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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기능항진증’에 대한 증례연구
- 소화기 내시경 세부전문의위 관련 환자들에 기대감자가 면역성 위염 고찰도최근 현대의학에서도 밝히지 못했던 ‘갑상선기능항진증’에 관한 연구논문이 발표돼 위와 관련된 질병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2일 대한 상부위장관 헬리코박터 학회는 저널을 통해 ‘자가면역성위염과 헬리코박터위염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갑상선기능항진증(그레이브씨 병)환자’ 에 대한 증례연구를 발표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순천 플러스 아이미코병원의 안용환 원장이다. 안 원장은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소화기내과 전임의 과정을 거쳐 소화기내과 분과전문의, 소화기내시경 세부전문의 자격을 갖춘 의사다. 현재 내과의사로서 순천에서만 12년간 근무하고 있다. 연구논문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염은 속 쓰림, 복통, 소화불량감 등의 증상도 아니며, 내시경 검사에서 보여지는 점막의 변화도 아니다. 위염은 위 점막에 대한 조직검사를 이용해 점막 층에 염증세포가 침윤된 조직학적 변화를 의미한다. 증상만 가지고 위염을 진단할 수는 없으며, 내시경 검사 소견에서의 위염진단은 위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지 확진은 아니기 때문에 원인에 따른 정확한 감별을 한 후, 위염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둘째, 내시경 검사를 받고 나면, 위축성 위염 혹은 장 상피화생이라는 말을 듣는다. 따라서 위축성 위염은 위 점막이 손상되어 점막 기능이 소실되고 점막 구조가 변형되는 것으로, 대표적인 원인이 헬리코박터균에 의한 감염과 자가면역성 질환이 있다. 화생상 위염(장 상피화생)은 이러한 원인들로 인해 위축성 변화와 염증이 진행되어 위 점막이 위 전정부나 장 점막과 같은 비 정상적인 형태로 변해가는 현상이다. 결국, 위축성 위염이나 장 상피화생은 위염을 일으키는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셋째, 위암 발생에 있어 만성적인 위의 염증성 변화, 즉 모든 만성 위염은 위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위축성 위염이나 장 상피화생은 결과물이므로, 이러한 변화에 대한 지속적인 자극이 없는 경우에는 암 발생률이 현저히 떨어지고 1년에 1%도 되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현재까지 위암 발생에 있어서 헬리코박터 균의 영향이 거의 90% 이상 되기 때문에 지속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헬리코박터균의 제균치료가 위염 관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다.넷째, 자가면역성위염은 앞서 말한 헬리코박터 균을 환경적 요인이라고 한다면 자가면역질환은 숙주 요인, 즉 몸 자체에서 스스로 생성된 면역반응으로 위염이 발생되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위에서 분비되는 위산은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그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영양소를 흡수하기 좋게 만들기도 하고 음식에 오염된 균을 없애주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가면역성위염은 이러한 위산을 분비하는 위 점막의 위벽세포가 스스로 만들어진 면역반응으로 인해 파괴되는 질환으로 위산분비가 현저히 저하되는 만성위염 중 한 가지다. 다섯째, 만성 위축성 위염의 원인 대부분은 헬리코박터 연관성 위염이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많은 원인이 바로 자가면역성위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드문 질환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오히려 간과되고 있는 질환이라고 감히 얘기할 수 있다. 아직 정확한 유병률은 알 수 없지만 동양에서는 0.5~3% 정도로 보고되고 있다. 따라서 자가면역성위염의 문제점은 위벽세포가 파괴되면 위산이 나오지 않게 되고 이로 인해 철분 대사에 영향을 미쳐 철 결핍성 빈혈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위벽세포의 파괴는 내인성 인자라고 하는 비타민 B12와 결합해 비타민 B12의 흡수를 돕는 물질이 나오지 못하게 되는데, 결국 비타민 B12의 결핍으로 이어지고 이는 여러 신경학적 증상과 함께 오랫동안 방치하게 되면 심한 빈혈 중 하나인 전격성 빈혈을 일으킨다. 이 외에도 비타민 C, 비타민 D, 칼슘 등의 흡수 저하를 가져온다. 더 중요한 것은 위산 분비 억제로 인해 위산 분비를 촉진시키는 가스트린이라는 물질이 올라가는데, 이러한 고 가스트린 혈증으로 위 내벽에 종양발생이 일어날 수 있어 주기적인 검진이 필요하다.게다가 이번 연구에서 보면 환자는 갑상선기능항진증, 헬리코박터위염 등이 함께 진단됐다. 그것은 갑상선과 위, 장은 배아기 때 함께 분화가 되어 발달하게 된다. 그래서 갑상선과 위는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특히 자가면역성 갑상선질환인 하시모토 갑상선염과 그레이브씨 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 자가면역성위염이 함께 동반돼 있을 가능성이 40%이상 높다. 그래서 갑상선 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는 자가면역성위염 여부를 함께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아직 자가면역성위염이 위암발생과의 연관성은 모호하다. 하지만 헬리코박터균에 감염이 되어 있다면 위암 발생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으므로 이러한 감별 진단 및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또 이 병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30~40% 정도는 무증상이다. 하지만 60% 이상에서 위장 장애를 호소하게 되며 잘 알려진 소화불량감, 속쓰림, 더부룩함 등의 증상이 흔하게 나타날 수 있다. 사실 흔한 위장 증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진단이 늦어지기도 하고 신경성으로 오해 받기도 한다. 증상이 몇 번의 치료에도 잘 낫지 않는다면 반드시 상담을 통해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 검사는 내시경 검사를 하는 것도 좋겠지만, 약 8시간에서 10시간 금식 후 혈액검사를 통해 위 기능을 평가하면 진단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갑상선 질환과 같이 동반된 자가면역질환이나 영양결핍으로 인한 증상이 동반될 수 있다.위는 해부학적으로 위, 아래 작은 주머니가 한 개의 큰 주머니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자가면역성위염의 내시경적 특징은 위 체부, 즉 윗 주머니에서 현저한 위축성 변화가 오고 아랫 주머니는 정상 소견을 보이는 것이다. 내시경 검사를 통해 윗 주머니의 위축성 변화가 심하다면 우선 위, 아래 주머니 각각에서 조직검사를 시행해 염증을 확인하고, 특수 염색 등을 통해 진단할 수 있다. 또한 혈액검사를 통해 위 기능에 대한 검사와 자가면역항체 검사를 시행하면 진단이 가능하다. 