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7 (금)

기획.연재
Home >  기획.연재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1905년 궁전광장…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
    고독한 자아(自我),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그림 앞에서 렘브란트(1606~1669)의 생애를 되씹어 본다. 그의 인생은 1642년에 아내 사스키아와 사별한 후부터 꼬였다. 그는 9개월 된 아들 티투스를 양육하기 위해 농부의 아내였던 과부 헤이처 드릭스를 유모 겸 가정부로 고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렘브란트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그런데 1647년에 헨드리케 스토헬스가 티투스의 가정교사로 들어오면서 헤이처와의 관계는 끝났다. 1649년에 헤이처는 결혼 약속 위반으로 렘브란트에게 소송을 걸었고 법원은 렘브란트에게 매년 2000 길더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러자 렘브란트도 헤이처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녀를 정신병자 수감원으로 보냈다. 한편 헨드리케는 1654년에 딸을 낳았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의 유언 때문에 헨드리케와 결혼할 수 없었다. 사스키아는 그가 재혼하면 4만 길더나 되는 유산을 행사할 수 없도록 유언장에 적었다. 당시 렘브란트는 수입에 비해 지출이 너무 많아 사스키아의 유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654년 6월에 헨드리케는 개혁교회 평의회에 나가 매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도덕적으로 엄격한 칼뱅주의자들은 렘브란트와 헨드리케의 동거를 극히 불온한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주요 고객들을 잃었고 더욱 곤궁해졌다. 이즈음 렘브란트는 헨드리케를 모델로 하여 그림 세 점을 그렸다. 첫째는 ‘플로라 옷차림의 헨드리케’이다. 렘브란트는 ‘플로라 옷차림의 사스키아(1634년)’도 그린 바 있다. 둘째는 ‘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인’이다. 영국 런던 네셔날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한 여인이 속옷의 말단을 걷어 올리고 냇가로 걸어들어간다. 엷은 미소는 장차 있을 목욕의 즐거움 때문이다. 셋째는 ‘다윗왕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이다. 목욕하고 있는 밧세바는 다윗의 편지를 받고 당혹한 표정이다. 그녀는 이미 우리아 장군과 결혼한 몸이었다. 그림은 향후 진행될 후반부를 예고하고 있다. 소위 ‘탈맥락화’이다. 나중에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전사하게 만들고, 밧세바는 솔로몬을 낳는다. 한편 1656년에 렘브란트는 파산 선고를 당했고 1658년에는 저택이 헐값에 경매되자 빈민가로 이사했다. 1663년에 사랑하는 여인 헨드리케가 죽었다. 헌신적인 여인 헨트리케를 잃은 렘브란트는 좌절했다. 1664년에 그는 ‘루크레티아의 자살’을 그렸다. 로마의 정숙한 부인 루크레티아는 그녀를 탐낸 귀족의 모함에 빠져 몸을 망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루크레티아는 헨드리케의 모습이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추모한 것이다. (로베르타 다다 지음·이종인 옮김, 렘브란트, 예경, 2008) 1666년에도 그는 ‘루크레티아의 자살’을 그렸는데 단도로 자신을 찌른 후의 모습이다. 흰 옷에 피가 배어있다. 1667년에 렘브란트는 유대인 신부(이사악과 리브가)를 그렸다. 이 그림도 아들 부부를 모델로 한 것이다. 1668년 2월에 외아들 티투스는 사스키아의 조카인 막달레나 반 로(Loo)와 결혼했다. 결혼 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그해 9월 티투스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는 좌절했다. 1669년 3월 렘브란트는 손녀딸의 세례식에 참석했다. 이 불행한 아이는 곧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겪었다. ‘자화상’이란 용어도 없던 시대에 렘브란트는 유화 40여점, 동판화 3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말년의 렘브란트 자화상을 보면 렘브란트의 궁핍과 초라함을 금방 알 수 있다. 빈민가에서의 생활, 그리고 식사는 빵과 치즈, 절인 청어가 전부였다. 1669년 10월 4일에 렘브란트는 63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젤에는 ‘아기 그리스도를 안은 시몬’이 미완성인 채로 걸려 있었다. 유족이라곤 15세의 딸과 1살도 채 안된 손녀뿐이었다. 10월 8일에 ‘고독한 자아(自我)’ 렘브란트는 조문객 없이 암스테르담의 서쪽 베스테르케르크 묘지에 쓸쓸히 묻혔다.이제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나온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별관에 있는 인상파·입체파의 그림들을 못 본 점이다. 르누아르·고호·고갱·피카소·마티스의 그림들 말이다. 궁전광장 궁전광장으로 나왔다. 궁전광장 중앙에는 높이 47.5m, 직경 4m, 무게 600t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기둥이 있다. 이 기둥이 바로 ‘알렉산드르 원주 기둥’인데 러시아가 1812년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34년에 세워졌다. 기둥 꼭대기에는 알렉산드르 1세 (재위 1801~1825)의 얼굴을 한 천사가 십자가를 붙잡고 뱀을 누르고 서 있다. 천사는 알렉산드르 1세이고 뱀은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것이리라.그런데 궁전광장은 러시아 역사 현장이다.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 그리고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아침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조용히 길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할 생각으로 궁전을 향했다. 행렬의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가폰(1870~1906)이 있었다.1903년 봄에 가폰은 ‘공장 노동자 클럽’을 만들었다. 모임의 주된 내용은 친교와 명사 강연이었다. 클럽은 활기를 띠어 1904년 가을에는 회원수가 9000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904년 12월 말에 1만2000명의 노동자를 가진 최대 금속기계 회사인 푸틸로프 공장에서 가폰의 클럽 회원 4명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노동자들은 연일 집회를 열어 해고자 복직을 요구했고 1905년 1월에는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확대되어 450여 공장의 근로자 11만명이 동조파업을 했다. 이럼에도 사업주들은 완강했고 노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1월 22일에 가폰은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나섰다. 청원서에는 해고자 복직 요구를 사업주가 거절했다는 내용과 함께 8시간 노동제, 노동권 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오후 2시에 궁전광장에는 20만 명이 넘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였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갑자기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1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죽었고 4000명 이상이 부상 당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잔혹한 학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노동자들이 항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1월 한 달 동안 동맹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44만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지난 10년 동안에 파업 참가자수 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국민들은 차르는 노동자 편이 아니며 지주 및 자본가들과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르는 물러가라. 공화국 만세.”이런 구호는 전국 도처에 퍼졌으며 집회와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당시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만주로 진입하여 1904년 9월에는 랴오양을 점령하였고 여순도 위협했다.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은 발틱 함대였다. 10월 15일에 니콜라이 2세는 발틱 함대를 라트비아 리예파야 항구에서 출발시켰다. 하지만 발틱 함대는 1902년에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220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해 대한해협에 도착했다. 전투준비를 끝낸 일본해군은 1905년 5월 27일에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무참하게 궤멸시켰다. 9월 5일에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중재아래 러·일간에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일본은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했고 1910년 8월29일에 조선을 강제 병탄했다. 한편 1917년 10월 25일 네바강에서 정박 중인 순양함 오로라 호에서 한 발의 공포탄이 울렸다. 이를 신호탄으로 공산혁명 지도자 레닌(1870~1924)은 겨울궁전을 습격하여 임시정부 카렌스키를 몰아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정권이 탄생한 순간이었다./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 기획.연재
    2021-03-08
  • “호기심과 질문이 가득찬 교실로 변화 중”
    지난 2019년 교육감에 취임, 3년째를 맞고 있는 장석웅 전남도교육감이 학교운영과 현장교실 수업운영 궤도 수정 등 코로나 펜데믹 현상에 잘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 수 감소로 인한 학교 통폐합과 폐교 등으로 교육환경이 갈수록 어려운 환경에서  선제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장석웅 전남도교육감에게 전남교육의 현장을 들었다.                                             -편집자 주 ▲전남교육청의 주요 성과를 꼽는다면? 코로나 19로 인해 지난해 1학기 등교수업 인원이 제한된 상황속에서도 작은 학교가 많은 전남은 수도권에 비해 등교일수가 4~5배 가량 많았다.효과적인 방역과 선제적이고 창의적인 정책을 추진, 농산물 꾸러미사업 추진을 통해 학생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농가를 위한 농산물꾸러미 배송사업 추진과 정부의 2차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에서 제외된 고등학생과 학교밖 청소년에게 비대면 학습지원금을 1인당 15만원씩 지급했다.전남교실ON 닷컴 등 원격수업대비 수업플랫폼을 전남교사들이 독자적으로 개발, 온라인 교육을 통해 전국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또한 코로나19 극복 국가우수사례로 선정되어 기획재정부에서 편찬한 코로나19 극복 경험편에 실리는 등 전남교육청의 역량과 능력을 전 세계에 알리는 쾌거를 거뒀다. 교실내 무선망 구축으로 원격수업기기 보급과 함께 통신비 지원과 취약계층 학생들에게 PC 150대 무상제공과 함께 6500 세대에 인터넷통신비를 지원하고 있다.작은 학교 살리기를 통한 농어촌지역 정주여건 개선으로, 농산어촌 유학프로그램과 미래형 통합학교를 운영하고 있다.이에 따라 서울의 초·중학생 82명이 전남의 소규모 학교로 전학해 6개월 이상 생활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에 신청해왔다. 소규모학교를 폐교하는 것보다는 초·중 또는 중·고를 통합해 정부가 구상하는 ‘그린 스마트 스쿨’과 연계해 공간을 혁신하고 학교를 생태적으로 재구성, 지속가능한 미래학교로 육성하고 있다.또 전국 최초로 기초학력 전담교사제 도입을 통한 학습안전망을 구축하고, 기초학력이 부족한 초등 1,2학년을 조기에 발견해 1대1 맞춤형 지원을 하고 있다. 정부계획보다 2년 앞선 무상교육 실시와 친환경 무상급식과 안전한 먹거리제공 등 ‘한아이도 포기하지 않은 교육복지’를 실현하고 있다.1987년 개관 이후 시설이 노후화하고 규모가 협소해 도서관 기능 수행에 한계를 노출, 이설 필요성이 지역민을 중심으로 제기되어 오던 영암공공 도서관이 영암읍 회문리 일원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6600㎡ 부지에 연면적 3900㎡, 570석 규모로 모두 170억(국비 50억, 도교육청예산 70억, 군비 50억) 사업비를 투자해 공공도서관을 신축, 오는 2024년 3월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영암공공도서관은 지역민의 의견을 수렴, 1층에 어린이·배려계층 전용시설, 2층은 청소년·성인 시설, 3층에는 교육·문화·커뮤니티 시설로 구성해 지역민과 소통하는 지역공동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취임 3년이 다가온다. 