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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합쇼핑몰, 주민 주도로 해야!”
    “시민 참여 기반, 활동하는 의회 만들 것” 포부 밝혀    거수기 역할 거부, 전문성 향상 “의회 위상 높일 것”“유연한 친화력, 포용력 강점” 지역정치권 기대 모여대선에 이어 지방선거까지 국가의 지형을 바꿀 만큼 격동 속에 치러졌지만, 광주 등 호남은 별로 변하지 않은 상황이다. 다들 ‘외로운 섬’을 떠올린다.지난날 개발 등 정책과 인사에서 차별·소외됐던 기억은 전설이 되고 이제 신앙의 대상이 된 듯하다. 마구잡이 흠집내기는 예리한 현실 비판으로 포장되고, 비현실적인 요구는 정의로운 주장으로 과장된다. 적어도 이 지역에 관한 한 공화(共和)는 실종됐거나 말살됐다는 지적이 낯설지 않다. 고립을 자초하고 독선을 고집한다는 평가가 그래서 더 아프다. 호남 특히 광주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철저한 배타(排他)를 둘러쓰고 악착같은 증오를 힘으로 삼아, 자강(自彊)하고 자립한 끝에 마침내 독립(獨立)하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나라 전체를 독단(獨斷)할 힘을 갖겠다는 것인가? 제9대 광주광역시의회가 출범했다. 한 정당의 과점(寡占) 구조가 더욱 견고해졌지만, 갈수록 높아지고 강해지는 시민의식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지방선거 과정에서 보인 파행(跛行)과 농단(壟斷)의 뿌리가 엄존하고 그에 대한 비난이 내연(內燃)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건 폭발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확실하다. 따라서 중앙정부와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광주시를 향한 광주시의회의 입장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당장 복합쇼핑몰 등 핵심 현안과 관련한 논의가 교착 상태고, 내년도 예산 확보도 예년의 무풍지대는 아니다. 또 광주시의 직제 개편과 인사까지 맞물리면서 광주시의회의 역할에 대한 기대는 어느 때보다 크고 강하다고 하겠다.제9대 광주광역시시의회 전반기를 이끌어갈 정무창 의장(광산구 제2선거구)을 만나 광주광역시의 앞날을 전망하고 시의회의 진로에 대해 들었다.            <편집자주>-의장 취임 소감은?정치를 시작했을 때의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원 구성과 市 조직개편안이 잘 처리된 만큼 9대 광주시의회 전반기 방향성 정립에 집중하려고 한다.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에 따른 인사권·조직권·예산권 등과 관련해서 합리적인 보완 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고 시급한 만큼 마음이 무겁고 바쁘다.-의장으로서 중점을 둘 부분은?내 재임 중 의정 구호를 ‘참여하는 시민. 행동하는 의회’로 정했다. 깨어있는 시민이, 원칙과 상식을 기반으로,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 시의회의 지향을 담은 것이다.나는 9대 전반기에 ‘의회다운 의회·실력 있는 의회·신뢰받는 의회’를 만들고자 한다.먼저, 집행부를 견제·감시하되 균형을 이루며 대안을 제시하는 등 성숙한 의정활동을 통해 의회다운 의회가 만들 것이다.   다음으로, 전문·다양화되고 있는 의정활동 수요에 대응하여, 의원 각자가 꾸준히 공부하고 연구함으로써 실력 있는 의회가 되게 할 것이다.또 선출직 공직자로서 ‘청렴’은 기본 덕목이다.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지 않도록 의원 각자의 윤리의식을 높여 신뢰받는 의회가 되게 하려고 한다.-광주시의회 의원 23명 중 22명이 집행부와 같은 당 소속이라는 점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독점적 구조’에 대한 비판을 잘 알고 있다.그러나 소속 정당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거수기 역할’에 그치지는 않을 것을 약속할 수 있다. 주민이 선택한 의원으로서 자율·독립성을 갖고, 집행부 견제와 감시라는 의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기준은 오직 광주 발전과 시민 행복이다. 모든 것을 그 관점에서 정확한 기준을 근거로 판단하고, 어떤 제한도 없이 과감하게 지적할 것이다.  -지방자치법 개정과 관련한 입장은? 이번 지방자치법 개정의 의미는, 지방자치의 중심이 자치단체와 단체장에서 주민과 지방의회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지방의회 인사권 독립, 정책지원관 제도 도입 등 의회의 권한과 위상이 강화됐다. 또 주민조례 발의 요건도 완화됐는데, 시민 참여가 쉬워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시의회는 이런 변화에 적극·능동적으로 대응하려고 한다. 시민의 다양한 견해를 수렴해 의정에 반영하기 위해 현장 활동을 강화하는 등 최선을 다할 것이다.-정책지원관에 대해서는?연간 약 10조 원인 예산 심의, 조례안 제·개정, 행정사무감사와 민원 청취, 현안사업 점검, 정책연구 활동까지 의원이 독자적으로 감당하기는 버겁다. 그런데 의원 수의 절반까지만 지원관을 둘 수 있어 한계가 뚜렷하다.(2022년까지 의원 정수의 1/4, 2023년까지 1/2 책정)  의원 수 만큼 정책지원관을 증원해야 한다. 지방자치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인 만큼 타 지방의회와 함께 적극 대응해 나갈 계획이다.-청렴 등 의원들의 윤리성 관련 물의가 그치지 않는데? 시의회뿐 아니라 어떤 조직이건, 구성원의 일탈을 사전에 완벽하게 예방하는 것은 힘들고, 불가능하다. 청렴하게 활동하는 분위기가 되도록 의원끼리 서로 독려하고 견제하며, 의원 개인은 스스로를 성찰하고 문제점은 없는지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청렴’은 의정을 비롯한 모든 공적 활동의 기본인 만큼, 의원들의 윤리의식을 높이는 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광주시의회는 통상적인 ‘법적’ 테두리보다 훨씬 강력한 규범을 철저하게 적용하여 시민 기대에 호응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복합쇼핑몰 유치, 군(軍)공항 이전, 어등산관광단지 개발 등 지역 현안 관련 입장은?광주시의 여러 난제에 대한 해법을 금세 한꺼번에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시민들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광범위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여러 지역 현안사업은 원칙적으로 민간이 주도해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복합쇼핑몰은 시민들이 건립을 원하기 때문에 소상공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 추진해야 한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도 공약한 사업인 만큼 국가지원을 최대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군공항 이전은, 입장 차이 확인을 반복하는 것 말고 광주·전남의 통 큰 결단이 필요하다. 