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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임상통합의학회 고문 박중욱 박사 “의사는 끝없이 공부해야 한다”
     불치·난치병 진단·치료법 찾아 최신 의학·과학정보 섭렵 “먹는 것이 우리를 만든다!” 식이요법·적절한 영양 강조  코로나19 등 감염병 집단방역 한계·개인면역력 키워야  개인유전자검사(DTC), 전문가 검사·판단·처치 절대 필요   대담=주성식 선임기자 지난 3월 27일 세종대학교 대양AI CENTER에서 「대한임상통합의학회 2022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정점을 치닫고 있었지만 의학회는 비상 상황일수록 ‘인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이루고 행사를 진행했다. 현재 의학회 고문인 박중욱 원장(신경외과 전문의, 청담의원)이 〈임상통합의학 관점에서 본 면역유전체학〉을 강의했다.  박중욱 고문은 2004년 대한임상통합의학회 설립을 주도하고 2014년 이사장을 맡아 학회의 안정과 성장을 이뤘다. 2018년부터는 고문으로서 학회에 방향을 제시하는 등 통합기능의학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담통합의원(서울 강남구 청담동 소재)에서 불치·난치병 환자들에게 활로(活路)를 열어주기 위해 진력하고 있는 박중욱 고문을 만났다. <편집자주> -이번 ‘대한임상통합의학회 2022년 학술대회’의 내용은? ‘면역과 비만 및 통증 관리’가 대주제였다. 면역과 관련된 장 기능, 암 식이요법과 면역요법, 비만 관련 약물 처방 등에 관해 최신 정보를 소개하고 공부했다. 최근 코로나19 유행 국면에 확인됐지만, 감염력이 강한 질병을 단체 방역으로 대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개인 방역 체제가 작동해야 한다. 동일 질병에 개인의 증상이 다른 것은 결국 면역력 즉 면역 체계의 효용성 차이 때문이다. 우리 학회는 미래 사회의 건강을 위해 면역 분야의 연구와 발전이 필수라고 본다. 암이나 비만 관리뿐 아니라 코로나19 등 유행병도 의학계가 주도적으로 해법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좀더 능동적인 분위기로 현장감있게 몰입하고자 이번 학회도 현장 강의로 진행하였고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한 덕에 지난 해 6월에 이어 아무 문제없이 치러냈다. -통합의학회의 설립 목적과 그동안의 활동 내용은? 대한통합의학회는 2004년 설립됐다. 급성기 질환 위주여서 포괄적·장기적 질병에 취약한 의료 현실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연구·학술 활동은 철저히 현대의학 즉 과학이 기반이다.  촌각을 다투며 발전하는 진단·검사법, 암을 비롯한 여러 불치·난치질환에 대한 최신 치료법을 연구한다.  특히 연수교육과 포럼 등을 통해 관련 전문가 육성과 저변 확보에 힘쓰고 있다. -최근 DTC 관련 논란이 적지 않은데? DTC(Direct To Consumer, 소비자 직접 의뢰방식 유전자 검사)는 의료기관이 아닌 유전자검사회사가 검체 수집·검사·결과 분석을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유전자 검사다.   2016년 법령이 정비돼 2017년부터 질량지수·중성지방 농도·콜레스테롤·카페인 대사 등을 시작으로 현재는 일부 암 유전자 검사까지 확대됐지만 그 효용성은 회의적이다.  유방암 가족력과 유전자 검사 결과를 근거로, 선제적 유방 절제술을 받은 안젤리나 졸리의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유명 인사인 만큼 전문가들이 특히 신중하게 판단했겠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불안감과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유전자가 우리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DNA Is Not Destiny.)”  해당 질병 유전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질병에 걸리고, 또 없으면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전자 검사와 함께,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후생 유전학적 적용을 고민해야 한다. 생화학 기전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개개인의 유전체에 통합적으로 적용하고 가늠할 수 있어야, 유전자 검사 결과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하고 의미 있는 조치를 할 수 있다.  미국만 해도 유전자(정보) 해독 회사와 미가공 유전자 자료(raw data)를 분석·처방하는 기업이 100여개 이상 경합하고 있다. 대다수 DTC가 (특정 유전자) 유무(有無)의 기초 자료를 대충 분석하고, 적절한 해법은 제공하지 못한다. 대중에게 막연한 호기심이나 두려움을 조성하는 상업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코로나19 대응은 적절한가? 앞으로 추이를 전망한다면? 유행 초기에 국경을 차단하지 않은 것, 근거 없는 거리두기 방식과 단계 조절 등이 아쉽다. 의료인(간호사·의사)들을 분열시킨 것 등 의료진들의 사기를 저하시킨 것도 문제였다.   최근 온갖 방역 조치가 무색하게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전 국민의 26~40% 감염까지 예측되는 상황이다. 이렇게 집단면역이 실현될지는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방역 실패 혹은 포기의 결과다.  이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위중증 환자와 사망자의 급격한 증가, 이에 따른 의료 시스템의 붕괴다. 일반 중환자군에 대한 진료 역량 부족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 바이러스 변이가 대개 증상은 약하고 감염력은 강해지는 추세이므로, 앞으로는 개인 방역을 강화하고 중환자 위주로 관리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또한 심근염, 머리가 명료하지(brain fog) 못하게 되는 코로나 후유증(Long Covid)의 치료·관리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통합기능의학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의 근원에 대한 통합의학의 관점은? 인류의 이성이 계발됨에 따라 과학 특히 현대 의학은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영유아 사망·전염병·전쟁 등 급격한 상황으로 인한 사망이 극적으로 줄고, 평균 수명은 현저히 증가했다. 현재 의학의 역할은 증가된 생존기간 동안 더 건강하고 안온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결국 만성 난치 질환의 해법을 찾는 것인데, 그 길은 애매모호한 체질론이나 여러 의학 체제를 아무 근거도 없이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현대 과학에 있다. 통합기능의학은 검증 가능한 과학을 대전제로 하되, 질병을 근원부터 파악해 우리 몸의 균형·항상성·개별성을 지키려고 한다.  그동안 주류 의학이 놓치고 있던 부분을 통찰하는 것이며, 이것이 미래 의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 향후 목표, 계획은? 많은 의사들이 보다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통합기능의학을 적용한 임상 프로토콜을 개발하려고 한다. 통합의학이 소수만의 혜택이 아니라 필요한 누구나 접할 수 있도록, 보험 혜택과 정책적 지원이 확대되게 하는 것도 있다. 특히 관련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해 정규 의학 교육에 통합의학을 포함시키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힘이 되는 한 찾아온 환자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의사로 열심히 살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 본다면? 호랑이를 그리려고 노력해야 고양이라도 그릴 수 있다. 감나무 아래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운(運)이 없다.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운이 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과정을 살펴보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게 여러 부문에서 활동했다. 그만큼 바쁘고 의욕적으로 살았고, 아무 후회도 없다. 그 모든 과정이 나를 성장시켰고, 조그만 성취지만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건강 관련 조언을 한다면? “You are what you eat. 먹는 것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 몸과 마음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진리가 내 몸에 맞는 건강한 식이(食餌) 즉 잘 먹는 것이다. 유익한 음식(채소·과일·동물성 단백질 등)과 줄여야 하는 음식(패스트 푸드·과다 탄수화물·중성지방 등)도, 개인의 생리학적 특성 등에 따라 적절한 식품군과 섭취량에 차이가 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소화 능력이 감퇴하므로 필요 영양소를 음식으로만 섭취하기는 어렵다. 