그동안 학교 현장은 어떻게 달라졌는가취임 후 학생의 올곧은 성장과 올바른 인성함양, 스스로의 변화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수업과 교육행정의 혁신을 통해 미래의 인재로 키우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상초유의 온라인 개학이란 큰 위기를 맞았고 대면수업과 비대면 수업을 오가는 혼란스러운 학교 현장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등 혼란 스러운 상황이지만 교육가족 모두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가면서 전남교육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동안 학교현장은 권위주의와 보신주의가 팽배하던 조직문화가 민주적 조직으로 바뀌었고 학생과 교실이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취임하면서 도민과 교육가족에게 약속했던 ‘학교다운 학교. 교육다운 교육’이 어느 정도 실현되어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한지 2년째 접어들었다. 각급 학교는 등교방식과 학교수업 방식이 바뀌면서 비대면 수업과 대면 수업을 오가며 현장수업은 혼란스럽기만 하고, 지속적인 변이바이러스가 발생하는 등 여전히 진행형 이다.  이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은 무엇인가?코로나19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일상이 탄생했다. 그중에서도 교육 분야의 변화는 더욱 빠르고 강력하다. 미래가 서둘러 와버렸다. 미래가 지구를 급습했다고 하는데 이는 교육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코로나 19가 끝나면 학교에서 교실 수업하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은 빚나갔다. 지금까지 200년 이상 지탱해온 근대학교의 유효기간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집단적 효율성이 강조된 교실공유 교육시대는 가고 개인의 개성과 욕구가 특화된 인공지능, 원격교육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당연히 기존 교육의 패러다임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교육과정은 물론이고 수업과 평가 교육행정 등 모든 면에서 온라인 환경에 맞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우리 전남교육청은 코로나19 국면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교육을 준비하고 실천했다. 그동안 온라인 개학과 원격수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며 특히 전남교사들이 만든 원격학습 플렛폼인 ‘전남교실ON.com’ 은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다. 더불어‘포스트코로나 시대’ 교육 대전환을 위해 도교육청에 포스트코로나 전담팀을 구성, 5개 정책과제에  대한 연구와 관련 TF를 꾸려 전남미래교육 종합발전계획을 마련했다. ▲학교와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교직원 및 일반직, 공무직 등의 감소요인도 지속적으로 발생함에 따라 향후 학교운영 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전남의 학생수는 지난 1978년 93만명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현재는 19만명 수준이며, 1982년 이후 통.폐합 정책으로 인해 농어촌 학교 828개가 사라졌다.지속적인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로 전남 학교의 생존이 크게 위협받고 있으며 소규모학교가 꾸준히 늘어 도내 전체 초·중·고교 877교 가운데  43.3%인 380개 교가 학생 수 60명이 채 안된다. 향후 5~6년 뒤에는 절반이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 이는 필연적으로 교직원 감소를 부르고 학교운영에 있어서도 변화가 불기피하다.전남교육청은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소규모 학교의 교육력을 강화하기 위해 학교 급이 다른 2개 학교를 통합해 인적·물적 자원을 공유·활용하는 ‘전남형 통합학교’를 운영하고 있다.이른바 초중, 중고 통합운영 학교인데 현재는 전남도내 12개 학교가 운영중이며 향후 소규모 학교  증가 추세를 감안하면 이를 더 확대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전국최초로 시군 교육지원청에 학교지원센터를 구축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학교지원센터의 역할이 교사의 행정업무 경감 외 학교폭력 등 현장에서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처가 요구되고 있는데 향후 계획은?그동안 일선교육청은 ‘지원보다는 관리의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실질적으로 학교행정업무를 지원하고 경감시켜 교사들이 학생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운영 중심의 학교를 만드는데 있다.22개 시·군 교육지원청에 구축 운영하고 있는 학교지원센터는 일선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폭력예방 및 이에 따른 사안처리, 기간제교사채용 등 19가지 이상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학교업무가 특정시기에 집중되어 있어 학교수가 많은 일부 시단위 지역은 지원업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이에 학교지원센터에서는 협의를 거쳐 제한 또는 단서 없이 즉시 지원하고 있으며 연차적으로 확대하는 학교업무표준안을 마련했다. 학교와 협업체계를 만들어나가면서 현장에서의 다양하고 심화된 요청에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강화해나가고 있다.그러나 교사가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는 여전히 많고 실질적인 업무경감을 체감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겠지만 현장에서는 이미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학교폭력 예방강화와 함께 크고 작은 학교폭력에 있어 일선학교에서 대응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학교폭력 발생은 여전히 심각한 후유증과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근본대책은 무엇인가?   먼저 학교 폭력사건은 일어나서도 안 되고 있어서도 결코 안 되는 일이다. 전남교육청은 학교폭력의 유형을 살펴 재발방지는 물론 다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학교폭력의 양상도 시대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요즘은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모바일과 온라인으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의 학교폭력이 일회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었다면 지금은 지속적이고 상습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다니기 때문에 사이버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점점 어려지는 추세이다.학교폭력은 처벌이나 사후처리로는 해결할 수 없다. 학생 혼자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학생 스스로의 노력과 함께 주변인들 특히 가정과 학교에서의 협력이 적극적으로 더해져야 환경이 바뀌고 사전예방이 가능하다.  가정에서의 지속적인 격려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자녀는 외부의 공격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자존감을 지니기 마련이다. 동시에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집중적인 상담과 괴롭힘을 방지하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또 아이들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고 분노 조절 등 감정조절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결국 학교폭력 예방은 친구 또는 교우 들 간의 우정, 스승과 제자와의 신뢰, 가족 간의 사랑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 ▲민선3기 전남교육의 핵심가치인 ‘민주’‘혁신’‘미래’ 라는 3대 가치 실현을 위한 정책은 무엇인가?주민직선 3기 전남 교육은 ‘민주주의’‘혁신’‘미래’라는 3대 가치를 바탕으로 ‘모두가 소중한 혁신전남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삶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원리이며 혁신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에서 시작해 교육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건설적 노력이다.전남 교육은 이를 바탕으로 미래사회를 함께 여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데 교육적 책무를 다할 것이다.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학생이고 우리아이들의 미래가 교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교실이 변해야 우리아이들이 미래사회의 인재로 커갈 수 있다. 살아 숨 쉬는 교실에서 이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다.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호기심과 질문이 가득 찬 교실, 배움과 성장이 일어나는 교실, 협력하며 스스로 배워가는 교실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 기획.연재
    2021-03-04
  • 회개와 용서를 그린 렘브란트 불후의 명작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가 1634년에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림은 알렉산드르 1세가 1814년에 구입한 나폴레옹 황제의 부인 조세핀의 컬렉션 중 하나이다. 그림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비추고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다. 오른편에 있는 성모 마리아는 실신 상태로 두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다. 1632년에 렘브란트는 네델란드 총독 오라네 공 프레데릭 헨드릭으로부터 헤이그 궁 개인 예배당에 걸릴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오라네 공은 프랑드르 미술 특히 루벤스에게 심취하였는데 렘브란트는 1633년에 안트베르펜 성당에 걸린 루벤스의 그림(1612년 작)을 참조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다.따라서 미술평론가 화이트는 이 그림을 ‘렘브란트가 루벤스에게 보내는 경의(敬意)’라고 비평했다. (화이트 저, 영혼을 비추는 빛의 화가 렘브란트, p 64)  하지만 렘브란트 그림은 루벤스의 그림과 사뭇 다르다. 루벤스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는 이탈리아 전통에 따라 인체 비례에 맞는 근육질인데 비하여 렘브란트가 그린 그리스도는 축 늘어져 있다. 또한 루벤스의 성모 마리아는 의연하게 그리스도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 반면에 렘브란트의 성모 마리아는 아예 실신하여 땅에 누운 상태이다.한편 오라네 공은 렘브란트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 흡족하여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를 추가로 주문했다. 이에 렘브란트는 1636년에 그림을 완성했다. 이후 렘브란트는 1646년까지 오라네 공을 위해 그리스도 수난 관련 연작 5점을 더 그렸다. ‘그리스도 승천(1636년)’ ‘그리스도의 매장(1639년)’ ‘그리스도의 부활(1639년)’ ‘목동들의 찬양’ ‘예수 할례제 (인멸되었으나 사본이 남아 있음)’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레이던 시절부터 친한 오라네 공의 비서 콘스탄테인 하위헌스의 도움과 중재가 컸다. 렘브란트가 하위헌스에게 보낸 일곱 통의 편지가 이를 말해준다.그리스도 수난 연작 그림들은 뒤셀도르프의 팔라틴 선제후에게 흘러들어갔다가 나중에 독일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에 안착했다. 이윽고 ‘돌아온 탕자’ 그림 앞으로 가면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천사와 늙은이와 알몸의 청년이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렘브란트가 1635년에 그린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일 줄이야.