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7-07 (목)

기획.연재
Home >  기획.연재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국내 중국 보물, 활용 방안 찾자!”
    민종기 한중고미술전승진흥원장 중국 황실도자기 가치 인정 판결 “작지만 중요한 의미”고흥군에 계약 사항 이행 촉구 “심적·물적 피해 엄청나”“해외 유출 우리 문화재와 교환·전문박물관 건립 추진”  전문가들 “국보급 유물, 문화·관광자원 활용 가치 크다” 대담=주성식 선임기자최근 국내 고미술 관련 분야에 큰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광주고법(제2민사부)이 “고흥군과 국가는 민종기 한중고미술전승진흥원장에게 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이후 두드러지는 상황이다.(본보 2022년 6월 20일자 1면 보도)고미술 전문가 등 관계자들은 소송 결과를 반기고 있다. 민 원장은 “중국 공적 기관에 소속된 최고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진품, 가액 약 7억원)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아쉽다”면서도 “국내에 있는 황실 도자기 등 중국 유물이 음해와 시비에서 벗어난 것은 중요한 진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민종기 원장은 2015년 고흥군의 제안으로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 중국 황실 도자기를 비롯한 고대 유물 4000여 점을 제공(임대차)했다. 고흥군은 해당 유물에 대해 ‘공적 감정’을 두 번(감정비 1억 원)이나 실시했다. 그 결과 290점이 진품으로 판명됐고, 그 가운데 233점을 1차 전시물로 확정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고흥 경찰이 직접 감정한다며 해당 유물 전체를 압수했다. 지방자치단체의 공적 감정(결과)을 전면 부정한 것이다. 이후 민 원장의 압수물환부재항고(인용)·경찰의 유물 파손·손해배상청구와 이번 2심 판결까지 지난(至難)한 과정이 이어졌다.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이 민 원장 본인과 그동안의 사정을 아는 주변의 판단이다. 민종기 원장은 이번 판결을 출발점으로 삼아,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고 실천이 합리적으로 이뤄지는 넓은 광장으로 나가려고 한다. 반평생 진력해 인연을 맺은, 무진장한 보물을 제대로 활용하는 데 남은 반평생을 바치려고 한다. 중국 황실 도자기를 비롯해 수만 점 보물들이 제 값을 하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민종기 원장을 만났다.-승소 판결에 감회가 적지 않겠다.만단(萬端)의 소회(所懷)를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지난 7년여 세월의 아픔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지역과 나라가 좋아지는 데 기여하겠다는 뜻이 폄훼됐을 뿐 아니라, 주무 기관(고흥군 박물관)이 시행한 공적 감정을 다른 기관(고흥 경찰)이 짓밟아, 큰 의미가 있는 박물관 전시계획이 좌절됐다, 이는 명백한 월권행위다. 경찰의 행태도 그렇지만, 고흥군의 대응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한 개인과 문화유산 임대차계약을 맺은 고흥군은, 임대인뿐 아니라 군민을 기만하고 배신한 것 아닌가? 자신들의 행위(계약 및 공적 감정)에 대해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짧지 않은 동안 내 마음은 숯덩이처럼 타버렸다.그러나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의 사법제도가 엄존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이제 회의(懷疑)와 주저(躊躇)를 털고 일어나, 내 뜻을 펼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황실 도자기 등 중국 고대 유물에 대해 알려달라.가끔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지는 것처럼 중국 고대 유물은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 명(明)나라 때의 작은 계항배(鷄缸杯) 찻잔 하나가 수백억 원에 거래되지 않던가. 그런 기물이 국내에 헤아릴 수 없게 많이 들어와 있다. 그런데 일부 초보자들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보물급 유물이 국내에 그렇게 많이 있을 수 있나?’라며 전부 가짜라고 단정한다. 한 마디로 무지와 편견과 아집의 결과다.중국은 국토만 한반도의 50배 이상이고, 기록된 역사만 3000년이 넘는다. 여러 왕조(王朝)가 명멸(明滅)했고, 주변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접했다. 그 과정에 많은 중국 유물이 해외에 전해졌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서구 열강의 약탈 대상이었다. 해외에 중국 유물이 많은 이유 중 하나다. 최근에는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도로·철도 건설, 택지·공업용지 조성 등 개발 과정에 출토된 유물이 질량(質量) 면에서 엄청나다. 황제 등 권력자들 무덤의 부장품이다. 한 분묘에서 도자기 2만여 점이 나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 유물들이 중국 법령이 정비되지 않은 시기에 해외로 빠져나갔고, 국내에도 대량 유입됐다, 지정학·역사적 밀접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최대 보유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왜 ‘가짜 시비’가 그치지 않는 것인가?중국의 고유한 매장문화나 (부장) 출토품 그리고 중국 황실도자기의 특징에 대해 무지한 데서 초래된 현상이다.중국 청나라 황실 유물 가운데 법랑채(琺瑯彩)는 마치 어제 만든 신품 같다. 전래품이 아니고 최근에 출토된 유물은 더욱 그렇다.그동안 크리스티, 소더비 등 국제적 경매회사는 이런 법랑채 도자기를 수십억~수백억 원에 팔았다. 국내에서는 최상품 도자기에 대해 ‘진짜라면 값이 얼만데? 볼 것도 없이 가짜야!’라며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이번 판결의 대상인 기물도 중국 공적기관(문화유산보호연구원)이 ‘진품, 평가액 10억여 원’으로 감정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황실도자기 진품을 한 번 본 적도 없는 초보자들이 가짜라며 떠들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부류들이 음해·모함한 것이 ‘가짜 시비’의 실상이다. 경찰은 그들의 말만 듣고 박물관 수장고까지 들어가 가짜를 찾는다고 하다가 파손사고를 일으킨 것이다.희귀한 고대 유물은 오직 세월만이 만들 수 있는 징표들이 있다, 많이 보고, 만지고, 직접 소장해봐야 알 수 있는 영역이다. 국내에서도 공부·연구하는 애호가가 많아졌고, 전문가 수준인 분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차츰 합리적인 토론과 합의의 장(場)이 만들어질 것이다.- 중국 기물인 만큼 중국 전문가가 감정하면 될 텐데?그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중국은 전문가급 감식안(鑑識眼)을 가진 소장가만 8000만 명이다. 또 중앙정부부터 각급 지역까지 수없이 많은 박물관·미술관을 보유·운영하고 있다. 그들이 소장할 유물을 구입하는 예산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진위(眞僞)·가격 감정에 각종 이권이 개입한다. 고대 유물과 관련해 중국에서 공적 영역에 속한 이들을 관방(官坊)이라고 부르는데, 수십 년 동안 중국의 관련 분야를 농단(壟斷)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 유물이 대부분 가짜라고 감정하는 부류들이다. 그 폐해를 지적하면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쪽을 국보방(國寶坊)이라고 한다. 능력 있고 양심적인 학자들, 옛 유물 관련 역사와 기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수장가들이 중심이다. 국보방 측은 관방들의 ‘엉터리 감정’으로 인해 보물급 유물들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시위를 벌이는 등의 활동을 통해 국가에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리는 경우 어떻게 되나?그 점이 문제고 또한 우리에게 기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벌어진 천경자 ‘미인도’ 사건을 되돌이켜 보자.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이 진품이라며 공식 복제본까지 만들어 유통시켰는데, 정작 작가는 자기 작품이 아니라고 밝혔다. 