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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만여명 참석 관민공동회… 백정 출신 개막연설
    1898년 10월 15일에 독립협회는 의정서리 박정양과 회담을 갖고 잡세 혁파와 중추원 관제 개정을 통한 의회 설립을 협의하여 박정양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이러자 수구파의 조종을 받은 황국협회 회원들은 16일에 박정양의 집에 몰려가서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다 같은 민회인데 어째서 독립협회만 상대하냐며 항의하고 박정양의 사임을 요구했다.10월 20일에 고종은 토론은 정치문제 이외에만 허용하고, 집회는 한 장소에서만 하도록 하는 이차집회(離次集會: 장소를 옮겨서 집회를 여는 것) 금지 조칙을 내렸다. 10월 21일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규탄을 받고 물러난 윤용선을 의정부 의정에 독립협회에 비판적이었던 최익현을 의정부 찬정에 임용했다.  이러자 독립협회는 10월 22일부터 정해진 장소인 독립관이 아닌 경무청 앞에서 집회를 열고, 칙명을 위반했으므로 처벌을 받겠다는 뜻으로 철야 농성을 하였다. 아울러 독립협회와 시위군중들은 신임 의정 윤용선의 집 앞에서 시위 집회를 열어 윤용선으로부터 자진 사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독립협회는 고종의 집회 금지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회를 계속했다. 이러자 10월 23일에 고종은 의정부 찬정 박정양을 참정(參政 총리)으로 승진시키고, 중추원 의장에 한규설, 부의장에 윤치호를 임명하였다. 아울러 고종은 중추원 관제를 중추원 의장·부의장과 협의해서 개정하라는 조칙을 내렸다.이에 독립협회는 이상재 등이 마련한 중추원 개정안을 정부에 제출했는데, 이 안에는 의관 50명 가운데 관선과 민선을 25명씩으로 하고 민선 25명은 독립협회가 회원 중에서 투표로 선출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의회설립운동이 일단 성공하자, 독립협회는 이를 관철하기 위해 10월 28일에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키로 결정했다. 그런데 정부 대표는 집회 장소가 독립관이 아닌 종로라는 이유로 불참을 통고했다. 하지만 독립협회는 10월 28일 오후 1시부터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독립협회 회원들 약 4000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윤치호는 (1) 황제와 황실에 대한 불경한 언행  (2) 외국에 대한 모독 (3) 회원간 및 전·현직 관료에 대한 비방 (4) 사회 개혁적 발언 엄금등 4개 조항의 대회 진행 규칙을 제시했다. 이는 황제권을 인정하고, 개혁적인 박정양 정부와 협력하여 점진적 내정개혁을 추진한다는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독립협회에 대한 고종과 정부는 물론이고 외국인과 수구파의 오해와 불신을 해소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러자 정부 대표는 고종 황제의 허락을 받고 대회 이튿날인 10월 29일에 관민공동회에 참가하였다. 10월 29일 오후 2시에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민간에서는 독립협회뿐만 아니라 독립협회 계열의 모든 자매 단체들이 참석하였고, 수구파 행동대인 황국협회까지도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다. 또한 의정부 참정 박정양, 법부대신 서정순, 농상공부대신 김명규, 탁지부대신서리 고영희, 중추원 의장 한규설, 원임 대신 김가진, 민영환·민영기·심상훈·이재순·정낙용, 한성판윤 이채연 등 정부 인사도 참석하였다.이렇게 관민공동회에는 정부 인사· 시민· 지식인·학생·노동자·상인·승려·백정 등 각계각층이 참석하였고, 그 수는 1만여 명을 넘었다.오후 3시에 시작된 관민공동회에서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가 먼저 인사를 하였다. 이어서 정부 측에서 의정부 참정 박정양이 등단하여 개막연설을 하였고, 민간 측에서 백정 출신 박성춘이 등단하여 개막연설을 하였다.“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에 이롭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매우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조(國祚)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합시다”이러자 군중들은 박성춘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박성춘은 1895년에 곤당골 교회에서 무어로부터 세례를 받는 기독교 신자였다. 1892년에 한국에 온 새뮤얼 무어(1846~1906 모삼열) 목사는 1893년에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중간쯤에 있었던 곤당골에다 장로교회를 열었다. 그는 고종의 어의인 에비슨과 함께 백정들에 대한 차별 철폐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런 무어 목사의 행동은 양반 신자와 선교사들로부터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0월 30일에 의정부 참정 박정양은 관민공동회에서 채택된 헌의 6조를 고종에게 보고했다.    “이달 29일에 백성들이 종로 거리에 크게 모여 ‘관민공동회’라 일컬으며 나라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의논하여 제거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의정부의 여러 신하들이 함께 모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 여섯 가지 조항의 강령으로 된 의견을 올린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다 일제히 좋다고 외쳤으며 또한 신들에게 이것을 상주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신들이 생각건대 그 여섯 가지 조항은 바로 나라의 체면을 존중하고 재정을 정돈하며 법률을 공평하게 하고 규정을 따르는 문제로서 모두 응당 시행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아룁니다.첫째, 외국인에게 의존하지 말고 관리와 백성들이 동심협력하여 전제 황권(皇權)을 굳건히 한다. 둘째, 광산, 철도, 석탄, 산림 및 차관(借款), 차병(借兵)과 정부와  외국과의 조약은 각 부의 대신들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하여 서명하고 날인한 것이 아니면 시행할 수 없다.셋째, 전국의 재정은 어떤 세금을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다른 부(府)와 부(部) 및 사적인 회사에서 간섭할 수 없으며, 예산과 결산을 인민들에게 공포한다.넷째, 이제부터 중대한 범죄에 관계되는 것은 특별히 공판(公辦)을 진행하되 피고에게 철저히 설명해서 마침내 피고가 자복한 후에 형을 시행한다.다섯째, 칙임관은 대황제 폐하가 정부에 자문해서 과반수의 찬성에 따라 임명한다.여섯째, 장정을 실천한다. 이상입니다.”보고를 받은 고종은 “의정부로 하여금 조처하도록 하겠다.”고 비답하였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30일  2번째 기사)   이어서 고종은 전제 황권을 견고케 한다는 ‘헌의 6조’에 만족하여, 10월 31일 새벽에 ‘조칙(詔勅) 5조’를 반포함으로써 관민 공동회에 대한 지지의 뜻을 표시하였다.