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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식의 어른왈/폭력의 기억
    20대 대통령 선거가 두 달 남짓 남았다. 그러나 이 사회의 바람직한 앞날에 대한 전망과 실천 방안은 보이지 않는다.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사회 체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근본까지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완벽하게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바에야, 공존(共存)의 기준은 확립하고 특히 준수해야 한다. 그 기준은 바로 최소한의 상식이다. 그 측면에서 대선 국면을 집권당(세력)의 행태 위주로 짚어보자. 무엇보다, 무소불위의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니까.그들은 아무 근거도 없이 코로나19 방역조치를 완화하고, 확진자가 폭증하면 사회 전체를 옥죄는 조치를 되풀이하고 있다. 수치스러운 무능과 절망적인 부패와 노골적인 이적(利敵)·매국(賣國) 행태는 갈수록 심각해진다. 끔찍한 패악(悖惡)과 추문(醜聞)이 경쟁하듯 등장한다. 단 하나만으로도 정권이 몰락할 사안이지만, 멀쩡하다. 민심을 추스르겠다며 내놓는 공약은 그저 “공약(空約)인 줄 알지?” 수준의 말장난일 뿐이다. 피로 피를 씻는 끔찍한 상황을 방치하거나 조장하고 ‘니들이 어쩔래?’라며 조롱하는 것 같다. 대선이라는 큰 경쟁의 결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뭔가 떠오르지 않는가? 지난해 21대 총선을 앞두고 집권당(세력)은 궤멸 직전 상황이었다. 몰락은 확실해 보였다. 그들에게는 상황을 돌이킬 아무 방법이 없었고, 누구보다 자신들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하늘이 돕고 신명이 보살피는 것일까.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고 할 돌림병이 등장했다. 마스크가 배급되고,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집회 결사와 이동의 자유가 박탈됐다.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놀랄 만한 방역 성과를 거뒀다(고 선전했다). 전 세계 언론이 찬사를 쏟아냈다(고 홍보했다).선거 취소 주장과 연기(延期) 요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외동포 등 최소 수 만명이 투표할 수 없었다. 국민 기본권인 투표권이 제한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승(大勝)을 거뒀다.과거 한 정복자가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전설이 떠오른다. 쾌도난마(快刀亂麻)도 그렇다. 결국 무법(無法)한 폭력이다.현 집권 세력은 지난해처럼 혼란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 아닐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어렵고 괴롭고 힘든 상황을 만들어 놓고, 쾌도(快刀)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전부를 전제(專制)·독재(獨裁)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 기획.연재
    2021-12-21
  • 시대의 명인인간문화재 양승희 선생
    가야금산조 및 병창 국가 무형문화재 제23호 양승희(梁勝姬) 선생은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金昌祖)의 모든 것을 발굴하여 만천하에 드러냈을 뿐 아니라 국악 사상 초유의 ‘산조학술대회’를 열고 가야금산조 효시에 대한 확실한 원형 제시로 국악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었다. 김창조의 손녀 죽파(竹波) 김난초(金蘭草)를 잇는 장손으로서 그의 연주는 지금 ‘사람의 마음을 두들기는 동중유정을 득도한 경지’라는 평을 듣는다.현재 유네스코 가야금산조 등재 추진위원장, 가야금산조 기념관 명예관장(영암), (사)국가무형문화재 기·예능협회 부회장, (사) 한국산조학회 이사장, (사) 김창조산조보존회 이사장, (사) 김죽파 양승희 가야금산조보존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저서(著書)와 연구 논문으로 ▲가야금산조 창시자 김창조와 가야금산조 ▲김창조 생애와 음악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樂聖 김창조 선생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이야기 ▲월출가야금 향연 ▲김창조 산조가 북한 안기옥, 정남희 산조에 끼친 영향 ▲한성기 가야금산조 등을 저술하고 5권의 악보를 출판했다.양승희 선생은 척박했던 가야금 1세대와는 달리 서울대학과 대학원에서 음악석사 과정을 밟고 1986년 성균관대대학원에서 ‘악기(樂記), 악리사상(樂理思想)의 철학적연구’논문으로 국악계에서는 드물게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지성인이다. 가야금 하나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현이 가지는 진정한 울림을 알기 위해 윤윤석에게 아쟁과 철금을 배우고 현과 판소리와의 조화를 모색하기 위해 스승 생존 당시 김소희를 모시고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김수연에게서 5년간 병창수업을 받았다.김창조, 한성기, 죽파를 탄생시킨 영암군에서 그는 가야금산조와 관련하여‘산조학술대회’를 열었다.2000년 4월, 영암군이 주최한 도선국사와 아스카(飛鳥) 문화의 시조로 알려진 왕인문화축제에서 축제 추진위원장 자격으로 ‘영암이 가야금의 본향’임을 전국에 알렸다. 