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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물염적벽 김삿갓 벚나무
      화순군 이서면 동복천에 물염, 창랑, 장항, 보산 등 4 적벽이 있다. 이중 물염은 봄, 창랑은 여름, 장항은 가을, 보산은 겨울적벽이다. 이 적벽은 조선 전기 때까지는 그냥 석벽이었다. 적벽이란 이름은 1519년 기묘사화에 동복으로 유배 온 최산두(1483~1537)가 붙였다, 중국에 4 적벽이 있다. 후베의 적벽은 삼국시대 주유와 조조가 대전을 벌인 양쯔강에 있다. 소동파가 적벽부를 읊은 적벽은 황주에 있다. 또 무창과 한양까지 모두 네 곳이다. 우리나라도 금산군 부리면의 금강을 적벽강이라 하니, 이곳 깎아지른 단애 이름이 적벽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금강의 적벽보다 화순 이서 동복천의 4 적벽이 그 규모나 아름다움에서 더 빼어난다. 어디 풍광뿐일까? 지금은 물염정, 망미정, 송석정만 있지만, 조선시대에 이곳 동복천에는 수많은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그중 동복천 8경으로 고소대, 봉황대, 동복현청의 협선루, 포월정, 만경대, 망미정, 물염정과 동복의 주산인 옹성산을 꼽는다. 망미정과 송석정이 남아있는 보산적벽은 겨울적벽이다. 여기 망미정에서 바라보는 옹성산의 설화는 봄, 여름 갈겨울의 풍광을 모두 합쳐놓았다. 이곳 보산적벽 아래는 금모래밭이었다. 임란의 용장 황진 장군이 동복 현감 시절 말을 몰아 군사조련을 했던 곳이다. 또 이곳 정자에서 사람들은 풍영을 누렸다. 가을에 베어 말린 풀단에 불을 붙여 건너편 옹성산 절벽 위에서 던지는 봄철 낙화놀이는 그 중 백미였다. 김삿갓이 이 낙화놀이에 왔고, ‘무등산이 높아도 소나무까지 아래이고, 적벽강이 깊어도 모래 위로 흐른다’는 시도 그날 읊었으리라 짐작한다. 옹성산의 단애인 장항적벽은 노루목 적벽이라고도 하는 높이 100여m의 가을적벽이다. 이곳 가파른 절벽 틈새에 한산암이 있었다. 한여름이 지나간 물결에 서늘한 바람이 실리는 날 하늘에서 내려오는 종소리는 절로 손을 모으게 했다. 한산암에 오르기 전 물결에 비추인 내 모습을 보나니, 가을 동복천은 저승길 들머리의 바로 그 명경이었다. 이어 창랑적벽은 여름적벽이다. 병풍처럼 둘러친 맑은 물에 붉은 배롱꽃 그림자와 두둥실 하얀 구름송이가 흘러가는 모습은 가슴으로만 보는 그림이다. 더위가 무엔가? 창랑적벽 맑은 물에 노 저어 나룻배를 띄우면 누구나 운무를 부르는 신선이었다. 물염적벽은 벚나무가 봄을 여는 봄적벽이다. 여기 물염정의 물염(勿染)은 세상사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 물염의 아름드리 벚나무가 아들 손자 벚을 거느리고 봄을 맞는다. 지리산의 운해를 신비로 걸친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고 동구를 지키는 느티와 은행도 오백 년은 거뜬이다. 하지만 수명으로 어찌 나무의 우열을 평가하랴? 또 그러지도 않는다. 벚나무는 봄의 나무이다. 이른 봄날 온갖 초목의 새잎이 나올 무렵, 꽃이 먼저 피어 온 세상을 화사하게 수놓는다. 꽃구름인 듯 두둥실, 꽃비인 듯 우수수, 꽃눈으로 하늘하늘 흩날려 부풀고, 적시니 그 마음 둘 데 없다. 이 벚나무의 왕인 왕벚나무는 제주도가 원산지이다. 또 늘어진 삼단 같은 가지를 실바람에 흔드는 능수벚나무는 숨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이 벚나무는 오래 살아야 백 년이다. 이른 봄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그 결실 또한 풍성하니 어찌 오래 살길 바랄쏘냐? 더욱 잎자루마다 꿀샘으로 뭍 곤충을 살리니, 온몸으로 사는 그 열정을 오래 살지 못함으로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백 년 이쪽저쪽의 여기 물염정의 벚나무는 이제 할아버지다. 앞으로 언제까지 자리를 지킬까 싶지만,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갈 것이니 무엇이 걱정이랴? 더욱이 물염정에서….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5-12
  • “광주 재활이 내 운명!”
    1당 독재 계속되면 광주는 죽는다, 내가 살리겠다 윤 당선인 광주 사랑 각별, 지역 발전에 큰 행운돼‘공항 이전, 실리콘밸리 조성 등 꼭 해낸다’다짐도대담=주성식 선임기자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고, 선거판은 차츰 달아오르고 있다. 호남 지역은 그동안 특정 정당 경선이 곧 본선(결과)이 됐던 ‘관행’에 큰 변화는 없으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만큼 변화가 있으리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7회 지방선거에서 시장 후보도 내지 못했던 정당은 집권당이 되면서 분위기 역전을 기대하고 있다. 주기환 국민의힘 광주시장 후보는 아직 정당 지지도부터 개인적 지명도까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정치 초보라는 약점을 신선하다는 장점으로 바꾸고, 소속 정당의 오랜 열세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각오가 돋보인다. ‘작은 불씨가 온 들판을 태운다’는 확신으로, 반드시 목적지에 이르고 말겠다며 결의를 다지고 있는 주기환 후보를 만나 그의 포부와 ‘광주시 재활’ 계획을 들었다. -출마 계기는?나는 광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평소 꾸준히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행태와 최근 광주의 상황을 보면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해졌다.공직을 떠나면서 운신이 자유로워졌고, 이번 대선 과정에 광주도 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2.7%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큰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상징이다. 나는 광주가 일당 독재의 비상식적인 상황을 벗어나, 대한민국의 건전한 일부가 되는 데 기여하겠다는 열망과 그것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출마를 결심했다. 광주에 대한 윤석열 당선인의 애정과 관심이 실현되도록 최선의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도 갖고 있다. -윤석열 당선인과의 인연이 화제다.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부인할 일도 아니다. 나와 윤 당선인은 20년 넘게 윤 당선인과 ‘운명적 동지’로 지내면서 서로를 존중해왔다. 특히 당선인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수평적인 리더십으로 대한다. 광주시장에 당선되면, 그런 리더십으로 광주시 공무원들과 협력해 광주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 -현 광주시의 문제점은?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뿌리인 ‘권력 독점’이 가장 크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그것은 오랜 소외와 차별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광주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광주에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공존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그저 일방적으로 전체를 가져야 만족한다. 지난날 혹독한 독재의 피해를 당했다고 떠들면서 더 악화된 형태로 그 짓을 반복하고 있다. 다른 문제는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내가 출마를 결심한 큰 이유 중 하나인데, 우리 지역에서 연이어 발생한 아파트 붕괴사고에 대해 살펴보자. 거대 건설회사부터 하청업체 그리고 주택조합 관계자까지 마치 부패와 불법·비리의 상징처럼 매도하고 있지만, 과연 그들(만)의 책임일까?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 사고(들)의 특징은 명백하다. 