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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일본 공사관 직원들에 이례적 훈장 하사
    1904년 2월 23일에 외부대신 임시서리 이지용과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노스께 간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다. 3월 7일에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대사로 임명해 한국에 파견했다. 명분은 한국 황실 위문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한일의정서 체결에 따른 고종의 저항을 무마하려는 것이었다. 3월17일에 이토는 서울에 도착하여 18일에 고종을 알현하였다.    3월 20일에도 이토를 만난 고종은 조령을 내려 일본 공사관 직원들에게 훈장을 하사했다. 매우 이례적이었다.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노스께는 훈1등(勳一等)에, 서기관 하키하라 슈이치는 훈3등(勳三等)에 서훈되었고, 공사관 전 직원이 훈장을 받았다.  3월 24일에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금번 일본 특파 대사와 수행원들에게 모두 훈(勳)을 줌으로써 친애의 뜻을 보여 주어라. 일본 특파대사인 추밀원 의장이며 후작인 이토 히로부미를 특별히 대훈위(大勳位)에 서훈(敍勳)하고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하사하라. 수행원인 추밀원 서기관장 쓰즈키 게이로쿠를 특별히 훈1등(勳一等)에, 육군 소장 우사가와 가즈마사, 해군 소장 사카모토 도시아쓰, 궁중 고문관인 자작 도엥 모토아이를 모두 특별히 훈2등에 서훈하고 각각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공사관 서기관 고쿠분 쇼타로를 특별히 훈2등에 서훈하고 팔괘장을 하사하라. 외무성 참사관 사카다 주지로, 제실 제도 조사국 비서 후루야 히사쓰나를 모두 훈4등에, 다카하시 다네노리를 특별히 훈5등에 서훈하고 각각 태극장을 하사하라.” (고종실록 1904년 3월 24일)3월 25일에도 고종은 이토를 접견했다. “함녕전에 나아가 일본 특파 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하였다. 다음날 귀국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고종은 이날 일본국 함장 해군 대위 이노우에 도시오를 특별히 훈3등에, 대위 시바후 사이치로를 특별히 훈5등에 서훈하고 각각 태극장을 하사하였다. 고종은 이렇게 일본인들에게 대한제국의 훈장을 주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  그런데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을 이렇게 적었다. “이토는 자못 정중하였고 경륜이 높아 고종은 민영환에게 명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여론에 의하면 이토는 반드시 비상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가 폐하를 알현할 때 매우 정중한 예의를 지키며 의지를 굳게 하기를 권하고, 또 정부가 구습을 버리고 새 조류를 따르라고 권고하였다.고종은 그의 위세에 눌려 10일 사이에 궁중의 극장을 철거하였는데, 그가 서울을 떠나자마자 다시 내비(內批)가 내려졌다. 이 일을 두고 서울 사람들은 ‘8일 동안 청명(淸明)’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종은 궁중에 극장을 설치하고 항상 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1905년에 알렌은 “황제는 무희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편 3월 31일에 민영환은 영국 공사관을 방문해 주한 영국공사 조던에게 이토의 방문에 대해 설명했다. 조던은 즉시 영국 외무성에 보고했다. “이토는 천황 국서를 직접 고종에게 전달하여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토는 황제에게 천황 선물이라고 30만 엔(현 시가 375억원)을 주었다. 또한 궁중 참석자에게도 50만 엔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경부선 이익금 일부와 경의선 이익금까지 보장하는 등 고종의 환심을 사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p 332-333 ; 구대열, 다모클레스의 칼? -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대응, 정성화 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5, p 29 ) #. 고문정치         제국 열강들의 예상과 달리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승장구했다. 1904년 5월 초에 일본은 고종에게 러시아와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칙선서(勅宣書)를 발표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5월 18일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 한국공사관을 철폐하고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소환 명령을 내렸다. 이날 외부대신이 칙선서 초안을 보고하니 고종이 윤허하였다. “대한(大韓) 정부는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것이 오직 대한국의 독립을 유지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확고히 하는 데 있다는 것을 헤아려 이미 의정서를 체결하고 협력함으로써 일본이 교전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번에 또 러시아주재 공사관을 철회하였으니 이것으로 실상 대한국과 러시아 간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또 앞으로 우리 대한국의 방향을 명백하게 하고 러시아가 이전과 같이 조약과 특준(特準) 합동 등 조건을 핑계하여 침략적 행위를 다시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외부대신이 칙선서(勅宣書) 초안을 의정부 회의에 제출하여 토의를 거친 뒤에 의정부 참정(參政)과 연명으로 상주(上奏)하니, 고종이 그것을 윤허하였다.”(고종실록 1904년 5월 18일)   그리고 이 날 밤에 고종은 칙선서를 의정부에 내려보내고 관보 호외를 통해 황제의 칙선서를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였다.〈칙선서(勅宣書)〉1. 이전에 한국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과 협정은 일체 폐기하고 전혀 시행하지 말 것이다.1. 러시아의 관리와 백성들에게나 회사(會社)에 인준한 특허 합동(特許合同) 가운데 지금까지도 유효 기간이 있는 것은 이제부터 대한(大韓) 정부가 무방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면 이전대로 그 인준해 준 것을 계속 누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두만강, 압록강, 울릉도의 산림 채벌 및 식수(植樹) 특허권은 본래 한 개인에게 허락한 것인데, 실상은 러시아 정부가 자체로 경영할 뿐 아니라 당해 특준(特準) 규정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침략 점거 행위를 하였으니, 당해 특준을 폐지하고 전연 시행하지 말 것이다.” (고종실록 1904년 5월 18일 4번째 기사)  이어서 일본 각의는 5월 31일에 ‘대한방침(對韓方針)’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두 가지를 결정했다. 여기에는 (1) 한국 내 일본군의 영향력 확대, (2) 재정권 장악 (3) 외교권 장악 (4) 경의선, 경부선 등 철도 장악 (5) 우편·전신·전화 등 통신 시설의 장악 (6) 농업, 임업, 광업, 어업 등에서 일본인의 한반도 진출 등 6개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두 가지는 ‘한국의 보호국화’를 위한 구체적 방책이었다. 