현대미술관은 진품이라고 주장했고, 조사 의뢰를 받은 한국화랑협회는 “대체적으로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답변했다. 해당 작품은 1999년 검거된 고서화 위조범이 자신이 위조했다고 자백한 데다, 2016년에는 프랑스 뤼미에르 감정팀이 위작이라고 발표했는데도 ‘진품인 것’으로 돼 있다.이것은 고대 유물이나 희귀 예술품의 진위와 가치를 판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세계적 경매회사들도 가끔 몇백억 원 대 작품의 감정에 실수하기도 한다. 나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우리나라가 희귀 고대유물·예술품 등 귀중품에 대한 ‘공적 감정체계’를 만드는 데 착수하기를 기대한다. 사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공적 기구 등 법적 감정 체제를 갖고 있지 않다. 국가가 주도해 공인 제도를 확립하고, 전담 교육기관을 만들어 전문가를 육성하면, 한중일(韓中日) 등 동양은 물론이고 전 세계 관련 분야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이것으로 반도체, 신약(新藥), 인공지능 등과는 다른 의미의 엄청난 국부를 창출할 수 있다. 몇 백억, 몇 천억원 가치를 갖고 있는 도자기를 쓰레기 취급하는 무지와 횡포와 자해행위를 그쳐야 한다.  -관련 소송 등에 대한 입장은?나는 사법제도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공권력 집행을 무한 신뢰한다. 이번 판결도 그 믿음에 대한 의미 있는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합리적인 결과가 도출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다만 고흥군은 한 개인과 맺은 계약의 당사자로서, 계약 사항을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적법하게 체결된 행정상 계약을 농락해서는 안 된다. 고미술 전문가들은 ‘그동안 국보급 보물을 방치함으로써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하고 있다. 내 개인의 물적 심적 피해에 대한 보상 차원을 떠나, 국민 모두가 공권력 행사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소중한 계기도 될 것이다. 즉각적인 조치를 촉구한다.-막대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는데, 향후 목표는?나는 황실 도자기 등을 구입하는 과정에 중국 전문가들과 탄탄한 인간적 관계(關係)를 맺었다. 그리고 현재 국내의 국보(급)보다 훨씬 뛰어난 우리 유물이 (중국에) 수없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천년 넘게 조공(朝貢)을 바쳤다는 것에서 그 실상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중국은 물론 세계 각국으로 유출된 우리 유물과 내가 갖고 있는 중국 유물을 (등가) 교환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이미 중국 고대 유물 전문가들 그리고 박물관·미술관 관계자들과 합의한 부분도 있다. 몇 천억원 혹은 몇 조원이 될지 모를 소중한 국보급 유물을 환수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국가를 비롯해 공적 부문에서 관여하겠다면 얼마든지 수용하겠다. 나는 오래 전부터 중국 고대 유물 관련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건립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해외에 있는 우리 유물 환수(등가 교환)는 중요한 사업으로 구상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소장하고 있는 유물 등 자산을 최대한 공개하고 활용해,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으로 위상을 확실하게 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만 해도 중국 고문물 관련 박물관 2백 개에 이를 정도다. 지금 서둘러야 한다. 내 소장품 말고도 얼마나 민간에 퍼져 있을지 모를 중국 기물 등이 헐값으로 팔려나가고, 쓰레기 취급돼 파손되는 혼란 상황을 속히 벗어나야 한다.
    • 기획.연재
    2022-07-06
  • “무슨 낯으로 다시 천지 사이에 서겠습니까?
    민영환, 배와 목 찔러 순절조병세, 가마안에서 음독인력거 인부도 목매 자결# 민영환의 자결      1905년 11월 28일에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 등이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신들이 두 재상의 뒤를 따라 속히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제 조약을 돌려보내는 일로 여러 번 호소하였지만 아직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폐하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매국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직하고 충성스런 신하를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여, 성명을 내고 회동하여 담판하게 하소서. 그래야 강제 체결된 조약이 폐지되고 나라가 보존될 것입니다.”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이미 여러 번 칙유하였으니 이해해야 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구는가? 속히 물러가라.”(고종실록 1905년 11월 28일 3번째 기사)하지만 민영환 등은 다시 상소하였다.“이 소청은 우리 조정에서 우리 법을 시행하여 처단해야 할 자를 처단하고, 사무를 주관할 대신을 골라 임명해서 조약을 폐지하기 위한 방도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나라는 존재해도 망한 것과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 시행하소서.”그런데 고종은 “또한 이미 거듭 타일렀는데도 이렇게구니, 이는 서로 믿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라고 비답했다. (고종실록 1905년 11월 28일 4번째 기사)이틀 후인 11월 30일 아침 6시에 민영환(1861∽1905)이 자결했다. 45세였다. 11월 29일에 평리원에서 처벌을 기다리다가 석방된 민영환은 다시 소를 올리기 위해 장소를 종로 백포점으로 옮기고 판서 민영규, 김종한, 남인철 등과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 날 오후에 민영환은 서대문 밖에 있는 본가에 가서 생모 서씨와 아내 박씨를 찾아 작별하였다. 그리고 전동 회화 나뭇골에 사는 옛 청지기인 의관(醫官) 이완식의 집(현재 인사동 공평빌딩 앞)을 찾았다.이튿날 아침 6시경에 민영환은 평소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 처음에는 복부를 찔렀는데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손에 묻은 피를 벽과 의복에 여러 번 문질러 씻고 난 뒤에 다시 찌르고 하였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어 유혈이 방안에 가득한 채 절명했다. 민영환의 소매 속에서는 명함 앞뒤로 쓴 유서 2통이 나왔는데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였다. 이 유서는 1905년 12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이 명함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도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그러면 민영환의 유서를 읽어보자. 먼저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警告韓國人民)’이다. “오호라! 나라와 백성이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들은 곧 생존경쟁 속에서 진멸(殄滅)되어 갈 것입니다. 무릇 살기를 구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사는 법이니, 제공(諸公)들이 어찌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영환은 마침내 한 번 죽어 황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고, 또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죄하고자 합니다. 이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구천 아래에서 제군(諸君)들을 도울 것입니다.다행히 우리 형제 동포들이 천만 배나 더 분발하여 지기(志氣)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서로 죽을 힘을 다하기로 결심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마땅히 저승에서 기쁘게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럼 이것으로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고별인사를 올립니다.”