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7-07 (목)

기획.연재
Home >  기획.연재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주성식의 어른왈/“2022년, 보이나니!”
    2022년이다. 하루가 여럿 모여 한 해가 되는데, 또 하나 구획(區劃)이 당도한 것이다. 아득한 집(宇)과 까마득한 때(宙)를 살피자니 감회가 심상치 않다.새해를 맞으며 온갖 덕담(德談)이 만발하고 밝은 전망과 흐뭇한 다짐이 넘쳐난다. 묵은 때를 잘 벗고 새 틀을 제대로 갖추자는 것이니, 소중한 습속(習俗)이 아닐 수 없다. 살아가는 실상이 만만치 않은 것이야 외면하면 그만이다. 인류가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이래 처음이라고 할 괴질(怪疾)이 엄연하고, 이기(利己)를 탐하며 독선(獨善)을 좇는 행태가 날로 악화되는 것도 맹목(盲目)이면 족하다. 척도(尺度)는 왜곡되거나 실종됐고, 말도 아닌 횡포(橫暴)한 소리만이 난무한다. 얄팍한 지력(知力)을 앞세워 현란(絢爛)한 분장술과 뒤섞고는 눈을 놀리며 귀를 가린다. 대화 따위 소용될 까닭이 없다. 무식과 배울 뜻마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편하게 그저 관견(管見)을 광신(狂信)할 따름이다. 그런 청맹(靑盲)과니들이 작당(作黨)해 마침내 대세를 조작하고 정도(正道)를 자임한다.그뿐이겠는가. 한 쪽에서는 오직 일신의 안위를 챙기면서 세상 일을 초월한 듯 흰 소리를 내뱉는다. 백안(白眼)과 사시(斜視)를 희번덕거리며, 언제건 휘두를 칼날을 뱃속에 감춘 채 그렇다.온통 도박판이고, 난장판이며, 복마전이다. 보다 악착(齷齪)같아야 살아남고, 더 악랄(惡辣)해야 행세한다. 인의·공정·염치·도덕 등은 빨리,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고 뭉개서 버리는 것이, 최선의 처세술이며 유일한 생존법이 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신뢰(信賴)가 사라져 없어진 것이다. 오늘 말을 내일 뒤집고, 극독(劇毒)에 당의(糖衣)를 입히고는 명약(名藥)이라고 속인다. 간담(肝膽)을 꺼내놓거나 목을 자를 듯 선연(鮮然)한 약속은, 버릇처럼 희롱이요  매양 사술(詐術)이 된다. 당연하다고 속삭이고, 당당하게 강변(强辯)한다. 옛 경전 중 하나에서 종말의 표지(標識)를 ‘읽을’ 수 있다. ‘말세는 세상에 신뢰가 사라진 때이며, 그 징후는 자격 없는 자가 권력을 잡는 것’이라고 천명(闡明)한다. 어떤가, 과연 감당하겠는가? 혹시 학수(鶴首)로 기다리는 것인가?2022년을 맞아 보이고, 보리라! 오래됐으나 늘 새로운 세상에 간절한 뜻을 드리리라! 지혜롭게 생각하고, 선량하게 행동하며, 모든 것이 온전해지기를!  
    • 기획.연재
    2021-12-30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신령스런 겨레의 성산, 백두산
    ‘백두산 벋어내려 반도 삼천리’의 백두산은 우리 어린이들이 폴짝폴짝 고무줄놀이에 노래하는 우리 겨레의 신령스런 성산이다. 지혜로운 웅녀가 용맹한 호랑이족을 품에 안아 하늘을 열고 아들 왕검이 땅을 펼치니, 윗녘의 너른 들 만주와 아랫녘의 무궁화꽃 피는 한반도이다. 백두대간이 개마고원에서 구름 위로 허리를 곧추세우니 지리산이 천황봉을 올려놓고 영산강, 낙동강, 탐라까지 품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씨를 뿌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열매를 거두었다.백두산은 북한의 량강도 삼지연군과 중국의 지린성에 걸쳐있는 휴화산이다. 천지는 20억여 톤의 물을 담은 가마솥의 칼데라 화산이다. 1413년, 1420년, 1597년, 1668년, 1702년에 화산재와 가스를 내뿜었다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의 이 천지를 내려 보는 2750m의 장군봉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고 한 해 8개월여 흰 눈을 얹은 흰머리산이다. 2500m 이상 되는 장군, 향도, 비류, 쌍무지개, 와호, 해발, 망천, 제비봉은 북한 쪽이고, 천문, 철벽, 용문, 녹명, 차일, 자하, 백운, 청석봉은 중국 쪽이며, 제운봉은 북한과 중국의 경계에 있다.다 우리 땅이건만 북한 삼지연의 동쪽 언덕길인 동파 말고는 북파와 서파, 북한과 경계인 남파까지도 지금은 남의 땅, 중국 땅 밟아 오르는 백두산 길이다.   <천지가는 길 백두밀림 잎갈나무> 슬프지만 어찌하랴? 사방 천지가 다 사람 사는 땅이라고 애써 달래며 백두산 천지의 흰 봉우리 끌어안으니, 백두 호랑이 만주벌판 내달리고, 백두 곰은 하늘 못에서 헤엄을 친다. 누가 뭐래도 백두산은 한반도의 신령스런 성산이요, 어버이산이다. 설령 지도에 금을 그어도, 그 누가 자기 것이라 우겨도 우리 산이다.숙종 38년(1792), 조선과 청은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인 압록강과 토문강이 나뉘는 곳 ‘ㅅ’자 바위에 두 강이 국경이라는 정계비를 세웠다. 그 뒤, 청은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며 백두산이 자기 땅이라 우기고, 조선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 밖 두만강을 토문강이라는 건 어림없는 말이고, 토문강이 흘러 송화강이 되는 곳까지의 간도가 우리 땅이라 했다.하지만 조선도 청나라도 아닌 일본이 청일전쟁 뒤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두만강과 압록강 위쪽의 기름지고 너른 들, 옛 고구려 땅인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아예 백두산정계비까지 없애버렸다. 그것뿐인가? 한국전쟁 뒤 북한과 중국은 백두산과 천지를 반으로 나누었다.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체결한 북·중국경조약이 그것이다. 더하여 2010년 위화도까지 중국에 넘겼다는 건 믿고 싶지도 않다.백두산과 백두고원 아래쪽의 잎갈나무,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 조금 오르면 들쭉나무, 백산차 등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조금 더 오르면 구름국화, 만병초 등 한대성 꽃과 금방망이, 물매화 등 냉대성 꽃들이 긴 추위가 다가오기 전 여름 한 철에 몰아서 핀다.   <삼지연 자작나무> <ㅅ사백두산 호랑이니 곶감을 무서워할까? 표범, 사향노루, 백두산사슴, 천지의 괴물이라는 큰곰 등 네발 달린 짐승과 삼지연메닭, 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 등의 조류, 북살모사와 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 무당개구리, 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 너무 차가워 생명체가 살기 어렵다는 천지에는 오색 무지갯빛 천지산천어가 있다. 백두산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건 또 그들이 있어서이다. 그래서 백두산은 사람뿐만이 아닌 온갖 생명체를 품고 있는 한반도의 씨종자산이다.나무와 꽃, 짐승 등 산 식구들 이름을 알아도, 몰라도 백두 밀림 걸어 천지에 이르니, 돌개바람이 휘감아 올린 물기둥이 용이 되어 하늘을 날고, 이내 비 그쳐 뜬 쌍무지개가 하늘길 사다리를 놓는다. 아름답다. 그저 신비롭고 장엄하다.이 천지의 못물이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니, 만주와 한반도를 함께 품는 백두산의 날개이다. 그 두 날개를 활짝 펼치며 한바탕 훨훨 나는 것은 폭포이다.   <천지가는 길 백두밀림 잎갈나무>   비룡폭포는 빼앗긴 땅, 중국 쪽에 있으니, 장백폭포라고도 한다. 천지가 꽁꽁 얼어도 용문봉과 철벽봉 사이 달문(땅문)을 나오며 하늘로 오르는 다리 승사하가 되었다가 67m 높이 비보라를 일으킨 뒤 4km쯤 흘러 이도백하에 이른다. 이도백하는 하늘 못물이 일도 천지에서 이도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곳 정계비 세워놓은 곳에서 송화강 상류인 토문강과 압록강으로 헤어지고 한 줄기는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두만강이 되어 나온다.