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8 (토)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주암호와 동천의 꽃놀이
    꽃놀이 계절인가 싶다. 가는 곳마다 진달래와 개나리 그리고 벚꽃 등 봄꽃이 만발하고 있다. 더욱이 호수를 안고 있는 순천주암호와 상사호의 그리고 동천호반 길에는 벚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옅은 분홍빛을 띠고 있는 꽃잎의 화려함은 새색시웃음마냥 다소곳이 피어나고, 그 꽃 웃음은 심신을 달래는 꽃놀이로 이어지고 있다. 상사에서 낙안으로 가는 길목과 주암호를 따라 광주로 가는 국도변은 온통 꽃물결이다. 꽃물결은 벌과 나비들만 좋아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도 좋아하고 동물들도 좋아한다. 꽃이 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분부터가 상승된다. 꽃을 바라보면서 화를 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꽃향기에 취하고, 꽃의 아름다움에 빠지며 자신들의 여가시간을 가지리라 믿는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지난 주말이었다. 동천 변에는 벚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붐볐다. 연인들의 행렬을 비롯해 가족단위와 삼삼오오 짝을 이룬 꽃놀이인파는 시간가는 줄 몰랐다. 코로나시국의 고달픔을 날려 보내려는지 수많은 인파가 북적거렸다. 아이들은 아들대로 어른은 어른들대로 제마다의 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무엇보다도 주암호와 상사호를 따라 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화전놀이까지도 곁들이고 있다. 연분홍빛으로 물든 진달래 꽃잎을 바구니가득 따다가 전을 부쳐 먹는 옛 풍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시큼 달큼하면서 봄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화전은 건강상에도 보탬이 된다고 한다. 특히 스트레스가 쌓여 있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을 맑게 해주며 심신의 피로를 풀어준다고 한다. 잠시, 꽃놀이와 화전놀이 유래를 더듬어 보자. 우리네 선조들은 계절에 따라 노는 시기를 두고 즐겼었다. 유교적 가부장제하에서 여성들은 여럿이 모여 놀이를 즐기기는커녕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궁중이나 양반가도 일반 백성층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 년에 단 하루 진달래꽃이 화사하게 핀 삼짇날은 예외였다. 여성들이 야외로 나가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놀이터가 심산유곡의 화전놀이였다고 한다.게다가 꽃놀이는 신라시대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곳은 경주의 화절현(花折峴)이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딸인 재매부인이 묻혀 재매곡이라 불린 계곡에 매년 봄꽃이 핀다. 이때면 여인들이 그 골짜기물가에서 잔치를 벌인다고 한다. 그 기록을 꽃놀이유래로 보여 지고 있다. 또 고려 시대에는 음력 3월 3일 즈음 들녘에 나가 봄날을 즐긴 답청(踏靑)의 풍속과 봄날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3월 3일 즐기는 것이 어찌 사치함이겠는가”라는 것과, “남녀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은 태평시대의 즐거운 일”이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외도 궁에서는 화사하게 진달래가 피면 곱게 차려입은 왕비가 궁녀들과 함께 진달래꽃을 따다가 ‘화전놀이’를 즐겼으며, 세도가의 부인들도 이를 따라 장막을 크게 드리우고는 며느리들도 다 모아 정성 들여 준비하고는 호세와 사치를 다투었다고 전해진다.조선의 문인이었던 임제(1549-1587)는 “작은 개울가에 돌을 고여 솥뚜껑 걸고 / 기름 두르고 쌀가루 얹어 참꽃을 지졌네 / 젓가락 집어 맛을 보니 향기가 입에 가득 / 한 해 봄빛이 배속에 전해지네.”라는 맛깔 나는 시로 남성들도 봄철음식인 화전을 별미로 즐겼음을 남겨놓았다.순천만 국가정원을 구경하기 위해 순천에 왔다는 연인들의 “꽃쌈” 놀이를 소개해 볼까 한다. 그들은 벚꽃송이를 비롯해 개나리꽃송이, 진달래꽃송이, 복숭아꽃송이, 유채꽃송이 등 꽃송이를 모아서 “꽃쌈”놀이를 펼쳤었다. 즉,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꽃잎하나를 떼어내는 놀이다. 또 꽃송이끼리 걸어서 잡아당기는 놀이와 꽃잎의 수가 많고 적음의 놀이 등 다양한 ‘꽃쌈’ 놀이를 하고 있었다.봄볕이 따사롭다. 햇볕이 감도는 동천 변에서 봄날 꽃놀이를 즐긴다는 것은 무한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여유를 갖으며 자신의 심신을 달래는 것은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는 방증이다. 더욱이 자신의 심정을 담아 글을 쓰거나 꽃놀이를 지어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필자는 잊혀져간 노랫가락이 문득문득 생각난다. 여성들이 즐겨 부르는 ‘봄날은 간다’의 노랫말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 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 나니/ 화 무는 십일 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라는 노래다. 그렇다. 흥과 멋을 알고 즐겨보자. 우리네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풍습은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아닐 수 없다. 어깨춤이라도 더덩실 추고 코로나시국을 넘겨나 보자. 봄볕의 따사로움과 봄꽃의 화려함으로 역경의 시간을 꽃놀이로 즐겨봄을.      
