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6-3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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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완도 신지 이광사 소나무
    명사십리 신지도는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다. 지금은 연도교가 놓이고 연륙이 되었지만, 신지면 대곡70번길 33은 조선의 큰 서예가 이광사, 또 조선 후기의 문신 목내선, 시인 이세보, 개화사상가 지석영 등이 귀양을 산 외롭고 쓸쓸한 유배지 섬이었다. 본관이 전주인 이광사(1705~1777)는 조선 제2대 정종의 서얼 왕자인 덕천군 이후생의 후손이다. 실학의 사상적 토대였던 양명학자로 강화도에서 학문을 이었던 강화학파이다. 이들을 또 육진팔광(六眞八匡)이라 한다. 경종이 즉위하여 집권세력인 소론은 노론을 숙청했다. 경종이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영조가 왕이 되었고 이번엔 집권세력인 노론이 소론을 숙청했다. 이때 소론으로 이조참판이던 이진유는 추자도로 유배되었다가 의금부로 압송되어 사약을 마셨다. 이에 이진유의 후손들이 강화도로 들어가 학문에만 힘썼는데, 이들을 강화학파라고 한다. 육진팔광은 육진과 팔광의 합친 말인데 육진은 이진유와 같은 진(眞) 자 항렬로 이진순, 이진수 등 6명이다. 팔광은 아래 항렬인 광(匡) 자로 이광세, 이광보, 이광사 등 8명이다. 그렇게 이들 이진유 후손들이 강화도에서 6대 250여 년 동안 강화학파를 계승하니, 이를 육대계승이라 한다. 1대 이광사, 2대 이긍익, 6대 이건창 등 십수 명의 선비가 그들이다. 이광사가 19세 때인 영조 1년(1724)이다. 아버지 이진검이 전라도 강진의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이광사는 강화도에서 학문과 글씨를 익혀 자신의 호를 따라 원교체라고도 하는 동국진체를 완성했다. 이 동국진체는 중국 서체를 뛰어넘어 넘치거나 기울지 않으며 힘이 있으니, 한마디로 수려하고 웅혼함이 넘친다. 영조 31년(1755)이다. 나주 객사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글을 역시 영조 1년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이배된 윤지가 붙였다. 이 일로 이광사는 1755년 함경북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말에 부인 문화 류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유배지에서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1762년 전남 신지도로 이배되었으며, 72세 때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광사는 죽은 이듬해인 1778년 선조들이 묻혀있는 경기도 장단 송남 거창지에 아내 류씨와 함께 묻혔다. 하지만 묘역이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의 수풀 속에 있다. 이광사의 글씨는 대흥사의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지리산 ‘천은사’, 고창 ‘선운사’, 김제 ‘금산사’의 현판에서 볼 수 있다. 이광사 글씨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귀양 길에 초의선사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친 게 원교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떼게 했다. 하지만 9년 뒤 서울로 가며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아달라’고 했다. 또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은 빈곤 속에서도 우리나라 야사 모음집 연려실기술을 집필했다. 연려실은 한나라 유항이 글을 정리할 때 신선이 명아주 지팡이를 태워 방을 밝힌 것에서 유래한다. 밤이면 바느질도 못 하는 순이 엄마 방에 달아준 달처럼, 기름 살 돈도 넉넉지 않았던 이광사는 달 대신 이 글씨를 써주며 아들을 격려했다. 15년간 이광사가 머물렀던 신지도의 집에서 바다가 보인다. 그 푸른 바다를 가리는 마을 앞 황토 언덕의 붉은색이 싫어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광사가 심은 3백여 살의 이 푸른 소나무가 이제 이광사의 적거지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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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30
  • 주성식의 어른 왈/국회 해산
    <주성식 선임기자>   이 사회의 여러 폐단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는 데 합의하는 것부터 어렵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국회(의원)일 것이다. 그것(들)은 창조(자기 권리)와 파괴(국정 방해)를 제멋대로 한다. 창조주마저 선망할 특권이요, 신(神)마저 격노할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국회에 똬리를 튼 것들의 패악(悖惡)이 나라의 기틀을 위태롭게 할 지경인 만큼, 현 상황을 살필 필요가 명백하고 긴급하다. 2년 전, 21대 총선을 취소하거나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하는 때였고, 사회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임박한 각급 선거(실시)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능과 불법으로 인한 총체적 파국에 빠져 있었던 집권 세력은 선거를 강행했다. 