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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함양 휴천면 목현마을 정대영 구송
      휴천은 이름처럼 내가 쉬는 곳이다. 물길이 흐름을 멈출 리 없지만, 먼 길 가는 나그네에게 잠시의 쉼은 삶과 숨의 여유와 낭만일 게다. 여기 휴천면의 나뭇골인 목현마을에 가지가 아홉이어서 구송이라 부르는 아름다운 자태의 소나무가 있다. 세월이 흐르며 가지 둘이 없어졌다지만 그런들 어쩌랴? 본디 이름이란 불리우고 남겨지면서 의미가 깊어지는 것이다. 여기 휴천면을 만든 지리산은 ‘방장’, ‘두류’라는 이름도 있다. 백두산 줄기가 흐르는 곳, 머무는 곳이어서 두류이다. 또 방장은 신선이 살고 불사의 영약이 있으며 뭇 짐승이 모두 흰빛, 궁전은 금은으로 지어졌다는 봉래, 영주와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이다. 바로 그 지리산이 흐르는 곳, 잠시 머무는 곳을 지키는 휴천면 목현마을의 구송은 반송인데, 이는 나뭇가지가 옆으로 퍼져 마치 밥상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송이 일반 소나무와 다른 점은 원줄기가 지면 가까이에서 3개 이상으로 갈라지는 것이라 한다. 일본반송은 지면에서 조금 올라와 갈라지고, 나무껍질이 검으면 곰반송이다. 지리산의 서쪽 물줄기는 섬진강으로 가고 동쪽 물줄기는 낙동강으로 간다. 남원의 요천은 섬진강으로 가지만, 남원 운봉의 세걸산 아래 금샘에서 솟구친 람천은 낙동강으로 간다. 이성계의 황산대첩 때 왜구의 피로 이레 동안 핏빛이었다지만, 람천은 이름처럼 쪽빛 맑은 물로 그냥 떠서 마시는 식수였다. 이 람천이 지리산 천왕봉이 환히 보이는 마천면에서 임천이 되고, 휴천면의 기암괴석이 즐비한 용유담에 이르러 엄천이 된다. 엄천은 ‘엄천사’라는 큰 절집이 있어서 얻은 이름이라 한다. 이 엄천이 흐르는 문하마을에는 마치 용이 누워있는 듯 우람한 용바위 와룡대가 있다. 정여창과 김일손이 ‘가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 하여 가거동이라 했는데, 소나무와 어우러진 용바위를 보며 바둑을 두는 신선도 함께 사는 곳이구나 한다. 이 용바위를 지나 곧바로 꺾인 물길이 모래를 쌓아 만든 섬은 새우섬이다. 여기 한남마을은 세종대왕의 서자인 한남군 이어(1429~1459)가 세조 때 단종 복위 실패로 유배 온 곳이다. 마을 이름이 한남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듯 지리산의 흐름이 잠시 머무는 휴천면은 인심이 순후한 석학과 유림의 고장으로 빼어난 인물이 향토를 빛냈다. 목현리 아홉 가지 구송을 심은 정대영은 헌종 4년(1838~1903)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3년의 시묘살이를 했다. 향약계를 조직하여 향장으로 마을의 부흥에 힘썼고 예법과 경전을 강의하여 후진 양성에 헌신하였다. 진양 정씨가 이곳 함양에 자리 잡은 것은 성종 19년에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정희보(1488~1547) 때다. 정희보는 17살에 나주박씨인 박맹지(1426~1492)의 손녀와 혼인하고 수동면 당곡의 처가로 왔다. 그의 호가 당곡인 연유이다. 그의 후학으로 노진, 이후백, 양희, 소세양, 강익, 오건, 임희무, 변사정, 정복현, 노관, 우적, 조식, 양홍택, 정지 등 관료와 의병장, 학자 등이 있으니, 함양 고을의 학풍은 정희보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이 정희보의 후손인 정대영은 아홉 가지 구송을 심고 나무 아래 대(坮)를 쌓아 구송대라 하였다. 아름다운 반송 그늘은 귀한 손님을 맞을 때나 떠나보낼 때 ‘영접과 환송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 구송대 옆 냇물에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하니 그 풍경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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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0
  • 대한매일신보 “매국노 수입하려면 한국으로 오라”
    이토-이완용 비밀각서 교환통감부, 사법부·경찰권 장악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순종이 즉위한 4일 후인 1907년 7월 24일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전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한일신협약을 제시하였다. 이에 이완용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 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하고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7월 24일 밤에 이토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한일신협약(보통 ‘정미 7조약’이라고 부른다)을 체결, 조인하였다.한일신협약 (정미 7조약)은 이렇다.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이하의 조관(條款)을 약정한다.제1조한국 정부는 시정(施政) 개선에 관하여 통감(統監)의 지도를 받을 것이다.제2조한국 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이다.제3조한국의 사법 사무는 일반 행정 사무와 구별할 것이다.제4조한국의 고등 관리를 임명하고 해임시키는 것은 통감의 동의에 의하여 집행할 것이다.제5조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 사람을 한국의 관리로 임명할 것이다.제6조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가 없이 외국인을 초빙하여 고용하지 말 것이다.제7조1904년 8월 22일에 조인한 한일 협약 제1항을 폐지할 것이다.”(순종실록 1907년 7월 24일)이리하여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한 데 이어서 내정권도 빼앗겼다. 그런데 이토와 이완용은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비밀각서를 교환하였는데, 그 내용은 군대해산, 각부 차관의 일본인 임용, 통감부의 사법부와 경찰권 장악 등이었다.  이로써 정부 각부의 차관과 주요 국장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하여 한국인 대신(장관)은 결재만 하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이러함에도 조정에는 조약에 반대하거나 조약을 체결한 대을 처벌하라는 상소 한 장 올라오지 않자, 1907년 8월 11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여 매국노를 수입하려거든 대한국으로 건너오시오…. 황족 귀인과 정부 대관이 다 나라를 파는 중이요”라고 통탄했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p 250-251) # 순종, 군대를 해산시키다.             한편 7월 24일에 순종은 법률 제1호, 〈신문지법(新聞紙法)〉을 반포하였다. (순종실록 1907년 7월 24일 3번째 기사)<신문지법>은 신문 발행 허가제, 신문 사전 검열제, 벌칙으로 발행 정지권과 시설 몰수권 등을 규정했다. 이 법은 언론 탄압과 언론 통제의  법적 근거가 되었으며 식민지 언론의 교두보가 되어 그 해악이 컸다. 