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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해남 수성송

왜구 물리친 해남현감 '변협'이 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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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6.0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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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수성송.jpg

 

역사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을 성찰하며 볼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임진과 정유 7년의 왜란이 있기 전, 조선에는 이를 예고하는 몇 차례의 왜란이 있었다. 주군 ‘다이묘’가 거느리는 왜병이면서 생계형 흉악범 해적집단 왜구가 걸핏하면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1510년 삼포왜란(부산포, 진해 내이포, 울산 방어진 염포), 1544년 사랑진(통영)왜란, 1555년 을묘왜변(달량포), 1587년 여수 손죽도 등지에서의 대규모 약탈이 그것이다.

왜구는 부산과 불과 50Km인 대마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았다. 이 왜구들의 배 ‘세키부네’는 노 40개로 격군 40여 명, 조총병 20명, 전투병 10명 등 모두 70여 명이 탔다. 조선 수군 130여 명이 타는 판옥선보다 작아 천자, 지자, 현자, 황자 총통을 싣지 못했다. 그 대신 날렵하고 빠르게 움직여 조선의 남해와 서해를 제집 드나들 듯했다.

명종 10년인 1555년 5월이다. 왜선 60여 척에 탄 4000여 명의 왜구가 전라도 해남 북평의 달량포에 들어왔다. 전라병사 ‘원적’이 급히 달량포성으로 달려갔지만, 왜구의 위세에 놀란 대부분의 관군이 이미 성을 넘어 도망쳐버린 뒤였다.

이때 장흥 부사 한온은 가리포로 가던 중 원적을 만나 달량포성으로 들어왔다. 원적은 겁에 질려 한온에게 ‘적이 강하니 지탱하기 어렵소. 어찌하면 좋겠냐’며 벌벌 떨었다. 이에 한온은 ‘주장이 흔들리면 누가 힘이 나겠소. 당신은 남문을 지키시오. 나는 북문에서 죽으리다’면서 장흥의 의병 안언방, 백민걸 등과 함께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였다. 원적은 기세등등 성을 넘어오는 왜구에게 항복의 뜻으로 갑옷을 벗어 보내 목숨을 구걸했으나,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3일간 항전 끝에 달량포성은 함락되었다. 왜구는 포로로 잡힌 영암군수 이덕견에게 ‘지금 즉각 한양으로 진격해 도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편지를 주어 조선 조정에 보냈다. 이어 거칠 것 없이 난포(어란포), 마도(강진), 장흥부병영(강진군 병영), 가리포(완도)를 짓밟아 살상과 노략질을 했다. 이에 강진과 장흥의 수령들은 서둘러 성을 포기했고, 두 고을의 물자는 고스란히 왜구들의 차지가 되었다.

발칵 뒤집힌 조정은 중앙군을 파병키로 하고 도순찰사 이준경과 경상좌병사 조안국, 좌·우 방어사 남치근과 김경석을 파견했다. 이준경은 나주에 이르러 왜구 토벌을 시작했다.

그렇게 왜구들이 해남, 완도, 강진, 장흥 일대에 흩어져 분탕질을 치고 다닐 때의 영웅이 해남 현감 변협이다. 변협은 해남군민과 병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수축하고 복병을 배치하여 사방이 왜구로 둘러싸인 해남성을 지켰다.

어느 날 왜구 10여 명이 가까이 왔다가 겨우 1명만 살아서 줄행랑친 뒤부터는 감히 다시 경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변협을 특진시켜 장흥부사로 삼았다.

변협의 본관은 원주이고 아버지는 중추부경력 변계윤이며, 어머니는 참판 최자반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용맹이 뛰어났으며 1548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555년(명종 10)에 해남현감이 되었다.

해남군청의 수성송은 변협이 장흥부사로 영전할 때 이를 기념하여 심고 ‘수성송’(守城松)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데서 유래한다. 곰솔이라고도 하는 이 해송은 겨울눈이 붉은색인 육송과 달리 회백색이다. 두 아름이 넘는 이 500살 수성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라와 내 가족을 누가 어떻게 지켜왔는지를 알 수 있으니, 이는 또 백성의 생목숨을 지켜 준 수생송(守生松)이고 그 마음마저 지켜준 수성송(守性松)이다.

김 목/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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