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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중운동에 의한 대한제국 개혁 정부 수립
    1898년 9월 11일에 ‘김홍륙 독다사건(毒茶事件)’이 터졌다. 고종 독살 미수사건이었다. 고종과 황태자(후에 순종)는 저녁 식사를 양식으로 먹은 뒤 커피를 마셨다. 1896년 아관파천 시절부터 커피를 좋아한 고종은 커피 냄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한 모금을 입에 넣자마자 뱉었다.그런데 황태자는 그냥 몇 모금을 마셨다. 조금 있다가 황태자가 토하고 쓰러졌다. 궁중은 아수라장이 됐다.9월 12일에 고종은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경무청에 지시했다.14일에 법부대신 신기선이 아뢰었다.“방금 겸임 경무사 민영기가 ‘죄인을 신문하는 즈음에 종신유형 죄인 김홍륙이 죄인의 구술에서 나왔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김홍륙을 잡아다 심문해야 하는데, 특지(特旨)로 인한 유배죄인이므로 감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삼가 아룁니다.” 이러자 고종은 “잡아다 심문하라”고 명령했다. 김홍륙은 함경도 사람으로 조실부모하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부 생활을 하면서 러시아어를 익혔다. 그는 1895년에 이범진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러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러시아어 통역관이 돼 출세의 기회를 잡았다. 김홍륙은 1896년 아관파천 시절에는 비서원 승으로 근무하면서 고종의 전담 통역관이 됐다.이리하여 김홍륙은 1896년 11월 15일에 학부협판(차관)으로 승진했고, 1897년 12월 18일에는 귀족원 경(卿)에 임용됐다.만민공동회가 개최된 1898년 3월 10일 다음 날인 3월 11일에 고종은 김홍륙을 한성부 판윤에 임용했다.그런데 김홍륙은 고종의 총애와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탐해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그를 규탄하는 방서(榜書)가 나붙기도 했다.8월 23일에 고종은 김홍륙이 탐오한 것을 추궁해 유배하라고 명했고, 8월 25일에 김홍륙은 흑산도로 종신 유배를 갔다. 이러자 김홍륙은 흑산도로 떠나는 날에 고종 독살 음모를 했다.“김홍륙은 유배지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한 냥의 아편을 전선사(典膳司)의 책임자 공홍식에게 주면서 수라상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했다. 이후 공홍식이 김종화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藥物)을 고종에게 올리는 차(커피)에 섞어서 올리면 은(銀)1000원(元)을 주겠다고 말했다.김종화는 일찍이 경운궁 보현당 고직(普賢堂 庫直 창고지기)으로서 서양 요리를 만들었는데, 요리를 잘하지 못해 내쫓긴 자였다. 김종화는 즉시 아편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됐다.”(고종실록 1898년 9월 12일)김홍륙 독다사건이 일어난 지 1주일이 지난 9월 18일에 현학표 등은 역적을 엄중히 다스리도록 연좌(連坐)와 노륙법을 부활하라고 상소하였다. 연좌제는 죄인뿐만 아니라 그 아내와 아들 그리고 친족까지도 연대적으로 처벌하는 제도이고, 노륙법은 죄인의 아내와 아들도 참형을 적용시키는 법으로 이 법들은 이미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9월 23일에 의관 서상우 등이 중추원 회의에서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을 주장하였다. 이에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신기선 이하 의관 34명이 동조하여 정부에 정식으로 요구했다. 9월 24일에는 서상우를 소두(疏頭)로 하여 상소까지 하였다.  그런데 경무사 민영기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부녀자와 무고한 사람들까지 무참히 고문하였고, 고문을 받던 공홍식은 자살을 시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자 독립협회가 반발하고 나섰다. 비록 김홍륙 같은 역적이라도 법률에 의해 처벌되어야 하고 고문은 용납될 수 없으며, 연좌와 노륙법 부활은 절대 불가라고 주장한 것이다. 9월 25일에 독립협회는 반역사건을 규탄하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인에 대한 고문과 이미 폐지된 노륙법과 연좌법의 부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9월 26일에 독립협회는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신기선에게 공한을 보내 의장과 서명한 의관의 사직을 요구하였다. 9월 27일에 신기선은 갑오개혁이후 역적을 다루는 데 교수형만 적용시키니 역변(逆變)이 그치지 않아 노륙법을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고, 또 대신의 진퇴는 협회가 말할 바가 못 된다고 답신하였다.10월 2일에 독립협회는 중추원 앞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대표를 뽑아 신기선에게 보내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의 부당성을 논하고 신기선의 사직을 권고하였다. 신기선이 불응하자 독립협회는 신기선을 고등재판소에 고발하였다. 고발장을 접수한 고등재판소는 독립협회에 회답하였다. “법부대신과 협판은 칙임관이므로 그의 구금에는 먼저 법부대신이 황제에게 상주한 후에야 구금할 수 있는데 법부대신 신기선 자신이 피고이므로 상주할 사람이 없어 기술적으로 이를 처리하기 어렵다.” 이러자 10월 6일에 독립협회는 고등재판소 앞에서 다시 민중대회를 열어 고종에게 상소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 의정부 의정 심순택이 고종에게 법부대신 신기선을 면직(免職)토록  아뢰었다. 이에 고종은 “옥사(獄事)가 한창 진행 중이므로 일에 서투른 사람에게 맡기기가 어렵다. 특별히 용서하고 한 달분 녹봉을 감하라.”고 하였다. 고종이 신기선에게 1개월 감봉 조치만 내리자, 독립협회는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10월 7일에 독립협회는 거듭 상소를 올려 신기선등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종은 도리어 독립협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법부와 중추원을 두둔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더욱 강경해졌다. 이들은 법부대신 신기선, 이재순·민영기 등 일곱 대신의 파면 운동을 전개하였다. 10월 10일에 독립협회의 윤치호 등은 경운궁 앞에서 농성을 계속하면서 신기선 등 일곱 대신의 파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날 반역음모죄인 김홍륙·공홍식·김종화 등은 모두 교수형(絞首刑)에, 김영기·엄순석·김연흥·김흥길·강흥근·김재택·조한규·김재순 등은 태형(笞刑) 50대에, 김홍륙의 아내 김소사는 태형 100대에 유배 3년에 처해졌다. 그런데 외국 공사들도 러시아 공사 마튜닌을 중심으로 김홍륙독다사건의 처리에 공동으로 항의하기로 하고 각 공사관별로 항의 공문을 외부(外部)에 보냈다.  