‘조칙 5조’는 아래와 같다. 1. 간관(諫官)을 폐지한 후 언로가 막혀 상하가 힘쓸 것을 권하고 가다듬을 것을 깨우치는 뜻이 없게 된 만큼 중추원에서 빨리 장정을 개정하여 실시할 것이다.1. 각 항 규칙은 일정한 것을 말한 것이 있는데, 각 회와 신문 역시 방한(防限)이 없을 수 없다. 회규(會規)는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명하여 시의를 참작해서 제정하도록 하고, 신문 조례는 내부와 농상공부에서 각 국의 규례에 의거하여 제정하여 시행할 것이다. 1. 관찰사 이하 지방 관리와 지방 부대 장관들은 현직에 있건 교체되었건 간에 관청의 재물을 공짜로 가진 자가 있으면 장률(贓律)에 관한 법조문에 따라 시행하며,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은 자는 법률에 의거 징계 처결할 것이다.1. 어사나 시찰원 등이 폐단을 빚어낸 것에 대해서는 본 고장의 백성들에게 내부와 법부에 가서 고소하도록 해서 사실을 조사하고 징계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1. 상공학교를 설립하여 백성들의 산업을 장려할 것이다.”(고종실록 1898년 10월 30일)   이렇게 고종은 중추원의 의회로의 개편을 사실상 승인하였다. 근대국가로 나가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11월 2일에 고종은 칙령(勅令) 제36호, 〈중추원 관제 개정 건(中樞院官制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중추원은 아래에 열거한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議定)한다. 1. 법률, 칙령의 제정과 폐지 혹은 개정하는 것에 관한 사항 2. 의정부에서 토의를 거쳐 임금에게 상주하는 일체 사항 3. 칙령에 따라 의정부에 문의하는 사항 4. 의정부에서 임시 건의하는 것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항 5. 중추원에서 임시 건의하는 사항 6. 백성들이 의견을 올리는 사항. 중추원의 직원은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관(議官) 50인, 참서관(參書官) 2인, 주사(主事) 4인으로 정한다. 의장은 대황제 폐하가 글로 칙수(勅授)하고, 부의장은 중추원에서 공천에 따라 폐하가 칙수하며, 의관은 그 절반은 정부에서 나라에 공로가 있었던 사람을 회의에서 상주하여 추천하고, 또 절반은 인민협회(人民協會 독립협회) 중에서 27세 이상 되는 사람이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를 투표해서 선거할 것이다. (고종실록 1898년 11월 2일)이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의회 개설만 남았다. 그러나 11월 4일에 변고(變故)가 일어났다.
    • 기획.연재
    2021-09-28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충효리 왕버들
    무등산은 광주사람들에게 아리랑과 같은 말이다. 먼 나라에서 아리랑 노랫가락에 눈물 흘리듯, 먼 곳에 다녀오다 바라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어머니의 품 같은 산이기 때문이다.이 무등에 눈이 세 번 내리면 빛고을에서도 펄펄 날리는 첫눈을 맞이한다. 그렇게 무등은 또 영험한 산이니 희망이요 민주, 인권, 평화의 상징이다.이 무등을 바라보며 식영정의 늘푸른 높은 솔이 지키는 광주호 상류로 올라가 화순 동복 가는 갈림길에서 환벽당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그렇게 무등의 품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충효동 1021번지에 장승처럼 서 있는 대여섯 아름의 왕버들나무 세 그루를 만난다.충효리 왕버들 이름은 김덕령(1567~1596) 장군과 관련이 있다. 김덕령은 1593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익호(翼虎), 충용(忠勇) 장군이란 칭호를 들으며, 이순신 장군과 장문포에서, 곽재우 의병장과 의령에서 왜를 크게 물리친 조선의병총대장이었다.어릴 적에는 효자로 아우 덕보와 함께 화순 동복의 석교천(남면)까지 수십 리 길을 걸어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고, 진주의 명의 김남신에게 약을 구하러 수백 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그러나 1596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운봉까지 진군하였음에도 적과 내통하였다 하여,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모진 국문에 숨졌다.그의 형 덕홍도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장군의 처 흥양 이씨도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순절하였다. 천만다행으로 아들 광옥은 고모와 함께 전북 익산의 용안현으로 피란했고, 왜란이 지난 뒤, 평안도 숙천군의 북도 방어사인 외숙 이인경에게 의탁했다. 그 뒤, 평안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에 정착, 용안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또 천만다행으로 숙종 임금 때에 장군의 억울함은 신원 되었고, 정조 임금 13년에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 시호를 충장공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충효리란 이름은 장군과 그의 가족의 우국,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이름이고, 광주의 중심거리인 충장로는 장군의 시호이다.여기 빛고을 광주의 삶터를 일군 충효리의 옛 지명은 석저촌이고, 이곳에 장군의 쉼터였던 옛 집터가 있다. 정려비각은 마을 앞 길가에 있고, 세 그루의 왕버들나무가 마주 보고 있다.왕버들은 4월에 꽃이 피고 5월에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이곳 충효리 왕버들은 석저촌 사람들이 1580년 무렵에 마을의 상징으로 일송(一松), 일매(一梅), 오류(五柳)로 심은 것이다. 굳이 손가락 꼽아보지 않아도 장군이 열 살 무렵에 심어진 나무가 아닌가 싶다.세월과 함께 소나무와 매화는 사라지고, 왕버들도 세 그루만 남았으나, 이 왕버들이 가까이 거느리는 정자와 원림이 여럿이다. 창계천으로 내려가면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고, 냇가 건너 왼쪽 언덕의 식영정과 그 일가들, 오른쪽의 소쇄원 등이 그것이다.환벽당은 명종 임금 때 나주 목사를 지낸 김윤제가 지었다. 취가정은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인 김만식과 친족들이 지었다. 정자의 이름 취가정은 조선 중기의 문인 권필이 자신의 꿈에서 술에 취한 김덕령과 서로 시를 나누고 억울하게 죽은 장군의 혼을 달래기 위해 읊은 ‘취시가’에서 유래한다.식영정은 1560년 김성원이 그의 장인이자, 스승인 임억령을 위하여 서하당과 함께 지었다. 또 소쇄원은 조선 중종 임금 때 학자 양산보가 1519년 기묘사화에 스승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하기 위해 지은 별서정원이다.이들 정자와 정원 이야기는 식영정의 소나무에게 더 자세히 들어볼 생각이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9-2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만연사 전나무
