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Home >  기획.연재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
“현장에 답이 있다” 이병노 담양군수, 민선 8기 키워드 ‘현장 행정’
- 12개 읍·면 순회 첫 '군민과의 대화' 성료… 소통 강화 시장·경로당 등 현장돌며 애로사항 청취·주요정책 설명 정책기조 '경청·섬김·공정·혁신'… 일하는 공직풍토 조성 지역경제 활성화·규제개혁·고향사랑기부제 행정력 집중 이병노 담양군수가 민선 8기 ‘새로운 담양 군민과 함께’라는 슬로건에 걸맞은 소통과 현장 중심의 역동적인 행정을 펼치고 있다. 이 군수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취임 이후 매일 8시에 출근해 오전에는 주민 면담과 사무실 업무를, 오후에는 주민과 소통하고 현안 사업장 점검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14일부터 23일까지는 민선 8기 출범 이후 첫 번째 찾아가는 군민과의 대화를 열어 12개 읍·면을 순회하며 군정 운영방향을 설명하고 지역 현장에서 직접 소통하며 군민의 애로사항과 의견을 수렴했다. 이번에는 보다 많은 군민과 소통하기 위해 현장 질의와 더불어 불편 사항이나 궁금한 부분에 대한 127건의 질의를 사전에 받아 관련 실과장과 군수가 함께 답변하는 방식을 더했다. 참석한 군민들은 평소 일상에서 겪었던 애로사항을 비롯해 주요 정책에 관한 질의와 군정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제안했다. 이 군수는 “이번 군민과의 대화를 통해 군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맞춤형 해답을 찾아 군민이 체감하는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며 “민선 8기의 실질적인 원년인 올해 역점 사업을 철저히 준비해 ‘다함께 행복한 자립형 경제도시 담양’ 건설의 기반을 다지겠다”고 말했다. 특히 이 군수는 이번 군민과의 대화를 통해 농어촌버스 단일요금제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담양군 농어촌버스 단일요금은 성인은 1000원, 청소년은 100원으로 오는 3월 1일부터 담양군 관내에서 승차하고 하차하는 경우 거리와 관계없이 가능하다. 또한 군민과의 대화에서 노인 일자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근로시간을 매달 2일간 연장해 줄 것을 요구하자 이 군수는 예산 약 5억2000만 원을 확보해 근로시간을 연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군수는 “100세의 아버님과 96세의 어머님을 모시고 살고 있어 지역 어르신들의 고충과 불편 사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고향을 떠나지 않고 요양 받는 시스템구축, 보건소 기능 고도화, 복지시책 확대로 공적 책임을 강화하는 등의 행정에 관심을 두겠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담양군의 소통 행보는 민선 8기 출범 이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앞서 이 군수는 민선 8기의 실질적 원년을 맞은 지난 1월 첫 행보로 전통시장을 방문해 상인들을 만나 현장에서 느끼는 애로사항과 전통시장 활성화 방안을 경청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지속적인 가뭄으로 인한 군민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물순환사업소와 신계정수장을 찾아 가뭄 대책 추진 상황과 안정적인 수돗물 공급을 위한 정수장 운영 실태를 점검했다. 설 이후에는 12개 읍면의 경로당을 방문해 새해인사와 함께 민선 8기 핵심 정책과제인 향촌복지에 대해 설명하고 직접 어르신들을 만나 소통하며 어르신들이 만족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조직 내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민선 8기 담양군은 경청과 섬김, 공정과 혁신이라는 네 가지 원칙을 정책 기조로 삼고 각 분야에서 사람과 제도, 환경을 새롭게 탈바꿈시키고 있다. 군수 중심의 군정 운영에서 탈피해 공무원 스스로가 문제점을 찾고 지역의 발전과 군민에게 봉사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공직풍토를 조성하고자 행정조직을 개편하고 사무전결 처리규칙을 개정해 직급에 맞는 권한과 책임을 강화했다. 또한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따뜻한 공직문화를 강조하며 임신·출산·육아를 이유로 경력관리, 인사평가, 부서배치, 임금 등에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취임 시 강조했던 규제개혁도 속도를 내고 있다.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는 규제개혁’을 목표로 「담양군 규제개혁위원회 설치 및 운영 조례」를 개정하고, 규제개혁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문성 확보를 위해 위촉직 민간위원을 확대하며 유연한 규제개혁을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 군수는 “군민의 행복권과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군민 편에 서서 규제를 개혁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지역의 경제를 떠받치는 산업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도 분주히 움직였다. 지난해 10월에는 지역 생산품 구매 활성화를 위한 관내 설계·생산업체와 간담회를 개최해 지역 업체의 어려움을 공유했으며, 올 1월에는 일반산업단지와 농공단지 입주기업체 협의회와의 간담회를 열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기업들을 격려하고, 담양군의 기업친화적 지원정책을 홍보했다. 또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취임 이후 국회와 중앙부처 및 전남도를 수차례 방문한 결과 영산강 관방지구 통합하천사업 500억 등 총 68건의 사업, 1286억 원을 확보했으며, 지역경제 활성화 최우수기관 등 25개 분야에서 우수자치단체로 선정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더불어 담양군은 올해부터 시행된 고향사랑기부제에 있어서도 전국 각지에서 응원이 전해지며 두 달여 만에 기부자가 1000명을 넘어섰다. 이는 출향 인사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담양 사랑을 전해주신 분들의 마음이 모여 이뤄낸 성과로, 담양군은 다양하고 질 높은 답례품의 신속한 선정과 고향사랑 홍보단 출범 등 제도 시행 전 발 빠르게 대응해 왔다. 특히 이 군수는 “향후 지방자치단체 재정의 관건은 고향사랑기부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직접 각 지역의 향우회에 참석해 제도의 취지를 설명했으며, ‘참이슬’ 소주병에 고향사랑기부제 홍보 라벨을 부착하는 등 제도의 활성화를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앞으로는 고향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답례품과 더불어 고향 사랑을 전해주신 분들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지역의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혁신사업을 발굴하는데 집중할 계획이다. 이병노 군수는 “취임한지 약 7개월 정도가 지났지만 매일 현장에서 군민과 소통하며 군정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며 “올해는 새로운 담양을 군민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도록 신명을 바쳐 일하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
- 기획.연재
-
“현장에 답이 있다” 이병노 담양군수, 민선 8기 키워드 ‘현장 행정’
-
-
주성식의 어른 왈/직접정치, 무지를 극복한다