그러니까 이도백하는 천지 못물이 토문, 압록, 두만의 셋으로 헤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두만은 수많은 지류를 품은 으뜸강이라는 말이지만, 장 담그는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 북부인 만주 지역이고 이미 고구려 시대에 콩된장이 있었으니 또 두만강이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서 도망치듯 땅속으로 숨었다가 수십 리 밖에서 솟아 나오니, 숨바꼭질 도망강이다.북한 땅인 장군봉 아래 300m쯤 계곡에서 샘물로 솟구쳐 나오는 3단 폭포는 사기문 폭포이다. 신기하고 영롱한 물빛을 생각게 한다는 이름의 사기문폭포가 직선의 급경사를 쏜살같이 달려서 햇살에 무지개를 그리며 떨어지니 백두폭포이다. 이어 백두밀영폭포와 두 물줄기로 가지런히 떨어지는 형제폭포들도 다 압록강의 근원이다.역시 압록강이 되는 리명수(鯉明水)폭포는 천지의 눈 녹은 물이 수십 킬로미터 땅속을 흘러 벼랑 중턱에서 솟구쳐나온 뒤, 두 번 꺾으며 다섯줄기의 은구슬로 한겨울에도 쏟아지니 신비롭다. 이곳의 잎갈나무 숲도 아름답지만, 폭포 기슭에는 나이 500여 년의 채양버들이 있다.이들 백두산의 수십여개 폭포는 모두 다 압록강이 되고 두만강이 되는 우리 폭포이다. 그리고 땅속 부석층을 흐르다 쏟아져나오는 리명수폭포가 있는 곳이 삼지연시이다. 이곳 백두산 기슭의 호수인 삼지연은 100여만 년 전에는 강이었는데, 백두산과 북포태산의 부석 등 화산분출물이 물길을 막아 눈과 빗물, 샘물로 채워지는 무방수호가 되었다. 처음에는 일곱 못인 칠지연이었는데, 지금은 세 곳만 남아 삼지연이다.여기 삼지연 비행장은 2005년 우리가 지원한 피치 8천 톤으로 활주로와 진입로를 보수하였고, 2018년 9월 20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백두산 천지에 오르기 위해 이 공항을 이용하였다. 그렇게 항공편을 이용하여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이 공항을 거쳐야 한다. 이 공항 활주로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백두산과 끝없이 펼쳐지는 백두밀림은 참으로 장관이다.또 북한에서 2009년에 발행한 1,000원짜리 지폐의 뒤쪽 그림은 삼지연 못가의 자작나무이다. 김일성이 항일독립군과 함께 첫발을 디뎠던 곳이라며, 1972년 6월 3일 여기 삼지연 못가의 자작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북한에서 봇나무라고 부르는 이 두 그루의 자작나무는 아랫부분이 한 그루처럼 붙어있어 마치 두 펄 벌려 만세를 부르듯 서 있다.이 백두산의 또 다른 이름은 태백산이다. 하늘을 열고 땅을 펼친 크고 밝은 산이니, 고조선의 제1세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다. 왕검은 서기전 2.333년에 송화강 유역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으니 단군 조선이다. 22세 색불루 단군이 남서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지린성 장춘의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다. 44세 구물 단군 때는 더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랴오닝성 개원시의 장단경 아사달로 또 도읍을 옮겼다. 마지막 47세 고열가 단군은 서기전 238년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우자, 이듬해인 239년 제위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단군조선은 47명의 단군이 2096년간 다스린 우리의 첫 국가이다.역사와 세월은 흘러간다.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백두산 천지의 우뚝 솟은 봉우리, 용트림하는 폭포와 활짝 펼친 두 날개 압록과 두만, 끝도 갓도 없이 펼쳐진 숲의 바다 백두밀림은 역사와 세월이 상존하는 신령스런 삶터이다. 옛 선인들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그날의 기개와 희망을 꿈꾼다면 역사건 세월이건, 앞으로든 뒤로든 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온 누리에 백두산의 영광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글/ 김 목 작가>
    • 기획.연재
    2021-12-30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광주향교 장원급제 은행나무
    광주공원의 옛 이름은 성거산이다. 위에서 보면 머리를 북쪽으로 두른 한 마리의 거북이가 광주천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다. 이에 거북을 달래려 등 위에 성거사를 세우고 목 위에 5층 석탑을 세웠다. 고려 초기의 일이다.조선 태조 7년인 1398년 서석산 장원봉 아래에 광주향교를 세웠다. 이 산 아래 고을에서 장원하는 인재가 많아서 장원봉이라 했고, 향교터로 잡은 이유였다. 호랑이의 피해가 잦아 성의 동문안으로 향교를 옮겼다. 하지만 저지대인지라 홍수에 취약하고 건물이 좁아 다시 고을의 서쪽 성거산 거북꼬리 터를 닦아 이전하였다. 1488년 권수평 현감 때의 일이다.1560년 목사 유경심이 향교를 중수하고, 기대승이 이를 기록하여 비를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향교가 훼손되자, 1600년 목사 이상길이 부임해 전당(殿堂)과 방실(房室)을 새로 지었다. 강항(1567∼1618)의 수은집에 있는 광주향교 중수상량문 기록이다.목사 서형수 재임 때인 1797년 정조가 자신의 책인 ‘어정대학연의’ 등의 교정을 광주향교에 맡겼고, 이의 보답과 우대책으로 이듬해인 1798년 도과 시험을 치렀다. 이 도과에 69명이 참여 53명이 합격하였고, 점수가 높은 2명(고정봉, 임흥원)이 임금 앞에서 전시를 볼 수 있었다.1804년 목사 김선이 낡은 건물을 개수했다. 1841년 8월 11일 밤, 명륜당이 불에 타 조철영 목사가 중수하였고, 1854년 홍재응 목사가 중수하였다. 또 일제강점기에 목사 박봉주가 비각을 중건하고 ‘광주향교비각중건기’를 자랑스레 써놨지만, 그 앞에 친일반민족 단죄문도 있다.이들 비석을 둘러보고 향교 외삼문을 들어서면 수령 250여 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성균관의 명륜당, 고부 향교와 함께 조선향교 3대 은행나무로 알려진 나무이다. 수령으로 봐서 서형수 목사 재임 때에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은행나무는 우람하다거나 별다른 큰 특징은 없다. 다만 정조 임금이 내린 도과의 시험 문제인 ‘어제’와 합격자 명부인 ‘어고방목’을 명륜당 봉안각에 보관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싶다. 당시 이를 기념하여 심었을 거로 여겨지니 장원급제 은행나무이다. 또 여기 향교가 거북꼬리 터고 은행나무가 그 꼬리에 닻처럼 섰으니, 성거사, 5층 석탑과 함께 광주 인재들을 위한 거북명당의 비보풍수 역할이 아닌가도 싶다.은행나무는 1목, 1과, 1속, 1종 밖에 없는 나무로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왔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암수가 있고 꽃가루 속에 움직이는 정충을 가진 풍매화이다. 1억5000만 년 전에 공룡과도 함께 살았으나 공룡은 멸종되었고, 은행나무는 끈질기게 살아 화석나무라 한다.독특한 향취의 부드러운 껍질 속 열매가 은백색이어서 백과(白果), 겉모양이 살구와 비슷하여 은빛살구인 은행(銀杏)이라 하는데 이는 한자 이름이다. 예전에는 은행잎이 오리발을 닮아 압각자(鴨脚子)였고, 열매가 손자 대에 가서야 열린다고 공손수(公孫樹)라 했다.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을 행단(杏壇)이라 하며, 향교를 세우면 공자의 상징처럼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고 길렀다. 그런 탓인지,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들과의 생존경쟁에 약하여 숲속보다는 사람의 손길이 닿는 장소에서 잘 자란다. 또 성장하면 수명이 길어 1,000여 년을 거뜬히 살고,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어, 장수와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다.기원하고 빌어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만, 진인사대천명인 게 세상사다. 그럼에도 장원봉이 있는 고을, 정조의 어제와 어고방목, 그리고 거북 명당 터의 정기까지 품은 늠름한 기상의 조선향교 3대 은행나무이며 장원급제 은행나무이다. 이 나무 앞에서 마음속 소망을 기원하고 빌어볼 일이다. 만에 하나 들어준다면 이 또한 은행나무 발복 아니겠는가?(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2-23