그림은 구약성서 창세기 22장에 충실하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이 100살, 부인 사라가 91세에 낳은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위에 올려놓고 칼로 이사악을 막 내려치려는 찰나에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손을 잡고 소리쳤다.“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도다.”(창세기 22장 9-13절) 그렇다. 아브라함은 행동하는 믿음이었다. (야고보서 2장)그림에는 이사악을 베려던 휘어진 단도가 떨어지며 공중에 멈추고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직도 왼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고, 빛은 이사악의 알몸에 집중되어 있다. 역시 영혼을 비추는 빛의 화가답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거장 카라바조를 닮았다. 또한 스승인 종교화가 라스트만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이 그림이 주문 제작인지 아니면 고객이 화가의 공방을 구경하다가 사들였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신교의 나라 벨기에는 칼뱅주의 교리로 인하여 종교화가 그리 성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는 생애에 걸쳐 종교화를 여러 장 그렸고, 별세 직전인 1668-1669년에 그린 ‘돌아온 탕자’는 불후의 명화였다.예르미타시 박물관 투어의 마지막 그림은 불후의 명작 ‘돌아온 탕자’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방문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1606~1669)가 죽기 직전인 1668~1669년에 그렸는데,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1668년에 갓 결혼한 외아들 티투스가 27세의 나이에 죽었다. 렘브란트는 1663년에 사랑하는 여인 헨트리케와 사별한 후 1668년에 외아들마저 잃었다. 더구나 그는 1656년에 파산 선고를 당하여 초라한 집으로 이사하였고 식사는 빵과 치즈 그리고 절인 청어가 전부였다. 렘브란트에겐 가난과 초라함 그리고 절망의 말년이었다. 그림 주문자도 끊어졌다. 예카테리나 여제(재위 1762~1796)가 1767년에 프랑스 파리 아메쥬네 백작으로부터 구입한 ‘돌아온 탕자’는 신약성서 누가복음 15장에 근거한다. 많은 세리(稅吏)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죄인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는 것에 못 마땅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로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백 마리 양에서 다시 찾은 양 한 마리 비유이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사람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한다. 둘째 비유는 은전 열 닢 중 되찾은 한 닢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셋째 비유는 돌아온 탕자이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을 미리 받아서 고향을 떠났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흉년까지 들어 알거지가 되어 남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는 못 견디고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라고 말하며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누가복음 15장 11-25절)그러면 그림을 자세히 보자. 빛은 아버지와 돌아온 탕자에 집중되어 있다. 소위 렘브란트 조명이다. 돌아온 탕자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 누더기 옷을 입고 닳아진 신발 뒤축으로 물집 잡힌 시커먼 발바닥을 드러낸 아들의 모습은 오갈 데 없는 처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붉은 망토를 두른 늙은 눈 먼 아버지는 아들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앞으로 몸을 굽히고 아들의 등과 어깨에 두 손을 대고 있다. 아버지 모습에는 부정(父情)과 관용이 느껴진다. 또한 아버지와 탕자의 옷 색상은 비슷하여 화합과 일치를 보여준다.한편 그림 맨 오른편에 붉은 망토를 하고 두 손에 지팡이를 집고 서 있는 사람은 큰 아들이다. 그는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가 매우 못 마땅한 표정이다. 누가복음 15장 29-32절에는 큰 아들의 항의와 아버지의 대답이 실려 있다.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에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 잔치를 베풀다니요!” 큰 아들의 투덜거림에 아버지는 말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그림에는 또 다른 세 명이 어둠 속에서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다. 앉아서 가슴을 치고 있는 모자 쓴 남자, 뒤 쪽에 서있는 여자, 그리고 컴컴한 어둠속에 너무나 희미하게 보이는 여인. 이들의 모습은 담담하다.‘돌아온 탕자’의 주제는 회개와 용서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탕자인 렘브란트는 신부님에게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그가 그동안 살아온 63년간의 세월을 고해하고 있는 것이다./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 기획.연재
    2021-02-17
  • 렘브란트, 제우스의 여인 ‘다나에’에 빠지다
    렘브란트가 1634년에 그린 ‘플로라 옷차림을 한 사스키아’를 감상한다. 렘브란트는 이 해에 사스키아와 결혼했는데, 그는 사스키아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다. ‘밀짚모자를 쓴 사스키아 (1633년)’, ‘베일을 쓴 사스키아(1633년)’, ‘모자 쓴 사스키아(1635년)’ 등이다.렘브란트가 20세의 사스키아 반 읠렌부르흐를 만난 것은 화상(畵商) 헨드릭 반 윌렌부르흐의 집에서였다. 그녀는 윌렌부르흐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레이우바르던의 시장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사스키아는 고향을 떠나 암스테르담에서 살았다. 화사하면서도 다소 수줍음 많은 그녀는 곧 렘브란트와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두 사람은 1633년 6월5일에 약혼했다. 이어서 둘은 1634년 7월 22일에 사스키아의 고향 프리슬란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사스키아는 결혼 지참금으로 무려 4만 길더를 가져왔다. 제분업자의 아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와 결혼으로 사회적 신분이 급격 상승했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를 제피로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서풍의 신)의 부인 플로라(봄과 꽃의 여신)로 그렸다. 사스키아의 머리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꽃으로 치장한 지팡이를 들고 있어 마치 봄의 여신 같다. 옷의 우아한 자수는 일본풍으로 화려하며 얼굴은 소녀같이 붉다. 당시 네델란드는 일본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일본 나가사키에는 네델란드 상관(商館) 데지마가 있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직원 하멜 일행도 1653년에 제주도에 표류하여 13년간 조선에서 지내다가 1666년에 여수에서 나가사키로 탈출했다. 1668년에 하멜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하멜보고서’를 출간했다.그런데 사스키아의 옷과 몸을 보면 그녀가 임신 중임을 암시한다. 그녀는 1635년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2개월 만에 사망했다. 한편 렘브란트가 꽃장식을 한 아내를 그린 것은 17세기 네델란드의 튤립 열풍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튤립 열풍은 집단광기였다. 튤립은 숙련된 장인이 버는 연간 소득의 10배보다 더 많은 값으로 팔려 나갔다. 그중에는 고급 품종 튤립 구근 하나로 대 저택을 사는 사람도 생겼다. 이러자 1633년에는 상류층은 물론, 기술자·하녀에 이르기까지 앞 다투어 선물거래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튤립을 재배하거나 꽃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격 상승을 목적으로 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튤립 열풍은 1636년에 절정에 달하였고, 1637년 2월 마침내 공황을 일으켜 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튤립 파동(Tulip mania)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투기로 인한 거품 경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튤립 버블은 네덜란드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절제, 금욕을 취지로 하는 칼빈주의적 미덕관이 부활하였고, 튤립 투자자들은 로마 신화의 여신 플로라에 비유하여 ‘욕심 많은 플로라에게 바치는 바보들’ 로 묘사되었다.한편 렘브란트는 1636년에 그린 ‘행복한 부부(일명 선술집의 방탕아)’에서 자신을 묘사했다. 완전한 행복을 묘사한 이 그림은 결혼의 기쁨을 유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미술 평론가들은 이 그림의 제목을 ‘선술집의 방탕아’로 부르고 있다. 술집에서 창녀들과 놀아나며 아버지로부터 미리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한 신약성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1642년에 렘브란트는 단체 초상화 ‘야경(민병대장 반닝 코크의 화승총 부대)’을 그려 네델란드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아내 사스키아가 1642년 6월에 3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3명의 아이를 잃은 다음에 1641년에 아들 티투스를 낳은 후 산후병과 결핵이 겹쳤다. 이후 렘브란트는 몰락하기 시작했다.이어서 렘브란트 방에서 ‘다나에(Danae)’ 그림을 보았다. 다나에는 화가들이 좋아하는 주제였다. 렘브란트 이전에는 티치아노(1490~1576)가 그렸고 20세기에는 ‘키스’의 화가 클림트(1862~1918)가 그렸다. 먼저 다나에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다나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국왕 아크리시우스의 딸이다. 아크리시우스는 다나에가 아들을 낳으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믿고 딸을 청동 탑에 가둔다. 그런데 다나에의 미모에 반한 바람둥이 제우스는 황금 소나기로 변신하여 청동 탑 안으로 들어와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열 달이 흘러 다나에는 페르세우스를 낳았다. 아크리시우스가 페르세우스를 죽이려하자, 다나에는 제우스의 핏줄이라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러자 아크리시우스는 딸과 외손자를 궤짝에 넣어 바다에 버렸다. 궤짝은 세리포스섬에 닿았고 페르세우스는 그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테스는 다나에를 아내로 맞고자 흉계를 꾸며 페르세우스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페르세우스는 모험 끝에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왔다. 그가 메두사의 머리를 자루에서 꺼내 폴리덱테스에게 보이자마자 폴리덱테스는 돌로 변해 버렸다.한편 다나에와 함께 아르고스로 돌아온 페르세우스는 원반던지기 경기에 참가했는데 그가 던진 원반이 우연히 아크리시우스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아크리시우스가 외손자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이 들어맞은 것이다.그러면 먼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전성기를 이끈 베네치아의 화가 티치아노 그림부터 살펴보자. 티치아노가 1553년에 그린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제우스는 황금비로 변신하여 다나에를 만나는데 황금비는 금화처럼 동글납작한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다나에 옆에 있는 노파가 앞치마를 펼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금화를 받고 있는 점이다. 탐욕의 상징이다.렘브란트는 티치아노의 ‘다나에’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제우스를 황금 햇살로 변신시킨다. 침대에 누워있는 나체의 다나에는 황금 햇살이 신(神)임을 느끼고 오른 손을 들어 맞이한다. 특이한 것은 다나에의 머리위에 있는 황금 조각이다. 이 조각은 에로스의 동생 안테로스인데 양손이 묶인 채 울고 있다. 