물론 헬리코박터균을 함께 가지고 있는지, 치료가 되었는지 등에 대한 확인도 매우 중요하다. 아직 자가면역성위염에 대한 직접적인 치료법은 없다. 앞서 말한 위산 분비 저하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영양소결핍증, 함께 동반될 수 있는 갑상선질환을 포함한 자가면역질환에 대한 관리, 헬리코박터균 감염에 대한 확인 및 치료가 매우 중요하겠다. 그리고, 주기적인 내시경 검사(2년마다 정기적인 건강검진 내시경 검사)를 통해 종양 발생 등을 확인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소화불량증이나 위, 식도 역류증이 있을 때 많은 병원에서 위산분비를 억제시키는 약을 처방 받아 복용하게 되는데, 이러한 위산분비 억제제의 경우 이 질환에서는 오히려 위산 분비 저하를 더 심하게 초래하게 돼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단 후 약 복용이 필요하다.우리나라는 2년에 한번씩 40세 이상이면 모두 내시경 검사를 받는다. 하지만, 대부분 위염, 식도염 이라는 진단명을 듣고 본인이 질환을 가진 환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위염은 조직학적 진단이 선행돼야 하고 식도염도 내시경 검사에서 상처가 없는 경우는 약 2주 간의 약물 복용 테스트를 하거나 24시간 위, 식도 산도 검사 등 특수한 검사를 통해서만 진단이 되는 질환이다. 의사들은 보다 정확한 정보를 환자에게 줄 수 있도록 하고, 환자 분들도 내시경 후 진단명에 대해 너무 불안해 하지 않으면 좋겠다. 위염은 위의 악성 질환의 시작이다. 가장 흔한 원인인 헬리코박터균이 있다면 반드시 치료를 받도록 하고, 정기적인 내시경검사를 받으면 된다. 의사들도 자가면역성위염이라는 질환이 절대 드문 질환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접근한다면 보다 정확한 정보를 환자에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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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기능항진증’에 대한 증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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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식의 어른 왈/2022년 별곡(別曲) 1
- 옛 사람이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逝者如斯)’라고 했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젊음과 활력도 사라지는 것을 탄식한 것이다. 무릇 생장(生長)과 쇠멸(衰滅)의 궤(軌)를 벗어날 수 없는 데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2022년도 가고 있다. 헤아리기 어려운 처음과 가늠하기 힘든 앞날 사이의 한 토막이 마무리된다. 〈어른曰〉 또한 기뻐하며 웃고, 슬퍼하며 울고, 부아 내며 부르짖은 만단(萬端)의 소회(所懷)가 마땅하다. 국내에서는 두 차례 큰 정치행사가 있었다. 그 과정에 이 사회의 끔찍한 실상(중 일부)이 드러났다. 암묵적 합의로 잠복되고 교활한 조작으로 은폐됐던 온갖 부조리와 불법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있을 수 없는 것이 그럴 만한 일이 됐고, 끝내 이 사회의 주류(主流)와 기본이 됐다. 마침내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폐단이며 해악(害惡)으로 몰렸다. 그 상황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있다. 내전(內戰)이라고 할 만한 치열한 대립과 극렬한 투쟁이 일상화됐다. 기득권의 강고(强固)한 틀로 무장한 모리배 집단은 조직적으로, 발악하듯 국가와 사회의 정상화에 반발, 저항했다. 이런 문제(들)를 해결한다면서 뜨내기·얼치기 전문가들이 날뛰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빨리, 송두리째, 돌이킬 수 없게 병근(病根)을 뿌리 뽑겠다는 조급증(躁急症)이 흙탕물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고, 악착(齷齪)같은 범죄(혐의)자들을 도와주는 꼴이다. 불법과 비리의 전모를 감추고 정당한 규정의 집행을 피할 수 있게 빌미와 틈새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방향이 정해지고, 흔들리지 않으며 나아가고 있다는 데서 작지만 든든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규칙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반이다. 윤리 도덕이건 법률이건, 사회 구성원(대다수가)들이 동의해 기준을 만들었다면 또한 아무 예외도 없이 따라야 한다. 걸핏하면 원론(原論)을 읊어대는 것들이, 툭하면 허무맹랑한 감성을 앞세워 예외를 당연시하고, 그 사이에서 온갖 더러운 짓으로 뱃구레를 키워 왔다. 아무리 이가 갈려도, 쓰레기 치운다며 규칙을 오·남용(誤濫用)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하나씩, 조금씩, 천천히, 빠뜨리지 말고, 악어가 강(江)을 청소하듯 두꺼비가 쉬파리 잡아채듯 하면 된다. 2022년을 마무리하며 꼭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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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식의 어른 왈/2022년 별곡(別曲)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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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하 시인“나라 일에 시민들 누구나 책임 있다”
- 김용하 시인(前 광주고등학교교장, 광주시인협회장)이 지난 12월 6일 열린 「2022년 광주 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광주 문화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8명 가운데 문학 분야(정소파상)에서 선정된 것이다. 그는 교직 40년 동안 시작(詩作) 등 집필 활동을 계속했으며 다양한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우리 지역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해 왔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후예(14世)라는 자부심으로 ‘가난하지만 올곧게’ 선비정신을 삶의 지표로 삼아온 김용하 시인은 우리 사회가 ‘무한 자유는 누리되 일말의 책임의식도 없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앞으로도 집필 작업을 계속하면서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도 적극 기여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김용하 시인을 만나 ‘문학과 삶의 편린(片鱗)’을 엿봤다.-수상을 축하한다. 소감을 밝혀달라.예향의 도시 광주에서, 모든 예술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문학분야 상을 받아 큰 영광이다. -문학활동 내용을 알려달라.1984년 수필로 등단한 이후 40여년 동안 ‘가슴으로 바라본 세상’ 수필집, 각종 문학지 등에 300여 편의 수필을 발표했다. 또 詩와 시조(時調)로 등단해 ‘소소한 삶의 향기’ 등 시집 발행, 각종 매체 게재 등 詩 900여 편을 발표했다. 