바로 ‘광주에서만’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 건설사나 하청업체는 광주에서만 공사하고 있는가? 주택조합은 다른 지역에는 없거나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가? 광주시부터 해당 구청까지, 관리 감독 책임은 없는가?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작업 지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중요 원인 중 하나 아닌가? 말단부터 최고 의사결정권자까지 한 통속이 돼, 뻔한 하자(瑕疵)에 눈 감고 뒷거래한 것 때문에 발생한 참변 아닌가 말이다.그런데 현수막 몇 장 걸어놓고, 슬퍼하는 척한 것 말고 도대체 뭘 했는가? 집행부부터 의회까지 한 정당이 독점하고 있으면서, 무슨 책임을 졌는가? 최소한의 상식 아니 양심이라도 있다면, 이번 선거에 시장부터 구청장까지 후보를 내지 않아야 맞는 것 아닌가?시민들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다 알고 있다. 얼마나 썩고 망가졌는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 증거가 아파트 붕괴고, 이번 대선 결과다. 그리고 이 추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내가 반드시, 뒤틀린 것을 곧게 펴고 무너진 것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것을 위해 출마한 것이다.  -광주시의 최대 현안, 과제는?광주시의 어떤 문제도 무슨 해결책도, 앞에서 지적한 ‘권력 독점’을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그동안 예산·법령부터 민심까지 온갖 것 들먹이며 약속을 무시하고 방치하지 않았는가. 한 패거리들끼리 예산 몇 푼 따다가 짬짜미로 단물 빨아먹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전혀 공약하지 않겠다는 것인가?윤석열 당선인은 늘 “호남이 잘 살아야 대한민국이 발전하다”고 강조해왔다. 나는 그 점에 적극 공감하면서 ‘꼭 실천할’ 8대 공약, 70개 이상 과제를 조만간 공약 발표 기자회견을 통해 제시할 예정이다. 그 공약들은 대부분 인수위의 국정 과제에 포함됐다. 즉 차기 정부가 책임지고 추진한다는 것이다. ▲군 공항 이전 ▲실리콘밸리 조성 ▲인공지능(AI) 모빌리티 융복합산업벨트 조성 ▲복합쇼핑몰 유치 등은 반드시 이룰 것이다. 또 임기 중 시민·공무원·각 부문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광주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해낼 것이다. 내가 내세운 ‘광주, 미래를 현재로!’에 모든 것을 담았다. -지금 검찰 수사권 관련 입법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이 문제의 본질은 수사권과 기소권이 어느 기관에 있는지와는 전혀 상관없다. 학계, 집권당 성향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검찰을 포함한 법조계와 심지어는 법안 추진세력이 큰 혜택을 볼 것처럼 선전하는 경찰까지 반대하지 않았는가. 이 법으로 인해 심각한 인권 공백 등 법 질서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확실하다. 국가 법 체계를 붕괴시키고, 그로 인해 이익을 보려는 악랄한 의도가 개재돼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자신의 경쟁력, 지지기반, 약점은?모든 면에서 장점과 약점이 겹친다고 생각한다. 먼저 검찰 공무원 경력은, 우리 지역이 법치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발전하게 하는 데 장점이 될 수 있는 반면 ‘법이면 다냐?’라며 거부감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당선인과의 관계도, 나는 광주 발전을 위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확신하는데, 일부는 검찰 경력이나 개인적 친분을 매개로 한 유착관계인 것처럼 왜곡된 관점으로 보기도 해서 놀랐다. 나는 내가 살아온 것 그대로 내놓을 수밖에 없다. 정치 경험이나 엄청난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오직 ‘가능한 한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나섰다. 시민들은 (나를)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할 것이다. 물론 좋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웃음)  -정치 특히 지방자치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들었다. 둘만 모여도 언행(言行)의 이해(利害)를 따지고 득실(得失)을 가늠하지 않는가. 우리가 무인도에서 혼자 꿈꾸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도록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구성원들이 합의한 규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원론(原論)이나 분식(粉飾)이 아니라, 명확한 실체를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지방자치는 중앙정치의 부속물이나 하부 단위가 아니라 전체의 일부이며 바로 전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일부 없는 전부가 어디 있겠는가.-호남 소외, 차별의 원인과 해법은 무엇인가?모든 문제는 복합적이다.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호남’이라는 일반화부터 문제라고 본다. 혹시 우리는 호남이라는 틀로 묶고 문제를 지적하는 행태를 아무 의식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아닐까?모든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우치면 좋겠다. 한비자(韓非子)는 ‘모든 것은 내부 요인 때문에 무너진다’고 설파했다. 결국 쇠(鐵)가 자기에게서 생긴 녹(綠) 때문에 썩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에게 문제점은 없는지 살피고 자부심을 바탕으로 자강(自强)에 힘써야 한다. 호남이 대한민국의 당당한 일부로서 기능하고 발전의 한 축이 되는 유력한 방안일 것이다.-평생 지켜온 원칙이 있다면?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사회적으로는 공정과 상식에 충실하려고 한다. 신념을 갖되 그것이 타인에게 폐가 되지는 않아야 한다고 믿으며, 안팎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왔다.특히 어머님이 늘 “베풀어라!”라고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평생 실천해왔다.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출범할 당시 “깜짝 등용”된 주기환 후보는, 업무 역량과 인품 등 모든 면에서 당선인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든든한 힘이면서도 큰 짐이다. 주 후보는 “윤 당선인 덕만 보고, 출마 경력으로 무슨 자리나 노리고, 청탁이나 처리하려고 나온 것 아니다. 내 삶의 마지막 열정을 광주 살리기에 쏟아붓겠다는 뜨거운 마음 하나로 출마했다. 반드시 결과를 내겠다”라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주기환 후보 모친은 길손이며 걸인까지 집에 오는 사람 누구나 밥을 먹이고 재워 보냈다고 한다. 한 번도 한 명도 예외가 없었다. 주 후보는 지금도 모친의 ‘베품’ 덕에 자신의 현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기환 후보는 확신한다. 광주 시민들이 서로 기대고, 함께 어우러지고, 모든 것을 나눔으로써 마침내 광주가 침체를 벗고 나라와 겨레의 빛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말이다.   주기환 후보는 아내와 슬하에 아들 둘을 뒀다. 기독교 신자(집사, 부인 권사)이며 등산이 취미 겸 유일한 건강관리법이다.
