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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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허난설헌 옛집 터 난설헌 살구나무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호가 초당이다. 강릉 초당동 477 허난설헌 생가터의 지명은 허엽이 이곳에서 두부를 만든 데서 얻은 이름이다. 이곳에 그 초당두부를 만든 우물이 있다. 허엽은 첫 부인이 1남 2녀를 낳고, 세상을 뜨자, 강릉김씨 김광철의 딸과 재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첫 부인 아들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지냈고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예언했다. 강릉김씨의 자녀인 허봉은 열여덟 살에 생원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였고,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썼다. 허균은 난설헌의 여섯 살 아래 동생으로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의 저자이다. 허난설헌의 어릴 적 이름은 초희와 옥혜이고, 자는 경번이며 난설헌은 호이다. 난설헌은 허균과 함께 천재라 불렸다. 여덟 살에 쓴 장편 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하늘의 신선이 산다는 백옥루’를 상상해 지은 시로 당시 한양의 화제가 되었고, 훗날 이 시를 읽은 정조도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불우했다. 1577년 15살 때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안동 김씨인 16살의 김성립과 결혼하였다. 남편도 문인이었으나 아내의 남다른 재능을 챙겨주기는커녕, 가정사마저 등한했다.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다, 아내가 죽은 1589년에야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절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허난설헌은 두 남매에게 온갖 애정을 쏟았으나, 연이어 남매를 잃었다. 경기도 광주 초월읍 지월리 양지바른 언덕에 남매를 나란히 묻고, 자신을 그 무덤 뒷자리에 묻으라고 했다. 그렇게 한이 맺혀서인지, 그녀의 ‘삼한(三恨)’은 조선에서 태어난 것, 여성으로 태어난 것,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한 것이었다. 허난설헌이 스물세 살에 친정어머니의 초상에 친정에 갔을 때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그녀는 ‘붉은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가 차가운 달에 떨어졌네’라는 시를 지었다. 허균이 이 시를 읽고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는 곧 스물일곱 살의 자기 죽음을 예감한 것이다"고 하였다. 허난설헌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사람은 허균이다. 그녀는 자신의 시를 불사르라 했으나, 허균은 생전에 넓은 땅에 태어나지 못했음을 한탄한 누이의 뜻을 이루어주려 그녀의 시를 중국 사신 주지번에게 주었다. 중국과 일본까지 난설헌의 시를 시인들이 애송하게 된 연유이다. 경포대에서 호수와 바다를 바라보면 신선이 된다는 곳이다. 바다와 호수, 너와 나의 눈, 마주치는 술잔, 그리고 마음속까지 해와 달이 뜬다는 곳이다. 사철 푸른 금강송과 낙엽송인 상수리나무, 그리고 벚꽃이 어울리면 경포호는 커다란 꽃구름이 되는 곳이다. 허난설헌이 태어난 집은 그 경포대가 있는 경포호 남쪽 솔숲에 있다. 오랜 세월 집 주인이 바뀌고, 집도 개축되었겠지만, 그곳에 오래된 나무가 있다. 그녀의 시에 나오는 살구꽃을 지금도 피우고 있는 한 아름 살구나무이다. 보슬보슬 봄비에 연못은 어둑하고/ 으스스 찬 바람 장막에 스며들제/ 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에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위에 지네. 허난설헌의 시 ‘봄비’이다. 이 봄비에 나오는 살구나무와 옛집 터의 살구나무가 같은 나무인지, 아닌지, 아니면 그 후손 나무라도 되는지, 아닌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웬일인지 오래된 그 살구나무 앞에서 한동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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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31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부안 개암사 이매창 홍매
      개암사는 백제 무왕 35년, 634년에 묘련이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에 세운 절이다, 개암은 기원전 282년, 진한과 마한에 쫓긴 변한의 문왕이 우(禹)와 진(陳) 두 장군에게 이곳 두 계곡에 도성을 쌓게 하고 전각 이름을 동쪽은 묘암, 서쪽은 개암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신라 때인 676년 원효와 의상이 이곳 우금산 울금바위 굴에서 수도했고, 고려 때인 1276년 원감국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을 피하지 못하고 소실되었다. 현재는 조선 중기의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1913년 화은이 시작하여 여러 건물을 복원하고 있다. 절에서 바라보이는 울금바위에는 3개의 동굴이 있다. 그중 원효방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는데, 원효가 수도하면서부터 샘물이 솟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우금산의 주류성은 백제의 유민들이 왕자 부여풍을 옹립하고, 3년간에 걸쳐 백제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다.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는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유적지다. ‘임진, 계사에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이 몸의 시름과 한 뉘에게 풀었으리/ 홀로 거문고 끼고 난세의 노래 뜯으면서/ 삼청동의 그대를 서글피 그리워했지요.’ 가사, 한시, 시조, 가무, 현금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했던 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의 시인인 이매창(1573∼1610)의 ‘옛일을 더듬으며’라는 한시다. 어릴 적 이름은 향금,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라 계생, 계랑이라 했던 매창은 그녀의 호다. 매창은 선조 6년에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얼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모친에게 거문고를 익혔다. 15세에 계례를 치러 정식 기녀로 입적하며 천향이라는 자를 받았다. 매창은 어릴 적부터 시문과 거문고에 천부적 재능이 있어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빼어난 솜씨에 흠뻑 빠져 혀를 내두르며, 신분과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조선 현종, 숙종 때 학자인 홍만종은 그의 저서 ‘소화시평’에서 ‘송도의 진랑(황진이)과 부안의 계생(매창)은 시의 문체가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고 했다. 삶도 사랑도 뜬구름일 수밖에 없는 기녀였지만 매창의 시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헤어진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지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는 지고지순한 만고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1610년 37살의 매창은 세상을 떠났다. 읍의 남쪽 나지막한 야산 공동묘지에 그녀의 유언대로 손때 묻은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기(妓)가 아닌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 ‘원(媛)’으로 추억했다. 1655년 매창이 떠나고 45년 뒤에야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1668년에는 사람들이 외워서 간직하던 시 58편을 고을 아전들이 모았다. 개암사에서 목판에 새기니 바로 ‘매창집’이다. 천민으로 태어나, 아픈 사랑을 안고 살았던 그녀의 아름다운 부활이었다. 살아서부터 미움과 질책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랑받는 사람이 바로 매창이다. 해마다 오는 봄이다. 봄 하늘가 흰구름이 송이송이 흐르고, 넋인 듯 사랑인 듯 매창의 시가 거문고에 실려 노래가 된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세월의 흐름을 넘어 살아간다. 매창의 시를 세상에 알린 개암사의 늙은 노매는 이제 근근이 봄맞이꽃을 달지만, 매창과 더불어 아름다운 정한의 꽃이다. 이른 봄 개암사에 가면, 그리고 개암매를 보면, 기녀가 아닌 아름답고 우아한 원인 매창도 만날 것이다. 매창은 부안의 시인이며, 개암사의 시인이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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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4