여러 언론의 요청으로 100여 편 이상 칼럼을 싣기도 했다. -창작 외에 문학 관련단체 활동도 많았던데?광주시인협회회장, 광주문인협회 수석부회장(2회 역임), 광주 문화예술상심사위원, 광주문학관 건립추진위원, 용아 박용철기념사업회 부이사장 등 20여개 문학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광주시인협회 회장 재임 중 ‘作家와 市民이 함께 누리는 文學的 同行’운동과 ‘시집 한 권 소지하고 다니기 시민운동’ 등을 시행해 큰 호응과 성과를 거뒀다. 지하철역(驛) 등에 시집을 비치하고, 시낭송·시집 나눠주기 등 ‘詩사랑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시집 나눠주기 운동’은 문학 일상화의 좋은 예가 됐다. ‘독자 없는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시집 등 문학서적을 시민에게 전했다. 광주시인협회가 2014~15년에 무료 배포한 시집만 3000권이 넘는다. 문학이 작가 등 특정인의 전유물에 그치지 않도록 ‘시집 한 권 소지하고 다니며 음미하기’ 외우지는 못해도 시집을 읽기만 해도 되는 ‘詩낭독회’ 등은 많은 사람의 공감과 사랑을 받았다.-문학 특히 詩는 무엇인가?詩는 삶의 과정에서 느끼는 사색의 결과나 자연과 사물에서 느끼는 감흥을, 짧고 가장 적절한 비유와 은유로 언어의 조탁(彫琢)을 통해 재창조한 산물이다. 꼭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감(五感)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 배출하고 그 과정에 자기 만족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면에 고이는 수 많은 사념들을 표현하고 분출하는, 일종의 본능적 활동이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1981년 고흥 금산중학교에서 근무할 때 서울신문 독자란에 수필이 게재됐고 또 동아일보에 짧은 글이 실렸는데, 한학자(漢學者) 한 분이 내 글에 감명을 받았다며 편지를 보냈다. ‘글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라는 놀라움으로 시간 나는 대로 글을 쓰고 여러 매체에 투고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후 시집·수필집 출간을 동아일보·광주일보·인터넷신문 등이 보도했으며 광주문화예술상·광주문학상·영호남수필문학대상·호남시조문학대상·광주예총공로상·소파문학공로상 등을 받았다. -교육 경력이 더 화려하다. 40여 년 교직에 헌신했다. 2012년 모교인 광주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나는 “국가와 사회는 사람에 의해서 발전하고, 사람은 교육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신념으로 교직에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에 두암중학교·풍암중학교 교장 등을 거쳐 모교인 광주고등학교에서 22대~23대 교장으로 5년여 재직을 끝으로 정년했다. -구체적 내용은?학교는 교장의 열정과 창의적인 경영만큼 변화한다. 우선 모교인 광주고를 전국 1600여 개의 고교 중 100여 개교만 선정되는 자율공립고등학교로 만들어 큰 발전을 가져왔다. 1993년부터 15년 연속 광주교육연수원 강사, 광주국공립중등교장협의회 회장, 한국교원대학교 교장자격 강사, 조선대학교 사범대학과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로 15년간 강의했다. 또 국가교육정책자문위원, 고등학교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 전국 자립형사립고교 평가위원, 국가수준 교육과정의 장학자료 편찬 및 전담강사, 광주광역시교육청 장학자료편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최근 교육 관련 논란이 적지 않다.요새 일부의 일탈에 의해 많은 교사들이 사기(士氣)를 잃고, 학생들의 행동을 방임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학교 현장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교육이 정치 추세에 따라 흔들리거나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바뀌는 것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너무 일찍 성인 수준의 자유와 자율만을 강조함으로써, 바람직한 가치관 형성과 학력 신장, 끼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초를 닦는 데 소홀하지 않을까 염려된다.교육에는 시기가 있고, 학교 교육의 성공이 나라 발전의 핵심이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고 한다. 공교육을 신뢰하고 바로 세워야 한다. 교사가 사도(師道)를 지켜 학생의 모범이 되고,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다른 사회활동에도 열심이라던데?퇴임 후까지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광주중등교장평생동지회 초대 회장, 광주검찰시민위원회 위원장, 광주선관위원회 공정방송심의위원, 흥복학원 관선이사, 전광일보 논설위원, 광주가정법원 국선변호인을 역임했고 무등시민광장포럼 상임대표 등으로 건전한 시민사회 확립에도 힘썼다. 특히 각종 언론에 정치·사회·교육 분야 관련 100회 이상 기고하는 등 사회 발전 특히 후진 계도에 힘쓰고 있다. 지금은 광주지검 형사조정위원, 광주문학관 건립추진위원, 한국시민자원봉사회 광주총회장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평교사 시절부터 제자와 친구 등의 부탁으로 주례를 섰는데, 새 가정을 이뤄 출발하는 젊은 부부들을 196쌍이나 축복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신조가 있다면?나는 엄격한 유교 집안(본관 울산,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예의를 숭상하고 가난하지만 양반의 가풍과 선비의 정신을 강조하셨던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청렴결백(淸廉潔白) 선공후사(先公後私) 지지불태(知止不殆)의 정신으로 살아왔다. 평소 선비답게 사는 것을 목표로, 수기치인(修己治人) 극기복례(克己復禮) 안분지족(安分知足) 등의 가치를 지키려고 힘썼다. -앞으로 계획은?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다양한 봉사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려고 한다. 안분지족의 마음으로 어느 것에도 목매지 않고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종교적 신앙을 갖고 감사와 사랑 속에서 스트레칭과 가벼운 산행 등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에 힘쓰려고 한다.-우리 사회 전반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구성원 모두가 합리적·미래지향적 가치관을 갖고, 지나친 물질숭상과 쾌락주의를 탈피하여 건전한 생활로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관용과 자율의 민주시민의식을 갖춘 공동체가 되도록 국민의식 개혁운동을 전개해야 한다.우리는 자책(自責)적 사고(思考) 없이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무한 자유는 누리되 일말의 책임의식조차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제 국가존망필부유책(國家存亡匹夫有責)이라는 말을 새기면서, 간디의 망국(亡國) 7조를 되뇌고 자기를 치열하게 성찰하며 살아가야 한다. 