일본 공사도 ‘김홍륙등 처형상황에 대한 반성 촉구’ 공문을 외부대신에게 보냈는데 이를 읽어보자. “서신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번에 궁내(宮內) 독극물 사건의 피고 김홍륙 등에 대한 재판과 형의 집행이 지극히 비밀리에 신속하게 시행된 것은 단적으로 말해 부정한 사정이 존재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김홍륙의 시체를 가두(街頭)에 드러내어 무법한 군중으로 하여금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만행을 자행하게 한 것은 인도(人道)에 위배되는 행위라 하여 세간에서 비난받고 있습니다.이것이 사실이라면 귀국 재판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또 빠르고 신속하게 문명의 단계에 도달하려는 귀국의 체면을 훼손시키는 것으로서, 본 대사관은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법사(法司)의 책임과 인도의 통의(通義)에 비추어 소감을 말씀드려 귀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고자 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3권) 이러자 고종은 법부대신 신기선과 판사 이인우를 파면시키고 의정부 찬정 서정순을 법부대신으로 임명했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11일)  이 날 농성 중인 의관 윤치호가 다시 심순택, 윤용선 등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10월 11일에도 독립협회는 경운궁 앞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종로 시전 상인들도 모두 철시하고 농성에 가담하였다. 농성 중인 윤치호는 상소하여 심순택, 신기선 등 일곱 대신의 파면을 거듭 촉구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집단농성에 불쾌했다. 10월 12일에 고종은 소두(疏頭) 윤치호를 중하게 견책하도록 명령했다.하지만 이날은 소학교(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참여하여 농성 참가자는 1만 여명으로 늘어났다. 경성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궁지에 몰린 고종은 의정부 찬정 박정양을 의정부 의정 서리로, 조병호를 탁지부 대신으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으로 임용하였다. 결국 심순택, 신기선 등 일곱 대신은 파면되었고,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도 사라졌다.10월 12일 저녁에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 각국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에서 민중운동에 의해 개혁 정부가 수립된 사실에 놀랐다.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평화적 혁명’이 일어났다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할 정도였다.“이 도시는 지금 막 집중적 열광의 시기를 통과했음을 보고함. 하나의 평화적 혁명이 일어남. 군중들의 요구에 의하여 거의 전면적 개각이 이루어짐. 이러한 내각의 변동은 1894년 일본이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했을 때 일어난 일이 있었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1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탐구당, 2003, p 353)
    • 기획.연재
    2021-09-07
  • 삶, 숨, 쉼터, 나무이야기/명옥헌 배롱나무
      피어나는 꽃치고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다. 하지만 지는 꽃이 아름다움의 칭송을 얻기는 힘들다. 백공작이라는 백목련도 질 때의 모습은 별로이다. 화무십일홍의 비유가 괜스레 생겼을까? 그럼에도 봄날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의 정취는 아련한 그리움이다. 또 동백꽃은 어떠한가? 이른 봄 눈 위에 떨어져서도 시들지 않은 모습의 붉은 꽃은 핏빛 사랑이다. 또 있다. 우리나라에 고려 말 무렵에 들어온 배롱꽃은 떨어져서 더 아름답다. 베롱꽃의 백일홍이란 이름은 백일동안 핀다고 해서 얻은 이름인데, 꽃이 다 질 때쯤 벼가 여물어 쌀밥나무라고도 한다. 또 살살 문지르면 바람이 없어도 가지가 흔들려서 간지럼나무라고도 하니, 파양화(怕痒花), 파양수(怕癢樹)란 이름이 그것이다. 후자탈(猴刺脫)은 나무껍질이 매끈해 원숭이도 미끄러진다 하여 얻은 이름이고 또 만당홍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매끈하고 깨끗한 수피 덕분에 청렴결백한 선비의 모습과 비슷하여 정자나 사당, 향교, 절집, 무덤가에 심었다. 이 배롱꽃의 한자는 자미화이다. 당나라 현종이 이 배롱꽃을 좋아하였다. 궁궐의 중서성, 상서성, 문하성에 배롱을 심고 자신이 업무를 보던 중서성을 ‘자미성’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색 백일홍을 자미(紫薇), 흰꽃을 백미(白薇) 또는 은미(銀薇), 붉은색을 홍미(紅薇), 비취색을 취미(翠薇)라 했다. 이중 취미와 은미를 본다면 한 해 배롱꽃을 다 봤다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희안은 ‘비단같이 아름답고 노을처럼 고운 홍미가 뜰을 비추며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한다’고 했다. 성삼문은 ‘어제저녁 한 송이 지고(昨夕一花衰), 오늘 아침 한 송이 피어(今朝一花開),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相看一百日), 내 너를 대하며 술잔을 들고 싶다(對爾好衡盃)’고 했다. 백일홍의 꽃잎과 꽃받침이 모두 여섯 장씩이니, 사육신의 숫자와 같음이 또 경이롭다. 신말주의 10대손으로 조선 후기 학자인 신경준은 순원화혜잡설(淳園花卉雜設)에서 ‘오늘 하나의 꽃이 피고 내일 하나의 꽃이 피며 먼저 핀 꽃이 지려 할 때 그 뒤의 꽃이 이어서 피어난다. 많고 많은 꽃잎을 가지고 하루하루의 공을 나누었으니 어찌 쉽게 다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렇게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뜨거운 여름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꽃이 배롱꽃이다. 이 배롱꽃이 아름다운 곳이 여러 곳이다. 그중 먼저 가볼 곳이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번지의 명옥헌이다. 오희도(1583-1623)는 1602년 사마시, 1623년(인조1) 알성문과에 합격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이곳 명옥헌은 그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집을 짓고, 명옥헌이라 했다. 이곳 장계정은 오이정의 호와 같다. 명옥헌의 배롱꽃은 장계정 앞의 연못과 어울려 더 아름답다. 나무에 피어있을 때는 물 위의 그림자이고 떨어져 물 위에 있을 때는 나무의 그림자이니, 명옥헌 배롱꽃은 나무에 있거나 물 위에 있거나 모습이 하나이다. 삶도 죽음도 아름다운 모습이니, 이 세상에 그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또 어디 있겠는가? 명옥헌 배롱꽃을 보지 않고 배롱꽃을 봤다고 하면 웃음거리이다. 뜨거운 여름, 불볕더위를 잊을 수 있는 꽃이 또 붉은꽃 배롱꽃이니 이열치열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2021년 8월 염천, 명옥헌에서는 만개한 배롱꽃말고도 청아한 연꽃을 덤으로 볼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는 또 이런 때 쓰는 말이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9-02
  • 사람 사이 상식이야기/당부 씩이나? 드리기 씩이나?