    • 기획.연재
    2022-05-08
  • 부패가 즐거움이고 음모가 인생인 황제
    # 역술가 정환덕에 빠진 고종1901년 11월 27일에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함녕전에서 정환덕이라는 역술가를 만났다. 그는 경상도 영양 사람으로 40세가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어려서부터 공부했던 역술로 출세하고자 서울로 올라왔다. 정환덕이 역술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널리 알려지자 경운궁 전화과장(電話課長) 이재찬이 고종에게 그를 추천하였다. 고종은 첫 질문으로 ‘어쩌다가 40세에 벌써 백발이 됐는지’를 물었다. 이 질문은 인사차 던진 것이었고, 정말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있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500년으로 한정했고 종묘의 정문 이름을 창엽(蒼葉)이라 썼다. 창(蒼)이라는 글자는 이십팔군(二十八君)이 되고 엽(葉)이라는 글자는 이십세(二十世)를 형상한 듯하다. 국가의 운수가 과연 이와 같은가?”조선 후기에 조선왕조의 수명이 500년이라는 예언들이 횡행했다. 그 근거가 종묘 정문 이름인 ‘창엽’이었다. ‘창엽’에는 조선이 태조 이후 20세대가 되거나 28대째 되는 임금 때에 망한다는 예언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1901년은 조선왕조 509년이 되는 때였고, 고종은 26대 임금이었지만 세대로 치면 철종이 20세대였다. ‘창엽’대로라면 조선왕조는 철종 대에 망했거나 아니면 고종의 손자 대에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 정환덕은 “폐하의 운수로는 정유년(1897)부터 11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운수는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정환덕은 1907년까지는 고종이 황제 자리를 유지할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과연 정환덕의 예언대로 고종은 헤이그 특사로 인해 1907년 강제 퇴위를 당하게 된다.그러자 고종은 “그렇다면 혹 기도한다면 꽉 막힌 운수를 피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왕조를 연장하고 싶었다. 이러자 정환덕은 “인재를 얻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원론적인 답변이었다. 이틀 후인 11월 29일에 고종은 다시 정환덕을 불렀다. 이날 고종과 정환덕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환덕은 “12월 그믐쯤에 화재의 염려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물러났다.이날 이후 고종은 정환덕을 잊었다. 그런데 1901년 12월 그믐에 정말로 화재가 발생했다. 이러자 고종은 1902년 1월 7일에 함녕전 침실로 정환덕을 불렀다.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정환덕을 침실에서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고종이 물었다.“네가 화재를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은 확정적인 운수가 있어서인가? 아니면 우연히 맞은 것인가? (중략) 장래 종묘사직의 존망을 나도 잘 알지 못하겠다. 그것을 들을 수 있겠는가?”고종은 나라가 보존될지 아니면 망할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내우외환을 자력으로 극복할 생각보다는, 내우외환이 운명이라면 운명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어떤 신통력에 매달리고 싶었다. 정환덕은 참으로 난감했다. 자신이 국가의 존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엄청 큰 부담이었으리라.정환덕의 답변은 그의 저술 <남가몽(南柯夢)>에 나온다. “신의 계산으로 본다면 다가오는 광무 9년(1905년) 을사 11월 갑자일에 일계(日計)가 건괘(乾卦)의 초구(初九)로 옮겨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옛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로 나가는 시기입니다. 초구는 하루종일 씩씩하고 저녁까지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시국을 당해 국가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위태하고 어렵습니다. 충신과 열사가 서로 죽기를 다투며 조정과 재야가 함께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밖에도 허다한 변란을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궁중의 법을 엄숙히 하시고 용단을 확고히 하시어 어진 신하를 친근히 하시고 소인을 멀리하소서. 그렇게 하면 화란(禍亂)에서 벗어나 복록(福祿)이 되며 꽉 막힌 운수는 가버리고 태평의 운수를 맞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정환덕의 말대로라면 대한제국의 미래는 1905년이 결정적인 전환기였다.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고종은 정환덕 말처럼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해야 했다. 그런데 이완용, 박제순  같은 이가 고종 주변에 있었고, 고종은 나약하고 무능했다.   이후 정환덕은 시종원에서 5년 정도 근무하면서 고종을 모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종의 자문관이 역술가였다는 점이다. 역술가의 현실 판단과 미래 비전은 말 그대로 현실보다는 역술에 기초했다. 그런 면에서 고종의 광무개혁은 적어도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 미신에 빠진 고종       1904년 11월 18일에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미국 국무부에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  “고종은 병적으로 미신에 빠져 있으며, 1895년 갑오개혁 기간 중 궁중에서 쫓겨났던 무당들이 궁중의 모든 일에 영향력을 미치고 국고로 들어가야 할 세금까지 가로챘습니다. 고종은 전투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던 1904년 11월에도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무당들의 말을 듣고 안심했습니다.”(구대열, 다모클레스의 칼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대응, 정성화 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6, p 28) 1882년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왕후(1851∽1895,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는 환궁하면서 여자 무당을 데리고 왔는데, 고종은 그녀에게 진령군이란 군호를 주었다. 측근이 된 진령군은 국정 농단을 하였다. 1893년 8월 21일에 전(前) 정언 안효제가 상소를 올려 무당 진령군을 처벌하라고 탄핵했지만, 탄핵한 안효제가 오히려 귀양을 갔다. 그런데 고종은 1895년에 민황후가 시해된 지 10년이 다 된 1904년에도  여전히 미신에 빠져 있었다.   윤치호 일기와 고종실록이 알렌의 보고서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1904년 5월 27일의 ‘윤치호 일기’이다. 이 사료는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 5월 27일 간밤에 비.4.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고종 황제는 궁궐을 짓느라 분주하다. (1904년 4월 14일에 경운궁이 모두 불탔다- 필자 주)무당과 점쟁이들이 있는 방 두 칸에서 시간을 보내는 황제, 난방을 한 곁방 밖으로 나와 한낮의 햇빛을 보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시간도 없는 황제, 권력이 일상이고 부패가 즐거움이고 음모가 인생인 황제.  이 황제는 이 저주받은 나라의 저주받은 백성들로부터 갈취한 몇백만 원의 돈을 궁궐을 짓는 데 낭비하고 있다.”1905년 4월 17일에 의정부 참정대신 민영환이 아뢰었다.(고종실록 1905년 4월 17일)  “ ‘무당이나 점쟁이 등의 잡술은 나라에서 철저히 금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요즘 법과 기강이 해이되어 그러한 무리들이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면서 요사스러운 말과 술수로 백성들을 선동하며 심지어는 패거리를 지어 정사(政事)를 문란하게 만듭니다. 실로 한탄스러우니, 속히 법부(法部)와 경무청으로 하여금 모두 붙잡아 법에 의거 죄를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그런데 1주일 뒤인 4월 25일에 무당과 점쟁이 등을 철저히 단속하지 않은 경무사 신태휴가 견책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의 미신 현혹 실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경운궁의 문을 수비하였다. 이때 요술(妖術)을 가지고 고종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혹 구름을 타고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만리 길을 가서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진영(陳營)을 굽어본다고도 하고, 혹은 비와 돌을 마음대로 떨어뜨리게 하여, 만일 적들이 국경을 침범할 때는 비와 돌로 그들을 섬멸할 것이라고도 하였다.그들은 요망스럽고 허황된 것이 모두 이따위 것들이었다. 민영환이 참정이 되어서 누차 그들을 엄히 묻기를 간청하였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금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끝내 금하게 할 수는 없었다.” 1905년 11월 5일에 전(前) 참찬 곽종석도 미신타파를 상소했다.   “화려한 옷과 사치스런 노리개, 기이한 물건을 모두 물리치고 비용을 허비하는 여러 토목 공사나 건축 공사를 없애며, 신령과 부처, 무당과 점쟁이를 섬기는 괴상하고 허무맹랑한 짓을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