고품질 기능성 영양제 복용이 필요한 까닭이며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개인의 적정 식단을 결정하고, 시중의 여러 기능성 식품들 가운데 신뢰할 만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의 식이 전반에 관해 기능의학 전문가에게  상담할 것을 추천한다. 적당한 운동 등 상식적인 것도 잘 지켜야 한다. -통합의학 등과 관련해 더 알리고 싶은 것은? 오랜 기간 여러 병원을 다니고도 해결하지 못한 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와 그 가족이라면 꼭 통합기능의학의 가능성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예를 들어, 과민성 장(腸)증후군·두통 등으로 내과 치료를 받다가 정신과로 간 경우, 수술·화학·방사선 등 암 치료 전후에 상담이 필요한 경우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예방 진료를 원할 경우 통합기능의학 전문가가 도움을 줄 수 있다. 과학적 근거에 의해 합성 약물 복용을 줄이고, 생활습관교정· 식이·운동 요법 등 위험이 적고 효과적인 처방을 제시할 것이다. 동료 의사들에게는 의료의 큰 줄기에 기민하게 반응할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외상·전염병·급성 질환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 통합의학의 가능성을 확인해봐야 한다.  류마치스내과·피부과·신경과·신경외과·재활의학과·마취통증과·가정의학과 특히 자폐·ADHD·우울증·불안·공황장애를 치료하는 정신과 그리고 노인의학 전문 의사들께 강력하게 권유한다.  의사는 어떤 분야보다 오래, 치열하게 공부한다. 그렇지만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관성적이지 않은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계속 학습해야 한다. 편협한 시각, 경직된 자세로는 환자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의사들 모두 정체되지 않고 변화에 잘 대처하는 의료인으로 거듭나기를 응원한다.   박중욱 고문의 건강법은 단순하다. 통합기능의학에 따라 식단과 식사량을 철저하게 조절하고, 정기적으로 받는 기능의학적 검사 결과에 따라 기능성 영양제를 복용한다. 너무 격렬한 운동은 피한다. 꾸준히 (골프) 연습하면서 가끔 필드에 나가는 것으로 운동량을 채운다.  그는 지금도 매일 기능의학의 최신 지견과 세계적 흐름을 확인한다. 환자 치료를 위한 공부일 뿐 아니라 최고의 취미가 됐다.  박중욱 고문은 청담병원에서 환자와 그 가족들을 만나, 오랜 질병의 고통을 위로하고 해결책을 찾는 데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술(仁術)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 바로 인술(人術)일 테니 말이다.
    • 기획.연재
    2022-04-11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초록비 녹우당의 초록빛 은행나무
    초록비가 내리고 초록으로 물든 녹우당(綠雨堂)에서는 스쳐 가는 바람도 초록색이다. 또 이곳 해남 윤씨 고택의 유적·유물을 통해 한 시대의 일이 쌓여 역사가 됨을 알게 된다.여기 연동마을의 녹우당은 1501년 윤선도의 4대 조부 윤효정(1476∼1543)이 도강 김씨와 탐진 최씨들이 살던 곳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그런데 집을 짓고 살면서 2차례의 화재가 있었다. 어느 날 윤효정의 꿈에 하얀 옷의 노인이 ‘지금의 자리는 산강수약(山强水弱)하니 자리를 옮기고 현재의 터는 못을 만들어 흰 연꽃을 심으라’고 했다. 이에 집을 옮기고 연못을 만들자 화재가 없었으며, 백련동(白蓮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이 백련지는 그렇게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이치로 만들어졌는데, 네모난 형태의 연못은 땅이요, 연못 속의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고대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연지에 물이 가득 차 그 물속에 덕음산의 산 그림자가 비추이면 집안과 마을이 번성한다’는 유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지의 섬을 ‘몰(말)무덤’이라 하는 것은 고기(漁)를 잡고 나무(樵)하며 조용히(隱)살고자 하는 어초은 윤효정의 뜻이 반영된 말이다. 윤두서가 백마를 다 그리고 난 뒤 그 백마가 죽어서 묻었다는 전설은 맘이 몰이 되고 몰이 말로 변한 탓이다. 윤두서가 이곳에 있을 때는 눈이 좋지 않아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렇게 해남 윤씨가는 윤효정 이후 5대에 이어지며 과거 급제자가 나와 명문으로, 해안 간척지를 개척하여 재력가가 되었다. 그러다 남인을 이끌던 윤선도가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귀향하였고, 소박한 시골집 녹우당은 큰 변화를 갖게 되었다. 윤선도는 수원집의 사랑채를 옮겨오고, 백련지를 큰 규모로 개수했다. 수원의 사랑채는 효종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이다. 이를 1668년에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왔던 것이다.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 이후에 녹우당은 더욱 풍성해졌다. 이전의 종갓집에 보태어 1821년 가묘와 3개의 사당이 중건되었다. 이어 행랑채를 신축하고, 1938년에 녹우당 뒤 재각인 추원당을 신축하였다. 현재의 녹우당은 그렇게 400년간의 증축과 개수의 과정을 겪은 결과물인 것이다. 그리고 녹우당이란 현판 글씨는 윤두서의 친구인 ‘이서’의 글씨다. 또한, 이때부터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의 외증손이자 실학자인 정약용, 남화의 대가인 허유 등이 머물고 교류하여 녹우당은 문화예술의 부흥처가 되었다.여기 녹우당 뒷산 9만여 평에 이르는 ‘해남연동리비자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241호이다. 조림숲이니 1대 나무는 5백 5십여 살이다. 이 비자숲을 보호하기 위해 윤씨의 선조는 ‘뒷산의 바위가 노출되면 이 마을이 가난하여진다.’는 유훈을 남겼다. 그리고 후손들은 이를 잘 지켜 오늘의 자랑이 되었다. 이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지에서 자라며 작은 잎끝이 두껍고 뾰족하다. 봄에 핀 꽃이 가을에 길고 둥근 열매가 된다. 나무의 수형이 아름답고 열매는 구충제, 변비 치료제, 기름을 짜기도 한다.또 녹우당에는 3백 살을 넘긴 해송 한 그루와 나이가 비슷한 회화나무가 있다.그리고 초록비 녹우의 상징인 은행나무는 윤효정이 그의 아들의 과거급제를 기념하여 심었다 한다. 처음에는 아들 4형제처럼 4그루였는데 지금은 2그루만 남았다.해남 윤씨가의 역사를 지켜본 이 은행나무는 자태가 웅장하며 가을에 황금빛으로 물이 들면 푸른 비자나무 숲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된다.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4-10
  • 날마다 외세의 치욕을 당하면서도 막지 못하다
    대신,관찰사 등 자주 교체폐하의 마음에 신의 부족 1904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議官) 안종덕이 ‘조정이 청렴, 근면, 공정하지도 않고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안종덕의 상소는 이어진다. “가만히 보건대, 폐하께서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말을 가지고 하지 마음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폐하의 일에는 무슨 일이나. 신의가 별로 없습니다. 조서나 칙서를 내릴 때마다 신의를 다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하나도 제대로 실천되는 일이 없습니다. 대궐을 깨끗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잡된 무리들이 더 들어오고, 잡세(雜稅)를 폐지한다고 말하지만 부패한 관리들이 소환되었다가는 곧바로 석방됩니다.  부패를 척결한다고 말하지만 관청이 부패관리를 보고하면 덮어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보살핀다고 하지만 대책을 올리면 아예 덮어둡니다.  대신이나 협판(차관)을 장기짝 옮겨 놓듯 교체하고, 관찰사나 군수는 여관 집 드나들 듯 교체됩니다.  직제(職制)는 어제 변경시켰는데 오늘 또 고치고, 법률은 중한 쪽으로 쏠렸다가 경한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래 가지고야 조정의 명령이 어떻게 신의를 보이겠습니까?더구나 관직 제도는 너무나 복잡합니다. 탁지부가 있는 이상 내장원은 왜 두며, 군부(軍部)가 있는데 원수부(元帥府)는 왜 만들었는지요?  외부(外部)가 있는데 예식원(禮式院)은 또 무엇 때문에 설치하며, 경무청이 있는데 경위원(警衛院)은 왜 또 둡니까? 