    • 오피니언
    2022-04-06
  • 주성식의 어른왈/돌림병을 배우다
    <주성식 선임기자>   대선을 통해 큰 갈래가 정해졌다는데, 지방선거 국면이 펼쳐지면서 이 사회는 더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다. 큰 암(癌) 덩어리를 떼어내자마자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병균이 훨씬 독(毒)하게 몸뚱이를 갉아먹는 꼴이다. 다들 정치를 탓하고 정치인을 꾸짖지만, 그 그늘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먹고 입고 머무는 것 어느 것에나, 들여다보고 끼어들어 참견하지 않는가. 먼저 아직(!) 집권세력이고 특히 이 지역을 독점하고 강제하는 정당의 행태를 살펴보자. 그들은 대선 결과에 대해 ‘고맙습니다. 부족했습니다’라고 사의(謝意)와 반성(!)을 내놓았다. 그러나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늘 그랬던 것처럼 ‘그냥 말’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패륜을 눈 감아줘서 고맙고, 범죄자를 지지해줘서 고맙고, 나라를 팔아먹으려다 실패한 것도 그냥 지나쳐줘서 고마운가? 어떤 것이, 왜 모자랐는가?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냥 징징거리며 ‘나 부족해요’라고, 또는 입발림으로 ‘범사(凡事)에 감사’하는 척하면, 잘못이 바로잡히고 헛된 것이 실재가 되고 없던 것이 생기는가?사실 ‘아깝게’ 졌다며 정신 승리를 구가하건, 아직 자리 몇 개가 남았다며 자위(自慰)하건 상관할 바 아니겠다. 그러나 인간적 처신은 뚜렷한 패륜(悖倫)이요 공직자로서의 업무와 관련해서는 중범죄 혐의를 받는 자를 추켜세우고, 미치광이 몇몇이 만들어낸 곁불이 구원의 불씨라도 되는 양 쬐지 못해 광분하는 것까지 괜찮을까? 그들은 사탕발림 몇 마디로 큰 권력을 잡고 맘껏 휘둘렀던 추억(만)을 되씹으며 허우적대고 있다. 욕설·폭행·협잡·횡령·말 바꾸기(사기!) 그리고 증오와 저주 따위로 국민 대다수를 홀리고 유권자들을 꼬드길 수 있다고 믿는다. 급한 비탈을 굴러가면서 바로 앞이 벼랑인 줄도 모르고 놀이기구를 탄 듯 즐거워하는 것들을 질책하고 훈계한들 무슨 소용인가. 습관이며 결국 본성인 저열(低劣)을 어떻게 바꾸고 고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꼭 그것들 탓만이랴. 떼 지어 날뛰는 모리배(謀利輩)들을 묵인하고, 아귀(餓鬼)나 야차(夜叉)를 내세워도 어여삐 여기는 무리들은 죄책(罪責)이 없겠는가? 돌림병을 배웠으니 마침내 이 나라 이 겨레 한꺼번에 도륙(屠戮)을 내겠다는 것인가?    