    돌림병이 창궐하면서 두드러진 것이 있습니다. 방역 담당 공무원들이 언론에 자주 나오더군요. 먼저 우리나라에 공무원이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런데 직책 명칭뿐 아니라 말하는 내용까지 베낀 듯 비슷해 실망스럽더군요. 암기할 정도가 된 방역수칙을 쏟아내고, ‘확산세가 심각하다’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병상 수가 부족하다’ ‘최대한 자제해 달라’ 따위를, 지치지도 않고 앵무새나 녹음기처럼 떠듭니다.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이런 ‘있으나마나’한 공무원들 행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 단어 즉 ‘당부(當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당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단단히 부탁함. 또는 그런 부탁’이라고 나오지요.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당연(當然)히 해야 할 것을 부탁한다’ 정도 되겠습니다. 즉 어느 정도 ‘강제’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지요. 누군가에게 뭘 부탁할 때는, 그 대상자가 시행 여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공무원(최고위급부터!)이란 자들이 국민들을 향해 ‘당연히’ 이렇게 하라고 말(지시·명령·하달)하는 것이 괜찮겠습니까? 더구나 ‘드리기’까지 끼워 넣어서 말이지요!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면, 그 내용을 법적 근거에 따라 고지하면 됩니다. 지금은 갇혀 있는 신세인 최고 권력자가 지난 날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당부드립니다’라고 ‘당연한 듯’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참으로 절망스러웠던 것은, 그 많은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그에 대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어른이 애 머리 쓰다듬으면서 “이리저리 해라 응?”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데도 “끽”소리도 하지 않은(못한?) 것입니다. 아예 아무 것도 몰랐건, 모욕에 꿈틀도 못했건, 호천망극·황공무지라고 받아들였건, 심각한 문제 아닌가요?당부는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당연히 해야 할 것을 요구할 때 쓰는 말입니다. 공무원이 국민들에게, 식당 주인이 고객들에게,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공인이 지지자들에게 “내지를” 말이 아니지요. ‘부탁·요청합니다’ 정도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해주세요’면 최선이겠지요. 높으신 나으리들! 내용도 그렇지만 표현 방식도 엄밀히 살피시기를 ‘신신당부’드리노라! 
    • 기획.연재
    2021-08-31
  • “소상공인 코로나19 피해 회복 100조 프로젝트 가동”
    ▲대선 출마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 - 문재인 정권의 무능과 위선, 조국과 윤미향의 내로남불, 집권 586세력의 횡포를 보며 이들에게 대한민국이 더 이상 유린되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586의 델타변이 이재명의 지지율 1위 현상을 목격하고 586 백신인 원희룡이 나서서 반드시 이재명의 집권을 막고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국민의힘 당내에서 아직까지는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지지율 정체를 돌파할 복안 있나. - 이제 곧 경선버스가 출발한다. 앞으로 치열한 검증과 토론을 거치며 각 후보들의 지지율도 크게 요동칠 것이다. 지금까지는 국민들이 문재인 정권과 누가 잘 싸웠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윤석열, 최재형 후보의 지지율이 조금 높게 나오고 있지만, 결국에 누가 문재인보다 더 잘 할 것이냐, 누가 이재명 지사와 맞붙어 이길 수 있는 사람인가 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될 것이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다. 조급해 하지 않고, 우리당의 경선 레이스를 생산적인 정책 비전 경쟁으로 이끌겠다. 찬바람 불고 경선이 본격화되면 준비된 후보 원희룡의 진가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의 경선과정에 막말주의보가 내려진 상황이다. 국민의힘 경선 과정에서는 어떨 것이라고 보고 있나. - 여야 가릴 것 없이 이번 선거는 역대 최고의 네거티브 선거가 될 것이다. 벌써부터 각 후보사이에 막말, 말꼬투리 잡기, 상대방을 헐뜯는 네거티브 등이 시작되고 있다. 막말이라는 것이 별거 아니다. 누군가와 논쟁할 때는 논점에 대해서 토론해야 한다. 약점을 잡아 비난하고 공격하는 건 토론이 아니라 싸우자는 얘기다. 지금 민주당의 상황을 보라.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보다 ‘문비어천가’만 부르기 바쁘고, 서로 헐뜯고 약점을 잡아 공격하고 몰아세우는 전형적인 구태정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제 곧 우리당도 경선이 시작된다. 민주당의 경선을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이다. 치열한 검증과 토론을 진행하되, 생산적인 정책과 비전 경쟁이 중심이 되도록 저부터 노력할 것이다. ▲최근 이준석 당 대표와 벌였던 녹취록 공방은 일단락 된것 같다. 어떤 의도였나? 당 선관위도 곧 출범하는데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 우선 공정 경선을 지키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기는 하나, 그것이 당내 분란으로 비춰지고 그 과정에서 당 대표와 후보간에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저도 후보 중 한사람으로서 국민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준석 대표가 직접 공정경선 잘 지켜가겠다 약속하고 사과까지 한 일이니 이 정도면 잘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선관위원장도 결정되었으니, 저부터 심기일전해서 적극 협력하고 공정경선을 통해 치열한 경선과 원팀 정신으로 정권교체 이룰 수 있도록 겸허한 자세로 임하겠다. 국민들 보시기에 공정하면서도 치열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정책 대안으로 넘쳐나는 경선 과정이 될 수 있도록 잘 관리해 주시리라 믿는다. ▲대선 후보로서 어필하고 싶은 자신의 브랜드가 있다면? 대표공약은? - 원희룡의 핵심 브랜드는 ‘국가찬스’다. 조국으로 대표되는 ‘부모찬스’ ‘기득권 찬스’를 갖지 못한 국민들에게 국가찬스를 드리겠다. 코로나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회복을 돕는 ‘담대한 회복 100조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 집권 직후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을 통해 50조원을 마련해 손실보상에 사용하고 2차 년도 이후는 통상적인 예산 배분에서 해당 기금 확충에 우선순위를 두는 방식을 사용한다. 담대한 회복프로젝트는 단순히 생존회복에만 그치지 않고, 자영업의 구조전환과 생산성 혁신으로 이어지도록, 낙후 업종 전환, 디지털 전환 경쟁력 강화, 대형화를 통한 경쟁력 확보, 종사자들의 사회보장과 교육 강화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물론 추가 세입 발생시 이 기금에 대한 국가부채를 최우선 변제해 재정건전성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도 함께 병행하는 계획이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잘한 일은 꼽을 만한 게 별로 없고, 잘못한 일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문재인 정부는 공정을 약속했지만 배신했다. 혁신이 아니라 퇴보를 가져왔다. 자유를 억압하고 미래를 파괴했다. 국민 편가르기와 내로남불이 도를 넘었다. 무능에도 사과를 모른다. 소주성으로 대표되는 경제정책의 실패, 부동산 정책의 실패, 백신 확보 실패 등 줄줄이 계속되는 실정에도 ‘적폐’ 타령뿐이다. 