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7 (금)

“光州鄕校 儒風 진작… 지역사회와 연계 강화”

오 기 주 제 30대 광주향교 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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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12.3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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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무투표 당선으로 광주향교 제30대 전교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임기는 2022년 1월 1일부터지만 취임식은 1월 7일로 알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취임 인사 겸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불민한 저 오기주에게 광주향교 유림의 대표요 광주 유림의 수장이라는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저 개인으로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막중한 책무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깊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거듭 감사 말씀 올립니다.
열과 성을 다하여 광주 유림이 하나되고 시민이 인정하는 향교 본연의 본래 기능과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무투표 전교로 당선되시기까지 많은 정열과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점들이 지금 이 자리 전교님의 바탕이 됐을까요.
제가 유림 활동을 하게 된 경위를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장사집도 아니요 기업가의 집안도 아니요 당시 천하지대본의 농사만 짓는 유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했고 유학을 실천하면서 자랐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유가의 실천이 몸에 배어있는 유림입니다. 그 때 일찌기 한문공부를 하였습니다. 겨우 4서(書)까지는 읽었어요. 그러나 공부냐 취업이냐 하였으나 취업하기로 하고 취직공부를 해서 중간에 진로를 바꾸었어요. 직업생활에 몰입하다 보니 많이 잊었습니다만, 중국 역사 책 사략(史略)에 이런 구절만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일반지덕필상(一飯之德必償)하고 애자지원필보러라.’ 어려운 생활에 처했을 때 밥 한술 준 공덕도 상으로 갚고, 흘겨보는 눈초리로 눈꼼질하거나 눈깔질했던 사소한 원수도 반드시 갚았다는 구절입니다. 저는 꿈을 이루고 가계를 이으기 위해서 공무원이 되기로 하고 그 분야 공부를 하여 당시 5급 을류 (지금의 9급) 공채 시험 합격으로 공무원을 시작하였습니다. 내 고향 삼도 면사무소 근무를 시작으로 광산구청, 광주시청 전입시험에 응시하여 시청으로 전입 선발되어 시청 환경녹지국, 도시계획국, 건설본부 서무계장 근무를 하다가 남구청 개청 요원으로 발탁되어 남구청에서 근무하면서 사무관 승진 경쟁 시험에 합격, 동장(洞長), 과장(課長)으로 근무(勤務)하였으며, 세월의 흐름에 어쩔 수없이 남구의회사무국장(南區議會事務局) 서기관(書記官)으로 정년을 하였습니다. 비록 서기관으로 정년(停年)했으나 저는 자부를 갖고 있습니다. 공채 시험으로 시작했고 경쟁 시험으로 승진했고 마지막에 대한미국 정부에서 서기관을 임명을 받았으면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서는 누가 뭐라 해도 성공한 케이스라 여기고 있습니다.현대는 평생교육, 즉 생애교육의 시대입니다. 저는 직업을 갖고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부족했던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 왔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 형설지공(螢雪之功)을 꾸준히 하여 정년 후에도 기회가 주어지면 쉼 없이 공부하였으며 한문특급지도사 자격도 취득하였으며, 고희(古稀)의 만학(晩學)에 학위(學位)도 영득(榮得)을 하였습니다. 저는 후회(後悔)가 없습니다. 왜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마음으로 최선(最善)을 다하는 정신력(精神力)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무엇이고 다 하였고 또한 성취(成就)하였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평생교육, 즉 생애교육의 시대입니다. 춘화현상(春花現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을 겪고 이겨내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유림에 발 딛게 된 것은 1991년 당시 청년유도회장 이형호 선배께서 입문을 권하셨습니다. 그 분 말씀이 제(弟)씨는 유학에 관심과 실력도 상당하니 청년유도회에 입문하여 도움을 주고 동행하면 좋겠다고 하시기에 평소 관심도 있고 해서 흔쾌히 수락하고 동참을 하였습니다. 당시 청년유도회 부회장 그 뒤 회장을 맡아서 활동하면서 선배유림 제현님을 나름 깍듯이 모셨습니다. 선배 유림의 도움과 성원으로 유학대학을 설립하였고 성년의 날 행사를 시행, 시작하였고 대성전 주변 조경에도 협력하였고 명륜당 뜰 잔디 조성에도 협조를 하였습니다.
▲취임 후 하고자 하시는 일이 많을 것 같은데요. 가장 중점을 두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의 임기중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해 주력(注力)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흐트러진 기강을 회복하여 광주향교(光州鄕校)의 유풍(儒風)을 진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1990年代 중반 광주향교대학(光州鄕校大學) 설립(設立)을 주도(主導)했던 사람으로 향교(鄕校)에서 강학기능(講學機能)을 크게 진작시키겠습니다.
셋째, 광주향교(光州鄕校)와 지역사회(地域社會)와의 연계를 강화(强化)시켜 시민(市民)과 함께하는 향교(鄕校)가 되도록 노력(努力)하겠습니다.