    <만연사 전나무>   해는 눈이 부셔서 바라보기 어렵고, 짙푸른 바다는 깊어서 다 들여다볼 수 없다. 한 그루의 나무를 다 볼 수 없으니 바로 화순읍 동구리 179번지에 사는 진각국사 전나무이다.이 키다리 나무는 백두산에 가면 끝없이 펼쳐지는 숲에서 만날 수 있다, 1713년 1월, 종5품인 홍문관의 부교리 홍치중이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고 숙종 임금에게 보고했다."무산에서 어활강(두만강의 지류)을 건너 산 밑에 이르니 인가 하나 없는 넓은 땅이 나타났습니다. 구불구불한 험한 길을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 보니 산이 아니고 바로 들판이었습니다. 백두산과 어활강의 중간에는 삼나무(杉樹)가 하늘을 가리어 해를 분간할 수 없는 숲이 거의 300리에 달했습니다. 거기서 5리를 더 가서야 비로소 비석을 세운 곳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이 보고에 나오는 삼나무는 일본 삼나무가 아니라 전나무의 옛 이름이다.이렇듯 전나무는 백두산 부근의 고산지대를 비롯하여 동쪽으로는 시베리아를 거쳐 동유럽, 서쪽으로는 알래스카와 캐나다까지 추운 곳에서 더 잘 자라는 한대지방을 대표하는 나무이다.또 전나무는 백두산의 가문비나무, 잎갈나무와 어깨를 겨루면서, 환경변화에 적응력이 높아 한반도 남쪽 끝까지 내려와 그 큰 키를 자랑한다.전나무는 젓나무라고도 한다. 잣나무에 잣이 열리듯 ‘전나무의 어린 열매에서 흰 젓이 나오므로 젓나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훈몽자회’, ‘왜어유해’, ‘방언유석’ 등 옛 문헌에도 젓나무라 쓰여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전봇대처럼 보여 전봇대나무라고 부르기도 했으니, 이름이야 어떻든 오늘은 만연사 전나무를 보러 간다.이곳 만연사는 1208년(희종 4)에 선사 만연(萬淵)이 세운 집이다. 만연이 광주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다가 지금의 만연사 나한전이 있는 골짜기에서 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고 한다.십육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역사의 꿈을 꾸고 주위를 둘러보니 눈이 내려 온 누리를 덮었는데, 그가 누웠던 곳만은 눈이 녹아 김이 났다고 한다. 만연은 조계산으로 가는 걸 멈추고, 김이 나는 자리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면서 만연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이 만연사 전나무가 임진·정유의 왜란을 어떻게 견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집은 6·25에 전소되는 아픔을 치렀다고 한다. 또 여기 만연사의 동림암은 정약용이 젊은 시절에 학문을 익히던 곳이다. 부친이 화순 현감으로 부임하던 해에 함께 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명창 임방울도 이곳에서 피나는 연습으로 국창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그렇게 한눈에 다 볼 수 없는 만연사 일주문 앞의 전나무는 당시 조계산 수선사 주지로 있던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창건 기념으로 심었다고 한다. 손가락 계산으로도 나이가 800살에 이름을 알 수 있다.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무 꼭대기 부분이 잘려있고, 펼친 가지들도 생육이 수월하지 못해 보인다.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귓가에 새소리, 풀벌레 소리보다 더 큰 딱딱딱 소리가 들린다. 오색딱따구리다. 덩치가 큰 나무와 작은 딱따구리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 관계이리라. 전나무는 몸을 내주고 딱따구리는 해충을 잡아 앞으로도 많은 세월을 함께 쌓아갔으면 한다.전나무는 한대성 나무지만, 온대에도 적응하고, 다른 키 큰 나무처럼 뿌리가 약하지도 않으니, 우리 민족의 기상에 맞는 강인하고 늠름한 나무이다. 한 번쯤 만연사에 들려 전나무를 바라보며 세월의 무게와 삶의 깊이를 훌훌 털어도 좋고, 더 단단히 차곡차곡 채워도 좋으리라.<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9-16
  • 삶, 숨, 쉼터, 나무이야기/만귀정 여름 배롱
    <과학과 물질문명의 발달은 인공지능 기능을 갖춘 주택과 자동차, 각종 생활용품, 그리고 인간의 꿈인 우주여행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하지만 자연과 환경 훼손으로 인한 코로나 19, 돼지 열병, 조류인플루엔자 같은 감염병은 그 대가이다.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는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바로 우리의 삶, 숨, 쉼터는 그 자연이다. 작가 김 목의 나무 이야기는 바로 그 자연의 이야기이다. 매주 한 번씩 게재될 기획연재에 독자 여러분의 호응과 격려 바란다.>   <만귀정 여름 배롱> 꽃에 취해 쓰러졌다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꽃에 취해 쓰려졌다고 누가 비웃겠는가? 그저 한바탕 웃고 말 일이다. 그럼에도 진정 꽃에 취해 쓰러지면 평생에 경험하는 귀한 멋이고, 아니더라도 무슨 손해가 있을 것인가?아무튼, 앞말이 길었다. 그러니까 꽃에 취해 쓰러지는 곳이 있으니,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274-1번지의 서창 만귀정이다.서창은 광주의 서쪽 창고이니, 말 그대로 큰 곡식 창고가 있던 곳이다. 그 창고의 세곡을 실어나르던 배들이 들판의 젖줄인 극락강을 오갔다.또 ‘서창 만드리풍년제’는 7월 백중(음력 7월 15일) 무렵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마지막으로 김매기를 재현하는 놀이였다. 논 주인이 봄부터 수고한 농사꾼들을 위로하고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위한 오랜 전통의 축제였다,여기 만귀정의 역사는 흥성장씨 장창우(1704~1774)가 전북 남원에서 이곳 동하마을로 이주하며 시작된다. 장창우는 초가 정자를 지어 자신의 호를 따 만귀정이라 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으니, 세월이 흘러 장창우와 만귀정은 이야기로만 남았다.1934년이다. 7대 후손 장안섭이 나서서. 만귀정 옛터에 네모난 연못을 만들고 연못 안에 둥근 동산을 만들어 정자를 지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옛사람들의 우주관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따라 만든 별서정원이다.만귀정은 하나의 연못을 두고 하늘과 땅, 사람을 상징하듯 세 개의 정자가 나란히 있다. 제일 맏형인 만귀정과 아우들인 습향각, 묵암정사가 다리로 이어져 있다. 몇 해 전까지는 멋들어진 나무다리였는데, 안전문제인지 이제는 돌다리가 놓여있다. 이 돌다리 또한 세월이 흘러야 이끼가 끼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서 멋이 되리라.아무튼, 세 정자 중 가장 막내인 묵암정사는 송정 읍장이었던 장안섭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광산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서 지었다. 묵암은 장안섭의 호이다.연못 가운데의 정자는 습향각이다. 