  • 군대와 식량은 버릴지언정 신의는 지켜야
    1904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議官) 안종덕이 ‘조정이 청렴, 근면, 공정하지도 않고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안종덕은 근면의 허상을 이야기한다.          “지금 폐하께서는 근면한 것을 좋아하지만 조정에는 게으른 습성이 있어 무슨 일이나 성사될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의정부의 회의는 모여 앉자마자 헤어지고 각 부(部)의 출근에 대해서 여러 번 주의를 주었음에도 출근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령이 결원되어 있으나 해가 지나도록 임용되지 않는 것은 전형을 맡은 관리들이 태만한 탓입니다. 죄수들이 옥에 갇혀 있어도 계절이 바뀌도록 심리하지도 않는 것은 법관들이 태만한 결과입니다. (중략) 신은 폐하의 근면이 ‘근면의 마땅한 도리를 잃은 데 있지않은가’생각합니다. 대체로 제왕들의 근면은 관리들이 수고로이 힘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 힘쓰며 인재를 얻은 다음에는 모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고요(皐陶)의 노래에는‘임금이 모든 일을 다 맡아보니 고굉지신(股肱之臣)들은 게을러져서 만사가 그르쳐지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을 다 맡아본다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서는 것이 근면한 듯 하지만 신하는 게을러지고 일이 그르쳐집니다. 근면하기는 마찬가지나 그 결과는 이처럼 상반됩니다. 진시황이 직접 계(啓)를 꼼꼼히 살피고, 수나라 문제(文帝)가 직접 호위 군사들에게 밥을 먹인 것은 해당 관청에서 할 일이었지 제왕이 직접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아! 폐하께서는 황위에 오른 이후 날마다 바쁘게 지냈으니, 참으로 천하에 의로운 임금입니다. 하지만 걱정이 지나쳐서 하찮은 일들까지 살폈고 근심이 깊어서 남이 하는 것을 싫어하여 모든 일을 직접 도맡아 하였습니다. 하찮은 일들까지 살폈기 때문에 큰 원칙이 허술해졌고 남이 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참소(讒訴)가 쉽게 들어왔습니다. 큰 원칙이 허술해지니 소인들이 폐하를 기만하게 되었고, 참소가 들어오니 대신들이 자주 교체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선다는 것입니다.(중략)  전형을 맡은 관리들은 명령만 기다리게 되고, 법을 맡은 관리들도 명령만을 받들게 되니, 임금의 팔다리 노릇을 해야 할 관리들이 어찌 게을러지지 않으며, 만사가 어찌 그르쳐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놓고 신은 감히 폐하의 근면이 근면의 마땅한 도리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윽고 상소는 공정에 다다른다. 그는 고종의 공정성을 상당히 의심한다.      “지금 폐하는 공정한 것을 좋아하나 조정에는 사리사욕이 넘쳐나고, 관리들 간에는 당(黨)이 갈라졌으며, 벼슬을 얻어 나가려는 자들은 대궐 안의 비호 세력과 결탁하고, 세력에 끼려는 자들은 외세에 의지합니다. 재주도 없이 턱없는 과분한 벼슬을 지내는 것은 모두 세도 있는 집안의 인척들이고, 죄를 지고도 요행수로 면하는 것은 모두 권세 있는 가문의 청탁 결과입니다. 임용해야 할 벼슬자리가 있으면 비천한 자들을 사대부들보다 먼저 앉히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면 도적보다 더 심하게 빼앗아 냅니다. 천하에 잘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사익을 채우는 일 한 가지뿐이니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폐하의 공정함이 진실한 공정함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정령(政令)과 하는 일들로 미루어 폐하의 마음을 더듬어 보면 순전히 공적인 마음에서만 출발한 것이 아닌 것도 있는 듯합니다. (고종실록 1904년 7월 15일)  안종덕의 상소는 계속된다. “요즘의 관보를 보니, 칙임관·주임관·판임관의 벼슬이 매번 가까이 돌면서 사적인 총애를 받거나 점쟁이나 이단(異端)의 무리들에게 내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두 무리들에도 어찌 등용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기야 하겠습니까마는, 대체로 이 무리들은 간사한 술법을 숭상하고 간교하여, 안으로는 남을 헐뜯고 시비를 전도하며 밖으로는 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권세를 구합니다. 그리하여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없는 무리들을 앞다투어 추종하며 저마다 아부하여 편당을 만들고는 자기들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쫓아냅니다. 이런 형세는 필시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야 말 것이니, 어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고종은 여전히 점쟁이나 이단의 무리를 등용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1899년에 만난 성강호이다. 그는 고종에게 1895년 을미사변에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혼령을 볼 수 있다고 현혹했다. 이에 빠진 고종은 명성황후가 생각나면 매번 성강호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1년 사이에 벼슬이 뛰어올라 협판(차관급)에 이르렀으며 그의 집 문 앞은 항상 저잣거리처럼 붐볐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상소는 이어진다. “지금 중앙과 지방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대부분 지조가 없고 턱없이 벼슬을 차지한 자들입니다. 약간이나마 염치가 있고 조금이나마 절개를 지닌 사람들은 임용되자마자 바로 쫓겨나고 벼슬에 나서자마자 물러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폐하의 공정한 마음을 헤아려서 왔다가 나중에는 이 무리들의 배척을 받고 떠나버립니다.” 간사한 자는 벼슬을 다 차지하고, 염치 있고 절개 있는 자는 쫓겨나는 현실이 대한제국이었다. 이어서 안종덕은 고종의 늦잠 버릇에 대해 말한다.   “대궐 안의 일은 알아서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신이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듣건대 폐하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어 정오가 지나서야 일어나므로 아침 식사를 들자마자 벌써 날이 저물어버린다고 합니다. 대문이 열리면 행랑(行廊)이 마치 시장 같아지고 항간의 잡된 무리와 시골의 부정한 무리들이 밀치며 꼬리를 물고 달려들어서는 폐하 앞에서 버릇 없이 부산스레 들락날락하니, 이는 무엇을 도모하자는 일이겠습니까?폐하를 보좌하여 일을 주관해야 할 높은 관리들과 나랏일을 논의해야 할 신하들은 해가 지나도록 폐하를 만나 뵙지 못하고 그저 문서나 받아 처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판이니 온 나라에 시행되는 정사가 과연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사사로운 것이겠습니까? 이는 명철한 임금이 정사를 베푸는 원칙에 손상을 주는 것일뿐 아니라, 옥체를 조섭하는 도리에도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고종은 1870년대 부터 민왕후와 함께 밤새 연회를 즐겨 새벽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 버릇은 여전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공적인 도리를 널리 시행하여 사적인 총애를 받는 자들을 내쫓고 신망 있는 사람을 널리 등용하소서. 