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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특례시(가칭) 만들어 수도권과 경쟁”
     “순천·광양·고흥 통합, 인구 100만 도시로 미래 선도 가능  여수시 인구 감소·행정력 낭비 등 무능 심각 대안 있어”  지역민 “도의원 5선 경륜 친화력 좋고 약속은 지키더라”김종철 전 전남도의회 의장이 여수시장 선거 출마 의지를 밝혔다. 그는 “지난해 중반부터 지역 사회 발전을 이끌어 달라는 지역민의 요구가 빗발쳤다”며 “20여 년 지방자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발전에 헌신하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신명나는 새 여수!’를 만드는 여수의 새 일꾼이 되겠다는 것이다.‘이순신특례시’라는 획기적 방안을 내걸고 표밭갈이에 나서고 있는 김종철 전 전남도의회 의장을 만났다.<편집자주>-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여수시장 후보로 출마한다고 선언했다.2010년 이후 정치 현장을 떠나 있었다. 전남도의회 의원 20년 동안 배우고 익힌 것을 숙성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자기 성찰을 통해 더 넓게, 잘 볼 수 있게 됐다고 확신한다. 최근 지역민들의 지지와 성원도 잇따르고 있다. ‘나를 낳고 키워준 여수에 봉사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결정하게 됐다. 있는 힘을 다하겠다.-여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가?나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여수의 여러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고, 가장 큰 문제는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집행부의 무능이 결정적 원인이다. 심각한 인구 감소, 여천공단·선박 등의 공해, 관광산업의 한계 등에 대해 손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물론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목표를 정하고, 실행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결과를 점검해 보완하는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중점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순신특례시(가칭)는 가능한가?가능하다. 여수와 순천, 광양, 고흥을 통합하면 인구80만 명에 근접하고, 100만 명은 바로 이뤄진다. 여수 인구가 33만 명을 넘다가 최근 28만 명 이하로 감소했다. 4개 시군 통합의 선결 요건으로 여수 인구를 30만 명으로 복원시키겠다.- 어려움이 적지 않을 텐데?물론 여러 지자체가 관계되는 사안이고, 주민 동의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복지 등에서 규모의 이점이 크고, 장기적으로는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과도 연관될 것이다. 꼭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고 특히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확신한다.-시장 출마(예상)자가 끊이지 않는데, 본인의 장점은?먼저 손꼽을 만한 정치 경험을 들 수 있겠다. 나는 전남도의회 의원만 5회 20년 연임했고, 지역은 물론이고 중앙정계에 두텁고 넓은 인맥을 갖고 있다.출마(예상)자 가운데 (지방)행정 경험을 내세우기도 하는 모양인데, 지방자치도 어디까지나 ‘정치’다. 그것도 중앙까지 포함하는 치열한 전쟁이다. 예산 확보부터 사업 유치까지, 전부 정치 논리로 좌우된다. 이런 관점에서 나보다 나은 대안이 있겠는가?또 지역민들이 나에 대해 “의리있다, 한다고 하면 꼭 하더라, 약속은 지킨다”라고 평가하는 특징이 가장 큰 경쟁력이며 중요한 자산이라고 믿는다. 며칠 전 한 모임에 참석했다가 어느 분이 “저 사람(김종철)이 나서면 무슨 문제건 해결했어”라고 동행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어떤 찬사나 격려보다 기쁘고 고마웠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겠는가. 그저 내 이익이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지역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그러나 나 스스로는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한다.-지방선거 전에 대선이다. 관계가 있는가?관계가 있다 뿐인가, 크고 결정적이다. 최근 우리 당은 아무 조건 없이 탈당자들의 복당을 허용했다. 통 큰 탕평책이라고 본다. 당의 외연이 넓어지고 내포는 충실해졌지만, 당원 특히 지방선거 출마자 개인으로서는 경쟁이 치열해진다는 측면이 있다. 어떻든 정치 공학적 측면을 다 헤아릴 수는 없고, 그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따름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후보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당연하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자당 대선후보 지지를 호소할 때 뭘 내세우는가?이 시기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인물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후보에 대한 지역 지지세가 워낙 강하고 뚜렷해서 누구와 토론하는 일도 없었지만 늘 어떤 상황에 누구에게라도 내 신념을 말할 준비는 돼 있다.-대선 결과를 전망한다면?(뻔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우리 당 우리 후보가 승리한다!김 전 의장은 1991년 현대 지방자치의 출범과 함께 전라남도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후 다섯 차례 연임했다. 8대 전남도의회 전반기 의장(2006.07~2008.06)을 지냈다. 김 전 의장은 여수의 바다와 섬 지역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수산 문제 특히 도서 지역 개발과 발전(방안)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모교인 전남대에서 ‘자랑스런 전남인 상’을 받았고, 1995년 씨프린스(SEA PRINCE)호 기름유출사건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사건 수습을 이끌었으며 ‘2012 여수엑스포’ 유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2018년 제7대 전국동시지방선거 전남준비기획단장을 맡아 압승에 큰 역할을 했고 현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 정무특보단 전남본부장, 희망사다리포럼 여수 대표로 활약하고 있다.대담이 마무리될 무렵, 한 시민이 다가와 김 전 의장에게 말을 건넸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덕담이 이어졌다. 기자가 “이 양반 어때요?”라고 묻자“응, 좋제. 믿을 수 있응께. 시장실 맘대로 가도 개얀헐 사람이여”라고 대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문득 천자문(千字文)의 ‘금생여수 (金生麗水)’ 구절을 아느냐고 묻더니 “여수에서 금이 나온다는 말 아니겄소! 옛날부터 여수가 잘 살 수밖에 없는 모냥이네 잉?”이라며 오지게 웃던 김 전 의장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겠다. 여수는 금 캐는 밭이요, 보물 펄떡거리는 어장(漁場)이다. 그 보배를 꼼꼼히 찾아내고 잘 갈무리해서 시민들에게 전하겠다는 한 사내의 결의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담=주성식 선임기자
    • 기획.연재