광주 현안과 관련해 지적할 것이 있다. 지난 달 18일 광주시가 국민의힘과 정책협의를 한다면서 국비 9천억원 지원을 요청한 것은, 내용도 그렇지만 절차 상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트램 설치는 그 효용성과 예산 확보 그리고 도시 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논란이 많은데, 시 의회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추진을 기정사실화했다. 광주시의회는 앞으로 집행부의 이런 일방적 행정에 대해 사후(事後) 추인(追認)이나 하는 ‘들러리’ 역할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업의 적절성을 가능한 한 기안 시점부터 철저히 확인할 계획이다.- 반도체 특화단지 유치와 관련해 시의회가 할 역할은?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 회복을 위해 미래 성장동력을 마련하는 것이시급하고 중요하다. 중앙정부가 지방 소멸을 막고 지역 균형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기회발전특구정책을 내놓았고 광주시도 적극 대응하고 있다. 특히 민선 8기 광주·전남 상생 1호 협력사업이 ‘반도체 특화단지 조성’이다. 광주·전남 접점 지역에 특화단지가 조성된다면, 지역발전을 견인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이 재도약하는 데도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전국 지자체들의 경쟁이 뜨거운 만큼 반도체특화단지를 유치하기 위해 광주시의회는 시민들의 역량을 결집하는 동시에 전라남도의회와도 유기적으로 공조해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낼 각오다.-민선 8기 첫 추가경정예산안 심의의 주안점은 무엇인가?광주시가 8월 11일 추경안(약 7362억원)을 제출했다. 심의는 대략 4가지를 중심으로 진행할 계획이다.첫째, 추경 성격에 맞게 필요하고 시급한 예산인가? 둘째, 민선 8기 광주시의 개편된 조직에 부합한 예산인가? 셋째, 강기정 시장의 주력 사업은 적정하고 타당한가?넷째, 예산편성지침에 부합하며 사전 절차를 준수했는가? 등을 따져 볼 것이다.특히 고물가·고금리와 코로나19 확산 등으로인해 어려운 상황인 만큼 민생 안정과 광주 발전을 위한 예산인지 꼼꼼하게 확인하겠다. 무엇보다도, 시민 혈세가 낭비되지 않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철저하게 심사할 계획이다.-제9대 광주광역시의회 의장 그리고 한 의원으로서 광주 시민들에게 요청할 것이 있다면?지방자치법이 개정된 데 따라 지방의회의 독립성과 권한이 커졌고‘기대와 우려’도 증가하고 있다. 또한 정치 환경의 변화로 인해 지방정부와 의회가 제대로 기능해야 한다는 주민 요구도 강력해진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를 비롯한 광주시 의원 23명 모두는 ‘시민의 대변자’이자 ‘시정의 동반자’로서, 집행부 견제와 감시에 소홀함이 없게 할 것이다.“의회다운 의회, 실력 있는 의회, 신뢰받는 의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특히 광주의 여러 숙원사업에 대해서는, 시민들과 소통하며 견해를 확인하고, 뜻과 지혜를 모을 것을 약속한다.시민들도 시의회에 관심을 갖고 동참해 주시기 바란다.
    • 기획.연재
    2022-08-17
  • 주성식의 어른 왈/홀로 나고 자란 듯
      사람 사는 곳에는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다. 빈부·귀천·노소가 갈리더니 선악이 나뉘고 마침내 음양(陰陽)이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웅동체(雌雄同體)나 단성생식(單性生殖)를 벗어나 이성(異性)이 교접함으로써 번성한 인류의 태생적 한계일 것이다.  인간은 그래서 싸운다. 대립과 투쟁은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된다.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교차하면서 물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승화(昇華)된다.  이 사회는 어떤가. 봉건 왕조가 끝나면서 식민지배를 겪었고, 반쪽짜리 독립은 영토 분단으로 이어졌다. 아직도 뚜렷한 봉건의 잔재와 식민지의 흔적과 분단의 상처가 부딪치면서, 갈수록 깊고 어두운 함정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윤리와 도덕 따위는, 조롱(嘲弄)의 재료요 희화의 대상일 뿐이다. 제도와 규율과 법까지 폭력과 감상(感傷)에 휘둘리고 있다. 악착(齷齪)같은 모리배들의 잘 드는 칼날이요 번쩍거리는 입성으로 전락한 지 오래인 것이다.   사회 어느 곳인들 성하겠는가만,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챙긴다는 부류들의 작태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렵다. 온통 파렴치와 무지와 탐욕뿐인 것들이, 힘을 갖겠다며 몸을 내굴리고 마음을 내버린다. 이익이 된다면 오물(汚物)이라도 들이마시고 손해를 면한다면 친구와 동지라도 팽개친다. 왕(王)과 그에 빌붙어 호강하던 사대부들이 정치 권력자들과 정당 하수인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훨씬 더러운 형식과 보다 더 무서운 내용으로 말이다. 그것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겨레를 개와 돼지처럼 취급하는 전모(全貌)를 밝히기는 어렵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또한 바닷물을 다 마셔야 그 짠 맛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둥을 치면 들보가 울리는 이치는 밝고 뚜렷하다. 우리 속언(俗諺)에 ‘호로 자식’이라는 것이 있다. 어원과 관련해 여러 설(說)이 있지만 ‘홀로 자식’ 즉 홀로 나고 홀로 자란 것처럼, 위아래도 모르고 앞뒤도 분간하지 못하는 자(者)라는 풀이가 맞을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아직도 미련이 남는가? ‘호로 자식’들이 성인(聖人) 현자(賢者)가 돼, 나라와 겨레를 지상낙원으로 이끌 것 같은가? 마시던 물에 침을 뱉고, 술병 깨서 자해(自害)하는 시늉으로 무전취식(無錢取食)하는 것들을 계속 방치하려는가? 두려워해야 한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치 떨리는 패륜·배덕자가 갑자기 쓸 만한 시민(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기획.연재
    2022-08-16
  • 옆집 아저씨 같은 공무원!
