 7월 15일에 고종을 알현했다.이후 이노우에는 7월 29일까지 17일간 미우라와 함께 민왕후를 시해하는 ‘여우 사냥’ 작전을 꾸미다가 일본으로 돌아갔고, 미우라는 공관에 머물면서 참선에 몰두하는 척했다.8월 16일에 내부 협판(차관) 유길준은 의주부 관찰사로 밀려났고, 8월 17일에 궁내부 협판 이범진이 농상공부 대신에 임용되었다. 친일파가 완전히 숙청된 것이다.이어서 민씨 일파는 일본군 장교가 교육하는 훈련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무청 순검(巡檢 경찰)을 이용했다. 이리하여 훈련대 병졸(兵卒)과 순검이 서로 충돌하여 양측에 사상자가 생겼다. 8월 19일 오전 7시 군부 대신 안경수가 일본인 장교가 훈련시키고 있는 훈련대 970명을 해산한다는 고종의 밀지(密旨)를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가서 미리 알렸다.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만나 분노를 터뜨렸다. 미우라는 우범선에게 다음날 훈련대와 함께 항의하도록 권유했다. 그리고 거사일을 8월 22일(양력 10월 10일)에서 8월 20일로 앞당겼다.  8월 19일 밤 경복궁에서는 사면된 민씨 척족 실세 민영준(1901년에 민영휘로 개명)이 궁내부 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밤늦도록 열렸다. 민왕후는 고종과 함께 달 놀이까지 즐겼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민왕후가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되었다.     
    • 기획.연재
    2021-05-10
  • 중국 중심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 붕괴
    평양성 전투에서 대승한 일본군은 1894년 10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 요동 반도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11월 8일에는 대련을 점령했다. 11월 22일에 일본군은 청나라 해군의 요람인 뤼순을 함락시켰다. 북양함대는 이미 산동 반도의  웨이하이웨이로 이동한 후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뤼순에서 중국인을 모두 죽였다. 심지어 여자와 어린이 불문하고 모조리 죽였다. 도시는 거대한 도살장으로 변했다. “나는 작은 아이를 안고 있는 한 여인을 봤는데, 그녀는 앞으로 힘겹게 나가며 호소하듯 병사들 쪽으로 아이를 추켜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둑에 이르자, 그 비겁한 놈들중 한 놈이 총검으로 그녀를 찔렀고, 그녀가 쓰러지는 순간 두 살쯤 된 아이를 찌르고는 그 어린 몸을 높이 쳐들었다. 여자는 일어나서 아이를 되찾으려고 맹렬하게 몸부림쳤지만, 결국 지쳐 쓰러져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일본군의 손이 닿는 모든 시체가 그랬듯, 그녀의 시체도 여러 쪽으로 토막이 났다. 호수에 더는 빈틈이 없을 것 같을 때까지, 새로운 희생자의 무리들이 떠밀려 들어갔다.” 당시 끔찍한 대살육을 목격했던 영국인 제임스 앨런의 증언이다. 미국의 <뉴욕 월드>는 11월 28일 기사에서 6만 명이 살해되었고 생존 주민은 36명에 불과했다고 보도했다. <월드>의 제임스 크릴만 기자는 “일본은 지금 문명의 가면을 벗고 야만의 모습을 드러낸 괴물”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뤼순학살사건은 일본의 언론공작으로 실상이 축소되어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상은 1937년의 난징 대학살에서 재현되었다. 일본군은 중국인 100만 명을 잔인하게 학살했고,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에는 일본군 두 명이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까지 보도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12월 16일에 복주를 점령하고 산해관 방면으로 계속 진격했다. 북경 점령도 멀지 않은 것이다. 전황이 극히 불리해지자 청나라는 호남 순무 소유렴과 호부시랑 장음환을 전권대신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회담 장소는 히로시마였다. 그런데 일본은 회담을 거절했다. 예상을 뛰어넘은 승전을 하고 있는 마당에 강화회담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1895년 1월 25일에 일본군은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있는 청국의 북양함대 해군기지를 공략하였다.1월 30일에 남쪽 방포대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2월 1일에 북쪽 방포대를 파괴했다. 이로써 청군은 웨이하이웨이의 육상 거점을 완전히 잃었다. 2월 4일 밤에 드디어 해전이 시작되었다. 일본 연합함대와 청나라  북양함대의 공방전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양측의 함선 다수가 격침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 해군은 2월 8일에 류공다오를 장악했고, 2월 9일에는 북양함대가 자랑하는 정원(靖遠)호를 침몰시켰다. 2월 12일 생존한 북양함대의 군함에서는 외국 고용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에 투항할 것을 협박했다. 결국 잔존한 북양함대는 일본군에 항복했고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은 자결했다.  북양함대의 남은 함선인 진원, 제원, 평원, 광병, 진변, 진중, 진북, 진서, 진동, 진남 등 15척은 고스란히 일본 연합함대에 인수되었다.북양함대 패전은 부패 때문이었다. 여제(女帝) 서태후가 60세 회갑을 맞아 북경의 이화원을 중수하느라 해군 예산을 몽땅 쓴 것이다. 북양함대에는 포탄이 단 세 발밖에 없었다 한다.3월에 일본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급해진 청나라는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을 전권대신으로 교체하고 강화회담 재개를 서둘렀다. 3월 19일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이홍장은 20일부터  아카마 신궁 옆에 있는 춘범루(春汎樓)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와 강화회담을 개시하였다. 청국 측 대표는 이홍장, 이경방(이홍장의 양자), 오정방,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외상이었다.    복어요리로 유명한 춘범루는 이토가 자주 찾은 곳이었다. 여기에서 만난 기생 우메코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이날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처리를 위하여 1885년 4월에 중국 천진에서 만난 후, 꼭 10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런데 지금은 청-일 양국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홍장은 회담을 시작하자마자 휴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토는 논의해보겠다면서 느긋했다. 3월 20일에 이홍장은 춘범루 근처인 인접사(引接寺)로 숙소를 옮겼다. 73세의 이홍장은 배에서 생활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3월 21일에 제2차 회담이 속개되었다. 이번에도 의제는 휴전이었다. 이토는 휴전 조건으로 천진과 산해관을 일본에 양도할 것 등을 제시했다.3월 24일에 제3차 회담이 열렸다. 