    2022-02-07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강릉 오죽헌 율곡송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지만, 산천 의구란 말도 옛 시인의 허사라고 했다. 그럼에도 강릉 오죽헌에 가면 의구한 산천과 인걸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수수 백 년 한 자리에서 말없이 역사와 인걸을 간직한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율곡은 신사임당의 용꿈에서 태어났다. 오죽헌에 그 용나무들이 있다. 또 오죽헌의 나무들은 사계절을 품고 있다. 봄의 율곡매, 여름의 사임당 배롱, 가을의 율곡송, 겨울의 오죽이 바로 그 오죽헌의 사계절이다.먼저 봄의 율곡매다. 세종 22년인 1440년 무렵,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짓고 별당 후원에 심은 나무이다. 사임당은 매화 그림을 많이 그렸고, 첫 딸을 낳아 ‘매창’이라고 했다. 이 매화는 연분홍 홍매이며 알이 굵다. 남쪽의 절집 매인 화엄사 화엄매, 백양사 고불매, 선암사 선암매와 함께 북쪽의 집안 매인 율곡매는 조선 4대 매화이다. 허나 나이가 6백여 살이니, 나뭇가지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그게 또 자연의 순리이다. 어찌 세월을 탓하랴? 나그네는 그저 이른 봄, 꽃송이를 피워올린 매화나무 옆의 율곡과 사임당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던 걸음 멈추고 눈 맞춤을 할 뿐이다.배롱나무는 여름나무이다. 오죽헌의 울 밖 여름은 배롱꽃이 지천이다. 오죽헌 뜨락의 6백 살 배롱은 꽃을 피워올리는 가지 품이 넉넉하고 자태 역시 매끈하다. 땅에서 올라온 가지가 다섯인데 두 가지는 서로 끌어안고 있으니, 사이좋은 부부와 세 아들딸의 모습이다.사철 푸르지만, 소나무가 짙푸른 하늘의 흰구름 송이를 걸치면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다. 오죽헌 율곡송 위로 하늘이 푸르고 흰구름이 꽃송이로 피어나니, 이 또한 승천하는 용이다. 그래서 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는 오죽헌의 몽룡실을 마주 보는 율곡송은 소나무이며 율곡이고, 사임당 꿈속의 용이며 소나무이다. 그렇게 높고 깊은 푸른 하늘의 흰구름을 꽃송이로 걸친 율곡송은 오죽헌의 가을 나무이다.오죽헌 담장 가까이의 노송들 가지가 오죽헌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일부러 그리 다듬었거나, 죽은 가지를 자른 흔적도 없다. 또 한두 그루도 아니니, 이는 분명 글만 읽고 외운 선비가 아니고, 대장간을 차려 호미, 낫, 괭이를 벼린 율곡에 대한 경배이리라. 더하여 문성사와 몽룡실을 향해 허리를 숙인 율곡송에게 예의와 품격을 배우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오죽은 까마귀처럼 줄기가 검어서 얻은 이름이다. 우리 인간처럼 60여 년을 살고 꽃이 피면 생을 마친다는 이 오죽은 오죽헌의 상징이다. 사철 푸르나 한겨울 흰 눈을 이면 기품이 더 빛난다. 그러기에 댓잎을 스치면 바람도 노래가 되는 법이니, 오죽은 겨울나무이다.그렇게 율곡매, 사임당배롱, 율곡송과 오죽을 둘러보고 나오니, 담장 밖 붉은 단풍이 유난히도 핏빛이다. 다른 나무 아래는 늦가을 낙엽이 수북한데, 이 단풍은 붉은빛 그대로 청정하다.핏빛 단풍을 보다 문득 오죽헌 문성사 대문 옆의 박정희가 심은 주목나무가 생뚱맞구나 한다. 오가는 나그네에게 주목하라고 심은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율곡과 사임당의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닐진대…. 율곡은 ‘격몽요결’에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 이 네 가지는 몸을 닦는 요점이다’고 썼다. 예로부터 사당 건물은 입구자 형태로 짓기에 그 안에 나무가 있으면 괴로울 곤(困)자가 되기에 나무 심기에 신중을 기한다. 따라서 그게 누구건 남의 집 사당 안에 함부로 기념식수를 하는 건 한 마디로 예가 아니다.아! 지리산이나 태백의 산록에 치솟지 못하고 담장 곁에 주눅 들어 염치없이 계륵으로 서 있는 오죽헌의 주목이 참으로 가엾다.(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1-28
  • ‘형식적 대한제국 독립’ 한일의정서 선포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국의 진해만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결정했고, 5일에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했다. 메이지 천황은 육·해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천황이 육·해군에게 내린 칙어를 읽어보자. “짐은 동양평화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서 짐은 작년 이래 정부로 하여금 청나라와 한국 두 나라의 시국(時局) 문제를 러시아와 교섭하게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동양 평화를 돌아보는 성의가 없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개 청나라와 한국 두 나라의 영토 보전은 우리 일본의 독립과 지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에 짐은 정부에 명령하여 러시아와 교섭을 끊고 우리 독립과 자위를 위해 자유의 행동을 집행할 것을 명령했다.” (신명호 지음,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2014, p 474·475)2월 6일 아침에 나가사키 근처의 사세보 군항에서 연합함대의 제 1전함대와 제2 전함대가 중국 뤼순으로 출발했다. 제3 전함대와 제7 전함대는 2월 6일 아침에 대마도의 다케시키 항을 출발하여 저녁 무렵에 진해만을 점령했다. 이어서 육전대가 상륙하여 마산의 전신국을 점령했다. 이것이 일본의 대한제국 첫 침략이었다. (와다 하루키 저 · 이경희 역,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2011, p 59-60)2월 8일 밤,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해군은 뤼순항에  있는 러시아 극동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이날 우류 소토치키의 일본 함대 14척은 제물포에 정박한 두 척의 러시아 전함에 대해서도 기습공격했다. 오후 4시경 카레예츠호가 자폭하였고, 6시경 바라크호가 침몰하였다. 2월 9일에 러시아가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2월 10일에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일본은 개전 이유에서 “러시아가 만주를 병탄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결과 한국의 영토 보존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번 전쟁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하고, 극동아시아 교역을 위한 지속적인 ‘문호개방’ 유지”라고 되풀이했다.  2월 9일에 일본군 1000명이 서울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도망치고 구중궁궐도 텅 비었으며 조정 대신들도 숨기에 바빴다. 나라를 지켜야 할 지도층이 흔들렸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라가 전쟁터가 되었는데도 ‘국외중립 선언’ 이상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너무나 무능하고 안일했다. 12일에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서울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것인가. 4월 14일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함녕전,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과 각 전각이 모두 불탔다. 이러자 고종은 미국공사관과 인접한 수옥헌에 임시 거처를 정했다. 4월에 알렌은 본국에 “고종 황제의 미국에 대한 기대가 당혹스럽다면서 고종이 1882년 한미수호조약 제1조의 ‘거중조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러일전쟁 종군기자 잭 런던(Jack London)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날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시험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 국민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문짝이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 2월 23일에 일본공사 하야시와 외무대신 서리 이지용간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1903년 10월부터 하야시는 이를 추진했다. 하야시는 정부 고관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고종의 독단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과 군부대신 민영철, 이근택 등을 포섭했다. 