문재인 정부의 모든 것을 되돌려 놓고, 우리 사회 모순의 핵심인 586 기득권을 해체해 온전한 나라를 만들고, 30년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다음 세대로 전해주기 위해, 원희룡이 정권교체의 선봉에 서겠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중 부동산 정책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원희룡표 부동산 정책’을 소개해 달라. - 문재인 정부가 다주택자를 때려잡고, 세금 올리고, 온갖 규제를 다 만들었지만 과연 집값이 잡혔나? 집값의 안정화는 ‘원하는 곳에, 원하는 형태의 내 집’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 때 가능하다. 저는 부동산 1호 공약으로 ‘반반주택’을 제시했다. 반반주택은 무주택자가 집을 살 때 그 가격의 절반을 정부가 지분투자 해주는 제도다. 희망하는 곳에 집을 사고, 팔고 싶을 때 팔 수 있는 선택권이 전적으로 거주자에게 있다. 정부가 50%를 투자할 때 직접 지원이 아니라 국가가 보증하는 SPC를 세워 은행에서 빌려 지원하는 방식을 사용하면 대략 7조로 20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우선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인 9억원 이하 주택에 대해 무주택 신혼부부들을 대상으로 하고 대상을 점차 무주택자 전체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제주지사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정책은. - 중국 자본으로부터 제주도 땅을 지킨 일이다. 투자영주권 제도를 악용해 제주도에 땅투기를 하는 중국 투기자본을 사실상 거의 몰아냈다. 도지사로 취임 당시 1년에 500명씩 발행되던 투자영주권이 2020년에는 단 2건으로 거의 제로가 됐다. 그 외에도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찾고 싶은 핫플레이스로 만든 것, 제주도를 제주도를 전기차 수소차의 천국, 탄소제로라는 미래를 준비하는 곳으로 만든 것이 가장 보람있는 성과들이다. ▲후보는 과거부터 호남과도 인연이 깊다고 들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 - 호남과의 첫 인연은 대학교 1학년 때 5·18민주묘지 참배였다. 당시는 ‘광주사태’라고 했을 만큼,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고 우리 사회적 인식도 다소 왜곡돼 있었다. 저 또한 5·18묘지 참배 이전에는 그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참배 이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국회의원 초선 때 만든 수요모임 소속 남경필, 정병국, 이성권 등과 함께 호남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여수엑스포 준비, 광양항 개발, 영암 F1 코리아 그랑프리 등의 사업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한나라당 내에서 힘을 모았다. 2005년 12월 호남에 기록적인 폭설을 기록했을 때, 12월23일~31일까지 일주일 넘게 호남에서 지내며 호남 당직자들과 함께 재해복구 자원봉사를 했다. 당시 여야 정치인들이 폭설 현장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 분들과 다른 제 진정성을 지켜본 많은 분들이 격려와 응원을 해주셨던 일이 기억난다. 대학교 1학년, 5·18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원희룡도 없었을 것이다. 제주가 저에게 어머니라면, 호남은 아버지와 같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대선 후보로서 호남지역 유권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번 대선은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기로가 될 선거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항상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호남분들이 지혜롭고 용감한 선택을 해주실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저 원희룡이 반드시 정권교체를 완성하고, 문재인 정부가 망쳐놓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약속을 드리겠다. 힘든 시기 잘 이겨내시고 저 원희룡이 늘 호남과 함께 하겠다.
    • 기획.연재
    2021-08-2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진제마을 당산나무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 177-9번지에 있는 느티나무 이름은 진제마을 당산나무이다. 수령 200살쯤으로 지난 세월 진제와 원제, 두 마을을 보살피고 지켜온 나무이다. 지금은 아파트 숲, 아스콘길에 쌓여 삶, 숨, 쉼터가 불편하지만, 정월 대보름이면 소박하나마 당산제를 받으니 외롭지 않은 나무이다.진제나 원제는 마을 앞 연꽃방죽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 광산 노씨가 터를 잡고, 뒤이어 밀양 박씨, 청주 한씨가 들어와 방죽에 제를 쌓고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다복다복 사람이 들어와 사니 큰 마을이 되어 면소재지가 되었다. 그러다 마을 앞에 있던 광산군 효지면사무소가 6·25 때 인민군의 방화로 소실되었고, 그 뒤 금당산 아래로 옮겨갔다.1862년에 한필오, 한필룡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받아 1864년에 세운 청주 한씨 쌍효비와 제실인 효우재는 도시화에 밀려 화순군 도곡면 천태로 옮겨갔다. 장성 비아와 나주 산포에서 흙을 가져와 가마굴 두 개에서 장독인 옹기를 구워 옹기촌, 점촌이라고도 했던 원제 마을은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구나’가 되었다.원제마을의 옹기를 시장에 내다 팔려면 제석산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그 고개를 조시미 고개, 부처울길이라고 했다. 조시미 고개는 산도적을 조심하라는 말이고, 부처울길은 고개 넘어 부처님을 우러러 모신 절이 있어서이다.이제 그 이름들 대신 아파트가 들어선 원제마을 앞은 남구다목적체육관이 있고, 연꽃방죽이 있던 곳에는 ‘김병내 구청장님 감사합니다’라는 현수막이 여럿 걸려있고, 남구복합운동장 공사가 한창이다.또 진제마을 앞에는 국제테니스경기장이 있어 밤에도 불을 훤히 밝히고 테니스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로만 보면 진제마을 당산나무는 나무로서는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참으로 영험한 나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살이에 어찌 희로애락이 함께 하지 않을까? 1980년 5월 24일 12시 30분경이다.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진압하던 계엄군의 총에 진월제 연꽃방죽에서 물놀이 하던 전남중 1학년 방광범이 죽었다. 잠시 뒤 13시에는 형이 사준 고무신을 자랑하려고 고샅으로 나갔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가 역시 총에 맞아 죽었다.이때는 누구라 할 것 없이 겪은 아픔이지만, 진제마을 당산나무는 6·25 때 활활 불꽃으로 사라지던 면사무소를 볼 때처럼 말대신 눈물을 펑펑 흘렸을 것이다. 예전에 이 진제마을 당산나무 앞에는 당산이란 돌비와 함께 경로탑이 있었다.‘무등산 정기 받아/ 우리 조상 터를 닦고/ 오륜지도 본을 끼쳐/ 후손에게 전하더라./ 갸륵하시다 높은 그 얼/ 이어받아 3백년/ 아! 진제여/ 우리의 긍지여!’하지만 경로탑의 글귀도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이따금 가까이 사는 노인들이 쉬어가지만, 이제 당산나무는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한다. 오가는 자동차의 매연, 빙 둘러 덮어버린 아스콘길 때문에 삶, 숨, 쉼이 쉽지가 않다.한 아름 아카시나무는 꿀을 한 말 내주고, 플라타너스 한 그루는 15평형 에어컨 5대가 5시간 일하는 것이고, 느티나무 한 그루의 산소는 어른 7명이 1년간 숨 쉬는 양이라고 한다.나무가 살아야 사람도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네 삶, 숨, 쉼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지, 땅에서 쑥 솟는지, 나무를 보고 깨달을 일이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8-26
  • 사람 사이 상식이야기/대충 하자고요?