대책을 세울 때에는 조정에 묻고 개인들과 의논하지 말며, 인재를 선발하는 경우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지조 있고 충직한 선비들 속에서 구할 것이요, 연줄을 대어 결탁하는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들 속에서 찾지 말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굽어살피소서.”안종덕은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를 멀리하고 신망받는 사람을 가까이하라고 간언한다. 하지만 고종은 여전히 몇몇 편애하는 사람들에 의존하여 대한제국을 이끌고 있었다.    이제 상소는 신의(信義)로 이어진다.  “지금 폐하께서는 신의를 좋아하지만 주변의 신하들은 속이는 것이 버릇이 되었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유언비어가 떼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애통조서(哀痛詔書)를 여러 번 내렸으나 온 나라가 감격하는 효과가 없고, 엄격한 칙서(勅書)를 자주 내렸으나 탐관오리들이 조심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신은 폐하의 신의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의가 없으면 사람의 도리가 서지 못하고 신의가 없으면 하늘의 도리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신의가 없으면 제 몸도 수행할 수 없으며 신의가 없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군대를 버리고 식량을 버릴지언정 신의는 버리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군대를 버리고 식량을 버릴지언정 신의는 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논어’ ‘안연 편’의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나온다. 자공 : 정치란 무엇입니까? 공자 : “식량을 풍족히 하고, 군사를 넉넉히 하고,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 : “부득이해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공자 : “군대를 버려라” 자공 : “나머지 두 가지 중에 부득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 “식량을 버려라. 백성들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는 존립하지 못한다. (民無信不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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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화엄사 각황전 황제 화엄매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의 품에 안겨 오랜 세월 민초들의 숱한 얘기를 만들고 그들을 보듬어주었다. 세상사의 이치와 인간 도리의 예를 깨닫게 하는 깨달음의 고을, 구례는 한반도 남쪽의 큰 언덕이다. 이곳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인 554년에 인도 승려 연기조사가 세웠다. 그 뒤 남북국 시대에 의상대사가 지금의 각황전 자리에 장육전을 짓고 건물의 벽을 화엄석경으로 둘렀다. 하지만 이 화려했던 전각은 정유재란에 잿더미가 되었고 인조 때 벽암선사, 숙종 때 계파선사에 의해 각황전으로 되살아났다. 각황전은 글자 그대로 깨우침의 황제 전각이다. 왜란에 불에 탄 전각 복원을 위해 화주승을 뽑을 때다. 밀가루와 엿을 넣은 항아리에서 엿을 꺼내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을 뽑았다. 이때 스님 매월이 뽑혔고, 그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받으라고 했다. 그런데 매월이 처음 만난 사람은 아랫마을 가난한 벙어리 노인이었다. 매월의 사연을 듣고, 노인은 두말없이 계곡에 뛰어들어 목숨을 시주하였다. 8년 뒤, 매월은 청나라에서 한 어린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청나라 황태자로 벙어리였다. 그런데 매월을 만나자, 말문이 터졌다. 황제는 매월에게 아들의 환생 사연을 듣고, 전각 복원비를 시주하였다. 그래서 장육전은 황제를 깨우친 전각, 각황전이 되었다. 이는 각황전 두어 전설 중 하나지만, 자신의 본심과 본성을 깨닫는 게 각성이고, 각성이 곧 깨우침의 황제인 각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이곳 화엄사 승려들은 임진, 정유왜란에 분연히 일어났다. 화엄대선 겸 선교판이던 윤눌은 임란이 일어나자, 수군에 가담하여  1차 진주성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스님 해안도 의병장으로 진주성에서 싸웠다. 스님 설홍은 방처인 등 화엄사 승병을 이끌고 석주관에서 왜병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렇듯 임란과 정유재란 때 석주관에서 왜와 싸웠던 의승병의 기록은 의병장 조경남의 산서전진실기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이미 알려졌으나, 정조 22년인 1798년에 화엄사 승당을 중수할 때 나온 격문 ‘기서화엄사화상승○○’과 ‘정유란일기’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그러니까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음력 8월 7일이다. 진주에서 올라온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병이 구례를 집중 공격했다. 구례현감 겸 석주관 만호였던 이원춘은 남원으로 후퇴하고, 왕득인이 의병과 함께 왜와 맞섰으나, 모두 전사했다. 왜의 살인, 방화, 약탈행위는 극에 달했다. 11월 초다. 구례의 20대 젊은 선비들 3600여 명, 화엄사 주지 설홍이 이끄는 승병 153명이 의분에 떨쳐 일어섰다. 그리고 이들도 모두 전사했다. ‘들도 산도 성도 모두 태워 버리고 사람을 쳐 죽이고 쇠사슬로 손을 묶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찾아 울부짖고 아이는 어머니를 붙들고 운다. 어린아이를 어머니로부터 떼어내 어미를 죽이니,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지옥의 참상이다.’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온 승려 케이넨의 종군일기이다. 또, 이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승병에 대한 앙갚음으로 화엄사를 불 지르고 범종을 훔쳤으나, 섬진강에서 배가 전복되었다. 이곳 붉다 못해 검은 화엄매는 아름답다. 오죽헌 율곡매, 선암사 선암매, 백양사 고불매는 이제 나이가 들어 근근이 봄맞이하지만, 화엄매의 봄맞이는 화사하고 눈부시다. 이 화엄매 맞이는 세상사의 이치와 인간 도리의 예를 깨닫는 각성이다. 그게 또 깨달음의 각황이니 새봄에 화엄매를 맞이한다면 황제는 물론이고 그 무엇이 부러우랴?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3-17
  • 김종민 환경공학박사 “공직 경험 살려 고향 돕고 싶어”
    대담=주성식 선임기자전라남도 담양군은 대나무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다양한 관광자원이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알려지고 있다. 광주광역시라는 대도시에 인접해 있어 교통 여건 등 접근성이 뛰어난데도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있어, 여유로운 휴식이라는 최근의 여가 활동 추세에도 적합하다는 평가다.담양군의 북서쪽에 자리한 수북면은 삼인산, 병풍산 등을 뒤로 하고 무등산을 마주하고 있다. 과거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분리될 때 전국의 풍수 명인들이 전남 전 지역을 답사했는데, 수북면에서 무등산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지역을 보고 한반도 최적의 도읍지라고 입을 모았다는 것이 전해지기도 했다. 김종민(환경부 서기관 정년퇴임, 69세) 씨는 공직을 마친 후 귀향해 인생 2막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안락’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역할’을 해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고향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환경 전문가로서 환경청 출범부터 환경 관련 6개 기본법 제정을 주도한 김종민 씨를 만나 뜨거운 지역 사랑의 속내를 들었다. -환경청 정년 퇴직 후 귀향해 활동하고 있다. 그 내용은? 귀향 후 생활 여건이 안정되자 공직 경험이 사장되는 것이 아쉬웠다. 영산강유역환경관리청 홍보강사로 위촉돼 학교·군부대·사회단체 등에서 환경 강의를 했다. 한살림 생활소비자협동조합(광주) 이사 등으로 사회단체에도 관여했다. 공직과 다른 분야 특히 지역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됐다. 