이름 그대로 ‘꽃향기가 깊이 스며드는’ 곳이다. 겨울이면 만발한 하얀 눈꽃, 이어받은 봄에는 흩날리는 하얀 벚꽃에 눈이 부시고, 여름에는 붉은 배롱과 연분홍 연꽃, 보랏빛 맥문동, 가을에는 붉은 상사화에 가슴이 뛰는 곳이다.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꽃향기에 취해 어찌 쓰러지지 않겠는가?그렇게 만귀정은 꽃대궐인 삶터요, 꽃향기에 숨 쉬는 숨터이고, 꽃에 취해 쉬는 쉼터이다.설령 습향각에서 꽃에 취해 다리가 후들거리더라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만귀정의 주인이 참 신비로운 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이다,만귀정 축대 밑에 네모반듯한 돌이 제단처럼 놓여있다. 들여다보면 앞면에는 취석(醉石), 뒷면에는 성석(醒石)이라 새겨져 있다. 다리를 건너갈 때는 꽃향기에 취해 ‘신선의 세계’로 가고 나올 때는 깨어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라는 뜻이다.절집이나 사당을 들어갈 때는 오른 쪽문, 나올 때는 왼쪽 문, 가운데 문은 신령이 다니는 문인 것처럼, 만귀정의 취석과 성석은 선계와 인간계, 이상과 현실의 가르침을 주는 돌이다. 그렇게 만귀정으로 돌아오면 마치 천상과 지상을 오가듯 선계 체험을 할 수 있다.하찮은 돌멩이라고 툭툭 발로 차는 사람이 아니라면, 만귀정의 여름꽃 배롱에 흠뻑 취해도 좋다. 만귀정의 여름 배롱꽃은 지친 삶과 숨, 쉼을 다시 일깨워주는 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9-09
  • 민중운동에 의한 대한제국 개혁 정부 수립
    1898년 9월 11일에 ‘김홍륙 독다사건(毒茶事件)’이 터졌다. 고종 독살 미수사건이었다. 고종과 황태자(후에 순종)는 저녁 식사를 양식으로 먹은 뒤 커피를 마셨다. 1896년 아관파천 시절부터 커피를 좋아한 고종은 커피 냄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한 모금을 입에 넣자마자 뱉었다.그런데 황태자는 그냥 몇 모금을 마셨다. 조금 있다가 황태자가 토하고 쓰러졌다. 궁중은 아수라장이 됐다.9월 12일에 고종은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경무청에 지시했다.14일에 법부대신 신기선이 아뢰었다.“방금 겸임 경무사 민영기가 ‘죄인을 신문하는 즈음에 종신유형 죄인 김홍륙이 죄인의 구술에서 나왔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김홍륙을 잡아다 심문해야 하는데, 특지(特旨)로 인한 유배죄인이므로 감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삼가 아룁니다.” 이러자 고종은 “잡아다 심문하라”고 명령했다. 김홍륙은 함경도 사람으로 조실부모하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부 생활을 하면서 러시아어를 익혔다. 그는 1895년에 이범진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러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러시아어 통역관이 돼 출세의 기회를 잡았다. 김홍륙은 1896년 아관파천 시절에는 비서원 승으로 근무하면서 고종의 전담 통역관이 됐다.이리하여 김홍륙은 1896년 11월 15일에 학부협판(차관)으로 승진했고, 1897년 12월 18일에는 귀족원 경(卿)에 임용됐다.만민공동회가 개최된 1898년 3월 10일 다음 날인 3월 11일에 고종은 김홍륙을 한성부 판윤에 임용했다.그런데 김홍륙은 고종의 총애와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탐해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그를 규탄하는 방서(榜書)가 나붙기도 했다.8월 23일에 고종은 김홍륙이 탐오한 것을 추궁해 유배하라고 명했고, 8월 25일에 김홍륙은 흑산도로 종신 유배를 갔다. 이러자 김홍륙은 흑산도로 떠나는 날에 고종 독살 음모를 했다.“김홍륙은 유배지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한 냥의 아편을 전선사(典膳司)의 책임자 공홍식에게 주면서 수라상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했다. 이후 공홍식이 김종화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藥物)을 고종에게 올리는 차(커피)에 섞어서 올리면 은(銀)1000원(元)을 주겠다고 말했다.김종화는 일찍이 경운궁 보현당 고직(普賢堂 庫直 창고지기)으로서 서양 요리를 만들었는데, 요리를 잘하지 못해 내쫓긴 자였다. 김종화는 즉시 아편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됐다.”(고종실록 1898년 9월 12일)김홍륙 독다사건이 일어난 지 1주일이 지난 9월 18일에 현학표 등은 역적을 엄중히 다스리도록 연좌(連坐)와 노륙법을 부활하라고 상소하였다. 연좌제는 죄인뿐만 아니라 그 아내와 아들 그리고 친족까지도 연대적으로 처벌하는 제도이고, 노륙법은 죄인의 아내와 아들도 참형을 적용시키는 법으로 이 법들은 이미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9월 23일에 의관 서상우 등이 중추원 회의에서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을 주장하였다. 이에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신기선 이하 의관 34명이 동조하여 정부에 정식으로 요구했다. 9월 24일에는 서상우를 소두(疏頭)로 하여 상소까지 하였다.  그런데 경무사 민영기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부녀자와 무고한 사람들까지 무참히 고문하였고, 고문을 받던 공홍식은 자살을 시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자 독립협회가 반발하고 나섰다. 비록 김홍륙 같은 역적이라도 법률에 의해 처벌되어야 하고 고문은 용납될 수 없으며, 연좌와 노륙법 부활은 절대 불가라고 주장한 것이다. 9월 25일에 독립협회는 반역사건을 규탄하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인에 대한 고문과 이미 폐지된 노륙법과 연좌법의 부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9월 26일에 독립협회는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신기선에게 공한을 보내 의장과 서명한 의관의 사직을 요구하였다. 9월 27일에 신기선은 갑오개혁이후 역적을 다루는 데 교수형만 적용시키니 역변(逆變)이 그치지 않아 노륙법을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고, 또 대신의 진퇴는 협회가 말할 바가 못 된다고 답신하였다.10월 2일에 독립협회는 중추원 앞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대표를 뽑아 신기선에게 보내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의 부당성을 논하고 신기선의 사직을 권고하였다. 신기선이 불응하자 독립협회는 신기선을 고등재판소에 고발하였다. 고발장을 접수한 고등재판소는 독립협회에 회답하였다. “법부대신과 협판은 칙임관이므로 그의 구금에는 먼저 법부대신이 황제에게 상주한 후에야 구금할 수 있는데 법부대신 신기선 자신이 피고이므로 상주할 사람이 없어 기술적으로 이를 처리하기 어렵다.” 이러자 10월 6일에 독립협회는 고등재판소 앞에서 다시 민중대회를 열어 고종에게 상소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 의정부 의정 심순택이 고종에게 법부대신 신기선을 면직(免職)토록  아뢰었다. 이에 고종은 “옥사(獄事)가 한창 진행 중이므로 일에 서투른 사람에게 맡기기가 어렵다. 