아무런 선거 대책도 내놓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상황을 수습할 의욕조차 없는 것 같았는데도 말이다.  그 때 코로나19가 등장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으로 이끌어줄 ‘구원의 여신(女神)’이 품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 뒤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정부가 ‘K방역’의 장점과 성과를 일방적으로 홍보하면, 일부 해외 언론(광고회사!)이 보도하고, 그것을 객관적 수치 등 최소한의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국내 언론이 확대 재생산(도배)해 줬다. 방역 등과 관련해 정부(정책과 실적)에 의문을 표시하기만 해도 ‘민족 반역자’에 ‘매국노’로 몰렸다. 정부가 적극 대행(!)해주는 집권당에 비해, 야당의 선거운동은 걸핏하면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발목이 잡혔다. ‘어린애 손목 비틀기’가 이보다 쉽고 즐겁겠는가! 21대 총선이 부정선거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시간은 또 얼마나 걸리겠는가?  그러나 복잡할 것 없다. 재외국민 등 유권자 가운데 투표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만큼 참정권 제한이 확실하다. 따라서 21대 총선은 원인무효이고, 현 국회는 해산해야 맞다.   가장 먼저 국회(의원)가 환영할 일이다. 진영(陣營) 가릴 것 없이, 파렴치한 모리배(집단)들이 작당(作黨)해 권력을 찬탈(簒奪)했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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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태백 구문소 백룡 소나무
      태백은 석탄의 고을이다. 태백산 들머리에 ‘태백 석탄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 가면 ‘1950년대 광부 아낙네들은 한 달에 한 번 배급 받는 백미를 늘려 먹으려고 잡곡, 밀가루 등과 바꾸었고, 장바구니에 담아 온 돼지고기 한 근을 아이들 몰래 남편 밥상에만 올려놓았다’는 옛 탄광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또 1960년대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인근 탄광의 경석장에서 땔감으로 괴탄과 갱목을 한 짐씩 주워다 놓은 뒤, 아버지가 가져다준 쇠구슬로 구슬치기를 하거나, 비석치기, 고무줄놀이하며 놀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산이 개발되기 전 태백에는 화전민이 너와집을 짓고 살았다. 초목을 불태운 거름으로 산밭을 일구어 조, 메밀, 감자, 옥수수, 콩, 수수를 심어 삶을 이었고, 1930년대에 일인이 탄광을 개발하자 광부가 되거나, 정착영농을 하게 되었다. 또 고랭지 채소로 부농을 꿈꾸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 험준한 산간인지라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은 화장하여 그 위에 돌무지를 쌓고 시루를 덮은 뒤 물레 가락을 꽃아 창귀를 가두어 호환을 예방하는 호식장을 치렀고, 이 무덤을 호식총이라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태백 용연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동굴이다. 굴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아 800m이며, 약 3억만 년 전에서 1억 5000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 바닥에서 올라온 석순이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또 임진왜란에 의병들의 모임터였으며, 어려운 시기의 피난처였다고 한다. 태백은 물의 고을이다. 태백시 한가운데의 못 황지에서 솟구친 물은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가고, 금대봉 아래 검룡소에서 시작된 물은 한강이 되어 서해로 간다. 태백시와 삼척시 사이의 백병산 흰늪에서 솟구친 물은 오십천이 되어 동해로 간다. 또 여기 삼수령은 한 발자국 사이로 빗물이 한강, 낙동강, 오십천 등 한반도 세 바다의 물로 나뉘니, 석별령이기도 하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에는 욕심 많은 황부자가 노승에게 시주 대신 두엄을 퍼 주어 이에 집터가 꺼져 연못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하루 5천여 톤의 물이 샘솟는데, 이 물은 태백시 매봉산 천의봉 너덜샘에서 시작한 황지천이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나오는 거라고 한다. 이 황지를 나온 황지천이 남으로 내려오다가 태백시를 벗어나기 전에 바위산을 만난다. 그리고 산을 뚫으며 도강산맥을 만드니 바로 구문소이다. 약 5억만 년 전에는 황지천이 산의 암벽 때문에 말발굽처럼 구부러져 흘렀다. 그러다 1억만 년 전 마침내 바위를 뚫었다, 기다리고 있던 철암천과 곧장 만나 낙동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구문소에 ‘엄청나게 큰 싸리나무가 구멍을 뚫었다, 단군께 치산치수를 배운 중국 하나라의 하우씨가 바위를 칼로 찔러 뚫었다. 