현재는 담양교육지원청 교육참여위원·광주광역시 규제개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귀향을 결심한 계기는? 국무총리실로 파견돼 있을 때, 직장암 3기 진단을 받았다. 과중한 업무와 박사학위 논문 준비가 겹치면서 건강에 무리가 왔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암 치료 과정에 공직 유지와 향후 삶에 대해 고민했다. 암 후유증 극복 등 건강 관리 차원에서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야겠다고 판단해 결정했다. -사회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내적으로 너무 침체돼 있다는 느낌이었다. 외적으로는, 가끔 접하는 지역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뭔가 활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활동 중 느낀 보람과 아쉬운 점은? 공직 경험으로 지역사회를 도울 수 있다는 점이 보람이었다. 아쉬운 점은 봉사하는 공직자의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내세울 만한 결과가 없다는 점이다. 덧붙여 객지에서 살다가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을 잘 포용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저서 출간을 준비 중이라는데? 환경부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다. 어린 시절 등 공직 입문 전 생활, 퇴직 후 귀향해 겪은 일도 추가했다. 재직 중 환경서적 3권을 펴냈다. 이번 책은 자료 위주의 전문서가 아니라 기억을 되살려 서술하려니 쉽지 않다. 요즘 공직 취업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진로를 선택과 적응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공직 생활에 대해 말해달라. 기업에 근무하다가 공무원으로 전직했다. 기업 급여가 공무원보다 많았지만 돈 벌이에 스스로를 소모하는 것 같았다. 직업은 생계 수단이기도 하지만 가치 추구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결정했다. 공직에서는 국민을 위해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자세로 일했다. 6개 환경법 제정에 참여한 것, 국무총리실에서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시각을 갖출 수 있었던 것, 전기차 관련 제도를 마련하는 등 전기차 보급을 직접 추진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아쉬움도 있다. 공무원 평가가 실적보다 연고나 주관적 판단, 시험 합격 여부 등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이런 평가제도는 행정 전반의 수준을 유지하고 제고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지방선거가 목전이다. 정치에 바라는 점은? 정치 지도자는 시대적 과제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 현재 산업화·도시화로 인해 각종 사고·재해가 빈번해지고, 환경오염·기후변화 등 환경문제가 심각하다. 이런 현안을 독재와 민주, 성장과 보전, 수구와 개혁 등 이분법적 사고와 땜질식 처방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 선거를 통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이 뽑히기 바란다. 유권자들도 신중하게 적임자를 선택하면 좋겠다.-세대 갈등이 심각하다. 노인으로서 느끼는 점과 대책은? 세대 갈등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두고 세대 간 갈등이 야기되는 건 당연하다. 지금의 젊은 세대(사회 진입층)는 주거·일자리·차별·재해·환경 등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 농경사회의 빈곤처럼 단순하지 않고, 대응하기 힘든 것이다.중장년 세대(사회 기득권층)는 아직 사회의 핵심에 있으면서 이분법적 사고로 문제를 대한다. 그 과정에 세대 간 갈등이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중장년 세대는 독단적 주장을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 현안이 젊은 세대 주도로 해결되도록, 그 과정에 지원하는 역할에 그쳐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대안은? 우리나라는 수도권 중심의 거대복합도시와 동남권의 중공업도시 그리고 농어촌과 연결된 거점 도시로 나눌 수 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곳과 농어업 소득 의존도가 높은 곳으로 갈린다. 현실적으로는 각 지역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산업화·도시화의 정도가 다른 만큼 문제와 대안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 문제를 일일이 거론하고 해결책을 한꺼번에 마련할 수는 없다. 지방자치기구 등을 통해 모든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삶의 신조가 있다면?책임감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자신·가족·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늘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명심했고, 업무에서는 요구되는 것 이상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운명처럼 공직에 들어가 환경행정으로 인생 1막을 보낸 사람!-향후 계획은? 그동안의 행정 경험을 살려 지역사회에 기여하려고 한다. 현재 담양교육지원청 참여위원·광주광역시 규제개혁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앞으로 범위를 넓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 볼 생각이다.-더 말하고 싶은 것은?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지 몰라도 삶의 질은 빈곤한 것 같다. 이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국가와 지자체를 비롯한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김종민 단장은 부인과 슬하에 아들 둘, 며느리, 손자가 있다. 책 읽기는 평생의 습관이며, 음악 듣기와 텃밭 농사로 소일한다. 좋은 먹을거리를 챙기고, 매일 태극권 연습과 반려견과 함께 자전거 타기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삼인산, 병풍산을 뒷배로 하고 영산강을 거느리며 너른 들 건너 무등산을 가늠하는 백수옹(白首翁) 김종민 박사! 흉중(胸中)에 천하를 경륜할 뜻을 품고 뇌리(腦裏)에 고금(古今)을 관통할 알음을 간직했으니, 꼭 무리가 모여 시끄럽지 않아도 그곳이 바로 도읍(都邑) 아니겠는가!
    • 기획.연재
    2022-03-1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진도 상만리 수호신 비자나무
      진도는 울돌목을 경계로 해남과 이웃하는 큰 섬이다. 이름처럼 보배로운 섬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있는 오랜 사람살이의 섬이다. 백제시대에 인진도군이 고군면 고성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시작하여 신라 때 진도현이 되었다. 고려 때인 1271년 5월 15일이다. 진도에 웅거하던 삼별초는 김방경과 몽골 원수 혼도의 여몽연합군에게 무너졌고, 주민 대부분이 몽골로 잡혀감에 따라 진도는 거의 빈터가 되었다. 또 1350년 충정왕 2년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왜구의 노략질에 남은 주민도 월악(영암군 시종면 월악리), 명산(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금산(해남군 삼산면)으로 피난하였으니, 이때에도 진도는 80여 년간 빈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 조선조 초에 주민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한때는 해남이나 영암 지역과 함께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우리의 삶이 거친 파도를 피해 잠시 젖은 날개를 섬바위에서 쉬는 갈매기와 다를 바 없다. 조선 3대 왕 태종 때인 1409년이다. 진도현을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이라 하였고, 1437년에 세종이 다시 분리하여 진도군이라 하였다. 이해 6월 29일에 초대군수 양경이 고성에 성을 쌓았다가 1440년에 지금의 진도읍으로 관청 소재지를 옮겼다. 그렇게 삼별초와 왜구의 노략질로 빈섬이 되었다가,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할 무렵이다. 1438년 세종대왕은 삼별초 대몽항전의 마지막 격전지인 남동리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남도진성을 쌓게 했다. 