김용하 시인은 몸이 약하다는 염려가 있었으나 하루 14시간 이상 근무한다는 고교 교감 3년, 교장 5년 등을 잘 마치고 오늘까지 건재할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부인(노명란)은 초등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직했으며 교회 등 여러 성가대와 합창단 지휘자로 30여 년 봉사하고 있다. 걸스카웃 지도자로 한국걸스카웃 전남부연맹장, 광주연맹부연맹장으로 활동했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슬하에 남매. 수상 : 황조근정훈장, 장원사도대상(章元師道大賞) 장관급 이상 정부 표창 4회, 덕천선도대상, 광주지검검사장 표창 등 교육 활동의 성과와 관련해 중앙일보, 광주MBC 등 각종 언론에 30회 이상 보도됐다.김용하 시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신앙심을 갖고 감사와 사랑 속에서, 여유를 갖고 즐겁게 생활한다. 안분지족(安分知足)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려고 한다. 그는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 크게 좌절한 적이 없으며, 최연소로 승진하는 등 사회적 인정도 받았다. 어느 목사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축복 한 사람’이라며 격려하기도 했다.김용하 시인은 또 필암서원(세계문화유산)에 배향된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후예(14세손)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 장형(김용숙, 84세)이 ‘하서 김인후 선생 천명도(天命圖)연구’ ‘백련초해(百聯抄解)의 현대적 해석’ 등 성리학 연구서에 이어 漢詩 400여 수를 수록한 시집(詩集)을 펴낸 것도 자랑거리다. ※ 김인후 : 동국(東國) 18현(賢). 호남 출신 중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 정조(正祖)가 도학(道學)·절의(節義)·문장(文章)이 해동 제1이라고 평했다. 자연가 등 시 1500여 수를 남겨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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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하 시인“나라 일에 시민들 누구나 책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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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능주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
- 화순 이양면 쌍봉사 절집은 그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839년 신라 신무왕 때 적인선사 혜철이 하안거를 보냈다 하니 오래된 절집이구나 할 뿐이다. 또 문성왕 9년인 847년에 22년간의 당 유학을 마치고 금강산 장담사에 머물던 쌍봉화상 철감도윤이 이곳에 있었다. 절 이름 쌍봉사는 속성이 박씨로 이곳에서 입적하여 철감의 시호를 받은 쌍봉 도윤의 부도탑과 탑비, 우뚝 솟은 중조산 두 봉우리가 절을 향해 고개 숙인 것과 인연이 닿아있다. 장보고는 젊은 시절 당나라 쉬저우(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었다. 용맹하여 말을 타고 창을 쓰면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828년 신라 흥덕왕에게 당나라 해적의 노략질과 사고파는 노비의 근절책을 주장하고, 이의 해결책으로 완도 장도의 청해진 대사(大使)가 되어 왜와 당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남북국시대 말기에 신라 왕정은 매우 불안정했다. 836년 흥덕왕이 재위 10년 만에 죽자, 왕의 사촌 김균정과 조카 김제륭이 왕위 다툼을 벌였다. 김제륭이 김균정을 죽이고 희강왕이 되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희강왕 재위 3년인 838년에 상대등 김명이 왕을 죽이고 민애왕이 되었다. 이듬해인 839년 장보고가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이 왕이 되니 신무왕이다. 하지만 신무왕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은 문성왕, 장보고는 진해장군이 되었다. 청해는 바다를 맑게 함이고 진해는 바다를 억누름이니 두 말뜻이 같고, 장보고는 해상왕을 넘어 육지의 왕까지 되고자 했다. 845년 장보고는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만들려 했으나 귀족들이 반대하자, 반기를 들었다. 846년 문성왕은 염장을 시켜 장보고를 죽이고 851년 청해진도 없앴다. 청해진 유민 10만여 명을 김제 벽골제 보수 노역장으로 보내니, 청해진도 진해장군도 한낱 폐허의 헛꿈이 되었다. 장보고는 823년에 중국 산동에 법화원을 세운 불교도이다. 청해진 10만 유민도 불교도였다. 이들이 벽골제 보수공사를 마치고 장보고가 지원하던 화순 이양 쌍봉사와 중장터의 운주사에 머물렀다. 철감선사가 경문왕의 요청으로 금강산 장담사에서 쌍봉사로 온 것은 그 청해진 유민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불심으로 위무하기 위함이었다. 이곳 철감선사탑은 국보이며 탑비는 보물이다. 또 후삼국의 견훤을 거쳐 고려 최씨무신정권의 실권자 최항이 환속하기 전 주지였다. 정유재란에 소실되어 현종과 경종 때 중창했다. 영조 때 여러 물품을 만들어 조정에 바쳤고 정조 때 절의 규모가 400여 칸에 이르렀다. 그리고 중종 때 양팽손이 후학을 가르친 학포당과 한말 의병들의 의소와 격전지가 이웃이다. 여기 대웅전은 보기 드문 국내 유일의 3층 목탑이었다. 한국전쟁 때 절이 모두 불에 타고 이 대웅전과 극락전만 남았으나, 안타깝게도 1984년 4월 대웅전은 연기가 되었고, 보물지정마저 사라졌다. 이때의 일이다. 농사일하던 노인이 불길에 휩싸인 대웅전에서 석가, 아난과 가섭존자의 삼존불상을 한 분씩 등에 업고 나왔다. 하나의 무게가 100kg이 넘어 장정 4명이 겨우 옮긴 불상이었다. 이 믿기지 않은 신통한 일을 대웅전 앞 두어 아름 감나무가 지켜봤다. 아직도 주먹만한 감을 주렁주렁 매다는 이 감나무에게 어찌 노인이 불상을 업었겠느냐는 물음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세상사 아무거나 전설이 되고 민담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와 세월을 지혜와 현명함으로 쌓아야 빛이 된다. 하지만 나무는 그저 몸 안에 금 하나 그어 빛이 된다. 신묘한 약초가 아닌, 아궁이 불쏘시개도 마다하지 않으니, 어찌 빛이 나지 않을까?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에 천년 고찰의 역사가 또 주렁주렁 매달려 있음을 본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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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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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능주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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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식의 어른 왈/닭갈비 핥으려고?