  • 고종, 한반도 분할 대비 평양 건설 나서
    #  서경 (평양) 행궁 공사 1896년 5월에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일본 대표로 참석한 육군 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러시아에 ‘39도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했다. 당시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 중(아관파천)인 시절이라 러시아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한반도 분할론’은 1894년 청일전쟁의 징후가 농후할 때 등장했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킴벌리는 중국과 일본에 한반도 분할 점령론을 제시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점령하며, 일본은 서울의 남쪽 지역을 중국은 서울의 북쪽 지역을 점령한다.” (이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요구한 ‘조선 4개도 분할’ 주장과 비슷하다.) 주미일본공사 또한 소말리아에 대한 영불 협정을 모델로 조선 분할 점령안을 제시했다. (최덕수 지음, 근대조선과 세계, 2021, p 175)하지만 일본은 영국 외무장관의 제안을 검토하는 듯하다가 1894년 7월 23일(음역 6월 21일)에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7월 24일에는 아산만 풍도에서 청나라 병력 1600명을 수송하던 영국 상선 고승호를 격침시켰다. 8월 1일에 일본은 청나라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청나라는 종이호랑이였다. 그런데 1901년 1월 7일 주일러시아 공사 이즈볼스키가 일본에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했다. 소식을 접한 고종은 비상이 걸렸다. 그리고 한반도가 분할될 경우를 러시아에 의지하여 북부지방에서라도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경(西京 평양) 건설에 나섰다. (이윤상, 대한제국기 국가와 국왕의 위상 제고사업, 2003;김용삼,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2020, p 334-335에서 재인용)1902년 5월 1일에 특진관 김규홍이 두 개의 수도에 대하여 건의했다. 즉 서경에 이궁(離宮)을 새로 짓자고 상소한 것이다. 5월 14일에 고종은 서경 공사를 명하면서 특별히 내탕전(內帑錢) 50만 냥(10만 원)을 내려보냈다. 그러면서 해당 도지사로 하여금 재정을 마련하여 공사를 끝내도록 하였다. 서경 공사비는 216만 원이 들었는데 고종이 하사한 내탕금 10만 원을 제외한 206만 원은 모두 평안도 백성들이 부담했다. (평안도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1903년 1월에 고종은 평안도에 대해 2년간 세금의 1/3을 감액하라고 명했다.)  1902년 6월 3일에 서경 행궁(行宮)인 풍경궁(豊慶宮) 공사가 시작되어 1903년 11월 6일에 태극전과 중화전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리하여 고종과 황태자의 어진이 모셔졌다. 그런데 추가 공사는 재정난 때문에 난관에 봉착했다. 더구나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평양은 어수선했고 공사는 중단되었다. 1904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 안종덕이 상소하여 서경 공사의 문제점을 아뢰었다. “서경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한 도(道)의 민력이 고갈되었다고 합니다. 대개 이 공사는 보잘것없는 간사한 자들이 원칙에서 어긋나는 망령된 설을 조작해 폐하를 속이고 그에 빙자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려는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서경 궁전을 건축하는 것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며, 백성들의 원한을 쌓으면서 궁전을 만들어 놓고 중하기 그지없는 황제와 황태자의 진전(眞殿)을 멀리 그곳에 모셔다 두는 것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입니까? 지금 러일전쟁을 하고 있는데 서경은 공교롭게도 그 요충에 있으니 장차 화가 미칠지 모릅니다. 신은 진전을 속히 도로 모셔 오도록 하소서.궁전 공사는 영영 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서도(西道)의 백성들이 소생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지금 중앙과 지방에 새로 짓는 사원과 부정한 사당이 몇이나 되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모두 헛되이 비용이나 허비하고 백성들이나 들볶아 대며 간사한 자들에게나 이익이 돌아가고 나라에서는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대체로 토목 공사를 벌이는 것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지 않는 데 관련되어 있습니다. 검소하지 않으면 청렴해지지 못합니다. 이처럼 재력이 궁핍한 때에 기근까지 닥치고 전쟁까지 덮친 마당에 백성들을 부리는 것이야말로 폐하의 청렴한 덕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폐하께서는 살피시기 바랍니다.”이어서 7월 25일에는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이 상소를 올려 서경 공사 책임자 민영철을 탄핵했다.  “민영철이 지난날 평안도에 감히 요궤(妖詭)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허황된 말로 부추기고 현혹시켜 폐하를 기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힘으로 눌러 복종시키려면 서경에 창건해야 한다고 하여 대거로 궁궐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매향전(賣鄕錢)을 집집마다 거두고 재목 운반 비용을 각 촌리(村里)에 배분하여 거두어들였으니 이는 백성이 어육(魚肉)이 된 것으로 마침내 전 지역이 소란해졌습니다. 그는 수많은 재물을 축적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는 국경을 넘어 몸을 빼서 도주하고는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으니 속히 자세히 조사하여 정죄(正罪)함이 마땅합니다.”이러자 1905년 2월 17일에 민영철이 공사 비용의 지출과 잔고를 기록하여 상소를 올렸다. “궁궐 공사를 감독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지출과 잔고를 기록한 책을 낱낱이 구별하여 올려서 폐하가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속히 신의 서경 감동당상 직책을 체차(遞差)시키고 직무를 잘못 수행한 변변치 못한 신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마침 어려운 시기를 만나 공사를 아직 끝내지 못하였는데 일의 형세가 본디 그럴 수밖에 없어서 재정문제로 말하면 수입과 지출이 더할 나위 없이 자세하니 혹 허튼 비방이 있다고 해도 개의할 것이 무엇인가? 