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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 700년 묵은 한을 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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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6.2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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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국공신 익화군 김인찬 관련 유물 발견

전문가 “18C 초 백자팔각주병, 사료 가치 커” 

소장자 “익화군 문중 업적 증명… 가보될 것” 

학계 “당시 정치·생활상 등 살필 소중한 자료” 


유물1.jpg

 

 개국공신 원훈 14명 중 11번째일 만큼 조선 개국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 관련 유물이 발견돼 관심이 모이고 있다. 특히 당시 권력 핵심이었는데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익화군을 제대로 조명할 계기가 될 것으로 관련 학계는 기대하고 있다.  

그 유물은 높이 38cm가 넘는 백자청화팔각주병(白瓷靑華八角酒甁, 사진)이다. 산죽(山竹) 세 가지가 담박(澹泊)한 필치로 그려져 있고 반대 쪽에는 '開國一等功臣益和君金仁贊 洪武二十五年壬申七月 太祖庶兄襄昭公 李和贈'이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1392년 7월 역시 개국공신이었던 양소공 이화가 익화군 김인찬에게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물을 감정한 전문가들은 “18세기 초에 만들어진 조선백자가 맞다. 다만 명문에 적힌 날짜는 14세기 말인데, 이성계의 묘호(太祖)와 이화(李和)의 시호(襄昭公)가 쓰였다는 점(이성계와 이화는 1408년 사망했기 때문에 1392년에는 묘호와 시호가 있을 수 없다), 이화가 이성계의 서제(庶弟)인데 ‘太祖庶兄’이라고 돼 있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고 밝혔다.

그들은 이어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이 유물이 18세기 초 제작한 진품(眞品)이며 진품(珍品)인 증거”라며 “누가 가짜를 만들면서 최소한의 사실(史實) 관계도 확인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사실(史實)과 전승 설화 등을 중심으로 한 전문가들의 주장을 정리해보자. 

"익화군 사후(死後) 후손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세자 책봉과 관련한 태종(이방원)의 박해 때문이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추론이다. 그러다 인조(仁祖) 6년(1628년) 익화군의 현손(玄孫) 김이갱이 익성군(益成君)에 봉(封)해진 것을 계기로,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문중을 재건했다. 그 과정에 익화군 관련 유품 등도 수습·정비했는데, 전해져오던 중 유실된 원작을 재현하는 과정에 실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기물의 명문은 ‘開國一等功臣益和君金仁贊 洪武二十五年壬申七月 上庶弟 開國功臣 李和贈’이었을 것이다."

즉 현 기물은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 확실하며, 명문의 사실(事實) 관계 오류는 재현 과정의 실수라는 것이다. 

문화유산 관계자들은 “색·기형(器形)·유약(釉藥)·태토(胎土) 등 특징으로 볼 때 조선 중기(中期) 기물(器物)이 확실하다”면서 “조선 개국 당시 정국 상황부터 선물(膳物) 관행 등 생활상 그리고 도자사(陶瓷史)까지 중요한 사료(史料)”라며 앞으로 진행될 연구에 기대를 보였다. 

소장자(김화중 한국고미술협회 광주전남지회장, 고전방 대표)는 “후손들이 보관하던 기물이 일본으로 유출됐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이 유물은) 조상을 기리는 후손들의 효성이 극적으로 결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오래 묻혀 있던 조상(益和君)의 위업을 되살리고 후손에 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익화군 문중의 700년 한(恨)이 풀릴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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