법부가 있는데 군법원(軍法院)에 권한을 나눠준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한 번은 나누었다가 한 번은 합하고, 한 번은 없앴다가 한 번은 두는 일은 모두 법을 문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법이 문란하면 백성들이 믿지 않게 되고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명령이 시행되지 않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폐하의 마음에 신의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안종덕은 내장원, 원수부, 예식부 등 황제 직속 부서가 왜 필요한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상소는 이어진다.    “폐하는 정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신하들이 어진가 어질지 못한지를 환히 꿰뚫었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벼슬길에 나오기는 어렵고 악한 사람이 승진하기는 쉬웠습니다. ‘착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등용하지 못했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내쫓지 못한 것’은 바로 춘추시대 곽(郭) 나라가 망한 까닭이니, 이것은 남이 권해서 될 일이 아니라 폐하 자신이 힘써 야 할 일입니다”여기서 “곽나라가 망한 까닭”이란  ‘관자(管子)’에 나오는 일화이다. 춘추시대의 패자 제환공(齊桓公)이 멸망한 곽 나라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 노인에게 “곽 나라는 어찌하여 망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노인은 “군주가 선량한 사람을 좋아하고 사악한 사람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노인의 말을 의아하게 생각한 제환공이 다시 물었다.“당신의 말이 맞는다면, 그는 현명한 군주인데 어찌하여 망했단 말인가?” 노인이 대답했다. “곽나라 군주는 선량한 사람을 좋아했지만 그들을 등용하지 못했고, 사악한 사람을 싫어했지만 그들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이처럼 안종덕은 고종에게 곽나라 군주처럼 되지 말라고 간언하였다. 선량한 자를 좋아하면서 그들을 등용하지 못했고, 악한 자를 싫어하면서 그들을 내치지 못해 망국을 초래했다는 교훈은 지금도 되새길 만하다.  상소는 계속된다. “외교의 경우에는 더구나 신의가 중요합니다. 항간의 보통 사람들도 신의가 없이는 교제를 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나라와 나라간에 교제를 하는 경우야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세계가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대한제국은 피폐하여 무력과 재력을 가지고서는 물론 겨루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직 지켜야 할 것은 신의뿐인데, 신의란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돌아보건대, 우리는 삼천리 강토와 500년 왕업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 독립 자주권을 잃고 있으며, 세력을 믿고 달래며 위협하는 자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습니다. 날마다 치욕을 당하지만 감히 막지 못하고 강요가 끊임없건만 감히 거절하지 못합니다. 이러다가는 장차 국내 정사와 대외 실무가 모두 남에게 넘어가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이 근원을 따져 보면 신의가 서지 못한 데 있습니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권세 높은 사람이 재능에 관계없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면 백성들이 본업을 저버리고 외세를 구한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을 놓고 보면 이 말이 이미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폐하께서 깊이 살펴야 할 일입니다.한편 지금 나라가 가난하기 그지 없지만 탁지부의 연간 수입이 그래도 6, 7천만 민(緡)은 됩니다. 우선 내장원을 없애어 탁지부에 소속시키는 동시에 각궁(各宮)과 내수사(內需司), 훈부(勳府) 등의 저축까지 합하면 거의 수억만 민은 될 것입니다. 안에서 재물을 저축하면서 무익한 소비를 없애야 합니다. 재물이 풍부해야 군사를 강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형편이 이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은 누구의 잘못 때문이겠습니까? ”안종덕은 고종이 정치를 제대로 하여 부국강병하길 간언한다.  이제 상소는 마무리 단계이다.   “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한제국에 인재가 없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이 걱정이 아니고, 폐하의 마음에 신의가 부족한 것이 더 걱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신의를 세우기만 하면 청렴과 근면, 공정 세 가지는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시행될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못하고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다’라고 하였으며, 또 ‘쉽게 수락하는 말에는 틀림없이 신의가 적고 자꾸 고쳐 말하면 일이 잘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폐하는 늘 말을 곱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말에 신의가 없고, 또 늘 쉽게 수락하였다가 번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의가 적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반드시 먼저 마음속으로 이 일이 청렴한 것인가 탐욕스러운 것인가, 근면한 것인가 게으른 것인가, 공정한 것인가 사사로운 것인가를 요량해 보고 청렴한 것이면 나아가고 탐욕스러운 것이면 물리치며, 근면한 것이면 힘쓰고 게으른 것이면 경계하며, 공정한 것이면 시행하고 사사로운 것이면 그만두면서 한결같이 신의를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아!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믿어 준 다음에야 간하는 법이다. 그 임금이 믿지 않으면 자기를 헐뜯는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하찮은 사람으로서 폐하에게 믿음을 받을 만한 것이 없지만 그저 바른 말을 해야 하는 직책에 있다는 이유로 감히 남이 하지 못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신의 허리가 작두에 잘려도 부족하고 신의 목이 도끼에 찍혀도 모자라리라는 것을 제 자신이 잘 알면서도 감히 이처럼 망령된 말을 하면서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정신병자라서 이러는 것이겠습니까?지금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폐하가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써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근본으로 삼으리라 마음먹고 여러 신하들이 간하지 못한 데 대해 간언하였으니, 지금이야말로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전환시켜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숨김없이 말한 것은 정사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될 것을 기대한 것이지, 자신에게 미칠 화나 복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의 마음을 살피시고 만일 티끌만큼이라도 비방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면 당장 저를 처단함으로써 공경치 못한 신하들을 경계시키소서. 그러나 만일 충성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것이라면 부디 살펴보고 채택하여 시행하소서. 신의 몸이 주륙을 당하더라도 드린 말씀이 시행된다면 신은 죽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겠지만, 혹시 덮어둔 채 살피지 않고 마치 예전에 신하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을 때처럼 죄도 주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남을 것이고, 또 그것은 폐하가 아랫사람을 신의로 대하는 도리도 아닐 것입니다.오로지 명철한 폐하의 재결(裁決)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이 지내는 중추원 의관 벼슬을 속히 체직하심으로써 죽어서 고향에 묻히려는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이에 고종은 간단히 비답하였다.“말은 물론 옳다. 그렇지만 시의(時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종이 언급한 시의(時宜)는 무슨 의미인가? 안종덕의 상소가 시의적절(時宜適切)하지 않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러일전쟁을 예의주시하라는 의미인가? 아무튼 고종은 안종덕의 상소가 그리 탐탁하지 않았다. 