이 날 이홍장은 휴전은 거론 안 하겠으니 강화 문제를 논의하자고 했다. 이토는 다음 날 강화조건을 제시하겠다고 답했다.회담을 마친 이홍장은 숙소인 인접사로 향하였다. 이홍장이 탄 가마가 모퉁이를 막 돌 때였다. 갑자기 괴한 한 명이 달려들어 권총을 발사했다. 탄환은 이홍장의 왼쪽 광대뼈 아래를 뚫고 들어가 왼쪽 눈 밑에 깊이 박혔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총탄이 금테 안경에 맞은 것이 행운이었다.저격범은 26세의 극우주의자였다. 그는 ‘강화하면 안 된다. 이참에 중국을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홍장을 저격한 것이다.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일본을 야만국이라고 비난할 것을 우려한 메이지 천황이 성명을 발표하고 육군 군의총감을 보내는 등 법석을 떨었다.이홍장의 피습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다. 일본이 유연해진 것이다. 4월 10일에 이홍장은 회담장에 다시 나왔다. 이후 협상은 급진전되어 4월 17일에 청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빌미가 되어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8개월 20일 만이었다.  청일간에 조인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이 독립 자주를 손상시키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완전히 폐지한다.둘째, 청국은 요동반도·대만·팽호열도를 일본에 할양한다.셋째, 청국은 전비 배상금으로 2억 냥(약 3억 엔)을 일본에 지불한다. 넷째, 청국은 일본에게 구미 열강이 청국에서 누리는 것과 동등한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함을 승인한다.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는 붕괴되었다. 종래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인 책봉-조공관계는 사라졌다.  그런데 조약 체결 6일 후인 4월 23일에 러시아가 주도하여 독일·프랑스 3국이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고 나왔다.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이었다. 일본은 분노하였으나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월 29일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요동 반도 반환을 결정했고 그 대신 청국으로부터 배상금 3천만 냥을 받기로 하였다. 이후 일본에는 러시아에 대한 적개감이 고조되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섶에 누워 쓸개를 맛본다는 뜻)’이라는 말이 슬로건처럼 번지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군비확장에 주력하였다.   이러자 영악한 민왕후는 친러 반일로 돌아섰다. 조선은 또 한 번의 격랑을 예고하고 있었다. < 참고문헌 > o 이윤섭 지음, 다시 쓰는 한국 근대사, 평단문화사, 2009o 김희영 지음, 이야기 중국사 3, 청아출판사, 2006o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지음,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 휴머니스트, 2012o 신명호 지음,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4  
    • 기획.연재
    2021-04-26
  • 사람사이 상조이야기/상조, 상식이 상책!
    앞 글에서 상조(장례)와 관련한 최소한의 판단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놀랄 만한 이익과 혜택은 대개 허황된 것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시면서 잘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그렇다면 77개쯤(구조 조정이 진행되고 폐업하는 경우도 있어, 숫자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되는 선불식 상조업체는 다 괜찮고 믿을 수 있을까요? 복잡하고 어렵지 않은 일상적 지식을 적용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상조(업) 관계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광고(廣告)를 통해 상조를 접하지요. 인기 배우 등 유명인이, 무척 진지한 표정과 확신에 찬 어조로 업체를 자랑합니다. 자본금이 얼마, 선수금은 이만큼 그리고 고객 숫자는 어떻다고 내세우지요. 그리고 빠지지 않는 것이 덤으로 준다는 ‘사은품’입니다. 가격은 얼마인지 품질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좋은 물건이라니 믿을 수밖에요. ‘말을 들어주기만 해도’ 값진 선물을 그냥 준다는데, 싫어할 까닭은 없겠습니다. 꼭 사탕 내밀며 어린애 꼬드기려는 것 같아 꺼림칙하기는 하지만요.그런데 요즘 변화가 생겼습니다. 밥그릇이나 냄비 등 주방기구나 소형 물품에 그치지 않고, 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각종 할인(우대)권이나 현금처럼 쓸 수 있다는 카드부터 몇 백만원 짜리 가전제품까지 제공하기도 하지요.그뿐입니까. 금융기관 등과 손잡고 매달 내는 선불금을 깎아준다거나, 물품 구매에 이익을 준다고도 하지요. 놀랍지 않습니까! 상조에 가입하기만 하면 하수분(河水盆)이나 도깨비 방망이라도 하나 생기는 듯합니다.그런데 그렇게 선물을 주는 상조업체는 자선단체일까요? 그 업체를 통해 장례를 비롯한 여러 행사를 치르겠다고 약속(계약)하기만 하면, 엄청난 혜택을 제공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우선 확인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런 ‘반가운 소식’을 알리는 선전 내용을 확인해보면, 대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아주 작은 글씨로, 가전제품 등은 별도 구매(계약)라고 표시돼 있습니다. 듣기 좋은 말로 '결합 상품'이라고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끼워 팔기'입니다. 이런 판매 방식의 문제점이 계약자가 해약하는 과정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민원이 빗발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더 교묘해진 형태로 규제를 피해 횡행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시겠지요? 그런 선물 등 혜택의 본질은 한 마디로, 전부 ‘자기 돈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품질이나 가격 등은 비교해보지도 못한 채, 선전과 광고에 동원된 유명인의 인건비까지 더해서 말입니다.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완벽한 지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상조 가입하려고 상조의 특징부터 관련 법규까지 샅샅이 알 필요도 없겠지요.어떤 사안을 판단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상식입니다. 그리고 그 상식은 ‘의문’에서 시작하지요. 일의 어려움을 강조하면서 쉽고 편한 해결책을 내세우고 덤까지 준다면, 한 번쯤 "왜 그렇지?"라며 꼼꼼히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그렇습니다. 상조 또한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속내에 자신 있다면 왜 요란한 포장을 씌우겠습니까.