    • 오피니언
    2022-04-06
  • 니체의 말처럼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뭣 때문에 사는 것일까. 단 한 번만이라도 뜻대로 살아본 적은 있을까. 날마다 영상 매체 등에 등장하는 정치인, 말쟁이, 관료, 유명 연예인들. 바로 지금의 순간을 잘살고 있을까. 한때는 권력의 꿀통에서 달콤함을 즐기던 자들. 지금은 파락호가 되어 자기 몸뚱이 하나 주체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아등바등 살았을까. 앞으로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 춘래불이춘을 스치면서 느껴본 상념들이다. 인생이 참으로 부질없다는 생각이 문뜩 든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버멘쉬’(Ubermensch)를 내세웠을까. 과거에는 ‘초인’으로 번역했으나 지금은 어감상 적절치 않아 본래의 독일어 발음 그대로 ‘위버멘쉬’로 사용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을 설파했다. 낙타는 참으로 인내심이 많은 동물이다. 끝없는 사막을 온갖 모래먼지 다 마셔 가면서 무거운 짐을 날마다 지고 오간다. 물론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다. 마치 숙명처럼 '마땅히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은 낙타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변신을 꾀한다. 사자로. 사자가 된다는 것은 정신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스스로가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기 위해서다. 사자는 자신이 섬겨온 주인은 물론 신에게까지 대적한다. 결국 신의 한 형태인 용과 일전을 벌인다. 드디어 이겼다. 이제 '나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하고자 하는 것을 한다.'는 사자로 변신한 것이다. 창조된 모든 가치를 아는 사자.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를 강탈하는 사자가 된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아니오' 하고 저항할 수 있는 백수의 제왕이 된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왜 사자를 본받지 못하고 낙타처럼 나와 무관한 법과 제도 그리고 윤리라면 무조건 맹종하며 사는 것일까. 칸트의 말대로 내가 최고의 목적적 존재인데. 왜 세상은 나를 지배만 하고 나는 아무 저항조차 못할까. 인간은 사자라는 것, 내가 내 뜻으로 정한 것이 아니면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인데도. 지금 이순간에도 강제적 의무의 수렁에 빠져있다. 심지어 자식을 키우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의무가 되었다. 억지로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고통과 갈등의 불씨가 아닌가. 사자는커녕 낙타의 신세조차도 타개할 수 없다. 역시 자신의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와 망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어린아이의 삶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가치를 봤다. 얽매이는 규범적 삶이 얼마나 무상한가도. 니체는 삶에 어떤 규약과 도덕이 있는 필연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를 ‘위버멘쉬’라 한 것이다. 권력을, 돈을, 명예를 쫓아다니는 자들이여. 제발 이제는 ‘아니오’라고 해봐라. 주어진 시간을 부질없이 다 소비해버리면 그대 앞에 놓인 것은 죽음뿐이지 않는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해 봐야 이미 때는 늦은 것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가고 싶은 곳 맘대로 가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 맘껏 사랑하고, 웃고 싶으면 맘껏 웃어라. 저 찬란한 태양, 살결을 스치는 바람결, 싱그러운 봄의 향기. 느낄 수 있는 시간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니체의 말처럼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 오피니언
    2022-04-06
  • 4차 산업 혁명 시대와 유아교육의 미래
    4차 산업혁명시대, 그 개념은 클라우스 슈밥이 2016년 세계경영협회(WEF)의 다보스포럼에서 발표하여 처음 알려졌다. 그 핵심 기술로 로봇공학,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생명공학, 3차원 프린터가 주로 언급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핵심 기술의 수혜와 부정적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우려한다. “가장 비관적이고 비인간적인 형태의 4차 산업혁명은 인류를 ‘로봇화’하여, 로봇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박탈할 잠재력을 가질 수 있기에 인간본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창조성, 공감, 윤리 정신을 보완하는 것으로 인류는 공동의 도덕적 의식을 가져야 한다.(Klaus, 2016)” 따라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미래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는 국가의 필연적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세계적 석학인 클라우스 슈밥(제 4차 산업혁명The Next 저자)이 한국교육계에 주는 메시지를 살펴보자. 그는 4차 산업혁명의 근간으로 창의성이 중요한데 정답과 입시 위주교육에 매몰된 상명하달식의 한국 교육방법은 4차 산업혁명에 도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시대는 맥락적 이해능력이 중요하고 전체 시스템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융합적 이해능력이 성공의 전제 조건이라 했다. 그럴려면 청년들이 창의력을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며 많은 기회와 적절한 교육의 제공이 미래교육의 지향점이라 했다(KBS지식 Pick). 하지만 핵심기술의 운용에 당장 시급한 자본인 청년교육에 대한 대책은 있으나 미래 유아교육에 대한 고민을 공개적으로 하는 이가 없어 유아교육자인 필자가 헤아려보기로 한다.  