    • 기획.연재
    2022-05-02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낙안읍성 이순신 푸조나무
      순천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를 두 팔처럼 벌려 남해의 뭍 섬들을 안고 품는 아름다운 고을이다. 그 남해의 여러 고을과 섬마을은 이른 봄이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고, 매화와 동백,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어우러진다. 하지만 왜의 침입, 그리고 재침입에 피난민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던 1597년 8월 9일이다. 순천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이순신은 이른 아침 길을 재촉하여 낙안에 이르렀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집을 나와 오릿길에 이르도록 장군을 맞이했다. 이윽고 낙안성으로 들어서니, 성의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반가워했다. 또 적에게 줄 수 없다며 불을 지른 탓에 관청과 창고가 다 타버렸다고 슬피 울었다. 군량미를 얻으러 온 이순신은 순간 온몸의 힘이 쑥 빠졌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시 한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낙안성은 동쪽 금전산, 북쪽 백이산, 서쪽 노강산과 부용산, 남쪽 제석산이 두르고 있는 천혜의 분지형 요새이다. 지형이 그러하니 대개의 성은 평지에서 산기슭으로 이어지나, 낙안성은 그냥 평평한 평야에 쌓은 평지성이자 석성이다. 그날 밤, 마을의 노인들이 술을 독채 들고 왔다. 함께 음식을 나누던 이순신은 바로 가까이 있는 당산나무에 술을 한 잔 부어주었다. 그 뒤 이 당산나무를 ‘장군목’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순신 나무’가 또 있다. 1591년 2월에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로 왔다. 이듬해 4월, 왜의 침입으로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이순신은 부족한 수군과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낙안성에 들렸다.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다.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군량미를 실은 마차 바퀴가 삐걱거리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서둘러 마차 바퀴를 수리하여 성 밖으로 나갔다. 큰 다리께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버렸다고 했다. 만약에 마차 바퀴 고장이 낙안성의 은행나무 아래가 아니고 다리 위였다면 어찌 됐을까? 이 광경을 지켜본 백성들은 낙안성 은행나무를 ‘이순신 나무’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한 그루 이순신 나무가 있다. 바로 객사 뒤, 담 곁에 있는 ‘푸조나무’이다.  이 푸조나무는 소금기에 잘 견디기 때문에 주로 남해안에서 자라고 있다. 수백 년을 살며 덩치도 두세 아름 넘게 커져서 바닷바람을 막아준다. 이순신이 이 푸조나무를 낙안성 객사 뒤뜰에 심은 것은 수군재건길을 걸었던 이듬해인 1598년이다. 그해, 10월 14일, 이순신은 순천의 왜교성을 공격하려고 고금도 진지를 나왔다. 낙안성과 가까운 여자만의 섬 장도에 이르렀다. 당시 노루섬이라고도 했던 벌교 앞바다 여자만 장도에는 왜의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 왜병은 이순신의 수군이 온다는 말에 창고를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이순신의 수군은 장도에 상륙하여 왜병의 군량미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이어지는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침하고, 11척을 빼앗았으며, 왜병 3,000명을 무찔렀다. 그 왜교성 전투를 앞두고 낙안성에 잠시 들렸던 이순신이 승전을 기원하며 심은 나무가 바로 객사 뒤쪽의 푸조나무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몸 한쪽을 잃었지만, 오늘도 이순신의 후예들을 맞아 그날의 역사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절로 머리가 숙어지는 이유이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4-28
  •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 새롭게 바라봐”
    나라사랑기도포럼 제 13-4차 정기기도회  양림동 선교사묘역서 ‘고난주간 특별기도’찬양·기도·말씀의 합심기도 순교자뜻 기려 지난 4월 16일 토요일 아침 7시에 나라사랑기도포럼(대표회장 문희성 목사)이 주관하는 나라사랑기도포럼 제13-4차 정기기도회  ‘고난주간 특별기도회’가 광주광역시 남구 호남신학대학교 경내에 있는 양림동 선교사 묘원 일원에서 개최됐다. 양림동 동산의 선교사 묘역에는 130여 전부터 미국장로교교회의 파송을 받아 광주전남북지역에 온 선교사들의 묘지와 일제 신사참배 반대와 6·25전쟁 당시 광주전남지역에서 순교한 850여명의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부활절을 하루 앞두고 열린 이날 특별기도회는 제1부 예배, 제2부 선교사·순교자 추모, 제3부 순교신앙 계승을 위한 기도 순으로 진행됐다.이날 나라사랑기도포럼 부회장 정석윤 목사의 인도로 진행된 1부 예배에서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제목으로 광주CCC 대표간사 이종석 목사가 설교했다.이 목사는 “100여 년 전 가난과 무지와 풍토병이 만연하던 불모지에 오신 유진벨, 오웬, 포싸이트, 윌슨, 서서평 등 수 많은 선교사들의 희생와 헌신으로 오늘 이 땅은 세계 10대 경제대국,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 되었다”며 “고난 없는 영광은 없고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이제 이곳에 있는 우리도 일어나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주님의 도전에 응답하자”고 강조했다.기도포럼 대표회장 문희성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제2부 선교사·순교자 추모 순서는 시인 리종기 목사의 추모헌시, 광교협대표회장 강희욱 목사의 추모사에 이어 예배에 참여한 200여명이 추모를 위한 합심 기도 후에 주최측에서 준비한 국화와 수건을 가지고 헌화와 묘비를 정성껏 닦는 순서를 가졌다.특히 금번 고난주간 특별기도회에는 국제펜클럽회원이고 한국문인협회회원인 광교협고문, 수석부회장 리종기 목사(시인)의 추모헌시가 있어 더 큰 감동을 주었다.“십자가여 생명의 부활이여!(양림동순교자 헌시)            은산 리 종기 시인/목사 피묻은 십자가 가슴에 품고어린 시체들 뒹글던 양림동산 찾은푸른 눈의 서양의 선교사님들이여맞이하는 사람 없는곳알아주는 사람 없는 곳무지와 미신과 가난의 저주만 있던 무진주 땅  잿빛도시 양림골에님들은 어깨의 무거운 짐 풀고이국땅 이 자리에 자리잡았나이다. 풍토병과 싸워가며이국의 악한영들과 영적전투 벌이며십자가의  핏빛 헌신으로 생명사랑  영혼사랑으로육체위해   현대식 제중병원 세워는포사이드 선교사님 윌슨선교사님혼을 위해  현대식 미션학교 세우는유화례, 쉐핑 선교사님영을 위해  구원방주 교회 세우는유진벨, 오웬, 변요한선교사님27명의 잠들어 있는 선교사님들의무수히 쏟아내는 순교정신뜨거운 선교의 핏빛 사랑눈물을 바치고땀을  바치고 한방울 피까지도 비치고이국땅 코리아 광주 양림동산에 밀알되어 누워 계신 님들이여! 이 묘역에 27명의 선교사님들이여 우리는 세계 최빈국가에서세계 6위 10위권의 상위권에 드는 경제강국, 군사강국, 반도체강국으로세계 제2의 선교강국 되었으니십자가의 핏빛사랑 선교사님 정신을 예수 부활생명으로 빛고을 광주에서 삼천리 금수강산, 북녁땅으로 세계 열방으로 펼쳐나가겠나이다.”              제3부 순교신앙 계승을 위한 기도시간에는 이종석 목사가 선교사들의 순교역사와 순교자에 대해 소개했다.M하프단의 잔잔한 연주가 양림동산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참석자들의 순교영성 계승을 위한 땅 밟기 기도와 묘역순례가 이어졌다.고난주간 특별기도회의 추모헌시와 추모사와 헌화와 순교자의 소개와 간절한 합심기도는 우리에게 믿음을 눈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기적의 시간이었다. M하프단과 형제들의 찬양은 어두어진 참가자들의 영혼을 흔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온전히 고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회장과 임원들의 구별된 마음가짐과 준비로 200여 명 가까이 참여한 기도회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로 부활절 주일 예배를 준비했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합심기도는 100여 전에 선교사들과 순교자들과 함께하는 감동을 주었고 “함께 가고자” 결단하게 하는 도전을 주었다. 이번 고난주간 특별기도회를 주관한 나라사랑대표회장 문희성 목사는 한마디로 “감동적인 메시지가 있는 기도회였다”며 “CCC대표간사 이종석 목사님께서 말씀을 뜨겁게 전해주셔서 감사드린다. 광교협 대표회장 강희욱목사님의 추모사로 격을 높혀 주셔서 좋았다. 고문 목사님들과 임원들의 헌신적인 수고에 감사드리고, 최선희 권사님이 조화 일체를 봉헌해 주셨고, 한평철 장로님이 화병심는 날 식사와 행사에 사용하는 수건을 섬겨 주시고, 이경영 권사님과 정순옥 권사님이 구운계란으로 섬겨 주시고, 크로마 M하프단의 찬양과 행사에 참석해 주신 강기정 전 정무수석, 김병내 광주 남구청장, 김용집 시의회 의장에게 감사드린다”고 했다.봄이 짙어가는 양림 선교동산에서 인류의 죄짐을 지고 십자가에 죽임당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언덕의 고난을 깊게 묵상하며 드려진 나라사랑기도포럼 고난주간특별기도회는 대단한 의미와 감동의 순간들이었다. 몇 주 전부터 선교동산을 오르며 기도하며 헌신한 예배와 추모와 기도회는 평화와 사랑과 인권과 자유를 갈망하고 헌신하는 광주정신의 시작이 어디에 있는지 그 현주소를 알게 했다.