임회면 상만리는 남도진성과 가까운 해안 마을이다. 고려 후기의 석탑인 오층석탑이 있고 상만사지라는 폐사지 절터가 있는 곳이다. 1930년 무렵 여기 폐사지 터에서 미륵불이 나와 초가로 절을 지어 만흥사라 하였고, 1974년 4월에 새로이 절을 지을 때 고려자기 2점이 출토되었다. 지금의 절 이름 구암사는 마을 뒷산 바위가 ‘비둘기 바위’ 때문인 듯싶다. 이런저런 사실로 보아 구암사는 고려 후기의 절터 자리로 여겨진다. 아무튼, 세종대왕이 남동리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남도진성을 쌓을 무렵 이곳 상만리에서 비자나무 한 그루가 땅을 뚫고 새움을 틔웠다. 거친 바람에 아랑곳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왜구 때문에 삶터를 잃고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옛터를 일구던 때부터 지금까지 600여 년을 함께하고 있다, 그러니 두 팔 벌려 안아 네 아름이 넘는 이 우람한 상만리 비자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이자, 수호신이다, 사람들이 나무에 오르다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 신령스런 나무이다. 난대성 상록침엽수로 한자의 비(非)자와 비슷하여 얻은 이름인 비자나무는 주로 절이나 마을에서 심고 가꾸던 귀한 나무로 주변에 모기도 서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4월에 꽃 피어 10월에 익는 열매는 영양이 풍부하고, 간식거리이며 구충제, 급체, 가래, 변비, 탈모, 여성병 등 옛 가정의 만병통치 상비약이었다. 또 비자나무로 만든 가구가 갈라지면 젖은 수건을 덮어 놓는다고 한다. 그러면 스스로 갈라진 틈을 메꾼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한 나무이다. ‘한 해 농사지어 삼 년을 먹는다’는 진도는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여 옥주라고도 했다. 사람들은 넉넉한 인심에 애향심이 높다. 이 사람들이 사는 한반도 남쪽 끄트머리 바닷가 마을의 한 그루 비자나무이지만, 참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나무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신하여 대대손손 우리를 지켜주는 신령스런 조상님 나무이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3-10
  • 중추원 의관 “조정이 청렴, 공정하지도 않다”상소
    1904년 5월 21일에 고종은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칙유(勅諭)하였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백성들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관청을 세우고 직무를 나누며, 어진 사람을 선발하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오직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에 있을 뿐이다. 청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재산을 산처럼 늘리고, 근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생업에 힘쓰며, 공정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반드시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풀리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신의로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법령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아는 법이다. 짐이 왕위에 오른 40여 년 동안 비록 덕이 없어서 선대 임금들의  크나큰 도리를 빛나게 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한 가지 생각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방도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안으로는 부(部)와 부(府)의 여러 신하들이 예전대로 안일하게 지내면서 백성들을 구원하는 길로 나를 바로 이끌어 주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지방 관리들이 탐욕에 젖어 나에게 백성들의 정상을 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잔학하게 침해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근심과 고통을 호소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왕 백성들이 생계를 잃고 앙상하게 여위어 어느 순간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질지 모르게 되고, 심지어 곤궁을 못이겨 도적이 되어 가지고 백주(白晝)에 항간에 달려들어 노략질을 제멋대로 해대는데, 농사를 망쳐 기근이 든 해이면 횡포하기가 더욱 심하였다. 짐이 먼저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고서 그에 기초하여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대한 내용으로 8자의 글을 직접 써서 내려보내니, 이것을 가지고 경계하고 힘써라.아! 여러 신하들은 이것을 걸어 놓고 해와 달처럼 밝히고, 이것을 받들어 쇠와 돌처럼 굳게 지킬 것이다. 청렴한 지조를 지켜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며, 직무에 근면하여 성의를 다하며, 마음을 공정하게 가짐으로써 한쪽에 편중하는 일을 없애며, 명령에서 신의를 지켜 법과 기강의 날을 세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질적인 병통을 없애고, 도적이 사라지게 하며, 의식(衣食)을 넉넉하게 하고, 예의의 기풍을 일으켜 세워, 백성들이 부부간의 안락을 누리게 하라. 아! 모든 관리들과 전체 백성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짐의 지극한 뜻을 본받고, 나라와 더불어 밝은 세상을 같이 이룩하여 태평성세의 복을 길이 누려야 하기 때문에 칙유한다.”이어서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렸다. “옛날 영조 임금 때에 영조께서 직접 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本固邦寧〕’는 내용의 여덟 글자를 각 관청의 벽에다 걸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훌륭한 글이 해와 달처럼 빛을 뿌리고 있다. 짐이 지금 이처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칙유(勅諭)하면서 ‘청렴과 근면, 공경과 신의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라〔廉勤公信以安斯民〕’는 여덟 글자를 직접 써서 내려보낸 것도 선대를 잇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들에 신칙(申飭)하여 이 글을 새겨 청사(廳舍)의 벽에 걸어 놓고 늘 보며 조심하면서 그대로 지켜나가 어김이 없도록 하라.” (고종실록 1904년 5월 21일) # 중추원 의관 안종덕의 상소  이로부터 두 달 정도 된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議官) 안종덕이 ‘조정이 청렴, 근면, 공정하지도 않고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5월 21일에 내린 칙서(勅書)를 삼가 보니, 빛나는 586자의 말은 간곡하기 그지없고 엄정하면서도 측은하게 여긴 것이었는데,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며 신하들을 신칙(申飭)한 내용은 마치 해와 달처럼 밝고 쇠나 돌처럼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청렴이라는 것은 의리와 예의의 틀이고, 근면이라는 것은 지식과 행동의 용기입니다. 공정이라는 것은 어진 이의 큰 덕이며, 신의라는 것은 덕을 세우는 기초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폐하가 임오년(1882) 이후부터 수십 년 동안 환난이 생길 때마다 밝은 조서를 내린 것이 몇천 마디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자신을 반성하고 아랫사람을 격려하며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 일하겠다고 다짐 안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관리들의 부패는 전(前)과 같아지고, 무사안일과  불공정도 전과 같아지고, 신의를 잃는 것도 전과 같았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말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얕고, 마음으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깊다고 합니다. 