이어서 순종은 7월 27일에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는 법률 제2호, 〈보안법(保安法)〉을 반포하였다. 언론 통제에 이어 집회와 결사도 금지시킨 것이다.   이어서 7월 31일에 순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군대를 해산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렸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재 우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 제도를 쇄신할 생각 아래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데에 전력하고 뒷날에 징병법(徵兵法)을 발포(發布)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려고 한다.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恩金)을 나누어주니 너희들 장교(將校), 하사(下士),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각기 자기 업무에 나아가 허물이 없도록 꾀하라.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統監)에게 의뢰하라.”(순종실록 1907년 7월 31일 양력 1번째 기사)당시의 군대 병력은 중앙에 4천 명(시위대 보병 2개 연대 약 3600명, 기병·포병·공병·치중병 약 400명)과 지방에 8개 대대(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해주·안주·북청) 약 4800명으로 도합 8800여 명이었다. 8월 1일 이른 아침에 이완용 내각은 중앙군 시위대 해산부터 시작했다. 오전 7시에 군부대신 이병무는 일본군 사령관 관저인 대관정에 시위대 각 대장들을 소집하고 해산 조칙을 전달했다. 그는 각 대장들에게 8시까지 훈련원(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맨손으로 모이라면서 10시에 해산식을 거행한다고 통보했다. 새벽부터 비가 퍼붓는 훈련원 해산식에 참가한 인원은 제1연대 제2대대 575명, 제1연대 제3대대 488명, 제2연대 제3대대 405명, 기병대 88명, 포병대 106명, 공병대 150명 등 총 1,812명이었다. 이때 정부는 하사에게는 80원, 병사 1년 이상자에게는 50원, 1년 미만자에게는 25원의 은사금을 지급하고 모자와 견장을 회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그런데 같은 시각에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성환(1869~1907)이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를 계기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군인들은 병영 내에 있던 일본인 교관에 대한 총격을 하였고, 인근의 제2연대 병사들과 함께 병영 밖으로 뛰쳐나와 남대문 부근에서 기관포로 무장한 일본군 제51연대 소속 3개 대대 병력과  두 시간 이상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200여 명(사망 68명), 일본군 90여 명(사망 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지방군인 진위대는 8월 3일 개성과 청주를 시작으로 9월 3일 북청 진위대까지 약 1개월에 걸친 해산계획이 세워졌다.그러나 8월 6일 강원도 원주 진위대의 저항을 시작으로 강화도 분견대가 무장봉기하고 충주·제천 등 각지 진위대 군인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진압에 나선 일본군의 사상자도 68명에 이르렀고, 한국 측  피해는 1,850명으로 집계되었다.이어서 일제는 서울의 잔존 부대인 여단사령부, 연성학교, 헌병대, 치중대, 홍릉수비대, 군악대를 8월 28일에 해산시켰다.한편 해산 군인들의 저항은 8월 이후 전국적인 의병 봉기의 열기로 연결되었다. 서울에서 내려간 시위대 병사나 각 지방 진위대 병사들이 무기를 지닌 채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충청도, 호남 일대로 내려가면서 의병 부대에 합류했다. # 기삼연, 호남 의병을 일으키다.  8월 1일 군대해산 후 전국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자 기삼연은 분연히 동지들과 손잡고 1908년 10월 말 장성 수연산 석수암(隨緣山 石水庵)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부대를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 이름하였다. 이 때 편성된 의진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대장 기삼연, 통령(統領) 김용구, 참모 김엽중 김봉수, 종사(從事) 김익중 서석구 전수용(전해산) 이석용, 선봉장 김태원(김준), 중군(中軍) 이철형, 후군 이남규, 운량 김태수, 총독 백효인, 감기(監紀) 이영화, 죄익 김창복, 우익 허경화, 포대(砲隊) 김기순  의진 명칭에 ‘회맹’이란 단어가 포함된 것은 4-5개 의진의 연합체란 의미였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에 추대된 기삼연은 ‘대한매일신보사’에 격서문을 아래 편지와 함께 보냈다. “나라가 부서지고 집이 망하였다.  여러 군자께서는 춘추의 대의로 곧은 붓을 잡아 몸은 신문사에 있으며 손으로 역사의 일기를 기록하여 천지의 바른 윤리를 돌리어 인민의 귀와 눈을 넓히면 인의로 성벽을 삼고 필묵이 무기가 되어 시골 군사 10만 명보다 나을 것이오니 더욱 높고 깊게 힘쓰시오. 통고하는 한 격서문을 삼가 보내드리오니 물리치지 마시고 신문에 기재하여 널리 유포하여 주십시오. 이는 곧 군자의 재량에 달렸습니다. 여러분 밝게 살피시오” 이어서 기삼연은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려 민중의 협력을 촉구하고 왜적에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격문 끝에는 ‘평민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1907년 10월말부터 1908년 1월말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주로 장성· 영광 · 담양 ·고창 · 함평 · 무안 등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의병전쟁을 벌였다. 이들의 주된 공격 대상은 일본 군경뿐만 아니라 일본인 우체부 및 이민자들이었다. 또한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는 조선인 밀정 및 일진회원의 처단 및 납세 거부투쟁에도 앞장섰다.   기삼연 의진은 10월 29일 고창 문수사에서 선봉장 김태원의 할약으로  일군을 격파하였다. 12월 7일에 의병부대는 영광 법성포를 공격하여 그곳을 탈환하였다. 그런 다음 순사주재소와 우편소는 물론 일본인 가옥 7채를 불태워버렸다. 이어서 창고에 쌓여 있는 세곡(稅穀)을 비롯한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노획하였다. 이후 호남창의회맹소는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의병부대를 나누어 활동하였다. 기삼연 본대는 장성과 담양으로, 김용구 부대는 고창으로, 김태원 부대는 나주, 함평, 광주로 이동하여 활동한 것이다.호남의병들이 기세를 부리자 일본군은 토벌대를 편성하여 1908년 1월 중순부터 광주, 나주, 장성, 함평, 순창 등지의 의병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제는 대구에 주둔하는 보병 제14연대  (1000여 명)를 호남 의병 진압에 투입시켰다.