    • 기획.연재
    2021-04-20
  • 상조, 뭘 알아야 할까?
    상조는 이미 필수품이 됐습니다. 자연과 사회와 사람은 서로 영향받으며 함께 변화한다니, 이렇게 논의할 정도면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이겠지요.그렇다면 상조(장례)와 관련해 어떤 근거로 판단해야 할까요? 평생 손으로 꼽을 정도의 일을, 얼마나 정확하고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우선 그 일을 하고 있는 주체(업체)부터 알아봅시다. 장례에 전문성을 갖고 있으며 적절한 조건으로 대행한다고 내세우는 곳은 크게 나눠 세 곳입니다.첫째가 선불식(할부거래) 상조입니다. 현재 알려져 있는 상조 대부분이 여기 해당됩니다. 그 다음이 장례식장입니다. 식장 건물이 크고, 호사스럽다고 할 만큼 잘 꾸며 놓았지요. 끝으로 후불식 상조입니다. 최근 공격적인 홍보 등을 통해 알려지고 있습니다.세 곳에 대해 상조의 장점을 기준으로 판단해봅시다.상조의 장점 중 하나가 편리성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장례 행사를 상조(회사)가 한꺼번에 처리해 준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장례의 과정과 절차 그리고 쓰는 물품도 포함돼 있습니다. 즉 의식이나 용품을 사안마다 비교하고 결정하는 번거로움과 곤란이 해결된다는 것이지요.위에 거론한 세 곳 가운데 어떤 것이 그 장점에 가장 맞을까요? 장례식장은 모든 내용을 상황이 발생한 다음 선택해야 합니다. 즉 ‘큰일’을 당해 황망하기만 한데 수십 가지 절차와 물품을, 가성비 따져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편리하겠습니까? 아니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후불제 상조도 비슷합니다. 후불제 상조는 ‘값이 싸다’고 주장하지요. 그런데 제시한 가격과 물품·용역을 살펴보면, 빠져 있는 것이 많습니다. 필요한 부분을 다 갖추면 오히려 비싸지곤 하지요.특히 후불제상조는 선불제상조가 ‘제도권’에서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과 ‘방문판매법’ 등으로 심한 규제를 받는 데 비해, 어떤 법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도입 초기 상조의 문제점이 재현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장례식장과 후불제상조의 큰 단점은 그들이 제시하는 용역과 물품이 적절한지 여부를 사전에 검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필요한 것을 일괄 처리하지도 못하지요. 법령이 제정되고 규제가 강화되면서 제공 내역과 가격을 고시하기도 합니다만, 용역과 물품 전체가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행사 진행 중은 물론이고 끝난 뒤에도 정확한 내용을 알기 어렵고 알게 돼도 대부분 그냥 넘어갑니다. 장례 즉 죽음을 가능한 한 멀리하고 싶으니까요. 이런 기피 심리를 노린 모호(模糊)함이 상조와 관련한 문제의 대부분입니다.선불식 상조는 제공하는 용역과 물품이 전부 공개돼 있습니다. 고객은 더하고 빼는 등 조정하면 됩니다. 어느 경우건 상조회사 관계자와 의논해 바가지나 속임수를 피할 수 있다는 것도 선불식 상조의 큰 이점입니다.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큰일’을 맡길 상조의 얼개를 대강이라도 “알았다!”는 생각이 드시나요?주성식/금호라이프 홍보부장 sesank@naver.com
    • 기획.연재
    2021-04-13
  • 하얀옷과 붉은 피로 우금치 계곡을 물들이다
    평양전투와 황해해전 1894년 7월 말에 경기도 성환에서 승리한 일본 육군은 북상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서의 전투는 9월 5일부터 9월16일까지 벌어졌다. 청군의 병력은 1만 2000명, 일본군은 1만 7000명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평양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청군은 통솔하는 원수가 없고 장수들의 직위가 서로 같아 호령도 한결같지 않았고, 군대는 기강이 문란했다. 청군은 간음과 약탈을 자행하여  평안도민들의 원망이 컸다. 반면에 일본군들의 명령은 매우 엄하였다. 사람을 살해하거나 촌락을 약탈하는 일이 없어 청군과는 크게 달랐다.이때 평양 감사 민병석은 시국이 바뀌어 모든 민씨 척족들이 쫓겨나자 무슨 죄명이 내려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김만식이 평양감사로 부임해 온다는 말을 듣고 당황하며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양대신 이홍장의 전문을 받고 그는 김만식에게 감사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다.“이홍장이 평양감사 민병석에게 보낸 전문은 이렇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조선왕이 일본인의 협박을 받고 있고 명령도 모두 일본인이 한다고 하는데 그들의 명령은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그리고 본 대신은 많은 병력을 인솔하고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평양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평안도의 민병석에게 옛날과 같이  직책을 완수하도록 하고, 또 그가 청군과 함께 중요한 임무를 맡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서울에서 다시 새 감사를 파견하려고 하면, 미리 각 총수에게 알려 새 감사를 신관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본 대신이 모든 일을 주관할 것이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이러자 김만식은 평양서윤 서병수와 함께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들어가 40일 동안 나오지 못했다. 평안도 사람들은 ‘민병석은 청나라 감사이며, 김만식은 일본의 감사’라고 불렀다.” (황현 지음 ·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06, p 210-2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역 매천야록 제2권)청일전쟁통에 평안감사가 둘이라니. 어이가 없다.   한편 청군과 일본군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승기를 잡자 갑자기 섭지초가 지휘하는 청군이 백기를 내건 후 도주하였다. 이러자 일본군은 더욱 기세를 올려 청국 장수 조보귀를 포함하여 2000명을 죽였다. 일본군의 압승이었다. 