    • 기획.연재
    2022-04-05
  • 김선호 광주교육감 예비후보 “교육계, 정치권 영향력 사라져야”
     중등 교육 전문가·교육의원·사학재단 이사장 등 경력 다채실력 광주 회복과 함께 사람다운 사람 길러내는 데 집중   전교조 출신 후보와 단일화 추진  “100% 시민 뜻에 따라” 대담=주성식 선임기자대선이 끝나자마자 지역 정치권은 6월 1일 실시되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열기가 뜨겁다. 단체장부터 의원까지 입지자들이 넘치고 유권자들의 혼란과 염증도 심해지는 모양새다. 그에 비하면 함께 시행되는 교육감 선거는 ‘평온(?)’해 보인다. 아마 정당 공천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 교육감이 3선 연임 제한에 따라 출마하지 못하는 광주광역시의 경우, 여러 후보들이 각축을 벌이며 내연(內燃)하는 불길은 어느 선거 못지않게 치열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호남일보는 대학 총장부터 국회의원, 전교조 지부장까지 출신과 배경이 다양한 광주광역시 교육감선거 (예비) 후보들을 만나 그들의 포부와 광주교육 발전계획을 들었다. 첫 순서로 중학교 교장, 교육의원, 사학재단 관선 이사장을 지내고 현재 유권자 단체 회장 등 시민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김선호 예비후보를 만났다.<편집자 주>-교육감 선거 출마 계기는?현 교육감의 공과(功過)를 뚜렷하게 가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광주 학생들의 학력과 광주교육청의 청렴도가 최하위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사기가 저하된 교직원들은 자발성과 자율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학생들까지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다. 나는 그동안 교육 관계자로서, 광주교육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안을 모색해왔다. 새로운 지도력을 발휘해 즐거움과 행복을 나누는 학교를 만들 수 있다고 믿어 출마를 결심했다. 광주교육, 새롭게 도약할 수 있다. 김선호가 해내겠다.-현 광주 교육의 문제점은 어떤 것인가?심각한 학력 저하, 전국 최하위권 청렴도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편향된 인사에 대한 지적도 있다.-해법이 있는가? 추진 계획은 무엇인가?가장 먼저 교직원의 사기를 진작시킬 것이다. 교사는 제왕적 권력이 아니라 민주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다. ‘인성교육을 바탕으로 한 실력 배양’은 학교(교육)의 기본이고 생명이다. 교직원들이 자발성과 자율성을 발휘하고, 학생 모두에게 평화통일의 희망을 갖고,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교육을 시행할 것이다.-본인의 경쟁력은 무엇인가?가장 먼저 교육 관련 다양한 영역의 많은 경험을 들 수 있다. 나는 공·사립 중고등학교, 인문계와 전문계 고등학교, 장애인 특수학교를 두루 거쳤다. 제6대 광주광역시의회 교육의원으로서 광주시교육청 업무를 감독·파악했다.동아여자중·고등학교 관선 이사장(재임 3년)으로서 학교장 공모·교사와 행정직원 공채 등을 실시해,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 사학에 모범이 됐다. 사회문제와 관련해서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공동대표로서, ‘일제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아냈고, <지역교육네트워크 화월주(화정·월산·주월동)>의 대표를 6년 동안 맡았다.이런 과정에 쌓인 경험이 중요한 경쟁력이고, 크고 작은 조직을 무리 없이 운영했다는 데서 충분히 검증됐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궁극적으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교육은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다. 지위가 높을수록 겸손하고, 많이 배울수록 상대방을 배려하며 존중하고, 많이 가질수록 베풀면서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교육감의 핵심 자격이라면?교육감 선거마저 정치판이 된 현실이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교육감은 초·중등 학교를 관장하는 만큼 그 현장 경험자가 맡아야 한다. 대학교 총장이나 교수는 초·중등 교육 현장 경험이 없지 않은가?-교육의 이념화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는데?이념(중심) 교육은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독선적 발상의 산물이다. 교육은 상대를 인정하고, 서로 소통하며 합의점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코로나19로 인해 교육 현장의 변화가 더 심해졌다. 꼭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비대면 수업이 늘어난 데 따라 수업의 양(量)과 질(質)이 달라진다. 빈부 차이가 학력에 비례하는 만큼, 취약계층 학생들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기타 교육 현안에 대한 견해는?탈학교 학생이 매년 전국적으로 4만 명, 광주도 1400명 정도다. 국가와 지자체가 탈학교 청소년에 대해 재학생 만큼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미래 세대의 부담도 줄어들 것이다.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과 정보통신기술(ICT, Information & Communications Technology) 관련 능력은 이제 기본 소양이 됐다. 정보기기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사립학교의 건학이념은 존중하되 부정과 비리는 엄단해야 한다. 올해부터 사학도 공개 전형으로 신규교사를 선발하게 된 만큼 철저한 감독이 필요하다.대입 제도를 과감하고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수월성 교육과 학력 평준화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늘 마음에 간직하는 기준이 있다면?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心如江山(심여강산)’이다. 항상 마음을 강처럼 깊게, 산처럼 높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렇게나 적당히 살지 않았고, 청렴하고 정의롭게 살려고 애썼다.김선호 후보는 부인과 함께 노모(94세)를 모시고 있다. 슬하에 2남 1녀와 손자 여섯을 뒀고, 아들·며느리·딸 등 4명이 교사인 교육 가족이다. 가족 모두 기독교인이며 김 후보는 안수집사, 부인은 권사다. 하루 1만보 걷기로 건강을 관리하며, 어릴 때부터 익힌 서예가 취미를 넘어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선호 후보는 사회활동에도 열심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 지역교육네트워크 화월주(화정·월산·주월동)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 한국유권자중앙회 광주광역시총회장, 광주광역시교육청 교육발전자문위원, 광주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지도위원이다.‘정의로운 교육 전문가’를 자임하는 김선호 후보는 “내 모습 그대로 깨끗하고 바르게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다짐한다. 특히 정치 권력에 휘둘리는 교육계의 실태를 지적하면서, 광주 시민들이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책 마련에 동참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김선호 후보는 “광주 교육 발전을 위해 반드시 정성홍 예비후보(전교조 지부장 출신)와 단일화를 이루겠다”면서 교육은 단순한 지식 거래가 아니고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소중한 기틀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기획.연재