두 석벽을 사이로 동쪽 철암천의 청룡과 서쪽 황지천의 백룡이 낙동강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백룡이 석벽을 뚫어 청룡을 기습하여 이겼다’는 옛이야기가 있다. 구문소는 구멍이나 굴을 뜻하는 ‘구무’와 한자어 물웅덩이 ‘소’를 더한 말이다. 내가 산을 뚫어 흐르니 ‘천천(穿川)’이고 ‘뚜루내’이다. 또 물방울이 돌을 뚫으니 수적천석이다. 그렇게 물이 산을 넘었으니,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여기 삼형제가 모두 물에 빠져 죽어 용이 되었다는 구문소 삼형제 폭포의 전설은 슬프지만,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백룡 소나무는 늘푸름이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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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3
  • 대한제국, 우군 하나 없는 사면초가
    일본, 을사보호 조약 보도 금지 황성신문 “죽더라도 묵인 못해”1905년 11월 20일 월요일 새벽에 <황성신문>이 경성 곳곳에 배포되었다. 신문에는 주필이자 사장인 장지연(1864~1921)이 쓴 사설 ‘오늘이 목 놓아 통곡할 날이요!(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와 ‘오건조약 청체전말 五件條約 請締顚末(5조약 체결 전말)’이 함께 실렸다.  먼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을 읽어보자.“지난번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내한 했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자임하여 주선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많도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그러나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하였으니, 이 조약이 불성립함은 이토 후작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호라,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정부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거짓 위협에 겁먹고 머뭇대거나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하였다. 아, 4000년의 강토와 500년의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게 바치고 2000만 생령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심하게 꾸짖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參政) 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임에도 단지 ‘부(否)’자로 책임을 면하여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으려 했더란 말이냐.김청음(金淸陰:병자호란때 김상헌)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 : 병자호란 때 정온)처럼 할복하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000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000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여 멎어 버렸는가.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당초에 <황성신문>은 일본의 사전 검열로 발행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사령부는 군사와 관계가 있다는 핑계로 검열을 시작했다. 그후 마루야마가 경무 고문이 되자 일본 경찰 한 명을 전속 검열관으로 배치했으며, 조금이라도 일본인의 비위를 거스리면 금지시켰다. 을사보호조약은 보도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나라의 존망에 관계되는 중대한 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사실을 보도하지 않으면 교활한 일본인이 조약을 만장일치로 동의한 것으로 천하를 기만할 것이라면서, 죽을지언정 묵인할 수 없다면서 직접 사설을 썼다. 신문은 평소의 발행 부수 3000부를 1만 부로 늘려 인쇄했고, 배달부로 하여금 각 가정과 기관에 빠짐없이 배달시키고 자신들은 밤새 술을 마시며 경찰의 체포를 기다렸다.  (박은식 지음 · 김승일 옮김, 한국통사, 범우사, p 329-331)  20일 아침에 일본 경찰은 신문사를 급습해 곧바로 신문 회수 작업에 나섰다. 발행된 1만부 중 서울에서 800부를 회수하고, 지방으로 보낼 2288부를 압수했다. 또 일본 경찰은 <황성신문>이 경무청 검열도 받지 않고 신문을 발행한 것을 문제 삼아 장지연 등 10여 명을 체포하고 <황성신문>을 무기 정간하였다. 장지연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황성신문>은 1906년 2월에야 속간될 수 있었다. 한편 해가 뜨자마자 <황성신문>을 본 시민들은 울분과 허탈에 쌓였다. 대한제국이 하루아침에 외교권을 빼앗긴 일본의 보호국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이날 경성의 번화가 종로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맵게 몰아치는 11월 하순의 음산한 찬바람이 옷자락을 마구 흔드는데,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큰 소리로 신문을 읽던 중년 선비가 방금 읽은 <황성신문>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외쳤다. ‘그렇소! 