      이미 말씀드린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난(欄) 명칭의 상조(相助)를 상식(常識)으로 바꿨습니다. 상조가 삶(LIFE) 자체를 대상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차원에서 큰 차이는 없겠어요.물 한 잔에도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담겨 있다고 하니, 어지럽게 궁리하고 부산하게 떠도는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이 꼭 나쁘고 없어야 할 것은 아니리라 자위(自慰)해 봅니다.최근 우리 사회 아니 전 세계의 가장 핵심 사안이라고 할 돌림병에서 시작하지요. 인류 역사를 질병의 영향력과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보기도 합니다만, 이번 코로나19는 유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과거의 페스트(흑사병)나 독감 등 유행은 전 세계가 아니라 ‘일부’였지요. 아마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 등장한 이후 가장 ‘보편적’으로 겪는 상황일 것입니다. ‘상식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말머리를 돌림병으로 한 이유이지요.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방역지침이 나왔습니다. 마스크 쓰기부터 손 씻기·거리 두기까지, 국민 모두가 유치원 아이 수준으로 균일화됐지요. 그러나 다들 워낙 ‘겁에 질려’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저 헝겊 꼴 면한 마스크를 비싸게(!) 배급처럼 받아도 감지덕지하지 않았나요?그런데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글 씀씀이’이지요. 국어 자체를 심각하게 오용 혹은 훼손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 한 예가 전염을 막아야 하니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라면서 내세운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라는 표어예요. 국어 사용과 관련한 명백한 오류입니다. 저 표현은 ‘거리’와 ‘마음’을 상대 개념으로 사용했지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써야 할 개념을 마음과 대비되는 것으로 쓴 것입니다. 저 표현을 만들고, 쓰도록 용인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쏟아낸 ‘것’들은 “‘(몸의) 거리는 멀어지게 하되 마음은 가깝게 유지하자’라는 뜻”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아마 그랬겠지요.그러나 말과 글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무인도에서, 자기 혼자뿐이라면, 무엇을 생각하고 뭐라고 말하고 어떻게 써도 괜찮겠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과 관련될 때는 일정한 규칙(문법 등)이 필요하지요.더구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무(公務)라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작은 일을 꼬치꼬치 따진다고요?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고,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빠져 큰 둑이 무너지는 것은 상관하지 않아야겠습니까? 저 말은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 정도면 뜻이 분명히 전해졌을 것입니다. 더 좋게는, 저 따위 미련하고 모자란 ‘소리’ 떠들지 않고 그냥 ‘거리두기!’라고 하면 됐겠지요.지난해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하면서 기념 주화를 발행했는데요,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주화에 들어간 문구(文句)에 쉼표(영국에서는 Oxford Comma)를 넣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었지요. 문제를 처음 제기한 소설가 필립 풀먼(Philip Pullman)은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주화 발행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로서도 자기 나라 말 사용과 관련해 쉽사리 결론 내지 못하는 사안인 것 같은데요, 중요한 것은 문장 부호 하나의 사용 여부가 아니라고 봅니다.아무리 작은 것(쉼표!)이라도 ‘대충, 얼렁뚱땅, 적당히, 뭐 그럴 수도 있어, 어지간히 하지’ 이런 방식은 용납할 수 없다는 치열한 문제의식, 마냥 부럽네요.주성식/금호라이프 홍보부장 sesank@naver.com  
    • 기획.연재
    2021-08-24
  • 고종, 외국인 용병 친위대 고용 꾀하다
    1898년 5월 14일에 서재필(1864~1951)이 추방됐다. 1895년 12월 26일에 귀국한 지 2년 5개월 만이었다.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7월 2일에 독립협회가 창립될 당시는 정부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후 서재필은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했다.1896년 9월 17일 자 ‘독립신문’ 논설에는 내부대신이 새로 임명된 거창군수 김봉수를 만나 “어떻게 자네가 고을 원님이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돈 3만냥을 주고 고을 원님 벼슬을 샀다”고 대답했다가 파면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재판소도 문제가 많았다. 재판소가 억울한 일 당한 사람을 법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송하러 온 사람을 건방지다고 잡아 가두기까지 했다. (서재필 기념회, 선각자 서재필, 2014, p93)정부 비판이 거세지자 고종은 서재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1897년 12월 13일에 외부대신 조병식은 주한미국 공사 알렌과 담판했다. 그는 알렌에게 정부를 비난하는 서재필은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자 알렌은 서재필이 미국인임을 강조하고 중추원 고문 계약기간 10년 중 남은 기간의 급료와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지급하지 않고는 해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백성들이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자 고종은 러시아의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시켰다. 이후 러시아 공사 스페에르는 서재필을 추방하라고 고종에게 압박을 가했다. 