이어서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各公館寄書)’이다.    “영환은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므로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또 2000만 동포에게 사죄하옵니다. 죽은 사람은 그만입니다만 지금 우리 2000만 인민들은 곧 생존경쟁 속에서 진멸되어 갈  것입니다. 귀 공사들이 어찌 일본의 행위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바라건대 귀 공사 각하는 다행히 천하의 공의(公議)를 중하게 여기시고, 이 사실을 귀 정부와 인민들에게 보고하여 우리 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도와주신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마땅히 지하에서 기쁘게 웃으며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아! 각하는 부디 우리 대한을 경시하거나 우리 인민의 뜨거운 마음을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고종은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조령을 내렸다.“이 중신은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의지와 기개가 바르며, 왕실의 근친으로서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보좌한 것이 많았고 공적도 컸다. 짐이 일찍부터 곁에 두고 의지하며 도움받던 사람인데, 이 어려운 때에 강개하고 격렬해져 마침내 자결하였으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은 해와 별을 꿰뚫을 만하다. 짐의 마음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예식원에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시호를 주는 은전을 시행하라. (후략) (고종실록 1905년 11월 30일)게일 목사는 『전환기의 조선』에서 민영환의 자결을 이렇게 적었다.   “1905년 11월 17일 한밤중에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이양된다는 내용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을 접하자 민영환은 대한제국은 이제 멸망했으며, 자신은 자결하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는 몇 통의 유서를 남긴 뒤 무디고 짤막한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이름 주위에 크게 쓰인 ‘자기의 조국을 위해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훌륭한 일인가”라는 문장을 조선은 되새겨야 할 것이다.’” # 조병세, 이상철과 김봉학 · 홍만식의 자결       민영환이 자결한 다음 날인 12월 1일 특진관 조병세가 약을 먹고 순국했다. 향년 79세였다. 조병세는 가평 시골집에 추방되었으나 11월 30일에 다시 상경하여 12월 1일에 심순택, 이근명과 함께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삼가 비지(批旨)를 받아보니,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하는 것은 서로 면려하고 수성(修省)하는 것만 못하니 힘쓸 것은 자강에 있다.’고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신들이 집에 물러가 있다 해도 근심에 휩싸여 통탄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며 문을 닫고 자결할 따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오늘 즉시 칙지를 내려 역적을 치소서. 삼가 서둘러 시행하소서.”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공연히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 경들은 그리 알고 집으로 돌아가라.”조병세는 가마에 태워 강제 추방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조민희의 집에 당도하자 죽었다. 조병세가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이 조령을 내렸다. “짐은 큰집을 버텨주는 기둥과 대들보처럼 의지했었고 이 어려운 때에 직면하여서는 더욱 마음을 의탁했었는데 갑자기 이처럼 부고가 이르렀다. 굳은 충성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정은 후세에 빛날 것이지만 짐의 슬픈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궁내부에서 1등급의 예장(禮葬)을 기준으로 지급하여 겸장례(兼掌禮)를 보내 호상(護喪)하게 하라. 정문을 세우고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라.(후략)”(고종실록 1905년 12월 1일 3번째 기사)   이날 종1품 이용직이 장인 조병세가 남긴 상소문을 올렸다.   “신이 늘그막에 죽지 못하여 국가의 위망(危亡)이 목전에 임박한 것을 목격하고, 병든 몸을 끌고 도성에 들어와 주사(奏辭)와 차자(箚子)를 올려 여러 번 번거롭게 해드리면서 그칠 줄을 모른 것은 혹시 일말이나마 나라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현재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장 눈앞에 임박하였는데도 폐하께서는 단지 4, 5명의 역신(逆臣)들과 문의해서 일을 주선하니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이 폐하 앞에서 한 번 죽음을 결단하지 못하고 심지어 저들의 위협을 받아 잡혀감으로써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자신을 욕되게 하여 스스로 크나큰 죄를 자초했으니, 이것이 어찌 죽을 날이 장차 임박하여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폐하의 죄인일 뿐 아니라 절개를 지키고 죽은 신 민영환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다시 천지 사이에 서겠습니까? 신은 죄가 중하고 살아서는 폐하의 뜻을 감동시켜 역신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강제 조약을 파기하지 못한 만큼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폐하와 영결합니다.신이 죽은 뒤에 진실로 분발하고 결단을 내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오적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논하고 코를 베서 처단함으로써 천지와 신인(神人)에게 사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각국의 공관과 교섭해서 허위 조약을 회수해 없앰으로써 국운(國運)을 회복한다면 신이 죽은 날이 태어난 날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정신이 어지러워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신은 피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는 것을 금치 못하며 삼가 자결한다는 것을 아룁니다.”이에 비답하였다. “조 특진관이 남긴 상소를 보니 더욱 마음이 슬퍼진다. 어찌 마음속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고종실록 1905년 12월 2일 3번째 기사)   12월 4일에는 학부 주사 이상철과 상등병 김봉학이 자결했다.    서울 계동(桂洞)에서 인력거를 끄는 인부도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는 옛날에 민영환의 사랑채에서 살다가 계동으로 이사하여 인력거를 끌며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때 민영환이 순절하였다는 말을 듣고 통곡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하루 종일 울고 있다가 인력거를 차주(車主)인 김삼령의 집에 가져다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가족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가 간 종적을 추적하였는데, 이미 그는 경우궁 뒷산의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의 시신은 이미 얼어 있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역 매천야록 제4권(1905년),    6. 인력거 인부의 순사) 이어서 12월 14일에 전 찬정 홍만식이 을사늑약이 체결된 데 분개하여 약을 먹고 죽었다.