- 세상에는 악(惡)한 것이 많다. 윤리 도덕적인 것에서부터 관습이나 상식 그리고 실정 법이 규정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각 집단이나 단체 등 우리 사회는 그런 기준을 넘는 행위를 제재한다.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사항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악(惡)할까? 종교와 철학 그리고 자연·사회과학 등 여러 분야의 숱한 사람들이 연원을 궁리하고 원인을 천착(穿鑿)하고 가설을 세워 대안을 제시하고 실험을 진행했다. 타고난 천성? 성장하는 환경?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 결과는 악(惡)의 근원에 대해 ‘뚜렷한 답 없음’으로 좁혀지고 있다. 따라서 마땅한 대안이나 효율적인 해결책도 없다. 아무리 요란을 떨어도, 장님들이 코끼리를 더듬는(群盲撫象) 식이요 우물 속에서 하늘을 가늠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이 온통 악(惡)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능력, 시간과 재산 심지어 목숨까지 아무 조건 없이 내놓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자기 이외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려는 이들이, 인류와 세계를 유지하는 기반이며 추동하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악(惡)한 것과 악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대립하고 투쟁한다. 서로가 존립의 원인이 되고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경쟁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힘겹고 괴롭고 아플 수밖에 없다. 인류는 발전하는 과정의 난관을 극복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를 모색해왔다. 악(惡)에 대해 설(說)이 많지만, 광범위하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즉 그 근원은 미련함(痴) 혹은 무지(無知)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지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최대 다수의 합의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게 민주주의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의(간접) 정치라는 허술한 제도의 약점을 파고든 모리배들이, 물리력을 확보하고는 신(神) 따위 불가침의 권위를 날조(捏造)하여, 공권력을 독점하고 폭력으로 유지하는 참사(慘事)가 반복돼 왔다. 그래서 직접정치다. 국민을 도탄(塗炭)에 밀어넣고 국가를 파탄(破綻)으로 빠지게 해 뱃속을 채우는 기생충들을 박멸(撲滅)하고 뿌리뽑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최근 광주광역시 지산나들목 폐쇄와 관련한 용역에서도 직접정치의 필요성은 절박하다. 시 최고권력자는 이미 ‘맘대로’ 폐쇄를 결정하고 ‘요식행위’로 용역을 실시했다는 것이 여러 경로로 알려졌다. 전지전능(全知全能)이라도 되는 양, 위임된 권력을 농단하는 짓이라는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미련하고 따라서 악(惡)하지 않은가? 간접정치의 참혹한 결과요, 그 피해를 광주시민이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
- 기획.연재
-
주성식의 어른 왈/직접정치, 무지를 극복한다
-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거제 옥포대첩기념공원 이선지 느티나무
- 이선지는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음력 5월 7일의 옥포해전에서 다친 조선 수군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전선 24척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4척이 연합하여 왜장 도도 다카도라의 왜선 26척을 불사른 이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이자, 왜란 최초의 대승이다. 전투가 끝나고 피해 상황을 점검하니 순천 대장선의 활병 이선지가 어깨에 화살을 맞은 게 전부였다. 아니다. 전공에 집착한 원균이 이순신 함대가 이미 사로잡은 왜선을 빼앗으려고 마구 활을 쏘아서 상처를 입은 조선 병사 두 명이 더 있다. 그러니 아군에 의한 피해가 왜군에 의한 피해의 두 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7월 8일의 한산도 대첩에서는 왜군에게 잡혔다 풀려난 조선 백성을 죽이고 왜군의 목을 베었다고 자랑스레 보고까지 했다. 이렇듯 이때의 원균 행적은 먼 곳의 적보다 가까이 있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날 옥포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이라 훈시했다. 곧,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태산과 같이 무거이 움직여라’이다. 이는 지도자의 능력에 따라서 과정과 결과가 달라짐이니 이 역시 역사의 교훈이다. 아무튼, 이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연이은 해전의 패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왜 함대를 증강시킨다. 하지만 결국 이순신의 조선 함대와는 교전을 전면 중단하라며 꼬리를 내린다. 왜의 수군에게 이순신의 조선 해역은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리는 지옥이었다. 이로써 선조를 의주까지 몽진케 하며 거침없이 평양까지 점령한 왜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고립되었고 왜군도 발목이 묶였다. 이곳 옥포는 큰 물고기가 동해를 삼킬 듯 입을 벌린 ‘ㄷ’ 자처럼 생긴 2킬로미터쯤의 거제도 동쪽의 만이다. 그날 이곳 옥포만에는 도도 다카도라의 왜선 50여 척이 있었다. 5월 7일 새벽, 이순신 함대의 우척후장이자 사도 첨사인 김완이 적을 발견하고 신기전을 발사했다. 이 신호를 본 이순신은 먼저 6척의 판옥선을 선봉으로 내보냈다. 이어 마치 독 안의 쥐를 잡듯 만안에 정박 중인 왜선을 향해 맹렬히 포격을 퍼부었다. 왜선도 만만치는 않았다. 왜의 특기는 재빨리 배를 움직여 상대의 배에 올라가 벌이는 육박전이다. 하지만 왜선 세키부네는 빠르기는 하지만, 선체가 낮아서 판옥선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더욱 이순신의 판옥선이 치고 빠지며 포격을 퍼부으니, 왜의 함선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왜선 몇 척이 겨우 탈출했고, 물에 빠진 왜병은 육지로 달아났다. 이들마저도 이순신은 가만두지 않았다. 전라좌수영으로 회군하며 합포(현재의 마산) 앞바다에서 왜선 5척, 다음날인 5월 8일 적진포(통영시 아래쪽)에서 11척을 불살랐다. 그렇게 첫 번째 출전에서 모두 45척의 왜선을 파괴하였다. 그렇게 옥포해전은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이자, 임진왜란의 방향을 바꾼 전환점이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으니, 동아시아의 흐름을 바꾼 시발점이다. 그 역사의 현장인 이곳 옥포만에 지금은 세계 최대 100만 톤급 뱃도랑의 대우조선 옥포조선소가 있다. 이제 그날의 치욕과 영광은 한 줌 재처럼 사라지고, 옥포만의 조선소에서는 5대양 6대주를 넘나들 선체 길이가 400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배들이 건조되고 있다. 이 옥포 조선소를 지키는 옥포대첩 기념공원의 이순신 장군 사당 효충사 앞의 느티나무에서 동해를 바라본다. 그리고 한겨울에도 의연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를 옥포대첩의 순천 대장선 갑판 맨 앞에서 위민멸왜의 화살을 쏘던 수군 병사 이선지로 여기고 고개를 숙인다. 김 목/ 동화작가
-
- 기획.연재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거제 옥포대첩기념공원 이선지 느티나무
-
-
“올바르게 일했다! 깨끗하게 떠난다!”