    • 기획.연재
    2022-10-19
  • 주성식의 어른 왈/개는 왜 짖을까?
      한 국회의원의 발언 그리고 그 후의 처신과 관련해 소란이 벌어졌다. 그 ‘나리’의 지난날 발언과 관련해 한 공직자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 공직자가 나리의 말과 행동에 근거해 무슨 ‘주의자’라고 했던 것이 확인되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 조금이라도 지력(知力)이 있다면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할 일이다. 정치가 더럽다거나 그 일에 종사하는 것들이 엉망이라는 뻔한 사실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개들 판’이라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고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재주가 놀랍고 저열(低劣)한 자질과 천박한 지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 나리는, 직접 토론하거나 구경이라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을까? 상대의 주장이나 발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몰라도 되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한 번도 경험할 수 없는’ 세상에서만 살았는가?  그 공직자의 발언을 문제 삼으려면, (무슨 주의자라는) 판단 근거의 사실 여부, 추론의 논리적 적합성 그리고 발언 전후에 특정 의도가 개입할 소지(素地)의 유무(有無) 등을 따져봐야 했다. 그런데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라고? 그는 과연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분노’했을까? 적국(敵國)의 간첩이라는 혹은 그 나라 지도자를 추종한다는 누명 혹은 오해를 견딜 수 없어서? 요즘은 ‘느낌’이 중요한데, 유권자들이나 일반 국민들이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될까 봐 무서워서? 아니면 그런 개돼지들이야 전혀 상관할 바 없지만, 은밀하게 활동해야 할 처지에 말과 행동을 조심하지 않아 정체가 발각되고, 그래서 ‘윗선’의 질책과 징계를 받을 것이 두려워서?  히틀러를 존경한다면 나치주의자요 스탈린을 좋아한다면 공산주의자다. 아닌가? 그래서 그 나리의 실수가 더욱 안타깝다. 왜 그 공직자가 사상과 표현의 자유까지 건드린 것을 지적하지 않았을까? 옛 소설의 서얼(庶孼) 출신처럼 마음껏 호부(呼父)하지도 못한 한(恨)이 골수와 폐부에 사무쳤을 텐데, 절실한 정의(情意)를 드러낼 때를 지나친 것 아닐까? 지엄(至嚴)한 함자(銜字)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을 꾸짖고, 충성의 단심(丹心)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 아닌가? 자기의 ‘주의’를 드러낼 신념과 용기가 없는 것인가? 요즘 나라 안팎에 완력(腕力)을 뽐내며 짖기를 멈추지 않는 것들이 많다. 시끄러운 장(場)에서 곁불이라도 쬐려고 조바심하는 것들도 넘쳐난다.  그러나 가엾은 마음에 일러주는데, 개는 무서우니까 짖는다. 그렇다. 아예 물 능력이 못 되고, 그럴 뜻도 없는 것이다.  
    • 기획.연재
    2022-10-18
  • 여유로운 곳! 멋진 쉼터! `제주 성산 아름다운리조트`
     제주 ‘아름다운리조트’ 재단장 마치고 “혼저옵서예!”성산 일출봉·우도 등 명승지 접근성 좋고 여유로워휴식 위주로 바뀐 관광 추세 따라 조용히 인기몰이 제주도 동쪽 끝에 있는 아름다운리조트(대표 지석민,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해맞이해안로 2644)가 최근 관광의 변화 추세를 반영하면서 조용히 인기몰이 중이다. ‘여유로운 휴식’ 찾는 추세 따라제주도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관광객 폭증으로 인한 문제점 또한 드러나고 있다. 대도시보다 더한 혼잡으로 인해, 여유로운 휴식이 아니라 불편과 짜증에 시달리기만 했다는 하소연이 늘고 있는 것.그런 관점에서 ‘아름다운리조트’가 입소문을 타고 있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아름다운리조트’ 부근에는 명소가 모여 있다. 바로 곁에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명소 성산일출봉이 있고, 우도(牛島)가 눈앞에 보이며 섭지코지· 광치기해변 등 소문난 관광지가 즐비한데도 놀랄 만큼 한적하고 조용하다. 숨어 있어 잘 드러나지 않은 보석이라고 하겠다. 최근 전면 개보수 마쳐‘아름다운리조트’는 최근 객실(40실)을 비롯한 시설 전체를 개보수했다. 최대 15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패밀리룸을 비롯해 2인실까지 다양한 수요에 대비하면서, 이용 편의성을 최대한 높였다.객실마다 취사 시설, 욕실, 대형 TV, 베란다가 갖춰져 있다. 전 객실이 바다를 향하고 있어, 베란다에서 일출과 낙조(落照)를 감상할 수도 있다. 전기차 충전시설(2기)이 충분하고 주차장도 넓다. 번잡하지는 않지만 이용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 편의점과 음식점도 다수 영업 중이다. 하루 내내 여유로운 곳‘아름다운리조트’는 아침에 해를 맞으면서 일어나 바닷가와 이어진 산책로(환상자전거길 포함)를 걷고, 낮에는 주변 명소를 방문하거나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멍 때릴 수 있고, 저녁에는 지는 해를 배웅하고, 밤에는 우도(牛島)의 아련한 불빛과 고깃배의 눈부신 집어등(集魚燈)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곳이다. 넉넉하게 쉴 수 있고, 마음만 내키면 어떤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어떤 선택이건 가능한 곳이다. 사람을 받드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레지나〉 ‘아름다운리조트’ 총지배인은 “우리의 목표는 「철저한 봉사」”라고 힘줘 말한다. 제대로 봉사하면 고객 만족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 자신을 비롯한 전 직원이 ‘고객이 있어야 리조트도, 우리도 있다’는 각오로 ‘철저한 봉사’를 실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총지배인은 “고객이 떠나시면서 건네는 ‘수고했다. 고맙다’라는 덕담이 ‘아름다운리조트’의 자산”이라며 최고를 향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 기획.연재
    2022-10-17
  • 이규현 전남도의회 의원 “직접민주주의 실현에 최선!”