- 계륵(鷄肋)은 닭갈비를 말한다. 별로 먹을 것은 없는데 버리자니 아까운 특성에 빗대, 뭔가 선택이나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흔히 쓰인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와 그의 참모인 양수(楊脩)가 관계된 고사에서 연유했다. 최근 이 지역의 한 정치인이, 과거에 몸담았던 정당과 그 고위 당직자 하나를 거론하며 이 옛말을 썼다. 그 정치인은 그 당직자를 계륵이라고 '규정'하면서 “떠나라”고 충고했다. 계륵을 의인화(擬人化)해서, 말을 잘 알아듣고 판단력도 정상이기를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계륵은 취사(取捨)의 대상일 뿐이니, 치태(痴態)가 분명하다. 또 그 당직자에게, 소속 집단을 ‘사랑한다면’ 떠나야 하고 ‘떳떳해져 돌아와라’ 따위로 재롱을 부렸다. 그 집단을 몇몇 인물과 패거리들이 전횡(專橫)하고, 최소한의 법과 상식마저 도외시하고 있는 상황을 아예 모르는 듯 상투적인 ‘당위(當爲)’만 떠든 것이다. 과연 최소한의 사리 분별이나마 있는지 의문이다. 특히 사유가 어떻든 그는 그들과 결별했는데 이런저런 참견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고, 현 정부(측)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입장에서 극한 대치 중인 집단에 대해 조언하는 것도 황당하다는 반응 또한 적지 않다. 그 정치인은 혹시 자신이 현 정치판에서 피아(彼我)의 쓸모를 저울질하고 조조가 한중(漢中)의 가치를 판단해 거취(去就)를 결정하듯 계륵의 처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착각 아닌가? 정치판에 끼어들면서 꽃가마에 태워져 호사를 누렸던 것이 본인의 역량만으로 가능했다고 여길까?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쓰이다가 마침내 효용이 다해 내쳐졌고, 그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측에 재활용되고 있는 것을 모를까? 아직 미련이 남아 용을 쓰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입장을 뚜렷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무슨 말이건, 어느 경우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알고 해야 한다. 양수는 계륵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고 그것에게 사라지라고 사정하거나, 뻔히 한 통속인 패거리들에게 쫓아내라고 부추기는 것이 맞겠는가? 혹시 그 집단과 배후의 막강한 영향력에 아직 미련이 남았는가? 아니 일편단심 그들을 그리워하는 충정을 인정해달라는 추파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살점은 다 발라먹고 부패가 시작된 뼈다귀와 함께 순장(殉葬)이라도 되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닭갈비를 핥아대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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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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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식의 어른 왈/닭갈비 핥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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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국, 아! 한국 황제, 아! 한국 국민”
- 조선 사회는 망국의 사회양반은 모든 악의 근원1898년 9월에 무술변법이 좌절되자 일본으로 망명한 청나라의 개화사상가 양계초(1873~1929)는 일본에서 14년간 살면서 조선의 망국에 관한 글을 여러 편 썼다.양계초는 1904년 9월 ‘조선망국사략(朝鮮亡國史略)’을 시작으로, 1907년 10월 ‘아! 한국, 아! 한국 황제, 아! 한국국민’, 1910년 9월에 ‘조선 멸망의 원인’과 ‘일본병탄 조선기’를 썼다. 아울러 1909년 12월에 안중근 의거를 찬양하는 장편시 ‘가을바람이 등나무를 꺾다’와 1910년 9월에 ‘조선 애사(哀詞)’ 24수를 지었다.그는 1904년 9월 24일에 쓴 ‘조선망국사략’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대(章臺) 궁전의 버들이여! 옛날에는 무성하더니 지금도 그러한지? 설사 긴 가지 옛날과 같았어라도, 필경 남의 손에 당겨져 꺾였으리라!청일전쟁 전의 조선과 청일전쟁 후의 조선을 비교해 볼 때, 더구나 청일전쟁 후의 조선과 러일전쟁 후의 조선을 비교해 볼 때 나는 눈물이 눈썹에 넘쳐흐름을 금치 못하겠다.이제 조선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의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오직 일본 번속 일부분으로서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 전적(典籍)에 이르기를, 상례(喪禮)의 지극한 애도는 군자가 그 근본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3천년 된 이 오래된 나라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멸망하는 데 그와 친속의 관계를 가진 이로써 어찌 그 종말을 장식하게 된 사실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이로써 비애(悲哀)를 생각하니 그 비애를 가히 알겠다.” (량치자오 지음·최형욱 엮고 옮김,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2014, p14)1907년 10월에 양계초는 ‘아! 한국, 아! 한국 황제, 아! 한국 국민’ 글을 발표했다. “한국 황제가 양위하고, 한국 군대가 해산하고, 한일신협약이 성립되었다. 아! 한국이 망했다. 아! 한국이 완전히 망했다. 온 세상에 바삐 돌아다니며 서로 알리기를 일본인들이 한국을 망하게 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어찌 한국을 망하게 할 수 있겠는가?한국이 망한 것은 한국 황제가 망하게 한 것이요, 한국 인민이 망하게 한 것이다. 한국 황제가 어떻게 한국을 망하게 했는가? 기지가 조금 있으나 독단으로 처리하기를 좋아하고 정해진 의견이 없으며, 오직 그럭저럭 버티는 데에만 힘쓰며 사람들의 이목을 막으려고만 했다. 또 늘 외국에 기대어 그 지위를 보존하고자 했다. 10년 동안 개혁 조칙들이 수십 차례 내려졌으나 정치는 전에 비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국에 이러한 황제가 있음으로 한국은 마침내 망했다.한국 인민이 어떻게 한국을 망하게 했는가? 한국 인민은 양반 관리들을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미천한 관직이라도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오직 사당(私黨)을 키워 서로 끌어주고 서로 밀치며,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은 몰랐다. (후략) (량치차오 지음, 위 책, p 82~84).”1910년 9월 14일에 양계초는 ‘일본병탄 조선기’를 썼다. 이 글은 64페이지에 달하는 장문(長文)이다. 양계초는 1868년부터 1910년까지 40년간의 조선의 멸망 과정을 4단계로 나누었다. 제1기는 메이지 유신과 청일전쟁, 제2기는 삼국간섭 이후 러일전쟁, 제3기는 을사늑약 이후 안중근 의거, 제4기는 1910년 망국이었다.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을 개방시킨 일본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일본은 1894년에 동학 농민봉기로 유발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이겼다. 그런데 1895년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요동 반도를 반납한 후 일본은 와신상담했다. 그리고 1905년에 러시아를 이긴 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했고 1910년에 조선을 강점했다.양계초는 일본의 조선 병탄을 이렇게 분석했다.“합병은 단지 그 명의일 뿐이나, 합병행위가 아니었더라도 어찌 조선이 멸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무릇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한 연후에 남이 정벌한다. 