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17 (일)

만민공동회 투쟁… 17명 독립협회 지도자 석방

대한제국망국사(14회)/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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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10.1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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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1월 4일 박정양 내각은 독립협회에 공문을 보내어 11월 5일까지 25명의 중추원 의관을 선출하여 명단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11월 5일에 독립관에서 중추원 민선의관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
그런데 11월 4일 밤에 ‘익명서(匿名書)’가 서울 광화문과 시내 곳곳에 게첨되었다. ‘익명서’에는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목적은 황제를 몰아낸 후, 대통령 박정양 · 부통령 윤치호 · 내부대신 이상재 등을 내세워 공화제 국가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는 의정부 찬정 조병식,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 법부협판 이기동 등이 꾸민 ‘익명서 조작 사건’이었다.  
그런데 조병식 등은 고종에게 ‘익명서’를 보이면서 독립협회가 황권을 폐하고 공화제 국가를 만들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익명서’를 읽은 고종은 즉각 독립협회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독립협회 간부 20명의 체포령을 내렸다. 아울러 고종은 ‘헌의 6조’에 서명한 박정양 등을 파면시키는 동시에 친러수구파인 조병식을 의정부 참정 겸 법부대신 임시서리로, 민종묵을 외부대신 겸 내부대신 임시서리로, 박제순을 농상공부대신으로, 김정근을 경무사로 임명했다.
조병식과 김정근은 11월 4일 밤중부터 11월 5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이상재(독립협회 부회장), 정교, 남궁억, 이건호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체포했다. 다행히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와 최정덕, 안영수는 체포당하기 직전에 도피하였다.
아펜젤러 집으로 피신한 윤치호는 11월 5일의 일기에 고종 황제에 대한 배신감과 러시아·일본의 배후세력 흉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의 관보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해임시킨 칙령을 공포했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 노예 유기환과 친러 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 없이 모종의 알짜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를 지원하고 있다.
저주받을 왜놈들! 그들이 대한의 마지막 희망인 독립협회를 분쇄시키는 데 러시아인들을 돕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을 나는 참으로 희망한다” (윤치호, 윤치호 일기, 1898년 11월 5일)
실제로 일본공사 대리는 ‘대한제국 황제가 독립협회 해산에 사전 동의했다’고 일본 외무성에 보고하였다.
삽시간에 서울 시내에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었으며, 박정양 내각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러자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동요했고, 맨 먼저 배재학당 학생들이 경무청 문 앞에 도착하여 항의 시위를 하였다. 이어서 영어학교와 일어학교 학생들도 경무청 앞으로 밀려왔고, 뒤이어 독립협회의 회원과 시민들 그리고 황국중앙총상회 회원들과 한국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贊襄會) 회원들도 합류하였다.
11월 5일 오전, 경무청 문 앞에는 삽시간에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하였고 자연스럽게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만민공동회에서 시민들은 임병길 등 5명을 총대 위원으로 선출하여 경무사 김정근에게 독립협회 지도자 체포를 항의하고 사건 경위의 해명을 요구하였다. 시민들은 분개해서 다투어 연설을 한 다음 ‘체포와 투옥을 자원’하기로 결의하고, 체포당한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자기들도 체포해 달라고 다투어 요구하였다. 경무사는 당황하여 시민들은 체포대상자 명단에 없으므로 체포할 수 없으니 해산해 줄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았고, 오후에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종로의 시전상인들도 철시하여 고종 황제와 수구파 내각의 처사에 항의하였다.
수구파 내각은 경찰 무력으로 시민을 해산시키고자, 순검을 내보내어 칼을 뽑아서 시민을 위협했다. 그런데 시민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으므로 순검들이 놀라 경무청 안으로 도망하여 들어왔다.
경무청 문 앞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수구파 내각은 다급하여 시민들을 설득시켜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완강히 해산을 거절하고 모닥불을 피워 놓고 철야농성을 시작하였다.
밤은 깊어 가는데 곳곳에 핀 모닥불이 일대를 대낮같이 밝힌 속에서, 만민공동회를 연 서울 시민들은 ‘독립협회 회원 석방’ 아니면 ‘자원취수’해 줄 것을 소리 맞춰 외쳤다.