일본도 서재필 추방에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1898년 4월 25일에 서재필과 정부 사이의 교섭이 미국 공사 알렌의 주선으로 타결됐다. 정부는 서재필 출국 조건으로 서재필과 계약한 10년 중 잔여기간 7년 10개월의 급여 등을 지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이러자 독립협회는 정부에 서재필을 재고용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4월 28일에 정부는 “서재필은 이미 해고됐으므로 체류 여부는 본인 의사에 달린 것”이라며 재고용을 거절했다.4월 30일에 이승만 등은 숭례문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그리고 정부에는 서재필의 재고용을, 서재필에겐 체류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5월 2일에 서재필은 정부가 재고용하기 전에는 체류할 수 없음을 만민공동회에 답신했다.5월 14일에 서재필은 미국인 부인과 맏딸을 데리고 용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날 용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재필을 전송했고, 서재필은 고별연설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얼굴은 눈물로 가득 찼다. 참석자들의 눈에도 “흐르는 눈물이 한강을 이루었다.” (5월 19일 ‘독립신문’)한편 서재필이 떠나자 ‘독립신문’을 인수 받아 사장 겸 주필이 된 윤치호는 5월 14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5월 14일 (토요일)오전 10시에 서재필 박사를 배웅하기 위해 용산에 갔다. 30명이 넘는 독립협회 회원들이 참석했다. 다들 눈물을 흘렸다. 서재필 박사에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변화이다. 1884년, 서재필 박사는 각계각층의 증오와 저주를 받으며 조선을 떠났다. 그 뒤 박사를 개처럼 죽이는 조선인은 누구라도 왕국에서 가장 충실한 신하로 간주됐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서재필 박사는 서울을 떠난다. 부패한 지배 세력은 박사를 증오하지만 국민들은 그와 함께 있다.”서재필은 떠났어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자주 독립, 민권 운동은 더욱 거셌다. # 고종, 외국인 용병을 친위대로 고용하다  1898년 9월 20일에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고종 황제의 외국인 친위대 구성 계획 추진과 의정부 대신들의 거부 움직임 보고’ 공문을 보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 근대사 자료집성 18권, 프랑스 외무부문서 8 대한제국Ⅰ·1897~1898)“고종 황제가 외국인으로 구성된 친위대를 조직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미국인 법무 고문관 그레이트 하우스가 상해에 체류 중인 5개국 퇴역군인 30명(미국인 9명, 영국인 9명, 프랑스인 5명, 독일인 5명, 러시아인 2명)을 고용했다 합니다. 서울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대신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물론이고 경찰과 군인들도 동요했습니다. 고종 황제는 딱 잡아떼는 버릇대로 외국인을 고용하라는 지시는 내린 적이 없으며 그레이트 하우스의 행동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9월 17일에 각 대신에게 항의서를 보내 누가 외국인 친위대를 서울에 오게 했는지 밝히라고 했습니다. 대신들은 이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일에 독립협회는 외부(外部) 앞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외부대신에게 독립협회가 반대하는 6가지 이유를 알렸습니다.1. 외국인 친위대를 궁에 둘 필요가 전혀 없었다.2. 친위대가 주둔하면 우리 군대가 시기하고 원한을 품을 것이다.3. 취해진 조치로 황실은 백성의 충정을 잃을 것이다.4. 외국인 친위대가 주둔하면 국제 분규가 일어날 수 있다.5. 외국인 용병은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는 5개국 국민들이므로 그 조직을 운영하기에는 대한제국 정부 자체도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다.6. 이 계획의 실현은 백성에 대한 신임도 없는 황실의 수치이며 황궁을 보호할 능력도 없는 조정의 수치이며, 황제조차 통제할 수 없는 외국인들에게 황제의 보위를 맡기는 대한제국 전체의 수치일 뿐이다.외부대신은 다음 날 이 문제를 의정부에 제기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자신도 외국인 친위대 유지를 승인하느니 차라리 사임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한편 19일 열린 의정부 회의에서 대신들은 만장일치로 군주가 세운 계획을 반대했습니다. 외국인 친위대는 근무도 하기 전에 해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깨끗이 마무리 지을 일만 남았습니다.”그랬다. 궁정 호위에 불안을 느낀 고종은 1898년 8월에 법무 고문관 그레이트 하우스와 장봉환을 중국 상해에 파견했고, 이들은 9월 15일에 외국인 용병 30명을 서울에 데리고 왔다. 9월 17일에 독립협회는 군부·외부·궁내부·경무청에 각 3명씩 대의원을 보내 외국인 용병의 즉각 귀환을 요청하는 항의문을 전달했다. 이어서 9월 18일에 외부 문 앞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외인부대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독립신문’도 이 사실을 규탄했다. 독립협회 소장파 활동가이면서 ‘제국신문’ 주필인 이승만(1875~1965)은 9월 19일 자 ‘제국신문’ 논설에서 ‘상하가 함께 부끄러운 큰 괴변’이라고 주장했다.“슬프도다. 우리의 처신함이여. … 임금이 그 백성을 믿지 못해 외국인을 데려다가 대궐을 보호하는 일이 세계에 나라 되고서야 어디 있으리오. 이는 신하도 없고 군사도 없고 백성도 없음이니, 상하가 함께 부끄러운 큰 괴변이라. 이런 일은 마땅히 신민이 일심으로 주선해 결단코 시행이 못되도록 하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후략).”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1부 1권, 나남, 2008, p 377~378)이러자 외국인 용병들은 9월 24일에 철수해 27일에 제물포항을 떠났다. 9월 29일에 플랑시 프랑스 공사는 외국인 친위대 해산 및 외국인 송환을 위한 경비 지출 상황을 보고했다.“대한제국 정부는 9월 26일에 친위대를 해산하며 외국인 용병들에게 상해로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1년 치 고용비 840 피아스터를 지급했습니다. 결국 2만5200 피아스터를 앉은 자리에서 낭비한 것입니다.”고종 황제는 외국인 용병을 단 하루도 근무시키지 못하고 고용계약 기간 임금 전액을 지급했다. 이게 대한제국이었다. 이는 국제적 망신이었다.