최근 유아교육학계에서 미래유아교육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그 연구 결과의 일부를 보면 변화된 교육 생태계에서 아동기 디지털 격차는 마치 자본과 같으니 디지털 환경을 아이들이 접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4차 산업 시대 포스트 휴머니즘과 미래 유아교육. 김민우2018). 필자는 이 논문 결과에서 특히 아동기 디지털 격차가 자본과 같다는 말이 곧 유아를 4차산업혁명 시대의 국가자본으로 간주한다는 말로 해석되어 이에 동의 할 수 없다. 또한 유아 발달심리적 관점으로 납득이 안 된다.최진석 교수(철학)는 지식은 세상을 통찰하는 밑걸음이라 하였다(인간이 그리는 무늬). 그런데 만약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유아가 죽은 엄마의 모습을 VR을 통해 만났다고 해 보자. 반대로 죽음과 VR을 아는 청소년이 죽은 엄마를 VR을 통해 만났다고 하자. 지식의 상태가 다른  이 두 아이의 느낌과 문제해결이 같을 수 있을까? 과연 유아들이 실생활에서의 경험과 가상공간에서의 경험을 비교 분석, 바람직한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가상의 디지털 세계는 실제와 유사한 모조품으로 상징이며 기호이다. 상징과 기호를 해석하기에 지식이 적은 유아의 힘으로 버겁다. 이런 디지털가상현실을 실제보다 먼저 만나는 과정이 유아에게 어떤 의미이며 인격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하는 점은 오늘날 대부분의 유아교육자들이 우려하는 부분일 것이다. 아이가 태어 날 때 발달 상태는 1차 산업 시대나 4차 산업시대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취약한 상태임을 상기해 보자. 아이는 2년이 지나야 겨우 두리뭉실한 말을 하게 되고 신이 준 감각 기관을 통해 직접 만져보고 알아가게 되는 1차 산업시대처럼 그 발달 과정은 수제 작업의 형태를 띤다. 그럼에도 아이를 국가의 발달 자본으로 보고 발달의 형태를 1차에서 4차로 훌쩍 뛰어 넘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면 유아의 발달 과정은 점프가 안되며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특수성 때문이다. 천천히 만져 보고 듣고 알아가며 인간의 즐거움과 행복을 느낌으로서 미완의 인간 정체성을 마음에 장착하도록 돕는 것이 미래 4차 산업의 탄탄한 밑 걸음을 키우는 일인 것이다. 이는 클라우스 슈밥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술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영역에서 협력이나 공감 능력같은 사회적 역할이 더욱 더 중요해 질 것이라는 예측에 걸 맞다. 이 예측은 유아교육에 주는 큰 울림으로 인간고유의 정체성 확립이 우선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다. 그러므로 유아에게 가족, 친구, 자연과 더 많은 체험의 기회를 주는 것이 유아정서를 안정시키며 건강한 인격형성으로 4차 산업시대의 주인공 역할을 더 잘 하게 할 것이다.   오은영 박사(소아정신과)는 만3세까지 게임이나 영상만화 접촉은 뇌발달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므로 자제하고 대신 자연 친화적 놀이를 권유한다. 4차 산업시대 미래유아교육은 청년교육과는 달리 유아의 발달에 적합한 체험 놀이중심으로서 그 본질적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 오피니언
    2022-04-05
  • 잃은 것, 얻는 것
    우리 삶의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작게 생각하면 음지와 양지이고 크게 생각하면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이 광대한 우주도 양면성이다. 도대체 크기가 얼마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고, 빅뱅 이후 팽창을 계속하는 우주에도 반우주가 있다고 한다.이는 물질을 구성하는 미세한 크기의 물체인 입자가 있는가 하면, 반양성자·반중성자·반전자 등의 반입자가 있고 원자핵에 대해 반원자핵, 물질에 대해 반물질이 있으니, 그렇게 추측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관측으로는 반물질의 천체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주 탄생 시에 우주와 반우주가 동시에 만들어져 서로 관측 불능의 상태로 떨어져 각기 우주를 형성했으리라 상상한다. 아무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몽중몽처럼 존재의 확인도 불가, 불확실한 인간이 해답을 찾기엔 어려운 현상이다.그렇다. 그러잖아도 복잡한 세상에서 우주와 반우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현실성도 없고, 밥이나 어떤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니기에 부질없다. 그럼에도 우리 삶의 양면성은 현실이다.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이 걱정이고, 날이 개면 우산 장수 아들이 걱정 아닌가? 모든 일에 상대가 있으니, 내가 때리면 네가 아프고 네가 때리면 내가 아프기 때문이다.또 세상사는 단순하지 않다. 그러기에 솔직하고 단순하게 살면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눈 뜨고도 코 벤다는 말처럼, 그렇게 세상사는 단순 논리가 대접받지 못한다. 또 그렇기에 고무신 한 켤레와 막걸리 한 잔에 귀중한 한 표를 던질 때도 있었다. 그뿐인가. 귀신이고 주술이어도 상관없다. 그게 돈이 되고 권력에 빌붙는 기회라면 종교도, 부모도, 친구도, 고향도 버릴 수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핑계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특히 곡학아세의 식자들은 매사에 도덕과 윤리, 정의와 공정을 따지며 핏대를 세우지만, 얌전한 강아지가 부뚜막에 먼저 오르는 법이다. 그들은 하늘은커녕 부끄러운 낯바닥을 손바닥으로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아는 것 자랑에 침 튀기는 점잖은 학자, 세상 돌아가는 여론에 발 담그고 두더지 고개 흔드는 현명한 정치가, 철밥통을 안고 사는 든든한 관료는 뒤로는 호박씨를 까면서도, 입으로는 인간사의 바른길, 정도를 내세우며 너희는 그 길로 가라 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걸리적거리면, 어떤 형태로든 보이지 않는 회초리로 철저하게 응징한다. 개돼지 다스리듯 당근과 채찍이 무기이고, 그게 또 통치의 기술이다.‘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이 엊그제고, 최루탄과 지랄탄에 콧물, 눈물 쥐어짜던 일, 설한풍 눈보라와 억센 비에 꺼질세라 맘 졸이며 촛불을 든 게 엊그젠데, 이제 무엇 때문에 그랬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누구는 낯바닥이 훤히 빛나니 개털흰털의 왕상이며, 누구는 신끼가 무당을 능가하고, 미모는 크레오파트라니, 여왕은 따논 당상이라는 대목에서는 조상이 계신 산을 바라보면서도 숨쉬기가 힘들다. 