넷째, 향교(鄕校)를 중심(中心)으로 하는 제(諸) 단체(團體)간의 관계(關係)와 위상(位相) 및 역할(役割)을 재정비(再整備)·조정(調整)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섯째, 모든 정책(政策)과 행정(行政)의 집행은 규정(規定)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제도화(制度化)하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광주향교(光州鄕校)가 더욱 투명해지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향교 유래에 비견되는 역사적 가치와 현대 사회에서 유교의 역할이 있다면 어떤 점들이 있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향교 유래는 조선시대 국가이념이었던 공자(孔夫子)이 가르침인 유교사상을 널리 알리고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자 조선 왕조 초(태조 7년)에 전국 지방에 건립됐습니다. 역사적으로 유교 이념이 계승돼 오면서 충.효 사상이 고양됐고 인.의.예.지.신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이념들이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훌륭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향교의 기능적인 면을 보면 문묘 향사, 교육기능, 사회 교화 기능 등이 있는데 문묘 향사는 조선 후기에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향교가 존속하게 된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행사가 석전제(釋奠祭)입니다.
이로써 조상과 웃어른들에 대한 효사상이 고취됐습니다. 교육기능은 향교는 처음에 향촌 교화와 과거를 통한 인재양성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건립되었기 때문에 향교교육은 제도적으로 과거 제도와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대사회에 교육의 중요성과 향학열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교화 기능은 향교는 ‘풍화지원(風化之源)’으로서 향촌사회를 교화시키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향교는 향악을 주관하여 실시하였고,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함으로써 지방의 풍속과 기강을 확립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사회정화 작용의 선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밖에도 서당 체험, 전통 혼례, 유학대학 운영 등 대중문화와 접점을 꾀하고자 지속 추진 중이고 향교 내에 유치원, 노인정(쉬터) 등을 개설해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끝으로 오 전교님이 향후 개선하거나 하고 싶은 덕목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왕왕 무슨 일을 처리하려면 정통성의 시비가 야기됩니다. 이를 불식하기 위해서 유림 총회를 한 번씩 소집하려면 어려움도 없지 않습니다. ‘광주향교 유림은 하나다’라는 명제 하에 일을 하고자 합니다. 단합하면 못할 일도,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먼저 대원 김중채 전교님께서 창안하시고 운영하셨던 규제위원회를 가칭 ‘유림윤리위원회(儒林倫理委員會)’로 개편하여 지속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허위 사실로 상호 모략하거나 유언비어 등으로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유림으로서 품위 손상을 자행하거나 사문난적의 행위자 등에게는 연령의 다소, 지위의 고하를 불문하고 소위 징벌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행위가 심하거나 반성의 정황이 없는 유림에게는 부득이 타율에 맡길 수도 있도록 할 것입니다.
사람이 만능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규정에도 있으나 전예위원회(典禮委員會)를 구성하여 운영, 전례 절차 등에 이견이 있거나 애매한 사항은 토의하고 협의하여 절차의 시비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유림대상추천위원회(儒林大賞推薦委員會)’를 구성, 공정성의 시비가 없도록 하여 유림의 공감을 제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상(大賞) 대상자의 선정 추천 또는 공로패 감사패 수여시에도 위원회의 심의를 받도록 할 것입니다.
유림단체의 ‘(가칭)임원적격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각 단체에서 진영논리로 편 가르기를 자행하는 불합리를 지양하고 다수 유림이 공감하는 단체장이 선임될 수 있도록 사전 조율하여 전체유림의 지지로 단체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교단체 가입 활동하는 유림은 단체 임원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음을 공지하는 바입니다.
다수 유림이 불합리한 점이 있다고 불평하는 각 단체의 규정(회칙)을 전체 유림이 공감할 수 있도록 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각 단체에서 전임위원을 1명씩 선정하여 합동으로 새로운 안을 만들어 개정하도록 하며 모든 유림은 향교직제(규정)의 대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각 단체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장시간의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끝맺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불민하고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광주향교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인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또 날씨가 고르지 않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기 부탁 말씀 드리고 임인년 새해에도 유림을 비롯해 여러분 가정에 화평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전기에 창건 ...중등교육과 지방민 교화
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서석산(瑞石山) 장원봉(壯元峰) 아래에 창건되었다.
호환(虎患)이 있어서 동문 안으로 옮겨 세웠다가, 1488년(성종 19)에 수해(水害)로 현감 권수평(權守平)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에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그 뒤에 중건한 것이다.
1974년에 대성전을 보수하고 단청하였으며, 1976년에 동·서재와 1978년에 명륜당을 보수하고 1981년에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동재·서재·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비각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외삼문 밖에 있는 비각에는 흥학비(興學碑)와 중수비(重修碑)·위성묘비(衛聖廟碑) 등이 있는데, 흥학비는 1563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대승(奇大升)이 찬기(撰記)하고 박광옥(朴光玉)이 음기(陰記)를 찬하였다.
중수비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1803년에 목사 김선(金銑)이 중수하고 교리 기학민(奇學敏)이 찬기한 것이며, 또 하나는 1855년에 목사 홍재응(洪在應)이 중수하고 기정진(奇正鎭)이 찬기한 것이다. 위성묘비는 권일제가 성묘를 지킨 것을 1843년에 목사 조철영(趙徹永)이 그 기(記)를 새겨 세운 비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소장 전적은 189종 306책으로 주로 경서와 문집류이며, 필사본인 ‘관안(官案)’·‘광주유림안(光州儒林案)’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인터넷 홈 페이지가 개설돼 접근성이 용이해졌으며 전통혼례, 서당 체험, 기타사항 등 문의는 향교 사무국 062-672-7008번으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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