이지용 등은 이용익 등 고종 측근 세력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로비 자금 1만 원(지금 시세로 13억 원 정도)이 필요하다고 일본 측에 요구하여 돈까지 받았다. 그런데 러일전쟁의 징후가 농후해지자 고종은 1904년 1월 21일에 중국 지푸에서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고 이를 각국 공관에 통고하였다. 그러나 각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나마 하야시가 주도한 교섭이 중단된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2월 12일에 파블로프 러시아 공사가 철수해버리자 하야시는 고종에게 조약 체결을 압박했다. 결국 고종은 2월 13일에 이지용을 일본 공사관에 보내 교섭을 재개하게 했다. 그러나 친러파 이용익은 일본과 조약을 체결했다가 나중에 러시아가 승리하면 곧바로 대한제국 병탄의 이유가 된다며 강력 반대했다. 한편 러시아군이 안주와 평양 부근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고종도 러시아가 승리할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현상건·이학균 등 측근들을 불러들이는 등 조약 체결을 연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이용익은 2월 22일에도 외부대신서리 이지용을 찾아가 만일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면 대역죄인으로 처분받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지용은 후환이 두려워 조인을 거부하고도 싶었지만, 그럴경우 하야시로부터 받은 로비 자금이 문제가 될 판이었다. 2월 22일에 일본은 이용익을 전격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였고, 육군참장 이학균 그리고 육군참령 현상건 등을 연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지용은 2월 23일에 아침 서울 밖으로 도주하려 하였다. 하야시는 이를 저지하고 전문 6조의 ‘한일의정서’ 조인에 성공했다. (서영희 지음, 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2012, p 29-36) 그러면 1904년 2월 23일의 「고종실록」을 읽어보자.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1900년 북청사변(北靑事變)후 러시아는 만주(滿洲) 일대에 군사를 체류시킨 채 기한이 되도록 철수하지 않았다. 비록 일본·영국 양국이 동맹으로 그에 대응하고 미국도 항의하였으나 러시아는 응하지 않다가 1903년 4월에 이르러 군사를 출동시켜 멋대로 우리나라 용암포를 차지하였다. 일본은 반도(半島)의 존망이 그 안위(安危)와 관계된다고 여겨 몇 달을 절충하였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도리어 군사 장비를 증수(增修)하자, 올해 2월 6일에 이르러서는 두 나라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9일 일본 함대가 러시아함을 공격하여 인천에서 2척을 격파하자 러시아함은 퇴각하다가 인천항에서 자폭 침몰하였다.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2일 러시아 공사(公使) 파블로프가 서울을 떠나 귀국하였다. 이에 이르러 국면은 일변하였고 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의정서(議定書)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외부대신 임시서리 육군참장 이지용과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노스께는 각각 상당한 위임을 받고 다음의 조목을 협정한다.제1조한일 양국 사이의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고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고히 믿고 시정(施政)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제2조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확실한 친선과 우의로 안전하고 편하게 한다.제3조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제4조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정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위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제5조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뒷날 본 협정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제6조본 협약에 관련되는 미비한 세부 조항은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부 대신 간에 정황에 따라 협정한다.이를 분석하면 제1조의 ‘시정개선 충고’에 따라 일본의 내정 간섭 근거가 마련되었고, 제4조에 따라 일본 군대 주둔의 길이 열렀으며, 제5조에 따라 러시아 등 다른 열강과 대한제국 간의 독자적 교섭의 길이 막혔다. 그런데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이지용은 고종의 조카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 이최응의 손자인데, 그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시 내부대신으로 을사오적이 되었고,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백작 작위를 받은 친일 매국노였다.  한편 한일의정서 선포후 영국의 「런던타임즈」는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이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영구히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지금부터 일본에 있어서 한국은 마치 우리 영국에 있어서의 이집트와 같다.한국의 독립은 형식적인 독립이다. 일본이 말하는 충고권이란 사실 얇은 종이 한 장을 덧씌운 명령권이다” 
    • 기획.연재
    2022-01-18
  • “사회적 약자·범죄 피해자 보호 최선”
    정성록 총경이 제77대 여수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18일 여수경찰서에 따르면 정 서장은 충혼탑 참배를 마친 후 취임식과 각 사무실을 돌며 인사하는 것으로 여수경찰서에서의 첫 업무를 시작했다.정 서장은 취임식에서 “당당하고 공정한 법 집행을 통해 사회적 약자와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고 시민이 안전한 여수, 아날로그 세대와 MZ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직장 분위기를 위해 서장부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이어 “전남청의 주요 7대 추진과제를 목표로 서로 신뢰하며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정 서장은 취임식 후 경찰서 사무실을 방문해 소속 직원들과 첫 인사를 나누며 여수시민의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또 현장에서 여수시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여수=김원중 기자
    • 피플
    2022-01-18
  • 삶.쉼터.나무이야기