     담양군의회 3선 거쳐 지역 기대 모아 전남도의원 당선 “민주당, 인재 육성 등 지역 기반 확보 절실” 쓴 소리   서예·문화행사·저술로도 명성 ‘전남문화 발전 적임자’대담=주성식 선임기자담양은 전남의 북쪽 끝에 있다. 그러나 전북을 포함한 호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중심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의 이치를 살핀다는 이들은 담양 삼인산(三人山) 앞에서 무등산에 이르는 너른 들이 한반도의 도읍지(都邑地)로 최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판단이 증명되는 것일까. 광주광역시의 배후 도시 정도로 여겨지던 담양은 최근 관광 열기와 여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추세에 맞춰, 남도의 핵심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이규현 전남도의회 의원(담양2, 농업수산위원회, 초선)은 담양이 해묵은 농촌의 모습을 벗어나 ‘새로운 문화의 중심’으로 변화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3선 군의원을 지내면서 담양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꾸준하게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을 마련하는 데 진력해 왔다.  이규현 의원은 첫 도의원 업무를 수행하면서 담양과 전남 그리고 소속 정당의 유기적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지역 민원부터 전남 전체의 숙원사업 그리고 정치 전반에 이르기까지, 냉철한 문제의식을 갖고 열정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농사 풍년이 농심 흉년으로 추락한 현장을 뛰어다니며 정부에 해결책을 요구하고 농민들을 격려하고 있는 이규현 의원을 만났다.-도의원 당선과 그동안 활동 소감은?도의회로 보내 주신 군민들께 감사드린다. 담양군의회 3선 의원으로 활동한 것에 대한 평가의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담양군뿐 아니라 전남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답하려고 한다. 전남 도의원들의 의정활동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다. 나도 더 열심히 배우려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의원들과 잘 협력하면서 신뢰받는 의원이 되는 데 힘쓰겠다.-도의원으로서 포부가 있다면?주민들과의 소통을 바탕으로 해 공약사항을 철저히 이행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자치·농정·문화 예술 발전에 집중할 계획이다.  특히 주민들의 집단민원 현장에는 꼭 함께해, 주민 편에 서서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다. 대전면의 한솔페이퍼텍(주) 이전, 창평면 예비군훈련장 이전 등이 좋은 사례다. 헌법이 보장하는 환경권 확보를 비롯해 지역발전을 위한 투쟁에는 늘 최일선에서 주민들과 함께한 것을 자부하고 있다.-전남 도정(道政)의 문제점이라면?전남은 농업 분야에서 선도적인 정책을 실행하고 있지만, 부족한 점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22개 시군 중 16개나 되는 인구소멸(예상)지역 관련 대책이 절실하다. 나는 그동안 농어촌기본소득이 도입돼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 왔다. 균형발전 사업 정도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또 남도문화르네상스를 내세우고 있지만, 전업 작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문화계 종사자들의 여건이 매우 열악하다. 자랑스러운 남도문화의 전통을 살리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창작비 지원 등 대책이 필요하다. 지방자치 30년이 지난 현재 지방분권과 주민자치의 상황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향후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주민자치가 확실히 정착돼 제 기능을 하도록, 마을공동체 활성화 등 마을 민주주의 실현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특히 여러 부서의 다양한 사업을 관장할 일관된 지휘체계가 필요하다. 도시재생사업·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농촌협약)·문화도시사업 등 부서별 사업마다 관리에 중복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 통합 관리함으로써 예산 절감은 물론이고 사업 효과도 배가될 것이다. -광주 군(軍) 공항 이전, 신재생에너지와 관련한 입장은?광주 군(軍) 공항 이전은 ‘기부 대 양여’방식이 원칙이다 보니 한계가 있었다. 이제 국가 주도 방식으로 전환하고, 광주·전남이 상생하는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신재생에너지 즉 대안에너지 도입은 전 세계적인 추세인 만큼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시행 과정에서 환경 등 관련 주민들에 대한 영향이 충분히 논의돼야 한다. 또 새로운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것 못지않게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식 전환) 교육도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집행부·의회 등 민주당 독점에 대한 견해는?우리 정치는 정당이 지역화되고 거대 양당의 독과점이 계속되면서 여러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한 없이 개진되고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데 효과적인 다당제 구도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전남도의회는 의장을 비롯한 구성원 전체가 정당 구분 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본다. 의원 모두가, 전남 발전과 도민의 행복이라는 ‘제일의(第一義)’를 실현하는 것이 최고 임무라는 인식 아래 초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남에 의과대학을 설립하는 데 전체 의원이 한 뜻으로 뭉쳐 있다.-정치 특히 지방자치에 대한 견해는?국민들이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대단히 송구스럽다. 뼈를 깎는 자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내가 소속된 더불어민주당은 이 지역 집권당인 만큼 부담이 크다. 민생 현안과 여론 추이 등을 파악하기 위해 당원과 주민의 견해를 듣고 논의하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 전남도당 차원에서 다양한 토론과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기 바란다.도당에 노인위원회·여성위원회·청년위원회·농어민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가 있지만, 의견을 모으고 정책을 만드는 과정이 제대로 진행됐는지 돌이켜볼 필요도 있다.특히 인재 육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당원들을 대상으로 2년 이상 소요되는 교육과정을 만들고, 이를 통해 역량을 갖춘 후보(군)를 키워야 한다. 현재처럼 짧은 (교육)시간만 채우면 얼마든지 입후보할 수 있는 형식적 제도는 보완해야 한다. -공직자로서 소신은 어떤 것인가?그동안 부끄럽지 않은 공직자가 되기 위해 힘썼다. 