조선이 만약 스스로 망하지 않는다면 망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40년 동안 일본이 했던 바를 하고자 했던 나라는 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열매를 획득한 나라가 어째서 오직 일본이었는가? 이는 단지 천행이라고만 할 수 없다. 중국이 조선에서 쌓았던 2천 년의 위엄 위에 다시 대의명분으로 임했다면, 일의 추세가 순조로워 일본은 중국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러시아가 그 광활한 영토와 많은 인민을 가지고 조선을 빼앗아 선성(先聲)을 올렸고, 조선을 중시한 것 또한 몇 배나 됐다.그러나 일본은 지극히 순조롭지 못한 지경에 처해서도 지극히 끈질긴 힘을 떨쳐 이 두 강자와 패권을 다투었고, 그 득실의 정세는 믿었던 바에 반대가 됐다.내가 자주 논했거늘, 일본이 승리한 것은 8단(端)을 알았다는 것이다. 첫째, 일본은 조선을 도모함에 있어 수십 년간 정책이 일관됐다. 둘째, 일본은 조선에서 실패 역시 여러 번 했지만, 처음에 세운 뜻을 버리지 않고 실천했다. 셋째, 기회를 살피는데 지극히 민첩하고 나아가는 것 또한 신속했다. 넷째, 위험을 무릅쓰고 매진해 다른 나라가 하지 않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다섯째, 일본은 마치 수은이 땅에 흐를 때 들어가지 않는 구멍이 없듯이 어느 방면을 막론하고 다 힘을 썼다.여섯째, 다른 나라들은 인민 여론의 세력에 대해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았으나, 일본은 40년 동안 경영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즉 일진회 등을 만들어 교묘한 책략들을 제공했다. 일곱째, 다른 나라들이 키우고자 서둘렀던 것은 오직 정치 세력이었으나, 일본은 경제 세력과 정치세력을 동시에 맹렬히 나아가며 쉬지 않았다. 여덟째, 다른 나라의 주동자들은 우리의 원세개나 러시아의 베베르 같은 이가 있으되 불과 한두 사람이었다. 일본은 여러 방면 모든 갈래를 나누어 활동하는 이들이 있어 위로는 장교로부터 아래로는 병졸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직책에 따라 함께 달려갔다. 저들이 우승의 기술을 지니고, 마음으로 도모하고 눈으로 집중하는 것이 어찌 조선 하나뿐이겠는가? 이에 나는 조선의 멸망을 보며 춥지도 않는데 전율을 느낀다.” (량치차오 지음, 위 책, p106~170).이어서 양계초는 1910년 9월 14일에 상해에서 발행한 ‘국풍보(國風報)’에 ‘조선 멸망의 원인’을 게재했다. “아! 이제 조선은 명실상부하게 멸망했다. 다시는 군주가 없고, 다시는 정부가 없고, 다시는 민족이 없고, 다시는 언어와 문자·종교가 없게 됐다.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사실 궁정(宮廷)에 있다. 오늘날 입헌국가에서 군주는 정치적 책임이 없고 악정(惡政)도 할 수 없다. 전제국가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국가의 명운이 전부 궁정에 달려 있다. (…) 조선의 태황제(고종)는 재위한 지가 거의 50년 됐는데, 위로는 생부에게 휘둘리고 안으로는 부인에게 견제를 받고, 아래로는 신하들에게 현혹됐다. 정사가 여러 문에서 나와 모든 근본이 정해지지 않음으로써 국가의 원기가 마침내 끊어져 다했다.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고종이 망하게 한 것이다.”이어서 양계초는 양반이 나라를 농단했다고 비판했다.“조선 사회는 망국의 사회다. 양반이라는 자들이 나라를 농단했다. 양반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양반은 관리로 임용되면 제 맘대로 빼앗고 가져가니 각종 조세 중 국고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이 백성으로부터 갈취한 것의 1/3도 안 됐다. 이런 까닭에 관리는 조선에서 가장 이익이 남는 장사였으니 양반들은 관리가 되기 위해 마치 오리 떼가 달리듯 했다.”(량치차오 지음, 위 책, p 86~95)양계초는 조선 백성에게도 비판적이었다.“이번에 합병조약이 발표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은 오히려 조선을 위해 흐느껴 울며 눈물 흘렸는데, 조선 사람들은 술에 취해 놀며 만족했다… 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은 반드시 천성에서 나온 것은 아니며, 과반수는 사회현상이 핍박해 그렇게 한 것이다.”이처럼 양계초는 조선은 썩어 문드러져 스스로 망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대체로 조선 정치의 문란함은 다스릴 수도 없고, 썩어 문드러져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지러움을 도모함에 부지런히 힘쓰고, 분발해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었다. (…)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이 어찌하겠는가? 스위스·네델란드·벨기에를 보지 못했는가? 국토 면적과 인구가 모두 조선보다 훨씬 못하지만, 유럽의 여러 강국이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이지 일본이 아니다. 무릇 조선 사람들은 망하는 것을 스스로 즐겼으니, 또한 무엇을 가엾게 여기겠는가? 아! 이제 조선은 끝났다. 황실의 위엄이 어디 있으며, 관리의 권세가 어디 있으며, 양반의 가문이 어디 있으며, 백성의 기름을 짜내서 이룬 경복궁이 어디 있으며, 삼청동의 여러 민씨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저택들이 어디 있으며, 일진회·대한협회가 어디 있으며, 뇌물을 쌓고 쌓던 허리춤 전대가 어디 있겠는가? (…) 오직 한 매국노의 이름을 사적(史籍)에 길이 남겨 만세에 비웃음과 욕을 먹게 했다. 천지간의 귀신에게도 물을 수 없는 얼마의 수단을 써서 그 뇌물 상자를 불렸던가? 이제는 모두 재처럼 타다가 날아가 없어지고 소리없이 사라졌다. 깊이 생각하고 찬찬히 살펴보노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랬던가? 그런데도 조선 사람들은 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 (량치차오 지음, 위 책, p 98-105).”신채호 · 박은식 · 장지연 등에게 영향을 주었던 양계초는 조선은 국왕에서부터 정부 관료 그리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망국의 길을 자초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조선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대오각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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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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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국, 아! 한국 황제, 아! 한국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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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산청군 이사재 박호원 배롱나무