일본군 전사자는 162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더 많이 처참히 죽은 사람들은 평양의 조선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주둔하고 있던 청군의 갖은 요구에 시달린 끝에, 지원부대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청군이 쏜 유탄에 맞거나 일본군의 총알 세례를 받아 죽었다. 청군이 물러간 후 김만식은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참혹한 전투를  치른 뒤여서 평양성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였고, 선화당 청판(廳板) 밑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시체들은 성 밖으로 끌어내어 모두 불에 태웠으나 열흘 동안을 태워도 다 타지 않았다.이 전투를 실제 목격했던 이인직은 소설 <혈의 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북문 밖 넓은 들에 철환 맞아 죽은 송장과 죽으려고 숨넘어가는 반송장들은 제각각 제 나라를 위하여 전장에 나와서 죽은 장수와 군사들이라.… 땅도 조선 땅이요 사람도 조선 사람이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싸움에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는가.”이윽고 9월 17일에 청국의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구의 대동구(大東溝)에서 일본함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 군함 11척이 순식간에 청국 군함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을 가하여 청국 군함 4척을 침몰시켰다. 해군 제독 정여창은 가까스로 여순항으로 도주하였다. 이렇게 평양과 압록강 하구의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중국 본토에 대한 공략을 서둘렀다. 제2차 동학농민봉기  일본이 평양과 황해전투에서 압승했다는 소식을 듣자 전봉준은 척왜 (斥倭)를 외치면서 전주에서 2차 봉기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4000명의 동학농민군은 10월 12일에 논산에 도착했다. 최시형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손병희도 15일에 북접 동학군을 이끌고 논산에 합류하였다. 전봉준은 10여 일간 논산에 머물면서 수만 명의 농민군을 모은 후 공주로 향했다.16일에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창의영수’ 전봉준은 논산에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관군도 항일에 동참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박제순은 아예 대꾸조차 안했다.  개화파 정권은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하고 관군을 공주로 내려보냈다. 최신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대 1개 대대도 진압군에 합류하였다.   10월 21일에 동학군은 충청도 목천 세성산에서 관군과 처음 접전을 벌여 수백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이어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공주를 눈앞에 두고 10월23일부터 25일까지 잇따라 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승패가 확연히 갈린 것은 아니었지만 동학군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경천으로 물러났다. 전열을 가다듬은 동학군은 11월8일과 9일에 공주 문턱의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수만 명의 동학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관군 2500명과 일본군 200명 등 2700명이 산봉우리 고지대에서 진을 치고 있는 우금치 계곡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동학군은 선두에 몇백 명이 화승총을 가졌고, 나머지는 창을 들고 있었다. 동학군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하지만 동학군은 대포와 연발총 그리고 미제 스나이퍼 소총과 무라다 소총 등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을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동학군은 선봉이 섬멸되자 잠시 공격을 중지했다가 다시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이러자 대포와 연발총과 소총이 다시 불을 뿜었고 동학군은  쓰러졌다. 잠시 뒤에 동학군이 다시 돌격하기를 무려 50여 차례. 계곡은 온통 하얀 옷과 붉은 피로 덮였고, 적진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전봉준은 마침내 전투를 멈추고 후퇴했다. 휘하의 군사를 점검해보니 두 차례 접전 후 1만 명 중 3000명만 남았고, 다시 접전 후에는 500명에 불과했다. 완전 참패였다. 전봉준은 남은 동학군을 데리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마치 해충을 박멸하듯 동학군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여 버리기 위해 집요하게 추격했다. 전봉준은 퇴각하며 기회다 싶으면 돌아서서 싸우고 또 싸웠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그는 순창군 피노리에 숨어 있다가 12월 2일 밤에 동료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이미 체포된 김개남은 전주에서 즉시 처형되었고, 전봉준 일행은 일본군 제19대대가 주둔하는 담양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나주로 옮겨졌다. 당시 나주는 호남농민군 토벌의 총본부가 있었고 초토사는 나주목사 민종렬이었다. 나주의 일본 순사청 감옥에 갇혔던 전봉준은 1895년 1월에 손화중 · 최경선·김덕명 등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1월 24일에 일본영사관 순사청 감옥에 갇혔다.전봉준과 성두한·손화중·김덕명·최경선 등은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법무아문 권설재판소로 넘겨졌다. 심문은 6차례 이루어졌다. 1895년 3월 29일(양력 4월 23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사형이었다. 그리고 이날 전봉준 등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전봉준(1855~1895)은 죽기 전에 다음 시를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가니 영웅도 어찌하지 못하는구나.백성 사랑하는 정의(正義) , 나 실수 없었어요,나라를 위한 단심(丹心) 그 누가 알아주리.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運去英雄不自謀  운거영웅부자모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爲國丹心誰有知  위국단심수유지(이이화, 전봉준 혁명의 기록, 생각정원, 2014,  신순철· 이진영 지음,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 기획.연재