군자는 말을 할 때는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을 할 때는 말을 돌아보니,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편이 더 나은 것입니다.가만히 보건대, 폐하께서는 말로 사람을 감동시키려 했지,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씩 진술하겠습니다.”    안종덕은 고종의 칙유가 ‘진정성’이 없다고 상소한다. ‘보여주기식’이라는 것이다. 먼저 안종덕은 탐오(貪汚)를 지적한다.    “대체로 아래가 위를 따르는 것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들풀이 바람이 부는 대로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윗사람이 청렴한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탐오(貪汚)하며, 윗사람이 근면한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게으르며, 윗사람이 공정한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사리(私利)를 챙기며, 윗사람이 신의가 있는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속이는 짓을 하겠습니까? 지금 폐하는 청렴한 것을 좋아하지만 조정의 신하들은 탐오 행위를 한 오점을 가지고 있고 지방의 백성들은 생계가 거덜 났다는 탄식이 많습니다. 뇌물이 성행하여 관청의 법도가 문란해졌으며, 탐학한 자들이 도처에 넘치고 도적이 빈번히 일어납니다. 이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은 폐하께서 청렴에 착실하게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이윽고 안종덕은 내장원의 폐해를 지적한다. “무릇 탁지부의 정공(正供)은 모두 폐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또 무엇 때문에 별도로 내장원(內藏院)을 설치하고 탁지부에 들어가야 할 일체의 공전(公田), 사전(私田), 개인 토지, 산과 못, 어장과 염전, 인삼포(人蔘圃), 광산 등을 떼어내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탁지부의 경비가 바닥나 녹봉과 급료, 공사비로 줄 비용이 없으면 대뜸 내탕전(內帑錢)이라 하여 바꾸어서 충당하게 하고는 뒤따라 나랏빚 독촉하듯 상환을 요구합니다.근래에는 언덕과 들판, 산림과 강이나 바다, 제방과 방죽, 어장과 사냥터로서 개간해서 곡식을 심고 확장한 것들을 탁지부에 넘기지 않고 어공원(御供院)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내장원에서 관할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임금에게 올릴 공물(貢物)을 꼭 이런 묵인 땅이나 황무지 같은 몹쓸 데서 나는 물건들로 바쳐야 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백성들에게 청렴치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풍속이 어떻게 아름다워지며 백성들이 어떻게 탐욕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상소는 매관매직의 폐해로 이어진다.   “대체로 벼슬을 파는 문제로 말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망치는 길입니다. 중국 한나라의 서쪽 후원(後苑)에서 벼슬을 팔고, 진나라의 개인 집에서 벼슬을 팔던 일이 모두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 전철을 몸소 밟으십니까? 대체로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은 하늘이 준 벼슬이고 임금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어찌 공공연히 사거나 팔아먹을 물건이겠습니까? 저 간교한 토호들과 아전들이 감히 요행으로 폭리를 얻어 볼 생각을 품고, 부유한 자는 재산을 털고 가난한 자는 이리저리 빚을 내어 먼저 10배 값을 실어다 주고서 밑지는 장사로 수령 자리를 사는데, 그런 사람이 나랏일을 위하겠습니까? 자신을 위하겠습니까? 빚을 갚고 제가 차지할 이득을 장차 어디에서 짜내며, 부임한 날부터 머리를 싸매고 하는 짓이란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게다가 사적으로 뇌물을 받아먹는 행위가 계속되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전을 못 찾을 것이니, 이런 형편에서 그가 하는 정사가 과연 청렴한 것이겠습니까, 탐욕스러운 것이겠습니까?
    • 기획.연재
    2022-03-07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신안 자은도 천사 여인송
      신안은 섬으로만 이루어진 군이다. 남도의 젖줄 영산강이 낳은 아들, 딸이 1004개이니 천사의 섬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니 이 섬 고을을 다 보려면 하루에 한 섬이어도 3년이니, 참으로 신안은 섬 부자다. 이 중 자은도에 가려면 먼저 목포에서 연륙교인 압해대교를 건너 압해도로 간다. 그리고 2019년 4월 4일 여기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한 천사대교를 다시 건넌다. 천사대교는 우리나라 교량 중 영종대교, 인천대교, 서해대교에 이어 4번째로 긴 해상교량이다. 또 이곳 암태도에서 은암대교를 건너면 자은도이다. 자은도는 청동기 유적인 지석묘와 패총이 있고, 삼국시대에 나주목에 속하였으며, 1377년 고려 우왕 때 수군지휘부인 군영지였고, 두봉산에 산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말을 사육하던 큰 목장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수군진지가 있었다. 또 오랜 전통의 고기잡이 방법인 독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자은도라는 지명은 임진왜란에 이여송 군으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두사춘’이 반역으로 몰리자 이곳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진 뒤, 사랑과 은혜의 자은도라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전국적인 소작쟁의 도화선이 된 1923년 8월부터 1년여에 걸친 암태도 소작쟁의는 도초도, 자은도, 매화도, 하의도로 이어졌다, 1925년 12월부터 다음 해인 1월까지의 자은도의 소작쟁의에는 일경 150여 명이 동원되었고 농민들은 일경과 지주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 이 일로 123명이 수감되었고 2020년 이들 중 26명의 공로자를 확인하여 2021년 8개월의 옥고를 치른 자은도의 김진운 등 11명이 1차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자은도는 우리나라의 섬 중 열두 번째로 큰 섬이다. 붉가시나무, 녹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 난대성 식물이 다양하게 자라는 섬 동쪽의 해발 364m 두봉산 아래 서북쪽으로 농경지가 펼쳐진다. 또 해안 곳곳의 만과 갑을 방조제로 막아 염전과 농경지로 이용한다. 특히 동쪽 해안의 대율염전과 부속섬이었던 욕지도가 농경지가 조성되면서 연결되었다. 이곳 자은도는 해수욕장 부자이다. 둔장, 외기, 내치, 양산, 분계, 신성, 백길, 면전, 신돌 등 큰 해수욕장이 9개이고 신성 마을에는 개인 집 앞마당이 해수욕장인 곳도 있다. 백길해수욕장은 3km가 넘는 너른 모래밭에 수심이 얕아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양산 해수욕장에는 ‘세계 조개 박물관’과 ‘천사섬 수석 미술관’이 있다. 또 둔장 해수욕장의 동구리섬과 할미도 등 두 개의 섬을 잇는 1004m 보행교는 ‘무한의 다리’라 하는데, 이곳에서 보는 해넘이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평생의 추억이다. 그리고 둔장에서 외기, 내치, 양산으로 이어지는 해변에서는 질 좋은 규사가 생산된다. 무엇보다 자은도의 해송 숲은 천혜의 자연경관이다. 그 해송 숲이 아름다운 분계 해수욕장에는 애처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여인송’이 있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아내가 어느 날 꿈에 물구나무를 서서 소나무를 바라보니 남편의 고깃배가 보였다. 그날부터 어부의 아내는 큰 소나무 위에 올라 기다리다, 그만 거꾸로 떨어져 추위에 얼어 죽고 말았다. 돌아온 남편이 부인의 시신을 그 소나무 아래에 묻어주자, 나무는 거꾸로 선 여인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야기가 주는 몫은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가며 사는 날까지 행복하라는 것 아니겠는가? 받거나 챙기고 돋보이려는, 허황되고 허망한 욕심을 버리고, 아낌없이 모든 걸 주려 한다면 그게 곧 행복이고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3-03
