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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진도 상만리 수호신 비자나무

나무에 오르다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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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3.1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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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상만리 비자나무.jpg

 

진도는 울돌목을 경계로 해남과 이웃하는 큰 섬이다. 이름처럼 보배로운 섬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있는 오랜 사람살이의 섬이다. 백제시대에 인진도군이 고군면 고성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시작하여 신라 때 진도현이 되었다.

고려 때인 1271년 5월 15일이다. 진도에 웅거하던 삼별초는 김방경과 몽골 원수 혼도의 여몽연합군에게 무너졌고, 주민 대부분이 몽골로 잡혀감에 따라 진도는 거의 빈터가 되었다. 또 1350년 충정왕 2년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왜구의 노략질에 남은 주민도 월악(영암군 시종면 월악리), 명산(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금산(해남군 삼산면)으로 피난하였으니, 이때에도 진도는 80여 년간 빈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 조선조 초에 주민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한때는 해남이나 영암 지역과 함께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우리의 삶이 거친 파도를 피해 잠시 젖은 날개를 섬바위에서 쉬는 갈매기와 다를 바 없다.

조선 3대 왕 태종 때인 1409년이다. 진도현을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이라 하였고, 1437년에 세종이 다시 분리하여 진도군이라 하였다. 이해 6월 29일에 초대군수 양경이 고성에 성을 쌓았다가 1440년에 지금의 진도읍으로 관청 소재지를 옮겼다.

그렇게 삼별초와 왜구의 노략질로 빈섬이 되었다가,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할 무렵이다. 1438년 세종대왕은 삼별초 대몽항전의 마지막 격전지인 남동리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남도진성을 쌓게 했다.

임회면 상만리는 남도진성과 가까운 해안 마을이다. 고려 후기의 석탑인 오층석탑이 있고 상만사지라는 폐사지 절터가 있는 곳이다. 1930년 무렵 여기 폐사지 터에서 미륵불이 나와 초가로 절을 지어 만흥사라 하였고, 1974년 4월에 새로이 절을 지을 때 고려자기 2점이 출토되었다. 지금의 절 이름 구암사는 마을 뒷산 바위가 ‘비둘기 바위’ 때문인 듯싶다. 이런저런 사실로 보아 구암사는 고려 후기의 절터 자리로 여겨진다.

아무튼, 세종대왕이 남동리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남도진성을 쌓을 무렵 이곳 상만리에서 비자나무 한 그루가 땅을 뚫고 새움을 틔웠다. 거친 바람에 아랑곳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왜구 때문에 삶터를 잃고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옛터를 일구던 때부터 지금까지 600여 년을 함께하고 있다, 그러니 두 팔 벌려 안아 네 아름이 넘는 이 우람한 상만리 비자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이자, 수호신이다, 사람들이 나무에 오르다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 신령스런 나무이다.

난대성 상록침엽수로 한자의 비(非)자와 비슷하여 얻은 이름인 비자나무는 주로 절이나 마을에서 심고 가꾸던 귀한 나무로 주변에 모기도 서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4월에 꽃 피어 10월에 익는 열매는 영양이 풍부하고, 간식거리이며 구충제, 급체, 가래, 변비, 탈모, 여성병 등 옛 가정의 만병통치 상비약이었다. 또 비자나무로 만든 가구가 갈라지면 젖은 수건을 덮어 놓는다고 한다. 그러면 스스로 갈라진 틈을 메꾼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한 나무이다.

‘한 해 농사지어 삼 년을 먹는다’는 진도는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여 옥주라고도 했다. 사람들은 넉넉한 인심에 애향심이 높다. 이 사람들이 사는 한반도 남쪽 끄트머리 바닷가 마을의 한 그루 비자나무이지만, 참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나무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신하여 대대손손 우리를 지켜주는 신령스런 조상님 나무이다.

<김 목/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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