오늘이야말로 목을 놓아 울 때요! 참으로 목 놓아 크게 울어야 할 때요! 그러나 운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소! 나는 결코 울지않으리다!’(중략) 무리 속에 있는 장년의 사내가 크게 대꾸했다. ‘그렇지요! 울어서 국사(國事)가 바로 잡힌다면야 오늘 우리 국민 그 누가 방성대곡을 아끼겠소.’ 그런데 말은 그리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송우혜, 스스로 운명 개척 못 한 대한제국, 조선일보, 2004년 10월 20일 :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p 172에서 재인용) #. 우군 하나 없는 대한제국  11월 21일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면에 「황성의무(皇城義務)」란 논설을 실었다.“어제 황성신문 기자가 일한신조약(日韓新條約)에 대하여 한황 폐하께서 이토 대사의 강청(强請)을 정대하고 명확하게 척절(斥絶 배척하고 거절)하신 칙어와 다수의 일본 병사가 궁궐에 난입하여 용탑(龍榻 임금이 앉고 눕는 침상)에 지척까지 다가와서 위협과 협박을 보인 행동과 이토대사가 참정대신(한규설)에게 공갈도 하고, 유세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강압수단과 한참정이 그 조약에 날인을 하지 않은 일과 각 대신이 군부(君父)를 속이고 저버리면서 국권을 상실한 죄를 사실에 입각하여 곧게 썼다.또 해당 조약이 황상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신 일이고, 참정대신이 날인하지 않은 것이니 반드시 무효하다는 설도 게재하고 해당 신문사 기자는 이 신문을 발포하면, 반드시 닥칠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서 일본의 검사도 받지 않고, 아침 일찍 전파하고는 앉아서 변을 기다렸다. 과연 일본 순사들이 와서 사장 장지연을 잡아가고 해당 신문을 정간시켰다.오호라! 황성 기자는 단지 해당 신문사의 의무를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로 대한 전국 사회 신민(臣民)의 대표가 되어 광명 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發顯)하리로다.방성대곡(放聲大哭)이라는 논설 한편에 이르러서는 모든 대한 신민이 된자가 통곡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세계 각국의 모든 공평한 마음과 정의를 가진 자는 모두 마땅히 그를 위해 분개하고 애통해하리니 오호라, 황성 기자의 붓은 가히 일월(日月) 그 빛을 다툴 것이로다. ”(기획 김홍식/해설 김성희/ 편집 김영선,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9, p 30-31)이어서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7일에는 호외를 발행해서 1면에는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과정을 상세히 보도했고, 2면에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옮겨 실었다.<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는데 주필에는 박은식이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인이 발행인인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이런 기사를 과감히 실었다.당시에 경성에는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에서 언급한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란 욕이 널리 유행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느 말이 유행인가?한편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한일보>는 이를 경거망동이라 했고, <제국신문>은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하리라.’는 논설을 실었다. 언론도 언론 나름이라는 말은 예부터 그랬던 모양이다.여기에서 을사늑약과 관련한 해외 언론 기사를 살펴보자.11월 20자 영국의 <더 타임즈>는 ‘일본과 한국, 협약에 이르다.’ 제하로 한국의 일본의 협약과정을 보도하면서, ‘한국은 앞으로 극동 지역의 태풍의 눈에서 벗어나 발전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영국은 1902년과 1905년에 일본과 2차에 걸친 영일 동맹을 체결한 동맹국으로서 러시아를 물리쳐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이었다.반면에 11월 22일 자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사라지는 한국’ 제하의 기사에서 ‘장차 대한제국의 황제는 영국 통치 아래의 인도 국왕의 지위로 전락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함께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데 걸림돌은 청나라나 러시아가 아니라 한국 내부’라고 보았다. 전반적으로 영국, 미국 등 열강들이 일본의 한국에서의 권리를 인정하는 입장이어서, 외국 신문들도 일본에 동조하거나 방관적인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대한제국은 우군 하나 없는 사면초가였다.