생기가 막히고 피눈물이 솟는다.2002년 12월 대선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행정수도를 공약했고, 2003년 12월 국회는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안’을 통과시켰다. 2004년 5월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발족하자 헌법소송이 제기됐고, 10월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법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이때에 나온 말이 관습법이다. 이 관습법도 이현령비현령인가보다. 아니다. 귀신 주술의 뜻이면 국방부고 청와대고 보따리를 싸야 한다. 집값 폭탄 타령하던 부자건, 집도 없는 서민, 집조차 잃은 이재민이건 수조 원의 혈세를 쓰는 그 일에는 꿀 먹은 벙어리다. 하기야 귀신 주술이 무섭긴 무섭나 보다. 유일신이건, 다신이건, 신을 숭배하는 종교인들도 마찬가지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래도 세상 이치가 우주까지도 양면성이니,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 하는데, 지난 3월 9일에는 모든 걸 다 잃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심하겠냐? 신의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는 관심 놨지만, 마른하늘에서 벼락도 치는 법이니까 말이다.  
    • 오피니언
    2022-04-03
  • 영웅들을 위한 에피소드
    난세에 영웅이 출현한다는 말이 있다. 옛 역사 속에서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 정승을 생각해 본다.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그 울타리에 이순신은 파격적인 진급으로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현지 부임했다. 예나 지금이나 군 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부임한 장수를 보고 순순히 인정하고 가만있었을 리 없다. 1597년(정유년) 2월,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마땅하옵니다”를 외쳤다. 이순신을 발탁해 주고 6계급 파격 진급에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공은 공, 사는 사’라며 문무백관들의 의견에 반대하지 못했다. 이틀이 걸려도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의정 겸 도제찰사(국가 비상사태 직무 총사령관) 이원익이 어명으로 전시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시상태에서는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외쳐도 이원익의 승낙 없이는 선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원익은 “전하께서 전시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하지 못하옵나이다”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도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대사로 선조를 설득하였다. 올바른 한 사람이 중요하다. 오직 한 사람의 곧고 바른 판단과 집념으로 대신들의 고집이 꺾었다.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만 떠받들던 공복, 소박하고 비범했던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84세로 눈을 감으면서 모든 자식들을 불러 놓고 “나를 위해 부고도 알리지 마라.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하는 일이나 비석도 세우지 마라”며 임종시까지 초가집에 살았던 조선의 명재상이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집단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침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집단 나르시시즘은 ‘자기 민족이나 국가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집단 에고(ego)’를 뜻한다. 이런 생각에 빠지면 자기 민족은 역사적으로 위대해질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된다. 현실이 이와 다를 때 권리가 침해당했다며 굴욕감을 느끼고, 적들에 대해 악이라고 분노한다. 이런 심리상태를 일컬어 정치학자들은 프랑스어로 분노를 뜻하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한다. 역사학자 리아 그린펠드(Liah Greenfeld)는 옛 독일의 르상티망이 20세기 초 주요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다. 자국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막는 적에 대한 응징으로 침략전쟁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orbel Albright) 전 미국 국무장관이 22년 전 막 권력을 장악한 푸틴과 회담하고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푸틴은 자기 나라에 일어난 일(옛 소련 해체)에 당황해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의 위대함을 회복하겠다는 결심이 단호하다” 다시 말해 푸틴은 옛 소련처럼 주변국을 거느리는 패권국의 지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굳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그럴 권리가 있는 위대한 국가라는 집단 나르시시즘 증상이다.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해 서방의 일원이 되겠다는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에 푸틴은 르상티망을 느꼈을 것이다. ‘러시아 민족이 위대해질 권리’를 침해하는 적으로 서방과 우크라이나를 규정하고 그 적과 싸우는 전쟁은 정당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위대한 민족이 되려면 약소국 지배보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더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푸틴은 모르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3개국의 민족주의자들 역시 이를 모르고 있을까 걱정이다.