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원 ‘양림동산’전라도 사역 순교 선교사 23명 묘비 조성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108번지 호남신학대학교 캠퍼스 경내 뒷산에 위치한 양림동 선교사 묘원(양림동산)은 1895년 한국선교사로 들어와 나주, 목포, 광주에 선교부를 세우고 30년간 한국복음화를 위해 살았던 유진벨(배유지) 목사의 묘를 비롯해 한센병 치료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오웬 선교사, 광주 직업여성과 걸식인, 한센병자들의 대모로 살았고 광주 최초의 시민장으로 치러질만큼 시민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쉐핑 선교사 등 한센병자와 결핵환자, 빈민과 고아, 과부를 위한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했던 22명의 미국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와 그 가족(자녀, 친척 등)의 묘가 있으며 전라도 일대에서 사역하다 순교한 23명의 선교사 묘비도 조성되어 있다.선교묘역에는 최초 서울 지역에 묻힌 선교사들의 기념비 22기와 전주지역과 순천지역에 묻힌 선교사 기념비 6기 등 22기의 묘비가 새로 조성되었고,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순교자들과 광주 전남에서 6·25 때 순교한 850여 분의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기획.연재
    2022-04-27
  • 주성식의 어른 왈/고양이를 탓하기 전에
    <주성식 선임기자>   이 사회 특히 정치의 문제점은 너무 심각하고 광범위하고 명백하기 때문에 오히려 방치되고 있다고 하겠다. 원인과 결과가 맞물리면서, 아예 관행이고 대세며 체질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힘을 가진 부류들은 날뛰며 더욱 강해지려 하고, 일부는 그 곁에 빌붙어 생계를 꾸린다. 한 마디로 복마전(伏魔殿)이다. 한창 진행 중인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그 속내의 일단을 살펴보자. 오는 6월 1일 유권자들은 투표인(印)을 몇 번 찍을까? 5천만 명이 넘는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투표구 별로 ‘나리’들을 몇 분이나 모시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으니, 선거(기간)가 시작되면 사회 전체가 난장판이 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떼를 지어, 춤을 춰대고 속이 뒤집힐 만큼 시끄럽게, 유행가와 구호를 퍼붓는다. 요란한 영상을 보여주며 거리를 누빈다. 누가, 몇 명이, 무슨 자리를 노려 ‘그 짓’을 하는지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한 부분일 뿐이다. 각 정당이 공천 후보를 뽑을 때마다 항의·탈당 등 소동이 벌어진다. 기준도 원칙도 없이 ‘맞춤형 전략 공천’ 등 폭력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실력자(몇몇)가 경쟁력·도덕성 따위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한 것을 들먹이며 공천을 쥐락펴락하지 않던가. 워낙 비난 여론이 들끓자 대안이라고 내놓은 것이 소위 ‘국민참여경선’이다. 물론 그것도 온갖 협잡·불법·비리 투성이지만, 그 발상부터 우습지 않은가? 해마다 수백억 원 국비 지원을 받는 정치집단이, 후보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무능을 자백하며 국민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니 말이다.  공천이나 (본)선거 결과에 책임지지 않으려는 꼼수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 어떤 뒷거래가 있는지 유권자와 국민은 대개 알고 있다. 그러니 결국 우리 문제요 우리가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혹시 우리는 그동안 아무 고양이한테나, 어떤 굴레도 채우지 않은 채, 생선가게를 맡겼던 것 아닐까? 몇 년(!)에 한 번, 종이쪽과 붓대롱만 손에 쥐면, 조건반사처럼 속절없이 투표소에 가서, 꼬박꼬박 ‘정해진’ 번호에 찍고, 또 던졌던 것 아닌가? 이제 더 이상 ‘허천난 아귀(餓鬼)’ 같은 것들에게 무한 권력을 허용하고, 방치하지는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직접 정치가 절실하다. 그 조건은 이미 충분하다. 그냥, 실행하면 된다.
    • 기획.연재
    2022-04-2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구례 명협정 이원익 왕버들나무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역사를 비틀고 뒤집어 보는 것은, 재미라기보다 바로보기의 한 방편이 아닐까 싶다. 조선 500년의 여러 정승 중 백성들이 꼭 정승 호칭으로 존경한 사람은 네 분이다. 첫째가 세종 때 영의정인 황희 정승이다. 두 번째가 역시 세종 때 좌의정인 맹사성 정승이다. 서울의 고갯길 이름 ‘맹현’은 맹 정승이 거기 살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가 명종 때 영의정인 상진으로 서울의 상동 이름도 상 정승이 거기 살았기 때문이다. 네 번째가 오리 정승인 이원익이다. ‘선조의 가훈을 받들어 충효로 마음을 세우고 인과 예절로 몸을 다스리며, 형제간에 화목하고 사리사욕으로 남에게 원한을 사지 말라.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라. 단지 수의와 연금으로 시신을 싸고, 외관이 있거든 석회를 쓰지 말고 석회가 있거든 외관을 쓰지 말라. 장지는 선영 내의 정한 곳에 입장하라. 초상, 소상, 담제 이후에도 일체 무당과 불가의 행사를 하지 말고 선조께서 소찬으로 진설한 것을 따라라. 풍수가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자손 대대로 한 산지에 장사하여 그 처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시제와 속제의 묘제 재물은 풍성과 사치를 숭상하지 말고 단지 정결히 하며 십여 접시에 그치도록 하라. 1630년 11월 21일, 아들 의전과 손주 수약에게 이글을 준다.’ 앞글은 오리 이원익(1547-1634) 정승의 유언 내용이다. 오리 정승은 선조, 광해군, 인조 왕 등 3 왕에 걸쳐 64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6번에 걸친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냈다. 임진, 정유재란, 정묘호란의 전장을 누볐고, 조선의 청백리 217명에 이름을 올렸다.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문자를 쓰고 있을까? 오리 정승이 없었다면, 조선은 과연 500년 역사를 기록했을까? 이렇게 역사를 비틀고 뒤집어 보면, 세종대왕은 한반도의 문명을 크게 여신분이고, 오리 정승은 민족의 역사를 이어 지키고 세운 분이다. 왜냐하면, 오리 정승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없고, 이순신이 없었다면 정유재란에 한양은 단숨에 무너졌을 테고, 조선의 남쪽은 왜가 지배하거나 식민정권이 세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례의 명협정은 그 정유재란에 오리 정승 이원익이 이순신을 만난 곳이다. 당시 이원익은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국가비상사태직무 총사령관이었다. 왕을 비롯하여 모두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때, 이원익은 왜의 코 앞인 전쟁터에 있었다. 이때도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만나기 위해 구례까지 달려간 것이다. 얼마 전 이순신은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으로 국문장에서 사형집행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다. 이원익은 선조에게 ‘전하께서 전시 중에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못 하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선조는 ‘도체찰사가 그리 말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는가 보다’라고 했고, 이틀에 걸친 친국은 마무리되었다. 조선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구례 명협정 옆의 500살 넘은 왕버들 나무와 아직도 푸르른 참느릅나무 3그루는 구례로 달려온 이원익이 이순신과 만나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이다. 이순신 또한 ‘오리 대감은 누구 보다 앞장서서 나를 믿고 옹호해 주었다. 나 역시도 상국이 오로지 나의 계책을 써 주어 오늘의 수군이 완전할 수 있었다.’라고 했으니, 이로써 오늘의 우리가 일본이건, 누구건,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명협정 500년 세월의 왕버들나무와 참느릅나무에게 돌아가신 조상님 모시듯 허리까지 굽혀 예를 갖추는 연유이기도 하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4-21
  • “온갖 법 문란해지고 정사 그르쳐”