어떤 평론가는 안테로스를 응답 없는 사랑의 상징으로 보고, 이 그림의 주제를 ‘아브라함을 기다리는 사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렘브란트 그림에도 노파가 나오는데 노파는 커튼 뒤에서 가만히 엿보고 있다.다나에는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렘브란트는 다나에를 1636년에 그렸는데 1654년까지 오랫동안 가필했다. 엑스레이 분석결과 광범위한 수정 흔적이 나온 것이다. 그는 이 그림을 애지중지했다. 1656년에 작성된 재산목록에도 다나에가 들어 있었다. 한편 에로티시즘의 대명사 클림트도 다나에를 그렸는데 다나에는 에로틱하다. 붉은 머리칼을 풀어헤친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자는 듯 꿈꾸는 듯 몽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나체의 다나에 허벅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황금비이다. 황금비는 씨앗이고 허벅지 사이는 관능과 잉태의 상징이다. 다다에는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를 드러낸다. 뺨의 붉은 홍조와 입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또한 젖무덤 사이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황홀경에 빠진 그녀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준다.이렇게 다나에는 서양미술사에서 다양한 해석과 표상을 이끌어냈다. 순수와 탐욕, 금지된 사랑, 환희와 쾌락 등 다나에만큼 여러 해석을 낳은 주제도 드물 것이다.여담이지만 렘브란트의 그림 다나에는 수난을 당했다. 1985년 6월 15일에 러시아 출신 한 남자가 다나에 그림에 염산을 뿌리고 칼로 두 번 난도질하여 다나에의 팔과 다리, 그리고 얼굴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림은 오랫동안 전시에서 철거돼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2년간에 걸친 복원작업을 하여 1998년 봄에 다시 전시됐다.
    • 기획.연재
    2021-02-03
  •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 그림 그 자체가 신앙고백
    # 카톨릭 옹호자 루벤스루벤스 그림 감상을 마무리하면서 성상(聖像)과 성화(聖畵)에 대하여  공부한다.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과 밀접하여 관련되어 있다. 종교개혁 2세대 칼뱅(1509~1564)은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성상과 성화에 대해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보였다.성화와 성상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 무엇과도 비슷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서 구절에 따라 하느님의 영광을 그릇되게 표현하고 변질시킨다는 것이다. 칼뱅은 성찬식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빵과 포도주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한편 플랑드르 지방 안트베르펜은 일찍부터 루터파의 거점이었으나 1550년부터 칼뱅파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560년경에 칼뱅주의는 겐트·발랑시엔 등 프랑드르 지방 전체로 확산되었고, 1566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1566년 8월 인구 10만 명의 상업도시 안트베르펜 밖 벌판에 2만5000명의 군중들이 칼뱅파의 노천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일부 극렬주의자들이 ‘성상(聖像) 파괴 난동’을 일으켰다. 이 난동은 8월 10일 서부 프랑드르 지방에서 시작하여 2주일도 안 되어 17개 지방에 퍼졌다. 8월 20일과 21일 사이엔 안트베르펜의 30개 교회가 약탈당하고, 8월 22일에는 헨트가 약탈당했다. 성상이 파괴되고 성화가 불태워졌고, 성상 파괴운동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자 프랑드르 지방을 통치하고 있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1527~1598)는 1567년에 강력 진압을 통하여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이후 종교전쟁이 일어났고 1588년에 프랑드르 북부 지역 7개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안트베르펜을 위시한 남부 플랑드르 지역은 펠리페 2세에 의해 다시 가톨릭 지역이 되었고, 반종교개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안트베르펜의 지역 유지들은 교회에 성상 및 성화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이는 1563년에 채택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종교미술에 대한 결의문에 고무된 것이었다. 결의문은 이렇다.“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의 성상들은 교회에서 반드시 형상화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합당한 존경심이 주어져야 한다.”한편 루벤스는 로마에 가서 미술수업을 하고 1609년에 안트베르펜에 돌아왔다. 그는 프랑드르 섭정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종교화 제작에 분주했다. 루벤스는 1610년에 산타 발부르가 교회의 세 폭 제단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을 그렸다. 1612년에는 병기제조업자 조합이 의뢰한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세 폭 제단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다. 1619년에 루벤스는 예수회 성당의 제단 장식을 위해 세 폭 제단화와 39점의 천장화를 주문받았다. 예수회는 스페인의 기사이자 수사인 로욜라 성 이냐시오가 1534년에 파리에서 창설한 수도회로 1540년 교황 바울로 3세의 승인을 얻은 후 교황에 대한 절대충성을 맹세하는 전위대가 되었고, 폴란드·아시아·신대륙 등지에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루벤스가 예수회로부터 주문 받은 그림 중 유명한 그림이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는 예수회 신부로서 1542년에 인도 고아에 도착하여 포교 활동을 했으며 1549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에서 전도했다. 1551년에 전도를 위해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1552년에 11월에 광동성 근처에서 열병으로 선종했다. 그는 1622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모든 선교사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성 바울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교에 입교시켰다고 알려져 있다.루벤스는 1620년까지 무려 63점이나 되는 종교화를 그렸다. 그의 공방에는 수백 명의 견습생이 지원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는데, 안톤 반다이크도 루벤스 공방에서 일했다. 아울러 루벤스의 종교화는 판화로 만들어져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한마디로 루벤스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었다. 바로크(Baroque)는 ‘일그러진 진주’ 또는 ‘불규칙하게 생긴 진주’라는 뜻이다. 바로크 미술은 로마 가톨릭 옹호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했다. 신자들의 시선을 압도할 만한 극적이고 화려하면서 교훈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가톨릭 교리를 강건히 하였고, 미술 그 자체가 신앙고백이었다.# 램브란트 방이제 예르미타시 박물관 투어 마지막 코스인 렘브란트 방(254호)에 들어섰다. 네델란드 미술의 거장 렘브란트(1606~1669)는 초년엔 부와 명성을 얻고 화려하게 살다가 아내가 죽은 후에 파산까지 당하고 쓸쓸하게 죽은 화가이다.  먼저 본 그림은 ‘플로라 옷차림을 한 사스키아’이다. 1634년 작품인데 28세의 렘브란트는 이 해에 20세의 사스키아와 결혼했다. 그림 감상에 앞서 렘브란트의 초기 생애부터 살펴보자.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은 1606년에 암스테르담에서 40km 떨어진 문화도시 레이덴에서 9형제 중 8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라인 강 근처에 풍차 돌리는 방앗간을 가진 제분업자였는데 ‘반 레인’이란 가문이름도 ‘라인 강가의’라는 뜻이다. 네델란드의 상징 3가지는 풍차와 나막신, 그리고 튤립이다. 풍차와 나막신은 낭만이 아닌 ‘네델란드(Netherlands 저지대란 뜻)’의 생존을 위해 물을 다스리기 위한 산물이었다. 렘브란트는 부유해진 부모 덕분에 기술 교육을 받은 형제들과는 달리 7살에 라틴어 학교에 들어갔고 1620년에는 레이덴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런데 그는 학과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화가 야코프의 도제로 들어간다. 그는 야코프에게 3년간 배우다가, 1624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라스트만 아틀리에에서 6개월간 조수로 일한다. 1625년부터 레이덴에서 독립화가가 된 렘브란트는 1628년에 ‘자화상’을 그렸다.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고, 오른쪽 볼과 귀 부분만이 밝다. 역시 ‘빛과 그림자의 화가’다운 터치이다. 이 해에 행운이 찾아왔다. 네델란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 콘스탄테인 하위헌스(1596~1684)가 그의 작업장을 찾아 온 것이다. 오란녀의 왕자 프레데릭 헨리의 비서이자 외교관이며 시인인 하위헌스는 렘브란트의 필치에 감명 받아 형제들의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고 미술계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1631년에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화상(畵商) 헨드릭 반 윌렌부르흐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1632년에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하였다. 이 시기에 네델란드는 1618년부터 스페인에 맞서 종교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칼뱅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은행과 주식시장 등 자본주의가 꽃피었다.이는 2006년 11월13일부터 11월 24일까지 중국 CCTV-2를 통해 방송된 12부작 역사 다큐멘터리 ‘세계를 호령하는 강대국의 패러다임, 대국굴기’의 제2부 ‘유럽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 세계를 움직이다’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는 EBS에서 2007년 1월과 6월에 2회 방송했다.)대국굴기 제2부 네델란드 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7세기는 황금시대였다. 네덜란드는 일약 세계의 경제 중심이자 해운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처음에 네덜란드인들은 농업과 청어가공으로 큰 부(富)를 거두게 되었다. 그 뒤 영국과의 무역 경쟁 와중에서 네덜란드는 상선을 가장 저렴하게 건조하고, 운송료를 낮추는 해상운송의 혁신을 이루어 ‘바다의 마부’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1602년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1619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점령하였다. 1621년에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1626년에 미국에 뉴 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나중에 영국이 이곳을 점령하자 이름을 뉴욕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1609년에는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와 암스테르담 은행을 창립하고, 신용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새로운 경제와 상업체계는 네덜란드의 부의 열쇠였고, 지금도 경제의 핵심 축을 이루는 존재이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의 절반을 점유하였다.” 한편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는 인맥이 넓은 화상 읠렌부르크의 중개로 부유한 상인과 직업전문가의 초상화 주문에 바쁜 시간을 보냈다.1631년에 그린 ‘니콜라스 루츠의 초상화’는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는 암스테르담 부자 상인 루츠를 그린 것이다. 1632년에는 외과의사 길드 회원들의 주문으로 단체 초상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그렸는데, 이 그림으로 렘브란트는 하루아침에 명성을 날렸다.
