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18 (목)

“무슨 낯으로 다시 천지 사이에 서겠습니까?

대한제국망국사(32회)민영환 · 조병세 등의 자결 /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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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7.0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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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배와 목 찔러 순절
조병세, 가마안에서 음독
인력거 인부도 목매 자결
# 민영환의 자결     
1905년 11월 28일에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 등이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신들이 두 재상의 뒤를 따라 속히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제 조약을 돌려보내는 일로 여러 번 호소하였지만 아직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폐하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매국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직하고 충성스런 신하를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여, 성명을 내고 회동하여 담판하게 하소서. 그래야 강제 체결된 조약이 폐지되고 나라가 보존될 것입니다.”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이미 여러 번 칙유하였으니 이해해야 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구는가? 속히 물러가라.”
(고종실록 1905년 11월 28일 3번째 기사)
하지만 민영환 등은 다시 상소하였다.
“이 소청은 우리 조정에서 우리 법을 시행하여 처단해야 할 자를 처단하고, 사무를 주관할 대신을 골라 임명해서 조약을 폐지하기 위한 방도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나라는 존재해도 망한 것과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 시행하소서.”
그런데 고종은 “또한 이미 거듭 타일렀는데도 이렇게구니, 이는 서로 믿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라고 비답했다. (고종실록 1905년 11월 28일 4번째 기사)
이틀 후인 11월 30일 아침 6시에 민영환(1861∽1905)이 자결했다. 45세였다. 11월 29일에 평리원에서 처벌을 기다리다가 석방된 민영환은 다시 소를 올리기 위해 장소를 종로 백포점으로 옮기고 판서 민영규, 김종한, 남인철 등과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 날 오후에 민영환은 서대문 밖에 있는 본가에 가서 생모 서씨와 아내 박씨를 찾아 작별하였다. 그리고 전동 회화 나뭇골에 사는 옛 청지기인 의관(醫官) 이완식의 집(현재 인사동 공평빌딩 앞)을 찾았다.
이튿날 아침 6시경에 민영환은 평소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 처음에는 복부를 찔렀는데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손에 묻은 피를 벽과 의복에 여러 번 문질러 씻고 난 뒤에 다시 찌르고 하였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어 유혈이 방안에 가득한 채 절명했다.
민영환의 소매 속에서는 명함 앞뒤로 쓴 유서 2통이 나왔는데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였다. 이 유서는 1905년 12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이 명함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도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면 민영환의 유서를 읽어보자.
먼저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警告韓國人民)’이다.
“오호라! 나라와 백성이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들은 곧 생존경쟁 속에서 진멸(殄滅)되어 갈 것입니다. 무릇 살기를 구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사는 법이니, 제공(諸公)들이 어찌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영환은 마침내 한 번 죽어 황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고, 또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죄하고자 합니다. 이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구천 아래에서 제군(諸君)들을 도울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형제 동포들이 천만 배나 더 분발하여 지기(志氣)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서로 죽을 힘을 다하기로 결심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마땅히 저승에서 기쁘게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럼 이것으로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고별인사를 올립니다.”
이어서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各公館寄書)’이다.   
“영환은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므로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또 2000만 동포에게 사죄하옵니다. 죽은 사람은 그만입니다만 지금 우리 2000만 인민들은 곧 생존경쟁 속에서 진멸되어 갈  것입니다. 귀 공사들이 어찌 일본의 행위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귀 공사 각하는 다행히 천하의 공의(公議)를 중하게 여기시고, 이 사실을 귀 정부와 인민들에게 보고하여 우리 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도와주신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마땅히 지하에서 기쁘게 웃으며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아! 각하는 부디 우리 대한을 경시하거나 우리 인민의 뜨거운 마음을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고종은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조령을 내렸다.
“이 중신은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의지와 기개가 바르며, 왕실의 근친으로서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보좌한 것이 많았고 공적도 컸다. 짐이 일찍부터 곁에 두고 의지하며 도움받던 사람인데, 이 어려운 때에 강개하고 격렬해져 마침내 자결하였으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은 해와 별을 꿰뚫을 만하다. 짐의 마음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예식원에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시호를 주는 은전을 시행하라. (후략) (고종실록 1905년 11월 30일)
게일 목사는 『전환기의 조선』에서 민영환의 자결을 이렇게 적었다.  
