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7-07 (목)

“나라는 망해도 황실만 온전하면 된다”

대한제국망국사(29회)/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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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5.1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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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실의 안녕만 챙겨
 일진회 “외교권 日에 위임”
중무장 일본군 회의장 포위
5월 14일 토요일에 을사늑약의 현장인 덕수궁 중명전(서울시 중구 정동)을 찾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면 을사늑약의 전말을 살펴보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반도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11월 2일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 특파대사로 임명했다.
11월 5일 송병준이 주도한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것이 독립을 유지하고 영원히 복을 누리는 길”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을사오적보다 더 나쁜 매국노들이었다. 11월 10일에 이토는 고종에게 메이지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다시 알현하길 청했다. 그런데 일본은 11월 11일에 이토 대사 접대비 명목으로 무기명 예금 증서 2만원(시가 25억 원)을 경리원경 심상훈을 거쳐서 황실에 납입시켰다. 이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1 보호조약 1-3’에 나온다.
11월 15일에 고종과 이토는 4시간 동안 단독 회담을 했다. 이토는 조약안을 고종에게 내밀었다. 고종은 이토에게 외교 형식이라도 보존해 달라고 매달렸지만, 이토는 변통의 여지 없는 확정안이라고 거절했다.
고종은 전·현직 정부 신료와 상의해야 하고 인민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토는 전제 군주가 인민의 뜻을 살피겠다는 것은 인민을 선동하려는 저의라고 항의했다.
마침내 고종은 외부대신끼리 협의 사항을 정부가 검토한 후에 짐이 재가하겠다고 이토에게 말했다.
11월 16일 오후에 이토는 정부 대신들을 숙소인 손탁호텔로 불러 조약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참정대신 (총리) 한규설이 외교의 형식만이라도 남겨 달라고 간청했으나, 이토는 ‘절대 불가’라고 못 박았다.
11월 17일 오전 11시에 한규설 등 대신 8명은 일본 공사관에 모였다. 일본 공사 하야시는 조약안을 본격적으로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정부 대신들은 선뜻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비로소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말문을 열었다.
“지금 당장 토의해 의결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중추원에서 여론을 수렴해야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야시는 언성을 높이며 반박했다.
“귀국은 전제국가인데 어찌하여 입헌정치 흉내를 내어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려 합니까? 황제가 응당 한마디 말로써 직접 결정하는 것인데 의견 수렴 운운으로 모면하려고 합니까?”
오후 3시쯤에 하야시는 대신들을 이끌고 대궐로 향했다.
이윽고 어전회의가 열렸다. 고종은 몹시 괴로워하면서 대책을 여러 번 물었다. 대신들은 조약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러자 고종은 일단 결정을 미루자고 했다.
이때 이완용이 아뢰었다.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면 조약의 내용 중에 첨삭하거나 개정할만한 중대한 사항을 상의하자는 것입니다.”
이완용의 말은 조약 체결 거절은 불가능하니 현실적인 대안을 찾자는 것이었다. 할복이라도 하면서 거절해야지, 조약안 첨삭·수정을 미리 대비하자니 이게 매국의 징조였다.
그런데 고종이 타당하다고 말하자 조약안의 첨삭·수정 회의가 진행됐다.
권중현이 아뢰었다. “신이 외부(外部)에서 얻어 본 일본 천황의 친서 부본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조약 조문에는 없습니다. 응당한 조목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종은 “과연 옳다. 농상공부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며 대만족을 표시했다. 황실의 안녕만 챙기는 고종의 모습이 돋보인다.
회의가 끝날 무렵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뢰었다.
“이상 아뢴 것은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들은 한 마디로 조약 체결을 거부하겠습니다.”
오후 4시경 시작된 어전회의는 7시 넘어서 끝났다.
잠시 후 하야시 공사가 참정대신 한규설에게 어전회의 결과를 물었다.
한규설은 ‘폐하께서는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지시하셨으나, 우리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거듭 말했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중대한 협상을 앞두고 협상전략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노출한 것이다.
이러자 하야시가 질책하고 나섰다.
“폐하가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조약을 순조롭게 진행해야지, 대신들이 모두 폐하의 명을 어기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런 대신들은 조정에 두어서는 안 되며 특히 참정대신과 외부대신은 그만두게 해야 하겠습니다.”