소청이 이러하니 감동의 직책은 아뢴 대로 하고 끝내지 못한 공사는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그런데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서경 공사는 중단되었고, 1908년에는 봉안된 어진이 다시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 용암포 조차 사건 러시아는 1903년 4월부터 압록강 삼림 채벌에 착수하였다. 5월 초에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일부가 압록강 하구 및 용암포까지 진출, 한국인 명의로 토지를 매입하고 병참부로 사용할 창고 및 사무소 건설공사에 착수하였다. 7월에는 러시아 삼림회사 한성 주재원 귄즈버그와 고종의 최측근인 궁내부 내장원경 이용익이 서로 결탁하여 사방 10리의 용암포의 토지를 러시아 삼림회사의 목재저장소로 대여해주기로 약속하였다. 7월20일에는 친러파 조성협과 러시아삼림회사 총무인 모지스코는 ‘용암포 조차(租借)에 대한 가조약’을 체결했다.   ‘용암포 조차 가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과 영국은 즉각 반발했다.일본의 고무라 외상은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에게 즉각 전문을 보내어 이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이에 하야시는 용암포를 러시아의 조차지로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며, 모든 나라가 균점할 수 있는 개항장으로 개설하라고 조선 정부에 강력 항의하였다.이런 일본의 항의에 대해 외부(外部)는 하야시에게 “그 조약은 조성협 개인이 체결한 사적 사항일 따름이며, 용암포를 개항장으로 만들 의사가 있다”라고 언질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9월 중순부터 용암포의 뒷산인 용암산에 포대(砲臺)를 구축하고 석탄 및 탄약을 적재한 선박을 입항시켰으며, 용암포에서 약 10리 정도 하류에 위치한 두류포에 망루를 건설하는 등 노골적인 군사기지화를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용암포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 사건 이후 일본에는 개전론이 일어났다. 하지만 협상론도 대두되었다. 1903년 8월 12일에 일본은 6개 조문의 협상안을 러시아에 제시했다. 핵심 내용은 ‘러시아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세한 이익을 승인하고, 일본은 만주의 철도경영에 관한 러시아의 특수 이익을 승인한다’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었다.  10월 3일에 러시아는 일본에 답신하였다. ‘만주는 일본과 협상 대상이 아니다. 러시아가 한반도의 해협을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도록 하고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39도 이북의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한다.’      즉 만주를 러시아가 확보하는 것은 당연하고 39도선 이북은 중립지대로 하고 39도선 이남에만 일본의 우위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 기획.연재
    2021-12-21
  • 주성식의 어른왈/폭력의 기억
    20대 대통령 선거가 두 달 남짓 남았다. 그러나 이 사회의 바람직한 앞날에 대한 전망과 실천 방안은 보이지 않는다.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사회 체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근본까지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완벽하게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바에야, 공존(共存)의 기준은 확립하고 특히 준수해야 한다. 그 기준은 바로 최소한의 상식이다. 그 측면에서 대선 국면을 집권당(세력)의 행태 위주로 짚어보자. 무엇보다, 무소불위의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니까.그들은 아무 근거도 없이 코로나19 방역조치를 완화하고, 확진자가 폭증하면 사회 전체를 옥죄는 조치를 되풀이하고 있다. 수치스러운 무능과 절망적인 부패와 노골적인 이적(利敵)·매국(賣國) 행태는 갈수록 심각해진다. 끔찍한 패악(悖惡)과 추문(醜聞)이 경쟁하듯 등장한다. 단 하나만으로도 정권이 몰락할 사안이지만, 멀쩡하다. 민심을 추스르겠다며 내놓는 공약은 그저 “공약(空約)인 줄 알지?” 수준의 말장난일 뿐이다. 피로 피를 씻는 끔찍한 상황을 방치하거나 조장하고 ‘니들이 어쩔래?’라며 조롱하는 것 같다. 대선이라는 큰 경쟁의 결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뭔가 떠오르지 않는가? 지난해 21대 총선을 앞두고 집권당(세력)은 궤멸 직전 상황이었다. 몰락은 확실해 보였다. 그들에게는 상황을 돌이킬 아무 방법이 없었고, 누구보다 자신들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하늘이 돕고 신명이 보살피는 것일까.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고 할 돌림병이 등장했다. 마스크가 배급되고,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집회 결사와 이동의 자유가 박탈됐다.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놀랄 만한 방역 성과를 거뒀다(고 선전했다). 전 세계 언론이 찬사를 쏟아냈다(고 홍보했다).선거 취소 주장과 연기(延期) 요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외동포 등 최소 수 만명이 투표할 수 없었다. 국민 기본권인 투표권이 제한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승(大勝)을 거뒀다.과거 한 정복자가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전설이 떠오른다. 쾌도난마(快刀亂麻)도 그렇다. 결국 무법(無法)한 폭력이다.현 집권 세력은 지난해처럼 혼란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 아닐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어렵고 괴롭고 힘든 상황을 만들어 놓고, 쾌도(快刀)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전부를 전제(專制)·독재(獨裁)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 기획.연재
    2021-12-21
  • 시대의 명인인간문화재 양승희 선생