  • 윤영민, 화순군수 출마선언… “‘행정하는 양심’ 되고파”
    인구 10만명 목표·지하철 연결 공동학군제 도입농촌 농민 권익 최우선… 경제적 자립 도시 추진메디컬 & 베드타운 조성… 정착하는 마을 활성화 지난 1월27일 기자회견을 통해 화순군수 출마를 선언한 현 화순군의회 윤영민 부의장을 만나 출마 선언 배경과 당선 후 군정 계획을 들어봤다. 윤 후보는 2014년 제7대 화순군의회 의원 당선으로 정치에 입문, 지역현안 해결과 교통봉사 활동 등 꾸준히 입지를 다져 온 것으로 알려졌다.                 /편집자 주-먼저 화순 군민에게 인사말과 약력을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저는 화순 토박입니다. 초·중·고를 화순에서 마치고 전남대학교 정책학 석사과정을 거처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 중에 있습니다. 또 화순 초등·고등학교 총동문회와 화순사랑 나눔봉사단 단장, 화순YMCA 부이사장직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화순을 위한 실질적인 역할을 해보고자 나름대로 결심하고 2014년 제7대 화순군의원에 당선, 제8대 전반기 의회운영위원장, 후반기 현재는 부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고향 토박인만큼 누구보다 화순에 대한 애정이 깊습니다. 따라서 화순군민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필요한 것들 모두를 찾아내 대책을 수립하고 추진해서 화순 발전을 이끌어 보고 싶습니다.  -지난 1월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화순군수 출마 의지를 밝히셨는데 출마를 결심하게 된 배경을 여쭙겠습니다. 사람들이 저한테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 왜 정치를 하느냐였습니다. 저는 사고(思考)의 틀이 잡히면서 ‘행정하는 양심’이라는 말이 참으로 가슴에 닿았습니다. 실천하는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를 하고싶은, 오직 화순의 발전과 주민들만을 위한 군수가 되고 싶습니다. 창조형 군수후보 윤영민은 이제 군민 여러분과 인화정치를 구현하겠습니다. 윤영민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인구 10만 새도시를 창조할 군민만이 존재합니다. 화순군민을 받들고 섬기면서 윤영민과 함께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은 모두가 저의 동지입니다. 윤영민이 군수가 되면 더 이상 갈등이 없습니다. 오로지 화순군에는 인화정치 만이 존재합니다. 진심으로 구현하고 실천해 보고 싶습니다. -당선되신 후 다소 열악한 측면이 있는 재정자립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화순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주민들의 소득증대에도 기여하는 등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복안이 있는지 궁금합니다.제 복안은 일자리 2만개 창출, 주택 2만개 건설입니다. 택지계발 사업을 통해 신도시를 건설해 공동주택을 우선으로 신성장 산업단지와 벤처타운을 설립하므로써 일자리 2만개 목표를 달성하겠습니다. 또 동복댐 관리권을 복원, 233억 기금을 조성해 적벽을 관광문화단지 사업으로 추진하고 능주·한천·이양·춘양·청풍을 잇는 선비문화벨트 조성, 이서에 관광형 거주타운, 능주에 자동차 극장 등 관광문화 테마 추진을 도모하겠습니다. 아울러 화순읍과 도곡을 잇는 체류형 의료휴양벨트 조성, 즉 메디컬타운을 건립해서 해외 의료 관광객까지도 유치, 군민 소득증진을 꾀하겠습니다. 이 밖에도 농축산 브랜드 사업과 인터넷 종합 쇼핑몰을 개설, 활성화해서 생산은 농민이 판매는 농협과 행정이 책임지는 시스템을 확립해 본연의 소득사업에도 총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앞서 드린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말이긴 합니다만 화순군의 인구가 점진적 증가추세에 있다고 하지만 체감할 만큼 눈에 띄는 상황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 자체 증가를 유도하거나 인구 유입책 등 모색해 놓은 방안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사실상 우리 화순군의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는 인구 증가라고 봅니다. 인구 유입책의 실효성을 갖추기 위해 광주 화순간 원활한 교통이 시급합니다. 당초 국토부의 경전철계획은 6m의 타워를 세워 모노레일 식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화순이 이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14년 전에 도시계획도로로 편입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문제는 국토부에서 10년에 한번 씩 평가하는데, 떨어집니다.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인구가 줄어들고 그로 인해 이용객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역 학교를 명문으로, 대학을 유치해 도시형 교육정책을 만들고 화순에 가장 적합한 보건 특성화 대학을 유치해 글로벌 인재육성 센터를 건립하고 이를 뒷받침할 가장 중요한 광주 화순간 공동학군제를 추진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인구 대비 병원과 병상수가 월등히 많아 의료 시설을 연계한 복합적인 위성도시로써 면모를 이루어 나간다면 인구 증가 문제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화순군민을 위한 복지정책이나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상해 본 것과 추진하고자 한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화순형 복지정책을 실행하고 아울러 적제적소에 군민이 필요로 하는 건강 체육 정책으로 군민을 모시겠습니다. 대학 학자금 무상 지원으로 4무 시대를 열어보고자 무상 고교 등록금, 무상 급식, 무상 교복, 무상 대학등록금 등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소년 문화 복지 공간을 조성하며 복지종사자들의 헌신적 노력에 대해 이들에게 처우 개선비를 지급하겠습니다. 반려동물 산업을 육성하고 펫 밀리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장애인 복지관을 건립해 활동범위를 넓힘으로써 장애인 처우 개선과 자립을 돕겠습니다. 65세 이상 노령인구에 대상포진 등 무상 예방접종을 시행하고 다목적 체육관 건립으로 어르신들을 위한 골프장, 전천후 테니스장, 청소년을 위한 풋살구장, 화순 군민들이 가장 원하는 운동 즉 수영장을 건립해 폭 넓은 화순군민 만의 복지를 추진하겠습니다. 화순군민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괄적으로 실천해 볼 생각입니다. -여러 주민들께 여쭤봤고 각종 집단민원의 원인을 살펴보면 대부분 주민들과 소통 부족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군민들과 원만한 소통 방안이나 대책을 들어보겠습니다.항상 그렇듯 이해관계가 얽히거나 실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늘 마찰음이 발생합니다. 여기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어떤 사업을 진행할 때 얼마나 지역 주민들과 화합하고 이익을 공유하며 주민들의 권리를 얼마나 지켜줄 수 있는지가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주민 수용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주민 수용성을 강조했을 때 비로소 이익공유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 민원 해결책은 이익공유와 주민참여제 도입입니다. 주민이 참여해서 이익공유도 하고 또 시설 유지보수, 운영하며 나오는 재화를 주민들에게 보상으로 제공한다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발전기가 집 뒤에서 돌아가는데 좋아 할 사람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돌아가면서 발생하는 이익이 내게 돈이 된다면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사고의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시당초 사업에 진입할 때 주민들에게 수용성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민들을 어떻게 참여시킬지, 이익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가장 중요한 요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민원이든 개인 민원이든 합리적 설득이 우선돼야 하고 그에 따른 실리라든가 혹은 사회적인 올바른 판단이 서게끔 해야 합니다. 