    • 오피니언
    2022-03-31
  • 잘 자라는 나무들처럼
    “스스로를 향해 너는 이렇다. 저렇다.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마라. 그럴 때마다 당신이 얻는 것은 상처뿐일 것이다.” 신비주의 작가라 불리는 브라질의 소설가인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마법의 순간”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을 나무라고 원망할 때가 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왜 내가 그런 일을 했었지? 미쳤어. 미쳤어. 이 머저리야.”라고. 지인에게 많은 돈을 빌려주고 떼일 때도 그렇고, 어떤 사건에 휘말려서 만신창이가 될 때도 그랬다. 나와 직접적으로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에. 하지만 자기 위로 기능이 발달한 편이어서 질곡에서 잘 벗어나곤 했다. 앞서 언급한 파울로 코엘료의 말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적용된다. 연인, 부부, 친구 등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혼율이 증가 중이다. 기혼자라 하더라도 출산율이 낮다. 그 결과 0.85%까지 낮아졌다. 그래서 결혼과 출산 장려를 위해 국가에서는 나름대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부모들은 더더욱 애달아하고. 그래서 명절날 등에 만나면 “결혼하라, 아기 낳아라” 등을 해댄다. 이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불화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가까운 사이에는 어떤 말이든 스스럼없이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현상들이 가까운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모두가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까울수록 자신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대서는 안 된다. 때문에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숲속의 나무들처럼. 멀리서 보면 빽빽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잘 자라고 있는 나무들일수록. 그 거리가 목숨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밀집되었다면 모두가 죽고 말았을지도 모르는데. 바람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흙을 부드럽게 하고 밑거름을 만들어주는 미생물들도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함께 살기 위해 숲속에서는 생존을 위한 수많은 승승게임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자정을 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외부의 강한 입김이 작용하기도 한다. 강렬한 태풍이 쳐들어와 가장 큰 나무부터 부러뜨리는 등. 현대는 급변하는 사회다.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극한경쟁을 벌인다. 이러면서 각자가 터득한 방법으로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신경이 날카롭다. 자신의 영역을 조금만 침범해도 극단의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때문에 모두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가족을 비롯한 친구, 연인 등이 상호 간에 가깝다고 생각하기에 충고해 준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힘이 되어주고 위로도 해주기 위해서.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상처가 되는 수가 많다.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사람 사이의 관계와 거리를 ‘개체공간(personal spac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모든 개체는 자신의 주변에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안에 다른 개체가 들어오면 긴장과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다. 대체로 가족과는 20cm, 친구와는 46cm, 회사 동료와는 120cm 정도의 거리가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에는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정신적 거리도 포함된다. 그래서 친한 관계라 하더라도 적절한 거리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그 거리를 침범하면 안 되지 않을까. 지키지 않았을 때 가족관계도, 연인관계도, 부부관계도 문제가 될 수 있기에. 그래서 잘 자라는 나무들처럼 거리를 잘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해 가면 어떨까
    • 오피니언
    2022-03-30
  • 폭력적 동물과 이성적 인간
    새 정권의 틀을 짜는 것이 만만치 않은 듯, 사안마다 시끄럽다. 그 가운데 ‘여성(女性)’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자. 여성가족부를 폐지한다는 것에 대해 여성계 등이 반대한다고 한다. 그동안 이 사회 여성들의 행태가 ‘지나치다’라는 견해가 있었다. 즉 나체로 길거리를 누비면서 ‘꼴리냐?’라고 쓴 팻말을 휘두르고, 큰 벼슬이라도 한 양 “이제 출산하지 않겠다!”고 떠드는 식의 폭력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불쌍한 할머니들 앞세워 놓고 뒤에서 온갖 파렴치한 착취를 계속해온 것(들)을 방관하고, 입에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떠올리기도 끔찍한 욕설을 인척에게 퍼붓는 짓에 대해 침묵하는 것 또한 바르지 않다는 것이다.현재 이 사회 여성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지적하기도 한다. 병역 면제, 취업·승진·각급 선거 공천 우선권 등 이루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유엔개발계획(UNDP)의 2018년 성불평등지수(GII, Gender Inequality Index)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189개국 가운데 10위를 차지할 만큼 성(性)평등 국가다. G20 국가 중에서는 2위 독일과 큰 차이가 날 만큼 압도적 1위다. 스위스는 1971년에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으며 특히 아펜젤주(州)는 1990년에야 가능했다.  그러니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겠는가? 연간 최소 1억원 가치라는 육아 등 가사노동은 내팽개치고 모든 여성이 정치 등 집밖 활동을 해야 하는가? 자기 계발과 직장 생활에 필요하다며 옷과 화장품 구입 등에 (가구) 수입 이상을 써도 되는가? 지어낸 소리를 떼를 지어 아무에게나 퍼부어도 괜찮은가? 남성은 모두 적폐와 구악(舊惡)이고 무한경쟁에 내몰려 그냥 도태(淘汰)돼야 할 존재인가? ‘그날 점심거리 말고는 아무 것도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데 말이다. 꼭 어머니나 누이나 딸이 아니더라도, 여성은 이 세상을 이루는 절대적 존재다. 그러나 몇몇 여권론자들의 과격한 주장에 휩쓸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끝없이 ‘부족하다. 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여성들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고 가치를 훼손하는 자해(自害) 행위일 뿐이다.  과연 이 시대 이 사회의 여성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로 편안(!)히 살던 지난날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언제까지나 약자와 피해자를 자처할 것인가? 이제 우리 삶을 길러낸 여성성(女性性)이 과연 자기만 챙기는 폭력적 동물의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합리적인 구성원으로서 이성적 인간의 것인지 결정할 때가 됐다.