    • 기획.연재
    2021-01-18
  • 2021년부터는 고교무상교육이 전면 실시된다. 또한 저소득 구직자 등 취업 취약계층 40만명에게 최대 300만원의 구직촉진수당이 지급된다.새해부터 달라지는 제도와 정책을 요약한다.   ■고등학교 전 학년 무상교육 2021년부터는 고등학교 전 학년 무상교육이 완성돼 1인당 약 160만원의 부담을 덜게 된다. 저소득층 학생의 부교재비와 학용품비를 지원하는 교육급여도 모두 인상돼 초·중·고 공교육비 부담이 줄어들게 된다.기획재정부가 발간한 '2021 이렇게 달라집니다' 책자에 따르면 고등학생들은 올해부터 전학년 수업료와 입학금, 학교운영지원비, 교과서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 고등학생 1인당 연간 160만원의 학비 부담이 경감된다.지난 2019년 2학기 고3부터 도입해 2020년 고2, 고3 대상으로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시행했고 올해 고1까지 전면 확대된다.대상학교는 초·중등교육법상 고등학교와 마이스터고, 각종학교 등이다. 그러나 입학금과 수업료를 학교장이 정하는 자율형사립고나 외국어고 등 일부 특목고는 제외된다.정부는 이 같은 고교무상교육 예산으로 9431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2021년 3월부터는 저소득층(중위소득 50% 이하) 가구 학생을 대상으로 부교재비와 학용품비를 지원하는 교육급여의 고등학생 지원금액이 전년 대비 평균 24% 인상된다. 초등학생은 올해 20만6000원에서 28만6000원으로, 중학생은 29만5000원에서 37만6000원으로, 고등학생은 42만2200원에서 44만8000원으로 각각 오른다.2020년까지는 부교재비와 학용품비로 나눠 지원했지만 2021년부터는 학생 교육 수요에 따라 교육활동 지원비로 통합해 지원해야 한다. 교육급여가 필요한 가구는 학부모가 읍면동 주민센터를 방문하거나 '복지로' 홈페이지(www.bokjiro.go.kr)에서 신청하면 된다. 자세한 사항은 보건복지 콜센터 129를 통해 문의하면 된다. ■종합부동산세율 0.1~2.8%p 인상 새해부터는 주택분 종합부동산세율이 0.1~2.8%포인트(p) 오른다. 장기보유특별공제 적용 요건 등 다주택자 양도소득세제도 바뀐다.정부에 따르면 1주택자의 종부세율은 0.1~0.3%p 인상된다. 과세 표준액 3억원 이하 주택은 0.5%에서 0.6%로, 3억~6억원 주택은 0.7%에서 0.8%로 각각 0.1%p씩 인상된다. 6억~12억원(1.0→1.2%), 12억~50억원(1.4%→1.6%), 50억~94억원(2.0→2.2%)은 각각 0.2%p씩, 94억원 초과(2.7→3.0%)는 0.3%p 인상된다.법인 보유 주택은 과세 표준액과 관계없이 개인 최고 세율인 3.0%가 단일로 적용된다.3주택 이상자나 조정대상지역 2주택자는 인상 폭이 더 크다. 3억원 이하(0.6→1.2%)는 0.6%p, 3억~6억원(0.9→1.6%)은 0.7%p, 6억~12억원(1.3→2.2%)은 0.9%p, 12억~50억원(1.8→3.6%)은 1.8%p, 50억~94억원(2.5→5.0%)은 2.5%p, 94억원 초과(3.2→6.0%)는 2.8%p 인상된다.법인은 6.0% 단일 세율 적용이다.조정대상지역 2주택자의 세 부담 상한(전년 대비 당해 연도의 종부세·재산세 합산 세액 증가 한도)은 200%에서 300%로 인상되고, 법인의 세 부담 상한은 폐지된다.법인 종부세 과세 표준을 산정할 때 적용하던 6억원 기본 공제는 폐지된다.고령 1주택자의 세액 공제율은 구간별로 10%씩 인상된다. 60~65세 세액 공제율은 10%에서 20%가, 65~70세는 20%에서 30%가, 70세 이상은 30%에서 40%가 된다. 고령 1주택 세액 공제율과 장기 보유 공제율(20~50%)을 합해 적용하는 합산 공제율 한도는 70%에서 80%로 10%p 인상된다.1주택자의 실거래가 9억원 초과 주택에 적용되는 장기보유특별공제 요건에는 거주 기간이 추가된다. 3~4년 보유 시 24%였던 장기보유특별공제율은 '보유 12%+거주 12%' 체계로 바뀐다.2년 미만 보유 주택(조합원 입주권·분양권 포함) 및 조정대상지역 다주택자 양도세율은 1년 미만 보유 시 40%에서 70%로 30%p, 1~2년 보유 시 기본 세율에서 60%로 인상된다. 분양권은 2년 이상 보유해도 60%의 중과세율이 적용된다. 이는 내년 6월1일 이후에 양도하는 주택부터 적용된다. ■저소득 구직자에 최대 300만원 지급 저소득 구직자 등 취업 취약계층 40만명에게 최대 300만원의 구직촉진수당이 지급된다. 최저임금은 시급 기준 8720원으로 인상된다.우선 1월부터 '한국형 실업부조'인 국민취업지원제도가 본격 시행된다.국민취업지원제도는 15~69세 저소득 구직자, 청년 등 고용안전망 사각지대의 취업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구직활동 의무를 이행할 경우 1인당 월 50만원씩 최대 6개월간 구직촉진수당을 지급하는 것이다.취업지원 서비스와 구직촉진수당을 같이 제공하는 Ⅰ유형과 기존의 취업지원 프로그램 '취업성공패키지'가 통합·운영돼 취업지원 서비스를 중심으로 제공하는 Ⅱ유형으로 운영된다. 지원 규모는 각각 40만명, 19만명이다.이 중 Ⅰ유형의 지원대상 요건을 보면 소득은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 이하여야 한다. 이는 내년 기준으로 1인 가구는 약 91만원, 4인 가구는 약 244만원 이하에 해당하는 것이다.재산 요건은 3억원 이하다. 토지나 건축물, 주택을 기본으로 분양권, 자동차 등도 포함해 고액 자산가 등은 구직촉진수당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취업경험 요건은 2년 이내 100일 또는 800시간 이상으로 정했다. 다만 요건 충족은 못했어도 구직 의사가 있는 이들도 지원받을 수 있도록 40만명 중 15만명은 별도로 선발해 지원한다. 올해부터는 30~299인 사업장의 근로자도 '빨간날'로 불리는 관공서의 공휴일을 유급휴일로 보장해야 한다. 이는 2018년 3월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른 것이다. 개정법은 올해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관공서 공휴일의 민간부문 적용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5~ 29인 사업장은 2022년부터 적용된다. 최저임금은 시급 기준 8720원으로 인상된다. 인상률은 지난해 대비 1.5%로 월급으로 환산하면 182만2480원이다. 소정 근로시간 주 40시간에 주휴시간을 포함한 월 근로시간 209시간을 적용한 결과다.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영세 사업주의 경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가 근로자의 임금 일부를 지원해온 '일자리안정자금'의 지원 수준은 최저임금 인상률이 1.5%에 그친 점을 고려해 소폭 하향 조정된다. ■우수 대중문화예술인 입영 연기 가능 방탄소년단(BTS) 등 우수 대중문화예술인들은 30세까지 입영을 연기할 수 있다. 온몸에 문신이 있거나 중학교까지만 졸업한 남성은 내년부터는 보충역이 아닌 현역으로 입영한다.기획재정부가 새해부터 달라지는 제도와 법규사항 등을 정리한 '2021년부터 이렇게 달라집니다' 책자에 따르면 6월부터는 입영연기 대상의 범위에 우수 대중문화예술인이 추가된다.그간 대학생·대학원생, 체육 분야 우수자는 징집이나 소집을 연기할 수 있었던 반면 대중문화예술 분야 우수자는 연기 대상에서 제외돼있었다.이에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며 국가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우수한 대중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보장하고자 병역법이 개정됐다.2월부터는 학력 사유 병역처분기준이 폐지된다.그간 고등학교 중퇴 이하 학력자는 현역(1~3급) 판정을 받아도 보충역 처분을 받았고 본인이 원할 경우에만 현역병 입영 대상으로 처분됐다.앞으로는 학력에 관계없이 현역(1~3급) 판정을 받은 사람은 모두 현역병입영 대상이 된다. 이를 통해 형평성 논란과 학력 차별 논란을 해소하겠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2월부터 현역병 입영자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신체등급 판정기준이 바뀐다.문신을 한 사람의 경우 사회적으로 부정적 인식이 감소함에 따라 4급 기준이 폐지되고 모두 현역(1~3급)으로 판정된다.또 현역병 입영적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강화했던 체질량지수(BMI), 굴절이상(근시, 원시) 등 현역 판정기준이 2014년 이전 수준으로 환원된다. 이를 통해 현역병 입영 대상이 늘어난다. ■소득하위 70% 기초연금 30만원 기초연금 최대금액인 30만원 지급 대상자가 소득하위 70%까지 확대된다. 기존에는 소득하위 40% 이하에게만 월 최대 30만원을 지급했었다. 장애인연금은 2021년부터 전체 수급자에게 월 최대 30만원을 지급한다. 장애인연금은 2018년 9월부터 월 최대 25만원을 지급했고 2019년 4월부터는 생계·의료급여 수급자 대상으로 월 최대 30만원 인상을 했다. 생계급여 수급권자 가구에 노인·한부모가 있는 경우 부양의무자 기준은 적용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향후 약 15만 가구에 대해 생계급여를 신규 지원한다. 통계원 변경과 산출방식 개편을 적용해 기준중위소득이 4인 기준 약 3% 인상될 예정이다. 복지제도 적용 대상의 소득기준이 상승함에 따라 더 많은 수급자에게 혜택이 돌아갈 예정이다. 저소득층 청년들의 저축을 유도하고 자산형성을 지원해 자립기회를 제공하는 청년저축계좌는 지원규모를 1만3400명으로 확대하고 종전 2회였던 가입기회를 4회로 늘린다. 기존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은 차세대 사회보장정보시스템으로 개편하고 내년 9월부터 기존 복지수급자를 대상으로 맞춤형 사회보장급여 안내를 우선 시행할 예정이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에 따라 2021년 상반기에는 흉부(유방), 하반기에는 심장 초음파 검사에 건강보험이 확대 적용된다. 그간 초음파 검사는 높은 비용 효과성에도 불구하고 재정부담 등으로 4대 중증질환자(암, 심장,뇌혈관, 희귀난치) 등을 중심으로 보험이 적용됐으나, 앞으로는 의사의 의학적 판단 하에 해당 부위에 질환이 있거나 질환이 의심돼 검사가 필요한 경우 건강보험을 확대할 예정이다.