지도자의 몫은 앞서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과 관용을 전제로한 합리라고 생각합니다. -화순군은 광주의 위성도시 성격이 강한 지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같은 위성도시 성격을 띠고 있던 인근의 나주는 혁신도시로 탈바꿈했고 군단위 장성, 담양에 비해 산지가 많은 화순군의 여건상 입지적 환경이 좋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화순군수에 당선되면 어떤 차별화로 화순군을 부각시킬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지금 처해있는 모든 상황에서 가장 위기 상황은 인구소멸입니다. 이 인구소멸을 극복하지 못하면 화순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이야기해도 인구가 없다면 정책은 소용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포커스를 인구 늘리는 것으로 맞추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구 증가를 우선으로, 어려워도 해야합니다.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을 연장하고 공동학군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유치하고 싶은 학교는 보건계열 대학교입니다. 화순의 1번 사업이 보건산업입니다. 그에 따른 근거는 예전부터 화순을 테라피 화순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테라피는 의료 메카니즘과 의료 치료메카니즘, 휴양 메카니즘을 합성해놓은 말입니다. 앞으로 화순에 2034년까지 국가에서 통과한 게 1조 4000억원의 의생명공학 사업이 들어오기로 돼 있습니다. 이미 그런 많은 관련 기업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R&D기업, KRT라고 해서 동물대체 산업도 들어와 있는 등 상당히 많은 의생명공학 사업이 들어와 있습니다. 블루이코노믹에 의생명공학을 담당하는 것이 화순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료산업적인 메카니즘을 말씀드린 것이고 의료산업과 주거가 연결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우리 화순 군민이 6만 4000인데 우리 화순의 병상이 인구대비 많습니다다. 약 4800개 병상이 있습니다. 우리 화순의 적정병상은 750개가량입니다. 근데 왜 4800개가 있느냐. 먼저 전대병원이 720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순 전대병원은 전국 군 단위에서 대학병원이 저렇게 큰 것이 있는 것은 우리 화순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부수적으로 요양병원 등 할 것 없이 4800병상이 있습니다다. 그리고 의료 종사자가 1만명입니다. 6만 4000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데 병원 종사자만 1만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료산업은 화순이 광주보다 집약돼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의사, 간호사, 의료행정 및 청소노동자 등의 의료계 종사자들의 자급률은 20%도 안됩니다. 사실상 양성이 불가능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건계 대학 단과 대학을 건립, 폐광지역에 넣으면 양성에 좀 더 박차를 가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과대학 유치에 필요한 2만평의 부지가 필요한데 공간부지는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광산에서 나오는 유효 토지가 100만평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광주에 있는 대학 중 단과대학만 화순으로 나오면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군민들에게 바라고자 하는 일이나 당부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저는 군민의 소리를 최우선으로 듣겠습니다. 군민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철저하게 파악해 이를 이뤄낼 수 있도록 모든 화순군 공직자와 함께 불합리한 규제를 전면 타파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쏟겠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일하는 공직자가 대접받는 문화 정착을 활성화시키며 인사추천제를 통해 창조행정 문화를 정착시키고 정책 자문 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군민과의 소통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마음에 새기겠슴니다. 누가 당선되든 화순을 위한 행정을 펼치지 않겠습니까만 저는 쓴소리조차 마다 않고 늘 군민의 소리를 들으며 군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주병오 기자
    • 기획.연재
    2022-03-01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조계산 천자암 쌍향나무
      냄새와 향기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무색무취라는 말도 있지만, 그 무색과 무취도 색과 취의 특성이니 모든 만물이 색깔은 물론 냄새와 향기를 갖고 있는 셈이다. 냄새는 어떤 사물이나 분위기 따위에서 느껴지는 특이한 성질이나 낌새를 말하지만, 좋은 뜻으로 쓰이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꽃, 향, 향수는 향기라고 하니 좋은 뜻이다. 따라서 사람도 이익에 눈멀어 살살거리면 냄새나는 녀석이라 눈 흘기고, 이타적 삶을 사는 분에게는 장미나 치자꽃처럼 향기로운 분이라고 존칭한다. 측백나뭇과 향나무속인 향나무는 그 향기로움으로 얻은 이름이다. 그리고 줄기가 누운 눈향나무,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곱향나무,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뚝향나무, 북아메리카 원산인 연필향나무, 가지가 나선 모양으로 돌아가는 가이쓰가향나무 등이 있다. 화순 동복천이 무등산 앞쪽의 좁은 골짜기를 나온 뒤, 사평을 지나면서 들녘을 적시다가 조계산을 만나 한바탕 크게 굽어지는 곡천에서 송광천을 만난다. 그 곡천에서 만난 동복천과 송광천이 사이좋게 주암호를 들어가는 걸 보며 송광천을 거슬러 벌교 쪽으로 조금 가면 송광면 소재지 이읍마을이다. 잠시 쉬어 동쪽으로 싸목싸목 오르막을 한 시간여 걸으면 조계산 중턱의 천자암에 이른다. 천자암은 조계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두 그루의 향기로운 쌍향수가 있는 범상치 않은 절집이다. 여기 나란히 서 있는 두 그루의 수령 8백여 년의 쌍향수는 곱향나무이다. 왼쪽 항나무가 오른쪽 향나무에 은근히 기대며 끌어안은 모습이다. 한 나무를 밀면 두 그루가 함께 움직이고 만져보기만 해도 극락에 간다고 한다. ‘천자암에 당도하니, 일지요 쌍향수도 흔들어보고’는 ‘순천가’의 일절이다. 한 나무를 흔들면 두 나무가 마치 한 그루처럼 흔들린다는 일지요(一枝搖)이니, 신비롭고 경이로운 나무이다. 천자암은 고려 때 담당국사가 창건했다. 당시 보조국사가 금나라 장종 왕비의 불치병을 치료해 주었고 이를 인연으로 왕자인 담당이 제자가 되었다. 두 사람이 귀국하여 천자암을 열고 짚고 온 지팡이를 꽂으니 잎이 나고 가지가 벋었다. 하지만 이 쌍향은 조선 선조 때 서역에서 건너왔다고도 하고, 보조국사와 담당국사가 살았던 시대 차이도 100여 년이다. 그럼에도 사실이 무엇이든 향기로운 사연이다.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게 절하는 듯한 모습은 스승께 예의를 갖추는 제자의 예절이고, 한 나무가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니, 이는 인간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자연의 오묘한 가르침이다. 이곳 천자암 가는 길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밤꽃 향기다. 비리비리쫑쫑, 보리밭 고랑에서 종다리 하늘 높이 튀어 오르고, 먼 산 뻐꾸기 울음에 콸콸 흐르는 물길 잡아 논모를 심을 때, 온 산에 흐드러지게 밤꽃 피는 그 무르익은 봄날에 가면 참 좋다. 아카시아 꽃향은 은은하지만, 그 꿀은 향수 맛이다. 밤꽃 꿀은 톡 쏘며 쓰나, 꽃향기는 향나무 향이다. 이 세상에 생명을 잇게 하는 정(精)향기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속물도 있지만, 온몸을 가시로 둘렀으나, 밤은 뭍 생명의 식량이 되는 고마운 열매이다. 천자암 가는 길에 지천으로 밤꽃이 필 때, 그 밤꽃 향기 맡으며 싸목싸목 걸어 천자암의 쌍향수를 만나보자. 쌍향나무 앞에서 함께 간 이들과 넌지시 어깨에 기댄 모습으로, 하나가 흔들리면 모두가 흔들리는 일지요 사진도 남겨보자.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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