3개월 뒤인 8월 22일에 일본은 <한일의정서> 제1조에 규정된 ‘시정개선’을 구실로 <한일 협정서(韓日協定書)>를 체결하였다. ‘고문(顧問) 정치’의 시작이었다.   이 조약은 “대한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삼아야 하며 재정 ·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또 대한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미리 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10월 15일 재정 고문에 일본의 대장성 주세국장출신인 메카다 다네타로를 임명하고, 12월 27일에는 외교 고문에 20여년 간 줄곧 일본에 고용되어 일해온 미국인 스티븐스를 임명했다.     이외에도 일본은 ‘시정개선’이란 명목하에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 경무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 학부 참여관 시데하라 타이라, 법부 고문 노자와 다케노스키, 군부 고문 노츠 쓰네다케 등 많은 일본인을 고문, 보좌관, 교관 등으로 한국 정부가 초빙하도록 강요했다. 이들은 행정 각 분야에 직접 종사하면서 실무 집행까지 관여했다는 점에서 1894년 갑오개혁 때 파견된 40여 명의 고문관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 기획.연재
    2022-02-22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강릉 허난설헌 옛집 허균 향나무
      누군들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을까?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지만, 이름에 영웅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으면 금상첨화이리라. 하지만 허균은 영웅이라기보다 풍운아이다. 아니다. 투사이자 전사가 아닐까? 싶다. 그렇더라도 허균은 이름을 남기려고 살았던 얄팍한 인물은 아니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불꽃처럼 살다간 진정한 혁명가였다. 허균의 호는 교산(蛟山)이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교(蛟)라 하나, 허균은 용이 되기 전의 이무기였다. 강릉 경포대에서 북쪽으로 차 한잔 마실 거리인 사천진해변의 꾸불꾸불한 앞산이 교산이다. 또 이곳의 교문암(蛟門岩)은 교산의 구룡과 사천의 내가 바다로 들어가는 백사장의 큰 바위였다. 연산군 7년에 내가 무너지자 늙은 교룡이 바위를 두 동강이로 깨뜨리며 승천할 때, 문과 같은 구멍이 뚫렸다는 바위이다. 여기 교산 자락 아래 사천진리 151-1의 애일당은 허균의 외가이자, 태어난 집이다. 외할아버지 김광균이 늙은 어머니를 위해 창을 열면 동해의 해돋이를 볼 수 있게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릉 김씨 아들을 얻기 전에는 그 집에서 외손을 잉태시키지 않으려 했으나, 허엽에게 출가한 첫째 딸이 허봉과 허균을 낳았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다. 24살의 허균은 왜적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함경도로 갔다가 이곳 교산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일이 문집 ‘성소부부고’의 ‘애일당기’에 있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폐허나 다름없이 황량해진 외할아버지의 옛 집터 애일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다시 일으켜 세운 후 거처로 삼았다. 마침내 오대산의 정기와 이무기의 정기가 합해 모인 바로 그 명당 지맥의 주인이 되었다.’ 허균은 이 무렵 바위를 깨트리고 승천한 교문암의 ‘교룡’이 되고자 했지 않았나 싶다. 당대의 명문가 집에서 태어나 명석한 두뇌와 시대를 보는 안목을 지녔으니, 바위 밑의 엎드린 이무기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으리라. ‘성소부부고’의 유재론과 호민론은 그의 정치사상이자, 치세의 방향이다. 허균은 유재론에서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한 시대를 위함이니,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호민론에서는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이다.’며 ‘윗사람의 부림을 당하는 사람은 항민(恒民)이고,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은 원민(怨民)이며, 시대적 변고에 자기 소원을 실현하려는 사람은 호민(豪民)이다. 이들 중 항민과 원민은 두렵지 않으나, 호민은 두려워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최초의 한글 소설인 그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은 그가 세우려는 이상 국가이며 그곳의 왕 홍길동은 바로 자신이었다. 허균은 어릴 적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운 다음, 둘째 형의 친구인 손곡 이달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달은 서자 출신으로 서얼금고법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이는 허균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을 터이고, 결국 서자 출신 심복 현응민의 광해군을 제거한다는 격문에 연루가 되어 역적이 되었다. 그리고 사형은 세 번 심리한다는 삼복계 절차도 없이 능지처참형으로 쉰 살의 삶을 마감했다. 강릉 허난설헌 생가는 허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이곳 문간채가 달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앞 정원에 교문암 아래 웅크렸던 교룡처럼 꾸불꾸불한 향나무가 있다. 허균이 말한 호민이 그 향나무를 촛불처럼 들면 용은 바위를 깨트리고 승천하리라. (김 목/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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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7
  • 주성식의 어른왈/달 달 무슨 달
      대보름이다. 휘영청 커다랗게 밝은 달을 떠올리다 보니 얼마 전에 달을 두고 요란을 떨었던 부류들이 생각난다.  당시 한 정치인이 추석을 맞아 현수막을 걸었는데 그 내용이 말썽이었다. “달님은 영창으로”라는 자장가 가사를 두고 ‘국가 원수 모독’까지 들먹이며 상대 진영이 흥분한 것이다.  정치인‘들’의 속내며 드잡이에 대해 어느 누가 낱낱이 알고 싶겠는가. 그러나 저런 문구가 의미를 갖게 되는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아야겠다.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가 거론되는 것도, 그에 대해 불에 덴 듯 반응하는 것도 분명 상식적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추석에 만월(滿月)이 뜨는 것은 당연하고, 밝은 달빛이 영창(映窓)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겨운 풍경이다. 따라서 달이 뭘 상징하고, 영창이 映窓인지 營倉인지 따위는 ‘나는 이런 뜻으로 썼다’고 명시하지 않는 한, 중의(重義)적 표현으로서 용인돼야 맞다. 설혹 현수막을 걸면서 누군가 영창(營倉)에 들어가기를 기대하거나 기원했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또 그런 행위가 모독(모욕?)이며 불법이 되는가? 한참 지난 일을 다시 거론하는 까닭이 있다. 최근 한 대선 후보가, 집권하게 되면 범법 행위에 대해 ‘법대로’ 조치하겠다고 밝히자, 이 사회 최고 권력자(달?)