원추각막, 무뇌수두증 등 68개 희귀질환과 중증 아토피성 피부염이 산정특례 대상 질환으로 신규 지정됨에 따라 해당 질환 진료비 본인부담률이 입원치료 기준, 기존 20%에서 10%로 인하된다. 또 현재 일반건강검진 결과 고혈압, 당뇨병 질환 의심자에 대해, 진찰료, 검사비용 본인부담금액이 면제되던 것에서 결핵 유소견자에게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경찰 '수사종결권'…자치경찰 도입 새해부터는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폐지되고 경찰에게도 수사 종결권이 부여되게 된다. 또 자치경찰제도 전면 도입될 예정이다.개정된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에 따르면 검사는 경찰에 수사지휘를 할 수 없게 되고 경찰은 자체적인 수사종결권을 갖게 된다.만일 검사가 부당하게 영장을 불청구할 경우 경찰은 '영장심의위원회'를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경찰은 1차적이고 일반적인 수사주체로, 검찰은 2차적이고 제한적인 수사주체로 역할이 각각 변경될 예정이다.또 같은날부터 자치경찰제가 도입된다. 경찰은 자치경찰과 국가경찰, 수사경찰 체계로 분리돼 각각 다른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자치경찰은 학교폭력과 여성, 아동 관련 범죄, 교통법규 위반 단속 등 민생치안 업무를 주로 담당하게 된다. 우선 1월1일부터 준비가 된 시도부터 순차적으로 운영된 후 다음해 7월 1일부터는 전국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 기획.연재
    2020-12-30
  • 막달라 마리아가 두손으로 예수의 발을 잡다’
    루벤스 방에서 젊은 여자가 두 손이 묶인 늙은이에게 자신의 젖을 먹이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이 그림은 로마의 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기억할 만한 공적과 격언들’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제목이 ‘로마인의 자비(Roman Charity)’이고 부제는 ‘시몬(Cimon)과 페로(Pero)’이다. 노인 시몬은 젊은 여자 페로의 아버지다. 시몬은 역모죄로 아사형(餓死刑)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아버지를 면회한 페로는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자신의 젖을 물린다. 그러자 간수들은 딸의 효성에 감동하였고, 딸의 효심을 전해 들은 로마 법정은 시몬을 석방한다. 이렇게 루벤스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젖을 물리며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려는 젊은 여인의 헌신적 사랑을 표현했다. 한편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도 루벤스의 ‘로마인의 자비’ 그림이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예르미타시 박물관 그림보다 훨씬 선정적이다. 늙은이가 두 젖이 다 나온 젊은 여인의 젖 하나를 애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외설이라는 비난도 일었는데, 예술과 외설의 기준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게 한다.  이윽고 한쪽 벽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루벤스의 걸작인 이 그림은 비극적이지만 엄숙하다. 예수는 머리를 뒤로 하고 새하얀 천에 휘감겨 있는데 손과 발에 박힌 못 자국이 선연하다. 예수의 시신 주변에는 6명이 있다. 남자가 4명, 여자가 2명인데 한 남자는 예수를 손으로 잡고 있는데 얼굴이 안 보인다.나머지 5명은 요셉과 니고데모, 사도 요한,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림 가운데에 두건을 두르고 있는 이는 요셉이다. 의회 의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 총독에게 청하여 예수의 시신을 인수받았다. 왼편의 수염을 기른 남자는 니고데모인데 천으로 예수를 감싸고 있다.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니 니고데모는 눈물을 참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 편에 진홍색 옷을 입은 이는 사도 요한인데, 두 발을 사다리 위 올려놓고 두 손으로 예수의 등을 받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열두 제자 중 그 곁을 지켰던 사람은 요한뿐이었다.한편, 왼편에 자주색 옷을 입고 예수의 옆구리를 만지고 있는 여인은 성모 마리아이고, 한 발을 꿇고 예수의 두 손을 잡고 있는 분홍 드레스의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런데 신약성서를 보면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렸을 때 같이 있던 사람은 6명만이 아니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자.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있었다.”(요한복음 19장 25-26)여자만 4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도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요셉은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그리고 언젠가 밤에 예수를 찾아 왔던 니고데모도 침향을 섞은 몰약을 백 근 쯤 가지고 왔다. 이 두 사람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요한복음 19장 38-41)그런데 벨기에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그림에는 예수 곁에 8명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세 폭의 제단화 중의 하나인데, 루벤스는 1612년에 중앙 패널에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고, 나머지 좌우 패널 ‘마리아의 방문’과 ‘성전에 아기 예수의 봉헌’은 1614년에 완성하였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초점은 어둠 속에서 예수의 시신을 휘감고 있는 하얀 수의이다. 예수 곁에는 남자가 5명 여자가 3명이 있다. 붉은 모자를 쓴 요셉은 흰 천을 잡고 있고, 니고데모는 두 발을 사다리에 올리고 있다. 진홍색 옷을 입은 사도 요한은 한 다리를 사다리에 걸치고 있다. 사다리 꼭대기에는 한 남자가 흰색 천을 이빨로 물고 있고, 웃통을 벗은 남자는 흰 천을 잡고서 예수를 내리고 있다.한편 청색옷의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만지려고 손을 뻗었고, 살색 블라우스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는 두 손으로 예수의 발을 잡고 있다. 그 옆에도 한 여자가 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가 의연하다. 실신한 마리아를 그린 다른 화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반면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베이덴(1399~1464)이 1435년경에 그린 ‘십자가 강하’에는 성모 마리아가 실신하여 성 요한과 한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다. 바로 옆방인 렘브란트(1606~1669) 방에서 본 그림도 성모 마리아가 실신 상태로 두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다. (렘브란트가 1634년에 그린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의 컬렉션이었다가 알렉산드르 1세가 1814년에 구입했다.)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이처럼 다를까? 어떤 종교사학자는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루벤스의 그림은 가톨릭의 반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다.그러면 종교개혁부터 알아보자.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이며 신학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城)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를 항의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붙였다.수도사 테첼은 면죄부를 팔면서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해준다고 약속했다. 면죄부 판매 대금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자금이었는데, 이는 로마 교황청의 타락의 전형이었다.루터는 ‘95개조의 논제’ 중 제36조에서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은 면죄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죄를 사면 받을 권한을 가진다”라고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에 정면 도전했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것이다. 루터의 반박문 95개조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퍼졌다.위기를 느낀 로마 교황청은 1520년 11월에 루터를 파문했다. 