    2021-04-12
  • 정년퇴직 앞둔 경찰 간부, 낙도 주민 생명 구해
    <김원익 경감> 신안군 압해읍 고이도에서 최근 정년퇴직을 3개월 앞둔 목포경찰서 압해파출소 센터장 김원익 경감이 심폐소생술로 의식불명이 된 마을주민을 구조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주민들에 따르면 밭에서 일하는 남편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아내가 동네 주민들에게 연락을 하자, 마을 주민들이 119구급대에 연락하고 서둘러 환자를 차량에 싣고 고이도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김 경감도 연락을 받고 즉시 선착장으로 출동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 주위로 마을 이장 등 주민 7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당황해 했다.  김 경감은 눈에 초점이 없고 맥박이 아주 약하게 뛰는 환자의 모습을 보고 긴박한 상황으로 판단되어 바로 심폐소생술을 했다. 얼마 후 전혀 의식이 없던 환자는 호흡이 돌아오고 주변 사람을 알아보는 등 의식을 되찾았다. 환자는 119구급대를 통해 목포의 한 병원으로 후송되어 입원 치료 중이다.환자 부인은 "담당 의사 선생님이 조금만 늦었어도 생명을 잃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며 "센타장님 덕분에 남편 목숨을 살렸다'며 고마워 했다.김원익 경감은 "경찰관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말했다.  
    • 기획.연재
    2021-04-04
  • 김연수·오정숙에서 이어지는 동초제 바디
    봄기운이 완연한 3월 동초제 춘향가 보유자 방성춘 명인을 만났다. 방 명인은 사단법인 동초제 판소리진흥회 이사장으로, 방성춘 판소리 전수관을 운영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제 16호(2000년 5월 16일) 동초제 춘향가 보유자이기도 하다. 편집자 注▲여러 관련 자료와 발표회 리플렛, 13회째 이어져오고 있는 서봉 전국국악경연대회를 면밀히 살펴보고 민간단체를 이끌어 오면서도 내실있고 참신한 활동에 깜짝 놀랐습니다. - 동초제소리는 쉽게 득음이 안 되고 어렵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다른 소리와 달리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라고나 할까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런 큰 울림의 소리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득음(得音)과정이 상당히 힘들고 어렵다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 국악계에서 득음에 도달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득음이란 선천적으로 목구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고 수많은 세월 속에서 하염없는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과 훈련과정을 거쳐야만 겨우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지금까지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1960년 13살에 어머니(제애돌)의 권유로 박채선 선생을 무작정 찾아가 ‘춘향가’를 배우면서 판소리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로부터 5년 후인 1965년에 공대일(孔大一)선생에게 ‘흥보가’, 1970년 무렵에 정광수(丁珖秀)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익혔습니다. 1975년도로 기억됩니다만 동초 김연수 선생의 이수자로 동초제 소리를 이어 받고 있는 오정숙(吳貞淑) 선생께서 광주시 동구 불로동 소재 학생회관에서 공연을 하신다는 걸 알고 처음 동초제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 공연이 제 인생을 갈라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소리 공부를 했듯이 무언가 홀린 듯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오정숙(吳貞淑) 선생과 동고동락하면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를 전수받았지요. 이후 동초제 소리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를 국립 서울중앙극장에서 완창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소리를 배운지 21년인 1981년에 마침내 전주대사습에서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차지해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저의 소리를 인정받기에 이르렀지요. 이후 전남대, 광주예고 전주예고 등에 출강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전남도립국악단 창악부 수석 단원으로도 운신(運身)의 폭을 넓혀 17년간이나 활동을 이어갔으니 이 지역의 산물인 동초제로 국악 진흥에 정성껏 봉사했다고 자부합니다. 특히 동초제 공연은 1997년 제17회 대한민국 국악제 초청 공연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마다 보폭을 넓혀갔습니다.1998년 전남 낙안 남도음식문화축제 국내·해외 75회 공연과 1999년 해상왕 장보고 세종문화회관 2회, 국내·해외 87회 공연, 2000년 경주 해외문화엑스포 국내·해외 52회 공연을 가졌습니다.특히 2000년을 잊지 못하는 건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는 것이지요.이렇게 제가 부르는 춘향가는 김연수(金演洙) 선생에서 오정숙 선생으로 이어지는 바디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마 제가 처음으로 한 국제 공연이 프랑스 파리 2001년 제 130차 BIE 정기 총회 공연과 독일 파견 노동자 위문 공연일겁니다. 특히 독일 파견 근로자와 간호사 위문 공연 야외 가설극장식 공연무대에서 판소리가 끝나자 관객 중 파견 근로자 1명이 일어나 갑자기 만세 삼창을 하는 겁니다. 