    • 기획.연재
    2022-07-05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완도 신지 이광사 소나무
    명사십리 신지도는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다. 지금은 연도교가 놓이고 연륙이 되었지만, 신지면 대곡70번길 33은 조선의 큰 서예가 이광사, 또 조선 후기의 문신 목내선, 시인 이세보, 개화사상가 지석영 등이 귀양을 산 외롭고 쓸쓸한 유배지 섬이었다. 본관이 전주인 이광사(1705~1777)는 조선 제2대 정종의 서얼 왕자인 덕천군 이후생의 후손이다. 실학의 사상적 토대였던 양명학자로 강화도에서 학문을 이었던 강화학파이다. 이들을 또 육진팔광(六眞八匡)이라 한다. 경종이 즉위하여 집권세력인 소론은 노론을 숙청했다. 경종이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영조가 왕이 되었고 이번엔 집권세력인 노론이 소론을 숙청했다. 이때 소론으로 이조참판이던 이진유는 추자도로 유배되었다가 의금부로 압송되어 사약을 마셨다. 이에 이진유의 후손들이 강화도로 들어가 학문에만 힘썼는데, 이들을 강화학파라고 한다. 육진팔광은 육진과 팔광의 합친 말인데 육진은 이진유와 같은 진(眞) 자 항렬로 이진순, 이진수 등 6명이다. 팔광은 아래 항렬인 광(匡) 자로 이광세, 이광보, 이광사 등 8명이다. 그렇게 이들 이진유 후손들이 강화도에서 6대 250여 년 동안 강화학파를 계승하니, 이를 육대계승이라 한다. 1대 이광사, 2대 이긍익, 6대 이건창 등 십수 명의 선비가 그들이다. 이광사가 19세 때인 영조 1년(1724)이다. 아버지 이진검이 전라도 강진의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이광사는 강화도에서 학문과 글씨를 익혀 자신의 호를 따라 원교체라고도 하는 동국진체를 완성했다. 이 동국진체는 중국 서체를 뛰어넘어 넘치거나 기울지 않으며 힘이 있으니, 한마디로 수려하고 웅혼함이 넘친다. 영조 31년(1755)이다. 나주 객사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글을 역시 영조 1년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이배된 윤지가 붙였다. 이 일로 이광사는 1755년 함경북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말에 부인 문화 류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유배지에서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1762년 전남 신지도로 이배되었으며, 72세 때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광사는 죽은 이듬해인 1778년 선조들이 묻혀있는 경기도 장단 송남 거창지에 아내 류씨와 함께 묻혔다. 하지만 묘역이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의 수풀 속에 있다. 이광사의 글씨는 대흥사의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지리산 ‘천은사’, 고창 ‘선운사’, 김제 ‘금산사’의 현판에서 볼 수 있다. 이광사 글씨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귀양 길에 초의선사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친 게 원교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떼게 했다. 하지만 9년 뒤 서울로 가며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아달라’고 했다. 또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은 빈곤 속에서도 우리나라 야사 모음집 연려실기술을 집필했다. 연려실은 한나라 유항이 글을 정리할 때 신선이 명아주 지팡이를 태워 방을 밝힌 것에서 유래한다. 밤이면 바느질도 못 하는 순이 엄마 방에 달아준 달처럼, 기름 살 돈도 넉넉지 않았던 이광사는 달 대신 이 글씨를 써주며 아들을 격려했다. 15년간 이광사가 머물렀던 신지도의 집에서 바다가 보인다. 그 푸른 바다를 가리는 마을 앞 황토 언덕의 붉은색이 싫어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광사가 심은 3백여 살의 이 푸른 소나무가 이제 이광사의 적거지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6-30
  • 주성식의 어른 왈/국회 해산
    <주성식 선임기자>   이 사회의 여러 폐단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는 데 합의하는 것부터 어렵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국회(의원)일 것이다. 그것(들)은 창조(자기 권리)와 파괴(국정 방해)를 제멋대로 한다. 창조주마저 선망할 특권이요, 신(神)마저 격노할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국회에 똬리를 튼 것들의 패악(悖惡)이 나라의 기틀을 위태롭게 할 지경인 만큼, 현 상황을 살필 필요가 명백하고 긴급하다. 2년 전, 21대 총선을 취소하거나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하는 때였고, 사회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임박한 각급 선거(실시)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능과 불법으로 인한 총체적 파국에 빠져 있었던 집권 세력은 선거를 강행했다. 아무런 선거 대책도 내놓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상황을 수습할 의욕조차 없는 것 같았는데도 말이다.  그 때 코로나19가 등장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으로 이끌어줄 ‘구원의 여신(女神)’이 품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 뒤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정부가 ‘K방역’의 장점과 성과를 일방적으로 홍보하면, 일부 해외 언론(광고회사!)이 보도하고, 그것을 객관적 수치 등 최소한의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국내 언론이 확대 재생산(도배)해 줬다. 방역 등과 관련해 정부(정책과 실적)에 의문을 표시하기만 해도 ‘민족 반역자’에 ‘매국노’로 몰렸다. 정부가 적극 대행(!)해주는 집권당에 비해, 야당의 선거운동은 걸핏하면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발목이 잡혔다. ‘어린애 손목 비틀기’가 이보다 쉽고 즐겁겠는가! 21대 총선이 부정선거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시간은 또 얼마나 걸리겠는가?  그러나 복잡할 것 없다. 재외국민 등 유권자 가운데 투표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만큼 참정권 제한이 확실하다. 따라서 21대 총선은 원인무효이고, 현 국회는 해산해야 맞다.   가장 먼저 국회(의원)가 환영할 일이다. 진영(陣營) 가릴 것 없이, 파렴치한 모리배(집단)들이 작당(作黨)해 권력을 찬탈(簒奪)했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겠는가!
    • 기획.연재
    2022-06-28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태백 구문소 백룡 소나무
      태백은 석탄의 고을이다. 태백산 들머리에 ‘태백 석탄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 가면 ‘1950년대 광부 아낙네들은 한 달에 한 번 배급 받는 백미를 늘려 먹으려고 잡곡, 밀가루 등과 바꾸었고, 장바구니에 담아 온 돼지고기 한 근을 아이들 몰래 남편 밥상에만 올려놓았다’는 옛 탄광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또 1960년대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인근 탄광의 경석장에서 땔감으로 괴탄과 갱목을 한 짐씩 주워다 놓은 뒤, 아버지가 가져다준 쇠구슬로 구슬치기를 하거나, 비석치기, 고무줄놀이하며 놀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산이 개발되기 전 태백에는 화전민이 너와집을 짓고 살았다. 초목을 불태운 거름으로 산밭을 일구어 조, 메밀, 감자, 옥수수, 콩, 수수를 심어 삶을 이었고, 1930년대에 일인이 탄광을 개발하자 광부가 되거나, 정착영농을 하게 되었다. 또 고랭지 채소로 부농을 꿈꾸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 험준한 산간인지라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은 화장하여 그 위에 돌무지를 쌓고 시루를 덮은 뒤 물레 가락을 꽃아 창귀를 가두어 호환을 예방하는 호식장을 치렀고, 이 무덤을 호식총이라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태백 용연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동굴이다. 굴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아 800m이며, 약 3억만 년 전에서 1억 5000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 바닥에서 올라온 석순이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또 임진왜란에 의병들의 모임터였으며, 어려운 시기의 피난처였다고 한다. 태백은 물의 고을이다. 태백시 한가운데의 못 황지에서 솟구친 물은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가고, 금대봉 아래 검룡소에서 시작된 물은 한강이 되어 서해로 간다. 태백시와 삼척시 사이의 백병산 흰늪에서 솟구친 물은 오십천이 되어 동해로 간다. 또 여기 삼수령은 한 발자국 사이로 빗물이 한강, 낙동강, 오십천 등 한반도 세 바다의 물로 나뉘니, 석별령이기도 하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에는 욕심 많은 황부자가 노승에게 시주 대신 두엄을 퍼 주어 이에 집터가 꺼져 연못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하루 5천여 톤의 물이 샘솟는데, 이 물은 태백시 매봉산 천의봉 너덜샘에서 시작한 황지천이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나오는 거라고 한다. 이 황지를 나온 황지천이 남으로 내려오다가 태백시를 벗어나기 전에 바위산을 만난다. 그리고 산을 뚫으며 도강산맥을 만드니 바로 구문소이다. 약 5억만 년 전에는 황지천이 산의 암벽 때문에 말발굽처럼 구부러져 흘렀다. 그러다 1억만 년 전 마침내 바위를 뚫었다, 기다리고 있던 철암천과 곧장 만나 낙동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구문소에 ‘엄청나게 큰 싸리나무가 구멍을 뚫었다, 단군께 치산치수를 배운 중국 하나라의 하우씨가 바위를 칼로 찔러 뚫었다. 두 석벽을 사이로 동쪽 철암천의 청룡과 서쪽 황지천의 백룡이 낙동강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백룡이 석벽을 뚫어 청룡을 기습하여 이겼다’는 옛이야기가 있다. 구문소는 구멍이나 굴을 뜻하는 ‘구무’와 한자어 물웅덩이 ‘소’를 더한 말이다. 내가 산을 뚫어 흐르니 ‘천천(穿川)’이고 ‘뚜루내’이다. 또 물방울이 돌을 뚫으니 수적천석이다. 그렇게 물이 산을 넘었으니,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여기 삼형제가 모두 물에 빠져 죽어 용이 되었다는 구문소 삼형제 폭포의 전설은 슬프지만,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백룡 소나무는 늘푸름이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6-23