- 열악한 환경에도 문화원 위상 정립, 나주문화 발전 견인나주문화원60년사 발간·나주학연구소 개설 등 업적 뚜렷正心誠意 신조, 시청·문화단체·복지시설에서 모범적 근무 대담=주성식 선임기자최기복 15대 나주문화원장 이임 지난 달 31일 나주시민회관에서 한 의식이 열렸다. 길에는 잔설(殘雪)이 드물지 않았고 매서운 추위의 뒤끝도 여전했지만, 행사장과 회관 주변에는 은은한 온기(溫氣)가 맴도는 것 같았다. 통상적인 행사나 모임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마지못해 동원되거나 억지로 참석한 사람들이 눈치껏 자리를 채우는 요식행위가 아니었다. 그날의 주인공을 참으로 아끼고 좋아하는 절실한 마음과 뜻이, 샘물처럼 솟아나고 큰 물결이 돼 마침내 넘쳐나는 듯했다. 최기복 15대 나주문화원 원장은 그의 유임(留任)을 바랐던 문화원 회원 등 많은 시민들에게 공직자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고 떠났다. 이날 이임식은 고마움과 아쉬움과 바람이 합쳐진 화합의 한마당이 됐다는 평가와 함께, 나주문화원의 앞날을 여는 데 강력한 기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최 문화원장은) 시청 근무할 때부터 늘 바르고 매사에 정성을 다했다. 마무리까지 모범을 보이니 시대와 지역의 ‘큰 어른’이 될 만하다”고 입을 모았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보기 드문 사례를 남기고 이임한 최기복 전 나주문화원장을 만났다. -나주문화원장 소임을 마친 감회는?제15대 나주문화원장으로 취임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이 지나 퇴임하게 됐다. 취임사에서, 36년간의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고향 나주를 지키고 문화원 발전에 헌신하는 ‘듬직한 등 굽은 소나무’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 생생하게 떠오른다.취임과 함께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3년 연속 총회를 서면으로 열 수밖에 없었다. 또 많은 문화행사가 취소·축소되고, 비대면(온라인)으로 운영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어떻든 문화 가족들을 위한 문화사업을 멈출 수는 없었다. 먼저 문화원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나주학 강좌를 비롯한 문화원 소식을 공유했다. 다양한 여건에 맞는 문화원의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 지역의 문화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에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고민하고 노력했다. 이제 임기를 마치고 보니, 지난 4년 동안 나주문화원을 아끼고 사랑해 주신 문화 가족 여러분의 후의(厚意)와 따뜻한 마음이 새삼 절실하게 느껴진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잊지 않을 것이다. -문화원장으로 일하는 동안 보람과 아쉬운 점은?나는 나주에서 나고 자라 70여 년을 살았다. 문화원장으로 지낸 지난 4년은 나를 진정한 나주인으로 만들어줬고, 나주의 문화와 정신을 공부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보다 안목 있는 문화인 그리고 성숙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준 시간이었다.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업무와 관련해서는, 나주문화원 창립60주년(2021년)을 맞아 문화원의 짧지 않은 발자취를 돌아보고 미래 전망을 제시하는 ‘나주문화원 60년사’를 발간한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감회가 크다. 문화원 부설 나주학연구소를 개설한 것도 보람이다. 나주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역발전과 문화기반 조성에 체계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됐다. 문화원의 위상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의미 있는 사업이었다. 이밖에도 향토문화 창달을 위해 향토문화 전문가 및 회원 발굴·향토사 조사연구 및 수집·보전·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나주들노래 전승·안성현 선생 선양·명맥이 끊어져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삼색유산놀이·세시풍속·풍물놀이 전승·보전 등 사업이 보람이었다.아쉬운 점이라면, 나주문화원에 아직 독립 원사(院舍)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문화도시 위상에 걸맞고 다양한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독립(전용) 건물을 마련해야 한다. 문화원 회원들이 쾌적하고 편안한 여건에서 문화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필수 시설인 것이다. 또 유·무형 국가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채 관리 소홀과 무관심 탓에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지역의 향토문화재·전통민속·음악 등의 보존을 서둘러야 한다. 지방문화원이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전승·보전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도 갖춰야 할 것이다.-연임에 대한 기대가 많았는데 고사한 이유는?‘박수(拍手)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다. 또 이형기의 시(詩) 「낙화(落花)」에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구절이 있다. 물러날 때를 잘 알고 떠나는 것이 4년간 쌓아온 성과의 의미를 그나마 제대로 살리는 것이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持論)이기도 하다.또 4년 동안 함께 일했던 부원장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고, 그가 나주문화원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 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또 확신했다. 나는 이제 문화원장 직은 떠나지만, 문화원 평생 회원으로서 또한 나주인의 하나로서 내 역할을 다할 것이다. 오직 나주시와 나주문화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나주문화원이 나주의 문화와 예술을 이끌어 가는 핵심이 되도록 힘을 보탤 것이다.-나주문화원의 발전에 대해 조언한다면?문화원의 내외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각 지방자치단체가 앞다퉈 설립하고 있는 지역문화재단이다. 나주시도 문화재단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데, 문화원과 유사한 사업을 하게 될 것이다.또 예총과 나빌레라문화센타가 문화예술단체의 한 축으로서 문화원과 경쟁 관계에 있다. 주민자치센터·공공도서관·복지관 등의 문화 활동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이제 문화원은 새로운 사고와 활동을 접목하고, 지역의 문화자료를 수집·정리해 체계적으로 관리·운영해야 한다. 사실 전통문화 자료 수집과 분류는 문화원 업무의 기본이다. 이 중요한 임무에 소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나주문화원이 60년의 역사와 전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60년을 열어가려면, 시대에 맞는 문화사업 발굴과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할 때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단체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앞으로의 계획은?김형석 교수의 수필집 ‘백년을 살아보니’에 “노년은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보통 65세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와 내 가까운 친구들은 그런 생각을 버린 지 오래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내가 공직에서 은퇴하면서 계획한 버킷리스트가 10개 있었는데, 올해 내 나이가 칠순에 접어들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하면서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것이 1차 목표다. 김형석 교수처럼 새로운 것에 계속 도전하고, 열심히 건강을 관리하면서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공직생활 등에 신조가 있었다면? 正心誠意(정심성의, 마음은 바르게 뜻은 참되게 한다)이다. 우리 집의 가훈(家訓)이자, 40여 년 공직생활 중에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기복 원장은 1978년 나주시청에서 공직을 시작해 2014년까지 총무국장·의회사무국장·농업기술센터소장·기획실장 등 요직을 맡았다. 퇴직 후 2015년 나주문화원 부원장, 2019년 원장에 취임해 이날 퇴임할 때까지 나주문화 발전을 이끌었다.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노인복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며 나주시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최기복 원장은 고향 나주에 살고 있다. 채소를 직접 재배하는 등 맑은 공기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것을 큰 기쁨이며 건강의 비결로 삼는다. 나주시청 동료였던 부인과 슬하에 1남2녀를 뒀다. 지금도 어머니(90세)를 모시고 있다.무등산 우뚝한 정기가 금성산에 머물러 영산강의 혜택을 입었으니 바로 나주다. 전라도의 중요 거점 중 하나였던 나주는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 데 부심(腐心)하고 있다. 촌각(寸刻)을 다투며 변화하는 세태가 부담이지만 옛것을 온전히 할 때라야 새것이 자리잡을 수 있다는 이치 또한 뚜렷하다. 그래서 나주의 지난날을 살펴, 오늘에 되살리고, 앞날을 제대로 준비하려는 최기복 원장의 뜻과 활약에 기대가 모인다. 바른 뜻으로 성의를 다하니(正心誠意) 어찌 그 열매가 없겠는가 말이다.