    가야금산조 및 병창 국가 무형문화재 제23호 양승희(梁勝姬) 선생은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金昌祖)의 모든 것을 발굴하여 만천하에 드러냈을 뿐 아니라 국악 사상 초유의 ‘산조학술대회’를 열고 가야금산조 효시에 대한 확실한 원형 제시로 국악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었다. 김창조의 손녀 죽파(竹波) 김난초(金蘭草)를 잇는 장손으로서 그의 연주는 지금 ‘사람의 마음을 두들기는 동중유정을 득도한 경지’라는 평을 듣는다.현재 유네스코 가야금산조 등재 추진위원장, 가야금산조 기념관 명예관장(영암), (사)국가무형문화재 기·예능협회 부회장, (사) 한국산조학회 이사장, (사) 김창조산조보존회 이사장, (사) 김죽파 양승희 가야금산조보존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저서(著書)와 연구 논문으로 ▲가야금산조 창시자 김창조와 가야금산조 ▲김창조 생애와 음악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樂聖 김창조 선생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이야기 ▲월출가야금 향연 ▲김창조 산조가 북한 안기옥, 정남희 산조에 끼친 영향 ▲한성기 가야금산조 등을 저술하고 5권의 악보를 출판했다.양승희 선생은 척박했던 가야금 1세대와는 달리 서울대학과 대학원에서 음악석사 과정을 밟고 1986년 성균관대대학원에서 ‘악기(樂記), 악리사상(樂理思想)의 철학적연구’논문으로 국악계에서는 드물게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지성인이다. 가야금 하나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현이 가지는 진정한 울림을 알기 위해 윤윤석에게 아쟁과 철금을 배우고 현과 판소리와의 조화를 모색하기 위해 스승 생존 당시 김소희를 모시고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김수연에게서 5년간 병창수업을 받았다.김창조, 한성기, 죽파를 탄생시킨 영암군에서 그는 가야금산조와 관련하여‘산조학술대회’를 열었다.2000년 4월, 영암군이 주최한 도선국사와 아스카(飛鳥) 문화의 시조로 알려진 왕인문화축제에서 축제 추진위원장 자격으로 ‘영암이 가야금의 본향’임을 전국에 알렸다. 실로 이러한 선포의 의미는 가야금산조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성취한 결과로서 양승희는 명실공히 김창조와 죽파를 잇는 후계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지금도 우리나라 ‘가야금 산조의 시조(始祖) 악성(樂聖) 김창조(1856-1919) 선생의 예술혼’과 그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고 선생의 산조음악의 계보 정립과 산조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가야금 산조의 본향인 영암에서 김창조 산조의 맥을 이어가면서 후대의 전수를 위해 평생을 받쳐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김죽파 선생은 양승희를 유일무이한 제자로 인정, 1985년 일본 공연 후 친필 유언을 남겼고, 국가에서 인정한 이수자 14명을 배출했다. 양승희를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준보유자(준인간문화재)로 세우고 1989년 9월 10일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이 타계한 후 2006년 정부는 양승희를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인간문화재로 지정했다. 이로서 양승희 선생이 김창조 산조의 정통성과 맥을 김죽파 선생으로부터 이어 받아 김창조 가야금산조의 음정, 박자 등 특징과 산조가락의 원형을 모두 사사했다. 김창조, 산조의 음악형식 완성악성 김창조 선생은 1856년 전남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에서 세습적 율객(律客)가정에서 출생, 재인 마을에서 자라면서 그의 천부적인 기악연주의 소질과 타고난 재질을 바탕으로 거문고, 해금, 피리, 단소 연주와 판소리 등에 탁월했으며, 근대 민간 기악음악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가장 빛나는 공적을 남긴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창조 선생은 1890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틀을 갖춘 ‘가야금산조’ 를 작곡함으로서 산조의 음악형식을 완성하여, 모든 산조 음악의 효시가 되었다. 김창조 산조 창작은 1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악기마다 기악독주곡으로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워 한국음악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으며,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세계가 경탄하는 인류의 걸작이 되었다.김창조 선생은 나주 남평 출신의 월북한 안기옥(1894-1974) 교수에게 10여 년간 가야금 산조원형을 가르쳤다. 안기옥은 ‘장별제를 설정하고, 정형화한 뒤 가감 없이 후대에게 전하도록 하라’는 김창조 선생의 유언에 따라 북한의 정남희(1905 -1984)와 중국의 연변예술학교 김진(1927-2007) 교수에게 김창조 산조의 원형과 안기옥 자신의 산조를 전수했다.김진 교수는 다시 양승희에게 김창조 가야금산조 원형악보와 자료들을 전해주어 1999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양승희 선생에 의해 김창조 산조가 연주되었고 CD로 출판되었다. 김창조 가야금 산조의 계보는 북한에서는 안기옥, 정남희, 김광준, 정운용에 이어지고 남한에서는 영암 모정출신의 한성기와 강태홍, 최옥삼, 김병호, 김윤덕, 성금련, 김죽파, 양승희 가락으로 이어지고 있다.김죽파 선생은 생전에 양승희 선생에게 “가야금산조를 만드신 김창조 그 분이 나의 친 할아버지이시며, 나는 할아버지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할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 후 할아버지의 제자이신 한성기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김죽파, 김창조에 바탕둔 독특한 예술혼 일궈김죽파(1911-1989) 선생은 전남 영암에서 출생, 태어 난지 10달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 품에서 할아버지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할아버지로부터 풍류, 가야금산조, 판소리를 배웠으며 9세 때 조부인 김창조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수제자 중 한 사람 이였던 영암군 모정리의 한성기(1889-1950) 선생에게 11세부터 산조, 풍류, 병창을 공부했다. 김죽파 선생은 조부의 재질을 물려받아 그의 나이 6세 때 조부로부터 풍류전바탕, 가야금산조와 판소리를 배웠으며 가야금산조를 창시한 김창조 선생에 뿌리를 두고 이후 김창조 가락에 죽파 자신의 독자적인 가락을 넣어 높은 수준의 예술세계로 승화시켜 자신의 산조를 완성하였다.김죽파 선생의 가야금 산조가락 분석결과, 김창조 산조 459 가락 중 음정, 박자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 김죽파 산조에 전해진 가락수는 112가락이나 되며 이는 김죽파 산조의 619가락 중 112 가락이다.(진양조:3가락, 중모리:11가락, 중중모리:7가락, 자진모리:91가락)김창조 산조는 전체 459가락으로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구성되어 있고 김죽파 산조는 전체 619가락으로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세산조시로 구성되어 있다.김창조 산조는 자진모리 안에 휘모리 부분이 포함되어있고, 김죽파 산조는 자진모리, 휘모리가 나뉘어 있다. (☞ 제1회 한성기가야금 산조 학술대회 양승희 논문집)  김죽파 선생은 1968년 이후 서울대학교 이재숙 교수, 김정자 교수, 양승희 등 100여 명의 제자들을 통해 각 대학에서 김죽파 산조를 전수시켰다.김죽파 선생은 1978년 1월 정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KBS TV, MBC TV, TBC 방송에 양승희 제자와 함께 20여 차례 출연 녹화 방영되었으며, 1981년 제1회 대한민국 국악제 공연, 인간문화재대제전 등 수많은 공연을 했다.음반은 1931년 경성방송국 OK 레코드사 산조취입, 1985년 일본 해외공연과 공연후 일본 킹 레코드사 CD 출반, 1988년 한국전통움악대전집 가야금산조 취입(중앙일보사 제작), 1989년 동경 빅터아오야마 스튜디오 죽파 가야금산조, 풍류전집을 취입(유작음반)했다.1980년 김죽파 선생은 양승희 가야금독주회를 위해 짧은 다스름, 진양조 20장단, 중중모리 4가락, 자진모리 4가락, 휘모리 36가락, 무장단의 뒷가락을 짜넣어 현존하는 55분 김죽파 산조를 완성, 양승희에게 전했다. 