특별히 용서하고 한 달분 녹봉을 감하라.”고 하였다. 고종이 신기선에게 1개월 감봉 조치만 내리자, 독립협회는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10월 7일에 독립협회는 거듭 상소를 올려 신기선등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종은 도리어 독립협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법부와 중추원을 두둔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더욱 강경해졌다. 이들은 법부대신 신기선, 이재순·민영기 등 일곱 대신의 파면 운동을 전개하였다. 10월 10일에 독립협회의 윤치호 등은 경운궁 앞에서 농성을 계속하면서 신기선 등 일곱 대신의 파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날 반역음모죄인 김홍륙·공홍식·김종화 등은 모두 교수형(絞首刑)에, 김영기·엄순석·김연흥·김흥길·강흥근·김재택·조한규·김재순 등은 태형(笞刑) 50대에, 김홍륙의 아내 김소사는 태형 100대에 유배 3년에 처해졌다. 그런데 외국 공사들도 러시아 공사 마튜닌을 중심으로 김홍륙독다사건의 처리에 공동으로 항의하기로 하고 각 공사관별로 항의 공문을 외부(外部)에 보냈다.  일본 공사도 ‘김홍륙등 처형상황에 대한 반성 촉구’ 공문을 외부대신에게 보냈는데 이를 읽어보자. “서신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번에 궁내(宮內) 독극물 사건의 피고 김홍륙 등에 대한 재판과 형의 집행이 지극히 비밀리에 신속하게 시행된 것은 단적으로 말해 부정한 사정이 존재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김홍륙의 시체를 가두(街頭)에 드러내어 무법한 군중으로 하여금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만행을 자행하게 한 것은 인도(人道)에 위배되는 행위라 하여 세간에서 비난받고 있습니다.이것이 사실이라면 귀국 재판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또 빠르고 신속하게 문명의 단계에 도달하려는 귀국의 체면을 훼손시키는 것으로서, 본 대사관은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법사(法司)의 책임과 인도의 통의(通義)에 비추어 소감을 말씀드려 귀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고자 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3권) 이러자 고종은 법부대신 신기선과 판사 이인우를 파면시키고 의정부 찬정 서정순을 법부대신으로 임명했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11일)  이 날 농성 중인 의관 윤치호가 다시 심순택, 윤용선 등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10월 11일에도 독립협회는 경운궁 앞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종로 시전 상인들도 모두 철시하고 농성에 가담하였다. 농성 중인 윤치호는 상소하여 심순택, 신기선 등 일곱 대신의 파면을 거듭 촉구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집단농성에 불쾌했다. 10월 12일에 고종은 소두(疏頭) 윤치호를 중하게 견책하도록 명령했다.하지만 이날은 소학교(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참여하여 농성 참가자는 1만 여명으로 늘어났다. 경성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궁지에 몰린 고종은 의정부 찬정 박정양을 의정부 의정 서리로, 조병호를 탁지부 대신으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으로 임용하였다. 결국 심순택, 신기선 등 일곱 대신은 파면되었고,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도 사라졌다.10월 12일 저녁에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 각국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에서 민중운동에 의해 개혁 정부가 수립된 사실에 놀랐다.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평화적 혁명’이 일어났다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할 정도였다.“이 도시는 지금 막 집중적 열광의 시기를 통과했음을 보고함. 하나의 평화적 혁명이 일어남. 군중들의 요구에 의하여 거의 전면적 개각이 이루어짐. 이러한 내각의 변동은 1894년 일본이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했을 때 일어난 일이 있었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1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탐구당, 2003, p 353)
    • 기획.연재
    2021-09-07
  • 삶, 숨, 쉼터, 나무이야기/명옥헌 배롱나무
      피어나는 꽃치고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다. 하지만 지는 꽃이 아름다움의 칭송을 얻기는 힘들다. 백공작이라는 백목련도 질 때의 모습은 별로이다. 화무십일홍의 비유가 괜스레 생겼을까? 그럼에도 봄날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의 정취는 아련한 그리움이다. 또 동백꽃은 어떠한가? 이른 봄 눈 위에 떨어져서도 시들지 않은 모습의 붉은 꽃은 핏빛 사랑이다. 또 있다. 우리나라에 고려 말 무렵에 들어온 배롱꽃은 떨어져서 더 아름답다. 베롱꽃의 백일홍이란 이름은 백일동안 핀다고 해서 얻은 이름인데, 꽃이 다 질 때쯤 벼가 여물어 쌀밥나무라고도 한다. 또 살살 문지르면 바람이 없어도 가지가 흔들려서 간지럼나무라고도 하니, 파양화(怕痒花), 파양수(怕癢樹)란 이름이 그것이다. 후자탈(猴刺脫)은 나무껍질이 매끈해 원숭이도 미끄러진다 하여 얻은 이름이고 또 만당홍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매끈하고 깨끗한 수피 덕분에 청렴결백한 선비의 모습과 비슷하여 정자나 사당, 향교, 절집, 무덤가에 심었다. 이 배롱꽃의 한자는 자미화이다. 당나라 현종이 이 배롱꽃을 좋아하였다. 궁궐의 중서성, 상서성, 문하성에 배롱을 심고 자신이 업무를 보던 중서성을 ‘자미성’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색 백일홍을 자미(紫薇), 흰꽃을 백미(白薇) 또는 은미(銀薇), 붉은색을 홍미(紅薇), 비취색을 취미(翠薇)라 했다. 이중 취미와 은미를 본다면 한 해 배롱꽃을 다 봤다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희안은 ‘비단같이 아름답고 노을처럼 고운 홍미가 뜰을 비추며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한다’고 했다. 성삼문은 ‘어제저녁 한 송이 지고(昨夕一花衰), 오늘 아침 한 송이 피어(今朝一花開),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相看一百日), 내 너를 대하며 술잔을 들고 싶다(對爾好衡盃)’고 했다. 백일홍의 꽃잎과 꽃받침이 모두 여섯 장씩이니, 사육신의 숫자와 같음이 또 경이롭다. 신말주의 10대손으로 조선 후기 학자인 신경준은 순원화혜잡설(淳園花卉雜設)에서 ‘오늘 하나의 꽃이 피고 내일 하나의 꽃이 피며 먼저 핀 꽃이 지려 할 때 그 뒤의 꽃이 이어서 피어난다. 