    임철진 광주 서구 풍암동장  시청 서구청 감사·홍보·문화 부서 전문성 발휘 주민 자치역량 강화와 직원 소통 주력 다짐  “불성무물(不誠無物) 신조로 모든 일에 최선을” 민선8기가 출범하면서 각 자치단체는 조직 구성에 바쁘다. 단체장의 공약 등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최근 광주의 핵심으로 위치를 확립한 서구도 마찬가지다. 2010년 이후 계속 구청장이 바뀌면서 역설적으로 활력이 강해진 측면을 감안하면 적절한 인재 기용은 더욱 중요한 사안이 됐다. 지난 7월 말 인사에서 풍암동장으로 발탁된 임철진 동장은 어깨가 무겁다. 서구의 가치, 풍암동의 위상 그리고 본인의 공직 이력과 관련된 다짐 등이 뒤섞이고 어우러진 까닭이다.광주시청에서 공직을 시작해 30년 넘게 시(市)와 서구청의 요직을 맡았던 임철진 동장을 만나 ‘서구의 모범동’인 풍암동 살림에 대한 구상과 각오를 들었다.<편집자주>-동장에 부임한 소감은?공직자로서 인사 발령은 늘 있는 일인 만큼 특별할 것은 없다. 다만 내가 공직생활 34년째인데, 이제 정년까지 2년여를 남기고 있다. 공직의 마지막 2년 동안 지역민과 직접 접촉하며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면에서 매우 뜻깊게 생각하고 있다. 풍암동은 우리 서구에서 인구가 가장 많기 때문에 그에 따른 무거운 책임감도 느낀다. 항상 재미있게 일하고, 일에서 즐거움을 찾아서, 주민들과 함께 마을 발전을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동장으로서 포부 및 각오는?우리 풍암동은 서구 관내 4개의 거점동 중 하나로 지정됐으며 특히 주민자치 실현의 모범적 시범동이다. 부임한 뒤 주민들의 참여 열기에 놀랐다. 주민자치회가 긍정적으로 기능하면서 오는 10월의 ‘풍암단풍축제’ 준비도 차질 없이 이뤄지고 있다. 또 주민들 결정에 따라 ‘한쪽 주차제’를 시행해, 주차난과 교통 체증이라는 두 가지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것도 주목할 만한 성과다. 따라서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다지는 데 중점을 두려고 한다. 간섭과 개입을 최대한 줄이고, 풍암동 주민자치회가 자율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할 것이다. 특히 풍암동에 있는 여러 단체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풍암동 발전에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주민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데 중점을 두려고 하는 까닭이다.이런 노력의 성과가 쌓여, 민선8기 서구청의 슬로건인 ‘함께 서구! 우뚝 서구!’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전망은 낙관적이다. -동 운영 방침을 알려달라.다른 무엇보다, 즐겁게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도록 하겠다. 모든 조직이 인간관계에 기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직원끼리 서로 상의하고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생각이다. 또한 마을(관련) 업무에 관여하는 주민들도 즐거운 분위기에서 일하며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시책, 직원 관리, 주민 응대 등 중점적으로 추진할 사항은?풍암동이 실질적인 마을중심 자치도시가 되게 하겠다. 풍암동 자치회 운영 및 마을사업 등이 한 단계 높아지는 데 중점을 둘 것이다.구체적 실현 방법은, 풍암동의 발전 방향을 재설정하고 또한 동 브랜드를 개발하려고 한다. 또 동 입구에 풍암동 홍보 안내판을 만들어 동의 위상을 높이고 안팎으로 동의 장점 등을 알리겠다. 특히 동 행정은 주민을 직접 대하고 민원을 처리하는 최근접 조직이다. 동 민원 담당자의 주민 대응이 서구청 전체에 대한 인식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준다. 민원인을 친절하게 응대하고 업무를 신속·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게 처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또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사무실 근무환경 개선에도 관심을 갖고 추진할 것이다. -공직자로서 소신과 원칙이 있다면?나는 공직자로서 ‘일에 대한 소명감’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독자적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감을 갖고 일함으로써 최선의 결과를 내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생활해 왔다. 그런 자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33년이라는 긴 공무원 생활을 지탱한 든든한 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신조는 ‘불성무물(不誠無物)’이다. 중용(中庸) 25장에 있는 글인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면서 살자, 정성이 없으면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알고 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고, 꼼꼼하게 챙기며, 최선을 다하고, 지혜를 모아 실수를 줄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일하는 데는 열정을 다해 노력했다. 열정은 일을 재미있게 해줄 뿐 아니라 큰 보람도 느끼게 해준다. 주어진 일에 있는 힘을 다하면 해결책을 얻게 되는 등 동료들의 경험과 지혜를 받아 알찬 결과를 거둔 경험이 많다.예를 들자면 2016년 서구청 홍보실장 때 현 서구청 SNS 캐릭터 ‘해온이’를 개발했다. 또 2018년도 광천동장 때는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정리한 ‘광천동 연가’ 책자 제작, ’광주천 해바라기 가꾸기 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웰로우 광천’의 모태를 만들었고 주민들로부터 많은 호응과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직자로서의 ‘청렴성’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되뇌면서 생활해 왔다. 1997년 8월부터 3년간 시청 감사담당관실에서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근무 당시 부패행위 공직자 징계에 관여했던 경험이 청렴한 공무원으로서 각오를 다지고 새롭게 정진할 수 있는 좋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됐다고 하겠다.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공직자로서 가장 큰 보람은 무사히 정년까지 근무를 마치고 퇴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공직기간 동안 풍암동장으로서 근무하면서 주민에게 봉사하고 마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의 목표다. 공직을 떠난 이후 “옆집 아저씨 같은, 친밀한 공무원!”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임철진 동장은 1991년 공채로 광주광역시에서 근무를 시작해 서구청 홍보실장, 광천동장, 일자리정책과장, 감사담당관 등 요직을 거쳤다. 2015년 국무총리 표창(모범공무원)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임 풍암동장은 페이스북(facebook) 등 다양한 SNS를 통해, 친지는 물론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업무 관련 사항부터 일상생활까지 날카로운 감각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표현해, 공사(公私) 간에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다. 불성무물(不誠無物)은 또한 무물불성(無物不誠)일 것이니, 임철진 동장의 성실한 자세는 풍암동의 복(福)이며 서구의 자랑이고 광주의 한 줄기 밝은 빛으로서 부족함이 없겠다. 동화책 교사인 부인(임은심, 57세)과 슬하에 1남 1녀. 종교는 기독교. 등산과 여행을 즐기고, 매일 1만보 이상 걷기와 탁구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 기획.연재
    2022-08-15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공주 무령왕릉 무령왕 반송