실로 이러한 선포의 의미는 가야금산조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성취한 결과로서 양승희는 명실공히 김창조와 죽파를 잇는 후계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지금도 우리나라 ‘가야금 산조의 시조(始祖) 악성(樂聖) 김창조(1856-1919) 선생의 예술혼’과 그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고 선생의 산조음악의 계보 정립과 산조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가야금 산조의 본향인 영암에서 김창조 산조의 맥을 이어가면서 후대의 전수를 위해 평생을 받쳐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김죽파 선생은 양승희를 유일무이한 제자로 인정, 1985년 일본 공연 후 친필 유언을 남겼고, 국가에서 인정한 이수자 14명을 배출했다. 양승희를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준보유자(준인간문화재)로 세우고 1989년 9월 10일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이 타계한 후 2006년 정부는 양승희를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인간문화재로 지정했다. 이로서 양승희 선생이 김창조 산조의 정통성과 맥을 김죽파 선생으로부터 이어 받아 김창조 가야금산조의 음정, 박자 등 특징과 산조가락의 원형을 모두 사사했다. 김창조, 산조의 음악형식 완성악성 김창조 선생은 1856년 전남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에서 세습적 율객(律客)가정에서 출생, 재인 마을에서 자라면서 그의 천부적인 기악연주의 소질과 타고난 재질을 바탕으로 거문고, 해금, 피리, 단소 연주와 판소리 등에 탁월했으며, 근대 민간 기악음악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가장 빛나는 공적을 남긴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창조 선생은 1890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틀을 갖춘 ‘가야금산조’ 를 작곡함으로서 산조의 음악형식을 완성하여, 모든 산조 음악의 효시가 되었다. 김창조 산조 창작은 1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악기마다 기악독주곡으로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워 한국음악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으며,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세계가 경탄하는 인류의 걸작이 되었다.김창조 선생은 나주 남평 출신의 월북한 안기옥(1894-1974) 교수에게 10여 년간 가야금 산조원형을 가르쳤다. 안기옥은 ‘장별제를 설정하고, 정형화한 뒤 가감 없이 후대에게 전하도록 하라’는 김창조 선생의 유언에 따라 북한의 정남희(1905 -1984)와 중국의 연변예술학교 김진(1927-2007) 교수에게 김창조 산조의 원형과 안기옥 자신의 산조를 전수했다.김진 교수는 다시 양승희에게 김창조 가야금산조 원형악보와 자료들을 전해주어 1999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양승희 선생에 의해 김창조 산조가 연주되었고 CD로 출판되었다. 김창조 가야금 산조의 계보는 북한에서는 안기옥, 정남희, 김광준, 정운용에 이어지고 남한에서는 영암 모정출신의 한성기와 강태홍, 최옥삼, 김병호, 김윤덕, 성금련, 김죽파, 양승희 가락으로 이어지고 있다.김죽파 선생은 생전에 양승희 선생에게 “가야금산조를 만드신 김창조 그 분이 나의 친 할아버지이시며, 나는 할아버지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할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 후 할아버지의 제자이신 한성기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김죽파, 김창조에 바탕둔 독특한 예술혼 일궈김죽파(1911-1989) 선생은 전남 영암에서 출생, 태어 난지 10달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 품에서 할아버지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할아버지로부터 풍류, 가야금산조, 판소리를 배웠으며 9세 때 조부인 김창조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수제자 중 한 사람 이였던 영암군 모정리의 한성기(1889-1950) 선생에게 11세부터 산조, 풍류, 병창을 공부했다. 김죽파 선생은 조부의 재질을 물려받아 그의 나이 6세 때 조부로부터 풍류전바탕, 가야금산조와 판소리를 배웠으며 가야금산조를 창시한 김창조 선생에 뿌리를 두고 이후 김창조 가락에 죽파 자신의 독자적인 가락을 넣어 높은 수준의 예술세계로 승화시켜 자신의 산조를 완성하였다.김죽파 선생의 가야금 산조가락 분석결과, 김창조 산조 459 가락 중 음정, 박자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 김죽파 산조에 전해진 가락수는 112가락이나 되며 이는 김죽파 산조의 619가락 중 112 가락이다.(진양조:3가락, 중모리:11가락, 중중모리:7가락, 자진모리:91가락)김창조 산조는 전체 459가락으로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구성되어 있고 김죽파 산조는 전체 619가락으로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세산조시로 구성되어 있다.김창조 산조는 자진모리 안에 휘모리 부분이 포함되어있고, 김죽파 산조는 자진모리, 휘모리가 나뉘어 있다. (☞ 제1회 한성기가야금 산조 학술대회 양승희 논문집)  김죽파 선생은 1968년 이후 서울대학교 이재숙 교수, 김정자 교수, 양승희 등 100여 명의 제자들을 통해 각 대학에서 김죽파 산조를 전수시켰다.김죽파 선생은 1978년 1월 정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KBS TV, MBC TV, TBC 방송에 양승희 제자와 함께 20여 차례 출연 녹화 방영되었으며, 1981년 제1회 대한민국 국악제 공연, 인간문화재대제전 등 수많은 공연을 했다.음반은 1931년 경성방송국 OK 레코드사 산조취입, 1985년 일본 해외공연과 공연후 일본 킹 레코드사 CD 출반, 1988년 한국전통움악대전집 가야금산조 취입(중앙일보사 제작), 1989년 동경 빅터아오야마 스튜디오 죽파 가야금산조, 풍류전집을 취입(유작음반)했다.1980년 김죽파 선생은 양승희 가야금독주회를 위해 짧은 다스름, 진양조 20장단, 중중모리 4가락, 자진모리 4가락, 휘모리 36가락, 무장단의 뒷가락을 짜넣어 현존하는 55분 김죽파 산조를 완성, 양승희에게 전했다. 