-
- 기획.연재
-
“올바르게 일했다! 깨끗하게 떠난다!”
-
-
주성식의 어른 왈/예언자? 자해공갈범?
- 지역 살림이 피폐(疲弊)해진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요, 지역민의 피로가 극심한 것 또한 너와 내가 마찬가지다. 한 물에 든 고기요, 얼거나 데거나 모진 꼴을 면하기 어렵다. 어쩌다 이 모양 요 꼴인지,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저주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 사회의 비극적인 정치 상황 중에서도 우리 지역이 유독 참혹한 지경인 이유는 뭘까? 풍토(風土)가 좋지 않을까? 종족이 본디 열등할까? 지조가 굳고 의리가 강하고 순진무구해서, 어떤 경우에도 한 번 선택한 것을 바꾸지 않는 것일까? 결국 지역 소멸이나 독립만이 대안일까? 이 지역(민)이라는 덩어리가 변해야 한다는 순진한 당위론부터, 이런저런 정치구도가 돼야 한다는 치졸한 정치공학적인 속셈까지, 소리는 시끄럽고 말은 많다. 그 소란이 또 다른 다툼을 불러온다. 고립이 고착화되고, 소외는 실체가 되고, 차별은 당연한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떻다고?’라는 식(式)의 자포자기적 심리와 ‘그냥 이렇게 살 거야!’라는 류(類)의 자학적 태도만이 자위(自衛)와 자위(自慰)의 유일한 수단이 된다. 그 참혹한 자리의 틈새를 비집고, 교활하고 악랄한 모리배들이 꾀어든다. 그것들이 우리 살을 파먹고 뼈를 갉아먹고 피를 빨아먹는 것이 실상이다. 일당 독점(재)의 폐해를 아무리 지적해봐야, 세상이 금세 천지개벽하지는 않을 것이고 인간이 환골탈태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고 아프더라도, 있는 것을 똑바로 보고 곪은 것을 도려내고 썩은 것은 버려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 참혹하게 폐쇄된 구렁텅이 속에서라도, 문제점을 철저하게 밝히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누차 지적했던 광주광역시(장)의 치태(痴態)가 결국 파국적 상황을 맞은 것에서도 상황의 절박함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우리 지역만 ‘천천히 말리는 듯한’ 가뭄이 계속됐고, 지역을 농단하는 책임자는 ‘제한 급수’를 거론했다. 마치 예언자(점쟁이?)라도 되는 양 날짜까지 점지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성숙한 역량으로 ‘자발적 절수’에 나섰고, 가뭄 극복에 자신감을 보였다. 시장의 예언은 ‘헛소리’가 됐다. 그리고 12일 새벽, 일이 터졌다. 헤아릴 수도 없는 다량의 수돗물이 버려졌다. 의심스럽다. 광주시 책임자는 자신의 제한급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자해공갈범처럼 ‘고의적으로’ 수도 밸브를 파손한 것 아닐까? 아니라고? 그렇다면 직무유기요, 배임이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주민 학대(단수 등)요, 당연히 주민소환 사유 아닌가?
-
- 기획.연재
-
주성식의 어른 왈/예언자? 자해공갈범?