가 분노하면서 사과하라고 요구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 마디로, 도둑(혐의가 있는)놈을 잡겠다고 하니까 ‘나는 도둑놈이요’라고 미리 자백하면서 오히려 몽둥이 들고 대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겠다,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말에 ‘정치’라는 굴레를 씌워, 미친 개조차 부끄러울 만큼 마구 물어뜯던 그 패거리들의 작태도 떠오른다.  그 ‘마마’가 그동안 민망한 모욕에도 모르쇠로 일관했고 의사표현도 ‘잘’ 하지 않던 터라, 이 격한 반응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혹시 구중궁궐에서 ‘월광소나타’ 따위 낯 뜨거운 아유(阿諛)에 길들어 있던 터라 ‘헛기침’ 정도에도 놀란 것일까? 아니면 저능(低能)이 노망(老妄)으로 변했거나,노추(老醜)가 마침내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지경에 이른 것인가? 그러나 꼭 달달 떨면서 걱정할 일은 아니겠다. 달은 영창(映窓)에도 뜨고 영창(營倉)에도 스며든다. 정신승리의 뛰어난 모범과 재조산하(再造山下)의 엄청난 업적을 기리는 데, 오래도록 맞춤의 각광(脚光)도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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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5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백두대간 태백산 삼천 년 주목나무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썩어 천년이면 삼천 년이다. 생성에서 소멸까지의 세월이 인생사에 비해 오래임은 물론이려니와, 그 모습이 내내 의젓하고 아름답다. 향기도 있지만, 유난히 속살이 붉어 주목이라고 하는 나무가 그것이다.   또 열매까지도 선홍빛이고, 톱밥을 우려 붉은색 염료로 쓴 이 주목은 3억 년에서 2억 5천만 전의 고생대 마지막 시기인 페름기에 처음 나타난 침엽수이다. 200만 년 전 우리 한반도에 새 둥지를 틀었고, 십수 번의 빙하기에서 혹독한 추위를 꿋꿋하게 이겨냈다. 그러기에 훌쩍 천년을 넘긴 평양의 낙랑고분, 경주의 금관총, 지린성의 고구려 환문총 등 고분 속 관이 주목나무이다. 그 고분의 주인은 이미 오래전 티끌이 되었지만, 관은 온전히 남아 인간사의 욕망과 권력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것인가를 말 대신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죽음길에서까지 사랑받은 이 주목은 1000m가 넘는 높은 산에서 주로 자라기에 한반도 남쪽에서는 설악, 태백, 소백, 덕유, 지리, 한라산 등에서 볼 수 있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내려온 백두대간이 태백시에서 힘껏 솟구치니 태백산이고,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소백, 속리, 덕유산으로 이어지다 지리산에서 멈춘다. 이곳 태백산은 낙동강, 한강, 삼척 오십천의 발원지이다. 태백시 황지는 낙동강 발원지이고, 거느리는 대덕산에는 한강 발원지 검룡소가 있다. 그리고 태백시 삼수령에서 흘러간 물이 발원지 백병산의 물과 만나 삼척시를 가로지르는 오십천이 된다. 또 이곳 일대는 장성탄광을 비롯한 많은 탄광이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이 여기 태백산 산신령이다. 단종이 죽임을 당하던 날, 어떤 사람이 영월 관아에 갔는데, 단종이 백마를 타고 동쪽 계곡으로 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느냐?’ 하니, ‘태백산으로 간다.’고 했다 한다. 또 단종이 죽은 뒤, 영월 동강 ‘어라연’의 신선이 되려고 했다. 그러자 물고기들이 떼로 나타나 ‘태백산 신령’이 되어야 한다고 간청하였기 때문이다. 또 있다. 단종이 영월에 있을 때 훗날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이 태백산 머루를 자주 진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자신은 머루 등 산과일을 챙겨 영월로 가고 곤룡포에 백마를 탄 단종은 태백산으로 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알아보니, 그날 단종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그런 연유로 산 정상 즈음에 단종을 기리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가 비각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산 위에는 천제단이, 산 아래에는 단군성전이 있다. ‘신라는 태백산을 삼산오악 중의 하나인 북악이라 하고 제사를 받들었다’는 기록처럼 동악 토함, 서악 계룡, 남악 지리, 북악 태백, 중악 팔공산이 신라의 오악이다. 백두산이 태백산이다. 또 묘향산도 태백산이다. 그러니까 수천 년 천제를 올린 민족의 성산 태백산이 셋인 셈이다. 그중 천지가 있는 백두산과 우리 민족의 시원 터인 톈산(천산) 줄기의 보거다산 천지는 같은 이름이다. 파미르 고원의 톈산을 나와 아리랑 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온 동이족은 백두산 천지에 이르러 고조선과 청나라를 일으켰다. 하지만 압록강 아래로 내려온 고구려는 묘향산 태백에 머물렀고, 신라는 북악 태백산을 넘지 못했다. 200만 년 전 한반도에 들어와 대대손손 삶을 이어온 주목나무가 그 역사를 알겠지만, 자꾸만 세월 속에 작아진 듯싶어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태백산 자락에서 이 터를 지켜온 삼천 년 주목나무의 의연한 기개와 기상에, 어찌 움츠리고 있으랴? 눈을 들어 백두산 천지 넘어 톈산 천지까지 바라본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2-10
  • 안중근 “하루아침에 바뀐 일본 러시아보다 못됐다”
    이준과 안중근, 러일전쟁 개전초 땐 일본 지지   # 이준과 안중근, 일본을 지지하다.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 초에 일본군은 러시아 병사들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질서있게 행동했다.   특히 한국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주한영국공사 죠단에 의하면, 일본군은 여자를 겁탈하지도  않았고 물건값도 제대로 지불했다. 윤치호를 비롯한 일부 개화파는 일본과 러시아는 한국에게는 두 개의 악(two evils)이지만 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일본이 덜 나쁘다고 보았다. (구대열, 다모클레스의 칼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대응, 정성화 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p 55, 59) 3월 23일에 이준이 이현석, 정순만과 함께 경무청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 부상자를 돕기 위해 의연금을 모집하자는 권고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권고문에 따르면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서이므로 대한 인민들도 일본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중국인들도 환호성을 지르고 나섰다. 러시아가 중국의 영토를 잠식하고 있는데 일본이 대신 이를 몰아 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1904년 3월 15일 자 청나라 신문 ‘경종일보’를 읽어보자.“학생과 상인들은 등불을 들거나 배를 몰아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는 시위를 벌이고, 스스로 상류사회에 속한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모금해서 일본군 부상병을 위로하고 있다.” (정승교 지음,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4, 2011, p 195-197)이런 생각은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안중근은 이준처럼 일본의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안중근이 1910년 2월 중국 여순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 ‘서문’을  읽어보자.