    여상현 시인은 1914년 2월 9일에 태어났으나, 언제 생을 마감했는지 모르는 낯선 이름이다. 6·25의 참화가 그 이름을 삼켜버린 경계의 시인이며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시인이다.여상현(呂尙鉉 필명呂星野)은 화순군 동면 천덕리 451번지 새암골에서 부친 여규병과 모친 조함령의 5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동복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9년 졸업하였다. 상경하여 경성중등학교 본과를 다니고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8월에 장성의 김아지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다. 이어 연희전문대를 나왔다.그가 태어난 새암골인 천동(泉洞)은 음기가 세고 앞산의 양기가 세다 하여 마을 한가운데에 진려석이 있다. 이 진려석은 3개가 더 있고, 그 주위에 당산나무도 10여 그루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이 천동마을 가까이에 화순탄광이 있다. 한때 2만여 명에 이르던 이곳 탄광 노동자의 삶과 평화로운 마을 풍경은 그의 시심의 원천이기도 하다.여상현은 1936년 오장환, 함형숙, 김광균 등 12명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시를 썼으며 그 동인지 1집에 ‘장’, ‘호텔 앞 광장’, 2집에 ‘법원과 까마귀’, ‘호흡’ 등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좌절에서 헤어나려는 몸부림을, 해방 이후에는 계급의식 속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애환과 외세에 대한 저항 등을 노래했다.1946년 서울신문사 기자이던 여 시인은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47년에 유일한 시집인 ‘칠면조’를 간행할 때 김기창 화백이 표지를 직접 그려 주었다. 표제시 ‘칠면조’는 해방공간의 상황을 야유와 풍자로 묘사한 시이며, 민요조의 ‘농부가’인 ‘노고지리 앞서가자 해가 지는 이 벌판….’의 작사자이기도 하다.이 농부가는 1950년대 초까지 초등과 중등학교에서 가르쳤는데, 중등 음악 교과서의 여상현 작사가, 1950년대 후반에 이상현으로 바뀌었다. 이는 여 시인의 육이오 당시 월북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그렇게 여상현 시인은 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1964년 12월 5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실종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세계도 평가받지 못했다.그러다 2017년 4월 27일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제4조에 의거하여 납북자로 결정되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늦었지만, 그의 고향 마을 생가터에 조촐하나마 시 ‘봄날’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졌다.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고 아름답게 표현했던 그의 시도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여상현 시인이 어릴 적 숨바꼭질하며 뛰어놀았을 그의 옛집 터 뒷동산에 한 그루 소나무가 있다. 마을의 고샅길, 성황당, 연못, 논두렁, 밭고랑까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보고 싶었을 그리운 고향 마을의 시 ‘봄날’을 여상현 시인의 고향 집 뒷동산 소나무에 기대어 떠올린다.‘논두렁가로 바스락 바스락 땅강아지 기어나고/ 아침 망웃(거름) 뭉게뭉게 김이 서리다// 꼬추잠자리 저자를 선 황토물 연못가엔/ 약에 쓴다고 비단개구리 잡는 꼬마둥이 녀석들이 움성거렸다// 바구니 낀 계집애들은 푸른 보리밭 고랑으로 기어들고/ 까투리는 쟁끼 꼬리를 물고 산기슭을 내리는구나/ 꿀벌 떼 노오란 장다리밭에서 잉잉거리고/ 동구밖 지름길론 갈모를 달아맨 괴나리봇짐이 하나 떠나간다/ 성황당 돌무데기 우거진 찔레엔/ 사철 하얀 종이쪽이 나풀거리더니 꽃이 피었네// 느티나무 아래 빨간 자전거 하나/ 자는 듯 고요한 마을에 무슨 소식이 왔다’      
    • 기획.연재
    2022-01-16
  • 황현택 “더 크고 안전한 광주 서구로 바꿀 터”
     대담 = 강흥석 대기자오는 3월 9일 대선에 이어 6월 1일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아직까지 대선 판세를 판가름하기엔 향방이 불투명하지만 지방선거를 4개월여 앞둔 가운데 입지자들은 대선 못지않게 달아오르고 있다. 광주 서구청장 출사표를 던진 황현택 현 광주시의원의 각오를 인터뷰를 통해 들어본다.                                      /편집자 주-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간단한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광주광역시의원 황현택입니다. 기초의원을 거쳐 시의원으로 서기까지 한결같이 저를 믿고 주민들의 대변자로 선택해 주신 서구민들께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초심을 잃지 않고 구민들의 마음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황 의원님의 약력을 여쭤보고 싶습니다.▶저는 2010년 광주광역시 서구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당선 후 꾸준히 교통 봉사활동을 12년째 하고 있고,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14년 재선 당선 이후 서구의회 의장을 역임했습니다. 2018년 시의원에 당선돼 산업건설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그외 여러 가지 약력이 있습니다만,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제19대 문재인 대통령 후보 당시 광주광역시 공동선대위원장을 역임했고, 더불어 민주당 중앙당 부대변인을 역임했습니다. 광주 3710지구 상무로터리 클럽 회장을 역임하고, 서구 생활체육 트레킹 초대회장, 금호2동 자치위원장, 서부교육지원청 정화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동안의 정치적 이력을 볼 때 지역 발전과 주민들의 행복지수 상승을 위해 애쓰신 흔적들이 많이 보입니다. 기초의원을 거쳐 시의원을 역임하시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과 보람찼던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저는 서구 기초 의원이었을 당시와 현직 시의원을 막론하고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아쉬운 점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람찼던 일이라면 호남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광주 서구 매월동 중고자동차매매단지 문제를 해결한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시는 ‘광주시 자동차관리사업 등록 및 등록번호판 발급대행자 지정조례’에 전시시설 인접 도로 폭은 12m 이상이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현장에 나가본 결과 2003~2010년 초반 조성된 5개 단지 도로 폭은 8~10m에 불과한 상황이었으며 이로 인해, 매월동 상인들은 구청 등록신고마저 안되고, 상인들은 양도·양수 등 재산권 행사마저 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에 저는 중고차단지에 종사하고 있는 수천 명 종사자들의 어려움이 신속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로 등록기준을 8m로 하향하는 ‘자동차관리사업 등록 및 등록번호판 발급대행자 지정조례’ 개정안을 발의, 본회의를 통과시킨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광역 시의원으로서 혹은 서구지역 주민들의 민심 대변자로서 해오신 역할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시민의 대표기관인 시의원은 광주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추구하고, 시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무이며 시민들이 저에게 주신 막중한 임무라 생각합니다.광주시민의 삶은 코로나19라는 감염병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시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사회단체와 소통 강화에 최선을 다하여 지역·계층 간 갈등을 중재·조정하고, 상생과 화합의 지역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광주 서구청장 입지자로서 서구 발전 방안에 대해 염두에 두셨던 일이 많을 것 같은데 말씀해 주십시오.▶서구 발전에 대한 여러 가지 발전방향이 있습니다. 맨먼저 도시철도 2호선과 연계한 사통팔달의 교통망 조기 구축을 추진하겠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스마트 상업·비즈니스 중심지로 개발하겠습니다. 둘째, 서구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초·중·고·대학생들에게 버스요금 할인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셋째, 청년창업 지원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지식산업센터 및 창업지원 센터 건립을 추진하겠습니다. 