  • 대한제국, 우군 하나 없는 사면초가
    일본, 을사보호 조약 보도 금지 황성신문 “죽더라도 묵인 못해”1905년 11월 20일 월요일 새벽에 <황성신문>이 경성 곳곳에 배포되었다. 신문에는 주필이자 사장인 장지연(1864~1921)이 쓴 사설 ‘오늘이 목 놓아 통곡할 날이요!(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와 ‘오건조약 청체전말 五件條約 請締顚末(5조약 체결 전말)’이 함께 실렸다.  먼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을 읽어보자.“지난번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내한 했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자임하여 주선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많도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그러나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하였으니, 이 조약이 불성립함은 이토 후작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호라,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정부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거짓 위협에 겁먹고 머뭇대거나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하였다. 아, 4000년의 강토와 500년의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게 바치고 2000만 생령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심하게 꾸짖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參政) 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임에도 단지 ‘부(否)’자로 책임을 면하여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으려 했더란 말이냐.김청음(金淸陰:병자호란때 김상헌)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 : 병자호란 때 정온)처럼 할복하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000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000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여 멎어 버렸는가.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당초에 <황성신문>은 일본의 사전 검열로 발행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사령부는 군사와 관계가 있다는 핑계로 검열을 시작했다. 그후 마루야마가 경무 고문이 되자 일본 경찰 한 명을 전속 검열관으로 배치했으며, 조금이라도 일본인의 비위를 거스리면 금지시켰다. 을사보호조약은 보도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나라의 존망에 관계되는 중대한 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사실을 보도하지 않으면 교활한 일본인이 조약을 만장일치로 동의한 것으로 천하를 기만할 것이라면서, 죽을지언정 묵인할 수 없다면서 직접 사설을 썼다. 신문은 평소의 발행 부수 3000부를 1만 부로 늘려 인쇄했고, 배달부로 하여금 각 가정과 기관에 빠짐없이 배달시키고 자신들은 밤새 술을 마시며 경찰의 체포를 기다렸다.  (박은식 지음 · 김승일 옮김, 한국통사, 범우사, p 329-331)  20일 아침에 일본 경찰은 신문사를 급습해 곧바로 신문 회수 작업에 나섰다. 발행된 1만부 중 서울에서 800부를 회수하고, 지방으로 보낼 2288부를 압수했다. 또 일본 경찰은 <황성신문>이 경무청 검열도 받지 않고 신문을 발행한 것을 문제 삼아 장지연 등 10여 명을 체포하고 <황성신문>을 무기 정간하였다. 장지연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황성신문>은 1906년 2월에야 속간될 수 있었다. 한편 해가 뜨자마자 <황성신문>을 본 시민들은 울분과 허탈에 쌓였다. 대한제국이 하루아침에 외교권을 빼앗긴 일본의 보호국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이날 경성의 번화가 종로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맵게 몰아치는 11월 하순의 음산한 찬바람이 옷자락을 마구 흔드는데,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큰 소리로 신문을 읽던 중년 선비가 방금 읽은 <황성신문>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외쳤다. ‘그렇소! 오늘이야말로 목을 놓아 울 때요! 참으로 목 놓아 크게 울어야 할 때요! 그러나 운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소! 나는 결코 울지않으리다!’(중략) 무리 속에 있는 장년의 사내가 크게 대꾸했다. ‘그렇지요! 울어서 국사(國事)가 바로 잡힌다면야 오늘 우리 국민 그 누가 방성대곡을 아끼겠소.’ 그런데 말은 그리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송우혜, 스스로 운명 개척 못 한 대한제국, 조선일보, 2004년 10월 20일 :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p 172에서 재인용) #. 우군 하나 없는 대한제국  11월 21일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면에 「황성의무(皇城義務)」란 논설을 실었다.“어제 황성신문 기자가 일한신조약(日韓新條約)에 대하여 한황 폐하께서 이토 대사의 강청(强請)을 정대하고 명확하게 척절(斥絶 배척하고 거절)하신 칙어와 다수의 일본 병사가 궁궐에 난입하여 용탑(龍榻 임금이 앉고 눕는 침상)에 지척까지 다가와서 위협과 협박을 보인 행동과 이토대사가 참정대신(한규설)에게 공갈도 하고, 유세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강압수단과 한참정이 그 조약에 날인을 하지 않은 일과 각 대신이 군부(君父)를 속이고 저버리면서 국권을 상실한 죄를 사실에 입각하여 곧게 썼다.또 해당 조약이 황상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신 일이고, 참정대신이 날인하지 않은 것이니 반드시 무효하다는 설도 게재하고 해당 신문사 기자는 이 신문을 발포하면, 반드시 닥칠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서 일본의 검사도 받지 않고, 아침 일찍 전파하고는 앉아서 변을 기다렸다. 과연 일본 순사들이 와서 사장 장지연을 잡아가고 해당 신문을 정간시켰다.오호라! 황성 기자는 단지 해당 신문사의 의무를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로 대한 전국 사회 신민(臣民)의 대표가 되어 광명 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發顯)하리로다.방성대곡(放聲大哭)이라는 논설 한편에 이르러서는 모든 대한 신민이 된자가 통곡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세계 각국의 모든 공평한 마음과 정의를 가진 자는 모두 마땅히 그를 위해 분개하고 애통해하리니 오호라, 황성 기자의 붓은 가히 일월(日月) 그 빛을 다툴 것이로다. ”(기획 김홍식/해설 김성희/ 편집 김영선,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9, p 30-31)이어서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7일에는 호외를 발행해서 1면에는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과정을 상세히 보도했고, 2면에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옮겨 실었다.<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는데 주필에는 박은식이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인이 발행인인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이런 기사를 과감히 실었다.당시에 경성에는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에서 언급한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란 욕이 널리 유행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느 말이 유행인가?한편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한일보>는 이를 경거망동이라 했고, <제국신문>은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하리라.’는 논설을 실었다. 언론도 언론 나름이라는 말은 예부터 그랬던 모양이다.여기에서 을사늑약과 관련한 해외 언론 기사를 살펴보자.11월 20자 영국의 <더 타임즈>는 ‘일본과 한국, 협약에 이르다.’ 제하로 한국의 일본의 협약과정을 보도하면서, ‘한국은 앞으로 극동 지역의 태풍의 눈에서 벗어나 발전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영국은 1902년과 1905년에 일본과 2차에 걸친 영일 동맹을 체결한 동맹국으로서 러시아를 물리쳐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이었다.반면에 11월 22일 자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사라지는 한국’ 제하의 기사에서 ‘장차 대한제국의 황제는 영국 통치 아래의 인도 국왕의 지위로 전락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함께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데 걸림돌은 청나라나 러시아가 아니라 한국 내부’라고 보았다. 전반적으로 영국, 미국 등 열강들이 일본의 한국에서의 권리를 인정하는 입장이어서, 외국 신문들도 일본에 동조하거나 방관적인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대한제국은 우군 하나 없는 사면초가였다.