    • 기획.연재
    2021-12-1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설악산 신흥사 리영희 향나무
      해거름 녘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산사의 범종 소리는 평화와 안식의 은혜이다. 온 가족이 저녁 밥상에 둘러앉아 나누는 사랑과 행복의 울림이다.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읍의 화재로 낙산사가 불타고 범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1469년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동으로 주조한 지름 98㎝, 높이 158㎝의 이 보물급 범종의 꼭대기 용 두 마리는 종을 매는 고리이고 그 아래 두른 띠는 연꽃잎이다. 몸통을 굵은 줄로 나눈 뒤 맨 위쪽에 범어인 산스크리트어 16자, 그 아래 보살상 4구를 모시고 사이마다 역시 범어 4자씩을 새겼다. 몸통 아래쪽에는 만든 시기와 사람 등 기록을 남기고 구름 모양의 물결무늬로 신비감을 더했다.이 종은 아주 큰 종은 아니지만, 모양이나 종소리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나라의 범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이었다. 그런데 전쟁 때도 아니고 모두가 화재 장면을 티브이로 지켜보는 가운데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그 안타까움이 참으로 컸다.1951년 설악산 전투가 한창일 때다. 우리 국군이 명령에 따라 설악산 상원사를 태워버리려 했다. 이때 당시 상원사 주지 ‘방한암’이 본당 안에 드러누웠다.“절을 태우려면 나도 함께 불사르라.”방 주지의 이 한마디가 상원사를 지켰고, 오늘 우리가 설악의 비경 앞에서 조금이나마 덜 부끄러운 이유이기도 하다.역시 1951년 늦가을이다. 설악의 밤은 이미 겨울일 때다. 설악으로 들어간 국군의 한 연대가 신흥사에 임시본부를 두었다. 이미 양양읍은 폐허가 되었고 스님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신흥사는 전화가 미치지 않았다.절에 들어간 병사들이 추위를 녹이려고 활활 모닥불을 피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병사들이 돌과 도끼, 삽으로 빠개고 있는 것은 장작이나 나무가 아니었다. 불경을 새긴 목판이었다. 이걸 본 한 장교가 기겁하고, 황급히 불을 끄도록 했다. 타다만 경판 조각까지 회수하여 경판고에 다시 꽂아놓게 했다.훗날 안 사실이지만 신흥사의 그 경판은 ‘은중경, 법화경, 다라니경’ 등 소중한 유물이었다. 경판을 제작한 화주와 비용을 댄 시주의 이름은 모르지만, 조선 효종 때인 1650년에서 59년 사이에 만든 것이었다. 또 한글, 한자, 범어의 세 언어로 새긴 복합언어 경판으로 불교계의 희귀본이었다. 그렇게 모두 연기로 사라질뻔한 경판은 다행히도 277판이 남았고, 이때 소실을 막은 한 장교는 바로 2010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난 리영희 선생이다.6·25 당시 양양은 수복지역으로 1951년 8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미 군정이 통치했다. 이때 신흥사 아미타여래좌상 뒤쪽 벽의 영산회상도가 사라졌다. 그 후 미국 LA 카운티박물관 수장고에서 여섯 조각으로 잘린 채 발견되어 2020년 8월, 66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이곳 신흥사 명부전은 이승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비는 곳이다. 조선 영조 때 지은 이곳에 조각승 무염이 1651년에 만든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이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이 명부전 왼쪽에 잘생긴 향나무 한 그루가 마치 이승을 떠난 이들에게 바치는 향불처럼 우뚝 서 있다. 오랜 세월 온갖 재난과 전화를 묵묵히 지켜본 향나무이다. 물론 6·25 때 불쏘시개로 타는 경판을 보며 혀를 차고 발을 동동 굴렀을 리영희 향나무이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2-1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아기/고성 통일전망대 김대건 목련나무
      목련꽃은 봄의 꽃이다. 불꽃을 품은 눈부신 등인 듯, 종 소리에 꽃구름이 피어나는 듯 화사한 꽃이다. 백목련이 선비의 기개인 갓과 상투이거나 아리따운 처자 저고리의 단정한 동정이라면, 자목련은 영웅이나 전사의 가슴에서 빛나는 찬란한 훈장이다.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 가면 십자가의 그리스도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성모 마리아상, 오른쪽에 김대건 신부상이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앞 의자 곁의 목련나무가 역시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 산야에는 북으로 가는 육로와 기찻길이 있고 오른쪽 짙푸른 바다에서는 철썩이는 파도가 하얀 거품을 토한다. 그리고 눈 앞은 손에 잡힐 듯,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땅, 그리운 산과 들,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바다 금강인 해금강이다.강원도 고성군은 38선 이북의 우리나라 최북단이다. 1945년 소련군이 차지했으나, 한국 전쟁 때 수도사단, 5사단, 11사단, 15사단이 351고지 전투 등에서 대승하여 되찾았다. 하지만 고성군은 나뉘어져 남북 고성군이 되었다. 태백산맥의 미시령을 경계로 설악산과 금강산을 구분한다면, 남북 고성군이 합쳐져야 금강산도 비로소 하나가 된다.여기 통일전망대는 금강산과 가까운 남고성의 맨 위쪽인 현내면 마차진리에 있다. 휴전선의 동쪽 끝이자, 민간인출입통제선 북쪽 10km 지점이다. 통일전망대에 오르면 해안 철책선이며 한국군과 북한군 초소가 한 눈에 보이는데, 불과 600m의 거리라고 한다.무엇보다도 가슴 셜레는 것은 해금강의 절경이다. 금강산의 바다쪽 한 자락이지만, 바라보며 숨이 막힌다. 거북이가 어슬렁어슬렁 파도를 헤치는 듯 송도는 우리 땅이고 그 넘어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끝자락 아름다운 구선봉(낙타봉) 봉우리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전망대에서 금강산까지는 최단 16㎞, 최장 25㎞라고 한다. 비록 망원경으로 확인하는 해금강의 만물상, 현종암, 사공바위, 부처바위, 그리고 조금 더 멀리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과 일출봉, 채하봉, 육선봉, 집선봉, 세존봉, 옥녀봉, 신선대 등이지만 가슴 한 가득 우리 나라, 우리 땅이다. ‘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감호도 푸른 숲 아래라 하니, 그저 그리움을 달랜다.여기 성모상은 지난 30여 년간 실향민은 물론 7천만 겨레를 품어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상과 김대건상은 2020년 9월 18일에 통일을 기원하며 남북화합의 상징으로 세웠다고 한다.새로 모신 김대건 신부는 지금의 충남 당진시 솔뫼에서 1821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2021년은 김 신부의 탄생 200주년인 희년이고, 이를 기려 유네스코가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그가 태어난 해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몇 달여만에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일곱 살 때에 박해를 피해 경기 용인 골배마실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15세 때 프랑스인 신부 피에르 모방에게 발탁되어 신학생이 되었다. 24세 때에 상하이 진자샹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됐다. 조선에 돌아와 1년여간 조선교구 부교구장으로 전교하다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우리 나라 최초의 가톨릭 사제이다. 질곡의 시대에 미리내의 별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힌 등불이자 희망이었다. 그 김대건 신부와 함께 북녘 산하를 바라보는 마른 잎을 떨군 앙상한 목련나무는 평화와 화합의 비목이자 생명나무이다.보송보송 보드라운 깃털의 파랑새 한 마리가 마른 가지에서 푸드득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른다. 그렇다. 새 봄이면 목련은 가지 가득 향기로운 꽃송이 등불을 켜고 꽃구름으로 피어나리라. 별똥별처럼 선을 그으며 금강산쪽으로 날아가는 파랑새를 쫓아 눈길도, 마음도 북녘 산하에 닿는다.(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2-09
  • 사람 사이 상식이야기/우리, 개나 돼지들?