넷째, 지역특화산업 활성화를 위해 소상공인 지원 방안 마련 및 전통시장(양동시장 복개도로 주차장 리모델링) 활성화 및 지원방안을 다각도로 연구 개발하여 소상공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섯째, 명문 고등학교(여자고등학교 및 사립 고등학교 등) 유치로 교육환경을 개선하겠습니다. 명문 고등학교를 유치해 지역 교육환경 대폭 개선 및 지역 전담형 마을 조성과 방과 후 학교 운영시스템 구축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섯째, 광주의 중심인 서구를 의료관광특구로 지정하여 의료명품 거리로 만들겠습니다. 일곱째, 타 지역 사람들이 광주에 하루 정도는 머무를 수 있도록 풍암 호수를 중심으로 금당산 및 백석산에 트레킹 조성사업을 적극 추진하겠습니다. 이와 연계해 중앙공원에 5·18 상징물인 기념탑을 건립, 짚라인을 형성하고 광주의 상징물 랜드마크를 추진하겠습니다. 아울러 장애인 산책로 확대 사업을 통해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함께 추진하겠습니다. 여덟째,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대책을 담당공무원과, 교육청, 학부모들과 협치와 소통을 통해 행정·재정적 지원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아홉째, 학교 주차장 공유 및 월드컵경기장 주차장을 적극 활용하여 서구 주민들에게 주차난 해소 및 불법주정차 없는 서구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열째, 하수관거 사업 실행을 위해 중앙정부와 광주시에 적극적인 재원마련을 요구하겠습니다. 끝으로 각 주민자치회 활성화 및 지역주요 공원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겠습니다. 서창벨트 발전대책으로 명품 주거도시를 만들며 주민주도형 재개발·재건축 시행과 도시재생 노후주거, 뉴타운 해제지역 맞춤형 환경개선, 마을 생태공원과 창의 놀이터 확충, CCTV·보안벨 설치 확대로 범죄 없는 서구, 안전제일 안심치안 구현으로 살기 좋은 명품도시 서구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또 광주시 300여 곳에 산재해 있는 외지 토지 중 현재 서구지역에 있는 서창동 탄약고(36만평)를 우선 이전할 수 있도록 하고 전남도 화훼단지(만여평)로 사용하고 있는 토지 등 최대한 서구지역의 외지 토지를 확보함으로써 이를 이용한 주민생활에 밀접한 전략적 개발을 추진하겠습니다. -오는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고 6월 1일은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될 예정입니다. 대선에서와 지방선거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입지를 다질 생각인지 궁금합니다.▶대선까지 한 50여일 정도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재명 후보와 같이 ‘민주당의 시간’이 되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으며, 또한 촛불혁명의 시대적 소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민심을 이반하는 정권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투철한 소명의식으로 제 본분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당과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 믿고 민심을 얻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후보에게 저의 조그만 역량이라도 필요하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을 것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 답변 감사드립니다. 오는 6월 치러질 지방선거의 선전을 기원하고 아울러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광주시민과 서구지역 주민 분들께 따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초심을 잃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보여주기식 ‘쇼’가 아닌 솔선수범과, 소통과 협치를 통해 주민들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균등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슴속에 깊이 새길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서구민을 비롯한 광주시민 모든 분들께 건강에 유의하시고 활기찬 새해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기획.연재
    2022-01-13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설악산 통일대불 통일소나무
      1708m의 설악산은 8월 한가위에 내린 눈이 이듬해 하지에 이르러서야 녹는다고 설산, 설봉산, 설화산이라고도 불렀다.이곳에 자리 잡은 신흥사는 천년고찰이다. 자장율사가 신라 진덕여왕 6년(652)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넣은 9층 탑을 세워 향성사라 했다. 효소왕 10년인 701년 절이 소실되면서 9층 탑도 6층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에 파괴되어 3층만 남았다. 향성사가 불탄 뒤 의상이 절터를 천여m 옮겨 세워 선정사라 하였는데, 조선 인조 20년(1642)에 다시 화마를 입어 폐허가 되었다. 이때 운서, 혜원, 연옥 세 스님이 백발신인이 새 절터를 점지하는 똑같은 꿈을 꾸고, 1644년 지금의 터에 중건하여 신(神)이 점지했다는 신흥사라 했다. 1995년에 앞글자를 신(新)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영동지역 불교를 새로 부흥한다는 염원이라고 한다.우리나라 남부에서 3번째로 높은 설악산의 대청봉을 중심으로 북쪽 미시령과 남쪽 점봉산을 잇는 능선을 경계로 동쪽을 외설악, 서쪽을 내설악이라 한다. 또 북동쪽 화채봉과 서쪽 귀떼기청을 잇는 능선을 경계로 남쪽은 남설악, 북쪽은 북설악이라 한다.내설악에 백담사, 수렴동계곡, 대승폭포, 와룡폭포, 옥녀탕 등이 있고, 외설악에는 울산바위, 흔들바위, 비선대, 비룡폭포, 신흥사 등이 있다. 한 발 건너 첨봉이고 암벽을 흐르는 물은 폭포와 소를 이루어 계곡이니 북쪽 금강산과 설악산은 형님 아우이다.신흥사에는 창건 당시 주조한 1400여 년의 범종과 조선 순조가 하사한 청동시루가 있다. 보물인 극락보전과 향성사지 3층 석탑, 1651년 조각승 무염의 목조아미타삼존좌상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한글, 한자, 범어로 새긴 경판, 보제루와 명부전, 조사전, 삼성각 등이 있다.1951년 5월 7일이다. 오전 6시에 설악산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군은 산을 올라가야 했고, 제12사단 소속 북한군은 높은 곳에서 경기관총을 쏘고 방망이 수류탄을 굴러내렸다.그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 5월 11일, 빗발치는 적탄을 무릅쓰고 목표 고지에 첫발을 디딘 김동희 소위가 저격병의 총탄에 전사하였다.다음 날 마침내 설악산이 아군 수중에 들어왔다. 아군도 상당수 희생하였지만, 적 사살 1140명에 각종 포 24문과 소화기 67정을 노획하는 동부전선 첫 승리였다.그해 겨울이다. 설악산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신흥사를 나온 아군이 마등령을 넘을 때였다. 정상을 눈앞에 둔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굽은 능선을 넘던 병사 하나가 발을 헛디디고 미끄러져 1000여m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눈 깜짝할 순간에 병사를 삼킨 눈 쌓인 계곡에서는 칼날처럼 아픈 바람 소리만 들렸다.1960년대 말쯤이다. 이곳 마등령 계곡 아래에서 녹슨 철모와 Ml 소총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거꾸로 꽂힌 Ml 소총에 철모를 씌운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의 주인공인 그 병사는 바람 속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이곳 설악산의 아름드리 금강송과 전나무 등은 산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한 그루, 한 그루 세월과 역사를 켜켜이 쌓으며 서 있다. 그 중 신흥사 들머리 통일대불 옆 금강송의 푸른 가지가 2층이다. 위, 아래에서 펼친 가지가 마치 우산인 듯, 어미 닭의 날개인 듯 세월과 역사를 품고 있다. 두 그루처럼 보이지만, 한 그루인 그 금강송을 올려다보며 생각한다,통일은 둘로 나뉜 지도의 땅을 합치는 것이 아니다. 헤어진 가족, 실향민은 물론, 7000만 겨레를 적과 아군이라 편 가름 없이 함께 보듬는 것이라는 것을….<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1-06