    2022-04-0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허난설헌 옛집 터 난설헌 살구나무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호가 초당이다. 강릉 초당동 477 허난설헌 생가터의 지명은 허엽이 이곳에서 두부를 만든 데서 얻은 이름이다. 이곳에 그 초당두부를 만든 우물이 있다. 허엽은 첫 부인이 1남 2녀를 낳고, 세상을 뜨자, 강릉김씨 김광철의 딸과 재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첫 부인 아들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지냈고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예언했다. 강릉김씨의 자녀인 허봉은 열여덟 살에 생원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였고,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썼다. 허균은 난설헌의 여섯 살 아래 동생으로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의 저자이다. 허난설헌의 어릴 적 이름은 초희와 옥혜이고, 자는 경번이며 난설헌은 호이다. 난설헌은 허균과 함께 천재라 불렸다. 여덟 살에 쓴 장편 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하늘의 신선이 산다는 백옥루’를 상상해 지은 시로 당시 한양의 화제가 되었고, 훗날 이 시를 읽은 정조도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불우했다. 1577년 15살 때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안동 김씨인 16살의 김성립과 결혼하였다. 남편도 문인이었으나 아내의 남다른 재능을 챙겨주기는커녕, 가정사마저 등한했다.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다, 아내가 죽은 1589년에야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절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허난설헌은 두 남매에게 온갖 애정을 쏟았으나, 연이어 남매를 잃었다. 경기도 광주 초월읍 지월리 양지바른 언덕에 남매를 나란히 묻고, 자신을 그 무덤 뒷자리에 묻으라고 했다. 그렇게 한이 맺혀서인지, 그녀의 ‘삼한(三恨)’은 조선에서 태어난 것, 여성으로 태어난 것,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한 것이었다. 허난설헌이 스물세 살에 친정어머니의 초상에 친정에 갔을 때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그녀는 ‘붉은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가 차가운 달에 떨어졌네’라는 시를 지었다. 허균이 이 시를 읽고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는 곧 스물일곱 살의 자기 죽음을 예감한 것이다"고 하였다. 허난설헌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사람은 허균이다. 그녀는 자신의 시를 불사르라 했으나, 허균은 생전에 넓은 땅에 태어나지 못했음을 한탄한 누이의 뜻을 이루어주려 그녀의 시를 중국 사신 주지번에게 주었다. 중국과 일본까지 난설헌의 시를 시인들이 애송하게 된 연유이다. 경포대에서 호수와 바다를 바라보면 신선이 된다는 곳이다. 바다와 호수, 너와 나의 눈, 마주치는 술잔, 그리고 마음속까지 해와 달이 뜬다는 곳이다. 사철 푸른 금강송과 낙엽송인 상수리나무, 그리고 벚꽃이 어울리면 경포호는 커다란 꽃구름이 되는 곳이다. 허난설헌이 태어난 집은 그 경포대가 있는 경포호 남쪽 솔숲에 있다. 오랜 세월 집 주인이 바뀌고, 집도 개축되었겠지만, 그곳에 오래된 나무가 있다. 그녀의 시에 나오는 살구꽃을 지금도 피우고 있는 한 아름 살구나무이다. 보슬보슬 봄비에 연못은 어둑하고/ 으스스 찬 바람 장막에 스며들제/ 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에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위에 지네. 허난설헌의 시 ‘봄비’이다. 이 봄비에 나오는 살구나무와 옛집 터의 살구나무가 같은 나무인지, 아닌지, 아니면 그 후손 나무라도 되는지, 아닌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웬일인지 오래된 그 살구나무 앞에서 한동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3-31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부안 개암사 이매창 홍매
      개암사는 백제 무왕 35년, 634년에 묘련이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에 세운 절이다, 개암은 기원전 282년, 진한과 마한에 쫓긴 변한의 문왕이 우(禹)와 진(陳) 두 장군에게 이곳 두 계곡에 도성을 쌓게 하고 전각 이름을 동쪽은 묘암, 서쪽은 개암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신라 때인 676년 원효와 의상이 이곳 우금산 울금바위 굴에서 수도했고, 고려 때인 1276년 원감국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을 피하지 못하고 소실되었다. 현재는 조선 중기의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1913년 화은이 시작하여 여러 건물을 복원하고 있다. 절에서 바라보이는 울금바위에는 3개의 동굴이 있다. 그중 원효방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는데, 원효가 수도하면서부터 샘물이 솟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우금산의 주류성은 백제의 유민들이 왕자 부여풍을 옹립하고, 3년간에 걸쳐 백제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다.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는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유적지다. ‘임진, 계사에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이 몸의 시름과 한 뉘에게 풀었으리/ 홀로 거문고 끼고 난세의 노래 뜯으면서/ 삼청동의 그대를 서글피 그리워했지요.’ 가사, 한시, 시조, 가무, 현금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했던 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의 시인인 이매창(1573∼1610)의 ‘옛일을 더듬으며’라는 한시다. 어릴 적 이름은 향금,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라 계생, 계랑이라 했던 매창은 그녀의 호다. 매창은 선조 6년에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얼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모친에게 거문고를 익혔다. 15세에 계례를 치러 정식 기녀로 입적하며 천향이라는 자를 받았다. 매창은 어릴 적부터 시문과 거문고에 천부적 재능이 있어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빼어난 솜씨에 흠뻑 빠져 혀를 내두르며, 신분과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조선 현종, 숙종 때 학자인 홍만종은 그의 저서 ‘소화시평’에서 ‘송도의 진랑(황진이)과 부안의 계생(매창)은 시의 문체가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고 했다. 삶도 사랑도 뜬구름일 수밖에 없는 기녀였지만 매창의 시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헤어진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지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는 지고지순한 만고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1610년 37살의 매창은 세상을 떠났다. 읍의 남쪽 나지막한 야산 공동묘지에 그녀의 유언대로 손때 묻은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기(妓)가 아닌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 ‘원(媛)’으로 추억했다. 1655년 매창이 떠나고 45년 뒤에야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1668년에는 사람들이 외워서 간직하던 시 58편을 고을 아전들이 모았다. 개암사에서 목판에 새기니 바로 ‘매창집’이다. 천민으로 태어나, 아픈 사랑을 안고 살았던 그녀의 아름다운 부활이었다. 살아서부터 미움과 질책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랑받는 사람이 바로 매창이다. 해마다 오는 봄이다. 봄 하늘가 흰구름이 송이송이 흐르고, 넋인 듯 사랑인 듯 매창의 시가 거문고에 실려 노래가 된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세월의 흐름을 넘어 살아간다. 매창의 시를 세상에 알린 개암사의 늙은 노매는 이제 근근이 봄맞이꽃을 달지만, 매창과 더불어 아름다운 정한의 꽃이다. 이른 봄 개암사에 가면, 그리고 개암매를 보면, 기녀가 아닌 아름답고 우아한 원인 매창도 만날 것이다. 매창은 부안의 시인이며, 개암사의 시인이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3-24
  • 군대와 식량은 버릴지언정 신의는 지켜야