    • 기획.연재
    2022-06-21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강경 옥녀봉 사랑의 느티나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살만한 곳’을 ‘지리, 생리, 인심’이 좋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이는 지형, 토양, 기후, 물산, 일자리, 전통과 풍속, 또 사농공상의 사민이 평등한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택리지를 탈고한 곳이 강경의 팔괘정으로 송시열이 이황과 이이를 추모하고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또 스승 김장생이 학문을 펼친 곳이 이웃 임리정이니, 강경은 노론들의 본거지였다. 당시 소론 학자로 노론의 핍박을 받은 이중환이 여기에서 집필하고 발문까지 마무리한 것은 강경이 살만한 곳 중 으뜸이라는 것 외에 나아가서는 학문평등, 사민평등의 바람이고 실천이었으리라. 논산시 강경읍은 부여 백마강이 남진하다가 크게 휘돌아가며 서진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 강경포구에서 발걸음을 멎는 논산천과 강경천을 받아 금강이 된다. 논산시 채운면의 미내다리는 조선시대의 무지개 모양 돌다리로 강경천을 건너는 주요 길목이었다. 또 강경은 동해안의 함경남도 원산항과 더불어 서해의 수로와 육로를 잇는 ‘조선의 2대 포구’였고 대구장, 평양장과 함께 전국 3대 장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까지 100여 척의 배가 드나들며 금강이 생명 터인 사람들의 농산물과 전국 각지의 상품을 유통시켰다. 그리고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전기가 들어왔고, 매년 10월 중순에 강경발효젓갈축제가 열린다. 이곳 강경 포구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해발 44m의 야트막한 바위산 옥녀봉에는 해조문이 있다. 해조문은 강경포구를 이용하는 어민들에게 밀물과 썰물의 날짜와 시간 등 물의 현상을 알려주는 총 170자로 수록한 암각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유적이다. 이 옥녀봉의 옛 이름은 강경산이다.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딸이 이 산 아래 맑은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놀았다. 그러다 돌아갈 시간에 쫓겨 옷을 제대로 챙겨입지 못했고, 이를 본 옥황상제는 하늘을 비춰주는 거울을 던져주고 하늘 문을 닫아버렸다. 그 뒤 거울만 들여다보다가 죽은 옥황상제의 딸은 옥녀봉의 바위가 되고, 거울도 바위가 되었으니 용연대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백제가 역사를 승자에게 내준 것처럼 여기 강경과 논산은 전라북도 땅이 충청남도가 된 곳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선 1963년 11월 21일이다. 전라북도 금산군과 논산, 역시 강경이 있는 전라북도 익산시 황화면이 충청남도가 되었다. 과거 나라와 지역의 경계가 산줄기나 강이었고, 금강 물줄기 아래가 모두 호남이던 것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흐르는 곳이 어느 도에 속하는지 알 리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강경의 금강이다. 과거의 영광이나 화려함에 무슨 미련이 있을 거냐? 그 과거를 반추하되 다시 딛고 일어나는 게 희망이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것이다. 조선의 2대 포구, 3대 시장의 빛나는 이름은 이제 옛 이름이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흐르는 강경의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 질 무렵 옥녀봉에서 도도히 흘러가는 금강을 바라본다. 이곳의 석양 노을은 황홀하다는 표현밖에 할 말이 없다. 또 이 석양은 내일을 여는 여명이다. 그 황금빛 노을과 새벽을 여는 여명까지 품은 강경의 금강은 마치 한 가닥 비단 자락을 펼쳐놓은 것 같다. 강은 산을 넘지 않는다. 산을 오르지도 않는다. 비단 자락 금강은 그 지혜롭고 아름다운 생명의 강이다. 여기 옥녀봉의 두 아름 느티나무는 사랑나무라는 이름이 있다. 방향을 잘 잡아 쳐다보면 아래쪽 늘어진 가지 모습이 하트 모양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젖줄 금강을 수수만년 함께하니, 그 젖줄의 젖무덤을 어찌 사랑이라 하지 않을 소냐?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6-16
  • 주성식의 어른 왈/개들 판이 되면 말세
    <주성식 선임기자>   대선과 지선까지 끝나면 세상이 좀 조용해지려나 했던 사람들이 더 심하게 진저리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탄식은 고상한 편이다. 최고 권력자와 배우자에 대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용어와 표현을 동원한 비난, 기간까지 정해 임기를 못 채울 것이라는 악담, 취임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 공공연하게 나돌았다는 극단적 폭력 선동까지, 증오와 저주가 넘쳐난다. 나라인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이곳이 과연 인간들이 사는 곳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꼴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마음껏 휘두르던 권력을 뺏기자 쏟아내는 투정이요 앙탈이라고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패배와 원인을 찾고 괴멸의 책임자를 가리겠다며 벌이는 집안 싸움에 비하면 말이다.  마침내 전매특허인 양 써먹는 과일이 또 등장했다. 사과에 물렸을까, 이번에는 수박 타령이다. 동료를 지목해 ‘패배의 원흉’이라고 단죄하고, 겉과 속이 다르다며 물어뜯고 씹어대는 꼴이 야차며 아귀와 다를 바 없다. 곧 사상 검증이나 인체 해부라도 할 기세다.  그뿐인가. 만신창이로 쓰러진 패배자를 지도자로 내세우고, 국어책이나 도덕 교과서 읽는 듯한 철부지를 데려다 중책을 맡기고, 그나마 말다운 소리를 꺼내면 불에 덴 듯 놀라 헐뜯기 바쁘고, 결국 그 날(刃)에 베일 것조차 모른 채 힘에 겨운 칼을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참으로 끔찍한 것은 따로 있다. 이제 그들은 절대적 기반이라고 할 ‘광적(狂的) 지지자’들을, 삼킬지 뱉을지 쓸모를 저울질하는 중이다. 「개(혁의)딸」을 자처(自處)하며, 성별(性別)까지 제한하는 폐쇄성과 독점적 이기심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 집단이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그들과 지지자들의 유일한 힘이었던 ‘개 같은 미친 짓’이 통제의 굴레를 벗어날 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차츰 느끼고 있다. 구체적 양상은 모호하지만 닥칠 것은 확실한 멸문(滅門)을 짐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두렵지 않은가. 선인(先人)들은 ‘세상이 개판 되면 말세인 줄 알라’고 경고했다. 개를 아기라고 부르고 개의 아이라고 자처하는 것들이 횡행하니, 확실한 개판 아닌가? 그것들에 빌붙어 늘어진 청승을 바루고 오그라든 팔자를 펴려고 안간힘을 쓰는 꼴, 마침내 ‘그들만의 말세’가 이르렀다는 명백한 징조 아닌가 말이다.