  • “일본은 조선의 魂을 없애려 한다”
    # 코레야 1903년 가을  1903년 가을부터 대한제국은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다. 동학교도들이 일본인을 내쫏기 위해 다시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시기에 폴란드계 러시아인 세로체프스키(1858~1945)는 1903년 10월 10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1개월간 한국을 여행하고, 1905년에 ‘코레야 1903년 가을’ 책을 지었다. ‘코레야 1903년 가을’의 마지막은 ‘전쟁 전야의 서울’이다. 저자는 러일전쟁 전야의 대한제국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문균과 나는 서울의 유명 음식점에서 마지막 저녁을 함께 보냈다. 음식점은 너무 형편없었다. 역겨운 술 냄새가 진동했고, 탁자도 의자도 벽도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다. 신문균은 말이 없었다. 벽 너머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손님들이 나간 후에야 그는 우울한 말을 하였다.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교육도 하고 학교도 열고 학생들 유학도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는 것은 관료들이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가족을 봉양해야 하고, 친척도 도와주어야 하고, 뇌물도 상납해야 하고… 그러니 도둑질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에 관료들이 너무 많다고 하지만, 한국에는 관직을 제외한 직업이란 게 없습니다. 농민들은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고 있어 차라리 개들이 더 낫게 사는 지경입니다.”  그는 한숨만 푹 쉬며 술을 들이켰다.  “그럼 일본인들은 어떻습니까?”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일본인들이요? 그들은 최악입니다. 그들은 산 채로 우리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어요. 그들은 은행을 열어서 우리에게 돈을 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들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 땅의 1/3이 그들 소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다들 그들에게 저당 잡히고 또 잡히고 있지요.”‘그래도 일본인들은 개혁을 시도하고 있지 않나요? 사람들을 교육하고 노예제를 폐지하고 국가 경제를 정비하고자 하지 않습니까?’“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만 우리를 만족시키려 하고 있어요. 우리의 겉모습만 바꾸고 내면은 다 파내 버려 껍질만 남기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혼을 없애려고 합니다.” 신문균은 우울한 침묵 속에 연거푸 술을 마셨다. 잠시 후 우리는 발코니로 나갔다. (…) 갑자기 저기 나무들 사이로 갓 쓴 노인의 환영(幻影)이 보이는 듯했다. 노인은 졸음이 밀려오는 지친 머리를 기댈 곳을 헛되이 찾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이야말로 한국의 저 불행한 과거를 말해주는 끔찍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세로셰프스키 지음· 김진영 외 4명 옮김, 코레야 1903년 가을, 개마고원, 2006, p 420-423) # 전운의 한반도 일본과 러시아는 여러 차례 협상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 위기에 놓였다. 1903년 12월에 러일 양국은 경쟁적으로 한반도에 병력을 증파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2월 17일에 순양함 두 척을 제물포로 보냈다. 일본군은 부산·인천 등을 통해 수십 명 단위로 상륙했고, 연습용 명목으로 기관포와 공병 재료들도 소속 들어왔다.  1904년 들어 열강들은 자국 공사관 보호를 명목으로 속속 호위병을 입경시키고 순양함을 제물포에 파견했다. 1월 3일 미국 공사 알렌은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위해 미 해병대 100명을 입경시켰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도 호위병을 증강했다. 러시아는 1903년 12월 17일에 순양함 두 척을 제물포로 보냈다.이러자 서울의 물가는 폭등하고 민심이 동요되는 등 극도의 혼란이 일어났다.  1월 25일 자 <황성신문>은 “근일 각국의 보호병이 서울에 들어오고 일본과 러시아의 개전론이 유포되면서 곡식값이 뛰고 있다”고 보도했다. 1904년 1월 2일에 고종은 고위 대신을 통하여 미국공사관에 파천을 요청했다. 알렌은 “전쟁이 터지면 황제가 공사관으로 오겠다는 요구를 거절했다”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 프랑스공사관에 온돌방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고종은 프랑스 공사관에도 파천을 타진했지만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 국외중립 선언 1904년 1월 21일에 고종은 중국 지푸에서 기습적으로 ‘국외중립선언(局外中立宣言)’을 하였다. 그 내용은 러시아와 일본 간에 평화가 결렬될 경우 대한제국은 엄정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지푸 선언은 황실에서 이용익이 극비리에 총지휘하고 현상건·강석호·이학균·이인영 등이 프랑스인 교사 마르텔 및 벨기에인 고문 델코안뉴 등의 협조를 받아 추진되었다. 영국 공사 조단은 ‘외무대신도 사전에 알지 못한 채 문서에 도장을 찍으라는 명령만 받았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더욱이 한국의 전신 업무는 실제로 일본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외부(外部) 번역관 이건춘을 지푸 주재 프랑스 부영사에게 밀사로 파견하여 불어로 된 선언문을 각국에 타전하였다.   그런데 일본과 러시아·미국은 이 선언에 대해 아무런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는 접수했다는 회신만 했을 뿐 이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 매켄지와 이용익의 면담  2월 8일 새벽에 사세보항을 출발한 연합함대 제4전함대는 제1군단 선봉대는 2천명을 싣고 오후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오후 8시부터 개시된 상륙은 한밤중에 이르러 완료되었다. 한편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이틀 앞서(2월 6일경) 영국 데일리 메일 종군기자 매켄지는 고종의 최측근 이용익과 대담하였다. (매켄지는 1908년에 <대한제국의 비극>, 1920년에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한국의 독립운동>이란 제목으로 번역됨> 책을 쓴 친한파이다.) 이 만남에서 이용익은 ‘한국이 러일전쟁에 결코 휘말려 들어갈 수 없다’는 굳은 확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내가 겪은 개인적인 기억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서울에 있는 동안 이용익과의 면담에 초대받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한국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말을 들은 이용익은 한국이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즉각 응답했다. 그와 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M(매켄지) : 열강으로부터 보장받지 못한 조약이란 쓸모없는 것이라는 점을 귀하는 모르십니까? 만약 조약이 준수되기를 바란다면 당신이 먼저 조약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 한국은 개혁을 단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이용익) : 다른 나라가 어찌하든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중립적이라는 사실과 우리의 중립이 존중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발송했습니다. M : 만약 귀국이 스스로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왜 당신들을 지켜주겠습니까? 