    1904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議官) 안종덕이 ‘조정이 청렴, 근면, 공정하지도 않고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안종덕은 근면의 허상을 이야기한다.          “지금 폐하께서는 근면한 것을 좋아하지만 조정에는 게으른 습성이 있어 무슨 일이나 성사될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의정부의 회의는 모여 앉자마자 헤어지고 각 부(部)의 출근에 대해서 여러 번 주의를 주었음에도 출근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령이 결원되어 있으나 해가 지나도록 임용되지 않는 것은 전형을 맡은 관리들이 태만한 탓입니다. 죄수들이 옥에 갇혀 있어도 계절이 바뀌도록 심리하지도 않는 것은 법관들이 태만한 결과입니다. (중략) 신은 폐하의 근면이 ‘근면의 마땅한 도리를 잃은 데 있지않은가’생각합니다. 대체로 제왕들의 근면은 관리들이 수고로이 힘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 힘쓰며 인재를 얻은 다음에는 모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고요(皐陶)의 노래에는‘임금이 모든 일을 다 맡아보니 고굉지신(股肱之臣)들은 게을러져서 만사가 그르쳐지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을 다 맡아본다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서는 것이 근면한 듯 하지만 신하는 게을러지고 일이 그르쳐집니다. 근면하기는 마찬가지나 그 결과는 이처럼 상반됩니다. 진시황이 직접 계(啓)를 꼼꼼히 살피고, 수나라 문제(文帝)가 직접 호위 군사들에게 밥을 먹인 것은 해당 관청에서 할 일이었지 제왕이 직접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아! 폐하께서는 황위에 오른 이후 날마다 바쁘게 지냈으니, 참으로 천하에 의로운 임금입니다. 하지만 걱정이 지나쳐서 하찮은 일들까지 살폈고 근심이 깊어서 남이 하는 것을 싫어하여 모든 일을 직접 도맡아 하였습니다. 하찮은 일들까지 살폈기 때문에 큰 원칙이 허술해졌고 남이 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참소(讒訴)가 쉽게 들어왔습니다. 큰 원칙이 허술해지니 소인들이 폐하를 기만하게 되었고, 참소가 들어오니 대신들이 자주 교체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선다는 것입니다.(중략)  전형을 맡은 관리들은 명령만 기다리게 되고, 법을 맡은 관리들도 명령만을 받들게 되니, 임금의 팔다리 노릇을 해야 할 관리들이 어찌 게을러지지 않으며, 만사가 어찌 그르쳐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놓고 신은 감히 폐하의 근면이 근면의 마땅한 도리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윽고 상소는 공정에 다다른다. 그는 고종의 공정성을 상당히 의심한다.      “지금 폐하는 공정한 것을 좋아하나 조정에는 사리사욕이 넘쳐나고, 관리들 간에는 당(黨)이 갈라졌으며, 벼슬을 얻어 나가려는 자들은 대궐 안의 비호 세력과 결탁하고, 세력에 끼려는 자들은 외세에 의지합니다. 재주도 없이 턱없는 과분한 벼슬을 지내는 것은 모두 세도 있는 집안의 인척들이고, 죄를 지고도 요행수로 면하는 것은 모두 권세 있는 가문의 청탁 결과입니다. 임용해야 할 벼슬자리가 있으면 비천한 자들을 사대부들보다 먼저 앉히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면 도적보다 더 심하게 빼앗아 냅니다. 천하에 잘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사익을 채우는 일 한 가지뿐이니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폐하의 공정함이 진실한 공정함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정령(政令)과 하는 일들로 미루어 폐하의 마음을 더듬어 보면 순전히 공적인 마음에서만 출발한 것이 아닌 것도 있는 듯합니다. (고종실록 1904년 7월 15일)  안종덕의 상소는 계속된다. “요즘의 관보를 보니, 칙임관·주임관·판임관의 벼슬이 매번 가까이 돌면서 사적인 총애를 받거나 점쟁이나 이단(異端)의 무리들에게 내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두 무리들에도 어찌 등용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기야 하겠습니까마는, 대체로 이 무리들은 간사한 술법을 숭상하고 간교하여, 안으로는 남을 헐뜯고 시비를 전도하며 밖으로는 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권세를 구합니다. 그리하여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없는 무리들을 앞다투어 추종하며 저마다 아부하여 편당을 만들고는 자기들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쫓아냅니다. 이런 형세는 필시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야 말 것이니, 어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고종은 여전히 점쟁이나 이단의 무리를 등용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1899년에 만난 성강호이다. 그는 고종에게 1895년 을미사변에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혼령을 볼 수 있다고 현혹했다. 이에 빠진 고종은 명성황후가 생각나면 매번 성강호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1년 사이에 벼슬이 뛰어올라 협판(차관급)에 이르렀으며 그의 집 문 앞은 항상 저잣거리처럼 붐볐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상소는 이어진다. “지금 중앙과 지방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대부분 지조가 없고 턱없이 벼슬을 차지한 자들입니다. 약간이나마 염치가 있고 조금이나마 절개를 지닌 사람들은 임용되자마자 바로 쫓겨나고 벼슬에 나서자마자 물러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폐하의 공정한 마음을 헤아려서 왔다가 나중에는 이 무리들의 배척을 받고 떠나버립니다.” 간사한 자는 벼슬을 다 차지하고, 염치 있고 절개 있는 자는 쫓겨나는 현실이 대한제국이었다. 이어서 안종덕은 고종의 늦잠 버릇에 대해 말한다.   “대궐 안의 일은 알아서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신이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듣건대 폐하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어 정오가 지나서야 일어나므로 아침 식사를 들자마자 벌써 날이 저물어버린다고 합니다. 대문이 열리면 행랑(行廊)이 마치 시장 같아지고 항간의 잡된 무리와 시골의 부정한 무리들이 밀치며 꼬리를 물고 달려들어서는 폐하 앞에서 버릇 없이 부산스레 들락날락하니, 이는 무엇을 도모하자는 일이겠습니까?폐하를 보좌하여 일을 주관해야 할 높은 관리들과 나랏일을 논의해야 할 신하들은 해가 지나도록 폐하를 만나 뵙지 못하고 그저 문서나 받아 처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판이니 온 나라에 시행되는 정사가 과연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사사로운 것이겠습니까? 이는 명철한 임금이 정사를 베푸는 원칙에 손상을 주는 것일뿐 아니라, 옥체를 조섭하는 도리에도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고종은 1870년대 부터 민왕후와 함께 밤새 연회를 즐겨 새벽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 버릇은 여전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공적인 도리를 널리 시행하여 사적인 총애를 받는 자들을 내쫓고 신망 있는 사람을 널리 등용하소서. 대책을 세울 때에는 조정에 묻고 개인들과 의논하지 말며, 인재를 선발하는 경우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지조 있고 충직한 선비들 속에서 구할 것이요, 연줄을 대어 결탁하는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들 속에서 찾지 말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굽어살피소서.”안종덕은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를 멀리하고 신망받는 사람을 가까이하라고 간언한다. 하지만 고종은 여전히 몇몇 편애하는 사람들에 의존하여 대한제국을 이끌고 있었다.    이제 상소는 신의(信義)로 이어진다.  “지금 폐하께서는 신의를 좋아하지만 주변의 신하들은 속이는 것이 버릇이 되었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유언비어가 떼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애통조서(哀痛詔書)를 여러 번 내렸으나 온 나라가 감격하는 효과가 없고, 엄격한 칙서(勅書)를 자주 내렸으나 탐관오리들이 조심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신은 폐하의 신의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의가 없으면 사람의 도리가 서지 못하고 신의가 없으면 하늘의 도리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신의가 없으면 제 몸도 수행할 수 없으며 신의가 없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군대를 버리고 식량을 버릴지언정 신의는 버리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군대를 버리고 식량을 버릴지언정 신의는 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논어’ ‘안연 편’의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나온다. 자공 : 정치란 무엇입니까? 공자 : “식량을 풍족히 하고, 군사를 넉넉히 하고,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 : “부득이해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공자 : “군대를 버려라” 자공 : “나머지 두 가지 중에 부득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 “식량을 버려라. 백성들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는 존립하지 못한다. (民無信不立)”