많고 많은 꽃잎을 가지고 하루하루의 공을 나누었으니 어찌 쉽게 다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렇게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뜨거운 여름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꽃이 배롱꽃이다. 이 배롱꽃이 아름다운 곳이 여러 곳이다. 그중 먼저 가볼 곳이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번지의 명옥헌이다. 오희도(1583-1623)는 1602년 사마시, 1623년(인조1) 알성문과에 합격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이곳 명옥헌은 그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집을 짓고, 명옥헌이라 했다. 이곳 장계정은 오이정의 호와 같다. 명옥헌의 배롱꽃은 장계정 앞의 연못과 어울려 더 아름답다. 나무에 피어있을 때는 물 위의 그림자이고 떨어져 물 위에 있을 때는 나무의 그림자이니, 명옥헌 배롱꽃은 나무에 있거나 물 위에 있거나 모습이 하나이다. 삶도 죽음도 아름다운 모습이니, 이 세상에 그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또 어디 있겠는가? 명옥헌 배롱꽃을 보지 않고 배롱꽃을 봤다고 하면 웃음거리이다. 뜨거운 여름, 불볕더위를 잊을 수 있는 꽃이 또 붉은꽃 배롱꽃이니 이열치열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2021년 8월 염천, 명옥헌에서는 만개한 배롱꽃말고도 청아한 연꽃을 덤으로 볼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는 또 이런 때 쓰는 말이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9-02
  • 사람 사이 상식이야기/당부 씩이나? 드리기 씩이나?
    돌림병이 창궐하면서 두드러진 것이 있습니다. 방역 담당 공무원들이 언론에 자주 나오더군요. 먼저 우리나라에 공무원이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런데 직책 명칭뿐 아니라 말하는 내용까지 베낀 듯 비슷해 실망스럽더군요. 암기할 정도가 된 방역수칙을 쏟아내고, ‘확산세가 심각하다’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병상 수가 부족하다’ ‘최대한 자제해 달라’ 따위를, 지치지도 않고 앵무새나 녹음기처럼 떠듭니다.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이런 ‘있으나마나’한 공무원들 행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 단어 즉 ‘당부(當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당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단단히 부탁함. 또는 그런 부탁’이라고 나오지요.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당연(當然)히 해야 할 것을 부탁한다’ 정도 되겠습니다. 즉 어느 정도 ‘강제’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지요. 누군가에게 뭘 부탁할 때는, 그 대상자가 시행 여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공무원(최고위급부터!)이란 자들이 국민들을 향해 ‘당연히’ 이렇게 하라고 말(지시·명령·하달)하는 것이 괜찮겠습니까? 더구나 ‘드리기’까지 끼워 넣어서 말이지요!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면, 그 내용을 법적 근거에 따라 고지하면 됩니다. 지금은 갇혀 있는 신세인 최고 권력자가 지난 날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당부드립니다’라고 ‘당연한 듯’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참으로 절망스러웠던 것은, 그 많은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그에 대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어른이 애 머리 쓰다듬으면서 “이리저리 해라 응?”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데도 “끽”소리도 하지 않은(못한?) 것입니다. 아예 아무 것도 몰랐건, 모욕에 꿈틀도 못했건, 호천망극·황공무지라고 받아들였건, 심각한 문제 아닌가요?당부는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당연히 해야 할 것을 요구할 때 쓰는 말입니다. 공무원이 국민들에게, 식당 주인이 고객들에게,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공인이 지지자들에게 “내지를” 말이 아니지요. ‘부탁·요청합니다’ 정도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해주세요’면 최선이겠지요. 높으신 나으리들! 내용도 그렇지만 표현 방식도 엄밀히 살피시기를 ‘신신당부’드리노라! 
    • 기획.연재
    2021-08-31
  • “소상공인 코로나19 피해 회복 100조 프로젝트 가동”
    ▲대선 출마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 - 문재인 정권의 무능과 위선, 조국과 윤미향의 내로남불, 집권 586세력의 횡포를 보며 이들에게 대한민국이 더 이상 유린되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586의 델타변이 이재명의 지지율 1위 현상을 목격하고 586 백신인 원희룡이 나서서 반드시 이재명의 집권을 막고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국민의힘 당내에서 아직까지는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지지율 정체를 돌파할 복안 있나. - 이제 곧 경선버스가 출발한다. 앞으로 치열한 검증과 토론을 거치며 각 후보들의 지지율도 크게 요동칠 것이다. 지금까지는 국민들이 문재인 정권과 누가 잘 싸웠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윤석열, 최재형 후보의 지지율이 조금 높게 나오고 있지만, 결국에 누가 문재인보다 더 잘 할 것이냐, 누가 이재명 지사와 맞붙어 이길 수 있는 사람인가 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될 것이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다. 조급해 하지 않고, 우리당의 경선 레이스를 생산적인 정책 비전 경쟁으로 이끌겠다. 찬바람 불고 경선이 본격화되면 준비된 후보 원희룡의 진가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의 경선과정에 막말주의보가 내려진 상황이다. 국민의힘 경선 과정에서는 어떨 것이라고 보고 있나. - 여야 가릴 것 없이 이번 선거는 역대 최고의 네거티브 선거가 될 것이다. 벌써부터 각 후보사이에 막말, 말꼬투리 잡기, 상대방을 헐뜯는 네거티브 등이 시작되고 있다. 막말이라는 것이 별거 아니다. 누군가와 논쟁할 때는 논점에 대해서 토론해야 한다. 약점을 잡아 비난하고 공격하는 건 토론이 아니라 싸우자는 얘기다. 지금 민주당의 상황을 보라.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보다 ‘문비어천가’만 부르기 바쁘고, 서로 헐뜯고 약점을 잡아 공격하고 몰아세우는 전형적인 구태정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제 곧 우리당도 경선이 시작된다. 민주당의 경선을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이다. 