    최근 몇 년 동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때가 되면 모든 것(의 실상)이 드러난다”는 참언(讖言)이 떠오른다. 때가 된 것일까? 어둡고 더러운 곳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이런저런 계기로 드러나고 있다.그냥 그동안 했던 대로 살았으면 무탈했을 텐데, 한 톨이라도 더 챙기겠다고 밝은 곳으로 기어 나오는 것이다. 다 자발적(自發的)이다. 비루(鄙陋)한 본성을 자술(自述)하고 추악한 행태를 자백(自白)하는 꼴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일일이 꼽자면 세상의 종이나 먹물을 다 써도 부족할 테지만, 갈수록 괴롭고 끔찍한 꼴이 심해지니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겠다.얼마 전 한 공직 후보자의 조직 책임자(가운데 하나)로 임명된 사람의 처신과 관련해 소란이 일었다. 처음에는 그가 속한 조직(의 일부)이 “음해”라는 식으로 극구 부인했는데, 당사자가 인정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직(職)에서 사퇴하면서 논의가 엉뚱한 곳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소동의 실체는 뚜렷하다. ‘유부녀가 사통(私通)해 혼외자를 낳았다. 남편은 당연히 그런 속내를 몰랐다. 이혼 과정에 수상한 부분이 많아 확인했더니 친자(親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를 옹호한다는 부류들 하는 짓이 해괴하다. 엄연한 범죄 혹은 죄악을 질책하는 데 대해 “그것이 뭐가 문제냐? 혼외자 낳으면 능력 발휘할 기회도 못 갖는다는 것이냐”라며 ‘여성(권) 탄압’이라는 식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그뿐인가. 당사자는 ‘혼외자가 ‘성폭행’의 결과인데 강간범을 문제 삼지도 않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낳아서 잘 키우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같은 패거리 중 하나는 그를 ‘진주조개’ 같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러다 ‘성령(聖靈) 수태(受胎)’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이 ‘훌륭한 여성’ 분의 처신과 주장에 따르자면, 최근 성폭(추)행에 대해 엄밀하게 문제 삼는 많은 여성들은, 꽃뱀 아니면 최소한의 모성애(포용력)도 없는 ‘이기적 괴물’이 된다. 여성(권)론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이런 패륜(悖倫)과 강변(强辯)에 동조하기 때문인가? 이제 모두 저 여자 기준대로 하겠다는 것인가?그러나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것은 따로 있다. 이 사회의 근간(根幹)이 지속적으로,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훼손되는 것에 우리가 둔감해지는 것이다. ‘반짝이는 것’에 길들어지다 보니 맹목(盲目)이 되고, 마침내 포장·과장됐거나 사기(詐欺)일 뿐인 ‘능력’ 따위에 개 돼지처럼 끌려다니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 기획.연재
    2021-12-07
  • 매관매직 등 부패풍조 만연 여전
    # 의정부 의정(총리) 윤용선의 상소   1900년 3월 12일에 의정부 의정(총리) 윤용선이 상소를 올렸다. 윤용선은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국 국제>를 만든 법규교정소 총재였다.  “첫째, 궁금(宮禁)을 엄숙하게 할 것입니다.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공적인 일을 빙자해서 사적인 것을 도모하여 폐단이 너무 많으므로 매우 통탄스러워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종친과 외척은 모두 촌수(寸數)를 한정하였고, 학식있고 단아한 선비라도 특별히 부르는 일이 없으면 알현할 수 없는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옛 규례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애당초 자격이 없는 조신(朝臣)들과 사방의 부잡(浮雜)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궁궐에 출입하여도 거의 막지 않으니, 기밀이 누설되고 위엄이 농락당하고 있습니다.삼가 바라건대, 관리와 액속(掖屬 액정서에 근무하는 관속)들을 엄히 금하고 살펴서 비록 각부의 관리라도 공적인 부름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종친과 외척도 들어오라는 명이 있어야 들이는 옛 법을 거듭 밝히소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의정부가 처리하도록 해주소서. 둘째, 잡세(雜稅)를 없애고 관리를 파견하는 것도 없애소서. 갑오년(1894) 이후 누차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아직까지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매기어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다방면으로 걷어 들이고 명목도 한두 가지가 아니며 사방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온갖 침학(侵虐)을 자행하고 있습니다.삼가 바라건대, 신속히 칙령을 내리셔서 모두 폐지하게 하소서. 만일 경비가 궁색하여 잡세로 보충하려고 하면 그 권한을 전적으로 탁지부(度支部)에 주어 탁지부가 덜 것은 덜고 징수할 것은 징수하게 하여 그 징수한 재물을 마땅히 써야 될 비용에 이획(移劃)한다면 백성을 착취하거나 중간에서 착복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독쇄관(督刷官), 위원(委員), 파원(派員) 등 허다한 관원은 폐단 위에 폐단만 더하게 되니 모두 없애버려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고종실록 1900년 3월 12일)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윤용선의 상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이때 별입시(別入侍)의 명목이 날로 늘어나 청별입시(廳別入侍), 계별입시(階別入侍), 지별입시(地別入侍) 등이 있었다. 청별입시는 청(廳)에 오르는 자요, 계별입시는 뜨락에 나열해 있는 자, 지별입시란 마당에 서 있는 자이다. 위로는 대관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당과 백정, 거간꾼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고종은 그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이 알현할 때마다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이에 입시한 사람들은 고종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려 서로 알현하곤 하였다. 어느 곳에는 광산이 난다, 어느 곳에는 수리(水利)가 있다, 어떤 회사를 세워야 한다고 하면 고종은 곧바로 허락했다. 