깜짝 놀라 당시 전남도청 인솔과장이 다가가 그 사연을 묻자 독일에 체류하면서 노래를 불러보라는 현지인들의 요구에 독일에서 배운 노래만 반복해 불렀는데 그때마다 독일인 동료가 하는 말이 ‘너희 나라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으나 한 소절도 제대로 못 불러 항상 불만이었다는 게지요. 그러다가 이렇게 훌륭한 판소리 무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벅찬 감격으로 만세 삼창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구만요. 우리 소리가 이렇게도 감동을 주고 한편으로는 아주 훌륭한 것이라는 걸 대변하는 것이지요. 해외공연도 공연이지만 동년 2001년 국내 공연 활동도 결코 게을리 하지 않고 무려 80회가 넘게 공연을 펼쳤습니다.이어 2002년 문화제 합동 공연 국내 해외 78회 공연, 2003년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수궁가 완창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판소리선정 축하무대 및 국내 해외 101회 공연을 쉼 없이 가졌지요. 그러던 중 2004년 에는 전라남도 도립국악원 창악부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항상 공연은 숙명적으로 따라왔어요.특히 2007년 9월 문화예술회관에서 5시간 동안의 적벽가 완창은 문화계 전반에 동초제 소리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지요. 이를 계기로 동초에서 오정숙 선생의 바디로 직접 나서서 동초제를 보급시켜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자발적으로 생기는 단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그 해 2007년도 이후 지금까지 13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동초제 서봉 판소리 국악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으며 지난해도 코로나-19로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온텍트시대에 맞춰 포스트 코로나로 어김없이 13회 동초제 전국국악경연대회를 무사히 끝마쳤던 기억도 새롭습니다.▲동초제의 ‘김연수(金演洙) 선생에서 오정숙 선생으로 이어지는 바디’라고 하셨는데 명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나의 목구성에 대해 전문가들의 평가를 보면 ‘여자지만 중앙성이 좋고, 수리성에 굵은 목구성을 지녔다’고 말하고요, 특히 춘향가 가운데 ‘이도령이 춘향집 찾아가는 대목’의 잉애걸이나 완자걸이, ‘사랑가’나 ‘옥중가’의 비성(鼻聲)과 ‘이별가’의 타루치는 목 등은 탁월하게도 자주 구사하는 붙임새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을 탁월하게도 잘 응용하고 각 단 또는 마디마다 조화롭게 소리를 잘 구사한다고들 말합니다.▲한마디로 ‘대단한 소리꾼’이라는 말씀이겠지요. 그러면 김연수 소리와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판소리가 있을까요?- 가장 쉽게 구분되는 소리는 아름다운 소리로 일컬어지는 임방울(林芳蔚) 선생의 소리이지요. 단가 ‘호남가’와 ‘춘향가’ 중 ‘쑥대머리’는 임방울 선생의 대표적인 소리로 알려져 있답니다. 임방울 선생은 국창(國唱)답게 선생이 태어난 이곳 광주에서 전국대회로 매년 개최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비교한다면 그렇지만요, 아까 맹키로 말하자면 동초 김연 수선생께서는 동편제와 서편제를 다아우르고 융합시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판소리라고 정의해 ‘우리나라에서는 역시 동초제 소리로구나’ 하면서 아주 중요한 판소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각별히 신경 써줬으면 좋겠습니다.거듭 한 가지만 더 강조해 말씀드리자면 동초제 판소리는 가사전달이 시대에 맞게 직역(直譯)되어 전달되는 반면 여타의 판소리는 문어체식의 표현을 구어체로 말하듯 뜻과 의미전달이 애매한 부분이 있다는 게 감히 비교우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국악 애호인들에 한말씀 하신다면.- 일제강점기에 농악(農樂)이라고 천시받던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음악이 이렇게 머물러서는 결코 안 되지요. 우리나라 대중음악만 봐도 세계로 뻗어가는 방탄소년단이 지구촌을 제패하면서 이젠 K-POP이 전 세계적으로 대세이잖는가요? 거기에 우리 지역에서는 G-POP이 매년 꾸준하게 경연을 통해 이 지역의 스타를 양성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랄만한 사건인가요? 정작 우리 것의 소중함이 더 각인되도록 K-POP, G-POP과 함께 잘 버무러진 다양한 퓨전국악이 나왔으면 합니다. 김연수 창시 ‘동편제’… 가사와 문학성 중시동초제는 국창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가 창시한 판소리 유파이다. 1930년대 초 여러 명창들의 소리 중 좋은 부분만 골라 도입해 자신이 소화해 내여 만들어 낸 김연수는 소위 ‘창극 판소리’라는 창법으로 판소리계에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동초제는 가사와 문학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설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너름새(동작)가 정교하고 부침새(장단)가 다양하다. 또한 경상도 동편제(東便制)의 우람함과 전라도 서편제(西便制)의 아련함이 융합된 동초제는 호남의 소리로 재편(再編)되어 맺고 끊음이 분명한 특징이 있다. 동초 김연수는 생전에 늘상 동편제를 아버지 소리로, 서편제를 어머니 소리로 표현하면서 “이 두 소리의 장점만을 취합해 아우르는 소리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소리가 동초제”라고 말했다.특히 김연수는 심청가와 춘향가에서 각 과정이 튼실해야 하면서 사설과 언어구사, 표현방법 등을 현대에 맞춰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일반인 시선에서 바라봤고 항상 뿌리가 튼튼한 나무가 가지가 많듯이 판소리에서도 뿌리의식을 자주 강조했다.동초제 판소리 춘향가는 정정렬제(丁貞烈制) 판소리 춘향가를 토대로 한다. 그러나 정정렬제 춘향가는 ‘적성가’ ‘산세타령’ 같은 이름난 옛 명창들의 더늠 대신 새로 짠 소리를 포함시켰다는 흠이 있다. 그래서 김연수는 옛 명창들의 더늠을 살리고 신재효(申在孝)의 사설을 참고하여 동초제 춘향가를 새로 짰다. 이것은 동초 김연수에서 오정숙을 거쳐 현재 동초제 춘향가의 기능보유자인 방성춘에게 전수되었다. 