서울의 외국인들도 낮부터 나와서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국민들의 애국적 의기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날 밤 만민공동회에는 각 곳에서 의연금과 의연물이 답지하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은 장국밥 3백 그릇을 보냈고, 시민과 상인들이 은화를 보내어 온 것은 다 셀 수 없으며, 외국인들까지도 성원을 보냈다.
이날 밤 시민들은 일치단결하여 경무청 문 앞에서 밤을 세웠다.
만민공동회 2일째인 11월 6일에는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모두 철시하고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였고 시민들은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했다.
11월 7일 아침 6시경에 경무청은 이상재 등 17명을 고등재판소로 이송하였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고등재판소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외부대신 민종묵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는 것에  양해를 구하기 위해 각국 공사관을 순방하였다. 그런데 영국 총영사와 미국 공사가 군대 동원에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만민공동회는 고등재판소장에게 이상재 등 17명의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날 오후 경무사가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만민공동회는 “17명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하고 물러가지 않았고, 고등재판소 문 앞에는 시민들이 더욱 많아졌다.
특히 각 학교 학생들은 학부(學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수 참가하였는데, 11세의 소학교 학생 장용남의 “피를 토하는 연설”이 화제였다.
이처럼 만민공동회 참가자가 수만 명에 이르자, 고종과 수구파는 크게 당황했다. 
11월 8일엔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다. 시민들은 찬비를 맞으면서도 고등재판소 문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철야했다.
고종은 이날 중추원 의장 한규설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장에 임명하여 정책 전환의 조짐이 보였다.
11월 9일 오전 9시경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은 군대 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 탄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친위대 2개 중대 병력을 투입해서 탄압을 획책했다가 실패하였다.
이날 구경나온 외국인들은 만민공동회의 시위와 시민의 호응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외국공사·영사들도 외부(外部)를 방문해서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초를 선 군인들까지도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했으며, 이날 밤 만민공동회를 포위하고 있던 200명의 군인들은 스스로 해산하여버렸다.
심지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나온 한성부 관리들까지도 수구파 정부의 모략을 개탄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하였다.
한편 전 승지 윤길병 등이 상소를 올렸다.
“이상재 등 17인을 경무청에 가두었다가 곧 법부에 넘겼습니다. 신 등이 삼가 생각건대 저와 같이 잡힌 17인은 바로 신 등과 일체 공적도 같고 일체 죄를 지은 것도 같습니다. 때문에 모두 자수하여 옥에 갇히려고 법부의 문 앞에서 4, 5일간 풍찬노숙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경무사 신태휴가 신등을 타이를 때 소매 속에서 익명의  투서를 꺼내서 보이고, 또 이름을 적은 목록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 투서가 간사한 무리들이 음모를 꾸며 모함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 글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백성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터인데 유독 한 사람만이 먼저 보고서 임금에게 보고하였으니 너무나 의아합니다.
 아래에서 재판을 받게 하소서”
(고종실록 1898년 11월 9일)
이날 밤도 시민들은 추위와 찬비 속에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철야했다.
만민공동회 6일째인 11월 10일에 대세는 결정적으로 만민공동회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시위가 계속되자 고종은 조병식·민종묵·유기환 등을 해임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법부대신 한규설을 불러들여 독립협회 17명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가 묻고 재심까지 끝났다는 대답을 듣자, 즉시 돌아가 판결해서 마무리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윽고 법부 대신 한규설이 피고 이상재 등 17명은 대신을 위협하고 재판을 강청한 죄가 있으므로 17명 전원을 태형 40대에 처한다고 선고했다고 아뢰자, 고종은 칙임관·주임관으로서 실직(實職)이 있는 사람만 속전(贖錢)을 물도록 하고 나머지는 속전도 면제한다고 제칙을 내려 17명 전원을 즉각 석방하였다. (고종실록 1898년 11월 10일) 
이로써 만민공동회의 6일간의 투쟁으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석방되었다. 시민들은 감격에 넘쳐 서로 붙들고 울며 만세를 소리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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