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08-20 (화)

홍경래 난과 김삿갓

송태윤/논설위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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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8.13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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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순이 선천부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손자인 병연(炳淵-1807~1863))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평상 시 삿갓을 쓰고 다녔기에 흔히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라고 부른다. 본관은 안동이며,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다.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때는 조선조 순조가 왕위에 있었으며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여 정치를 농단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으니 나라의 기강은 흐트러지고 국가 재정의 근간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삼정(三政)이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하였다.
이 틈을 타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는 지역 차별 철폐를 주장한 피지배층의 민중항쟁이다. 이는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와 안동 김 씨 세도 정치의 타도였다.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중엽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민중 항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1800년, 홍경래는 약 10년 동안 서북인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고, 항쟁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우군칙·이희저·김창시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순조11년인 1811년 12월 18일 다복동에서 김창시가 “조선 왕조 개국 이래 서북인 가운데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서울 사대부는 서북인과 혼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라는 격문을 공표한 것을 시작으로 1000여 명의 군사가 일으킨 민중항쟁이었다.
관군들이 평안도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양민들까지 적으로 간주해 마구 학살하자, 이에 격분한 농민들이 정주성에 모여들었다. 관군은 연일 정주성을 공략했으나 죽기 살기로 항전하는 농민군을 쉽사리 꺾지 못했다.
26일 홍경래는 남진군을 이끌고 안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박천의 송림리를, 북진군은 정주에서 선천으로 진격해 선천과 철산을 잇달아 장악했다. 이때 농민군이 앞장서 가산·박천·선천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가산군수 정시는 항복하지 않고 거역하다가 칼을 맞아 죽었고, 선천부사 김익순은 농민군에게 항복했다. 이로 인해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참형을 당했고, 가산군수 정시는 만고의 충신이 되었다.
관군과 반군은 서로가 공방을 벌이며 승패를 가리지 못하던 중 4월 19일 새벽에 관군은 성 밑으로 굴을 파고 설치한 1800근의 화약을 터뜨려 정주성을 무너뜨린 뒤, 성 안으로 몰려 들어가 봉기군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총탄에 맞아 전사했고, 홍총각 등은 사로잡혔으며, 우군칙과 이희저는 달아났다가 이튿날 체포되었다. 당시 정주성에 있다가 체포된 사람은 모두 2,983명으로 이 가운데 10세 이하 소년224명, 여자 842명을 뺀 1917명이 모두 참수됐다. 이렇게 하여 소위 홍경래의 난은 마무리됐다.
김삿갓의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으로 인해 역적의 자손이라 자식과 손자들은 법에 따라 죽음을 당하거나 종이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죄는 당사자 김익순에게만 묻고 아들 손자들은 종이 되는 신세를 면했는데, 여기에는 세도가 안동 김 씨들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병연의 어머니는 집안 내력을 철저히 숨기고 살면서 남달리 영민한 작은아들 병연을 글방에 다니게 했다. 병연은 열심히 공부했고 스무 살이 되자 고을에서 보는 향시에 응했다.
시제는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한다’이었다.
김삿갓은 가슴을 펴고 시를 써내려갔다. 그중 마지막 한 구절은 이렇다 “임금을 잃은 이 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 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네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일을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와 같이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는 시이다.
김삿갓은 장원급제를 했고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옛 일을 더 감출 수가 없었다. 병연은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기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듣고 난 뒤부터 심정이 몹시 괴로워 술과 시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는지 스물두 살 때 장가를 보냈고 이어 손자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그 뒤 그의 발걸음은 위로는 강계·금강산·영월 아래로는 여산·지리산·동복까지 끝없는 방랑의 길을 떠돌았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시가 물처럼 쏟아졌고,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해학이 넘쳤다.
그는 쉰일곱 살에 전라도 땅 동복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떨쳐버렸다. 김병연은 스스로 그의 할아버지의 잘못을 회개하고 방랑하면서도, 기성 권위에 도전하는 등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풍자하였다. 그래서 그를 참여시인 또는 민중시인이라고 부른다.
유해는 강원도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에는 광주 무등산 기슭에,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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