동초제 춘향가는 크게 백년가약에서 이별로, 이별과정에서 수난과정, 수난과정에서 재상봉 장면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다른 춘향가와 달리 처음부터 ‘기산영수’ 대신 정정렬제 더늠인 ‘꿈 가운데 어떤 선녀’로 시작하고, 정정렬제에는 없는 ‘기산영수(箕山潁水) ‘ ‘신세타령’ 등 옛 명창들의 더늠을 넣어 더 풍부하고 일반인으로 하여금 쉬운 이해를 도왔다. 여기에 일반인들의 삶이 재조명되는 과정 등으로 공연 시간이 8시간이 넘어가는 대작(大作) 춘향가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또 춘향가에서 춘향이는 관기인 어머니 월매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사대부의 처첩으로 그리면서도 춘향이가 이미 사서오경에 달통한 한집안의 규수 이상의 문장가로 표현했으며 이몽룡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꿈속의 태몽에서 용을 상징하는 풀이로 소리를 들으면 이미 그림같이 그려지는 이미지화법으로 더 감칠맛을 더했다는 특징이 있다.◆ 서봉 방성춘 명인 약력 1947년 광주 광산구 비아동 출생1960년 박채선 선생 사사1965년 공대일 선생을 사사 (흥보가)1970년 정광수 사사(흥보가, 수궁가)1975년 오정숙 선생으로부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전수1976년 이후동초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완창 발표회(국립 서울중앙극장)1981년전주대사습 판소리 명창부 장원대통령상 수상1982년 이후전남대, 광주예고, 전주예고 등 출강1983년 이후전남도립국악단 창악부 수석 단원 17년간 활동2020년제13회 동초제 서봉 판소리 국악대회 개최    
    • 기획.연재
    2021-03-31
  • 망국의 원인 규명 앞서 역사적 사실 인식부터
    # 연재를 시작하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단재 신채호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망할 수 없다.”- 박은식 ‘한국통사(韓國痛史)’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4블록 입구 ‘대한제국 망국사(大韓帝國 亡國史)’를 연재한다. 자주·독립국을 대내외에 천명한 대한제국은 1897년(고종 34년) 10월 12일에 탄생하였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고종, 순종 2대 황제가 통치하다가 12년 10개월 만인 1910년 8월 29일에 망했다.  왜 대한제국이 망했나?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기번은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을 내부에서 찾았다. 2012년에 발간된 ‘로마 멸망사’의 저자인 영국의 역사학자 골즈워디는 로마 멸망의 원인을 내부 요소는 물론 외부 요소들도 살폈다.  이처럼 대한제국 망국(亡國)의 원인도 내부와 외부 요인 등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망국의 원인 규명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역사적 사실(팩트)’을 제대로 아는 일이다. 진실보다는 흥미에 치중하는 역사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 그리고 소설은 종종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킨다. 이 연재는 조선왕조실록(고종·순종실록)과 국사편찬위원회의 각종 사료, 황현의 ‘매천야록’,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 등과 한국 근대사 관련 저서들을 참고하여 ‘역사적 사실’ 전달에 충실할 것이다.   공자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뒤돌아보라(告諸往 而知來者 : 논어 학이편)”고 한 말을 되새기면서 연재를 시작한다.   # 대한제국 탄생 전야   고종은 1863년부터 조선을 통치했는데 가장 큰 격변은 1894년 동학 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었다. 1895년 10월 8일에 민왕후(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자 고종은 사실상 감금 상태였다. 이러자 이범진 등 친러파는 웨베르 러시아 공사의 도움을 받아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을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1896년 4월 7일에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7월 2일에는 독립문 건립을 위해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자주독립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자 환궁에 대한 요구도 거셌다.  1897년 2월 20일에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각국 대사관이 몰려 있는 정동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경운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이곳에 거처했다. 경복궁, 창덕궁 등이 불탔기 때문이다.   그러면 격변의 1894년부터 살펴보자. 1894년엔 두 가지 큰 사건, 동학 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1864년에 동학교주 최제우가 처형된 이후, 2대 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삼남·경기지방에서 동학 교세가 확장되었다. 1893년 3월에 동학교도 2만 7000 명은 보은에서 모여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당황한 조정은 3월 25일에 어윤중을 양호 선무사로 삼아 내려보냈다. 이날 고종은 어전회의를 열어 청나라 군대 파병을 거론하였으나 대신들은 반대했다. 그런데 어윤중이 동학교도들을 설득하자 뜻밖에도 동학교도들은 4월 3일에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강경파들은 전라도 금구에서 반봉건 · 반외세 집회를 별도로 열었다. 1894년 음력 1월 10일 밤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노하여 전봉준(1854~1895)이 주도한 농민들이 봉기했다. 11일 새벽에 고부 관아를 점령했는데 조병갑은 도망하고 없었다.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는 사태수습은커녕 주모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잠시 피신한 전봉준은 음력 3월 20일에 무장에서 봉기하여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고 3월 25일에 백산에서 8000 명이 모여 ‘보국안민’을 기치(旗幟)로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를 창설한 후에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여세를 몰아 음력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러자 고종은 동비(東匪)를 빨리 토벌하지 못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극도로 불안했다. 