이 : 우리는 미국과 약속을 했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 되어 줄 겁니다. 이용익은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자기의 결심을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자 러시아 선박 와리아크호와 코리에츠호는 제물포항에서 일본 함대의 포격을 받고 격침되었으며 일본 군대는 한국의 궁궐을 점령했다. (매켄지 지음 · 신복룡 역주, 한국의 독립운동,  p 58-59)이용익이 언급한 미국의 약속이란 1882년 5월 22일에 체결된 한미수호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good offices)조항’을 말한다. “미합중국 대통령과 조선국왕 및 각 그 정부의 공민과 신민간에 영구한 평화와 우호가 있을 것을 기약하고 만일 제3국이 체약국 간의 어느 한 정부에 대하여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체약국 중의 타방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대로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하여야 한다.”이용익은 이 조항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미국이 도와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 거중조정 조항은 1883년 11월 26일에 체결된 한영수호통상조약 제1조에도 명시되어 있다. “제1조 (2) 체약국의 일방국과 제3국 간에 분쟁이 발생되는 경우에 청을 받은 타방은 이의 원만한 타결을 보기 위해 조정에 노력한다.” 이용익은 국가 간의 통상수호조약에서 통상 쓰는 이 용어를 가지고 미국이 영토의 보전까지 도와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이용익만의 생각이 아니라 고종과 그 측근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기획.연재
    2022-01-04
  • “光州鄕校 儒風 진작… 지역사회와 연계 강화”
    ▲우선 무투표 당선으로 광주향교 제30대 전교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임기는 2022년 1월 1일부터지만 취임식은 1월 7일로 알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취임 인사 겸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불민한 저 오기주에게 광주향교 유림의 대표요 광주 유림의 수장이라는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저 개인으로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막중한 책무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깊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거듭 감사 말씀 올립니다.열과 성을 다하여 광주 유림이 하나되고 시민이 인정하는 향교 본연의 본래 기능과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무투표 전교로 당선되시기까지 많은 정열과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점들이 지금 이 자리 전교님의 바탕이 됐을까요.제가 유림 활동을 하게 된 경위를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저는 장사집도 아니요 기업가의 집안도 아니요 당시 천하지대본의 농사만 짓는 유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했고 유학을 실천하면서 자랐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유가의 실천이 몸에 배어있는 유림입니다. 그 때 일찌기 한문공부를 하였습니다. 겨우 4서(書)까지는 읽었어요. 그러나 공부냐 취업이냐 하였으나 취업하기로 하고 취직공부를 해서 중간에 진로를 바꾸었어요. 직업생활에 몰입하다 보니 많이 잊었습니다만, 중국 역사 책 사략(史略)에 이런 구절만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일반지덕필상(一飯之德必償)하고 애자지원필보러라.’ 어려운 생활에 처했을 때 밥 한술 준 공덕도 상으로 갚고, 흘겨보는 눈초리로 눈꼼질하거나 눈깔질했던 사소한 원수도 반드시 갚았다는 구절입니다. 저는 꿈을 이루고 가계를 이으기 위해서 공무원이 되기로 하고 그 분야 공부를 하여 당시 5급 을류 (지금의 9급) 공채 시험 합격으로 공무원을 시작하였습니다. 내 고향 삼도 면사무소 근무를 시작으로 광산구청, 광주시청 전입시험에 응시하여 시청으로 전입 선발되어 시청 환경녹지국, 도시계획국, 건설본부 서무계장 근무를 하다가 남구청 개청 요원으로 발탁되어 남구청에서 근무하면서 사무관 승진 경쟁 시험에 합격, 동장(洞長), 과장(課長)으로 근무(勤務)하였으며, 세월의 흐름에 어쩔 수없이 남구의회사무국장(南區議會事務局) 서기관(書記官)으로 정년을 하였습니다. 비록 서기관으로 정년(停年)했으나 저는 자부를 갖고 있습니다. 공채 시험으로 시작했고 경쟁 시험으로 승진했고 마지막에 대한미국 정부에서 서기관을 임명을 받았으면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서는 누가 뭐라 해도 성공한 케이스라 여기고 있습니다.현대는 평생교육, 즉 생애교육의 시대입니다. 저는 직업을 갖고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부족했던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 왔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 형설지공(螢雪之功)을 꾸준히 하여 정년 후에도 기회가 주어지면 쉼 없이 공부하였으며 한문특급지도사 자격도 취득하였으며, 고희(古稀)의 만학(晩學)에 학위(學位)도 영득(榮得)을 하였습니다. 저는 후회(後悔)가 없습니다. 왜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마음으로 최선(最善)을 다하는 정신력(精神力)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무엇이고 다 하였고 또한 성취(成就)하였기 때문입니다.현대는 평생교육, 즉 생애교육의 시대입니다. 춘화현상(春花現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을 겪고 이겨내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유림에 발 딛게 된 것은 1991년 당시 청년유도회장 이형호 선배께서 입문을 권하셨습니다. 그 분 말씀이 제(弟)씨는 유학에 관심과 실력도 상당하니 청년유도회에 입문하여 도움을 주고 동행하면 좋겠다고 하시기에 평소 관심도 있고 해서 흔쾌히 수락하고 동참을 하였습니다. 당시 청년유도회 부회장 그 뒤 회장을 맡아서 활동하면서 선배유림 제현님을 나름 깍듯이 모셨습니다. 선배 유림의 도움과 성원으로 유학대학을 설립하였고 성년의 날 행사를 시행, 시작하였고 대성전 주변 조경에도 협력하였고 명륜당 뜰 잔디 조성에도 협조를 하였습니다.▲취임 후 하고자 하시는 일이 많을 것 같은데요. 가장 중점을 두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저의 임기중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해 주력(注力)해 보고자 합니다.첫째, 흐트러진 기강을 회복하여 광주향교(光州鄕校)의 유풍(儒風)을 진작하도록 하겠습니다.둘째, 1990年代 중반 광주향교대학(光州鄕校大學) 설립(設立)을 주도(主導)했던 사람으로 향교(鄕校)에서 강학기능(講學機能)을 크게 진작시키겠습니다.셋째, 광주향교(光州鄕校)와 지역사회(地域社會)와의 연계를 강화(强化)시켜 시민(市民)과 함께하는 향교(鄕校)가 되도록 노력(努力)하겠습니다.넷째, 향교(鄕校)를 중심(中心)으로 하는 제(諸) 단체(團體)간의 관계(關係)와 위상(位相) 및 역할(役割)을 재정비(再整備)·조정(調整)하도록 하겠습니다.다섯째, 모든 정책(政策)과 행정(行政)의 집행은 규정(規定)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제도화(制度化)하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광주향교(光州鄕校)가 더욱 투명해지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향교 유래에 비견되는 역사적 가치와 현대 사회에서 유교의 역할이 있다면 어떤 점들이 있는지 설명해 주십시오.향교 유래는 조선시대 국가이념이었던 공자(孔夫子)이 가르침인 유교사상을 널리 알리고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자 조선 왕조 초(태조 7년)에 전국 지방에 건립됐습니다. 