그러나 평안도는 백성들이 사나워 파견된 관원들이 누차 쫓겨나거나 구타를 당하였으므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오직 영남과 호남지방이 화를 당하여 원성이 날로 드높았다. 이때 윤용선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억지로 이런 상소를 하였다.”윤용선이 상소하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궁금이 문란한 것은 과연 한탄스럽다. 무릇 종친과 외척, 조신들의 출입하는 규정은 궁내부로 하여금 옛 법을 거듭 밝혀 시행하게 하라. 독쇄관 같은 관리를 없애버리는 것은 더없이 급한 일이다.”하지만 궁금 문란과 부패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 민영환의 어리석음 1901년에도 매관매직의 풍조는 여전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전보다 훨씬 더 심했다. 아무리 종친이나 외척 혹은 임금과 가까운 자라도 감히 한 자리도 은택(恩澤)으로 얻을 수 없었다, 관찰사 자리는 10만 냥 내지 20만 냥이었고, 일등 수령 자리도 5만 냥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서상욱은 민영환의 외삼촌이다. 민영환은 고종에게 외삼촌의 군수 자리를 달라고 오래전에 아뢰었는데, 고종은 “너의 외삼촌이 아직까지 군수 한자리 하지 못했단 말이냐?”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에 민영환이 다시 외삼촌 일을 아뢰자 고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잊을 뻔하였다. 곧바로 임명하도록 하겠다”하고는 서상욱을 광양군수에 임명하였다.   민영환은 집에 가서 기쁜 얼굴로 어머니에게 “오늘 임금이 외숙에게 군수 자리를 허락하셨으니, 천은(天恩)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러자 그의 어머니가 실소(失笑)하면서 “네가 이처럼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란 말이냐? 임금이 언제 한자리라도 은택으로 제수한 적이 있었더냐? 어찌하여 너에게만 특별히 은덕이 미친단 말이냐? 내가 이미 5만 냥을 바쳤단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는 구례에서 살고 있는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황현 지음·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하, p 106-107)  # 군수 임기를 16개월로 정하다 1903년에 군수의 임기를 개정하여 16개월로 정하였다. 이때 군수를 임명함에 있어 금액의 다과에 따랐는데, 고종은 관직을 자주 팔면 돈이 많이 생긴다고 여겨 1년도 못 되어 금방 교체시켰다. 심지어 1년 동안에 5명의 군수가 교체된 군도 있었고, 한 사람이 1년에 5개 군을 바꾼 군수도 있었다.  돈을 바치고 임명된 군수들은 부임하자마자 즉시 수탈을 일삼았다. 조금만 늦춰지면 교체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친 돈이 워낙 많아 본전을 뽑을 수 없었고, 부자로서 군수가 된 자가 몇 년 사이에 가산이 탕진되어 관직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차 드물었다. 고종은 이런 점을 깨닫고 그 기한을 16개월로 정한 것이다. 이때 기호(畿湖) 이북 지방에서는 백동전(白銅錢)을 사용하고 영호남 지방에서는 엽전을 사용하였는데, 백동전 1냥이 엽전 70푼에 해당되어, 영호남 지방에서 군수자리를 사는 사람은 서울에서 백동전을 상납하고, 시골에서 엽전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10냥이 실제로는 7만 냥이었다.그리고 백성은 조세를 엽전으로 바쳤는데, 서울에는 백동전을 바쳐,  그 차익을 챙긴 것이 자기 봉급의 10배나 되었다. 그래서 영호남 지방의 군수 자리는 특별히 좋은 자리였다. (황현 지음, 위 책, p 138-139) # 군수의 자리값 려 군수 70여 명이 새로 임명되었는데, 고종의 뜻이 중간에 변해 모두 면직되고 아울러 김주현 또한 교체되었다. 당시 군수 자리는 5, 6만 냥을 바쳐야 했는데, 졸지에 자리를 빼앗겼으니 경향에 파산한 집안들이 속출하였고, 시전에서 어음을 쓴 자는 줄줄이 구속되었다. (황현 지음, 위 책, p 147-148) # 마산포 조차(租借) 사건 1899년 5월 1일 대한제국은 마산포, 군산, 성진 세 곳에 개항장을 설치하였다. 6월 2일에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각국 공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산포 각국 공동 조계 장정이 조인되었다. 그런데 1900년 3월 30일 외부대신 박제순과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마산포의 각국 거류지(居留地) 밖의 10리(里) 이내 지점을 러시아에 조차(租借)한다는 것과 거제도는 영구히 조차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체결했다.(고종실록 1900년 3월 30일)  러시아 입장에서 마산포는 부동군항(不凍軍港)을 얻을 수 있는 천혜의 항구였다. 이를 미리 눈치챈 일본은 이미 마산포 부근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따라서 마산포의 러시아의 조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 기획.연재
    2021-12-07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부여 낙화암 낙화송
    서기 538년부터 660년까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는 당시엔 사비였고, 국호는 남부여였다. 서기전 18년 부여족의 온조가 한강을 중심으로 건국한 백제는 4세기 중반 충청도를 중심으로 북으로 황해와 경기, 동으로 강원도 서부, 남으로 전라도를 영역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이후 3년여 치열한 부흥운동을 벌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곳 부여의 금강 이름은 백마강이고 백제 멸망의 슬픈 사연이 있다. 당의 소정방이 사비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안개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때 한 노인이 날씨가 나빠진 것은 백제왕이 용으로 변하여 조화를 부리는 것이며, 평소에 백마 고기를 즐겨 먹는다는 것까지 귀띔해주었다. 소정방은 백마의 머리를 잘라 미끼로 용을 낚아 죽였다. 날씨는 좋아졌고, 결국 백제는 멸망했다.당시 소정방이 용을 낚은 곳을 조룡대라 한다. 부여 구드래 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고란사 선착장에 이르면 섬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다. 천년하고도 여러 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그네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그 조룡대다.