    1904년 7월 15일에 안종덕은 고종 정권이 ‘청렴, 근면하지 않고 공정 하지도 않으며 신뢰도 잃었다’는 상소를 올렸다. 한 달이 지난 8월 22일에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고종은 재정 고문에 일본인 메카다, 외교 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스를 임명했다.  8월 28일에 철도원(鐵道院) 총재 신기선이 의정부 참정(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5일 후인 9월 2일에 신기선은 사직 상소를 올렸다.“(전략) 현재 온몸과 터럭들까지 다 병들어 단 한 점의 살점도 성한 것이 없이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온갖 법이 문란해지고 모든 정사가 그르쳐졌습니다. 하나하나 두루 진찰해 보면 변사를 갈아대며 말해도 그 증세를 다 말해 낼 수 없으며 그 어떤 약도 효력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증세에 대한 처방을 가장 근원적인 데서 찾으면 두 가지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첫째 대궐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것이고, 둘째 뇌물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온 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으로서 신기하고 심원한 논의가 아니며 본래 평소의 확실한 이치여서 시행하기 쉬운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 시행하지 않겠습니까? 첫째, 대궐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것입니다. 임금은 만백성의 위에 있습니다. 깊은 대궐에서는 상하의 엄격한 구분이 있고 친척들이 뵙는 것도 정해진 시간이 있으며 궁인(宮人)들과 내시(內侍)들의 시중에도 제한이 있고 만나는 사람은 오직 공경이나 어진 사대부들 뿐인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지금은 하찮고 간사한 무리들이 폐하의 곁에서 가까이 지내는가 하면 점쟁이나 허튼 술법을 하는 무리들이 대궐 안에 가득합니다. 대신은 폐하를 뵈올 길이 없고 하찮은 관리만 늘 폐하를 뵙게 됩니다. 정사를 보는 자리는 체모나 엄할 뿐 서리나 하인들이 직접 폐하의 분부를 듣습니다. 시골의 무뢰배들이 대궐의 섬돌에 꼬리를 물고 드나들며 항간의 무당 할미 따위들이 대궐에 마구 들어갑니다. 평소에 감히 보통 관리도 가까이하지 못하던 자들이 폐하의 앞을 난잡하게 마구 질러다닙니다. 이로 인하여 벼슬을 함부로 주고 이를 통해 청탁이 공공연히 벌어집니다. 굿판이 대궐에서 함부로 벌어지고 장수하기를 빌러 명산(名山)으로 가는 무리들이 길을 덮었습니다. (...)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소인(小人)들을 멀리하고 어진 사대부들을 가까이하며 경찰들에게 엄히 신칙(申飭)하여 필요 없이 대궐에 들어가는 것을 단속하여서 대궐을 엄숙하고 맑게 만들어야 합니다. 폐하가 정복(正服) 차림을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날마다 재상과 대신을 만나 정사의 도리를 강론한다면 정사가 어찌 깨끗해지지 않고 법이 어찌 서지 않으며 대궐의 문란이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둘째, 뇌물을 없애는 것입니다. 대체로 벼슬자리를 만들어 놓고 직무를 맡기는 것은 장차 하늘이 준 직책에 나가 하늘이 낸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오직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만을 선발하여 등용하고 조금도 사적인 마음을 개입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뇌물로 벼슬을 주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폐하의 명철함으로는 절대로 재물을 귀중히 여기고 어진 것을 천하게 여기면서 불법적으로 벼슬을 팔아먹을 리가 없건만, 수십 년 이래로 뇌물 주고받는 것이 풍습이 되고 관청 문이 저자처럼 된 것은 틀림없이 간사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청탁을 하여 사욕을 채우고 진상(進上)을 구실로 규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지금 상하가 서로 이익을 다투는 것을 마치 일상적인 일처럼 보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뇌물이 아니면 벼슬을 얻을 수 없고, 뇌물이 아니면 송사(訟事)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으로 알며, 관찰사나 수령 자리에는 모두 높은 값이 매겨져 있고 의관(議官)이나 주사(主事) 자리도 또한 값이 정해져 있어서 심지어는 뇌물을 바치고 어사(御使)가 되어 각도(各道)를 시찰하기도 합니다.”   이어서 신기선은 갑오경장 후부터 폐지된 경연(經筵)을 다시 열고, 하루에 세 번 조회를 열어 일체 정사를 처결할 때는 반드시 대신들과 직접 대면하여 의논하고 조정의 신하들에게 직접 문의할 것을 상소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간곡한 마음을 살펴 신의 벼슬을 체차(遞差)하고 신의 말을 채용해서 날마다 경연에 나가고 정사를 직접 처결하여 대궐을 엄숙하고 깨끗하게 만들고 뇌물을 근절하소서.”이러자 고종은 ‘사직하겠다는 말을 거두고 즉시 일을 보라.’고 비답(批答)하였다. 이로부터 2개월이 지난 11월 25일에 신기선은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다. (고종실록 1904년 11월 25일)“삼가 생각건대 신은 위태로운 때에 줄곧 녹봉만 축냈습니다. 이에 물의(物議)가 물 끓듯 하고 사람들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이 변변치 못하게 직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랜 폐단을 없애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하였고 또 기강을 엄하게 세워 민심을 진정시키기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간 상사(喪事)를 만나 감히 사임하는 글을 내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폐하를 번거롭게 하니 원컨대 속히 신의 참정 벼슬을 체차하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이러자 고종은 번거롭게 굴지 말라며 사직을 반려했다. 하지만 신기선은 12월 31일에 또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다. “신이 재주도 없이 외람되게 벼슬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뢰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그전대로 어물어물 벼슬에 있은 지 이미 한 달이 지났습니다. (...) 오늘날 백성들이 일으킨 소란은 참으로 유사(有史) 이래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백성들이 단체로 회를 결성하여 정부에 대들고 칙명(勅命)에 항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면밀히 따져 보면 그것은 곧 폐단을 강제로 짓누르고 억울한 기운이 쌓인 것에 불과합니다. 이 변고가 비록 고금(古今)에 처음 보는 일이나 그 이치를 궁구해 보면 또한 필연적인 것입니다.지금 조정은 태평의 즐거움을 탐하고 큰 세력만 의지하였습니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사욕만 채웠고, 시행하는 정령(政令)은 압제(壓制)로 줄달음쳤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원한이 극도에 이르렀으나 하소연할 데가 없게 되었고, 그것이 처음 변란인 임술년(1862)의 소요를 초래하였고 두 번째 변란으로 갑오년(1894)의 난리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나라는 비로소 개혁을 도모하며 유신(維新)을 표방하였습니다.그러나 오랫동안 이루어진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대소 관리들은 전날보다 몇 곱절 더 제 이익만 채우며 공적인 것을 모두 잊고 폐하를 속이며 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부패 관리들은 백성들의 등골을 긁어내고 파견 관리와 시찰 관리들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빙자하여 재물을 빼앗고 있습니다.경무(警務)를 맡은 두 관청과 옥을 맡은 관리들은 요민(饒民)에게서 포악하게 약탈하여 온 나라를 함정으로 만들고 있으며 각 진위대(鎭衛隊)의 군사들은 비적(匪賊)을 핑계대고 백성들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각궁(各宮)과 각사(各司)에서는 잡세(雜稅)를 함부로 받아 내고 서경(西京)의 궁(宮)을 짓는 역사(役事)에 도(道) 전체를 모조리 긁어내어 고갈시켰습니다. 전환국은 악화(惡貨)를 주조하여 물가를 등귀시키고 있으며 내장원(內藏院)에서는 역참(驛站)의 둔전(屯田)을 관할하면서 농민들을 들볶고 있습니다. 이 밖의 허다한 고질적인 폐단은 다 셀 수도  없습니다.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이 도리어 임술년(1862), 갑오년(1894) 전보다 더 심해졌으니 백성들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분연히 모여 살아날 길을 도모하는 것 또한 괴이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이런 비상한 변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신은 매번 폐하 앞에 나설 때마다 적이 폐하의 뜻을 헤아리고 개연히 분발해서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신이 어찌 외람되게 의정부(議政府)의 벼슬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그 누구보다 어리석고 나약하기 때문에 아첨이 풍속이 되고 신하가 폐하의 위엄을 무릅쓰고 바른 말로 간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는 것이 정상이 되어 있어 신은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합니다.사변이 들이닥쳐도 망연해져 어쩔 줄 모르고 폐단을 바로잡을 계책이란 늙은이가 늘 하는 푸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정부의 회의에 관리들이 모이는 것이 엉성하고 인망이 경박하여 동책(董策)하지 못하고 탄주(彈奏)는 폐하의 재가를 받지 못하여 법질서를 세우지 못합니다. 신은 외람되게 오랫동안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어진 사람이 나설 길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나라 일이 갈수록 위태로워져도 타계할 계책을 세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니 바라건대 폐하는 속히 신의 참정(參政) 벼슬을 체차(遞差)하고 유능하고 식견 있고 명망 높은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소서.”마침내 고종은 아뢴 대로 하라면서 사직을 수리했다. 참정에 임명된 지 4개월 만이었다.