그러자 루터는 12월 10일 비텐베르크 광장에서 교황의 파문장과 교회 법전 등을 불태웠다. 1521년 4월에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 소환되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감금 직전이었던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 공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그는 1522년에 독일어판 신약성서를 출간하여 대중에게 보급시켰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었다. 이후 루터파 교회는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그런데 종교개혁의 주동자는 2세대인 장 칼뱅(1509~1564)이었다. 1536년에 칼뱅은 제네바에서 ‘기독교 강요(綱要)’를 출간해 ‘예정설’을 주장하고 노동과 금욕을 중시하였고, 신에 의해 이미 결정된 소명 즉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칼뱅주의가 시민들에게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자극시키자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스위스·프랑드르 지방·영국·스코틀랜드 등지로 확산되었다.한편 가톨릭은 신교의 종교개혁에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1563년)를 통한 교리의 정립, 무능하거나 타락한 성직자에 대한 처벌과 규제, 예수회의 활발한 선교와 교육 사업, 그리고 기존의 교리와 성찬식 고수, 성상(聖像)과 성화(聖畵)의 유지 등을 통하여 신교의 도전에 정면 대응했다. 이른바 ‘반종교개혁’이었다.
    • 기획.연재
    2020-12-30
  • 루벤스, 헬레나와 결혼 10년 생명력 불살랐다
    루벤스방에서 ‘바쿠스(Bacchus)’를 감상한다. 이 그림은 ‘땅과 물의 만남’과 같은 벽에 있다. 바쿠스는 로마 신화의 포도주와 황홀경의 신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이다. 그림은 한마디로 ‘부어라 마셔라’이다. 술잔을 든 바쿠스는 여인이 따르는 술을 받고 있고, 그 밑에서 한 아이가 떨어지는 술을 받아 마시고 있다. 바쿠스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병나발을 불고, 아이는 오줌을 싸고 있다.이 그림은 루벤스(1577~1640)가 1637년에 그린 것인데 이 시기는 루벤스에게 제2 황금기였다. 루벤스는 1626년에 첫 번째 부인 이사벨라 브란트와 사별하고 1630년에 37세나 어린 헬레나 푸르망과 재혼했다. 1608년 12월 초에 루벤스는 8년간의 이탈리아 생활을 마치고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다. 종교 전쟁을 치렀던 안트베르펜은 1609년 5월 9일의 12년 휴전 협정으로 평온을 되찾았고, 전쟁으로 파괴된 성상과 성화 복원이 시급했다. 이런 일감은 예술가들에겐 호재였다.1609년 10월 초에 32세의 루벤스는 21세의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 계급 출신으로, 그녀의 아버지 얀은 법률가로 안트베르펜시의 서기관이었고, 인문주의자였다.결혼식은 산 미켈레 수도원 교회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교회는 루벤스의 어머니 마리아가 묻힌 곳이었다. 루벤스 어머니는 1608년 10월19일에 안트베르펜에서 작고했는데 루벤스는 임종을 보지 못한 불효자였다. 루벤스는 이사벨라와 결혼한 직후에 ‘이사벨라 브란트와 함께 있는 자화상’을 그렸다.루벤스와 이사벨라의 모습이 대부분인 이 그림에는 애정이 가득하다. 루벤스 부부는 우아한 모자를 쓰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정원에 앉아 있다. 이사벨라는 몸을 남편 가까이 둔다. 그녀의 손은 루벤스의 팔목을 잡고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루벤스는 한 손을 칼의 손잡이에 얹은 채 관중을 향해 시선을 던진다.그런데 루벤스 부부에 불행이 닥쳤다. 이사벨라와의 결혼에서 태어난 세 명의 자식중 장녀인 클라라 세레나가 1623년 8월에 갑자기 죽은 것이다. 이어서 1626년 6월에는 아내 이사벨라가 죽었다. 당시 남부 플랑드르를 할퀴고 간 흑사병 때문이었다.루벤스는 실의에 빠졌다. 그는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외교 활동에 전념했다. 1629년에 루벤스는 외교관으로 스페인과 영국 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영국에 갔다. 영국에서 루벤스는 찰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화이트홀 궁전 연회장 장식화 제작 주문도 받았다. 아울러 루벤스의 외교적 활동이 결실을 맺어 1630년에 스페인과 영국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1630년 12월에 53세의 루벤스는 16세의 헬레나 푸르망과 재혼했다.헬레나 푸르망은 비단과 태피스트리 상인 다니엘 푸르망의 11번째 막내딸이었다. 1622년경에 루벤스는 그녀의 언니 수잔나 푸르망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이 때 헬레나는 8살이었다. 한편 루벤스는 1630~1631년에 16세의 헬레나 푸르망과 결혼 직후에 결혼의상을 입고 있는 초상화를 그렸다. 한마디로 헬레나는 아프로디테였다. 1639년에 추기경이자 왕자인 페르디난트는 형 펠리페 4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헬레나를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언급하였다. 초상화의 그녀는 행복해 보이지만 앳된 모습에 수줍음이 내비친다. 루벤스가 1630~1632년에 그린 또 다른 초상화 ‘헬레나 푸르망’은 풍만한 외모에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1631년에 루벤스는 ‘정원에서 헬레나와 함께 있는 루벤스’를 그렸다. 이 그림은 아내 헬레나가 루벤스와 함께 안트베르펜 저택의 정원을 지나 현관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노란 모자를 쓰고 손에 부채를 든 헬레나 옆에는 검은 모자와 검은 옷을 입은 루벤스가 있다. 헬레나 옆에는 이사벨라 브란트가 낳은 아들 니콜라스(12세)가 있다. 이들 앞에는 공작새가 있다. 제우스신의 부인 헤라(Hera)는 결혼과 가족의 수호신인데, 공작새는 헤라의 상징물이다.1632~1633년에 루벤스는 ‘사랑의 정원’을 그렸다.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이 그림은 정원에서 선남선녀들이 사랑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운데엔 다양한 의상을 한 여인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고, 왼편엔 모자 쓴 남자가 어린 천사가 등을 밀고 있는 젊은 여인과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이 바로 루벤스와 헬레나이다. 그 옆에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오른편 맨 위에는 돌고래 위에 앉아 있는 여인상의 가슴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이는 사랑과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하늘에선 천사들이 꽃과 비둘기로 축복하고 있고, 뒤편에도 은밀한 사랑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펠리페 4세가 특히 좋아한 작품이었다.1632년 1월에 루벤스와 푸르망 사이에 첫 딸 클라라 요한나가 태어났다. 1633년 7월에는 큰 아들 프란츠가 태어났다. 너무 기쁜 나머지 루벤스는 헬레나와 아이의 그림을 여러 장 그렸다. 루벤스는 1635년경에 ‘큰 아들 프란츠를 안고 있는 헬레나 푸르망’을 그렸다. 헬레나가 집의 테라스에서 알몸의 프란츠를 안고 있다. 1636년에는 ‘클라라 요한나, 프란츠와 함께 있는 헬레나 푸르망‘ 그림을 그렸다. 특히 이 그림은 루벤스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화실에 놓여 있었다.루벤스는 헬레나에게서 5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막내딸은 그가 죽은 후 8일 후에 태어났다.한편 1635년에 루벤스는 메헬렌 근처의 스텐 성을 구입했다. 그는 이 성에서 헬레나와 함께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헬레나를 모델로 그림을 여러 장 그렸다. 마지막 불꽃을 태운 것이다.1636년부터 1638년까지 루벤스는 ‘미의 세 여신 (三美神)’를 그렸다. 삼미신은 비너스를 모시는 세 여신이 정원에서 서로 회동하고 모습을 담은 그림인데 삼미신은 아글라이아(미), 에우프로시네(은총), 탈레이아(풍요)이다. 풍만하고 아름다운 세 여신은 장미 넝쿨 아래서 나신으로 서로 안고 있다. 루벤스는 늘 키 크고, 붉은 뺨의 풍만한 금발 여인을 그렸는데, 그 모델은 다름 아닌 아내 헬레나 푸르망이었다. 필자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았는데 복제품을 한 장 샀다. 루벤스는 1636~1638년까지 ‘파리스의 심판’을 그렸다. 여기에도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하는 데 벌거벗은 아프로디테의 모델이 역시 젊은 아내 헬레나였다. 그런데 루벤스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그림은 1638년경에 그린 ‘욕실에서 나오는 헬레나 푸르망’이다. ‘모피를 걸친 헬레나 푸르망’이란 제목으로도 불린 이 그림은, 헬레나가 거의 벗은 채 어깨를 휘감은 모피만 걸치고 진홍 카펫 위에 서 있다. 갓 목욕하고 나온 헬레나의 몸매는 유백색(乳白色)으로 빛나고 있는데 에로틱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그림은 루벤스가 가장 아껴 늘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유언장에서 경매목록에서 제외하고 헬레나 소유로 남긴다.루벤스는 1640년 5월30일 통증으로 심장발작이 일어나 별세했다. 그는 헬레나와 결혼한 1630년에서 1640년까지 10년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의 그림도 놀라운 생명력으로 불탔다.