이번 도의원에 당선된 후 한 지역 주민이 글을 써주셨는데 나의 소신을 집약해 상징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즉  「子産曰 政如農功 日夜思之 思其始而成其終 朝夕而行之 行無越思 如農之有畔 其過鮮矣(자산이 말하기를 ‘정치는 농사처럼 밤낮으로 마음을 써야 한다. 처음을 생각해 끝을 이뤄야 한다. (이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되, 행하는 것은 생각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농사를 짓되 두렁(한계)이 있는 것과 같으니 잘못이 적을 것이다) - 춘추(春秋) 좌전(左傳) 양공이십오년(襄公二十五年)이 글의 의미를 바탕으로 삼고 전해주신 분의 뜻을 동력으로 해 의정 활동에 진력하려고 한다. 어떤 경우의 무슨 사안에나, 진정한 자치의 실현과 도민의 행복에 합당한가를 먼저 생각하려고 한다. -목표가 있다면?스페인의 ‘마리날레다’시(市) 같은, 직접민주주의가 제대로 실천되고 주민 모두가 행복한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과거에 이장(里長)으로 일할 때 ‘창조적마을만들기사업’에 선정돼, 마을 내 협동조합을 만드는 등 활동한 경험도 있다. 지방의회에 진출하면서 ’일시 중지‘ 상태지만, 마을공동체 관련 활동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이규현 의원은 정치인에 앞서 널리 알려진 문화 예술인이다. 담양군예술인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메타세콰이어가로수길’을 전국적 명소로 키워냈다. 2004~5년 대나무축제집행위원장으로서 대나무축제를 성공시켜 독특한 지역문화 활성화에 기여했다. 이 의원은 서예(書藝) 분야에서 국전 초대작가·전남 미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남도서예문인화대전 초대작가·광주시미술대전 추천작가로 활동하며, 개인전 3회를 비롯해 여러 단체전을 개최한 바 있다. 또 지명(地名) 천년을 맞아 담양군사편찬위원 및 집필위원으로 활약했고 대전면지(大田面誌) 편집위원장을 맡아 면지 발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어느 때나 쉽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다정한 이웃‘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이규현 의원은, 튼실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정치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꼭 옛글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오직 만물에서 배워 사람을 온전히 섬기려는 것이니, 삼인산 우뚝한 솟음이며 멀리 무등까지 껴안은 담양 들판 너른 품에 꼭 맞춤하지 않는가.부인 조융희 여사(60세, 풍물패 공연 등 봉사활동 주력)와 슬하에 2남. 종교는 천주교.  
    • 기획.연재
    2022-10-17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남원 정충사 황진 소나무
      조선시대 으뜸 장수는 누구일까? 대부분 이순신을 떠 올릴 것이다. 그럼 육군에서만은 누구일까? 여긴 답이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단연코 황진(1550~1593)이다. 황진은 임진왜란에 나라의 운명을 바꾼 용장이다. 선조 9년(1576) 27살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첫 전투는 1583년 함경도 회령의 야인여진 니탕개의 난 평정 때이다. 이때 평생의 벗이자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김해부사 이종인과 함께 눈부신 활약을 했다. 1590년 임란 두 해 전이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선전관인 황진은 호위무사였다. 이때 일인들이 50보 과녁을 쏘아 맞히고 자랑하자, 황진은 작은 과녁을 그 옆에 세워 명중시킨 뒤, 마침 날고 있는 새 두 마리까지 떨어뜨렸다. 또 일본도 한 쌍을 사면서 "머잖아 왜가 침입하면 이 칼을 쓰겠다"고 했다. 또 화순 동복현감으로 부임할 때다. 황진은 비쩍 마른 말 한 마리를 사와 살찌게 키웠다. 그 말을 타고 적벽강 모래밭을 달리며 칼, 창, 활쏘기와 진법 등 병사 조련에 힘썼다. 1592년 왜가 침입하여 거침없이 북진하는 6월 5일 황진은 용인전투에 참전했다.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600여 왜군에게 5~8만여 조선군이 어이없이 참패했는데, 황진의 군사만은 거침없이 적을 무찔렀고 피해도 없었다. 이어 황진은 남원성 방어를 위해 파견 나갔다가 7월 10일 뒤늦게 웅치 전투에 참여했다. 조선군이 왜의 화력에 밀려 전주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안덕원으로 후퇴해 있을 때였다. 황진은 왜의 앞을 막아 섬멸하면서 이치고개에 이르렀다. 왜병이 개미 떼처럼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올랐다. 황진은 부사수 두 명이 쉴 틈 없이 건네는 화살을 받아 쏘고 또 쏘았다. 앞의 화살이 꽂히기도 전, 뒤 화살이 날아가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적의 조총에 스쳐 상처를 입고도, 오른손 엄지 뼈가 드러나도록 쏘았다. 이치 대첩 뒤 수원 사평에서 홀로 왜군에 둘러싸였으나, 왜장의 말까지 빼앗아 타고 마구잡이로 적을 베어 왜군을 경상도 상주까지 몰아냈다. 결국, 왜군은 연이은 패배로 1593년 4월 한양에서 부산포로 퇴각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왜군은 7월 진주성 함락의 총공격에 나섰다. 상주에 있던 황진은 병력 700명과 함께 진주로 갔다. 그러나 왜군 10만여 명에 놀란 권율,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과 명군은 고개를 휘저으며 멀찌감치 물러나 버렸다. 이때 의령의 곽재우가 "진주는 외로운 성이라 지켜낼 수 없다"고 했으나, 황진은 "김천일과 약속했으니 두 번 죽어도 싸우겠다"고 했다. 또 어릴 적 의형제를 맺었던 형이 경상우병사 최경회였다. 그날 황진은 성 밖에 있던 최경회의 아내 논개를 만나 함께 입성했다. 진주성에서 황진의 활약은 용이거나 호랑이의 기세였다. 날이 덥기도 했지만, 웃옷을 벗어 던지고 흙과 돌을 날라 토산을 쌓아 28일에는 진두지휘로 왜병 1000여 명을 죽였다. 하지만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병이 쏜 조총 한 발이 성의 목판에 튕겨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성루에 있던 황진은 장검을 쥔 채 적진을 노려보며 전사하였다. 그렇게 황진이 순절한 다음 날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하지만 왜 역시 임란 전투 중 가장 많은 4만여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육지에서는 황진,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곡창 호남을 차지하려는 왜의 야욕을 막은 것이다. 그렇게 조선의 운명을 바꾼 황진의 시신을 남원 의병이 고향으로 모셨다. 그 뒤 황진의 말이 묘 앞을 지날 때면 걸음을 머뭇대며 슬피 울었다. 남원시 주생면에 황진기념관, 묘와 사당 정충사가 이웃이다. 그 정충사와 묘를 향해 고개 숙인 소나무를 보며 황진의 말처럼 머뭇머뭇 걸음이 헛디뎌진다. 고인 눈물이 앞을 가리며 점점 붉어지더니 핏빛으로 뚝 떨어진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10-13
  • 주성식의 어른 왈/한글의 비극