-
-
비변사 “水戰에 가한 왜적 육지에선 불리””
- 호남, 영남 큰 읍성 증축·수리김성일 “이순신 발탁 잘못” 상소# 일본 승려 현소, 가도입명(假道入明)을 넌지시 알리다 1591년 1월 말에 황윤길·김성일 등 조선통신사가 귀국할 때 일본 승려 현소와 야나가와 시게노부(平調信) 일행이 회례사로 동행했다. 현소 일행은 부산포에서 선위사 오억령의 접대를 받았다. 현소는 처음에는 자못 오만하여, 시 한 수를 지어 오억령에게 화답을 요구하였다. 오억령이 즉석에서 그 운자에 맞추어 지으니 현소가 탄복하고는 공손해졌다. 오억령은 현소가 ‘내년에 길을 빌어 명나라를 침범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즉시 아뢰었다. 조정은 크게 놀라 오억령을 체직시키고, 응교 심희수로 대신케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3월 1일)그런데 오억령이 한양으로 돌아와서 일본 사신과 문답한 일기를 바치면서 왜군이 반드시 침략할 형세라고 극언하였으나, 조정은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린다며 질정관(質正官)으로 보내버렸다. 이윽고 윤 3월에 현소와 시게노부 등이 서울에 도착하여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선조는 황윤길·김성일 등으로 하여금 사적으로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면서 왜국 동향을 파악하게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자 현소가 김성일에게 은밀히 가도입명(假道入明) 요구를 전달했다. 현소는 히데요시의 ‘정명향도’ 요구를 ‘가도입명’으로 슬쩍 바꾸어 흘린 것이다. 그런데 김성일은 현소를 타일렀을 뿐 사태의 심각성은 느끼지 못했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윤 3월 1일)4월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현소 등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5월에 현소 등이 돌아가자 선조는 답서를 주었다. “우리 나라에게 한패가 되어 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무슨 뜻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으며 또한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요?(…) 어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범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여 아득한 중국을 치려고 망동하십니까?”(…) (선조수정실록 1591년 5월 1일 3번째 기사)# 조정, 육지 방어에만 힘쓰다. 이때 조정에서는 왜에 관한 일을 매우 걱정하여 변방의 일을 아는 재신(宰臣)을 뽑아 삼도(三道)로 나누어 파견하여 군무(軍務)를 순찰하여 대비하게 했다. 김수를 경상도 순찰사로, 이광을 전라도 순찰사로, 윤선각을 충청도 순찰사로 삼았다. 7월에 조정은 호남·영남의 성읍을 수축하였다.“호남·영남의 성읍을 수축하였다. 비변사가 왜적은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불리하다고 하여 오로지 육지의 방어에 힘쓰기를 청하니, 호남·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에게 노고만 끼쳐 원망이 일어나게 하였는데, 식자(識者)들은 결단코 방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선조수정실록 1591년 7월 1일)11월에 홍문관 부제학 김성일은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폐단을 논하였다. 또한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됐다고 상소했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11월 1일) 이러자 경상감사 김수는 ‘성을 쌓는 일에 사대부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고 장계를 올렸지만 갈등만 낳았고 왜침 대비는 속도와 힘을 잃은 채 흐지부지됐다.# 명나라, 조선을 의심하다.선조는 집권당인 동인 김성일의 의견에 동의하여 전쟁은 없다고 단언했지만 왜국의 정세를 명나라에 보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고민했다.선조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명나라에 알리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영의정 이산해는 명나라가 조선이 왜국과 사통(私通)하였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많으니 숨기는게 낫다고 개진했다. 하지만 대사헌 윤두수는 명나라에 주문(奏聞)해야 한다고 하였다. 병조 판서 황정욱도 윤두수와 같은 의견이었다. 선조도 윤두수의 의견에 가까웠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4월 1일 2번째 기사)이후 선조는 다시 의견을 들었다. 이때 좌의정 류성룡은 영의정 이산해와 약간 다른 이유에서 명나라에 대한 보고에 반대했다. 류성룡은 히데요시의 말은 명나라를 겁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면서, 히데요시의 일을 명나라에 보고하는 것은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다고 주장했다.(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2021, p 46)세 번째 논의는 5월 4일 오후에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에서 홍문관 부제학 김수가 『강목』 「동진원제기(東晉元帝記)」를 강의한 후에 이루어졌다. 김수는 류성룡의 의중을 알고 명나라에 일본의 동향을 알리는 일에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병조판서 황정욱은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선조도 황정욱과 같은 입장이었다. 선조 : “복건은 일본과 가깝고 장사꾼이 통행하고 있으니 일본이 우리에게 서계를 보냈다는 사실이 이미 중국에 전달했는지 어찌 알겠는가? 설사 히데요시가 침범하지 않더라도 서계에 그런 의도가 드러났으니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문책한다면, 왜적을 끌어들여 상국(上國)을 침범한다는 누명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전일에 윤두수도 이런 점을 염려한 것이니, 주문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이러자 김수는 한풀 꺾였다.김수 : “주문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더라도 일본의 군사 출동 시기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선조 : “섬 오랑캐의 실정에 대해 주문하는 이상, 군사 출동 시기를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는가?”김수 : “분명치 못한 것을 언급함은 온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문하는 내용도 누구한테 들었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일본과 국서를 주고 받은 사실을 그대로 알린다면 난처하지 않겠습니까?”이러자 선조가 좌승지 유근을 돌아보았다.“승지의 의견은 어떠한가?”유근 : “신의 생각에는 대의로 보면 주문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나하나 그대로 주문할 경우 난처한 일이 생길 듯싶습니다. 가볍게 주문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이윽고 선조는 경연관 박동현에게 의견을 물었다. 박동현 : “알려야 합니다. 다만 알리는 내용은 허술하게 할 수 없으니, 대신으로 하여금 널리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선조는 박동현의 의견에 찬동했다.(선조수정실록 1591년 5월 1일 1번째 기사)5월 5일 아침에 선조는 3정승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였다.이윽고 영의정 이산해·좌의정 류성룡·우의정 이양원 등이 와서 아뢰었다.“어제 경연에서 아뢴 말을 보건대, 김수가 우려한 것이 비록 일을 주도면밀하게 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왜국이 명나라를 친다는 말을 듣고 어찌 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명나라에 보낼 주문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주문 가운데는 표현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후일에 난처한 일이 생길 대목도 있습니다. 유근의 ‘경미하게 대충 보고하자’는 주장은 자못 일리 있는 듯합니다. 전에 일본에 잡혀갔다 도망해 온 사람 김대기 등 30여 명에게서 들은 풍문이라고 하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선조는 “아뢴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조정은 명나라는 별도의 진주사는 보내지 않고 하절사 김응남이 명나라에 갈 때 대략 전해 들은 말이라고 하고 예부에 자문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김응남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조선이 왜군을 인도하여 명나라를 침범할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다. 김응남 일행이 산해관에 도착하자 관소(關所) 직원들은 냉랭했다. 심지어 “너희 나라가 왜놈들과 공모하여 반란을 꾀하고서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로 들어오느냐?”고 꾸짖었다.당시에 복건성(福建省)에서 무역상을 하는 진신(陳申)이 유구(오키나와)에 들렀다가 “히데요시가 장차 쳐들어오려 하는데 조선을 선봉으로 삼았다”는 말을 들었다. 진신은 귀국하여 복건성 순무(지방장관) 조참로에게 알렸고 조참로는 조정에 보고했다.유구국(琉球國) 세자 상녕(尙寧)도 사신을 중국에 보내 “일본의 관백이 조선으로 쳐들어가려 한다.”고 알렸다.또한 강서성 출신 허의후는 포로가 되어 사쓰마 영주 시마스 요스히사의 의관(醫官)으로 일했는데, 히데요시가 장차 중국에 쳐들어갈 것을 알고 몰래 주균왕(米均旺)을 통해 절강성에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이 편지에는 조선이 1590년 5월부터 일본에 당나귀 등 조공을 바쳤고, 1591년 7월에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속히 명나라를 치도록 재촉했다는 등 조선에 불리한 허위사실이 많았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5월 1일)이처럼 진신과 허의후 등의 보고로 중국 조정은 떠들썩하였다.다만 각로(閣老) 허국은 지금 황제의 생일이 멀지 않았으니, 그때 조선의 사신이 오는 것을 보면 그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성절사 김응남 등이 북경에 도착하자 허국은 김응남 등을 불러 자세히 물은 후 곧 조정에 알렸다. 이리하여 명나라의 의심이 차츰 풀렸다.한편 1591년 8월에 요동 도사는 조선에 왜정을 보고하라고 했다.이는 허의후가 무함한 때문이었다. 깜짝 놀란 선조는 10월 24일에 한응인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보냈다. 한응인 등은 왜국의 동태를 알리고 조선이 허의후에게 무함당한 사실을 변명하자, 황제는 조선 사신을 인견하고 극진히 위로하였다.하지만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의심은 해소되지 않았다. 명나라는 조선이 히데요시의 정명향도(征明嚮導)에 야합(野合)했으리라 의심하였고, 이런 의심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현실화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명나라는 즉각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고, 선조의 요동 망명에 대하여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였다.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2021, p 43-57)
-
- 기획.연재
-
비변사 “水戰에 가한 왜적 육지에선 불리””
-
-
“잘 먹으면 건강하다!”