    • 기획.연재
    2022-06-21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강경 옥녀봉 사랑의 느티나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살만한 곳’을 ‘지리, 생리, 인심’이 좋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이는 지형, 토양, 기후, 물산, 일자리, 전통과 풍속, 또 사농공상의 사민이 평등한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택리지를 탈고한 곳이 강경의 팔괘정으로 송시열이 이황과 이이를 추모하고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또 스승 김장생이 학문을 펼친 곳이 이웃 임리정이니, 강경은 노론들의 본거지였다. 당시 소론 학자로 노론의 핍박을 받은 이중환이 여기에서 집필하고 발문까지 마무리한 것은 강경이 살만한 곳 중 으뜸이라는 것 외에 나아가서는 학문평등, 사민평등의 바람이고 실천이었으리라. 논산시 강경읍은 부여 백마강이 남진하다가 크게 휘돌아가며 서진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 강경포구에서 발걸음을 멎는 논산천과 강경천을 받아 금강이 된다. 논산시 채운면의 미내다리는 조선시대의 무지개 모양 돌다리로 강경천을 건너는 주요 길목이었다. 또 강경은 동해안의 함경남도 원산항과 더불어 서해의 수로와 육로를 잇는 ‘조선의 2대 포구’였고 대구장, 평양장과 함께 전국 3대 장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까지 100여 척의 배가 드나들며 금강이 생명 터인 사람들의 농산물과 전국 각지의 상품을 유통시켰다. 그리고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전기가 들어왔고, 매년 10월 중순에 강경발효젓갈축제가 열린다. 이곳 강경 포구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해발 44m의 야트막한 바위산 옥녀봉에는 해조문이 있다. 해조문은 강경포구를 이용하는 어민들에게 밀물과 썰물의 날짜와 시간 등 물의 현상을 알려주는 총 170자로 수록한 암각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유적이다. 이 옥녀봉의 옛 이름은 강경산이다.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딸이 이 산 아래 맑은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놀았다. 그러다 돌아갈 시간에 쫓겨 옷을 제대로 챙겨입지 못했고, 이를 본 옥황상제는 하늘을 비춰주는 거울을 던져주고 하늘 문을 닫아버렸다. 그 뒤 거울만 들여다보다가 죽은 옥황상제의 딸은 옥녀봉의 바위가 되고, 거울도 바위가 되었으니 용연대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백제가 역사를 승자에게 내준 것처럼 여기 강경과 논산은 전라북도 땅이 충청남도가 된 곳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선 1963년 11월 21일이다. 전라북도 금산군과 논산, 역시 강경이 있는 전라북도 익산시 황화면이 충청남도가 되었다. 과거 나라와 지역의 경계가 산줄기나 강이었고, 금강 물줄기 아래가 모두 호남이던 것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흐르는 곳이 어느 도에 속하는지 알 리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강경의 금강이다. 과거의 영광이나 화려함에 무슨 미련이 있을 거냐? 그 과거를 반추하되 다시 딛고 일어나는 게 희망이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것이다. 조선의 2대 포구, 3대 시장의 빛나는 이름은 이제 옛 이름이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흐르는 강경의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 질 무렵 옥녀봉에서 도도히 흘러가는 금강을 바라본다. 이곳의 석양 노을은 황홀하다는 표현밖에 할 말이 없다. 또 이 석양은 내일을 여는 여명이다. 그 황금빛 노을과 새벽을 여는 여명까지 품은 강경의 금강은 마치 한 가닥 비단 자락을 펼쳐놓은 것 같다. 강은 산을 넘지 않는다. 산을 오르지도 않는다. 비단 자락 금강은 그 지혜롭고 아름다운 생명의 강이다. 여기 옥녀봉의 두 아름 느티나무는 사랑나무라는 이름이 있다. 방향을 잘 잡아 쳐다보면 아래쪽 늘어진 가지 모습이 하트 모양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젖줄 금강을 수수만년 함께하니, 그 젖줄의 젖무덤을 어찌 사랑이라 하지 않을 소냐?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6-16