    • 기획.연재
    2022-03-22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화엄사 각황전 황제 화엄매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의 품에 안겨 오랜 세월 민초들의 숱한 얘기를 만들고 그들을 보듬어주었다. 세상사의 이치와 인간 도리의 예를 깨닫게 하는 깨달음의 고을, 구례는 한반도 남쪽의 큰 언덕이다. 이곳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인 554년에 인도 승려 연기조사가 세웠다. 그 뒤 남북국 시대에 의상대사가 지금의 각황전 자리에 장육전을 짓고 건물의 벽을 화엄석경으로 둘렀다. 하지만 이 화려했던 전각은 정유재란에 잿더미가 되었고 인조 때 벽암선사, 숙종 때 계파선사에 의해 각황전으로 되살아났다. 각황전은 글자 그대로 깨우침의 황제 전각이다. 왜란에 불에 탄 전각 복원을 위해 화주승을 뽑을 때다. 밀가루와 엿을 넣은 항아리에서 엿을 꺼내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을 뽑았다. 이때 스님 매월이 뽑혔고, 그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받으라고 했다. 그런데 매월이 처음 만난 사람은 아랫마을 가난한 벙어리 노인이었다. 매월의 사연을 듣고, 노인은 두말없이 계곡에 뛰어들어 목숨을 시주하였다. 8년 뒤, 매월은 청나라에서 한 어린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청나라 황태자로 벙어리였다. 그런데 매월을 만나자, 말문이 터졌다. 황제는 매월에게 아들의 환생 사연을 듣고, 전각 복원비를 시주하였다. 그래서 장육전은 황제를 깨우친 전각, 각황전이 되었다. 이는 각황전 두어 전설 중 하나지만, 자신의 본심과 본성을 깨닫는 게 각성이고, 각성이 곧 깨우침의 황제인 각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이곳 화엄사 승려들은 임진, 정유왜란에 분연히 일어났다. 화엄대선 겸 선교판이던 윤눌은 임란이 일어나자, 수군에 가담하여  1차 진주성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스님 해안도 의병장으로 진주성에서 싸웠다. 스님 설홍은 방처인 등 화엄사 승병을 이끌고 석주관에서 왜병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렇듯 임란과 정유재란 때 석주관에서 왜와 싸웠던 의승병의 기록은 의병장 조경남의 산서전진실기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이미 알려졌으나, 정조 22년인 1798년에 화엄사 승당을 중수할 때 나온 격문 ‘기서화엄사화상승○○’과 ‘정유란일기’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그러니까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음력 8월 7일이다. 진주에서 올라온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병이 구례를 집중 공격했다. 구례현감 겸 석주관 만호였던 이원춘은 남원으로 후퇴하고, 왕득인이 의병과 함께 왜와 맞섰으나, 모두 전사했다. 왜의 살인, 방화, 약탈행위는 극에 달했다. 11월 초다. 구례의 20대 젊은 선비들 3600여 명, 화엄사 주지 설홍이 이끄는 승병 153명이 의분에 떨쳐 일어섰다. 그리고 이들도 모두 전사했다. ‘들도 산도 성도 모두 태워 버리고 사람을 쳐 죽이고 쇠사슬로 손을 묶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찾아 울부짖고 아이는 어머니를 붙들고 운다. 어린아이를 어머니로부터 떼어내 어미를 죽이니,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지옥의 참상이다.’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온 승려 케이넨의 종군일기이다. 또, 이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승병에 대한 앙갚음으로 화엄사를 불 지르고 범종을 훔쳤으나, 섬진강에서 배가 전복되었다. 이곳 붉다 못해 검은 화엄매는 아름답다. 오죽헌 율곡매, 선암사 선암매, 백양사 고불매는 이제 나이가 들어 근근이 봄맞이하지만, 화엄매의 봄맞이는 화사하고 눈부시다. 이 화엄매 맞이는 세상사의 이치와 인간 도리의 예를 깨닫는 각성이다. 그게 또 깨달음의 각황이니 새봄에 화엄매를 맞이한다면 황제는 물론이고 그 무엇이 부러우랴?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3-17
  • 김종민 환경공학박사 “공직 경험 살려 고향 돕고 싶어”
    대담=주성식 선임기자전라남도 담양군은 대나무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다양한 관광자원이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알려지고 있다. 광주광역시라는 대도시에 인접해 있어 교통 여건 등 접근성이 뛰어난데도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있어, 여유로운 휴식이라는 최근의 여가 활동 추세에도 적합하다는 평가다.담양군의 북서쪽에 자리한 수북면은 삼인산, 병풍산 등을 뒤로 하고 무등산을 마주하고 있다. 과거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분리될 때 전국의 풍수 명인들이 전남 전 지역을 답사했는데, 수북면에서 무등산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지역을 보고 한반도 최적의 도읍지라고 입을 모았다는 것이 전해지기도 했다. 김종민(환경부 서기관 정년퇴임, 69세) 씨는 공직을 마친 후 귀향해 인생 2막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안락’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역할’을 해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고향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환경 전문가로서 환경청 출범부터 환경 관련 6개 기본법 제정을 주도한 김종민 씨를 만나 뜨거운 지역 사랑의 속내를 들었다. -환경청 정년 퇴직 후 귀향해 활동하고 있다. 그 내용은? 귀향 후 생활 여건이 안정되자 공직 경험이 사장되는 것이 아쉬웠다. 영산강유역환경관리청 홍보강사로 위촉돼 학교·군부대·사회단체 등에서 환경 강의를 했다. 한살림 생활소비자협동조합(광주) 이사 등으로 사회단체에도 관여했다. 공직과 다른 분야 특히 지역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됐다. 현재는 담양교육지원청 교육참여위원·광주광역시 규제개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귀향을 결심한 계기는? 국무총리실로 파견돼 있을 때, 직장암 3기 진단을 받았다. 과중한 업무와 박사학위 논문 준비가 겹치면서 건강에 무리가 왔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암 치료 과정에 공직 유지와 향후 삶에 대해 고민했다. 암 후유증 극복 등 건강 관리 차원에서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야겠다고 판단해 결정했다. -사회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내적으로 너무 침체돼 있다는 느낌이었다. 외적으로는, 가끔 접하는 지역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뭔가 활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활동 중 느낀 보람과 아쉬운 점은? 공직 경험으로 지역사회를 도울 수 있다는 점이 보람이었다. 아쉬운 점은 봉사하는 공직자의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내세울 만한 결과가 없다는 점이다. 덧붙여 객지에서 살다가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을 잘 포용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저서 출간을 준비 중이라는데? 환경부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다. 어린 시절 등 공직 입문 전 생활, 퇴직 후 귀향해 겪은 일도 추가했다. 재직 중 환경서적 3권을 펴냈다. 이번 책은 자료 위주의 전문서가 아니라 기억을 되살려 서술하려니 쉽지 않다. 요즘 공직 취업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진로를 선택과 적응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공직 생활에 대해 말해달라. 기업에 근무하다가 공무원으로 전직했다. 기업 급여가 공무원보다 많았지만 돈 벌이에 스스로를 소모하는 것 같았다. 직업은 생계 수단이기도 하지만 가치 추구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결정했다. 