치열한 검증과 토론을 진행하되, 생산적인 정책과 비전 경쟁이 중심이 되도록 저부터 노력할 것이다. ▲최근 이준석 당 대표와 벌였던 녹취록 공방은 일단락 된것 같다. 어떤 의도였나? 당 선관위도 곧 출범하는데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 우선 공정 경선을 지키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기는 하나, 그것이 당내 분란으로 비춰지고 그 과정에서 당 대표와 후보간에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저도 후보 중 한사람으로서 국민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준석 대표가 직접 공정경선 잘 지켜가겠다 약속하고 사과까지 한 일이니 이 정도면 잘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선관위원장도 결정되었으니, 저부터 심기일전해서 적극 협력하고 공정경선을 통해 치열한 경선과 원팀 정신으로 정권교체 이룰 수 있도록 겸허한 자세로 임하겠다. 국민들 보시기에 공정하면서도 치열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정책 대안으로 넘쳐나는 경선 과정이 될 수 있도록 잘 관리해 주시리라 믿는다. ▲대선 후보로서 어필하고 싶은 자신의 브랜드가 있다면? 대표공약은? - 원희룡의 핵심 브랜드는 ‘국가찬스’다. 조국으로 대표되는 ‘부모찬스’ ‘기득권 찬스’를 갖지 못한 국민들에게 국가찬스를 드리겠다. 코로나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회복을 돕는 ‘담대한 회복 100조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 집권 직후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을 통해 50조원을 마련해 손실보상에 사용하고 2차 년도 이후는 통상적인 예산 배분에서 해당 기금 확충에 우선순위를 두는 방식을 사용한다. 담대한 회복프로젝트는 단순히 생존회복에만 그치지 않고, 자영업의 구조전환과 생산성 혁신으로 이어지도록, 낙후 업종 전환, 디지털 전환 경쟁력 강화, 대형화를 통한 경쟁력 확보, 종사자들의 사회보장과 교육 강화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물론 추가 세입 발생시 이 기금에 대한 국가부채를 최우선 변제해 재정건전성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도 함께 병행하는 계획이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잘한 일은 꼽을 만한 게 별로 없고, 잘못한 일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문재인 정부는 공정을 약속했지만 배신했다. 혁신이 아니라 퇴보를 가져왔다. 자유를 억압하고 미래를 파괴했다. 국민 편가르기와 내로남불이 도를 넘었다. 무능에도 사과를 모른다. 소주성으로 대표되는 경제정책의 실패, 부동산 정책의 실패, 백신 확보 실패 등 줄줄이 계속되는 실정에도 ‘적폐’ 타령뿐이다. 문재인 정부의 모든 것을 되돌려 놓고, 우리 사회 모순의 핵심인 586 기득권을 해체해 온전한 나라를 만들고, 30년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다음 세대로 전해주기 위해, 원희룡이 정권교체의 선봉에 서겠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중 부동산 정책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원희룡표 부동산 정책’을 소개해 달라. - 문재인 정부가 다주택자를 때려잡고, 세금 올리고, 온갖 규제를 다 만들었지만 과연 집값이 잡혔나? 집값의 안정화는 ‘원하는 곳에, 원하는 형태의 내 집’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 때 가능하다. 저는 부동산 1호 공약으로 ‘반반주택’을 제시했다. 반반주택은 무주택자가 집을 살 때 그 가격의 절반을 정부가 지분투자 해주는 제도다. 희망하는 곳에 집을 사고, 팔고 싶을 때 팔 수 있는 선택권이 전적으로 거주자에게 있다. 정부가 50%를 투자할 때 직접 지원이 아니라 국가가 보증하는 SPC를 세워 은행에서 빌려 지원하는 방식을 사용하면 대략 7조로 20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우선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인 9억원 이하 주택에 대해 무주택 신혼부부들을 대상으로 하고 대상을 점차 무주택자 전체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제주지사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정책은. - 중국 자본으로부터 제주도 땅을 지킨 일이다. 투자영주권 제도를 악용해 제주도에 땅투기를 하는 중국 투기자본을 사실상 거의 몰아냈다. 도지사로 취임 당시 1년에 500명씩 발행되던 투자영주권이 2020년에는 단 2건으로 거의 제로가 됐다. 그 외에도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찾고 싶은 핫플레이스로 만든 것, 제주도를 제주도를 전기차 수소차의 천국, 탄소제로라는 미래를 준비하는 곳으로 만든 것이 가장 보람있는 성과들이다. ▲후보는 과거부터 호남과도 인연이 깊다고 들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 - 호남과의 첫 인연은 대학교 1학년 때 5·18민주묘지 참배였다. 당시는 ‘광주사태’라고 했을 만큼,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고 우리 사회적 인식도 다소 왜곡돼 있었다. 저 또한 5·18묘지 참배 이전에는 그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참배 이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국회의원 초선 때 만든 수요모임 소속 남경필, 정병국, 이성권 등과 함께 호남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여수엑스포 준비, 광양항 개발, 영암 F1 코리아 그랑프리 등의 사업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한나라당 내에서 힘을 모았다. 2005년 12월 호남에 기록적인 폭설을 기록했을 때, 12월23일~31일까지 일주일 넘게 호남에서 지내며 호남 당직자들과 함께 재해복구 자원봉사를 했다. 당시 여야 정치인들이 폭설 현장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 분들과 다른 제 진정성을 지켜본 많은 분들이 격려와 응원을 해주셨던 일이 기억난다. 대학교 1학년, 5·18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원희룡도 없었을 것이다. 제주가 저에게 어머니라면, 호남은 아버지와 같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대선 후보로서 호남지역 유권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번 대선은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기로가 될 선거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항상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호남분들이 지혜롭고 용감한 선택을 해주실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저 원희룡이 반드시 정권교체를 완성하고, 문재인 정부가 망쳐놓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약속을 드리겠다. 힘든 시기 잘 이겨내시고 저 원희룡이 늘 호남과 함께 하겠다.