    • 오피니언
    2022-03-29
  • 소중한 나는 소우주(小宇宙)
    완연한 봄이 왔다.봄은 청춘의 피를 끓게 한다. 봄과 인생은 위대한 신의 선물이다.헤르만 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 일일이 속속들이 아름다워라!”라는 시구절이 있다. 청춘(靑春)은 한창 꿈 많고 젊고 건강한 시절을 봄철에 비유한 것으로, 인생에서 청춘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핀 매화꽃, 벚꽃,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서 만물이 생동하는 청춘이다. 이십대의 청춘처럼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아름다운 산야를 그 동안 외롭고 추웠던 시절에서 벗어나 싱그러운 몸짓으로 삶의 둥지에 영광과 꿈을 향해 담으려고 날개짓하는 삶의 여정이다.  “삶은 아름답고 존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천지의 중심에 서 있는 만물의 주인이다”고 오행대의(581-619년 수나라 소길의 저서)에 밝히고 있다.한나라 무제 때 인재를 구하는 현량책(賢良策)을 제시한 인물로 유명한 동중서가 지은 춘추번로(春秋繁露)는 “하늘 또한 희노애락의 심기가 있으니 사람과 서로 버금하고, 유사한 것으로 합해 보면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늘과 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동일시할 정도로 사람의 가치를 높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865년 E·H 리히터는 코스모즈아설을 주장하며 생명의 배종은 코스모즈아가 우주의 공간에서부터 지구에 운반되어 생물이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동서양에서 하늘과 우주에서 인간의 내재적 존귀한 가치를 동일시할 정도로 인간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인간의 생명존중과 존귀한 삶의 가치는 우주 속에서 만물과 구별하여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한국의 행복지수가 전 세계 146개국 가운데 59번째 인 것으로 나타났다. UN 산하 자문기구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2022 세계행복보고서(2021 World Happiness Report)를 공개했다. SDSN은 2021년부터 국가 국내 총생산(GDP), 기대수명, 사회적지지, 자유, 부정부패, 관용 등 6개 항목 3년간의 자료를 토대로 행복지수를 산출하여 순위를 산출하고 있다. 행복지수(5.935) 59위 한국은 GDP나 기대수명 항목에서는 수치가 높았지만 나머지 행목은 상대적으로 많이 낮았다. 2022 행복지수 1위는 7.821를 받은 핀란드였다. 2위는 덴마크(7.636), 3위 아이슬란드(7.557)를 나타냈다. 동아시아에서 대만(6.521)은 26위, 일본(6.039) 54위, 중국(5.558)은 72위에 올랐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낮추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주범은 지나친 외모주의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일단 몸이 크고 외모가 준수해야 인기가 넘친다. 문제는 외모에 치중해질수록 인간성에 대한 관심은 멀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성형수술은 세계 1위이다. 지나친 외모컴플렉스는 인간관계와 사회갈등으로 이어져 행복지수를 낮춘다.한편 한국은 2003년부터 OECD 자살율이 2020년 10만명당 23.5명으로 1위였다. 미국(14.5명), 일본(14.17명)은 물론 2위인 리투아니아(21.6명)보다 1.9명이 많이 보이고 있다. 또한 OECD 30개국 중 한국인의 갈등지수는 2021년 3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보수와 진보(85.4%), 빈부갈등(82.7%), 노년과 청년세대(60.9%), 남녀(48.8%) 등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1위 멕시코(69.0%), 2위 이스라엘(56.5%), 한국은 55.1%를 3위를 기록하고 있다.행복지수가 높은 선진국은 자존감이 높고 상대를 배려하고 인정하며 소통과 화합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사회이다. 인간의 자존감과 자아실현의 가치는 천부인권 사상이다. 인간의 생명의 가치가 우주보다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삶의 가치를 상실한 채 스스로 삶을 방치하는가 하면, 스스로 근심걱정을 키워가며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인생의 삶은 희로애락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다. 도덕경에 “불행은 복에 의지해 성장하는 곳이고, 복은 재앙이 숨어 있는 곳이다. 만남은 헤어짐의 시작이고, 즐거움은 근심걱정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라고 말한다.소중한 삶을 함께 하는 소우주는 우리의 마음과 몸의 오장육부와  30조의 세포, 38조의 미생물을 관리하는 군주이며, CEO이다. 어머님 은혜 작사자 양주동 박사는 스스로 “나는 국보다”고 자존감이 넘치고 해학과 유머 넘치는 삶을 행복하게 살았다.