      요 며칠 사이 한글을 떠받드는 말글이 온 누리에 차고 넘친다.(글쓴이 나름대로 뜻을 두려고 첫 줄을 한글로만 써봤다)  한글은 그 구성의 과학성과 사용의 편리성부터 창제(創製)의 바탕이라는 애민(愛民)정신에 이르기까지, 온통 경탄과 찬양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휴대용 통신기기 등에 쓰는 기계어(機械語) 측면에서는, 다른 언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니 자랑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걱정도 적지 않다. 한글 사랑이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외눈박이나 우물 속 개구리가 세상을 보는 듯한 꼴은 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통신사가 ‘우리 말(글)’ 관련 방송에서, 없애거나 바꿀 말로 ‘호출(呼出)·뗑깡·우동’을 들었다. 일본어 혹은 일본식 한자(漢字)라는 것이다.  그러나 호출은 일본뿐 아니라 중국도 쓰고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도 정식으로 올라 있는 단어다.  뗑깡(てんかん癲癎)의 어원(語源)을 밝히고는 ‘생떼’라고 써야 한다는 애국적인 주장은 눈물겹지만 그저 억지로 보인다. 그렇게 따지고 밝히자면 우리 민족만 쓰는 말과 글이 얼마나 되겠는가. 과연 다 알아낼 수는 있겠는가?  우동(ぅどん)을 가락국수로 써야 한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짜장면부터 작장면(炸醬麵) 혹은 춘장볶음국수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은 핫도그(HOT DOG)를 중국처럼 열구(熱狗)라거나 뜨거운 개라고 써야 한글을 올바로 대우하는 것이며 제대로 애국하는 것인가? 그러나 한글의 비극은 이런 짓이 그 방송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 신문사는 애매모호(曖昧模糊)를 들먹이며, 애매(曖昧)가 일본식 한자니 쓰지 말고 모호(模糊)만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일본어 혹은 일본식 한자(만!)는 이 사회에서 무조건 배제해야 하는 악(惡)이고 쓰레기라는 식(式)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애매는 중국 동진(東晉) 시대 대문장가였던 손작(孫綽)의 난정후서(蘭亭後序, 서기353년)에 나오니(聊於曖昧之中) 써도 될까? 이 사회가 철학(哲學)과 주의(主義)라는 어휘를 쓰게 된 경위(經緯) 그리고 인간(人間)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용법이 한자 문화권에서 변한 내용을 알게 되면, 이것들을 모조리 폐기하고 새로 조어(造語)해서 써야 할까? 패거리 몇몇이 모여 지적(知的) 도덕적 우월성을 독점한 것처럼 날뛰려면, 그만한 바탕이라도 있어야 한다. 죽창(竹槍) 깎아 들고 쳐들어가자며 나불거리기만 하지 말고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한’은 크고, 넓고, 높고, 밝고, 하나로 온전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에 유일(唯一)이나 독존(獨存)은 없다. 그러니 품을 열어야 한다.(廣開土) 방구석에 처박혀 혼자 거울 들여다보며 자랑하고 뽐내는 것 같은 ‘뗑깡’을 그치지 않으면, 한글은 마침내 한(漢)글이나 한(限)글 한(恨)글이 되고 말 것이니 말이다.
    • 기획.연재
    2022-10-11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밀양 어변당 박곤 은행나무
      한여름 땡볕이 눈부신 날 어변당을 찾았다. 밀양시 무안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2km쯤 가니 오른쪽으로 직각으로 길이 꺾인다. 그 들녘 한가운데 길로 들어서니 눈앞의 산봉우리가 좌우로 두 날개를 펼치고 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으니, 어변당이 있는 연상리 상당동이 바로 그 알의 마을이다. 이곳은 조선 초기의 무장 박곤 장군이 무예와 학문을 닦으며 살던 곳이다. 또 어변당의 적룡지와 함께 그를 기리는 덕연서원이 있다. 박곤은 밀성 박씨 태사공파 박언부의 11대손이다. 이곳 연상리로 이주해온 박의번의 둘째 아들로 고려 공양왕 3년(1391년)에 태어났다. 박곤은 효성이 지극했다. 부모를 위해 작은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길렀다. 어느 날 꿈에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이 ‘효성에 감탄하고 우릴 키워줘 감사하다’며 그 은혜로 붉은 비늘 두 개를 드리겠다고 했다. 다음 날 우레와 함께 연못 물이 부글부글 끓더니 붉은 물고기는 용이 되었고 붉은 비늘 2개를 남겼다. 또 자라가 붉은 잉어를 잡아먹으려 할 때 박곤이 살려 주었고 붉은 비늘은 그 보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박곤은 학문과 함께 무예 익히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무과의 초시, 복시, 전시를 두루 거쳐 21세에 장원급제하였다. 세종 1년(1419)에 최윤덕 장군의 막하로 대마도 정벌, 남해의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 박곤은 용이 남긴 붉은 비늘 두 개를 말의 배 가리게 양쪽에 붙였다. 말은 나는 용처럼 빨리 달렸고, 이에 적병은 박곤을 비룡장군이라며 두려워했고 이름만 들어도 도망쳤다. 박곤은 34세 때인 세종 11년에 순문사로 북방의 성들을 살피고 국방정책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특히 축성법의 전문가로 국방의 자문을 맡아 각처의 진지를 심사했다. 박곤은 공조, 호조, 예조참판,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세종 18년 명나라 영종 즉위 하례사로 다녀왔다. 귀국 후 다시 한성판윤을 지냈고, 초청을 받아 또 명나라 연경(북경)에 갔다. 이때 박곤이 벼슬을 사양하자, 영종은 표(瓢)씨 성을 하사하며 미인 3인과 맺어주었다. 이들이 세 아들 일걸(一傑), 이걸(二傑), 삼걸(三傑)을 낳았고, 후손들이 표씨 성을 잇고 있다, 그러나 박곤은 고국을 못 잊어 여러 차례 간청으로 어렵사리 홀로 귀국하여 곧장 고향으로 왔다. 그리고 적룡지 연못 앞에 어변당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별당인 어변당은 박곤이 중국에서 돌아온 1440년경에 지었다. 그 뒤 중종 때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밀양부사를 지낸 이휘영이 고쳐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에 마을이 모두 불탔으나, 다만 어변당과 적룡지는 무사하였다. 1652년에 밀양부사 김응조가 어변당기를 남겼다. 1708년 후손인 박세용이 어변당을 중수할 때 이명기가 어변당기를 썼다. 또 1841년 중수할 때 이호윤이 쓴 어변당중수상량문이 있다. 이 어변당을 지을 때 박곤이 심은 은행나무가 6백 살이 넘었다. 그러다 2백여 년 전의 벼락과 십수 년 전의 촛불로 몸통에 깊은 상처를 입었으나, 아직도 푸른 잎, 새 가지를 뻗고 있다. 어변당 앞 붉은 용의 못 적룡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의 이상향이다. 또 이 네모 연못의 둥근 섬은 동해의 봉래산이니, 신선이 사는 곳이다. 이 둥근 섬에 어린 배롱나무가 있고, 아직은 어린꽃을 피운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늘로 오른 붉은 용처럼 온 연못에 붉은꽃 그늘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박곤이 심은 화마 입은 은행나무가 아직도 그 푸름을 잃지 않고 있는 것 또한 하늘의 뜻이려니 허리 굽혀 예를 갖춘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10-06
  • 이토 “일본에 대항하려면 공공연한 방법으로 하라”