- ‘바른 먹을거리 ’푸드스타 교육에 공감대 확산 강지원 변호사·박중욱 박사 등 강연 인기 폭발 박영현 올바포럼 대표 “수강 인원 확대하겠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는 가운데 ‘먹을거리로 건강을 확보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올바포럼(올바른먹을거리운동본부, 대표 박영현)이 주관하는 ‘푸드스타(FOOD STAR)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1월 5일 시작된 1기 강의는 2월 2일 5주차를 맞았다. 이날 강지원 변호사와 박중욱 박사(신경외과 전문의, 대한임상통합의학회 고문, 서울 청담병원 통합기능의학연구소 소장)의 열강에 참석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강지원 변호사는 자신이 체험한 ’통곡물 식사‘와 ’다작(多嚼, 많이 씹음)‘의 효과 등을 소개해 박수를 받았다. 박중욱 박사는 20여 년 각고의 노력 끝에 정립한 통합의학을 다양한 임상 사례 중심으로 강연해 관심을 끌었다. 박중욱 박사는 ’나에게 이로운 것이 남에게는 해가 될 수 있다‘며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검사·치료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박중욱 박사는 “과거에는 음식이 단지 영양소와 칼로리원(源)이었을 뿐이지만, 최근에는 생명 유지의 필수 사항을 전하는 ’정보 전달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소개했다. 특히 치매·고혈압·비만·아토피 등 만성질환의 실체와 치료법 그리고 염분·수분 섭취 등 전반적 건강 관리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식생활과의 연관성을 강조해 참석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한 참석자(71·여)는 “이렇게 열중해서 강의를 듣기는 처음이다. 앞으로 (교육에) 더 적극적으로 참석해 내 건강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게 열심히 배우겠다”며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나타냈다. 박영현 대표(하이랑, 자연성(自然城) 회장)는 “현미의 효능을 극대화하고 먹기 쉽게 가공한 ‘꽃눈쌀효소미’ 등 올바른 먹을거리 개발과 전파에 진력할 것”이라며 “앞으로 수강 인원을 확대하고 교육 여건도 개선해 ‘푸드스타(FOOD STAR) 육성에 진력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국민 건강을 유지·증진시키고 나아가 식량 주권 확보의 기틀을 다지겠다는 것이다.
-
- 기획.연재
-
“잘 먹으면 건강하다!”
-
-
주성식의 어른 왈/지역감정과 직접정치
- 현재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간접정치를 시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대로 큰 무리 없이 굴러간다. 우리를 짓누르는 우리 사회(제대로 된 국가는 아니다!)의 형편이 그래서 더 치욕스럽고 한스럽다. 그 깊고 어두운 바탕에 지역감정이 있다. 현재의 정치·사회 등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지역감정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없다고 하겠다. “지역감정이라니!”라며 그 자체를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의식적 중간층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지역감정은 선거를 비롯한 정치·사회적 사안마다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투쟁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호남의 상황이 가장 심각하고 악성(惡性)이다. ‘호남’이 지역감정 문제의 고질(痼疾)이 된 것은 뿌리가 깊다. 연원(淵源)이 신라의 삼국통일부터이며, 1960년대의 정치적 격동기에 노골화됐고, 민주화 과정에 극심해졌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동안 호남은 집권세력(지역)의 집중적인 견제와 탄압을 받았고, 그것이 정치·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됐다. 그 근거가 됐던 ‘호남(것들)이 문제’라는 독단(獨斷)적 정언(定言)은 사회·문화적 사실처럼 됐다. 차별과 소외를 넘어 거의 인종청소(학살)라고 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정당 등 정치집단들이 진영(陣營)을 막론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고 확장하고 강화하는 수단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해 왔다. 이제 지난 정권의 망국·반민족적 행태가 차츰 드러나면서 호남에 대한 질시(疾視)는 파국적 상황에 이른 듯하다. 비리와 부정과 범법을 저지른 것(들)이 살아남고, 힘을 얻고, 똬리를 틀고 앉아 마침내 온 나라와 겨레를 결딴내게 하는 데, 호남이 숙주(宿主)가 되고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분노가 임계점(臨界點)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또 있다. 해결사를 자처하며 호남을 개조하겠다고 설치는 무리들이다. 문명인이 미개인을 계몽·교화하는 식으로 어르고, 달래고, 꾸짖고, 나무라는 강압적 행태가 호남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호남을 핍박했던 것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퇴영적 발상이다. 호남(인들)은 ‘이 사회의 문제가 오직 호남 탓인가? 호남 것들은 다 미련하고, 악질이고, 그냥 제거하거나 개조할 대상인가?’라며 분노하고 있다. 허접한 일반화의 오류조차 극복하지 못한 채 삿대질만 하는, 지적 오만에 빠져 허덕이는 지진아(遲進兒)들의 행태를 꾸짖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정치다. 지역감정이 정치 모리배들이 잇속을 챙기는 수단이 되고, 결국 사회적 현상(現狀)으로 고착화되는 파행(跛行)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
- 기획.연재
-
주성식의 어른 왈/지역감정과 직접정치
-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한산도 수루 조선 수군 느티나무