    • 기획.연재
    2021-12-1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설악산 신흥사 리영희 향나무
      해거름 녘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산사의 범종 소리는 평화와 안식의 은혜이다. 온 가족이 저녁 밥상에 둘러앉아 나누는 사랑과 행복의 울림이다.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읍의 화재로 낙산사가 불타고 범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1469년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동으로 주조한 지름 98㎝, 높이 158㎝의 이 보물급 범종의 꼭대기 용 두 마리는 종을 매는 고리이고 그 아래 두른 띠는 연꽃잎이다. 몸통을 굵은 줄로 나눈 뒤 맨 위쪽에 범어인 산스크리트어 16자, 그 아래 보살상 4구를 모시고 사이마다 역시 범어 4자씩을 새겼다. 몸통 아래쪽에는 만든 시기와 사람 등 기록을 남기고 구름 모양의 물결무늬로 신비감을 더했다.이 종은 아주 큰 종은 아니지만, 모양이나 종소리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나라의 범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이었다. 그런데 전쟁 때도 아니고 모두가 화재 장면을 티브이로 지켜보는 가운데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그 안타까움이 참으로 컸다.1951년 설악산 전투가 한창일 때다. 우리 국군이 명령에 따라 설악산 상원사를 태워버리려 했다. 이때 당시 상원사 주지 ‘방한암’이 본당 안에 드러누웠다.“절을 태우려면 나도 함께 불사르라.”방 주지의 이 한마디가 상원사를 지켰고, 오늘 우리가 설악의 비경 앞에서 조금이나마 덜 부끄러운 이유이기도 하다.역시 1951년 늦가을이다. 설악의 밤은 이미 겨울일 때다. 설악으로 들어간 국군의 한 연대가 신흥사에 임시본부를 두었다. 이미 양양읍은 폐허가 되었고 스님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신흥사는 전화가 미치지 않았다.절에 들어간 병사들이 추위를 녹이려고 활활 모닥불을 피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병사들이 돌과 도끼, 삽으로 빠개고 있는 것은 장작이나 나무가 아니었다. 불경을 새긴 목판이었다. 이걸 본 한 장교가 기겁하고, 황급히 불을 끄도록 했다. 타다만 경판 조각까지 회수하여 경판고에 다시 꽂아놓게 했다.훗날 안 사실이지만 신흥사의 그 경판은 ‘은중경, 법화경, 다라니경’ 등 소중한 유물이었다. 경판을 제작한 화주와 비용을 댄 시주의 이름은 모르지만, 조선 효종 때인 1650년에서 59년 사이에 만든 것이었다. 또 한글, 한자, 범어의 세 언어로 새긴 복합언어 경판으로 불교계의 희귀본이었다. 그렇게 모두 연기로 사라질뻔한 경판은 다행히도 277판이 남았고, 이때 소실을 막은 한 장교는 바로 2010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난 리영희 선생이다.6·25 당시 양양은 수복지역으로 1951년 8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미 군정이 통치했다. 이때 신흥사 아미타여래좌상 뒤쪽 벽의 영산회상도가 사라졌다. 그 후 미국 LA 카운티박물관 수장고에서 여섯 조각으로 잘린 채 발견되어 2020년 8월, 66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이곳 신흥사 명부전은 이승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비는 곳이다. 조선 영조 때 지은 이곳에 조각승 무염이 1651년에 만든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이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이 명부전 왼쪽에 잘생긴 향나무 한 그루가 마치 이승을 떠난 이들에게 바치는 향불처럼 우뚝 서 있다. 오랜 세월 온갖 재난과 전화를 묵묵히 지켜본 향나무이다. 물론 6·25 때 불쏘시개로 타는 경판을 보며 혀를 차고 발을 동동 굴렀을 리영희 향나무이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2-1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아기/고성 통일전망대 김대건 목련나무
      목련꽃은 봄의 꽃이다. 불꽃을 품은 눈부신 등인 듯, 종 소리에 꽃구름이 피어나는 듯 화사한 꽃이다. 백목련이 선비의 기개인 갓과 상투이거나 아리따운 처자 저고리의 단정한 동정이라면, 자목련은 영웅이나 전사의 가슴에서 빛나는 찬란한 훈장이다.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 가면 십자가의 그리스도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성모 마리아상, 오른쪽에 김대건 신부상이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앞 의자 곁의 목련나무가 역시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 산야에는 북으로 가는 육로와 기찻길이 있고 오른쪽 짙푸른 바다에서는 철썩이는 파도가 하얀 거품을 토한다. 그리고 눈 앞은 손에 잡힐 듯,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땅, 그리운 산과 들,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바다 금강인 해금강이다.강원도 고성군은 38선 이북의 우리나라 최북단이다. 1945년 소련군이 차지했으나, 한국 전쟁 때 수도사단, 5사단, 11사단, 15사단이 351고지 전투 등에서 대승하여 되찾았다. 하지만 고성군은 나뉘어져 남북 고성군이 되었다. 태백산맥의 미시령을 경계로 설악산과 금강산을 구분한다면, 남북 고성군이 합쳐져야 금강산도 비로소 하나가 된다.여기 통일전망대는 금강산과 가까운 남고성의 맨 위쪽인 현내면 마차진리에 있다. 휴전선의 동쪽 끝이자, 민간인출입통제선 북쪽 10km 지점이다. 통일전망대에 오르면 해안 철책선이며 한국군과 북한군 초소가 한 눈에 보이는데, 불과 600m의 거리라고 한다.무엇보다도 가슴 셜레는 것은 해금강의 절경이다. 금강산의 바다쪽 한 자락이지만, 바라보며 숨이 막힌다. 거북이가 어슬렁어슬렁 파도를 헤치는 듯 송도는 우리 땅이고 그 넘어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끝자락 아름다운 구선봉(낙타봉) 봉우리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전망대에서 금강산까지는 최단 16㎞, 최장 25㎞라고 한다. 비록 망원경으로 확인하는 해금강의 만물상, 현종암, 사공바위, 부처바위, 그리고 조금 더 멀리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과 일출봉, 채하봉, 육선봉, 집선봉, 세존봉, 옥녀봉, 신선대 등이지만 가슴 한 가득 우리 나라, 우리 땅이다. ‘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감호도 푸른 숲 아래라 하니, 그저 그리움을 달랜다.여기 성모상은 지난 30여 년간 실향민은 물론 7천만 겨레를 품어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상과 김대건상은 2020년 9월 18일에 통일을 기원하며 남북화합의 상징으로 세웠다고 한다.