역사적으로 유교 이념이 계승돼 오면서 충.효 사상이 고양됐고 인.의.예.지.신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이념들이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훌륭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향교의 기능적인 면을 보면 문묘 향사, 교육기능, 사회 교화 기능 등이 있는데 문묘 향사는 조선 후기에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향교가 존속하게 된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행사가 석전제(釋奠祭)입니다. 이로써 조상과 웃어른들에 대한 효사상이 고취됐습니다. 교육기능은 향교는 처음에 향촌 교화와 과거를 통한 인재양성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건립되었기 때문에 향교교육은 제도적으로 과거 제도와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대사회에 교육의 중요성과 향학열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교화 기능은 향교는 ‘풍화지원(風化之源)’으로서 향촌사회를 교화시키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향교는 향악을 주관하여 실시하였고,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함으로써 지방의 풍속과 기강을 확립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사회정화 작용의 선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밖에도 서당 체험, 전통 혼례, 유학대학 운영 등 대중문화와 접점을 꾀하고자 지속 추진 중이고 향교 내에 유치원, 노인정(쉬터) 등을 개설해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끝으로 오 전교님이 향후 개선하거나 하고 싶은 덕목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왕왕 무슨 일을 처리하려면 정통성의 시비가 야기됩니다. 이를 불식하기 위해서 유림 총회를 한 번씩 소집하려면 어려움도 없지 않습니다. ‘광주향교 유림은 하나다’라는 명제 하에 일을 하고자 합니다. 단합하면 못할 일도,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먼저 대원 김중채 전교님께서 창안하시고 운영하셨던 규제위원회를 가칭 ‘유림윤리위원회(儒林倫理委員會)’로 개편하여 지속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허위 사실로 상호 모략하거나 유언비어 등으로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유림으로서 품위 손상을 자행하거나 사문난적의 행위자 등에게는 연령의 다소, 지위의 고하를 불문하고 소위 징벌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행위가 심하거나 반성의 정황이 없는 유림에게는 부득이 타율에 맡길 수도 있도록 할 것입니다.사람이 만능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규정에도 있으나 전예위원회(典禮委員會)를 구성하여 운영, 전례 절차 등에 이견이 있거나 애매한 사항은 토의하고 협의하여 절차의 시비가 없도록 하겠습니다.‘유림대상추천위원회(儒林大賞推薦委員會)’를 구성, 공정성의 시비가 없도록 하여 유림의 공감을 제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상(大賞) 대상자의 선정 추천 또는 공로패 감사패 수여시에도 위원회의 심의를 받도록 할 것입니다.유림단체의 ‘(가칭)임원적격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각 단체에서 진영논리로 편 가르기를 자행하는 불합리를 지양하고 다수 유림이 공감하는 단체장이 선임될 수 있도록 사전 조율하여 전체유림의 지지로 단체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교단체 가입 활동하는 유림은 단체 임원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음을 공지하는 바입니다.다수 유림이 불합리한 점이 있다고 불평하는 각 단체의 규정(회칙)을 전체 유림이 공감할 수 있도록 개정하도록 하겠습니다.이는 각 단체에서 전임위원을 1명씩 선정하여 합동으로 새로운 안을 만들어 개정하도록 하며 모든 유림은 향교직제(규정)의 대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각 단체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장시간의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끝맺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불민하고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광주향교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인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또 날씨가 고르지 않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기 부탁 말씀 드리고 임인년 새해에도 유림을 비롯해 여러분 가정에 화평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전기에 창건 ...중등교육과 지방민 교화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서석산(瑞石山) 장원봉(壯元峰) 아래에 창건되었다.호환(虎患)이 있어서 동문 안으로 옮겨 세웠다가, 1488년(성종 19)에 수해(水害)로 현감 권수평(權守平)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에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그 뒤에 중건한 것이다.1974년에 대성전을 보수하고 단청하였으며, 1976년에 동·서재와 1978년에 명륜당을 보수하고 1981년에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동재·서재·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비각 등이 있다.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외삼문 밖에 있는 비각에는 흥학비(興學碑)와 중수비(重修碑)·위성묘비(衛聖廟碑) 등이 있는데, 흥학비는 1563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대승(奇大升)이 찬기(撰記)하고 박광옥(朴光玉)이 음기(陰記)를 찬하였다.중수비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1803년에 목사 김선(金銑)이 중수하고 교리 기학민(奇學敏)이 찬기한 것이며, 또 하나는 1855년에 목사 홍재응(洪在應)이 중수하고 기정진(奇正鎭)이 찬기한 것이다. 위성묘비는 권일제가 성묘를 지킨 것을 1843년에 목사 조철영(趙徹永)이 그 기(記)를 새겨 세운 비이다.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소장 전적은 189종 306책으로 주로 경서와 문집류이며, 필사본인 ‘관안(官案)’·‘광주유림안(光州儒林案)’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좋은 자료이다.인터넷 홈 페이지가 개설돼 접근성이 용이해졌으며 전통혼례, 서당 체험, 기타사항 등 문의는 향교 사무국 062-672-7008번으로 하면 된다.
    • 기획.연재
    2021-12-30
  • 2022년 새해맞이 축시/새해 아침이니
    <김 목/시인·동화작가>   새해 아침이니 선물을 듬뿍 받고 싶다두 팔 벌려 한아름 주고도 싶다그렇지, 세상을 밝히는 등이 있다면그 선물이 봄등이었으면 좋겠다바람이 불어가는 언덕에 걸어 놓으면봄바람이 솔솔 온 세상으로 퍼져서여기저기 향기로운 환한 봄 가득하겠지   향기로운 꽃등도 좋겠다우러름을 일으키는 정의로움 계향남의 말을 귀에 담는 겸손함 문향공정을 지키고 나누고 베푸는 시향바람을 거슬러서도 퍼지는 계문시향이 세상 으뜸 향기 그 셋 묘향꽃등이면새해 아침이 어찌 평화롭지 않으랴   저녁에는 별등이어야 하겠다큰 등 하나 작은 등 일곱 개를 사다가북극성과 북두칠성 자리에 놓으리라어두운 밤을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얼마든지 별빛을 나눠주겠지갈 길 잃은 사람에게 희망등이 되겠지   이 모든 등을 합치면 무슨 등이 될까물으나 마나 그 등은 어머니등말만 들어도 포근하고 따뜻하고가슴까지 먹먹해지는 등아참, 든든하고 넉넉한 아버지등도세상의 내일이 될 딸등, 아들등도새해 아침 선물이었으면 좋겠다  
    • 기획.연재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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