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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환곡과 과거제도의 폐단을 통탄하는 시를 짓다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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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10.2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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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1804년에 지은 ‘여름에 술을 대하다[夏日對酒]’에서 환곡의 폐해를 지적한다. 시를 읽어보자   

 
농가엔 반드시 식량을 비축하여          
삼년 농사지으면  일년 치 비축하고
       
구년 농사지으면  삼년 치 비축하여      
검발하여 백성 먹여 살리는 건데          
사창이 한 번 시작된 후로               
불쌍히도 수많은 목숨 떠돌이 됐지       
검발(檢發)이란 법으로 단속하고 창고에 있는 곡식을 풀어내는 일이다. 
사창(社倉)이란 쌀 저장 창고인데 사창이 환곡(還穀)으로 변했다.     
빌려주고 빌리는 건 양쪽이 다 원해야지  
억지로 강행하면 그건 불편한 거야       
천하 백성이 다 머리 흔들 뿐        
군침 흘리는 자는 한 명도 없네.    
봄철에 좀먹은 것 한 말 받고        
가을엔 온전한 쌀 두 말을 갚는데    
게다가 좀먹은 쌀값 돈으로 내라니   
온전한 쌀 팔아 돈을 바칠 수밖에 
  
봄에 좀 먹은 쌀 한 말 받고, 가을에는 품질 좋은 쌀 두말을 갚는데 그것도 돈을 내라고 하니 이는 이중삼중  착취이다. 그것도 수령과 아전이 대놓고 하니 어이가 없다.  
남는 이윤은 간교한  관리 살찌워        
한번 벼슬길에 천경(千頃) 논이 생긴다네. 
쓰라린 고초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돌아가니 
긁어가고 벗겨가고 걸핏하면 매질이라      
큰 가마솥 작은 솥을 모두 다 가져가고     
자식은 팔려가고 송아지마저 끌려가네.   
이런 수탈이 어디 있는가? 이게 수령과 아전들이 할 일인가?  
군량미 비축한다 말도 말게나.                
그 말은 교묘하게 둘러맞추는 말일 뿐         
섣달그믐 임박해서 창고 문 닫아걸고          
새봄도 되기 전에 창고 곡식 다 비우니        
곡식 쌓아둔 기간은 겨우 몇 달뿐이요         
일 년 내내 창고 속은 텅텅 비어 있는 꼴이네 
군량미 조달 할 일 불시에 생기는데          
그때는 탈 없으란 법 있다던가.              
군량미조차도 환곡으로 둔갑되었으니 참담하다. 이를 참다못해 1862년 2월29일에 진주민란이 일어났다. 경상우병사 백낙신이 사복을 채운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남지방 70여 고을로  민란이 들불처럼 번졌다.
 
농가 양식 대준다는 말 하지도 말게        
너무도 자애로워 오히려 지나치네.         
자녀들이 제각기 살림을 났으면           
부모도 자녀에게 맡겨 두는  법           
헤프거나 아끼거나 각자에게 맡겨야지     
죽 먹어라 밥 먹어라 간섭이 웬 말인가.   
모든 일 부부가 의논해서 결정하지        
지나친 부모 간섭 원하지 않네.           
상평의  법이 원래 좋았는데              
아무런 까닭 없이 버림당하고 말았네.     
정조 때에  환곡제를 폐지하고 상평창 제도로 개편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두어라 말아라. 술이나  마시자.          
백 병 술이 장차 샘물같이 되리라        
정약용은 술이나 마신다. 속만 상하니 술로 화를 푼다. 
한편 정약용은 『목민심서』 ‘호전(戶典)6조’, 제3조의 ‘환곡의 장부’에서 이렇게 적었다. 
“환곡은 사창(社倉)이 변한 것으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줬다가 추수기에 거둬들이는 조적도 아니면서 백성의 뼈를 깎는 병폐가 되었으니, 백성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일이 바로 눈앞에 닥쳤다.”

사진 1. 다산 정약용 선생 상(像)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정약용 유적지)                                                   
이윽고 정약용은 과거제도의 문제점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해마다 춘당에서 과거시험 보이는데        
수많은 사람이 한 자리에서 겨루니          
이루(離婁)같이 눈 밝은 자가 백 명 있어도  
낱낱이 감시하기 못하는 일이지            
춘당은  창덕궁에 있는 대(臺)이다.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치렀다.
이루(離婁)는 중국 전설상의 황제시대 때 살았다는 눈이 비상하게 밝은 사람이다.
되는 대로 적당히  채점하고             
당락은 오로지 시관 손에 달렸다네.      
높은 하늘에서 별똥 하나 떨어지니       
만명의 눈이 모두 똑같이 쳐다보네.      
법을 무너뜨리고 요행심만 길러주니     
온 세상이 모두 미친 것 같네.            
정약용은  과거시험에 부정이 많았음을 탄식하고 있다. 정약용은 원주(原註)에서 “이상은 대과(大科)에 대해 논한 것이고, 이 아래는 소과(小科)에 대하여 논한 것”이라고 적었다.  대과는 과거시험의  ‘문과’를 말하고,  소과는  생원과 진사시험을 말한다.
식자들 지금도 따져 말하길      
변계량의 허물을 아직도 탓하네.  

변계량(1369~1430)은 세종 때 20여 년간이나 대제학을 지내면서 국가 중요 문서를 도맡아 처리했으며 과시(科詩) 체제를 처음으로 정비한 인물이다. 
과시(科詩)의  격조가 원래 비루하여 
끼친 해독을 크고 넓어 엄청나구나.  
마을마다 앉아 있는 선생들이       
한과 당의 것은 가르치지 않고      
어디서 온 것인지 백련구(百聯句)만         
읊고 외우느라 방 안이 가득하고    
백련구(百聯句)는 시골 서당의 초보 교과서인 백련초해(百聯抄解)에 나오는 시구이다. 이 백련초해는 초학자에게 한시를 가르치기 위해 칠언고시 중 연구(聯句) 100개를 뽑아 풀이한 한시입문서인데, 장성군 필암서원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1510∽1560)가 편찬했다고 전해진다.
항우와 패공의 옛날 고사 만       
장마다 편마다 지리하게 연해있네. 
항우는 초패왕이고, 패공은 한나라의 유방이다. 시골 서재에서 출제(出題)하는 것들이 모두 초한(楚漢)시절 고사 뿐 이다. 
강백은 입부리가 호탕했고        
노긍은 기교한 표현 잘했는데     
강백은 조선후기의 시인으로 과시(科詩)에 능했으며 시풍(詩風)이 호탕했다. 노긍(1738~1790)도 역시 과시에 능했다.

한평생 공부하여 성인을 닮자 하나    
소동파와 황정견도 엿보지 못해       
소동파(蘇東坡)는 소식(1036~1101)의 호이다.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당송팔대가였다. 그는 「적벽부」시로 유명하다. 황정견(1045∽1105)은  소동파 문하에서 배운 시인이다.
시골에선 비록 내노라 할지 몰라도    
시체문(時體文)도 어두워 캄캄하다네.   
대대로 이름 한번 날리지 못하건만     
그래도 농사일은 하지를 않네.        
 
과거에 뽑히고는 고사하고           
문자도 아직은 미개한 상태           
글 조금 안다고 농사일 안 하는 허세꾼들이 아니꼽다. 
어떡하면 대나무 만 그루 묶어다가     
천 길 되는 빗자루를 만들어서        
쭉정이 먼지 따위 싹싹 쓸어서        
바람에 한꺼번에 날려버릴꼬.         
정약용은 허세들을 대나무 비로 싹 쓸어버려야 한다고 끝맺는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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