“1905년 11월 17일 한밤중에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이양된다는 내용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을 접하자 민영환은 대한제국은 이제 멸망했으며, 자신은 자결하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는 몇 통의 유서를 남긴 뒤 무디고 짤막한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이름 주위에 크게 쓰인 ‘자기의 조국을 위해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훌륭한 일인가”라는 문장을 조선은 되새겨야 할 것이다.’”
# 조병세, 이상철과 김봉학 · 홍만식의 자결      
민영환이 자결한 다음 날인 12월 1일 특진관 조병세가 약을 먹고 순국했다. 향년 79세였다.
조병세는 가평 시골집에 추방되었으나 11월 30일에 다시 상경하여 12월 1일에 심순택, 이근명과 함께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삼가 비지(批旨)를 받아보니,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하는 것은 서로 면려하고 수성(修省)하는 것만 못하니 힘쓸 것은 자강에 있다.’고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신들이 집에 물러가 있다 해도 근심에 휩싸여 통탄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며 문을 닫고 자결할 따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오늘 즉시 칙지를 내려 역적을 치소서. 삼가 서둘러 시행하소서.”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공연히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 경들은 그리 알고 집으로 돌아가라.”
조병세는 가마에 태워 강제 추방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조민희의 집에 당도하자 죽었다.
조병세가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이 조령을 내렸다.
 “짐은 큰집을 버텨주는 기둥과 대들보처럼 의지했었고 이 어려운 때에 직면하여서는 더욱 마음을 의탁했었는데 갑자기 이처럼 부고가 이르렀다.
굳은 충성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정은 후세에 빛날 것이지만 짐의 슬픈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궁내부에서 1등급의 예장(禮葬)을 기준으로 지급하여 겸장례(兼掌禮)를 보내 호상(護喪)하게 하라. 정문을 세우고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라.(후략)”(고종실록 1905년 12월 1일 3번째 기사)  
이날 종1품 이용직이 장인 조병세가 남긴 상소문을 올렸다.  
“신이 늘그막에 죽지 못하여 국가의 위망(危亡)이 목전에 임박한 것을 목격하고, 병든 몸을 끌고 도성에 들어와 주사(奏辭)와 차자(箚子)를 올려 여러 번 번거롭게 해드리면서 그칠 줄을 모른 것은 혹시 일말이나마 나라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현재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장 눈앞에 임박하였는데도 폐하께서는 단지 4, 5명의 역신(逆臣)들과 문의해서 일을 주선하니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이 폐하 앞에서 한 번 죽음을 결단하지 못하고 심지어 저들의 위협을 받아 잡혀감으로써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자신을 욕되게 하여 스스로 크나큰 죄를 자초했으니, 이것이 어찌 죽을 날이 장차 임박하여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폐하의 죄인일 뿐 아니라 절개를 지키고 죽은 신 민영환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다시 천지 사이에 서겠습니까? 신은 죄가 중하고 살아서는 폐하의 뜻을 감동시켜 역신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강제 조약을 파기하지 못한 만큼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폐하와 영결합니다.
신이 죽은 뒤에 진실로 분발하고 결단을 내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오적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논하고 코를 베서 처단함으로써 천지와 신인(神人)에게 사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각국의 공관과 교섭해서 허위 조약을 회수해 없앰으로써 국운(國運)을 회복한다면 신이 죽은 날이 태어난 날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정신이 어지러워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신은 피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는 것을 금치 못하며 삼가 자결한다는 것을 아룁니다.”
이에 비답하였다.
“조 특진관이 남긴 상소를 보니 더욱 마음이 슬퍼진다. 어찌 마음속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고종실록 1905년 12월 2일 3번째 기사)  
12월 4일에는 학부 주사 이상철과 상등병 김봉학이 자결했다.   
서울 계동(桂洞)에서 인력거를 끄는 인부도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는 옛날에 민영환의 사랑채에서 살다가 계동으로 이사하여 인력거를 끌며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때 민영환이 순절하였다는 말을 듣고 통곡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하루 종일 울고 있다가 인력거를 차주(車主)인 김삼령의 집에 가져다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가족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가 간 종적을 추적하였는데, 이미 그는 경우궁 뒷산의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의 시신은 이미 얼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역 매천야록 제4권(1905년),    6. 인력거 인부의 순사)
이어서 12월 14일에 전 찬정 홍만식이 을사늑약이 체결된 데 분개하여 약을 먹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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