    1971년은 7월 초까지 이어진 장맛비가 자주 많이 내렸다. 이에 웅진백제(475∼538)의 왕릉급 무덤인 송산리 5호와 6호 고분의 벽화 훼손을 우려해 7월 5일 왕릉 뒤에 배수로를 냈다. 그때 괭이 끝에서 돌소리가 났다. 조심스레 캐보나 벽돌이었는데 6호분과 다른 무늬였다. 그 벽돌을 따라 파내려 가니 아치 모양의 입구가 나왔다. 새로운 무덤이었다. 6일 황급히 조사단을 꾸렸으나, 7일에 또 비가 내려 8일에야 발굴에 나섰다. 아침 일찍 발굴을 재개해 오후 4시 15분께 무덤문을 열었다. 이때 펑 소리와 함께 무덤에서 휜 연기가 나왔다. 그리고 곧 두 개의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이 백제 무령왕(461~523)과 왕비의 무덤임을 확인했고, 다음 날 오전 8시 무렵 벽돌(전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무덤의 유물을 수습했다. 이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고분으로 출토 유물만 124건 5천232점이며 국보가 12건 17점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문화의 정수이니 그저 박물관 한 채를 고스란히 얻어낸 셈이다. 또 무덤 주인과 조성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고대 왕릉이어서 역사학과 고고학 연구의 기준점이 되는 자료였다. 하지만 전문적 기술도 부족했고, 하루 만에 속전속결로 발굴을 끝낸 졸속 작업이었다. 1500년간 무령왕릉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 백제인들이 어떤 생각으로 무덤에 유물을 넣고 배치했는지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월드컵 연장전에서 터진 역전골처럼 환희와 전율이 느껴지는 세기의 발굴이었지만, 두고두고 무지, 무능, 아쉬움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문화재 착취에 혈안이 된 왜인과 그들에게 놀아난 도굴범의 손을 타지 않은 것만도 그저 하늘의 도움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무령왕 금제관식은 왕관의 꾸미개이다.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로 작은 구슬을 금실로 꼬아서 달았는데, 그 앞에서 숨만 크게 쉬어도 구슬들이 하늘하늘 움직인다. 절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으니, 천오백 년을 넘어, 우리 눈앞에 온 신비로움이다. 또 입에 붉은 연지를 칠한 석수인 진묘수는 사자나 기린의 모습으로 이마에 외뿔, 큰 눈과 코, 네 다리에 불꽃 날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진묘수 유물이자 유일하다. 무령왕은 백제 25대 왕으로 501부터 522년까지 제위에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24대 동성왕의 차남이다. 당시 백제 21대 왕은 개로왕이다. 웅진으로 천도한 22대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동생이다. 23대 삼근왕은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24대 동성왕은 개로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이다. 그런데 무령왕이 동성왕의 차남이라면 문제가 발생한다. 무령왕이 심근왕이나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했다. 개로왕이 아우 부여곤지를 왜국 사신으로 보낼 때, 자신의 아이를 밴 부인을 곤지의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 시가현 북쪽 섬 가카라노섬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차남이 아닌 배다른 형이다. 멸망한 백제의 기록은 철저히 파괴되고 지워졌으니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승자의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허접한 왜의 기록에 의존하자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지우개로 지워진 역사에 홀연히 나타난 무령왕릉은 신비이면서 역사를 꿰어맞추는 보물임이 틀림없다. 이 공주 무령왕릉 들머리에 반송 한 그루가 왕관 금제관식의 불꽃처럼 날개를 하늘로 펼치며 서 있다. 어찌 보면 진각수의 날개이니, 그 앞에 서니 역사와 기록의 소중함이 새삼스럽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8-10
  • “고종에 통렬하게 ‘을사늑약’ 책임 물어야”
    고종, 어전회의서 대신들에 떠넘겨이완용, 이지용·이근택 2배 받아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의 ‘임시 기밀비(機密費) 지불 잔액 반납의 건(1905년 12월 11일)’에는 황실과 대신들이 을사늑약 체결 전후하여 일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이 문서를 그대로 읽어보자. 문서번호 : 기밀 제253호     발신일 : 1905년 12월 11일발신자 : 임 공사(林 公使)    수신자 : 계 외무대신(桂 外務大臣)    제목  : 임시 기밀비(機密費) 지불 잔액 반납의 건지난달 4일 자 기밀 제119호로써 보호권 확립에 관한 조약체결 등을 위하여 무엇인가 비용을 필요로 하겠기에 기밀비 10만원을 송부하여 위의 목적에 지출하라는 것을 훈시(訓示)한 내객은 경승(敬承)하였습니다.따라서 신협약 체결 전에 있어서는 당장 대사(大使) 내한(來韓)에 즈음하여 궁중 내탕금이 궁핍 상태라는 것을 탐지했기 때문에 대사 접대용 비용에 충당하는 명의 아래 금 2만 원을 심상훈을 거쳐서 황제 수중에 납입시키고, 금 3000원은 오로지 폐하의 좌우에 있는 시종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구완희에게, 또 금 3000원은 이하영(법부대신)에게 급여한 외에, 나머지 2만 원은 모두 조인 후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등으로 하여금 선후책으로서 그 부하를 위무시킬 필요상 지급할 것을 조치했습니다. 또한 이후 참정 박제순 기타 한 두 대신에게 앞과 같은 목적으로서 지급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었기에 그 견적 1만5000원을 공제하고 잔액 금 3만9000원은 이에 반납 조치하였사오니 사수(査收)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별지 첨부하여 말씀 올립니다. [별지] 문서 제목 : 동건(同件) 기밀비 지출 내역    기(記)금 10만원 기밀금내지출(內支出)금  2만 원 11월 11일 무기명 예금증서로써 심상훈을 거쳐 궁중에금  3000원 11월 12일 구완희에게금  3000원 11월 16일 이하영에게금  5000원 11월 22일 이지용에게금  5000원 11월 22일 이근택에게금  1만 원  11월 22일 이완용에게금  1만 5000원 박제순 외 두 대신에게 지급해야 할 것계 금 6만 1000원차액금 3만 9000원(圓) 반납액(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 문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1 보호조약 1-3, (195) 임시 기밀비(機密費) 지불 잔액 반납의 건) 기밀비 10만 원은 현 시가로 환산하면 250억 원이다. 이 중에 일제는 11월 11일에 무기명 예금증서로써 2만원(25억 원)을 심상훈(황실 재산 담당관인 경리원경)을 거쳐 황실에 납입시켰다. 이에 대하여 박종인은 저서 『매국노 고종(2020년)』에서 고종이 2만 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기밀비 10만 원 중 2만 원을 황제 쪽에 보냈다고 하지만, 황제가 직접 받았다는 말은 없다. 고종이 뇌물을 받았다면 어찌 헤이그 평화회의 특사 파견이며, 강제 퇴위의 역사가 있었겠는가”며 고종을 비호했다. (이태진, ‘매국노 고종’은 일제의 역사 왜곡이다, 서울신문, 2021.3.9.)하지만 고종이 뇌물을 직접 받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황실이 무기명 예금 증서로 2만 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구완희는 조약체결 전인 11월 12일에, 법무대신 이하영은 11월16일에 각각 3000원을 받았다. 구완희는 1904년 3월 28일에 북진하는 일본 군대 접대관이었고, 뇌물을 받을 당시는 육군참령이었다. 법부대신 이하영은 전임 외부대신이었고 주일공사를 한 친일파였다.  한편 을사늑약 체결 이후인 11월 22일에 5000원(6억 2500만원)을 받은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에도 일본으로부터 1만 원을 받은 친일파였고, 군부대신 이근택 역시 친일파였다. 그런데 이완용은 이지용과 이근택이 받은 5000원의 두 배인 1만 원(12억 5000만원)을 받았다. 그만큼 일본이 이완용의 공로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아울러 일본은 12월 11일에 외부대신 박제순 외 두 대신에게 주기 위해 1만 5000원을 남겼다. 