    헤이그 밀사 파견은 선전포고이완용 “일 천황에 사과”상주1907년 7월 2일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대한제국에 알려지면서 고종 황제의 운명도 마지막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종을 폐위시키기로 작정했다.  7월 3일에 이토는 고종을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이토는 “일본에 대항하려면 공공연한 방법으로 하라”고 말하면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협박했다. 이러자 고종은 밀사를 파견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경운궁에서 나오자마자 이토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불러 고종을 폐위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이날 밤 총리대신 이완용은 고종을 알현하고 ‘황실을 보존하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퇴위가 불가피함’을 전언했다. 이러자 고종은 이완용의 행동이 신하의 도리가 아님을 지적하고 크게 역정을 냈다. 사흘 후인 7월 6일에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은 고종이 스스로 일본 천황에게 가서 사과하든지 아니면 대한문 앞에서 하세가와 일본 주차군사령관에게 사죄하라고 2시간 동안이나 핍박했다. 송병준은 이토의 지시에 따라 고종 폐위에 앞장 선 것이다. 이러자 고종은 크게 진노했다. 7월 7일에 이토는 일본 정부에 대한제국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고종 폐위에 관련 처리요강’을 훈시해 달라고 전보를 보냈다. 이토 통감의 전보를 받은 일본 정부는 7월 10일에 원로대신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 7월 12일에 일본 정부는 메이지 천황의 재가를 받아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문서번호 : 제141호(극비)    발신 : 하야시 외무대신(1907년 7월 12일 오후 5시 10분 동경 발)    수신 : 이토통감 (7월 12일 오후 9시 30분 경성 착)    제목 : 대한 정책(對韓對策)에 대한 각의 결정 통보 건 사이몬지 총리대신 명에 의함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제57호 전보 건에 대해서는 원로 제공(諸公) 및 각료와도 신중히 숙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방침을 결정하고 오늘 재가를 받았음. 일본 정부는 현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함. 그 실행에 대해서는 현지의 상황을 참작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를 통감에 일임할 것.만약 전기(前記) 희망을 완전히 달성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때는, 적어도 내각 대신 이하 중요 관헌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에 따라 집행하고, 동시에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중요 관헌에 임명할 것. 본 건은 극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외무대신이 한국에 가서 직접 통감에게 설명할 것임.  외무 대신은 15일에 출발할 예정임.” 이런 와중에 대한제국 내각은 이완용과 송병준이 서로 앞장서서 고종 황제 폐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7월 18일에 외상 하야시 다다스가 서울에 도착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다급해진 이완용은 7월 16일에 입궐하여 고종에게 (1)을사조약에 옥새를 찍을 것 (2) 황제 폐하가 일본에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과할 것 (3) 양위할 것을 상주했다. 하지만 고종은 완강히 거부했다. 17일에도 이완용과 송병준은 고종에게 노골적으로 양위를 요구했다. 이러자 고종은 철종의 사위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했다. 박영효는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895년에 귀국하여 내부대신을 하다가 대역죄인에 몰려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07년 6월에 박영효는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상경하여,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와 접촉하여 특별사면을 받았다. 이런 박영효를 고종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한 것이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와도 친한 박영효가 나서서 자기를 보호해주리라 굳게 믿었다. 7월 18일 오후 5시에 고종은 이토를 불러, 자기는 헤이그 밀사 파견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재차 해명했다. 하지만 이토는 그들이 개인 차원에서 행동했다 하여도 한국인이니 임금이 책임져야 한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어서 고종은 양위와 관련하여 이토에게 물었다. 이토는 이 문제는 일본 천황의 신하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뗐다. 7월18일 오후 8시쯤에 일본 외상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입국 인사를 하였다.이어서 이완용과 송병준 등은 고종을 알현하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은 가장 강경하고 불손한 행동으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고종은 단연코 거절하면서 궁내부대신 박영효를 불러오라고 했지만, 박영효는 병을 칭하며 오지 않았다.이 날 밤 상황은 험악했다. 고종은 여차하면 대신들을 살육하려고 시위대 근위병을 궁중으로 불렀고 대신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권총을 품에 숨기고 들어갔다.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중과 외부의 연락이 가능한 전화선들을 모두 절단했다. 이 날의 상황을 황현은 <매천야록>에 적었다.  “이완용 등은 황태자에게 양위하라고 하였으나, 고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이완용은 칼을 빼어들고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고함 질렀다. 이때 폐하를 모시고 있는 무감(武監)과 액례(掖隷 액정서에 딸린 아전)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이완용의 행위를 보고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칼을 빼어 들고 고종의 말 한마디만 기다리며 이완용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참담한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완용을 흘겨보며 “그렇다면 선위를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자 이완용 등은 물러나갔다. (황현 지음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하, 문학과 지성사, 2005, p 405-406)7월 19일 새벽 5시에 고종은 황태자에게 정사를 대리하도록 명했다. 이러자 황태자는 상소를 올려 대리 청정에 대한 명령을 취소할 것을 아뢰었다. 고종이 사양하지 말라고 하자, 황태자는 재차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고종은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했다.