    • 기획.연재
    2020-12-22
  • 광주 서구, 올해 상복 터졌다
    <서대석 광주 서구청장> 광주 서구(구청장 서대석)의 행정이 외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각종 평가에서 눈에 띄는 수상 실적을 거두고 있다.정부의 핵심정책인 주민자치, 복지, 안전, 환경, 보건 등 다양한 분야의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행정력을 입증하는 성과를 낸 것.최근 서구는 제19회 전국주민자치박람회에서 농성1동과 치평동이 주민조직네트워크 분야와 주민자치 분야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풍암동 및 화정3동은 우수상을 수상했다.또 학습공동체 분야에서 화정1동이 우수상을, 제도정책 분야에서는 자치 분권상을 수상, 5년 연속 우수사례 전국 최다 선정 지자체라는 영예를 안게 됐다.더욱이 지난해 금호1동에 이어 금년에는 농성1동이 대상 후보에 오르며 2년 연속 대상 후보를 배출해 내는 저력을 보여줬다.지난해 서구는 대상을 비롯해 최우수상 1개, 우수상 3개와 장려상 4개로 전국 최다 우수사례 수상의 영예를 안으며 주민자치 선도 지자체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서구는 또 행정안전부가 주최하는 ‘제9회 대한민국 지식대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대한민국 지식대상은 민간과 공공부문의 지식행정·경영 우수사례의 발굴·확산을 취지로 제정된 이 분야 최고 권위의 상이다. 서구는 주민 및 공무원 대상 제안제도, 아이디어 공모전, 서구청 SNS 그리고 청년정책 참여단 등을 운영해 지식기반 활동을 활발히 펼친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이 뿐만 아니다. 거버넌스 지방정치대상 공모대회 조직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2020 거버넌스 지방정치 대상’ 에서 ‘자율과 참여, 마을과 현장중심 자치공동체 실현’을 주제로 참여해 자치분권 강화 분야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복지부문에서도 서구의 행정력은 빛을 발했다.지난 18일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2020년 지역복지사업 평가에서 3개 분야에서 대상 및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기관 표창과 함께 4000만원의 포상금을 받기도 했다.전국 229개 지자체 가운데 서구는 ‘찾아가는 보건복지서비스 제공 분야’ 대상, ‘민관협력 및 자원연계 분야’, ‘지역사회 통합돌봄 서비스 제공분야’에서 각각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다.평가에서 서구는 올 한해 코로나19 속에서도 취약계층의 심리적 안정과 소통, 생활 안정을 위해 추진한 긴급 이웃살피미운동, 각종 꾸러미 제작과 75세 이상 어르신들에 대한 전수조사를 통한 맞춤형 통합돌봄서비스 실시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코로나19 사태와 폭우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가중된 가운데 서구는 재난 대비한 평가에서도 좋은 결실을 맺었다.얼마전 행전안전부가 ‘2020년도 여름철 자연재난 대책 평가’를 통해 서구를 우수기관으로 선정, 특별교부세 2억원을 지급한 것.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한 평가에서 서구는 여름철 자연재난 사전대비 기간에 재해 우려지역 안전 및 인명보호 계획을 수립하고, 선제적 비상상황 관리를 추진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이밖에도 서구는 풍수해 보험 가입률 제고를 위해 광주시에서 실시하는 풍수해보험사업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020년 민방위 업무 평가에서는 우수상을 받는 등 안전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환경 분야에서도 서구는 다양한 친환경 정책 도입과 선도적인 실천운동 등을 통해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대응에 기여한 점을 높게 평가 받아 녹색환경대상에서 종합대상인 환경부장관상을 수상했다.올해 서구는 화정3동과 화정4동 지역에 태양광, 태양열 377개소를 보급하고, 사회복지시설 및 취약계층 가구 414개소에 LED등을 설치했으며친환경 저녹스 보일러 2315대를 지원하는 등 소나무 35만 그루 식재 효과를 거두게 됐다. 또 도시 불투수 면의 증가로 인한 홍수, 지하수 고갈, 도시열섬 악화 등 물 문제 가중 현상을 줄이기 위해 비점오염 및 우수유출 저감을 위한 ‘그린빗물인프라 조성사업’을 광주 자치구 가운데서는 최초로 추진하기도 했다.일자리 및 보건 분야에서도 서구는 가시적인 성과를 이뤄냈다.보건복지부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지원사업 평가대회에서 광주 서구 시니어클럽이 최우수상, 식중독 예방관리에서 식품의약품 안전처장상, 비만 예방관리사업에서 보건복지부장관상, 자치구 출산정책평가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것.특히 최근에는 광주시가 주관하는 규제개혁 자치구 평가에서 정부합동평가 지표, 인증제 진단 6개 지표를 평가한 결과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으며, 한국거버넌스학회와 언론사에서 실시한 행정대상·의정대상에서 행정혁신부문 행정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이처럼 올해 서구청은 각종 평가에서 45건의 수상을 했으며, 정부 부처와 광주시 주관 각종 공모 사업에서도 잇따라 선정되며 다급한 현안사업비를 확보했다.대표적인 공모사업으로 지난 9월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에너지공단의 공모에서 2021년 신재생에너지 융복합지원 사업에 선정, 32억 6000만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이 사업비는 상무1,2동, 화정1동, 금호1동 등 436개소에 2MW 규모의 태양광발전 설비 설치, 10개소에 태양열 온수설비, 1개소에 연료전지 발전 설비비로 투입될 예정이다.이밖에도 서구는 행정안전부의 2021년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사업 공모에서 10억 7000만원, 보건복지부 보건복지 전달체계 강화 시범사업 공모에서 4억 2000만원, 지역사회 통합돌봄 선도사업 특화사업 공모에서 1억6000만원, 고용노동부 지역산업 맞춤형 일자리창출 지원사업에서 3억4000만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또 광주시가 주관하는 2021년 전통시장 및 상점가 시설현대화 사업비24억 4000만원, 사회적기업 일자리창출 사업 8억 5000만원 등을 비롯해 75건의 공모사업에서 총 143억 여원의 사업비를 확보함으로써 열악한 구 재정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게 됐다.서대석 청장은 “모든 공직자들이 협업을 바탕으로 적극 노력한 결과 여러 가지 대내외 평가와 공모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며 “확보한 사업비를 효과적으로 집행해 현안사업들이 차질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연재
    2020-12-20
  • 광주고총동문회 '2020 자랑스러운 光高人의 밤' 성료
    김낙현 회장 "코로나19 어렵지만 광고인 역량으로 극복하자" 광주고등학교총동문회(회장 김낙현·24회)가 지난 12일 ‘4·19민주혁명역사관’에서 ‘2020 자랑스러운 광고인의 밤’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기노석(20회·의학박사·흉부외과 전문의·금호라이프 회장) 동문에게 '광고인 영예대상', 그리고 김명민(10회·前 광주시의회 의원) 동문 등 8명에게 ‘자랑스러운 광고인상’이 수여됐다.광주고총동문회는 정부 시책에 따라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등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참석하지 못한 다수 동문을 위해 유튜브 생방송으로 행사를 실시간 중계했다.광주고총동문회는 매년 10월 ‘光高동문체육대회’를 모교에서 개최해 왔으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규모를 대폭 축소해 이날 행사로 대체했다.
    • 기획.연재
    2020-12-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