이 두 대신이 누구일까? 을사오적인 권중현은 포함될 것 같고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일까? 탁지부 대신 민영기일까, 궁내부 대신 이재극일까?아무튼 황실과 이완용 등은 일제로부터 뇌물을 받고 나라를 팔아 넘겼으니 매국노(賣國奴)임이 틀림없다.  # 울사오적 논쟁  이제 을사늑약에 관한 두 가지 논쟁, 즉 을사오적 논쟁과 고종책임론 논쟁을 정리한다.  을사늑약은 ‘을사오적(박제순·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 때문에 체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을사늑약은 ‘을사5적’에게만 전적인 책임이 있는가? 이완용 등 5명은 1905년 12월 16일의 상소에서 “신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죄를 정부에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어찌 꼭 5인만이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말했다.   윤덕한도 저서 『이완용 평전』에서 을사늑약의 책임을 5명에게만 묻는 것은 이성적인 역사 인식의 결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대신들과 함께 문안 수정에 참여하여 사실상 조약에 동의했다. 법무대신 이하영은 이토에게 ‘찬성’ 판정을 받았고, 친일 주구 노릇을 하였다. 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은 고종과 이토 사이를 오가며 어느 대신 못지않게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 한 채 오로지 5적에게만 묻는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역사 인식이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길, 2012, p 222-226)  강동진도 ‘을사 5적’이 아니라 법부대신 이하영과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포함시켜 ‘을사 7적’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4, p 158)여기에서 꼭 밝혀야 할 것이 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망했을 때 일제는 76인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당연히 이완용· 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이하영·이재극 소위 ‘을사 7적’이 포함되었다. 아울러 민영기와 한규설도 포함되었는데, 한규설만 작위를 반납했다.  # 고종 책임론 논쟁 을사오적 논쟁과 함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종 책임론이다. 고종은 11월 18일 오전 1시 궁내부 대신 이재극으로부터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정부 대신들의 무능과 무기력함을 한탄하면서, 배일주의자 박용화 · 이근상마저 입궐하지 않는 사실을 개탄했다고 한다. (서영희 지음, 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2012, p 87)또한 「대한매일신보」등 여러 신문들도 ‘고종은 끝까지 반대했는데 ‘을사 5적’이 일본에 굴복해 멋대로 조약을 체결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리하여 ‘고종은 을사조약에 반대했다’는 신화가 창조되어 그것이 오늘 날까지도 마치 역사적 진실인 양 굳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P 222-223)그렇다면 고종은 조약 체결에 전혀 책임이 없는가? 이에 대하여 윤덕한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을사조약의 최고 책임자가 고종이며 이 조약과 관련해 가장 비난받아 할 당사자가 고종이라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 증언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종이 이토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지 못하고 내각에 책임을 떠넘긴 데 이어 나중에는 ‘협의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내각 대신들로 하여금 선택의 여지를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실 전제군주 국가에서 황제의 명령은 최종적인 것이며, 따라서 황제가 협의해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는데 대신들이 끝까지 이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토와 하야시는 고종의 이 지시를 최대의 무기로 삼아 대신들을 내리 눌렀던 것이다. 고종이 반대하고 비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은 ‘애국적’일지 모르지만 진실은 아니다. 그리고 진실이 아닌 것에서 진정한 애국심이 솟을 수는 없다. 나라의 체면을 생각해 무능한 군주를 감싸는 억지 주장을 펴기보다는 통렬하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자세가 보다 애국적인 것이 아닐까. (윤덕한, 이완용 평전, p 223- 224)한편 송우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고종 황제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전 회의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보호조약을 강요하는 이토에게 고종은 ‘정부 대신들이 의논하여 조치하라’는 말로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고종은 이토에게 오히려 길을 터준 셈이었다.  국제 여론 상 후유증이 클 ‘황제 협박’보다는 ‘대신 협박’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던 이토는 고종의 책임 회피를 반기며, 정부 대신들을 온갖 흉악한 술수를 동원하여 협박했다. 협력에는 상당한 보상이 약속되었고, 협력하지 않은 대신에게는 멸문의 협박까지 있었다.”(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2007, p 153-154 )이처럼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에 대하여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고, 조약 체결에 참석한 대신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 기획.연재
    2022-08-09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구례 매천사 황현 오동나무
      황현(1855∼1910)은 조선 말기의 선비이다. 본관은 장수, 자는 운경. 호는 매천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과거 응시차 상경한 서울에서 강위,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우했고, 이들을 한말 한문학의 4대 문장가라 부른다. 무엇보다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에 왜인이 국권을 침탈하자 자결했다. ‘나라가 망한 날 선비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나 위로는 한결같은 마음의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 읽은 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뿐이다. 아득히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참으로 통쾌함을 깨달으니 너희는 너무 슬퍼하지 말지어다.’ 이때 황현이 동생에게 남긴 ‘유자제서’의 일부이다. 또 다음은 황현이 남긴 ‘절명시’ 4수의 일부이다. ‘고국강산 찌그러져 짐승도 슬피 울고 나는 새도 슬피우니/ 무궁화 이 강산은 가라앉아 사라지고/ 세월의 등잔불 아래 천고의 한 덮어두니/ 참다운 지식인 되어 인간답기 어렵도다.’ 어디 생목숨을 끊기가 쉬울까? 이날 황현은 아편 약사발을 세 번이나 입술에서 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세상 가장 고결한 죽음이었다. 황현이 오동나무 아래에서 썼다는 오하기문은 개항 무렵부터 1907년 12월까지 편년체를 중심으로 엮은 사서이다. ‘아! 재앙과 변괴가 일어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국가정치의 순탄함이나 혼란에는 나름대로 주어진 운수가 있고 일이 꼬이거나 풀리는 것은 순환되기 마련이다. 