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중략) 그런데 유럽의 여러나라들은 가까이 수 백년 이래로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 중 러시아가 가장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구나 동아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과 사람이 다 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을 내려 동해 가운데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 대륙에서 한주먹에 때려 눕히게 하였으니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중략)한·청 두 나라 국민은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하는 등 일에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으니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 천황의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 운운했으니 이와 같은 대의가   청천백일의 빛보다 더 밝았기 때문에 한·청 인사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 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졌던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하나의 큰 인종 사랑하는 무리를 이루었으니 이도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로 한번에 크게 부수었으니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두 나라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없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政略)이나 일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 천만 번 의외로 승리하고 개선한 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의 장춘 이남인 한국을 조차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명성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슬프다.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중략) 그래서 동양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하는 자리를 여순구(旅順口)에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여러분의 눈으로 깊이 살펴보아 주기 바란다. (안중근 저, 안중근 의사 자서전, 범우사, 2000, p 119-123) 러일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는커녕 1905년 11월17일에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안중근은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고 1909년 10월 26일에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 : 나가모리 프로젝트      1904년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일본은 4월에는 전보사와 우체총사를 접수하고 군기 누설 예방 명목으로 전보 검열을 실시했다. 5월 초순에 일본은 고종을 압박하기 위해 궁궐 숙청을 단행했다. 내관들을 다수 파면하고 황제 알현은 대신과 협판에 한정시키는 등 고종을 근왕 세력들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고자 했다.또한 전라도·경상도·강원도 연해 어업권에 이어 전쟁 중인 일본군에 신선한 생선을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평안도· 황해도·충청도 3도 연해 어업권 등 각종 이권마저 요구했다.그런데 6월에 일본인 나가모리 도키치로(長森藤吉郞)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가 알려져 큰 파문이 일었다. 일본 대장성 관리였던 나가모리는  1903년 12월에 한국에 경제·금융 사정 등을 살피고 한국을 경영할 방법을 구상한 결과가 ‘황무지 개척권 요구’였다. 나가모리는 1904년 3월 16일 「대한제국 내 토지의 개간·정리 및 소주, 연초, 백삼, 식염, 석유 등의 제조 · 수입 전매특허에 관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교섭을 진행했다. 그런데 6월부터는 일본 외무성 지시하에 주한 일본 공사관 측이 공식적으로 나서서 대한제국 정부와 교섭을 시작했다. 6월 6일에 일본 공사 하야시는 외부(外部)에 50년 동안 전국 황무지의 개척권을 위임하라고 요구했다. ‘황무지(荒蕪地) 개척권 요구’는 개간되지 않은 전국의 많은 땅을 황무지라 하여 50년간 일본인에게 무상 대여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 그 땅들을 자기들이 비용을 들여 경제가치가 있는 땅으로 바꾸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겉으로는 일본이 한국을 돕기 위한 제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국 땅의 절반 이상을 공짜로 삼키겠다는 야욕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은 황무지 개간권 획득을 통해 막부 말기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일본 내 과잉 인구를 한반도에 이주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야욕에 백성들은 분노했다. 울분에 차 있던 백성들은 전 국토의 3할에 해당하는 황무지를 한 푼의 대가도 없이 강탈하려는 일본의 만행을 결코 묵과하지 않았다. 유생 및 전직·현직 대신들이 반대 상소를 연거푸 올렸고,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도 논설과 기사로 일제히 일본을 규탄하였다. 또한 전(前) 중추원 의관 송수만, 심상진 등은 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민중 회의를 열고 보안회(保安會)를 창설하였다. 회장에 신기선, 부회장에 이유인, 대판회장(代辦會長)에 송수만을 추대하였다. 보안회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약칭인데, 종로에다 소청(疏廳)을 두고 공개 성토대회를 열어 결사반대를 외치면서 전국에 통문을 보냈다.  이러자 대한제국 정부는 6월 29일 자로 그 계약을 인준할 수 없다고 일본 측에 통고했다. 당황한 일본은 보안회의 해산과 집회 금지를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이어서 일본 공사관은 일본 헌병이 서울의 경찰 임무를 맡겠다고 통고하였고, 7월 21일에는 송인섭·송수만·원세성 등 보안회 주요 간부들을 체포했다. 더구나 하야시 공사는 고종이 날마다 시위 경비로 2천 원씩을 보안회에 내려주어 은밀히 배일 집회를 교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황무지 개간 사업 등 일본 측 요구에 대해 고종은 용단을 내리라고 압박했다.언론에서는 연일 일본의 불법행위를 폭로, 규탄하였고, 보안회의 활동과 유생·대신들의 상소 운동도 더욱 격렬해졌다. 7월 23일에 고종은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거절하는 긴급고시를 전국에 반포하였다. 결국 8월 10일에 백성들과 대한제국 정부의 일치된 저항으로 일본은 계획을 중단하였다.