    • 기획.연재
    2022-04-20
  • “횡재 바라지 말고 안목 키워라!”
    김화중 고미술협회 광주전남지회장 ‘보물찾기 반세기’핵 가족화·아파트 생활, 예술품 시장에 큰 변수돼많이 보고·자기 기준 갖고·조금씩 투자하면 성공소장 유물 공개 계획·전시장소 마련 등 참여 기대 대담=주성식 선임기자코로나19 상황과 경기 침체가 맞물리면서 골동품·예술품 시장은 급격히 위축됐지만, 봄 기운과 함께 방역조치가 완화되면서 차츰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한국고미술협회 광주전남지회장 취임 2년째인 김화중 고전방 대표도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예술의 거리를 찾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라고 밝힌 김화중 대표는 “경기 침체 국면이라고는 하지만 억눌렸던 소비 심리가 살아나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예술품 등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고 있다”라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봄빛 완연한 광주 예술의 거리 고전방 사무실에서 김화중 대표의 ‘보물찾기 반세기’를 들어보고, 골동품·예술품 시장의 현황과 전망을 살폈다.-고미술협회는 어떤 곳인가?예술품 특히 고미술(골동)품과 관련해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일 것이다. 설립된 지 반세기가 됐다. 도자기·동서양화·고서화 같은 옛 물건에 대해 알고 싶은 경우, 가장 믿을 만한 답을 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근현대 미술품도 다룬다.-공인(公認)된 기관이란 말인가?공인이라면 국가나 공적기관이 설립하는 등 법적 근거가 있다는 의미일 텐데, 우리나라에 고대 유물이나 예술품을 다루는 공인 기관은 없다. 이것은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다.-그렇다면 진품(眞品) 여부부터 가격까지 전혀 믿을 수 없다는 것 아닌가.이 부분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생성부터 따져봐야 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와 관련한 진위 논란이 있었다. 작가 본인이 ‘가짜’라고 했는데도 국가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과 검찰은 진짜라고 했던 유명한 사건이다. 예술품을 구입해 감상하고 소장하겠다는 입장에서 어느 판단을 따르는 것이 맞겠는가?널리 알려진 추사(秋史, 金正喜)나 남농(南農, 許楗)은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가짜가 유통됐다. 문제는 그 가짜가 작가 본인이 직접 제작한 진짜에 못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더 훌륭하기도 했다는 데 있다. 당시의 종이·붓·먹을 사용해, 유행하던 필법으로, 치열한 노력 끝에, 더 ‘작가답게’ 위조한 작품과 원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아니 어떤 것이 더 예술적 가치가 있겠는가?그래서 앞에서 ‘가장 믿을 만한’이라고 한 것이다. 완벽한 감정은 있을 수 없다. 누구도 해낼 수 없다. 끝없이 근사치(近似値)를 추구하는 것이 감정이고, 우리 고미술협회는 그 과정에 가장 충실하다는 것이다.-요즘 이 분야에도 변화가 있다던데?과거 동양화(남화, 문인화)가 주를 이루고 글씨(서예 작품)가 보조적인 역할을 했는데, 추세가 완전히 변했다. 핵가족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주거 공간도 아파트가 많아지면서 소품 위주의 서양화·조각 등이 인기다. 젊은 층이 한자(漢字)에 익숙하지 않은 영향도 있을 것이다.-이 분야에 종사하게 된 계기는?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양화 유통에 관여하게 됐다. 당시에는 각 가정은 물론이고 시중 다방, 식당 심지어는 유흥업소까지 그림이나 글씨 몇 점 걸어놓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 경제가 좋아지던 때라 수입도 괜찮았다.작품을 많이 접하다 보니 어떤 것이 진귀한 것인지 나름대로 안목이 생겼다. 특히 세상에는 물질적 이득 말고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가치관도 갖게 되고, 이 분야에서 한 몫을 해내고 있다는 보람도 커졌다.-중국과 관련한 일도 적지 않았다던데?중국이 개방되면서 이 업계에도 중국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중국과 거래해 큰 돈을 벌었다는 업자들 소문이 무성했다. 나는 고서(古書)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한중(韓中)은 동일한 한자문화권이고, 과거에도 물자 이동이 활발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운반하기 쉽다는 점도 고려했다. 중국 시장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당시 중국은 경제 규모나 생활 수준이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후진적이었지만, 골동품 시장은 별천지였다. 중국의 골동품 수장(애호)가가 약 8000만 명 정도다. 구매력을 가진 열렬 애호가가 우리 전체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중국 고서(古書) 경매로 적지 않은 수입을 거뒀는데, 전부 중국 골동품 구입에 썼다. 흑피옥(黑皮玉)·칠기(漆器, 전국시대 추정)·도자기까지 진품이 많았고, 지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최근 중국 골동품과 관련한 논란이 적지 않다.기물이나 작품의 (眞僞)부터 적정 가격,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중 관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분란이 심각하다.그 대표적인 것이 흑피옥(黑皮玉, 玉 彫刻에 검은 칠을 했다)이다. 이 유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은, 7000~1만년 전 우리 민족이 만주·몽골 지역을 지배하던 때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인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중요한 보물인지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중국이 전면적으로 고대 유물 해외 반출을 금지하고, 코로나19 상황이 닥치면서 소강상태이기는 하지만, 연구자부터 소장자와 유통 관계자까지 ‘해뜰 날’을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또 중국 고대 도자기와 관련해서도 다툼이 적지 않다. 한쪽은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보물급 도자기가 우리나라에 (한 점도!) 있을 리 없다고 한다. 다른 편은 중국은 한반도의 50배 이상 크고, 3000년 가까운 역사 동안 무수한 유물이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도로공사나 택지 개발 과정에 최소 20만기 이상 상류층 분묘가 파헤쳐졌고, 그 과정에 부장품(副葬品)이 대량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국외 반출이 통제되기 전 수천만 점이 해외로 빠져나갔으며, 국내에도 최소 100만 점 이상 들어와 있다고 주장한다.이 기물들이 유통되면서 법적 분쟁도 적지 않게 발생한 것으로 들었다.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본다.-기억에 남는 일이 적지 않을 텐데?중국에 다니면서 흑피옥과 춘추전국시대(추정) 칠기(漆器)를 처음 접했을 때가 지금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참으로 좋은 기물은 감정이나 분석이 필요 없다. 그냥 ‘아 좋다!’라고 느껴진다. 또 마지못해 인수한 물건이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던 것도 기억난다. 물론 반대인 경우가 더 많았지만. (웃음)-그동안 지켜온 원칙이나 신조가 있는가?