여기 고란사 선착장에서 언덕길을 오르면 임금이 마셨다는 약수가 솟는 고란사다. 옛날, 이 약수에 띄우던 진란과 고란이라는 신선초가 있었는데, 진란은 지금 없고 고란도 멸종위기다.고란사에서 조금 더 오르면 낙화암 절벽바위의 백화정이다. 낙화암이란 이름은 낭만이지만, 그 사연은 슬픔이다. 여기서 꽃잎처럼 떨어진 삼천궁녀의 죽음이 과장이든 아니든 낙화암은 백제 멸망의 통한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떨어질 타(墮)자의 타사암이었으나, 낙화암이라 부르는 것만도 그나마 다행히 아닌가 싶다.백제의 황성 옛터인 사비부여는 멸망의 통한과,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백제 문화가 꽃을 피운 곳이다.소정방이 자신의 공적을 의기양양 써넣은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아름다운 백제탑이면서 ‘평제탑(平濟塔)’이라는 굴욕을 안고 있다. 부소산의 ‘당 유인원 기공비(唐 劉仁願 紀功碑)’ 역시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 백제 부흥운동의 주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는 와신상담의 비이다.부여 세도면 ‘반조원리’는 중국과의 교역이 한창일 때 백제의 높은 관리가 마중 나와 영접했던 곳인데, 백제 침략 시에 소정방이 이곳에서 황제의 조서를 반포하여 얻은 이름이다.부여군 양화면 암수리 산 69번지의 ‘유왕산’은 의자왕과 태자, 대신, 백성 1만2천8백7명이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강제로 끌려가기 전의 수용소였다. 해마다 음력 8월 17일이면 천, 하고도 수백 년 전, 그날의 한 맺힌 이별을 되새기는 추모 행사가 이어지는 곳이다.그 애절한 슬픈 마음은 부여국립박물관에서 씻을 수 있다. 이곳 고려 전기의 동사리 석탑,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눈부신 아름다움의 국보 제237호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제293호 금동관음보살입상을 보면 평생에 한 번 볼 수 있는 경이로움이구나 할 것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깨닫는 행운이구나 할 것이다.바로 이 사비백제의 통한과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수수 백 년 전해주는 소나무가 낙화암 백화정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7백여 살의 두세 아름 낙화송이다. 여기 낙화암은 여암 신경준 산경표의 금남정맥 끝부분이니, 끝은 또 곧 새로운 시작이다. 우러러 바라노니 천년을 푸르러 낙화암을 지켜온 낙화송은 이제 지난 역사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여는 낙화송(樂花松)이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2-02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나주 금성관 은행나무
      1894년 음력 7월 초하루, 광주지역 5천 동학농민군을 이끄는 최경선이 나주 금안리에 진을 쳤다. 7월 5일 어둠이 내리는 시각 나주 접주 오권선과 함께 나주 관아의 서쪽 성문인 서성문을 공격했다. 하지만 나주 목사 민종렬과 수성군 도통장 정석진이 이를 잘 막아냈다.8월 13일, 전봉준은 수하 10여 명과 함께 민종렬과 담판을 하기 위해 나주 관아로 들어갔다. 하지만 목사 내아인 금학헌에서의 회담은 결렬되었고, 전봉준은 객사인 금성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옷 세탁을 핑계로 사지를 벗어났다. 10월 18일, 조정은 관군과 일본군을 파견하며 호남초토영을 나주에 설치하고 민종렬을 초토사로 임명했다.11월 23일이다. 수만의 농민군은 나주 금안리의 진을 나와 북망문 쪽 함박산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농민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했다. 이틀 뒤인 11월 25일, 농민군은 금구와 원평, 태인 전투에서도 연이어 무너졌다, 12월 2일, 피신 길에 오른 전봉준은 순창 피로리(避老里)에서 피체되었다. 그리고 호남초토영이 있는 나주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되었다.나주는 천년을 넘어 역사의 고을이다. 이곳엔 영산강을 사이로 특이한 역사가 있다. 영산강 아래쪽이 마한일 때 위쪽은 백제였다. 아래쪽이 후백제일 때, 위쪽은 고려였다. 삼별초군과 동학군도 영산강 아래쪽에서는 기세를 올렸으나 나주성은 점령치 못했다. 특별한 편 가름은 아니지만, 고대사회에서 강이 위아래 고을의 소통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비단 고을 나주(羅州)는 호남의 중심 고을이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합친 말이다. 또 전라는 동서남북 온 세상을 아우른다는 뜻이니, 나주는 온 세상을 덮어주는 비단 자락이다. 그렇게 나주는 차령과 금강 이남의 웅도이자 수도였고, 앞으로도 그리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903년, 금성(나주)에 첫발을 디딘 왕건은 고려를 개국했고, 천여 년 뒤인 1894년에 온 전봉준은 동학혁명의 영웅이다. 하지만 1980년 나주를 다녀간 전두환은 치욕의 인물이다.나주는 삼한 시대에 마한의 54개국 중 불미국으로 추정되며, 목사 고을이 된 것은 983년 고려 성종 2년이다, 이 나주를 대원군이 결불여나주(結不如羅州)라고 평했다. 경지 면적 넓기는 나주만 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런 해석도 할 수 있다. 경지가 넓으니 수확량도 많고, 거둬들이는 세금도 많으니, 비리나 수탈도 함께 정비례했을 거다. 평안감사와 과천 현감, 나주 목사는 조선 시대 벼슬아치들의 1순위 선망처였다. 그러니 금성관 객사에는 선정비, 공적비가 즐비하다.그중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좌근을 기리는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가 있다. 영산포 도내기샘의 처자 ‘나합’이 김좌근을 움직여 나주의 기근에 구휼미를 실어 보낸 데 대한 보은의 비다. 하지만 안동김씨의 세도가 끝나고 두 동강이 났던 걸 다시 붙여 금성관 경내에 세웠다.또 하나 눈에 띄는 비는 나주 수성군들이 동학농민군들을 물리친 내용을 기술한 ‘금성토평비’다. 그리고 전라관찰사 윤웅렬의 ‘창덕애민비’에는 1910년 일제의 남작 작위를 받은 민족반역자라는 표지판이 함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 30여 기의 비석은 역사의 굴곡과 백성의 애환이 서린 이정표이기도 하다.아무튼, 이를 700년 가까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나무가 금성관 뒤뜰의 은행나무이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야 못 봤겠지만, 두 왕조의 흥망성쇠, 전란과 민란, 동학혁명과 나주학생독립운동 등 근현대 역사를 품고 있는 나무이다. 그러니 이 노거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저 도도히 흐르는 역사라는 물줄기에 한 점 티끌의 오욕이 되면 안 되겠구나 한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1-25