    • 오피니언
    2022-03-29
  • 하양목련꽃 피는 순천
    지난 주말이었다. 봄비가 내린 듯싶더니 세찬 비바람으로 돌변했었다. 하얗게 머금어 갓 피어나는 목련꽃들이 비바람에 찢기고 있었다. 참으로 서운했다. 특히 순천에서 피어나는 목련꽃은 유별했다. 순천사람의 마음과 순천여고의 상징성을 지녔기에 더욱 그렇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 싶다. 순천여고생들의 교복은 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적미를 풍겼으며 곡선미까지 겸비했었다. 그 원인과 까닭을 묻는다면 애써 말하고 싶다. 목련꽃송이처럼 피어나는 교복의 하얀 타이와 교지의 이름이 ‘목련’이었다는 사실이다.예부터 순천고을은 산자수려한 고을이었다. 삼산이수의 수려함은 물론 순천만이 펼쳐지는 남쪽바다는 여수와 고흥반도를 잇는 여자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순천사람들은 넉넉하고 순하고 순한 하늘사람으로 평하기도 했다. 봉화산과 동천을 중심으로 한 원 도심과 신도심에 심어진 목련꽃들이 봉긋봉긋 솟아나는 계절이다. 도심거리는 물론 길거리와 도시공원부지 그리고 후미진 공터까지도 하양목련꽃은 밝게 피어나고 있다. 더욱이 순천만국가정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노란 개나리꽃과 함께 하양목련꽃이 거리를 환하게 비치고 있다. 예를 들자면 그 유명한 옥천서원에서 동천으로 이어지는 옥천 변과 동천 변은 하양목련꽃이 눈이 부시도록 피어나고 있다. 누가 말했던가? 목련꽃은 4월의 꽃이라고 말이다. 숭고하고 고귀한 목련꽃의 사설은 뒤로하더라도 목련꽃에 얽힌 이야기는 부지기다. 그 중에서도 목련꽃의 전설은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신화가 그렇듯 목련의 전설도 못 다 이룬 사랑이야기다. 사람과 신의 사랑이 가능하던 옛날, 어느 한 나라의 임금에게는 외동딸인 공주가 있었다고 한다. 공주는 백옥(白玉)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가졌으며, 마음씨 또한 비단결처럼 고왔다. 공주를 아는 젊은 청년들은 모두 남몰래 공주를 사모했으며 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공주가 사랑한 것은 오로지 북쪽바다의 신(神)이었다. 하지만 북쪽 바다의 신은 이미 혼인을 해 아내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져 죽어버렸다. 그래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표현할 때 목련꽃을 대두시켰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넋을 기린 꽃이 목련꽃이 아닐까 싶다.요즘 순천은 하양목련꽃의 거리다. 학창시절 애창했었던 양희은의 ‘하얀 목련’이 흘러나오듯 거리마다 하양목련꽃의 출렁임이 넘실거린다. 휴대폰에 음악을 틀어놓고 동천 변을 산책하는 시민들은 하양목련꽃과 자색목련꽃의 전설이야기를 뒤 늦게라도 알고 싶어 했다. 결론적으로 북쪽바다의 신을 사랑했었던 두 여인의 넋이 목련꽃이다. 공주의 넋은 하양목련꽃, 바다신의 아내의 넋은 자색목련꽃으로 피어났으며 언제나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북향화 라고 부르기도 한다. 낙안면 평사리 ‘용쟁이골’에는 수백 그루의 하양목련꽃이 만발하고 있다. 하얀 새떼들이 움집해서 무용을 하는 듯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도 극히 아름답다. 맑은 공기와 맑은 물이 생성되는 용쟁이골에는 하양목련이 꽃동산을 이루고 있다. 필자의 움막을 찾는 지인들은 말한다. 일 년에 단 한 번이라도 찾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렇다. 하양목련꽃 피는 시기만이라도 이곳에 와서 휴식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양목련꽃 피는 순천’과 ‘목련꽃 지는 밤’의 글을 쓰지 않고는 베길 수 없었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하얀 빛깔 퇴색되어지는 밤도톰한 꽃잎 떨어져가는 밤이천 이십 이년 삼월 이십육일자정이 지났건만 잠은 오지 않고자꾸만 달아나는 잠을어이 붙잡을까 어찌 달아맬까나이테가 늘어 갈수록모성애를 끌어오는 목련꽃아리고 슬픈 사랑이야기꽃 엄마품속 헤집고 누이가슴 태우며고고하게 버티며 우아하게 피건만새소리 물소리 들리지 않고 빗소리 바람소리 시끄럽네
    • 오피니언
    2022-03-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