상식과 관행을 지키자고 다짐해왔다. 다시 말하자면 합리성과 의리(義理)를 중시하고, 원칙으로 삼았다.이 업에 종사하다 보면 온갖 ‘위험’에 접할 수밖에 없다. 고의건 자신도 몰랐건 가짜를 비싸게 팔려는 사람들이 있다. 거래가 마무리된 후 그것을 확인했을 때, 세상의 상식과 업계의 관행에 따라 무리하지 않고 처리해왔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격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확실하지 않은 경우 그리고 분명 진품인데 인정받지 못할 때 속앓이가 심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극복해 왔다.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앞에서 언급한 흑피옥을 비롯해 그동안 수집한 중국 관련 기물과 국내 유물 등을 적절한 공간에 전시하고 싶다.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 어떤 형식이건, 내 노력의 성과를 공개해 가능한 한 다수와 나누려는 것이다. 혼자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뜻 있는 분들의 관심과 동참을 기대한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골동품·예술품 감정 기준이 마련되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법규 제정·관계 전문기관 설립·전문가 양성 등 어떤 분야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에 힘을 보탤 것이다.-골동품·예술품 구입과 소장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조언한다면?가장 먼저 욕심을 버려야 한다. 가끔 언론에 나오는 횡재(橫財)는 몇 년에 한 번, 수억 명 인구 중 한두 명의 사례다. 그리고 결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복권 당첨자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그다음에는 많이 봐야 한다. 만져 보고, 냄새도 맡고, 가능하다면 오감(五感)을 넘어 육감(六感)까지 동원할 수 있도록 경험을 쌓아야 한다.그래도 미진한 것이 있기 마련이니 공부해야 한다. 관계 역사부터 작가(들)의 특성과 사용한 재료에 이르기까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점을 명심하면 좋다.보기에 좋고, 쓸모도 있고, 주변과 어울리고, 경제적으로 큰 부담도 없는 선에서 하나둘 모으다 보면 어느 새 전문가가 돼 있을 것이다.김화중 대표는, 귀천(貴賤)을 비롯한 골동품·미술품의 가치는 각자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국 유명 박물관 앞에서 크기나 상태까지 실물과 전혀 다르지 않은 복제품을 팔고 있는 것을 거론하며 “그 작품의 아름다움에 과연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아이가 유치원 때 삐뚤빼뚤하게 쓰고 어설프게 그린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편지의 가치가, 호화로운 미술관 속 거만(巨萬)을 헤아린다는 명작만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 진정 소중한 가치가 온전히 드러나고, 되도록 많은 사람이 반가이 접해 넉넉하게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김화중 대표의 뜻, 이미 ‘진품(珍品)이요 보물’ 아닌가!
    • 기획.연재
    2022-04-17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포항 구룡포 천지창조 용송
      일만이천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는 인간을 비롯 뭍 생명에게 멸족의 두려움과 멸망의 공포였다. 이 시기의 생존은 사라져버린 태양을 대신한 불이었다. 서양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뭍 생명을 살렸고, 북방민족을 살린 건 태양 안에 살며 태양과 인간을 불로 맺어준 불의 신이자, 전령사인 삼족오다. 이 삼족오를 모시고 빙하기를 견뎌온 부족이 해 뜨는 동쪽으로 아리랑 고개를 넘어 정착했으니 석기부족인 곰족이다. 뒤이어 고개를 넘어온 청동기 부족이 호랑이족이다. 이 두 부족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가 단군조선이다. 이들 후손 중 철기문화를 일으킨 부족이 예족이다. 이들은 박달나무로 만든 강한 활에 쇠활촉을 달고, 역시 쇠날을 박은 긴 창으로 한반도의 동해안과 바다를 다스렸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그 6.9m의 긴창을 두세 병사가 함께 들고 능숙하게 다뤘으니, 이는 훈련이 잘된 강한 군사력을 말한다. 동해를 품에 안은 포항지역은 삼한 시대 진한의 12국 중 근기국이다. 근기(勤耆)는 고대 신라어로 도기야(都祈野)이며 ‘돕(돋)기/도기(도끼)/도지/돋이’를 음차 및 훈차한 표기이니 ‘해돋이’를 뜻한다. 또한, 연오랑과 세오녀의 오(烏)도 불의 신 삼족오이니, 이는 ‘해맞이’다. 이 ‘연오’가 ‘영일’이 되었고, 영일만의 호미곶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 다리가 대나무를 닮아 대게인 포항대게 중 크고 단단한 대게를 ‘박달게’라 한다. 이 박달도 환웅 천황 배달국 신시의 밝고 환한 새 나라에 닿아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신족 사상의 제천의식을 치렀던 이곳 포항은 신라에 병합되기 전 제철과 직조기술로 진한의 지배자였고, 오늘날에도 동해의 으뜸 도시이자, 세계를 지배하는 철의 왕국이다. 포항에 구룡포 설화가 있다, 열 마리의 해룡이 승천하는데, 9용은 하늘에 오르고 1용은 바다에 머물렀다. 짝수 10은 음수로 여성, 홀수 9는 양수로 남성이다. 따라서 아홉 용은 세상으로 나갈 남성이자 아들이고, 바다에 남아 10을 채우는 용은 삶터를 지킬 여성이자 어머니이니 모계에서 부계로 이어짐의 상징이다. 또 10은 완벽한 수, 9는 가없이 큰 수이니 완전함과 가없음으로 세상을 연 곳이 포항이다. 이는 대륙해양 고을 포항의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자부심과 자긍심이다. 뭍과 바다, 하늘의 지배자인 그 포항의 용이 이제 포스코의 철로 만든 배와 비행기가 되어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니, 구룡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설화였다. 또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가 있다. 신라 8대 아달라왕 때다. 불로 쇠를 다루는 연오와 옷감을 짜는 세오가 바위배(큰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가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은 사자를 보내 연오와 세오의 귀국을 권유했다. 이에 연오는 세오가 짠 비단을 보내 평화를 약속하니, 신라 왕은 근심을 덜었다. 이 역시 높은 파도를 이길 튼튼한 배, 제철과 직조기술로 왜 열도를 달래고 어르면서 평화를 유지했음을 상징하는 태양신화이다. 구룡포의 근대문화역사 거리는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곳 구룡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공원에 오르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의 역동적인 구룡 조형물이 있다. 그 아홉 용이 넘실대는 푸른 파도를 가르며 하늘로 오르고, 또 열 번째 용이 있으니 바로 바다를 보며 용트림하는 용송이다. 그렇게 아홉 용이 하늘에서 세상의 번영을 이루고, 또 열 번째 용이 뭍과 바다에서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구룡포는 세상의 핵심인 용의 터이자, 여의주다. 구룡포에 가면 그 열 용을 보며 대륙에서 해양으로 나가는 포항의 힘찬 기상과 늠름한 기백을 함께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아이들과 함께 가면 더욱 좋은 곳이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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