한규설은 몸을 일으키며 ‘공사가 이렇게 말하니 나는 참석할 수 없다’고 대꾸했다. 이윽고 대신들이 만류하자 한규설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당황한 하야시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긴급 연락했다.
오후 8시쯤에 이토가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일본군 헌병 사령관 등을 거느리고 황급히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으로 들어왔다. 수옥헌 안팎은 중무장한 일본군이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포위해 공포 분위기였다.
하야시 공사로부터 사태를 파악한 이토는 고종의 알현을 여러번 요청했다. 하지만 궁내부 대신 이재극은 “짐이 이미 대신들에게 협상해 잘 처리하라 했고,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대신들이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를 전달했다.
그런데 “대신들이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고종의 어명은 결국 독약이 되고 말았다.
고종의 어명을 접한 이토는 곧 참정대신 한규설에게 토의하자고 요청했고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이토는 먼저 참정대신에게 말했다.
“참정대신은 어전에서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
한규설은 ‘반대’였다고 말했다.
다음에 이토는 외부 대신에게 물었다.
박제순이 대답했다.
“외부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이 넘어가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토는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칙령이 아니겠습니까? 외부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
다음엔 민영기에게 묻자 민영기는 ‘절대 반대’라고 답했다. 이어서 법무대신 이하영에게 물었다.
이하영: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가 있는데 또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이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
이토: 그렇지만 이미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이 또한 찬성입니다.
이어서 이토는 이완용에게 물었다.
이완용은 말했다.
“이번 일본의 요구는 대세 상 부득이한 것이다. 종전에 우리 외교의 변화가 심했던 탓으로 일본은 두 차례나 큰 전쟁을 치렀다. 일본은 더 이상 동양 평화를 위태롭게 할 수 없어 이번 요구를 제기한 것이다. 일본은 이번에는 반드시 목적을 관철하려고 할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진대 원만히 타협해 일본의 제의를 수용하고 우리의 요구도 제기해 관철하는 것이 좋다. 자구(字句) 등은 다소 수정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이완용은 대신들의 결의를 한순간에 뒤집고, 적극 찬성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러자 이토는 벌떡 일어나면서 “조약 중에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되니, 과연 당신은 완전 찬성이요”라고 크게 만족했다. 이토의 마음에 든 것이다.
이어서 권중현, 이근택, 이지용이 모두 찬성했다. 대세가 확 바뀐 것이다.
1905년 11월 17일 늦은 밤,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과의 찬반 문답이 끝나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불러 말했다.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를 받아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찬성은 6인, 반대는 2인으로 가결이 됐으니 주무 대신에게 지시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하도록 주청해 달라.”
이토가 가결을 선언하자, 참정대신 한규설은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이토는 제지하며 “어찌 울려고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이후 한규설과 박제순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 있었고, 민영기,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 이하영은 조약 문안을 수정하는 문제로 설왕설래하는 바람에 회의장은 다소 어수선해졌다.
이때 한규설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예식관 고희경을 시켜 고종의 알현을 요청하고, 대청 뒤 작은 방으로 들어가 다시 이재극에게 알현을 청했다. 이 때 고희경이 일본 공사관 통역 시오가와가 참정대신을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한규설이 앞뜰로 나가니 시오가와와 일본 헌병들이 한규설을 작은 방에 감금해 버렸다.
한참 있다가 한규설이 회의실로 다시 들어왔다. 한규설은 갑자기 통곡하자 회의는 잠시 중단됐다. 이때 이토는 “너무 떼를 쓰는 모양을 하면 죽이겠다”며 모두 들으라는 듯이 엄포를 놓았다.
대신들은 겁에 질렸고 이후 조약 수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문안 수정이 끝나자 이토는 “참정대신이 반대해도 다른 대신들은 수정안에 모두 찬성했으니 안건은 결정됐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토는 일본 공사관 통역 마에마 교사쿠와 외부 보좌원 누마노 등과 일본군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외부(外部)로 달려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탈취하게 해, 박제순과 하야시가 나란히 조약에 날인했다.
(그런데 11월 18일의 ‘윤치호 일기’에는 외부(外部)의 직인은 일본이 탈취한 것이 아니라 외부대신 박제순의 명령에 의해 직원이 수옥헌(중명전)에 가져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처럼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2시경에 을사 5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의 조약안은 당초에 4개 조항이었는데 조선의 요구에 의거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나라는 망해도 황실만 온전하면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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