새로 모신 김대건 신부는 지금의 충남 당진시 솔뫼에서 1821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2021년은 김 신부의 탄생 200주년인 희년이고, 이를 기려 유네스코가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그가 태어난 해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몇 달여만에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일곱 살 때에 박해를 피해 경기 용인 골배마실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15세 때 프랑스인 신부 피에르 모방에게 발탁되어 신학생이 되었다. 24세 때에 상하이 진자샹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됐다. 조선에 돌아와 1년여간 조선교구 부교구장으로 전교하다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우리 나라 최초의 가톨릭 사제이다. 질곡의 시대에 미리내의 별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힌 등불이자 희망이었다. 그 김대건 신부와 함께 북녘 산하를 바라보는 마른 잎을 떨군 앙상한 목련나무는 평화와 화합의 비목이자 생명나무이다.보송보송 보드라운 깃털의 파랑새 한 마리가 마른 가지에서 푸드득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른다. 그렇다. 새 봄이면 목련은 가지 가득 향기로운 꽃송이 등불을 켜고 꽃구름으로 피어나리라. 별똥별처럼 선을 그으며 금강산쪽으로 날아가는 파랑새를 쫓아 눈길도, 마음도 북녘 산하에 닿는다.(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2-09
  • 사람 사이 상식이야기/우리, 개나 돼지들?
    최근 몇 년 동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때가 되면 모든 것(의 실상)이 드러난다”는 참언(讖言)이 떠오른다. 때가 된 것일까? 어둡고 더러운 곳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이런저런 계기로 드러나고 있다.그냥 그동안 했던 대로 살았으면 무탈했을 텐데, 한 톨이라도 더 챙기겠다고 밝은 곳으로 기어 나오는 것이다. 다 자발적(自發的)이다. 비루(鄙陋)한 본성을 자술(自述)하고 추악한 행태를 자백(自白)하는 꼴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일일이 꼽자면 세상의 종이나 먹물을 다 써도 부족할 테지만, 갈수록 괴롭고 끔찍한 꼴이 심해지니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겠다.얼마 전 한 공직 후보자의 조직 책임자(가운데 하나)로 임명된 사람의 처신과 관련해 소란이 일었다. 처음에는 그가 속한 조직(의 일부)이 “음해”라는 식으로 극구 부인했는데, 당사자가 인정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직(職)에서 사퇴하면서 논의가 엉뚱한 곳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소동의 실체는 뚜렷하다. ‘유부녀가 사통(私通)해 혼외자를 낳았다. 남편은 당연히 그런 속내를 몰랐다. 이혼 과정에 수상한 부분이 많아 확인했더니 친자(親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를 옹호한다는 부류들 하는 짓이 해괴하다. 엄연한 범죄 혹은 죄악을 질책하는 데 대해 “그것이 뭐가 문제냐? 혼외자 낳으면 능력 발휘할 기회도 못 갖는다는 것이냐”라며 ‘여성(권) 탄압’이라는 식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그뿐인가. 당사자는 ‘혼외자가 ‘성폭행’의 결과인데 강간범을 문제 삼지도 않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낳아서 잘 키우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같은 패거리 중 하나는 그를 ‘진주조개’ 같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러다 ‘성령(聖靈) 수태(受胎)’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이 ‘훌륭한 여성’ 분의 처신과 주장에 따르자면, 최근 성폭(추)행에 대해 엄밀하게 문제 삼는 많은 여성들은, 꽃뱀 아니면 최소한의 모성애(포용력)도 없는 ‘이기적 괴물’이 된다. 여성(권)론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이런 패륜(悖倫)과 강변(强辯)에 동조하기 때문인가? 이제 모두 저 여자 기준대로 하겠다는 것인가?그러나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것은 따로 있다. 이 사회의 근간(根幹)이 지속적으로,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훼손되는 것에 우리가 둔감해지는 것이다. ‘반짝이는 것’에 길들어지다 보니 맹목(盲目)이 되고, 마침내 포장·과장됐거나 사기(詐欺)일 뿐인 ‘능력’ 따위에 개 돼지처럼 끌려다니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 기획.연재
    2021-12-07
  • 매관매직 등 부패풍조 만연 여전
    # 의정부 의정(총리) 윤용선의 상소   1900년 3월 12일에 의정부 의정(총리) 윤용선이 상소를 올렸다. 윤용선은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국 국제>를 만든 법규교정소 총재였다.  “첫째, 궁금(宮禁)을 엄숙하게 할 것입니다.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공적인 일을 빙자해서 사적인 것을 도모하여 폐단이 너무 많으므로 매우 통탄스러워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종친과 외척은 모두 촌수(寸數)를 한정하였고, 학식있고 단아한 선비라도 특별히 부르는 일이 없으면 알현할 수 없는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옛 규례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애당초 자격이 없는 조신(朝臣)들과 사방의 부잡(浮雜)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궁궐에 출입하여도 거의 막지 않으니, 기밀이 누설되고 위엄이 농락당하고 있습니다.삼가 바라건대, 관리와 액속(掖屬 액정서에 근무하는 관속)들을 엄히 금하고 살펴서 비록 각부의 관리라도 공적인 부름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종친과 외척도 들어오라는 명이 있어야 들이는 옛 법을 거듭 밝히소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의정부가 처리하도록 해주소서. 둘째, 잡세(雜稅)를 없애고 관리를 파견하는 것도 없애소서. 갑오년(1894) 이후 누차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아직까지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매기어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다방면으로 걷어 들이고 명목도 한두 가지가 아니며 사방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온갖 침학(侵虐)을 자행하고 있습니다.