    • 기획.연재
    2022-06-15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해남 수성송
      역사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을 성찰하며 볼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임진과 정유 7년의 왜란이 있기 전, 조선에는 이를 예고하는 몇 차례의 왜란이 있었다. 주군 ‘다이묘’가 거느리는 왜병이면서 생계형 흉악범 해적집단 왜구가 걸핏하면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1510년 삼포왜란(부산포, 진해 내이포, 울산 방어진 염포), 1544년 사랑진(통영)왜란, 1555년 을묘왜변(달량포), 1587년 여수 손죽도 등지에서의 대규모 약탈이 그것이다. 왜구는 부산과 불과 50Km인 대마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았다. 이 왜구들의 배 ‘세키부네’는 노 40개로 격군 40여 명, 조총병 20명, 전투병 10명 등 모두 70여 명이 탔다. 조선 수군 130여 명이 타는 판옥선보다 작아 천자, 지자, 현자, 황자 총통을 싣지 못했다. 그 대신 날렵하고 빠르게 움직여 조선의 남해와 서해를 제집 드나들 듯했다. 명종 10년인 1555년 5월이다. 왜선 60여 척에 탄 4000여 명의 왜구가 전라도 해남 북평의 달량포에 들어왔다. 전라병사 ‘원적’이 급히 달량포성으로 달려갔지만, 왜구의 위세에 놀란 대부분의 관군이 이미 성을 넘어 도망쳐버린 뒤였다. 이때 장흥 부사 한온은 가리포로 가던 중 원적을 만나 달량포성으로 들어왔다. 원적은 겁에 질려 한온에게 ‘적이 강하니 지탱하기 어렵소. 어찌하면 좋겠냐’며 벌벌 떨었다. 이에 한온은 ‘주장이 흔들리면 누가 힘이 나겠소. 당신은 남문을 지키시오. 나는 북문에서 죽으리다’면서 장흥의 의병 안언방, 백민걸 등과 함께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였다. 원적은 기세등등 성을 넘어오는 왜구에게 항복의 뜻으로 갑옷을 벗어 보내 목숨을 구걸했으나,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3일간 항전 끝에 달량포성은 함락되었다. 왜구는 포로로 잡힌 영암군수 이덕견에게 ‘지금 즉각 한양으로 진격해 도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편지를 주어 조선 조정에 보냈다. 이어 거칠 것 없이 난포(어란포), 마도(강진), 장흥부병영(강진군 병영), 가리포(완도)를 짓밟아 살상과 노략질을 했다. 이에 강진과 장흥의 수령들은 서둘러 성을 포기했고, 두 고을의 물자는 고스란히 왜구들의 차지가 되었다. 발칵 뒤집힌 조정은 중앙군을 파병키로 하고 도순찰사 이준경과 경상좌병사 조안국, 좌·우 방어사 남치근과 김경석을 파견했다. 이준경은 나주에 이르러 왜구 토벌을 시작했다. 그렇게 왜구들이 해남, 완도, 강진, 장흥 일대에 흩어져 분탕질을 치고 다닐 때의 영웅이 해남 현감 변협이다. 변협은 해남군민과 병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수축하고 복병을 배치하여 사방이 왜구로 둘러싸인 해남성을 지켰다. 어느 날 왜구 10여 명이 가까이 왔다가 겨우 1명만 살아서 줄행랑친 뒤부터는 감히 다시 경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변협을 특진시켜 장흥부사로 삼았다. 변협의 본관은 원주이고 아버지는 중추부경력 변계윤이며, 어머니는 참판 최자반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용맹이 뛰어났으며 1548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555년(명종 10)에 해남현감이 되었다. 해남군청의 수성송은 변협이 장흥부사로 영전할 때 이를 기념하여 심고 ‘수성송’(守城松)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데서 유래한다. 곰솔이라고도 하는 이 해송은 겨울눈이 붉은색인 육송과 달리 회백색이다. 두 아름이 넘는 이 500살 수성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라와 내 가족을 누가 어떻게 지켜왔는지를 알 수 있으니, 이는 또 백성의 생목숨을 지켜 준 수생송(守生松)이고 그 마음마저 지켜준 수성송(守性松)이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6-09
  • 120만 독립왕국이 저항 한번 못한 채 강점당해
    1905년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1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공사가 조인한 늑약은 명칭도 붙이지 못했고, 조인 날짜는 11월 17일로 하였다. 1905년 11월 17일의 「고종실록」에는 을사늑약 체결 기록이 실려 있다.   “한일협상 조약(韓日協商條約)이 체결되었다.〈 한일협상 조약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주의(利害共通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실지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이 목적으로 아래에 열거한 조관(條款)을 약정한다.제1조일본국 정부는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통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監理指揮)할 수 있고 일본국의 외교대표자와 영사(領事)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제2조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한다.제3조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면서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궁중에 알현하는 권리를 가진다.일본국 정부는 또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을 두는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밑에 종래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職權)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 사무를 장리(掌理)할 수 있다.제4조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의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제5조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이상의 증거로써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 정부에서 상당(相當)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記名) 조인(調印)한다.광무(光武) 9년 11월 17일외부 대신 박제순 명치(明治) 38년 11월 17일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가 본 을사늑약  주한미국공사관 부영사 윌러드 스트레이트는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밤의 광경을 미국공사관 담 너머로 모두 보았다. 수옥헌(漱玉軒, 지금의 중명전)은 미국공사관과 맞붙어 있었다.윌러드는 러일전쟁 취재차 일본에 온 AP 기자였다. 그런데 그는 1905년 6월에 덜컥 주한미국 공사관 부영사로 임명되었다.1905년 6월 26일에 윌러드는 고종을 수옥헌에서 알현하였다. 당시에 고종은 1904년 4월에 경운궁이 불타서 이곳 2층에서 지내고 있었다.1905년 7월 2일에 윌러드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이봐, 황제의 궁전이 바로 옆이야. 우리가 공사관 뜰로 들어왔더니 황제가 침대 의자에 앉아서 우릴 쳐다보더라고. 도대체 이런 나라를 상상할 수 있겠어!”