  • 황제 고종, 절대권력을 행사하다
    # 매관매직이 풍습인 대한제국 o 오스트리아 외교관이 본 조선의 정세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이 탄생했지만 매관매직은 여전했다. 흡혈귀 같은 관료의 수탈은 대한제국 시대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먼저 1898년 1월 11일에 일본 도쿄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외교관이 수집한 조선의 정세에 대하여 살펴보자. (한국엔 공사관이 없었다)“이 나라의 한탄스러운 상황은 무엇보다도 비양심적이고 부패한 관료  계층에 그 원인이 있다. 관료들은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보잘것 없는 곡물만을 받기 때문에 마치 흡혈귀처럼 민중의 피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이 나라에서는 거의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민중은 계속 비참한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관료들에 의한 철면피한 강탈체계가 폐지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조선의 새날이 밝아 올 것이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2020, p 253) o 주한프랑스 공사의 보고서 1899년 3월 25일에 주한프랑스공사 플랑시는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 했다.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사례금이 높아진 관직 매매입니다. 실제로 아무리 낮은 관직이라 해도 4000 피아스트르를 지불해야 한다고 최근 언론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가장 인기를 끄는 관직은 지방 수령입니다.최근 관직매매 소문이 점점 확산되어 의정부 참정(총리) 심상훈은 내부대신에게 이 같은 관행이 대한제국의 명성에 먹칠을 한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그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는데 내부대신이 황실에서 내린 명령을 집행하는 인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신들은 참정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그런데 황제는 내각의 태도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판단해 내부대신에게 10년 유배형을 내리고 심상훈은 15년 유배에 처했고, 다른 대신들은 파면에 처했습니다. 이 같은 느닷없는 조치로 인해 박제순 외부대신도 파면당했고, 후임으로 이도재가 임시서리로 임명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대사자료집성 19권 프랑스 외무부 문서 9 대한제국 Ⅱ·1899~1901 > 대한제국의 대외 정책과 주재 외국인 1899~1901 2권> 【3】 독립협회 현황과 관직 매매)한편 1899년 3월 15일의 ‘고종실록’에는 “심상훈이 군수 100명을 전보시킨 내부대신의 파면을 요청하자 고종은 의정부 여러 신하도 견책했다”고 적혀 있고, 3월 24일의 실록에는 “죄인 민병한은 10년간 황주군 철도(鐵島)에, 죄인 심상훈은 15년간 지도군(智島郡) 고군산에 유배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o 샌즈의 비망록 1899년 10월에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 샌즈가 궁내부 고문관에 취임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러·일 양국의 대립에서 벗어나 스위스처럼 영세 중립국이 되려면 내정개혁이 급선무라고 정부 고관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샌즈의 개혁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궁내부 관리들부터 부패했다. 특히 영친왕의 친모인 엄귀비는 샌즈의 개혁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샌즈는 1930년에 발간한 ‘조선비망록’에서 이렇게 회상했다.“지금도 관직 임용에 뇌물 수수 관행이 너무 심해 이를 직업으로 삼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까지 등장했다. 그들은 어떤 지방 관직을 얻는데 필요한 뇌물 준비금을 토지와 농산물 거래 때의 통상적인 이자인 월 12%로 후보자에게 빌려주고 공직을 얻은 뒤 짧은 기간 내에 되받아 냈다. 뇌물은 황제에게까지 올라가는 데 조선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뇌물을 그렇게 비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땅과 백성은 황제가 바라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곧 국가이다. 관리들은 황제의 징세 청부업자일 뿐이다. 지방행정도 부패했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샌즈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비망록, 2019, p127~128) o 청나라 공사 서수붕의 비웃음 1900년 12월에 청나라 공사 서수붕은 귀국하면서 고종의 매관매직을 비웃었다.“서수붕이 처음 고종을 뵈었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고종이 의아하게 여기고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본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가 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귀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30년이나 되었는데도 제위(帝位)가 아직 편안하니 기수가 왕성하지 않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고종은 크게 웃으며 부끄러운 줄 모르자 서수붕이 나가면서 말했다.‘불쌍하구나, 대한의 백성들이여’.”(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2006, p 282) #. 고종 황제, 재정권과 군권 · 인사권을 장악하다.  고종은 황제권 강화를 위해 재정권과 군권(軍權), 인사권을 무소불위로 휘둘렀다. 1898년 이후에 고종은 궁내부를 대폭 확대했다. 1894년 갑오개혁기에 관원이 163명이던 것이 1903년 말에는 470여 명으로 급증했고, 내장원(內藏院), 예식원, 철도원, 통신원 등 여러 기관이 신설됐다.   이들 신설기구는 기존의 탁지부, 외부, 농상공부 등이 관장했던 재원이나 업무를 가져갔다. 탁지부가 관장하던 화폐주조권, 홍삼 전매권, 역둔토 소작료 징수권, 상업세·어세 · 염세 등 허다한 재원들이 내장원으로 이관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부 재정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심지어 탁지부는 관원 봉급 재원도 부족하여 결세를 담보로 내장원으로부터 대규모  재정 자금을 차입하기도 했다. 