삼가 바라건대, 신속히 칙령을 내리셔서 모두 폐지하게 하소서. 만일 경비가 궁색하여 잡세로 보충하려고 하면 그 권한을 전적으로 탁지부(度支部)에 주어 탁지부가 덜 것은 덜고 징수할 것은 징수하게 하여 그 징수한 재물을 마땅히 써야 될 비용에 이획(移劃)한다면 백성을 착취하거나 중간에서 착복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독쇄관(督刷官), 위원(委員), 파원(派員) 등 허다한 관원은 폐단 위에 폐단만 더하게 되니 모두 없애버려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고종실록 1900년 3월 12일)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윤용선의 상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이때 별입시(別入侍)의 명목이 날로 늘어나 청별입시(廳別入侍), 계별입시(階別入侍), 지별입시(地別入侍) 등이 있었다. 청별입시는 청(廳)에 오르는 자요, 계별입시는 뜨락에 나열해 있는 자, 지별입시란 마당에 서 있는 자이다. 위로는 대관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당과 백정, 거간꾼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고종은 그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이 알현할 때마다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이에 입시한 사람들은 고종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려 서로 알현하곤 하였다. 어느 곳에는 광산이 난다, 어느 곳에는 수리(水利)가 있다, 어떤 회사를 세워야 한다고 하면 고종은 곧바로 허락했다. 그러나 평안도는 백성들이 사나워 파견된 관원들이 누차 쫓겨나거나 구타를 당하였으므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오직 영남과 호남지방이 화를 당하여 원성이 날로 드높았다. 이때 윤용선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억지로 이런 상소를 하였다.”윤용선이 상소하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궁금이 문란한 것은 과연 한탄스럽다. 무릇 종친과 외척, 조신들의 출입하는 규정은 궁내부로 하여금 옛 법을 거듭 밝혀 시행하게 하라. 독쇄관 같은 관리를 없애버리는 것은 더없이 급한 일이다.”하지만 궁금 문란과 부패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 민영환의 어리석음 1901년에도 매관매직의 풍조는 여전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전보다 훨씬 더 심했다. 아무리 종친이나 외척 혹은 임금과 가까운 자라도 감히 한 자리도 은택(恩澤)으로 얻을 수 없었다, 관찰사 자리는 10만 냥 내지 20만 냥이었고, 일등 수령 자리도 5만 냥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서상욱은 민영환의 외삼촌이다. 민영환은 고종에게 외삼촌의 군수 자리를 달라고 오래전에 아뢰었는데, 고종은 “너의 외삼촌이 아직까지 군수 한자리 하지 못했단 말이냐?”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에 민영환이 다시 외삼촌 일을 아뢰자 고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잊을 뻔하였다. 곧바로 임명하도록 하겠다”하고는 서상욱을 광양군수에 임명하였다.   민영환은 집에 가서 기쁜 얼굴로 어머니에게 “오늘 임금이 외숙에게 군수 자리를 허락하셨으니, 천은(天恩)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러자 그의 어머니가 실소(失笑)하면서 “네가 이처럼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란 말이냐? 임금이 언제 한자리라도 은택으로 제수한 적이 있었더냐? 어찌하여 너에게만 특별히 은덕이 미친단 말이냐? 내가 이미 5만 냥을 바쳤단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는 구례에서 살고 있는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황현 지음·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하, p 106-107)  # 군수 임기를 16개월로 정하다 1903년에 군수의 임기를 개정하여 16개월로 정하였다. 이때 군수를 임명함에 있어 금액의 다과에 따랐는데, 고종은 관직을 자주 팔면 돈이 많이 생긴다고 여겨 1년도 못 되어 금방 교체시켰다. 심지어 1년 동안에 5명의 군수가 교체된 군도 있었고, 한 사람이 1년에 5개 군을 바꾼 군수도 있었다.  돈을 바치고 임명된 군수들은 부임하자마자 즉시 수탈을 일삼았다. 조금만 늦춰지면 교체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친 돈이 워낙 많아 본전을 뽑을 수 없었고, 부자로서 군수가 된 자가 몇 년 사이에 가산이 탕진되어 관직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차 드물었다. 고종은 이런 점을 깨닫고 그 기한을 16개월로 정한 것이다. 이때 기호(畿湖) 이북 지방에서는 백동전(白銅錢)을 사용하고 영호남 지방에서는 엽전을 사용하였는데, 백동전 1냥이 엽전 70푼에 해당되어, 영호남 지방에서 군수자리를 사는 사람은 서울에서 백동전을 상납하고, 시골에서 엽전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10냥이 실제로는 7만 냥이었다.그리고 백성은 조세를 엽전으로 바쳤는데, 서울에는 백동전을 바쳐,  그 차익을 챙긴 것이 자기 봉급의 10배나 되었다. 그래서 영호남 지방의 군수 자리는 특별히 좋은 자리였다. (황현 지음, 위 책, p 138-139) # 군수의 자리값 려 군수 70여 명이 새로 임명되었는데, 고종의 뜻이 중간에 변해 모두 면직되고 아울러 김주현 또한 교체되었다. 당시 군수 자리는 5, 6만 냥을 바쳐야 했는데, 졸지에 자리를 빼앗겼으니 경향에 파산한 집안들이 속출하였고, 시전에서 어음을 쓴 자는 줄줄이 구속되었다. (황현 지음, 위 책, p 147-148) # 마산포 조차(租借) 사건 1899년 5월 1일 대한제국은 마산포, 군산, 성진 세 곳에 개항장을 설치하였다. 6월 2일에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각국 공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산포 각국 공동 조계 장정이 조인되었다. 그런데 1900년 3월 30일 외부대신 박제순과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마산포의 각국 거류지(居留地) 밖의 10리(里) 이내 지점을 러시아에 조차(租借)한다는 것과 거제도는 영구히 조차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체결했다.(고종실록 1900년 3월 30일)  러시아 입장에서 마산포는 부동군항(不凍軍港)을 얻을 수 있는 천혜의 항구였다. 이를 미리 눈치챈 일본은 이미 마산포 부근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따라서 마산포의 러시아의 조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 기획.연재
    2021-12-0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