- 통영항에서 한산도로 가는 배를 타면 동쪽은 거제도이고, 서쪽은 통영의 안산인 미륵산이다. 이 뱃길의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마저 잊을 만큼 아름답다. 그러기에 항구와 바다와 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려면 이 통영의 뱃길에 다녀온 뒤 말하여도 늦지 않다. 배의 갑판으로 갑자기 갈매기 몇 마리가 날아온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의 누나와 남동생이다. 아침 햇살이 잘게 부서지는 파도에서 그네를 타던 갈매기를 그 두 아이의 새우깡이 부른 것이다. 이따금 환한 웃음소리가 터지는 건 던져주는 새우깡을 갈매기들이 덥석 챙길 때이다. 그 아이들의 깔깔 웃음소리와 갈매기의 끼룩 소리가 아름다운 화폭을 더 아름답게 색칠한다. 눈앞의 통영 도남항 등대가 연필 모양이다. 이 연필 등대가 ‘꽃’의 시인 김춘수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 구절을 파도 위에 쓴다. 그러더니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닥 않는데’로 이어진다. 그렇게 이 연필등대는 김춘수, 유치환, 박경리 등 이곳 출신이거나 활동한 작가들을 기리기도 한다. 한반도의 뭍 섬에 신이 있다면 그 신들의 으뜸 신이 사는 섬은 한산도이다. 하늘의 북극성처럼 한산도는 한반도 뭍섬의 지침이 되는 위치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이다. 조선의 첫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첫 통제영을 뭍섬의 지침이 되는 이 한산도에 열었다. 그리고 1597년 이순신이 없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말아먹을 때까지 3년 8개월여 수군의 근거지였다.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은 판옥선 160여 척, 거북선 3척을 내동댕이치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다 죽임을 당했다. 이 해전은 임진정유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배이며 처절히 궤멸된 치욕이다. 그리고 원균은 다시는 없어야 할 어리석은 지도자의 본보기이다. 그러기에 이순신의 그 날은 더욱 빛나고 더하여 성스럽다. 왜란 초기인 1592년 7월 8일이다. 6척의 조선 판옥선이 60여 척의 왜 함대를 거제도와 통영의 좁은 물목인 견내량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한산 앞바다에서 학익진으로 왜선 47척을 불사르고 13척을 빼앗았다. 이때 왜도 학익진을 알았으나 파도치는 바다에서는 불가능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순신은 학의 날개로 왜선을 쓸어버렸다. 왜에게는 그저 꿈결이었으나, 그 꿈결을 이순신이 현실로 만들었으니 생각만으로도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 통쾌한 한산대첩이다. 여기 한산도의 지명 ‘문어포’는 그 한산대첩 때 섬으로 도망친 왜군이 길을 물은 곳이다. 마을 사람이 엉터리로 가르쳐준 데로 갔으니, 바로 ‘속은섬’이다. 그 왜군이 산을 개미허리처럼 잘록하게 파서 ‘개미목’이고, 두억리는 죽은 왜병의 머리가 억 두나 되어서이다. 이들 시신을 매장하여 ‘매왜치’, 승전의 고동을 불어 ‘고동산’, 이순신 장군이 비로소 갑옷을 벗고 쉴 수 있어서 ‘해갑도’이다. 이렇듯 400년을 넘어 그날의 통쾌함이 한산도에 지명으로 남아있다. 통영을 떠난 배가 그 한산도의 관함항에 이어 제승당항에 도착한다. 여기서 이순신과 삼도수군통제영의 유적지인 제승당까지는 찰싹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걸어서 금방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한산셤 달 발근 밤의 수루에 혼자 안자/ 큰 칼 녀픠 차고 기픈 시름 하는 적의/ 어듸셔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긋나니’를 읊은,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누각 ‘수루’에 앉아 한산도 앞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여기 수루를 지키는 느티나무는 이순신의 나무이고, 조선 수군의 나무이다. 한겨울이어서 느티나무는 모두 잎을 떨구었지만, 그 펼치고 있는 나뭇가지의 당당함은 조선 수군의 우렁찬 함성이 잎 대신 매달려 있음이다. 이 수루에 앉아 그날의 한산대첩지 바다를 바라보니, 한반도 뭍섬의 으뜸 신이 계시는 황궁이 바로 여기 제승당이구나 한다. 김 목/동화작가
-
- 기획.연재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한산도 수루 조선 수군 느티나무
-
-
화순군, '머물고 싶은 도시' 대전환 첫발
- 적벽 명소화·화순천 꽃강길·고인돌 사계절 축제·이양홍수조절지 파크골프장 추진 온라인 쇼핑몰 화순팜 활성화, 농·축협 로컬푸드 출하시스템 개선…농업예산 확대 제2생물의약산업단지 조성…청년·신혼부부 만원 임대주택, 24시간 양육돌봄 시행 <구복규 화순군수> 화순군(군수 구복규)이 행운과 도약을 상징하는 계묘년(癸卯年) 새해를 맞아 힘찬 발걸음을 시작했다. ‘화순을 새롭게! 군민이 행복하게!’를 슬로건으로 작년 7월 야심차게 출범한 민선 8기 화순군은 지난 6개월 동안 각종 조례를 정비하고, 군수 공약 세부실천계획을 수립하는 등 바쁜 와중에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함과 동시에 미래화순의 청사진을 완성하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민선 8기 6개월 성과…마을주치의 제도 호평 지난해 화순군은 민선 8기 공약사업으로 지정된 ‘마을주치의 제도’를 과감히 선보였다. ‘마을주치의 제도’는 화순군보건소, 12개 보건지소, 13개 보건진료소의 공중보건의(의사·한의사·치과의사) 등 의료 인력이 13개 읍·면 마을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다양한 보건의료 서비스, 건강체조 등을 제공하는 제도로 시행기간 내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화순군은 결국 ‘마을주치의 제도’에 힘입어 동아일보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2년마다 평가하는 지역발전지수(RDI) 평가에서 전남 군 단위 1위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또한 10월부터 경로당 379곳을 대상으로 펼친 ‘경로당 입식 식탁 지원 사업’도 어르신들의 전폭적인 호응에 힘입어 성공 사례로 분류된다. 