이런 일들은 당시의 운세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결정된 것이라 바꿀 수는 없다고 하나 더러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의 잘잘못에 기인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오랫동안 누적된 추세로 그렇게 된 것이지 일조일석에 조성된 것은 아니다.’ 이는 오하기문 머리글 중 일부이고 이를 더 보완한 7권의 책이 매천야록이다. 황현이 오하기문을 쓴 오동나무가 구례 매천사 뜨락 담장 가에 있다. 이 오동나무는 벽오동이다. 오동과 벽오동은 이름이 비슷하나 오동은 현삼과, 벽오동은 벽오동과로 다른 나무이다. ‘장자’는 봉황이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예천은 태평성대에 솟는 단물샘이니 그곳은 낙원이다. 오동은 목재가 희어 백동이라 하고, 벽오동은 줄기가 푸르러 청동이라 한다. ‘오(梧)’는 벽오동, ‘동(桐)’은 오동나무이니 봉황이 깃드는 오동은 모두 벽오동이다. 또 한 해에 한 마디씩 자라는 벽오동은 평생 푸르러 불로의 상징이다. 여름 시작 무렵 작은 꽃무리를 가지 끝에 피워 가을이면 다소곳이 오므린 잎가에 오순도순 매달린 완두콩 같은 열매는 먹을 만하다. 황현은 서울에서 사귄 세 살 아래 벗 정만조가 진도로 유배당하자, 구례에서 먼 길을 걸었다. ‘물속의 달 같은 깨끗한 님’이라 칭찬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시까지 남겼다. 오하기문에 나오는 그 정만조는 명문가에 태어난 개화사상의 지식인이다. 당시 여흥 민씨 일파와 맞서다가 진도에서 10년 넘게 유배를 살았다. 1907년 고종의 퇴위 뒤 사면 되어 관계로 복귀했으나, 변절하여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대표적인 친일매국노, 사학자가 되었다. 매천사 벽오동의 봉황이었을 황현이 오하기문을 다시 쓴다면 정만조를 어떻게 평가할까? 아직도 푸르른 매천사 오동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오하기문은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보며 지배세력의 잘못을 질타했던 지난날의 역사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직시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7-28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함양 학사루 김종직 목아 느티나무
    함양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북쪽 고을이다.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칠선계곡 자락이 내려섰다 올라선 뒤 다시 내려서며 만든 들녘이니, 산수풍광은 한마디로 빼어남이다. 가야의 졸마국이었고 신라 초기에 속함군, 경덕왕 때 천령군(天嶺郡)이라 했다. 신라 말에 최치원이 이곳 군수로 부임했다. 당시 고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위천(渭川)은 적은 비에도 넘쳤다, 최치원은 위천에 둑을 쌓아 물길을 잡고 둑 아래에 나무를 심었다. 관에서 쌓은 둑의 숲이니 대관림이고, 그 뒤 대홍수에 둑을 다시 쌓아 지금의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졌다. 중국 진국의 고도인 시안시의 옛 이름 셴양과 여기 함양, 또 셴양의 위수와 함양의 위천은 한자어까지 같다. 이 함양 이름은 고려 8대 왕인 현종 9년(1018)에 얻었다. 지리산이 사람의 가슴이라면 함양은 그 머리이고 산청과 남원은 두 팔, 하동과 구례는 두 발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수도였던 셴양과 한반도 남쪽의 지리산 천왕봉의 머리 고을 함양의 이름이 같은 건 당연함이 아닌가 싶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이다. 500여 척에 탄 왜구가 진포에서 최무선의 화포에 배를 잃고 금강 줄기를 따라 이동하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이에 삼도원수 배극렴이 함양의 사근내역에서 왜구와 사투를 벌였으나, 원수 박수경, 배언 및 고려군 500명이 전사하였다. 이때 왜구의 장수는 15~6세의 아기발도였다. 이 아기발도는 우리 말의 ‘아기’와 몽골어 ‘바토르(용맹한 자)’의 한자 음차표기 ‘발도’가 합쳐진 것이니, 왜구이지만 이름을 남긴 용장이다. 하지만 남원까지 진출했다가 인월역과 황산에서 1만여 왜구는 몰살당하고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이 전투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당시 이성계는 왜구이지만 용맹무쌍한 아기발도를 생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군의 피해를 우려한 이지란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내가 화살로 아기발도의 투구를 벗길 테니, 네가 죽여라’며 두 발의 화살로 투구를 벗겼고, 이지란의 화살은 아기발도의 목숨을 앗았다. 대관림의 상림과 하림이 있는 함양에는 깊은 역사와 함께 그 역사를 간직한 우람한 나무도 많다. 그중 하나가 여섯 아름의 학사루 앞의 느티나무이다. 조선 9대왕 성종 1년인 1470년 김종직이 이곳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4년여 머무를 때다. 마흔이 넘어 얻은 다섯 살배기 어린 아들 목아(木兒)를 홍역으로 잃었다. 김종직은 그 슬픔을 달래며 아들 이름을 생각하며 천년을 삶을 살아갈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500년 넘어 우리가 그 나무를 보게 된 연유이다. 아들을 잃고 나무를 심을 당시의 애절한 마음이 김종직의 ‘점필재집’에 있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김종직은 이 느티나무를 최치원이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는 함양군청 앞 누각 학사로 앞에 심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동헌이 헐리고 학교가 되었기에 지금은 함양초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다. 아들을 잃고 나무를 심어 아들을 삼은 김종직의 슬픔과 염원의 나무인지라, 날마다 자라는, 또 언제나 아이들이 있을 학교와의 인연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김종직이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현판을 떼어 소각한 사건은 훗날 무오사화의 단초가 되었다. 역사의 흐름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으니, 함양에 가거든 학사루 건너 김종직의 목아 느티나무를 경배하듯 꼭 보고 올 일이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7-21
  • “시국을 보건대 어쩔 수 없어서” 파렴치한 변명
    ‘종사는 안전’ 궤변 일색  고종은 을사오적 비호1905년 12월 16일에 을사오적(학부대신 이완용,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이 을사늑약을 조인한 전후 사정을 아뢰고 사직을 청했다.     상소 첫머리이다.  “신들이 성조(聖朝)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신들이 버젓이 의정부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어찌할 수 없어서입니다.”‘시국을 보건대 어쩔 수 없어서’라고 변명하다니. 참으로 파렴치하다.이어서 을사오적은 상소를 올린 민영환, 조병세, 이상설 등이 조약의 주지(主旨)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올린 상소는 흐리멍덩하게 하는 말이라고 싸잡아 비판했다.   상소는 이어진다. “새 조약의 주지(主旨)로 말하면,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宗社)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궤변 일색이다. 외교권이 전당포에 잠깐 잡혔다가 돈 생기면 도로 찾는 물건이란 말인가?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1907년에 군대 해산, 1909년 사법권 상실, 1910년에는 일제에 강점되었다.  이어서 오적들은 을사늑약은 1904년 2월 23일의 한일의정서와 8월의 한일신협약의 연장선일 뿐이라면서 그때 쟁집한 사람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과정을 살펴보면 이들의 주장은 최악의 궤변이다. 외부대신이지용 등은 로비 자금 1만 원(지금 돈 13억 원)이 필요하다고 일본 측에 요구하여 돈까지 받았다. 