공직에서는 국민을 위해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자세로 일했다. 6개 환경법 제정에 참여한 것, 국무총리실에서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시각을 갖출 수 있었던 것, 전기차 관련 제도를 마련하는 등 전기차 보급을 직접 추진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아쉬움도 있다. 공무원 평가가 실적보다 연고나 주관적 판단, 시험 합격 여부 등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이런 평가제도는 행정 전반의 수준을 유지하고 제고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지방선거가 목전이다. 정치에 바라는 점은? 정치 지도자는 시대적 과제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 현재 산업화·도시화로 인해 각종 사고·재해가 빈번해지고, 환경오염·기후변화 등 환경문제가 심각하다. 이런 현안을 독재와 민주, 성장과 보전, 수구와 개혁 등 이분법적 사고와 땜질식 처방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 선거를 통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이 뽑히기 바란다. 유권자들도 신중하게 적임자를 선택하면 좋겠다.-세대 갈등이 심각하다. 노인으로서 느끼는 점과 대책은? 세대 갈등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두고 세대 간 갈등이 야기되는 건 당연하다. 지금의 젊은 세대(사회 진입층)는 주거·일자리·차별·재해·환경 등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 농경사회의 빈곤처럼 단순하지 않고, 대응하기 힘든 것이다.중장년 세대(사회 기득권층)는 아직 사회의 핵심에 있으면서 이분법적 사고로 문제를 대한다. 그 과정에 세대 간 갈등이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중장년 세대는 독단적 주장을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 현안이 젊은 세대 주도로 해결되도록, 그 과정에 지원하는 역할에 그쳐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대안은? 우리나라는 수도권 중심의 거대복합도시와 동남권의 중공업도시 그리고 농어촌과 연결된 거점 도시로 나눌 수 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곳과 농어업 소득 의존도가 높은 곳으로 갈린다. 현실적으로는 각 지역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산업화·도시화의 정도가 다른 만큼 문제와 대안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 문제를 일일이 거론하고 해결책을 한꺼번에 마련할 수는 없다. 지방자치기구 등을 통해 모든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삶의 신조가 있다면?책임감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자신·가족·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늘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명심했고, 업무에서는 요구되는 것 이상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운명처럼 공직에 들어가 환경행정으로 인생 1막을 보낸 사람!-향후 계획은? 그동안의 행정 경험을 살려 지역사회에 기여하려고 한다. 현재 담양교육지원청 참여위원·광주광역시 규제개혁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앞으로 범위를 넓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 볼 생각이다.-더 말하고 싶은 것은?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지 몰라도 삶의 질은 빈곤한 것 같다. 이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국가와 지자체를 비롯한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김종민 단장은 부인과 슬하에 아들 둘, 며느리, 손자가 있다. 책 읽기는 평생의 습관이며, 음악 듣기와 텃밭 농사로 소일한다. 좋은 먹을거리를 챙기고, 매일 태극권 연습과 반려견과 함께 자전거 타기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삼인산, 병풍산을 뒷배로 하고 영산강을 거느리며 너른 들 건너 무등산을 가늠하는 백수옹(白首翁) 김종민 박사! 흉중(胸中)에 천하를 경륜할 뜻을 품고 뇌리(腦裏)에 고금(古今)을 관통할 알음을 간직했으니, 꼭 무리가 모여 시끄럽지 않아도 그곳이 바로 도읍(都邑) 아니겠는가!
    • 기획.연재
    2022-03-1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진도 상만리 수호신 비자나무
      진도는 울돌목을 경계로 해남과 이웃하는 큰 섬이다. 이름처럼 보배로운 섬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있는 오랜 사람살이의 섬이다. 백제시대에 인진도군이 고군면 고성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시작하여 신라 때 진도현이 되었다. 고려 때인 1271년 5월 15일이다. 진도에 웅거하던 삼별초는 김방경과 몽골 원수 혼도의 여몽연합군에게 무너졌고, 주민 대부분이 몽골로 잡혀감에 따라 진도는 거의 빈터가 되었다. 또 1350년 충정왕 2년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왜구의 노략질에 남은 주민도 월악(영암군 시종면 월악리), 명산(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금산(해남군 삼산면)으로 피난하였으니, 이때에도 진도는 80여 년간 빈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 조선조 초에 주민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한때는 해남이나 영암 지역과 함께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우리의 삶이 거친 파도를 피해 잠시 젖은 날개를 섬바위에서 쉬는 갈매기와 다를 바 없다. 조선 3대 왕 태종 때인 1409년이다. 진도현을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이라 하였고, 1437년에 세종이 다시 분리하여 진도군이라 하였다. 이해 6월 29일에 초대군수 양경이 고성에 성을 쌓았다가 1440년에 지금의 진도읍으로 관청 소재지를 옮겼다. 그렇게 삼별초와 왜구의 노략질로 빈섬이 되었다가,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할 무렵이다. 1438년 세종대왕은 삼별초 대몽항전의 마지막 격전지인 남동리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남도진성을 쌓게 했다. 임회면 상만리는 남도진성과 가까운 해안 마을이다. 고려 후기의 석탑인 오층석탑이 있고 상만사지라는 폐사지 절터가 있는 곳이다. 1930년 무렵 여기 폐사지 터에서 미륵불이 나와 초가로 절을 지어 만흥사라 하였고, 1974년 4월에 새로이 절을 지을 때 고려자기 2점이 출토되었다. 지금의 절 이름 구암사는 마을 뒷산 바위가 ‘비둘기 바위’ 때문인 듯싶다. 이런저런 사실로 보아 구암사는 고려 후기의 절터 자리로 여겨진다. 아무튼, 세종대왕이 남동리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남도진성을 쌓을 무렵 이곳 상만리에서 비자나무 한 그루가 땅을 뚫고 새움을 틔웠다. 거친 바람에 아랑곳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왜구 때문에 삶터를 잃고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옛터를 일구던 때부터 지금까지 600여 년을 함께하고 있다, 그러니 두 팔 벌려 안아 네 아름이 넘는 이 우람한 상만리 비자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이자, 수호신이다, 사람들이 나무에 오르다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 신령스런 나무이다. 난대성 상록침엽수로 한자의 비(非)자와 비슷하여 얻은 이름인 비자나무는 주로 절이나 마을에서 심고 가꾸던 귀한 나무로 주변에 모기도 서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4월에 꽃 피어 10월에 익는 열매는 영양이 풍부하고, 간식거리이며 구충제, 급체, 가래, 변비, 탈모, 여성병 등 옛 가정의 만병통치 상비약이었다. 또 비자나무로 만든 가구가 갈라지면 젖은 수건을 덮어 놓는다고 한다. 그러면 스스로 갈라진 틈을 메꾼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한 나무이다. ‘한 해 농사지어 삼 년을 먹는다’는 진도는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여 옥주라고도 했다. 사람들은 넉넉한 인심에 애향심이 높다. 이 사람들이 사는 한반도 남쪽 끄트머리 바닷가 마을의 한 그루 비자나무이지만, 참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나무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신하여 대대손손 우리를 지켜주는 신령스런 조상님 나무이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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