- 지리산 들머리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이사재(尼泗齋)는 박호원(1527~1585)의 재실이다. 밀양이 본관인 박호원의 아버지는 호조 소속의 정3품 ‘내자시 부정’을 지낸 박이, 어머니는 황희의 5대손으로 한성부판윤을 지낸 황맹헌의 딸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박호원은 명종 1년(1546)에 사마시에 급제, 1552년 문과에 급제하여 1555년 함경도 북평사가 되었다. 1562년, 중종 무렵부터 나라를 시끄럽게 하던 임꺽정 토벌 때에 반국대적토포사 남치근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웠다. 임꺽정은 홍길동, 장길산, 전우치와 더불어 조선의 4대 도적이다. 임꺽정의 아버지는 동네 우물물도 먹지 못하는 경기도 양주의 고리백정으로 관에 끌려가 죽었다. 이에 도적이 된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황해도 구월산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했는데 지략과 통솔력을 갖추고 힘이 장사였다. 관은 임꺽정 무리의 토벌에 나섰지만, 빈민들이 이들을 도와 어려움이 컸다. 위정자들의 수탈과 학정에 시달리던 천민계층에게 이들은 의적이었던 것이다. 박호원은 이 임꺽정 토벌의 공으로 어느 역에서든지 말을 이용하는 숙마 1필을 상으로 받았다. 또 이듬해에 세자시강원 보덕이 되고 1565년에는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리고 선조 9년(1576) 대사헌, 1581년에 호조판서가 되었고 임진왜란 발발 7년 전인 1585년 세상을 떠났다. 박호원은 호조의 참판과 판서를 지낸 유능한 경제관료였다. 훈구파의 자손으로 동인과 가까웠으나 선조 시대의 사림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너그러운 인품의 정치인이었다. 박호원은 증조부 시절부터 한양에서 지냈으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꽤 너른 임야와 농지를 소유했다. 이곳 박호원의 재실 이사재 상량문의 기록 ‘세정사팔월’은 1857년이니 사후 270여 년 뒤 지어진 건물이다. 또 이사재는 여기 니구산과 사수천에서 한자씩 이름을 따왔다. 또 니구산은 공자의 고향인 산동 곡부의 뒷산, 사수도 그곳의 사수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사재는 왼쪽의 니구산, 앞쪽의 사수천이 훤히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는데, 들어가려면 회화나무와 소나무가 수문장으로 지키고 있는 거유문을 지나야 한다. 거유라는 말 역시 맹자의 말씀 ‘인에 머물고 의를 따른다’는 ‘거인유의(居仁由義)’이다 이 재실 앞에 박호원의 외거노비가 살던 집이 있었다. 1597년 6월 1일(양력 7월 14일) 이순신이 하룻밤을 묵은 곳이다. ‘비 오다, 일찍 떠나 청수역에 도착하여 말을 쉬게 하였다. 저물녘에 단성 땅 박호원 농노의 집에 머물려는데 주인이 흔쾌히 맞아주었으나, 잠자리가 좋지 못하여 어렵게 겨우겨우 밤을 보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거유문을 들어서면 담 곁에 매화나무가 있다. 당시 농노 집 뜨락에도 매화나무가 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옥살이와 고문 후유증, 모친상의 슬픔 속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고난의 길이었다. 오늘의 이사재 매화는 그날 이순신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나무를 대신하고 있다. 이사재 왼쪽 담 곁에는 유난히 연리지가 많은 200여 살 배롱나무가 있다. 나무 아래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천원지방이다. 네모난 못 가운데의 둥근 바위가 마주봄이요, 한여름 노오란 어리연꽃과 붉은 배롱꽃은 바라봄이다. 다 연리지의 함께함의 인연이다. 이순신이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을 지내고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를 지냈으나, 당시 궁궐에서 여기 집 주인 박호원과 친분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는 두 분의 인연도 매화처럼 향기롭고 배롱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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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산청군 이사재 박호원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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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식의 어른 왈/바로 지금
- 예상했던 대로 싸움판이 벌어졌다. 이미 시작된 다툼이 본격화되고 그 양상이 심각해졌다고 할 것이다. 그동안 온갖 시비와 패악으로 ‘때려주기’를 원하는 듯하던 세력들은 마침내 파업을 추켜즐었다. 칼 물고 뜀뛰기요, 시뻘겋게 숯불이 타오르는 화로를 안고 살판을 넘는 격이다. 막장 행태를 보임으로써 국민들의 불편과 불안을 고조시키고, 상대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불법 행위에 대해 정부가 ‘법대로’ 대응하면서 파업의 동력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국민들 대다수가 파업에 공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극심한 거부반응을 보인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이제 모두들 파업이 귀족 노조가 더 많이 비정상적인 몫을 챙기려는 짓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고의건 아니건!)는 점을 깨닫고 있는 듯하다. 이제 핵심 노조가 파업을 철회하고 상위 조직에서 탈퇴하는 데다 개별 노조원들의 이탈까지 이어지면서, ‘시끄러운 장(場)’을 만들어 결전을 벌이려던 시도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꼴이 되고 있다. 이런 정황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정치판이다. 前 최고 권력자는 ‘도를 넘지 말라‘고 을러대면서, 자신의 집권 때와 정보는 같은데 결론이 반대가 됐다고 투덜댔다. 당시에 중요 정보를 삭제하고 대통령기록물로 묶어 은폐했을 뿐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갖고 왜곡 날조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혹시 빠뜨릴까 걱정하는 듯 그는 중대 범죄(혐의)에 대해 ’내가 했다‘고 자백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최고 권력에 도전하기도 했던 한 정치인은, 이 지역의 가뭄을 거론하며 ‘과거에는 왕이 책임졌다’고 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부나 그 최고 책임자를 꾸짖고 나무라려는 속셈이었을 텐데, 전제(專制)적이며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칭신(稱臣)하며 현 최고 권력자를 왕으로 섬기고, 지부상소(持斧上疏)로 곤경을 면하려는 것이냐는 비아냥도 퍼부어졌다. 그(들)는 이 지역에서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는데, 가뭄이나 건축 현장 붕괴 등 참사(慘事!)가 왜 이곳에서만 발생하는지에 대해 아무 인식도 없고 따라서 반성도 하지 않는다. 오직 남만 탓하면서, 그 과정에 또 제 발등을 찍고 있다. 삼악(三惡)의 으뜸이라는 우치(愚癡) 즉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이 패거리들의 저열(低劣)함을 안타까워할 여유는 없다. 협잡꾼과 모리배들은 끊임없이 하소연하고 징징거리고 울부짖으면서, 교활하게 허점을 노리고 악랄하게 약점을 공략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애 팔목 비틀기’도 확실하게,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도 완전하게, 풀을 뽑되 뿌리까지 철저하게 해야 한다. 법과 질서를 온전히 지킬 때, 이 사회가 한 국가로서 기능하고 구성원 모두가 살 만한 터전이 될 수 있다. 그 유일한 대의(大義)를 굳게 세워 밝게 내보일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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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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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식의 어른 왈/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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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부여 가림성 백제병사 충혼 소나무