그런데 이용익은 2월 22일에 이지용을 찾아가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면 대역죄인으로 처벌 받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러자 일본은 2월 22일에 이용익을 전격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했다. 그럼에도 이지용은 2월 23일에 도주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하야시 공사는 이를 막고 ‘한일의정서’ 조인에 성공했다. (서영희 지음, 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2012, p 29-36) 이어서 이완용 등은 ‘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자세히 상소한다. 16일 손탁호텔에서의 이토와 대화, 17일 오전 일본 대사관에서 일본대사와 연석회의, 그리고 오후에 중명전에서 고종과 대신들의 회의를 자세히 적었다. 여기에서 고종과 대신들의 회의 내용을 살펴보자. 고종 : 우선 늦추는 것이 좋겠다. 이완용 : 만일 허락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약관(約款) 가운데도 첨삭하거나 개정할 만한 매우 중대한 사항이 있으니, 잘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고종 : 약관의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바랄 수도 있을 듯하니 학부대신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권중현 : 지금 학부대신이 말한 것은 꼭 허락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한 번 질문할 말을 만들어서 여지를 준비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고종 : 그렇다면 조약 초고(草稿)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고치겠는가? 권중현 : 신이 외부에서 얻어 본 일본 황제의 친서 부본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약관은 나라의 체통에 크게 관련 되지만 여기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도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것도 응당 따로 한 조목을 만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고종 : 과연 옳다. 농상공부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에 여덟 대신이 똑같이 아뢰었다. “이상 아뢴 것은 실로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물러나가 일본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마디 말로 물리치겠습니다.” 고종 :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고종의 말은 ‘완전 거절이 아닌 협상을 잘하라.’는 의미로 들렸다.      이어서 오적들은 일본 공사가 참정대신과 외부대신을 체차하겠다는 일을 자세히 아뢴다. 조금 뒤에 이토 히로부미 대사가 군사령관 하세가와와 함께 급히 도착하였다. 일본 공사가 이토에게 전후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이토는 궁내부 대신 이재극에게 폐하의 접견을 여러 번이나 요구하였다. 이재극이 돌아와서 ‘짐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를 전하였다.  이윽고 상소는 이토가 사회를 보면서 찬반을 묻는 진풍경을 자세히 설명한다. 이토는 참정대신 한규설은 반대, 외부대신은 찬성,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반대라고 정리하였다. 그런데 이완용이 찬성 발언을 한 뒤에 권중현·이근택·이지용은 대체로 학부대신과 같은 뜻이라고 말하여 이토는 찬성 6명으로 정리했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2012, p 218-219)이어서 이완용등의 상소는 조약 개정 과정을 자세히 아뢴다. “그때 양편에 분분하던 의견이 조금 진정되어 이토 대사가 직접 붓을 들고 신들이 말하는 대로 조약 초고를 개정하고 곧 폐하께 바쳐서 보고하도록 하여 모두 통촉을 받아 결국 조인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의 사실은 단지 이것뿐입니다.”이렇게 이완용 등은 자기 변명하였다.  “그런즉 신들이 때 어찌 감히 스스로 변명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 조약에 대한 죄를 정부에 돌린다면 8인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어찌 꼭 5인만이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한규설로 말하면 수석 대신이었습니다.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다만 죄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도모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 반대한다고 말한 대신들도 처음에는 반대한다고 말하였지만 끝내는 개정하는 일에 진력(盡力)하였으니, 신들과 별로 경중의 구별이 없습니다.그런데 무슨 연유로 걸핏하면 5인만을 들어 실제가 없는 죄명을 씌어 신들로 하여금 천지간에 몸 둘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까?” 이완용 등 5인은 자신들만 역적이 된 것이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날조라는 것이다. 상소는 계속된다.   “무릇 위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관대히 용서하고 신들에게 더 죄주지 않았고,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뢸 때에는 사임하지 말라고  칙유하셨습니다.” 그랬다. 고종은 참정대신 한규설을 면직시켰지만, 법부대신 이하영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사직 상소는 반려했다. 11월 22일에 고종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임시로 의정대신 서리(署理)로 임명하였고, 11월 28일에는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승진시켰다. 12월 8일에 고종은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의정부 의정 대신 서리를 명하였고, 12월 13일에는 외부대신 사무 서리로 임명했다. 고종은 문책해야 할 을사오적을 중용한 것이다.  이제 장문(長文)의 상소 마지막이다.  “이는 진실로 신들의 몸이 진토가 되어도 기어이 보답하여야 할 기회이건만 저 무리들은 폐하께서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날로 더욱 떠들어대면서 치안에 해를 주고, 정령(政令)이 지체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입니까?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의 체통을 깊이 진념하시고 속히 법사(法司)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이런 혼란스런 무리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터무니 없는 말로 죄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모두 형률을 적용하여 징계함으로써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얼마나 다행한 것이겠습니까?”이완용 등은 기고만장하다. 고종의 비호를 믿고 그들을 탄핵한 이들을 우습게 보고 있다. 이에 고종이 비답하였다. “나라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하라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마는, 혹 부득이한 상황으로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여론이 당사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또한 해명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오직 다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될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들은 각기 한층 더 노력함으로써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고종실록 1905년 12월 16일) 고종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 을사오적을 비호하다니. 이게 고종의 이중성이었다.   