더구나 민왕후는 초토사 홍계훈이 급히 보낸 동학군의 편지를 보고 대원군이 동학군을 배후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학군의 편지엔 “국태공(대원군)에게 올립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윽고 민왕후가 병조판서 민영준(나중에 민영휘로 개명)을 불러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라고 하였다. 민영준은 난색을 표했다. 당시 조정은 동학농민군의 개혁안을 적극 검토하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민영준은 천진조약에 따라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면 일본군도 들어올 것이므로 형세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고종실록 1896년 9월 27일의 민영준의 해명 상소)  민왕후는 홍계훈이 보낸 동학군의 편지를 내보이면서 크게 꾸짖었다. “못난 놈! 내 차라리 왜놈의 포로가 될지언정 다시는 임오년의 일은 당하지 않겠다. 여러 말 하지 말라!”이러자 민영준은 음력 4월 29일에 원세개를 만나 파병을 요청했고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급히 전보를 띄워 알렸다. 이에 이홍장은 청군 파병을 허락했다. 여기서 조정이 원세개에게 청군 파병을 요청한 글을 읽어보자. “본국 전라도 관할 태인, 고부 등은 백성이 흉하고 사나워 본래부터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요즘 동학에 붙은 동비(東匪) 1만여 명이 무리 지어 공격하여 10여 군데 고을을 빼앗고 전주성을 함락했습니다. 조정은 군대를 보내 진정시키려 했지만 동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여 우리 군대를 격파시켰습니다. 이처럼 흉측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을 피우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다시 서울로 북상하도록 놓아둔다면 그 피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군대는 신생 조직이고 숫자도 적고 전투를 안 해본 군인이어서 그들을 섬멸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흉악한 무리들을 오랫동안 놓아둔다면 중국에까지 우려를 끼치는 바가 많아질 것입니다.  지난 임오년(1882년)과 갑신년(1884년) 두 차례의 내란 때도 모두 청군에 의지해서 진정시킬 수 있었듯이, 이번에도 귀 총리(원세개)에게 원군을 간청하오니 속히 북양대신에게 전보를 쳐서 군대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속히 와서 우리 군대 대신 소탕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현 지음 ·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상), P 340-342)아니, 이럴 수가? 박은식은 ‘한국통사’ ‘제2편 27장  청군을 요청한 전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임금과 왕비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 군대를 불러서 자기 백성을 진압하려 했으니 이게 제정신인가?” 한편 고종의 요청에 의해 청군 3000명이 6월 8일(음력 5월 5일)에 아산에 도착했다. 일본군 8000명도 6월 9일에 1885년에 청·일간에 맺은 천진조약에 따라 인천에 들어왔다.이러자 6월 11일(음력 5월 8일)에 외세 개입을 우려한 전봉준은 전주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화약(和約)후 자진 해산했다. 사태가 진정되자 고종은 청·일 양군의 동시 철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고 7월 23일 (음력 6월 21일)에 경복궁을 점령했다.  7월 25일에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아산만 앞바다 풍도에서 청나라의 함정을 기습 공격하여 청군 1100여명을 익사시켰다.일본군은 7월 30일에 아산·공주·성환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동안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에서 청나라에 패배한 이후 군비 확충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1883년부터 1893년까지 10년간 군함 55척을 보유하여 청나라 해군력과 필적하였고, 육군은 병력증강과 신무기로 무장하였다. 8월 1일에 메이지 천황은 청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다.전쟁의 명분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며 내정에 간섭하고 있는 청과 싸워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의(底意)는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함이었다.  한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과 청의 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뉴욕 타임즈의 청일전쟁 기사이다.  “이 전쟁은 흔히 동양과 서양문명 사이의 충돌이라고 불리지만, 문명과 야만 사이의 싸움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것 같다.”  뉴욕 트리뷴도 이렇게 썼다. “지금의 전쟁은 한국이 앞으로 독립국으로 존재할지 아닐지를 포함해 많은 것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과는 한국이 일본과 함께 문명으로 가는 큰길로 행진해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중국과 함께 반(半)미개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든가 둘 중 하나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제임스 블래들리 지음·송정애 옮김, 임페리얼 크루즈, 프리뷰, 2010, p 206-207)
    • 기획.연재
    202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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