고종황제의 금고인 내장원이 정부를 상대로 이자놀이를 한 것이다.  이후 내장원은 탁지부 대출금 환수를 위해 각 지방에 봉세관을 파견하여 결세를 직접 징수했는데,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원성(怨聲)의 표적이 되었다. 그 예로 1901년에 일어난 ‘제주민란(‘신축교안’, ‘이재수의 난’으로도 불림)은 봉세관이 과중한 과세를 강압적으로 징수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더구나 1900년 이후에 내장원으로 이관된 전환국은 황제의 의향에 맞춰 백동화를 대량 주조하여 ‘황제의 전환국’이 되었다. 백동화 대량발행은 물가를 폭등시켜 1904년의 물가는 1894년보다 3-5배 치솟았다. 또한 고종은 예식원을 신설하여 외교 업무를 맡김으로써 외교 업무도 외부와 예식원으로 이원화시켰다. 농상공부 산하 기관이었던 전보사,우체사, 철도사 및 광산 관리기능도 궁내부에 신설된 통신원, 철도원, 광학국으로 이관되었다.  아울러 고종은 군권(軍權)을 직접 장악했다. 고종은 1899년 6월에 원수부를 설치하고 황제가 대원수를 겸임하고 황제를 호위하는 부대인 시위대(侍衛隊)와 지방 진위대(鎭衛隊)를 증강해 배치했다. 한편 군부 예산은 지나치게 많았다. 1901년에는 정부 예산 중 44.8%에 이르렀고 1904년에 이르기까지 40%에 달했다.  고종은 인사권도 마구 휘둘렀다. ‘회전문 인사’를 자주 한 것이다. 1899년에 ‘대한국 국제’를 선포한 이후부터 1907년까지 군부대신의 임용기간은 길게는 14개월, 짧게는 2일이었다. 이들은 9년 동안 34명이 교체됨으로써 재직기간은 평균 96.6일이었다. (장영숙 지음, 고종의 인사정책과 리더십, 2020, p 338)이렇게 고종 황제는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했던 프랑스 루이 14세나 러시아의 짜르처럼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였다.   
    • 기획.연재
    2021-11-23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화순 고사정 의병청 회화나무
      ‘의병’이 무엇이냐? 정유재란(1597) 대책을 논하며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궁금했다. 왜는 성주가 항복하면 백성들도 복종했기에 의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 각처의 방백을 죽이고, 심지어 왕이 도망갔는데도 들불처럼 일어나는 의병은 이해불가였고, 뒤가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당시 곽재우와 의병총대장 김덕령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남쪽전선은 왜와 의병의 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나라가 위기일 때 농민, 어민, 노비, 중인, 사림, 퇴직 관료, 장병 등 다양한 계층을 조직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인 것은 ‘의병청’이었다.화순 만연산에서 흘러온 만연천과 삼천이 만든 삼천리(화순읍 상삼2길 31)의 의병청지(址)는 호남 의병군을 이끌었던 역사의 터이고 금산, 무주, 진주 전투 등의 승전 토대가 된 곳이다.여기 의병청지는 해주 최씨인 최경운, 최경장, 최경회 삼형제가 주역이다. 임진왜란에 삼형제는 의병청을 설치하고 병사, 전마, 군량을 모았다. 최경운의 아들 최홍재는 의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 참여했다. 최경회는 금산전투에 참여했던 의병을 이끌고 전북 장수로 나아가 왜를 무찔렀다. 무주 우지치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후꾸시마 마사나리를 활로 쏘아 죽이고 ‘언월도’를 노획했다. 이 언월도는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오동나무꽃 문장이 새겨진 보물급 칼이다. 또 이때 왜장의 품에서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와 ‘고려청자’까지 되찾았다.또 최경회는 진주성에서 왜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 황진, 고종후 등과 함께 9일 밤낮을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때 최경회를 따라 종군하던 주논개는 남편의 순절에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남강으로 유인하여 투신 순절하였다.선조는 최경회의 형인 최경장을 ‘계의병대장(繼義兵大將)’으로 임명하였다. 장남인 최경운은 500여 의병을 이끌고 화순의 오성산성을 지키다 1597년 순절했다. 1782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화순 현감이 올린 ‘오성산최경운전망유허도(烏城山崔慶雲戰亡遺墟圖)’가 그때의 기록이다.이들 해주 최씨 삼형제와 의병청지를 기리는 곳이 의병청지인 고사정이다. 이 고사정은 1678년(숙중 4)에 삼형제의 둘째인 최경장의 아들로 칠곡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최후헌이 지었다. 고사정은 선조가 칭송한 남쪽 고을의 높은 선비라는 뜻의 ‘남주고사(南州高士)’에서 유래한다.여기에 수령 200여 년의 회화나무가 있다. 이 회화나무는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가 나오며 잡귀신이 범접을 못 한다는 길상목(吉祥木)으로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일제강점기 때이다. 왜의 헌병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언월도’를 내놓으라고 최씨 가문의 종손 상투를 회화나무 가지에 묶어놓고 사흘을 고문했다. 하나 종손은 꿋꿋이 버티며 끝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6·25 때 경찰이 언월도와 청산백운도, 고려청자를 가져갔다. 언월도가 불법무기라는 명목이었고. 이 언월도를 경찰서 난로의 조개탄 쑤시개로까지 썼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으로 언월도는 되찾았으나, 청산백운도와 고려청자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다.또 여기 고사정 앞에는 의병청지의 수천 명 의병이 마시던 우물이 있다. 당시에는 우물이 세 개였으나 지금은 하나만 남았다. 최경운 의병대장의 호인 삼천, 그 세 우물은 이곳 삼천리의 지명이기도 하다. 또 여기 고사정은 계의병대장인 최경장의 후손이 지키고 있다.‘상투를 묶었던 가지는 아버님이 보기 싫다고 잘라 버렸지요.’최현신 종손의 말에 다시 올려다보는 회화나무에 햇살이 빛나고 흰구름 한 조각이 걸려있다. 어찌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졸렬한 자들이 조선 선비의 기개와 의기를 깨닫으랴? 최경운, 최경장, 최경회 세 분이 이끈 의병청의 의기가 문득 삼천의 샘물로 솟구친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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