    • 기획.연재
    2022-07-20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단양 청풍호 두향매
      초파일 명관분매(初八日 命灌盆梅), 그러니까 ‘12월 8일 아침,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지시한 말이다. 여기서 매화는 ‘두향’, 지시한 사람은 이황(1501∼1570)이며 죽기 전의 유언이기도 하다. 단양의 관기였던 두향과 조선의 성리학자인 이황의 사랑 얘기는 애틋하나, 당시와 오늘의 신분이나 신념이 다르니 말하기에 조심스럽다.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와 신분, 신념을 뛰어넘는 황진이와 서화담, 매창과 유희경, 자야와 백석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두향과 이황이 한 치도 다를 리 없다. 이황이 27살 때이다. 두 아들을 낳은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3년이 되던 해이다. 유배 중이던 권질의 부탁으로 그의 딸을 후처로 맞았다. 그러나 집안 몰락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정신이 조금 온전치 못했다. 어느 날 제사에 제를 올리기도 전에 그녀가 치마에 배를 감추자 형수가 질책했다. 이황은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손자며느리의 행동을 노엽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라며 아내를 감싸주고 제사를 마친 뒤, 배를 손수 깎아 아내에게 주었다. 그 아내 권씨는 이황과 혼인한 지 16년 뒤 출산 중 난산으로 사망하였고 태어난 아이도 며칠 후 죽고 말았다. 이에 전처의 두 아들은 이황의 당부대로 권씨 부인의 묘에서 시묘살이를 했고, 자신도 묘 근처에 암자를 짓고 한 해 동안 기거하였다. 또 이황은 첫째 부인과 사별한 직후 들인 첩실도 있었다. 그녀는 장애가 있는 권씨를 대신해 실질적인 안살림을 잘 이끌었다. 이황은 이 첩실이 죽자, 서자인 이적을 호적에 올리고, 행여나 그 후손들이 적서 차별을 받을까 염려하여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하지 못하게 금하였다. 이후로 지금까지 퇴계 가문의 족보에는 적서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 이황이 아내의 시묘를 마친 다음 해인 1548년 1월이다. 47세의 이황은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당시 단양은 3년째 한발로 백성들은 궁핍에 시달리고, 이황 자신도 둘째 아들 이채가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죽어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때 만난 19살의 단양의 관기 두향이 매화분을 가져와 퇴계를 위로했다. 두향은 매화꽃 같은 청초함에 글솜씨며 거문고 솜씨도 빼어났다, 그러나 형이 충청감사가 되자, 이황은 자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전임 전날 밤 이황은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라 두향에게 주고, 두향은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로 받았다. 이별은 까마귀 없는 은하수보다 길어, 이황은 1570년 6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향과 만나지 못했다. 두향은 남한강가에서, 이황은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하늘을 오가는 구름으로 마음만 주고받았다. 그래도 풍기군수 시절 이황이 두향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또 두향이 도산서원의 이황에게 난초를 보내자, 이황은 자신이 마시는 우물물을 길어서 보냈다. 이 우물물은 두향이 이황의 건강을 비는 새벽 정화수가 되어 오래 보전되었다. 어느 날, 이 정화수가 핏빛으로 변하자, 두향은 소복 차림으로 단양에서 도산서원까지 나흘을 걸어 문상했고, 어느 해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그 남한강을 내려다보는 강선대 아래 두향이 누워있고, 그 무덤을 바라보는 곳에 이황과 두향의 기념공원이 있다. 여기에 이제 어린 매화나무가 있고, 소나무 두 그루가 호위병처럼 서서 두향묘를 바라본다. 청풍호가 되어 잠시 흐름을 쉬고 있는 강선대 아래 남한강은 그저 아무 말이 없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7-1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함양 천년 상림 연리목
      칠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칠 년 가뭄에 비 내리지 않을 때 없고, 석 달 장마에 해 안 뜨는 날 없다는 말도 있다. 칠 년 가뭄이건, 석 달 장마이건, 하늘이 무너져도 살 수 있으니 어떻거나 질긴 목숨이라는 말이다. 옛 제왕의 덕목 중 하나가 치산치수이다. 농본시대이기도 했지만,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으니, 어떻게든 먹고 사는 것의 첫 번째는 산과 물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산지와 하천이 가파르고 길이가 짧다. 비가 오면 상류 지역의 흙과 돌이 수해에 미치는 큰 원인이 된다. 함양의 대관림은 원시림이 아니다. 지금부터 1,100년 전 고을을 관통하는 위천에 둑을 쌓고 심은 우리나라의 첫 인공림이다. 둑을 따라 13만㎡의 평지에 120여 종 2만여 그루 낙엽활엽수가 사는데, 지금은 상림과 하림공원으로 부른다. 관에서 쌓아 대관림이라 했던 이 상림과 하림은 신라말의 학자 최치원의 치적이기도 하다. 경문왕 8년(868) 12살의 최치원은 영암 구림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 아버지 견일은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했고, 최치원은 유학 7년만인 874년 18세 때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885년 29세에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많은 글을 썼으니, 황소의 난 때 쓴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최치원이 귀국하자 헌강왕은 그를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하였고 이어서 890년의 대산군(전북 태인)에 이어 천령군(경남 함양), 부성군(충남 서산)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문란한 정치에 실망한 최치원은 895년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때의 기록이 해인사의 한 공양탑에 있으니 ‘당토의 병(兵), 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굶어 죽고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다’가 그것이다. 최치원이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의하면 908년 말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고려 왕건에게 보낸 ‘계림은 시드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이라는 편지글이 있어, 새로운 나라 고려가 일어남을 미리 내다보았음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함양 백성들과 함께 조성한 이곳 상림에는 뱀이나 개미가 없다고 한다. 그 까닭은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 함양에 있을 때다. 최치원은 홀어머니께 아침저녁은 물론 외출하거나 돌아와서도 반드시 문안을 올렸다. 어느 날, 어머니가 혼자 상림에 산책을 나갔다가 뱀을 보고 놀랐다. 이 말을 듣고 최치원은 숲으로 달려가 ‘상림의 모든 해충은 없어져라.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마라’고 외쳤다. 그 후로 모든 해충이 사라졌으니,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과 땅, 미물까지도 감동했음이다.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 달리 생긴 게 아닐 것이다. 또, 대관림에 나무를 심을 때 쓰던 최치원의 금호미를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곳 상림을 찾게 되면 그 금호미를 꼭 찾아볼 일이다. 단 마음씨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 최치원이 마음씨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도록 해놨기 때문이다. 또, 여기 상림 들머리에 개서어나무와 느티나무의 연리목이 있다. 연리목은 예부터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왔으니, 한 번쯤 이곳 상림의 연리목 앞에서 누군가와 손을 꼭 잡아볼 일이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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