    • 기획.연재
    2022-02-08
  • “이순신특례시(가칭) 만들어 수도권과 경쟁”
     “순천·광양·고흥 통합, 인구 100만 도시로 미래 선도 가능  여수시 인구 감소·행정력 낭비 등 무능 심각 대안 있어”  지역민 “도의원 5선 경륜 친화력 좋고 약속은 지키더라”김종철 전 전남도의회 의장이 여수시장 선거 출마 의지를 밝혔다. 그는 “지난해 중반부터 지역 사회 발전을 이끌어 달라는 지역민의 요구가 빗발쳤다”며 “20여 년 지방자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발전에 헌신하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신명나는 새 여수!’를 만드는 여수의 새 일꾼이 되겠다는 것이다.‘이순신특례시’라는 획기적 방안을 내걸고 표밭갈이에 나서고 있는 김종철 전 전남도의회 의장을 만났다.<편집자주>-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여수시장 후보로 출마한다고 선언했다.2010년 이후 정치 현장을 떠나 있었다. 전남도의회 의원 20년 동안 배우고 익힌 것을 숙성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자기 성찰을 통해 더 넓게, 잘 볼 수 있게 됐다고 확신한다. 최근 지역민들의 지지와 성원도 잇따르고 있다. ‘나를 낳고 키워준 여수에 봉사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결정하게 됐다. 있는 힘을 다하겠다.-여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가?나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여수의 여러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고, 가장 큰 문제는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집행부의 무능이 결정적 원인이다. 심각한 인구 감소, 여천공단·선박 등의 공해, 관광산업의 한계 등에 대해 손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물론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목표를 정하고, 실행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결과를 점검해 보완하는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중점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순신특례시(가칭)는 가능한가?가능하다. 여수와 순천, 광양, 고흥을 통합하면 인구80만 명에 근접하고, 100만 명은 바로 이뤄진다. 여수 인구가 33만 명을 넘다가 최근 28만 명 이하로 감소했다. 4개 시군 통합의 선결 요건으로 여수 인구를 30만 명으로 복원시키겠다.- 어려움이 적지 않을 텐데?물론 여러 지자체가 관계되는 사안이고, 주민 동의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복지 등에서 규모의 이점이 크고, 장기적으로는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과도 연관될 것이다. 꼭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고 특히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확신한다.-시장 출마(예상)자가 끊이지 않는데, 본인의 장점은?먼저 손꼽을 만한 정치 경험을 들 수 있겠다. 나는 전남도의회 의원만 5회 20년 연임했고, 지역은 물론이고 중앙정계에 두텁고 넓은 인맥을 갖고 있다.출마(예상)자 가운데 (지방)행정 경험을 내세우기도 하는 모양인데, 지방자치도 어디까지나 ‘정치’다. 그것도 중앙까지 포함하는 치열한 전쟁이다. 예산 확보부터 사업 유치까지, 전부 정치 논리로 좌우된다. 이런 관점에서 나보다 나은 대안이 있겠는가?또 지역민들이 나에 대해 “의리있다, 한다고 하면 꼭 하더라, 약속은 지킨다”라고 평가하는 특징이 가장 큰 경쟁력이며 중요한 자산이라고 믿는다. 며칠 전 한 모임에 참석했다가 어느 분이 “저 사람(김종철)이 나서면 무슨 문제건 해결했어”라고 동행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어떤 찬사나 격려보다 기쁘고 고마웠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겠는가. 그저 내 이익이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지역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그러나 나 스스로는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한다.-지방선거 전에 대선이다. 관계가 있는가?관계가 있다 뿐인가, 크고 결정적이다. 최근 우리 당은 아무 조건 없이 탈당자들의 복당을 허용했다. 통 큰 탕평책이라고 본다. 당의 외연이 넓어지고 내포는 충실해졌지만, 당원 특히 지방선거 출마자 개인으로서는 경쟁이 치열해진다는 측면이 있다. 어떻든 정치 공학적 측면을 다 헤아릴 수는 없고, 그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따름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후보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당연하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자당 대선후보 지지를 호소할 때 뭘 내세우는가?이 시기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인물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후보에 대한 지역 지지세가 워낙 강하고 뚜렷해서 누구와 토론하는 일도 없었지만 늘 어떤 상황에 누구에게라도 내 신념을 말할 준비는 돼 있다.-대선 결과를 전망한다면?(뻔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우리 당 우리 후보가 승리한다!김 전 의장은 1991년 현대 지방자치의 출범과 함께 전라남도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후 다섯 차례 연임했다. 8대 전남도의회 전반기 의장(2006.07~2008.06)을 지냈다. 김 전 의장은 여수의 바다와 섬 지역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수산 문제 특히 도서 지역 개발과 발전(방안)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모교인 전남대에서 ‘자랑스런 전남인 상’을 받았고, 1995년 씨프린스(SEA PRINCE)호 기름유출사건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사건 수습을 이끌었으며 ‘2012 여수엑스포’ 유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2018년 제7대 전국동시지방선거 전남준비기획단장을 맡아 압승에 큰 역할을 했고 현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 정무특보단 전남본부장, 희망사다리포럼 여수 대표로 활약하고 있다.대담이 마무리될 무렵, 한 시민이 다가와 김 전 의장에게 말을 건넸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덕담이 이어졌다. 기자가 “이 양반 어때요?”라고 묻자“응, 좋제. 믿을 수 있응께. 시장실 맘대로 가도 개얀헐 사람이여”라고 대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문득 천자문(千字文)의 ‘금생여수 (金生麗水)’ 구절을 아느냐고 묻더니 “여수에서 금이 나온다는 말 아니겄소! 옛날부터 여수가 잘 살 수밖에 없는 모냥이네 잉?”이라며 오지게 웃던 김 전 의장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겠다. 여수는 금 캐는 밭이요, 보물 펄떡거리는 어장(漁場)이다. 그 보배를 꼼꼼히 찾아내고 잘 갈무리해서 시민들에게 전하겠다는 한 사내의 결의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담=주성식 선임기자