이 외에도 각 기관단체에서 받은 다수의 수상 이력이 있지만, 화순군의 진면목이 드러난 알짜 대목은 12월 행정안전부가 공표한 ‘2022년 전국 지역안전지수’ 평가이다. 화순군은 전남 22개 시·군 중 평균 안전지수 등급(감염병 관리 1등급 등)이 가장 높은 곳으로 나타나 도내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명성을 떨쳤다. <화순군민과 구복규 군수의 신년대담> ■구복규 군수 ‘민선 8기 실천 원년’ 선언 구복규 화순군수는 새해 첫날 해맞이 행사에서 “행운과 도약을 상징하는 계묘년 새해를 맞아 화순은 공정과 혁신, 미래산업과 관광으로 새롭게 도약할 것”이라며 “저와 화순군의 공직자 모두가 ‘화순을 새롭게! 군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2일 시무식에서는 “민선 8기 군정운영의 밑그림이 완성된 만큼 올해는 실천 원년으로 성과를 통해 군민들이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공직자들의 분발을 독려했다. 화순군정의 6대 주요정책 중 ▲문화·관광 인프라 확대를 통한 ‘남도관광 1번지’ 도약 ▲고소득 창출로 돈 버는 부유농촌 건설 ▲지역경제 활성화 및 화순형 미래산업 육성 등 3개 정책은 반드시 성공해야 할 군정목표의 핵심 과업이다. ▲소통과 역지사지 섬김행정 ▲SOC 확충에 따른 쾌적한 생활환경 조성 ▲군민이 행복한 복지화순 실현 등 3개 정책은 민선 8기의 성공을 뒷받침 할 근간이다. 새해 벽두 13개 읍·면을 순회하며 실시한 '화순군민과 구복규 군수의 신년대담'을 시작으로 민선 8기 화순군민의 꿈을 실은 ‘희망열차’가 머물고 싶은 10만 도시를 향해 힘찬 굉음을 내뿜고 있다. ■역지사지 섬김행정 실천…현장행정 중심 ‘역동성’ 강조 현장행정 중심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공정한 조직문화를 조성하고, 읍·면 순회 사랑방 좌담회, 군정발전혁신단 지속 운영 등을 통한 소통행보와 역지사지 섬김행정으로 화순의 새로운 변화를 도모한다. 또한 13개 읍·면장들의 권한과 역할을 대폭 강화해 소규모 민원 해결에 즉시 대응토록 했다. ■문화·관광 인프라 확대 '남도관광 1번지' 도약 정책실현을 목적으로 짜인 실천계획 가운데 민선 8기를 상징하는 문화·관광 분야에선 화순문화관광재단을 출범시켜 문화·관광콘텐츠 개발과 마케팅을 전담할 컨트롤 타워로 삼을 계획이다. 세계문화유산 고인돌공원은 사계절 축제 장소로 변모하고, 능주 역사·문화도시 조성, 동복 연둔리 숲정이와 김삿갓 유적지 관광지 조성, 환산정 문화관광단지 조성사업 등 권역별 맞춤형 사업도 본궤도에 오른다. 지난해 광주시로부터 관리권을 이양 받은 화순 적벽은 ‘적벽 명소화사업’을 진행해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거듭날 예정이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양 홍수조절지는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대규모 생태공원과 전국 최대 규모의 파크골프장으로 재탄생해 인근에 조성될 야구장·골프장과 연계한 시너지효과로 화순의 또 다른 랜드마크가 될 전망이다. ■고소득 창출로 돈 버는 ‘부유농촌’ 건설 화순군은 고소득 창출로 돈 버는 부자농촌 건설을 위해 농업예산을 확대하고, 5대 특화작목과 한약재를 비롯한 고부가가치 농업생산물에 주력할 방침이다. 농민들이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온라인 쇼핑몰 화순팜을 활성화 하고, 농·축협 로컬푸드 출하시스템 개선 및 농산물 판로 확보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다. 또한 청년 농업인을 육성하고, 귀농·귀촌인, 은퇴자들의 안정적 정착을 위한 비닐하우스 70% 설치지원 등의 사업시책을 다양하게 전개해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이다. ■쾌적한 생활환경 조성을 위한 SOC 투자 확대 화순군은 쾌적한 생활환경 조성을 위한 SOC 분야에도 투자를 확대해 화순을 '머물고 싶은 도시'로 대전환하겠다는 전략이다. 화순천을 주무대로 야간조명과 음악분수가 흐르는 꽃강길을 조성하고, 개미산에 전망대를 세워 아름다운 화순 경관을 마음껏 누비고 감상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제공키로 했다. 특히 최단·최적 등산로 코스(너와나 목장~무등산 장불재)로 알려져 폭발적으로 증가한 관광수요에 발맞춰 ‘무등산국립공원 중지마을 도로 개설’을 서둘러 진행할 방침이다. 막혀있던 무등산국립공원 인프라 구축의 활로를 열어 국립공원공단의 투자를 적극 유도함으로써 대형 관광버스를 통한 무등산 탐방객 유치는 물론, 주민편의 향상과 소득창출·증대가 함께 기대된다. 아울러 동면 서성리 농촌공간 정비사업, 오동리 농촌 재생사업 등은 농촌지역의 정주여건을 과감히 개선해 주민들에게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하고, 도시 경쟁력 강화 차원의 공영주차장 확대, 스마트 신도시 조성사업 또한 도심 내 교통난 해소와 주거환경 개선 등에 상당한 기여가 예상된다. <2022년 우수지역특구 시상식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모습> ■지역경제 활성화 및 화순형 미래산업 육성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소상공인지원센터를 설치하고, 청년 푸드트럭 지원사업, 화순사랑 상품권, 노인일자리사업 등을 확대 운영키로 했다. 또한 제2생물의약산업단지 조성과 바이오 선도 기업 유치 경쟁에도 적극 나서 명실상부한 K-바이오산업 거점도시로서의 명성을 굳건히 할 것이다. 반려 동·식물인구 1500만 명 시대에 발맞춰 화순형 미래산업으로 선정한 반려 동·식물산업도 반려동물 경진대회, 테마파크 조성, 난 전시회 개최 등을 통해 적극 육성하기로 했다. ■청년·취약계층·교육 사업도 적극 추진 군민이 행복한 복지화순 실현 정책으로 하반기부터 입주를 시작할 청년 및 신혼부부 만원 임대주택과 24시간 양육 돌봄 제도는 벌써부터 청년층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줄 정책으로 기대를 모은다. 사회적 약자인 독거노인과 장애인 가정을 위해 이동 빨래방을 운영하고, 다문화 문화원, 장애인 복지관, 보훈회관을 설립하는 한편,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생활지원사 등 사회복지 분야 종사자들의 처우도 함께 개선해 상생기반을 한층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그 밖에 공교육을 강화해 청소년 재능개발 지원 등 인재양성에 투자하고, 평생학습 환경 구축을 통한 인문도시 조성에도 만전을 기할 방침이다.
-
- 기획.연재
-
화순군, '머물고 싶은 도시' 대전환 첫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