- 중국 제나라 관중의 저서 관자에 있는 ‘민이식위천 왕이민위천’은 ‘백성은 먹는 것이 하늘이고, 왕은 백성이 하늘이다’라는 말이다. 백제 제24대 동성왕이 가림성을 쌓은 건 바로 그 하늘인 백성을 잘살게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리고 왕의 절대권력이 백성(하늘)을 지키기 위함이라 믿었기에, 가림성의 병사들은 그 하늘(백성)을 지키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백제라는 나라 이름이 있건 없건 오직 하늘인 백성을 위해 굳건히 성을 지켰다. 하지만 사치와 향락에 빠져든 동성왕의 행각은 하늘의 버림을 받았다. 501년 8월, 동성왕은 가림성을 축조한 위사좌평 백가를 성주로 임명했으나 백가는 불만을 품었다. 그해 11월 사냥을 나간 동성왕이 큰 눈에 갇혀 가림성 가까이 머물렀다. 이때 백가는 자객을 보냈고, 왕은 큰 상처에 12월에 죽었다. 뒤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백가를 참수하고 시신을 백강에 던졌다. 여섯 명의 좌평은 백제 16품 관등의 1품이고 위사좌평은 왕의 호위와 군사를 맡은 직책이다. 백가는 동성왕의 신임을 받아 중국 남제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백성을 내팽개친 우매 탐학한 왕과 자신의 정치 권력만 탐낸 백가의 반역은 백제 멸망의 신호탄이었다. 부여 임천면의 가림성은 동성왕 23년(501) 8월, 금강 하류 성흥산에 쌓은 산성이다. 산봉우리 즈음에 쌓은 머리띠 모양이어서 ‘테뫼식’, 떡시루에 두르는 시룻번 같아 ‘시루성’이라고 하는 산성이다. 골짜기를 끼고 산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과 달리 물과 식량이 넉넉지 않아 오래 버티기 힘든 성이다. 하지만 여기 가림성은 660년 백제 멸망 이후에도 672년까지 백제의 이름을 당당히 지킨 철옹성이다. 성이 있는 성흥산은 해발 260m로 낮으나, 평야에 우뚝 솟아 강경을 비롯해 금강 하류 일대를 바라보는 군사 요충지이다. 또 남북국 시대에 신라가 국가 제사를 지낸 24개 명산의 하나이다. 산기슭의 대조사는 백제 26대 성왕(504~554) 때 스님 겸익이 창건했다. 어느 날 겸익의 꿈에 관세음보살이 황금빛 큰 새가 되어 성흥산 중턱 바위로 날아갔다. 겸익이 그곳에 절을 짓고 미륵 석불을 세웠다. 이 황금빛 큰 새의 서기로움은 대륙의 웅자로 부여족 후손인 성왕에게 백제 부흥의 희망을 품게 했고,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660년 6월이다. 개 한 마리가 사비강 언덕에서 왕궁을 향해 짖고 사라졌다. 사비성의 개들도 길가에 모여 짖고 울어대다가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궐에서 큰소리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라고 외치다 땅속으로 들어갔다. 땅을 파보니, 석 자쯤 깊이에 거북이가 있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고 쓰여 있었다. 의자왕이 이에 대해 묻자, 무당이 ‘둥근 달은 가득 참이니 차츰 기울며, 초승달은 가득 차지 못함이니 점점 차게 된다’라고 대답했다. 뒤이어 신하가 ‘둥근 달은 왕성함이요, 초승달은 미약함이니,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해진다’라고 대답했다. 의자왕은 노하여 무당은 죽이고, 신하의 대답에는 기뻐하였다. 1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은 물론 나라를 망치는 것은 공정과 상식이 아닌 우매와 탐학에 있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 망국의 백제를 끝까지 지킨 부여 임천면 가림성에 백제병사 충혼사가 있다. 그리고 병사들이 쉼 없이 오르내렸을 성벽 아래 바윗길에 한 아름 반의 소나무가 천년 세월을 이고 있다. 문득 백성을 하늘로 우러른 가림성의 용감한 백제 병사와, 자신이 하늘인 양 으스대던 왕을 비롯한 우매 탐학한 자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리고 그 이름 없이 스러져간 병사들 생각에 떨어지려는 눈물을 감추고 슬픔을 참으려 그저 고개를 숙인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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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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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부여 가림성 백제병사 충혼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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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영광! 땅에 이지웨이!”
- 이병석 반석그룹 회장 33년 전 반석상사 창업, 자재·공구·비품 호남 선두종합건설부터 전문의류까지 건축 일관 체제 갖춰 인터넷 판매 ‘이지웨이’로 도약 “경쟁보다 상생” 이병석 반석상사 회장은 이지웨이 사옥(대지 1300여 평, 건평 480평) 완공에 맞춰 계열사들의 업무 분장에 관심을 쏟고 있다. 1989년 창호 자재를 취급하는 반석상사를 창업하며 건축업계에 투신한 후 이제 종합건설까지 아우르는 기업집단을 이룬 만큼 관리의 효율성이 중요해진 것이다.건축업계 외길 33년반석 계열사는 건축자재·공구부터 단종 건설, 종합건설에 이르기까지 건축과 관련해 일관 체제를 갖추고 있다. 고객 접근 방식도 일반 매장과 인터넷 판매를 병행하며 상승효과를 내고 있다. 최근에는 코오롱의 건축 현장 의상 브랜드인 볼디스트(BOLDEST) 대리점을 열기도 했다. 전국 두 번째다. 이병석 회장은 “지역 건설업계에서 쌓은 신뢰 덕에 (볼디스트 대리점을) 열 수 있었다”라며 “건설 인력의 안전을 도모하고 편리성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터넷 판매 ‘이지웨이’ 돋보여점점 판매 규모와 비중을 키워가고 있는 인터넷 판매업체 ‘이지웨이’의 약진도 돋보인다. 2016년 창립한 이지웨이는 공구와 비품 등 자재를 쉽고 편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매장·체험장 개설과 함께 인터넷 판매망을 구축해 지역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호남 최대 건축 자재·공구 업체 지향이병석 회장이 이끄는 회사는 종합건축, 시설물 유지, 창호·철물, 도장(塗裝)을 담당하는 ㈜페트라산업개발, PC(POLYCARBONATE) 등 건축 자재 일반을 취급하는 ㈜반석넥산 그리고 디월트(DEWALT)를 비롯한 전 세계 명품 공구와 건설 자재를 호남 최대 규모로 취급하고 있는 ‘이지웨이’가 있다. 작은 자재·공구부터 의류와 단종업체부터 종합건설에 이르기까지 건설 관련 일관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이병석 회장은 “아들 둘이 분야를 나눠 잘 이끌어가고 있다”라며 “경륜이 필요한 부분에 조언하는 것으로 도움을 주려고 한다”고 밝혔다. 책임지는 자세로 일할 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독실한 기독교 믿음이 바탕이병석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해밀교회 장로, 2006년 임직)다. 말술을 마다않고 줄담배를 물고 지냈던 ‘호걸’이었지만,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지금도 큰 자랑거리가 두 아들과 손자들까지 12명 모두 교회에 ‘열심’이라는 점이다.이 회장은 3년 전 개인적으로 페트라선교회를 설립해 콩고·베트남·태국·필리핀과 국내 등 10여 곳의 선교를 지원해왔다. 앞으로 그 범위와 규모를 확대할 계획이다. ‘기독교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더 힘을 기울이려는 것이다. 이병석 회장은 관련 업계에서 성공을 거둔 이유로 ‘상생’을 꼽는다. 전체의 발전은 경쟁을 통한 승패가 아니라 공존하는 협력으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병석 회장은 시편 23편을 믿고 의지한다. 목자가 ‘갈 만한 곳’으로 인도하리라는 굳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려고 힘쓴다.그러니 당연하다. 하늘의 영광을 위해 진력하는 이병석 회장에게, 사업이나 가정이나 자기의 영혼까지 성공에 이르는 길은 밝고 뚜렷하게 저절로 드러난다. 하나님이 예비한 이지웨이(EASY WAY, 쉬운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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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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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영광! 땅에 이지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