    • 기획.연재
    2022-02-07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강릉 오죽헌 율곡송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지만, 산천 의구란 말도 옛 시인의 허사라고 했다. 그럼에도 강릉 오죽헌에 가면 의구한 산천과 인걸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수수 백 년 한 자리에서 말없이 역사와 인걸을 간직한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율곡은 신사임당의 용꿈에서 태어났다. 오죽헌에 그 용나무들이 있다. 또 오죽헌의 나무들은 사계절을 품고 있다. 봄의 율곡매, 여름의 사임당 배롱, 가을의 율곡송, 겨울의 오죽이 바로 그 오죽헌의 사계절이다.먼저 봄의 율곡매다. 세종 22년인 1440년 무렵,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짓고 별당 후원에 심은 나무이다. 사임당은 매화 그림을 많이 그렸고, 첫 딸을 낳아 ‘매창’이라고 했다. 이 매화는 연분홍 홍매이며 알이 굵다. 남쪽의 절집 매인 화엄사 화엄매, 백양사 고불매, 선암사 선암매와 함께 북쪽의 집안 매인 율곡매는 조선 4대 매화이다. 허나 나이가 6백여 살이니, 나뭇가지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그게 또 자연의 순리이다. 어찌 세월을 탓하랴? 나그네는 그저 이른 봄, 꽃송이를 피워올린 매화나무 옆의 율곡과 사임당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던 걸음 멈추고 눈 맞춤을 할 뿐이다.배롱나무는 여름나무이다. 오죽헌의 울 밖 여름은 배롱꽃이 지천이다. 오죽헌 뜨락의 6백 살 배롱은 꽃을 피워올리는 가지 품이 넉넉하고 자태 역시 매끈하다. 땅에서 올라온 가지가 다섯인데 두 가지는 서로 끌어안고 있으니, 사이좋은 부부와 세 아들딸의 모습이다.사철 푸르지만, 소나무가 짙푸른 하늘의 흰구름 송이를 걸치면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다. 오죽헌 율곡송 위로 하늘이 푸르고 흰구름이 꽃송이로 피어나니, 이 또한 승천하는 용이다. 그래서 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는 오죽헌의 몽룡실을 마주 보는 율곡송은 소나무이며 율곡이고, 사임당 꿈속의 용이며 소나무이다. 그렇게 높고 깊은 푸른 하늘의 흰구름을 꽃송이로 걸친 율곡송은 오죽헌의 가을 나무이다.오죽헌 담장 가까이의 노송들 가지가 오죽헌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일부러 그리 다듬었거나, 죽은 가지를 자른 흔적도 없다. 또 한두 그루도 아니니, 이는 분명 글만 읽고 외운 선비가 아니고, 대장간을 차려 호미, 낫, 괭이를 벼린 율곡에 대한 경배이리라. 더하여 문성사와 몽룡실을 향해 허리를 숙인 율곡송에게 예의와 품격을 배우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오죽은 까마귀처럼 줄기가 검어서 얻은 이름이다. 우리 인간처럼 60여 년을 살고 꽃이 피면 생을 마친다는 이 오죽은 오죽헌의 상징이다. 사철 푸르나 한겨울 흰 눈을 이면 기품이 더 빛난다. 그러기에 댓잎을 스치면 바람도 노래가 되는 법이니, 오죽은 겨울나무이다.그렇게 율곡매, 사임당배롱, 율곡송과 오죽을 둘러보고 나오니, 담장 밖 붉은 단풍이 유난히도 핏빛이다. 다른 나무 아래는 늦가을 낙엽이 수북한데, 이 단풍은 붉은빛 그대로 청정하다.핏빛 단풍을 보다 문득 오죽헌 문성사 대문 옆의 박정희가 심은 주목나무가 생뚱맞구나 한다. 오가는 나그네에게 주목하라고 심은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율곡과 사임당의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닐진대…. 율곡은 ‘격몽요결’에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 이 네 가지는 몸을 닦는 요점이다’고 썼다. 예로부터 사당 건물은 입구자 형태로 짓기에 그 안에 나무가 있으면 괴로울 곤(困)자가 되기에 나무 심기에 신중을 기한다. 따라서 그게 누구건 남의 집 사당 안에 함부로 기념식수를 하는 건 한 마디로 예가 아니다.아! 지리산이나 태백의 산록에 치솟지 못하고 담장 곁에 주눅 들어 염치없이 계륵으로 서 있는 오죽헌의 주목이 참으로 가엾다.(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1-28
  • ‘형식적 대한제국 독립’ 한일의정서 선포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국의 진해만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결정했고, 5일에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했다. 메이지 천황은 육·해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천황이 육·해군에게 내린 칙어를 읽어보자. “짐은 동양평화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서 짐은 작년 이래 정부로 하여금 청나라와 한국 두 나라의 시국(時局) 문제를 러시아와 교섭하게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동양 평화를 돌아보는 성의가 없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개 청나라와 한국 두 나라의 영토 보전은 우리 일본의 독립과 지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에 짐은 정부에 명령하여 러시아와 교섭을 끊고 우리 독립과 자위를 위해 자유의 행동을 집행할 것을 명령했다.” (신명호 지음,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2014, p 474·475)2월 6일 아침에 나가사키 근처의 사세보 군항에서 연합함대의 제 1전함대와 제2 전함대가 중국 뤼순으로 출발했다. 제3 전함대와 제7 전함대는 2월 6일 아침에 대마도의 다케시키 항을 출발하여 저녁 무렵에 진해만을 점령했다. 이어서 육전대가 상륙하여 마산의 전신국을 점령했다. 이것이 일본의 대한제국 첫 침략이었다. (와다 하루키 저 · 이경희 역,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2011, p 59-60)2월 8일 밤,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해군은 뤼순항에  있는 러시아 극동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이날 우류 소토치키의 일본 함대 14척은 제물포에 정박한 두 척의 러시아 전함에 대해서도 기습공격했다. 오후 4시경 카레예츠호가 자폭하였고, 6시경 바라크호가 침몰하였다. 