고종의 ‘대리 청정’ 조칙이 내려지자 이완용은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의식을 주관하는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스스로 궁내부 대신 임시 서리가 되어 7월 20일 오전 9시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중화전에서 순종 즉위식을 거행했다. 즉위식은 고종과 순종 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고 궁궐의 내시가 대신하는 권정례(權停例)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고종 황제(1852~1919 재위 1863-1907)는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44년 만에 파란만장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갔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이 즉위했다. (1907년 7월 19일의 순종실록에는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순종이 즉위식을 올리는 그 시각에 이완용의 집이 불탔다. 반일 단체 동우회 회원들이 이완용의 남대문 앞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홀랑 태워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재도구는 물론 누대에 걸친 조상 신주까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양자를 잘못 들인 탓에 우봉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을 당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는 박제순이 가장 욕을 많이 먹었는데 2년 후인 고종 퇴위를 계기로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어 민중들의 저주를 받았다.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가족들을 잡아 죽이자’는 군중들의 함성에 쫓겨 남산 아래 왜성구락부로 몸을 피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이완용은 순종의 즉위식을 주관했다. 즉위식이 끝나자 이토는 서둘러 이완용을 태우고 남산 통감 관저로 향했다.  오고 갈데없는 이완용 가족들은 이날부터 왜성 구락부에 머물렀고, 두 달이 지난 9월에 형 이윤용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다. 그런데 1908년 1월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집도 없이 형에게 얹어 사는 이완용의 딱한 사정’을 듣고 중구 저동에 있는 남녕위 궁을 하사함으로써 이완용은 비로소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고종은 퇴위를 강요한 이완용을 괘씸하게 생각할 만도 한데 그에게 집까지 하사한 것이다. 윤덕한은 『이완용 평전』에서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황실과 이완용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p 245-247) 한편 일제는 서둘러 일본국 천황의 축하 전보를 보내 고종의 퇴위를 기정 사실화했고, 7월 20일에 순종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각국 영사를 수옥헌(漱玉軒 지금의 중명전)에서 접견하였다. 그런데 고종의 퇴위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 시내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통곡이 이어지고 수천 명이 모여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폭동 사태가 연출되었다.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가 습격당하고, 시위군중 일부는 경운궁 대한문 앞 십자로에 수백 명이 꿇어앉아 고종에게 결코 양위하지 말라고 애원하기도 했다.일제는 이런 군중 시위를 경찰과 주차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처럼 막강한 물리력을 동원한 일제의 제압으로 퇴위 반대 시위는 점차 수그러들고 말았다.
    • 기획.연재
    2022-10-05
  • 주성식의 어른 왈/그래서?
      이 사회의 형편이 심상치 않다. 손쓸 길 없는 외우(外憂)가 갈수록 악화되는 데 더해, ‘뒤질소냐’라는 듯 내환(內患)은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분탕질을 업(業)으로 삼는 듯한 부류들이 안방에 똬리를 틀고 앉아 소리(만)를 질러대고 딴지(만)를 걸고 있으니, 좁은 땅덩어리에 사는 고단한 무리들의 앞날이 달걀을 쌓아 놓은 듯 위태로워 보인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정언(定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상 모든 일은 정치적이다. 당연히 정치는 우리 삶에 절대적인 요소다. 그러나 현재 이 사회의 정치는 극단적으로 왜곡돼 있으며, 그 정점(頂點)에 (공)권력을 독과점해 사유화한 정치 모리배들이 있다.  국민의 주권이 몇몇(!) 정치꾼들에게 위임돼 행사되는 과정의 광태(狂態)는 다들 잘 알고 있다. 피아(彼我)를 나누거나 진영을 가릴 필요도 없는 전반적 현상이다. 농단(壟斷)을 넘어 독단과 전제(專制)에 이른 패악이, 정치의 탈을 쓰고 나라와 겨레를 결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 최고위 공직자와 관련한 소동을 살펴보자. 그가 욕을 했는지 여부, 그것이 국익을 해친 참사(慘事)인지에 대한 판단, 그에 대해 여론은 어떤지 그리고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낼 기세로 요란을 떠는 것들이 무엇을 노리는지는 어느 누구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사실 관계가 특정되지 않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극단적 언사로 위협하기만 하는 것은 욕심뿐인 사기범 그리고 저급한 공갈범들이나 하는 짓이다.  젊잖은 말투와 그럴 듯한 글줄로 ‘무작정’ 사과(謝過)를 들먹이는 것은, 지식도 판단력도 소신도 두뇌도 없다는 고백일 뿐이다. 그따위 ‘헛짓’(들)에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몰리며 헤매는 것은, 난파선(難破船)에서 지레 겁먹은 쥐 떼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다.  그러나 철이 바뀌고 세상도 변했다. 범죄 혐의자가 억울하다고 울부짖으며 거꾸로 몽둥이를 휘두르면 벌(罰)을 면하고, 패거리들 몇몇 모아 시끄럽게 외치기만 하면 술과 밥이 나오던 무법천지 호시절(好時節)은 끝났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깐죽’거리는 짓도, 격장(激將)의 계책조차 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호구(虎口)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해(自害)에 그치고 말 전망이다.    그러니 부패한 고기를 먹어치워 강을 정화(淨化)한다는 ‘악어’의 크기와 무게에 관심이 간다. 아무리 쉬파리가 달려들고 들끓어도, 흔들리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그래서?’라며 제 할 일을 하는 듯하니 말이다.
    • 기획.연재
    202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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