    • 기획.연재
    2021-08-23
  • 주성식의 상조 이야기/인간은 서로 기대야 한다
      사람 사이 상조이야기가 벌써 22회를 맞았습니다. 상조의 출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원칙부터 현황까지 대강을 살펴봤지요. 상조를 잘 아는 분들에게는 미흡한 것이고 관심을 갖지 않는 분들에게는 헛일이었겠습니다.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상조라는 분야와 관련해 무책임하게 대응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가 컸어요. 그럭저럭 ‘얻어들은’ 것을 통해 대충 짐작하고 마냥 ‘믿었던’ 것을 반성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끈질긴 게으름과 무식(無識)을 벗어나고, 가능하다면 여러 사람과 공유하려고 한 것이지요.인류가 수렵·채집 생활을 벗어나 정착한 것이 약 1만2000년 정도라고 합니다. 정보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기껏 몇 천년 됐지요. 그리고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인류의 역사는 바로 지적(知的) 역량이 커지는 과정입니다.2000년쯤 전에는 ‘다른’ 집단은 그냥 말살 대상이었지요. 중세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정당하다고 확신하면서 마녀사냥을 했습니다. 노예 매매와 대량 학살은 지금도 지구촌 어딘가에서 자행되고 있지요. 성(性) 차별이요? 세계적 선진국이라는 유럽 한 나라가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락한 것이 1971년입니다. 인종이나 국가, 성별(性別)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어떤 짓’을 해도 괜찮았고 심지어 권장되기도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치고 강제한 경전(經典)들이 지금도 ‘엄연하게’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더 이상 그런 독선(獨善, 나뿐)은 가능하지 않지요. 비록 조금씩이지만, 성역(聖域)은 무너지고 폭력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변화가 시작됐고, 그 추세가 점점 더 뚜렷해질까요? 바로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이 무지(無知)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도덕적으로도 성장한 것이지요.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질문한 것 즉 회의(懷疑)의 결과입니다.‘사람사이 상조이야기’는 상조에 대해서도 “과연 그런가?”라고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말입니다. 맹목적인 선입견에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마녀사냥과 노예 매매 그리고 인종과 성(性)차별을 용인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이제 ‘사람사이 상조이야기’의 자세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무식과 무지 그리고 그로 인한 독선과 폭력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뭐든 뿌리가 있는 것, 조금씩이라도 파헤치다 보면 언젠가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실체가 드러날 수도 있겠지요.서로 기대야 제대로 설 수 있는 인간의 진면목 말입니다.
    • 기획.연재
    2021-08-17
  • 주성식의 상조 이야기/상조, 근사(近似)하네요!
    어떤 관점으로 무슨 해석을 하더라도, 상조(업)가 ‘죽음’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기적이라고 할 정도의 ‘낮은’ 가능성으로 삶(生命)이 생긴 것에 비하면, 죽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정된 것이지요. 따라서 상조는 발생 확률 10할(割)이 보장돼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불확실에서 확정으로 향하는 과정 즉 생활이라는 것 또한 명백하지요.상조는 일상생활에 관여하는 방향으로 변화(진화)하고 있습니다. 다만 결혼 등 분화·특화하고 있는 부분은 비중을 줄이고, 일반화·규모화가 가능한 분야에 집중한다는 것이지요. 크루즈를 포함한 여행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국내 선불식 상조회사(이하 상조회사) 가운데 상당수가 상호에 ‘라이프(LIFE, 생명·생활)’를 넣고 있는 것도, 그런 추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끼워팔기’ 논란이 그치지 않는데도, 가전회사 등과 협업한 일부 상조회사의 결합판매는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금융회사와 연계해, 불입금을 대폭 할인해 주거나 아예 무료인 상품도 등장했지요. 금융회사에서 신용카드를 발급 받은 후 그 사용 실적에 따라 차별적 혜택을 주는 방식입니다.그것만이 아닙니다. 노인 요양 등 복지사업이나 건강(검진·관리) 분야를 비롯해, 치매치료제 같은 신약을 개발하는 바이오(BIO) 산업에 대한 투자도 하지요. 일상생활의 다양한 수요에 적극 대응할 뿐 아니라, 사회 변화 등을 감안해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상조가 도입되고 40여년이 지나는 동안 상조회사들은 숱한 고비를 극복해 왔습니다. 또 법령과 제도가 정비되고 국민들의 인식도 많이 바뀐 만큼 최소한의 존립 기반은 확보했다고 판단하고 있지요. 이제 고객(회원)들의 신뢰와 지지라는 ‘최고의 자산’을 바탕으로, 회원들 최대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회사와 고객의 이익이 만나는 최적점(最適點)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상조회사들은 현재 코로나19로 촉발돼 갈수록 비중이 커지고 있는 비대면 상황을 분석하면서, 대책 마련에 집중하고 있지요. 앞으로 여러 전문 업체나 포털(portal)과 협업하거나 독자적 방식으로 고객들의 요구에 대응할 것입니다.장례나 (크루즈)여행처럼 평생 손꼽을 만큼 발생 빈도가 낮은 특수한 경우는 물론이고, 날마다 이용해야 하는 생활의 모든 부분에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이지요. 상조, 다가올 ‘멋진 신세계’에 ‘근사(近似)한 대안’이 되겠네요!