2월 9일에 러시아가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2월 10일에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일본은 개전 이유에서 “러시아가 만주를 병탄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결과 한국의 영토 보존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번 전쟁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하고, 극동아시아 교역을 위한 지속적인 ‘문호개방’ 유지”라고 되풀이했다.  2월 9일에 일본군 1000명이 서울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도망치고 구중궁궐도 텅 비었으며 조정 대신들도 숨기에 바빴다. 나라를 지켜야 할 지도층이 흔들렸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라가 전쟁터가 되었는데도 ‘국외중립 선언’ 이상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너무나 무능하고 안일했다. 12일에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서울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것인가. 4월 14일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함녕전,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과 각 전각이 모두 불탔다. 이러자 고종은 미국공사관과 인접한 수옥헌에 임시 거처를 정했다. 4월에 알렌은 본국에 “고종 황제의 미국에 대한 기대가 당혹스럽다면서 고종이 1882년 한미수호조약 제1조의 ‘거중조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러일전쟁 종군기자 잭 런던(Jack London)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날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시험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 국민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문짝이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 2월 23일에 일본공사 하야시와 외무대신 서리 이지용간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1903년 10월부터 하야시는 이를 추진했다. 하야시는 정부 고관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고종의 독단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과 군부대신 민영철, 이근택 등을 포섭했다. 이지용 등은 이용익 등 고종 측근 세력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로비 자금 1만 원(지금 시세로 13억 원 정도)이 필요하다고 일본 측에 요구하여 돈까지 받았다. 그런데 러일전쟁의 징후가 농후해지자 고종은 1904년 1월 21일에 중국 지푸에서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고 이를 각국 공관에 통고하였다. 그러나 각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나마 하야시가 주도한 교섭이 중단된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2월 12일에 파블로프 러시아 공사가 철수해버리자 하야시는 고종에게 조약 체결을 압박했다. 결국 고종은 2월 13일에 이지용을 일본 공사관에 보내 교섭을 재개하게 했다. 그러나 친러파 이용익은 일본과 조약을 체결했다가 나중에 러시아가 승리하면 곧바로 대한제국 병탄의 이유가 된다며 강력 반대했다. 한편 러시아군이 안주와 평양 부근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고종도 러시아가 승리할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현상건·이학균 등 측근들을 불러들이는 등 조약 체결을 연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이용익은 2월 22일에도 외부대신서리 이지용을 찾아가 만일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면 대역죄인으로 처분받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지용은 후환이 두려워 조인을 거부하고도 싶었지만, 그럴경우 하야시로부터 받은 로비 자금이 문제가 될 판이었다. 2월 22일에 일본은 이용익을 전격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였고, 육군참장 이학균 그리고 육군참령 현상건 등을 연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지용은 2월 23일에 아침 서울 밖으로 도주하려 하였다. 하야시는 이를 저지하고 전문 6조의 ‘한일의정서’ 조인에 성공했다. (서영희 지음, 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2012, p 29-36) 그러면 1904년 2월 23일의 「고종실록」을 읽어보자.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1900년 북청사변(北靑事變)후 러시아는 만주(滿洲) 일대에 군사를 체류시킨 채 기한이 되도록 철수하지 않았다. 비록 일본·영국 양국이 동맹으로 그에 대응하고 미국도 항의하였으나 러시아는 응하지 않다가 1903년 4월에 이르러 군사를 출동시켜 멋대로 우리나라 용암포를 차지하였다. 일본은 반도(半島)의 존망이 그 안위(安危)와 관계된다고 여겨 몇 달을 절충하였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도리어 군사 장비를 증수(增修)하자, 올해 2월 6일에 이르러서는 두 나라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9일 일본 함대가 러시아함을 공격하여 인천에서 2척을 격파하자 러시아함은 퇴각하다가 인천항에서 자폭 침몰하였다.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2일 러시아 공사(公使) 파블로프가 서울을 떠나 귀국하였다. 이에 이르러 국면은 일변하였고 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의정서(議定書)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외부대신 임시서리 육군참장 이지용과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노스께는 각각 상당한 위임을 받고 다음의 조목을 협정한다.제1조한일 양국 사이의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고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고히 믿고 시정(施政)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제2조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확실한 친선과 우의로 안전하고 편하게 한다.제3조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제4조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정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위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제5조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뒷날 본 협정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제6조본 협약에 관련되는 미비한 세부 조항은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부 대신 간에 정황에 따라 협정한다.