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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강릉 오죽헌 율곡송

오죽헌 향해 고개숙인 담장 곁 노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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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1.2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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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지만, 산천 의구란 말도 옛 시인의 허사라고 했다. 그럼에도 강릉 오죽헌에 가면 의구한 산천과 인걸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수수 백 년 한 자리에서 말없이 역사와 인걸을 간직한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율곡은 신사임당의 용꿈에서 태어났다. 오죽헌에 그 용나무들이 있다. 또 오죽헌의 나무들은 사계절을 품고 있다. 봄의 율곡매, 여름의 사임당 배롱, 가을의 율곡송, 겨울의 오죽이 바로 그 오죽헌의 사계절이다.
먼저 봄의 율곡매다. 세종 22년인 1440년 무렵,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짓고 별당 후원에 심은 나무이다. 사임당은 매화 그림을 많이 그렸고, 첫 딸을 낳아 ‘매창’이라고 했다. 이 매화는 연분홍 홍매이며 알이 굵다. 남쪽의 절집 매인 화엄사 화엄매, 백양사 고불매, 선암사 선암매와 함께 북쪽의 집안 매인 율곡매는 조선 4대 매화이다. 허나 나이가 6백여 살이니, 나뭇가지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그게 또 자연의 순리이다. 어찌 세월을 탓하랴? 나그네는 그저 이른 봄, 꽃송이를 피워올린 매화나무 옆의 율곡과 사임당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던 걸음 멈추고 눈 맞춤을 할 뿐이다.
배롱나무는 여름나무이다. 오죽헌의 울 밖 여름은 배롱꽃이 지천이다. 오죽헌 뜨락의 6백 살 배롱은 꽃을 피워올리는 가지 품이 넉넉하고 자태 역시 매끈하다. 땅에서 올라온 가지가 다섯인데 두 가지는 서로 끌어안고 있으니, 사이좋은 부부와 세 아들딸의 모습이다.
사철 푸르지만, 소나무가 짙푸른 하늘의 흰구름 송이를 걸치면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다. 오죽헌 율곡송 위로 하늘이 푸르고 흰구름이 꽃송이로 피어나니, 이 또한 승천하는 용이다. 그래서 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는 오죽헌의 몽룡실을 마주 보는 율곡송은 소나무이며 율곡이고, 사임당 꿈속의 용이며 소나무이다. 그렇게 높고 깊은 푸른 하늘의 흰구름을 꽃송이로 걸친 율곡송은 오죽헌의 가을 나무이다.
오죽헌 담장 가까이의 노송들 가지가 오죽헌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일부러 그리 다듬었거나, 죽은 가지를 자른 흔적도 없다. 또 한두 그루도 아니니, 이는 분명 글만 읽고 외운 선비가 아니고, 대장간을 차려 호미, 낫, 괭이를 벼린 율곡에 대한 경배이리라. 더하여 문성사와 몽룡실을 향해 허리를 숙인 율곡송에게 예의와 품격을 배우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오죽은 까마귀처럼 줄기가 검어서 얻은 이름이다. 우리 인간처럼 60여 년을 살고 꽃이 피면 생을 마친다는 이 오죽은 오죽헌의 상징이다. 사철 푸르나 한겨울 흰 눈을 이면 기품이 더 빛난다. 그러기에 댓잎을 스치면 바람도 노래가 되는 법이니, 오죽은 겨울나무이다.
그렇게 율곡매, 사임당배롱, 율곡송과 오죽을 둘러보고 나오니, 담장 밖 붉은 단풍이 유난히도 핏빛이다. 다른 나무 아래는 늦가을 낙엽이 수북한데, 이 단풍은 붉은빛 그대로 청정하다.
핏빛 단풍을 보다 문득 오죽헌 문성사 대문 옆의 박정희가 심은 주목나무가 생뚱맞구나 한다. 오가는 나그네에게 주목하라고 심은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율곡과 사임당의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닐진대…. 율곡은 ‘격몽요결’에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 이 네 가지는 몸을 닦는 요점이다’고 썼다. 예로부터 사당 건물은 입구자 형태로 짓기에 그 안에 나무가 있으면 괴로울 곤(困)자가 되기에 나무 심기에 신중을 기한다. 따라서 그게 누구건 남의 집 사당 안에 함부로 기념식수를 하는 건 한 마디로 예가 아니다.
아! 지리산이나 태백의 산록에 치솟지 못하고 담장 곁에 주눅 들어 염치없이 계륵으로 서 있는 오죽헌의 주목이 참으로 가엾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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