한편 윌러드는 11월 17일 밤 을사늑약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했다.“나는 공사관 창문을 통해 궁궐 안으로 일본 군대 및 경찰이 몰래 잠입하는 것과 매우 불안한 표정을 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조선 대신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순간 창백한 얼굴을 한 고종과 왕자가 창문 커튼을 옆으로 밀고 살짝 밖의 동정을 살폈다. 이것이 바로 몇 시간 후면 조인될 보호조약의 긴장된 장면이었다.그날 밤 10시 소란한 소리와 함께 일본군은 떠나고 있었으나 아직도 궁궐 내에는 일본 경찰들로 꽉 차 있었으며 관복을 입은 한국 관리들은 나라를 잃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불과 100여m 앞에서 한 나라의 운명이 맥없이 절단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나는 그저 망연할 뿐이었다. 특히 1200만명의 독립왕국이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이렇게 무기력하게 강점당하는 모습에 침통함을 느낀다. (백성현·이한우 지음,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2006, p 372-373)윌러드는 친구 블랜드에게 보내는 11월 29일의 편지에도 이렇게 적었다.“새벽 두 시에 잔디밭에서 수옥헌을 보니 건물 주변은 물론 베란다까지 일본인들이 가득했다. 뒤편 프랑스 공사관 통로에도 가득했다. 황제가 여차하면 거기로 도망갈까 예상하는 듯 했다.이곳 상황은 참 놀랍다. 왕관을 쓴 자들 가운데 최악으로 비겁한 황제는 궁전 속에 움츠리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으로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황제는 외부대신에게 조약에 서명하라고 지시하고서는 자기가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또 지시했다. 그래서 외부대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참정대신 한규설은 회담장에서 쫏겨났다. 황제명령을 어기고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한규설은 그 파란만장한 밤에 엄비 방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엉겁결에 황제에게 대신들로 하여금 나라를 배신하지 말게 하라고 간청해버린 것이다. 이 행동으로 한규설은 3년 형을 받았다. (중략)가장 어이없는 일은, 저들은 무슨 일이 닥칠지 벌써 경고가 돼 있었고 그래서 늦기 전에 이 사태가 오지 않도록 충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저들은 마치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에 처박고 사태를 똑바로 보려 하지 않았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2020, p 325-326, 355)그랬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서 고종이 맨 먼저 한 일은 참정대신  한규설을 파면한 일이다. “조령(詔令)을 내렸다. 의정부 참정대신 한규설은 황제의 지척에서 행동이 온당치 못하였으니, 우선 본직을 면직시키라.”(고종실록 1905년 11월 17일 2번째 기사)그나마 한규설은 윌러드의 편지 내용과 달리 3년 유배는 면했다.# 이근명, 이상설의 상소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날인 11월 19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이 상소를 올렸다. “신은 어제 정부가 조약을 체결한 일에 대해 너무나 놀랍고 의심스러워 줄곧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입니까? 조정에 물어서 협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바로 한 밤중에 대궐에서 그 누가 알까 두려워하면서 부랴부랴 회의를 열어 이렇듯 체결하여 일을 크게 그르쳤습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사람들의 울분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실로 천하의 영원한 죄인으로 되었으며 또 국법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상(皇上)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그날 회의한 모든 대신(大臣)들을 모두 법에 따라 처벌하심으로써 온 나라의 한결같은 울분을 풀어 주소서.”이에 고종은 널리 양해하라고 비답하였다. (고종실록 1905년 11월 19일)이것이 바로 고종의 이중성이었다. 고종은 조약 체결에 반대한 총리대신 한규설을 면직시키고서, 11월 18일에 사직상소를 올린 법부대신 이하영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사직상소는 반려한 상태였다. 한편 1905년 11월 1일에 의정부 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된 이상설(1870∽1917)은 11월 18일 오전 2시에 참정대신 한규설이 풀려나자 참정대신과 손을 맞잡고 통곡하면서 망국을 슬퍼했다. 즉시 그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11월 19일에 이상설은 고종의 비준 절차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엎드려 아뢰옵나이다. 신이 어제 새벽 정부에서 일본과 약관을 체결하여 마침 조인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르기를 천하 대사를 다시 어찌할 수 없구나 하고 사저로 돌아와 다만 슬피 울고 힘써 자정(自靖)하기를 도모하고자 상소 진정하여 면직을 바랐습니다. 이제 듣자오니 그 약관이 아직 주준(奏准)을 거치지 아니하였다 하니 신의 마음에 위행(慰幸)이 가득하고, 국가를 위해 계책을 아직 세워볼 만하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대제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하지 않아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사직을 위해 죽는다.(殉社)’는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역대 조종이 폐하에게 맡기신 무거운 임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중략) 폐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그르다고 여기시거든 곧 신을 베어서 여러 도적에게 사과하시고, 신의 말이 옳다고 여기시거든 곧 여러 도적을 베어서 국민에게 사과하소서. 신의 말은 이뿐이오니 다시 더 말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박민영 지음, 이상설 평전, 신서원, 2020, p 78-79)이상설은 고종에게 노골적으로 분사(憤死)하라고 상소하였다. 조약을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하여도 나라는 또한 망하니, 이럴 바에는 황제가 차라리 죽음을 택하여 저항하라고 주청했다. 이처럼 신하가 임금에게 사직을 위해 죽으라는 상소는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러자 11월 24일에 「대한매일신보』는 ‘이상설의 상소문(讀李參贊疏)’을 신문에 게재하고 ‘자고로 난세를 당하여 직신(直臣)의 간언은 있었지만 막중한 군부의 죽음을 끊는 순사직(殉社稷)을 간한 신하는 이상설에게만 있었던 충언’이라고 극찬하였다.
    • 기획.연재
    2022-06-0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