    • 기획.연재
    2021-08-10
  • 만민공동회, '글이 아닌 말로 정치 참여 길' 열다
    # 독립협회의 토론회 개최          1897년 5월에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 이름하고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키로 하였다. 5월 23일에 개수작업이 완료되었다. 8월 8일 독립협회 모임에서 서재필과 윤치호는 회원들에 대하여 독립협회를 좀 더 유용한 기구로 개편할 것을 제안하여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독립관에서 토론회를 열기로 하였다.  1897년 8월 29일 오후 3시 독립관에서 ‘조선에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을 주제로 약 7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하는 가운데 제1회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제2회 토론회에는 방청객이 200명이나 참석하였으며 토론회 참가자와 방청인 수는 계속 증가하여 제8회 토론회부터는 약 500명이 참석하기에 이르렀다.토론회는 1898년 2월 13일 구국 선언상소를 결정한 제21회 토론회를 전환점으로 달라졌다. 그 이전까지는 신교육진흥, 산업개발, 미신타파, 위생과 치안, 신문보급 등 계몽적인 것이 주된 주제였는데, 2월 13일 21회 토론회 이후는 자주독립, 대외정책, 수구파 비판, 이권 반대, 자유 민권, 의회설립 주장 등 정치와 사회 현안이 주류를 이루었다. # 만민공동회 1898년 3월 10일 오후 2시에 서울 종로의 저잣거리에서 민회(民會)가 열렸다. 이 날 ‘독립신문’은 행사 예고 기사를 실었고 독립협회 회장 이완용과 고문 서재필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은밀히 준비했다.민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는데 당시 서울 인구가 19만 6000명임을 감안하면 대성황이었다. 서울 시민 5%가 모인 것이다. 민회에서 시민들은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종로 백목전(白木廛) 다락 위에서 시민들이 연설을 하였다. 현공렴, 이승만 등 배재학당과 경성학당 학생들도 연설에 나섰다. 이들은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지금의 영도) 조차(租借) 요구 철회와 한러은행 철수, 그리고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해임을 요구하여 집회를 이끌었다.이 모임에는 러시아 공사,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도 관람하였는데 집회 열기가 가득하자 서울의 외교계와 정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원조 촛불’이라고 불리는 이 집회는 ‘글이 아닌 말로 정치 참여’를 하는 길을 열었고, 민중과 연사가 자주 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했다. 모임은 당초엔 ‘민회(民會)’라 했으나 만 명이나 모이자 나중에는 ‘만민공동회’라 불렸다.이러자 고종은 만민공동회의 열기와 러시아 측의 압력 사이에서 고심하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우선 고종은 원로대신 김병시와 조병세에게 칙사를 보내어 의견을 물었다. 원로대신들은 러시아 군사교관 및 재정 고문의 해임을 촉구하였다.고종은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일본 측의 후원도 있었던 까닭에 3월 11일 밤에 이 문제를 내각회의에 붙여 토의하게 하였다.김홍륙·민종묵·정낙용 등 친러파 인사들은 러시아의 원조가 절실함을 내세워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은 만민공동회의 민의와 원로대신들의 권유에 따라 러시아의 압력을 사절하자고 주장하였다.고종은 결단을 내려 러시아공사관에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청하는 회신을 보냈다.이 시기 러시아는 한반도보다도 만주 경영이 급선무라 여겼기에 고종의 답신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결정하였다.3월 17일에 러시아 정부는 “한국 민중의 여론이 이와 같으면 재정고문과 군사 교관들을 철수하는 것이 가하다”고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훈령하였다. 이에 스페이에르 주한 러시아 공사는 고종에게 절영도 조차 요구 철회와 재정고문 및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하였다.3월 24일에 고종은 탁지부 재정고문과 러시아 교관들을 파면하였고, 이어서 3월 1일에 개설된 한러은행도 문을 닫았다.러시아 정부는 스페이에르를 4월 12일 자로 마튜닌으로 교체하여 한반도에서 후퇴 조짐을 보였다. 일본도 그들의 절영도 석탄고 기지를 한국 정부에 돌려보냈다.그런데 러시아의 한반도 후퇴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반대 때문이었을까? 이는 독립협회 활동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이다. 러시아의 철수는 러시아의 관심이 조선에서 만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최문형 지음,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 250-251)1897년 11월에 독일 함대는 독일 선교사 살해를 이유로 청도가 위치한 교주만을 점령했다. 러시아는 독일의 교주만 점령에 대한 대책으로 1897년 12월 19일에 여순, 대련을 점거하고 1898년 3월 27일에는 요동반도를 조차하였다.러시아의 이런 조치에 영국과 일본은 즉각 대응조치를 취했다. 이러자 러시아 외상 무라비예프는 “지금의 정세로서는 한국에서 일본에게 상당한 양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1898년 1월 7일에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타다시에게 “한국에 대해 러시아는 일본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제의를 하기에 이르렀다.이후 일본은 러시아에게 만주와 한국을 맞교환하자는 제의를 했지만 러시아는 거부하였다. 그 대신 러시아는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이권을 잠시 포기했다. 한편 러시아와 일본은 1898년 4월 25일에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 로젠과 일본 외무대신 니시 로쿠지로 간에 ‘로젠-니시 협정’을 맺었다.이를 살펴보자.1. 양국 정부는 조선의 주권과 독립을 확인하고 일체의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 2. 조선이 양국 중 어느 국가에 조력을 요청하는 경우는 서로 협상하여 처리한다. 3. 러시아는 조선에서 일본의 상업과 공업의 기업이 크게 발달한 사실과 일본 거류민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상업상·공업상의 관계가 발전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처럼 러시아는 일본의 요구에 크게 양보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시 후퇴하였지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고종은 여전히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었다.  #  고종, 독립협회 회원 지석영 등 4명을 구속하다.   3월 10일 만민공동회 개최에 경악한 고종은 즉시 견제에 나섰다. 3월 15일에 고종은 특명을 내려 독립협회 회원 지석영, 이원긍, 여규형, 안기중을 구속시켰다.지석영(1855~1935)은 우리나라에 종두법(種痘法:천연두 예방법)을 처음 보급한 사람이다. 그는 1883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고,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해 우두를 보급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를 했다.지석영은 1894년 7월 5일에 민씨 척족 실세 민영준(나중에 민영휘로 개명)과 나라를 망친 무당 진령군(眞靈君)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종실록 1894년 7월 5일)지석영 등 4명이 구속되자 3월 20일에 독립협회는 경무사 김재풍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1) 1897년 11월 2일에 반포한 법률 제11조 규정에는 사람을 체포할 때는 24시간 안에 재판소로 이송하도록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무청이 독립협회 회원 몇 명을 체포해 여러 날 구금하고도 재판소로 이송하지 않은 것은 법률 위반이다. (2) 독립협회 회원이 왜 체포됐는지를 밝혀라”였다.하지만 고종은 바로 조령(詔令)을 내려 이들을 10년 유배에 처하라고 명했다.“지석영 등은 마음가짐이 음흉하고 행실이 비열하다. 제멋대로 유언비어를 만들고 인심을 선동해 현혹시켰으니, 법부(法部)로 하여금 유배 10년에 처하게 하라.”고종은 소위 선동죄를 적용한 것이다. 법부는 재판도 없이 이원긍은 용천군 신도에, 여규형과 지석영은 풍천군 초도(椒島)에, 안기중은 장연군 백령도에 유배했다. (고종실록 1898년 3월 20일)이러자 독립협회는 특별회와 토론회를 잇달아 열어 정부의 횡포를 거세게 규탄하고 항의 편지를 보내는 등 투쟁을 벌였다. 결국 6월 28일에 고종은 “유배된 죄인 지석영 등 4명을 모두 특별히 방송(放送)하라”고 명했다. 한편 고종과 수구파 정부는 ‘독립신문’ 주필이자 독립협회 지도자 서재필에 대한 추방 작업을 벌였다.
    • 기획.연재
    202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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