    • 기획.연재
    2021-08-2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진제마을 당산나무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 177-9번지에 있는 느티나무 이름은 진제마을 당산나무이다. 수령 200살쯤으로 지난 세월 진제와 원제, 두 마을을 보살피고 지켜온 나무이다. 지금은 아파트 숲, 아스콘길에 쌓여 삶, 숨, 쉼터가 불편하지만, 정월 대보름이면 소박하나마 당산제를 받으니 외롭지 않은 나무이다.진제나 원제는 마을 앞 연꽃방죽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 광산 노씨가 터를 잡고, 뒤이어 밀양 박씨, 청주 한씨가 들어와 방죽에 제를 쌓고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다복다복 사람이 들어와 사니 큰 마을이 되어 면소재지가 되었다. 그러다 마을 앞에 있던 광산군 효지면사무소가 6·25 때 인민군의 방화로 소실되었고, 그 뒤 금당산 아래로 옮겨갔다.1862년에 한필오, 한필룡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받아 1864년에 세운 청주 한씨 쌍효비와 제실인 효우재는 도시화에 밀려 화순군 도곡면 천태로 옮겨갔다. 장성 비아와 나주 산포에서 흙을 가져와 가마굴 두 개에서 장독인 옹기를 구워 옹기촌, 점촌이라고도 했던 원제 마을은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구나’가 되었다.원제마을의 옹기를 시장에 내다 팔려면 제석산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그 고개를 조시미 고개, 부처울길이라고 했다. 조시미 고개는 산도적을 조심하라는 말이고, 부처울길은 고개 넘어 부처님을 우러러 모신 절이 있어서이다.이제 그 이름들 대신 아파트가 들어선 원제마을 앞은 남구다목적체육관이 있고, 연꽃방죽이 있던 곳에는 ‘김병내 구청장님 감사합니다’라는 현수막이 여럿 걸려있고, 남구복합운동장 공사가 한창이다.또 진제마을 앞에는 국제테니스경기장이 있어 밤에도 불을 훤히 밝히고 테니스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로만 보면 진제마을 당산나무는 나무로서는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참으로 영험한 나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살이에 어찌 희로애락이 함께 하지 않을까? 1980년 5월 24일 12시 30분경이다.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진압하던 계엄군의 총에 진월제 연꽃방죽에서 물놀이 하던 전남중 1학년 방광범이 죽었다. 잠시 뒤 13시에는 형이 사준 고무신을 자랑하려고 고샅으로 나갔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가 역시 총에 맞아 죽었다.이때는 누구라 할 것 없이 겪은 아픔이지만, 진제마을 당산나무는 6·25 때 활활 불꽃으로 사라지던 면사무소를 볼 때처럼 말대신 눈물을 펑펑 흘렸을 것이다. 예전에 이 진제마을 당산나무 앞에는 당산이란 돌비와 함께 경로탑이 있었다.‘무등산 정기 받아/ 우리 조상 터를 닦고/ 오륜지도 본을 끼쳐/ 후손에게 전하더라./ 갸륵하시다 높은 그 얼/ 이어받아 3백년/ 아! 진제여/ 우리의 긍지여!’하지만 경로탑의 글귀도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이따금 가까이 사는 노인들이 쉬어가지만, 이제 당산나무는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한다. 오가는 자동차의 매연, 빙 둘러 덮어버린 아스콘길 때문에 삶, 숨, 쉼이 쉽지가 않다.한 아름 아카시나무는 꿀을 한 말 내주고, 플라타너스 한 그루는 15평형 에어컨 5대가 5시간 일하는 것이고, 느티나무 한 그루의 산소는 어른 7명이 1년간 숨 쉬는 양이라고 한다.나무가 살아야 사람도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네 삶, 숨, 쉼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지, 땅에서 쑥 솟는지, 나무를 보고 깨달을 일이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8-26
  • 사람 사이 상식이야기/대충 하자고요?
      이미 말씀드린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난(欄) 명칭의 상조(相助)를 상식(常識)으로 바꿨습니다. 상조가 삶(LIFE) 자체를 대상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차원에서 큰 차이는 없겠어요.물 한 잔에도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담겨 있다고 하니, 어지럽게 궁리하고 부산하게 떠도는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이 꼭 나쁘고 없어야 할 것은 아니리라 자위(自慰)해 봅니다.최근 우리 사회 아니 전 세계의 가장 핵심 사안이라고 할 돌림병에서 시작하지요. 인류 역사를 질병의 영향력과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보기도 합니다만, 이번 코로나19는 유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과거의 페스트(흑사병)나 독감 등 유행은 전 세계가 아니라 ‘일부’였지요. 아마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 등장한 이후 가장 ‘보편적’으로 겪는 상황일 것입니다. ‘상식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말머리를 돌림병으로 한 이유이지요.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방역지침이 나왔습니다. 마스크 쓰기부터 손 씻기·거리 두기까지, 국민 모두가 유치원 아이 수준으로 균일화됐지요. 그러나 다들 워낙 ‘겁에 질려’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저 헝겊 꼴 면한 마스크를 비싸게(!) 배급처럼 받아도 감지덕지하지 않았나요?그런데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글 씀씀이’이지요. 국어 자체를 심각하게 오용 혹은 훼손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 한 예가 전염을 막아야 하니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라면서 내세운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라는 표어예요. 국어 사용과 관련한 명백한 오류입니다. 저 표현은 ‘거리’와 ‘마음’을 상대 개념으로 사용했지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써야 할 개념을 마음과 대비되는 것으로 쓴 것입니다. 저 표현을 만들고, 쓰도록 용인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쏟아낸 ‘것’들은 “‘(몸의) 거리는 멀어지게 하되 마음은 가깝게 유지하자’라는 뜻”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아마 그랬겠지요.그러나 말과 글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무인도에서, 자기 혼자뿐이라면, 무엇을 생각하고 뭐라고 말하고 어떻게 써도 괜찮겠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과 관련될 때는 일정한 규칙(문법 등)이 필요하지요.더구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무(公務)라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작은 일을 꼬치꼬치 따진다고요?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고,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빠져 큰 둑이 무너지는 것은 상관하지 않아야겠습니까? 저 말은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 정도면 뜻이 분명히 전해졌을 것입니다. 더 좋게는, 저 따위 미련하고 모자란 ‘소리’ 떠들지 않고 그냥 ‘거리두기!’라고 하면 됐겠지요.지난해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하면서 기념 주화를 발행했는데요,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주화에 들어간 문구(文句)에 쉼표(영국에서는 Oxford Comma)를 넣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었지요. 문제를 처음 제기한 소설가 필립 풀먼(Philip Pullman)은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주화 발행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로서도 자기 나라 말 사용과 관련해 쉽사리 결론 내지 못하는 사안인 것 같은데요, 중요한 것은 문장 부호 하나의 사용 여부가 아니라고 봅니다.아무리 작은 것(쉼표!)이라도 ‘대충, 얼렁뚱땅, 적당히, 뭐 그럴 수도 있어, 어지간히 하지’ 이런 방식은 용납할 수 없다는 치열한 문제의식, 마냥 부럽네요.주성식/금호라이프 홍보부장 sesank@naver.com  
    • 기획.연재
    202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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