이를 분석하면 제1조의 ‘시정개선 충고’에 따라 일본의 내정 간섭 근거가 마련되었고, 제4조에 따라 일본 군대 주둔의 길이 열렀으며, 제5조에 따라 러시아 등 다른 열강과 대한제국 간의 독자적 교섭의 길이 막혔다. 그런데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이지용은 고종의 조카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 이최응의 손자인데, 그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시 내부대신으로 을사오적이 되었고,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백작 작위를 받은 친일 매국노였다.  한편 한일의정서 선포후 영국의 「런던타임즈」는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이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영구히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지금부터 일본에 있어서 한국은 마치 우리 영국에 있어서의 이집트와 같다.한국의 독립은 형식적인 독립이다. 일본이 말하는 충고권이란 사실 얇은 종이 한 장을 덧씌운 명령권이다” 
    • 기획.연재
    2022-01-18
  • “사회적 약자·범죄 피해자 보호 최선”
    정성록 총경이 제77대 여수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18일 여수경찰서에 따르면 정 서장은 충혼탑 참배를 마친 후 취임식과 각 사무실을 돌며 인사하는 것으로 여수경찰서에서의 첫 업무를 시작했다.정 서장은 취임식에서 “당당하고 공정한 법 집행을 통해 사회적 약자와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고 시민이 안전한 여수, 아날로그 세대와 MZ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직장 분위기를 위해 서장부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이어 “전남청의 주요 7대 추진과제를 목표로 서로 신뢰하며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정 서장은 취임식 후 경찰서 사무실을 방문해 소속 직원들과 첫 인사를 나누며 여수시민의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또 현장에서 여수시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여수=김원중 기자
    • 피플
    2022-01-18
  • 삶.쉼터.나무이야기
    여상현 시인은 1914년 2월 9일에 태어났으나, 언제 생을 마감했는지 모르는 낯선 이름이다. 6·25의 참화가 그 이름을 삼켜버린 경계의 시인이며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시인이다.여상현(呂尙鉉 필명呂星野)은 화순군 동면 천덕리 451번지 새암골에서 부친 여규병과 모친 조함령의 5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동복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9년 졸업하였다. 상경하여 경성중등학교 본과를 다니고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8월에 장성의 김아지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다. 이어 연희전문대를 나왔다.그가 태어난 새암골인 천동(泉洞)은 음기가 세고 앞산의 양기가 세다 하여 마을 한가운데에 진려석이 있다. 이 진려석은 3개가 더 있고, 그 주위에 당산나무도 10여 그루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이 천동마을 가까이에 화순탄광이 있다. 한때 2만여 명에 이르던 이곳 탄광 노동자의 삶과 평화로운 마을 풍경은 그의 시심의 원천이기도 하다.여상현은 1936년 오장환, 함형숙, 김광균 등 12명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시를 썼으며 그 동인지 1집에 ‘장’, ‘호텔 앞 광장’, 2집에 ‘법원과 까마귀’, ‘호흡’ 등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좌절에서 헤어나려는 몸부림을, 해방 이후에는 계급의식 속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애환과 외세에 대한 저항 등을 노래했다.1946년 서울신문사 기자이던 여 시인은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47년에 유일한 시집인 ‘칠면조’를 간행할 때 김기창 화백이 표지를 직접 그려 주었다. 표제시 ‘칠면조’는 해방공간의 상황을 야유와 풍자로 묘사한 시이며, 민요조의 ‘농부가’인 ‘노고지리 앞서가자 해가 지는 이 벌판….’의 작사자이기도 하다.이 농부가는 1950년대 초까지 초등과 중등학교에서 가르쳤는데, 중등 음악 교과서의 여상현 작사가, 1950년대 후반에 이상현으로 바뀌었다. 이는 여 시인의 육이오 당시 월북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그렇게 여상현 시인은 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1964년 12월 5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실종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세계도 평가받지 못했다.그러다 2017년 4월 27일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제4조에 의거하여 납북자로 결정되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늦었지만, 그의 고향 마을 생가터에 조촐하나마 시 ‘봄날’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졌다.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고 아름답게 표현했던 그의 시도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여상현 시인이 어릴 적 숨바꼭질하며 뛰어놀았을 그의 옛집 터 뒷동산에 한 그루 소나무가 있다. 마을의 고샅길, 성황당, 연못, 논두렁, 밭고랑까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보고 싶었을 그리운 고향 마을의 시 ‘봄날’을 여상현 시인의 고향 집 뒷동산 소나무에 기대어 떠올린다.‘논두렁가로 바스락 바스락 땅강아지 기어나고/ 아침 망웃(거름) 뭉게뭉게 김이 서리다// 꼬추잠자리 저자를 선 황토물 연못가엔/ 약에 쓴다고 비단개구리 잡는 꼬마둥이 녀석들이 움성거렸다// 바구니 낀 계집애들은 푸른 보리밭 고랑으로 기어들고/ 까투리는 쟁끼 꼬리를 물고 산기슭을 내리는구나/ 꿀벌 떼 노오란 장다리밭에서 잉잉거리고/ 동구밖 지름길론 갈모를 달아맨 괴나리봇짐이 하나 떠나간다/ 성황당 돌무데기 우거진 찔레엔/ 사철 하얀 종이쪽이 나풀거리더니 꽃이 피었네// 느티나무 아래 빨간 자전거 하나/ 자는 듯 고요한 마을에 무슨 소식이 왔다’      
    • 기획.연재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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