  • 주성식의 어른 왈/개들 판이 되면 말세
    <주성식 선임기자>   대선과 지선까지 끝나면 세상이 좀 조용해지려나 했던 사람들이 더 심하게 진저리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탄식은 고상한 편이다. 최고 권력자와 배우자에 대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용어와 표현을 동원한 비난, 기간까지 정해 임기를 못 채울 것이라는 악담, 취임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 공공연하게 나돌았다는 극단적 폭력 선동까지, 증오와 저주가 넘쳐난다. 나라인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이곳이 과연 인간들이 사는 곳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꼴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마음껏 휘두르던 권력을 뺏기자 쏟아내는 투정이요 앙탈이라고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패배와 원인을 찾고 괴멸의 책임자를 가리겠다며 벌이는 집안 싸움에 비하면 말이다.  마침내 전매특허인 양 써먹는 과일이 또 등장했다. 사과에 물렸을까, 이번에는 수박 타령이다. 동료를 지목해 ‘패배의 원흉’이라고 단죄하고, 겉과 속이 다르다며 물어뜯고 씹어대는 꼴이 야차며 아귀와 다를 바 없다. 곧 사상 검증이나 인체 해부라도 할 기세다.  그뿐인가. 만신창이로 쓰러진 패배자를 지도자로 내세우고, 국어책이나 도덕 교과서 읽는 듯한 철부지를 데려다 중책을 맡기고, 그나마 말다운 소리를 꺼내면 불에 덴 듯 놀라 헐뜯기 바쁘고, 결국 그 날(刃)에 베일 것조차 모른 채 힘에 겨운 칼을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참으로 끔찍한 것은 따로 있다. 이제 그들은 절대적 기반이라고 할 ‘광적(狂的) 지지자’들을, 삼킬지 뱉을지 쓸모를 저울질하는 중이다. 「개(혁의)딸」을 자처(自處)하며, 성별(性別)까지 제한하는 폐쇄성과 독점적 이기심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 집단이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그들과 지지자들의 유일한 힘이었던 ‘개 같은 미친 짓’이 통제의 굴레를 벗어날 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차츰 느끼고 있다. 구체적 양상은 모호하지만 닥칠 것은 확실한 멸문(滅門)을 짐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두렵지 않은가. 선인(先人)들은 ‘세상이 개판 되면 말세인 줄 알라’고 경고했다. 개를 아기라고 부르고 개의 아이라고 자처하는 것들이 횡행하니, 확실한 개판 아닌가? 그것들에 빌붙어 늘어진 청승을 바루고 오그라든 팔자를 펴려고 안간힘을 쓰는 꼴, 마침내 ‘그들만의 말세’가 이르렀다는 명백한 징조 아닌가 말이다.
    • 기획.연재
    2022-06-15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해남 수성송
      역사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을 성찰하며 볼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임진과 정유 7년의 왜란이 있기 전, 조선에는 이를 예고하는 몇 차례의 왜란이 있었다. 주군 ‘다이묘’가 거느리는 왜병이면서 생계형 흉악범 해적집단 왜구가 걸핏하면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1510년 삼포왜란(부산포, 진해 내이포, 울산 방어진 염포), 1544년 사랑진(통영)왜란, 1555년 을묘왜변(달량포), 1587년 여수 손죽도 등지에서의 대규모 약탈이 그것이다. 왜구는 부산과 불과 50Km인 대마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았다. 이 왜구들의 배 ‘세키부네’는 노 40개로 격군 40여 명, 조총병 20명, 전투병 10명 등 모두 70여 명이 탔다. 조선 수군 130여 명이 타는 판옥선보다 작아 천자, 지자, 현자, 황자 총통을 싣지 못했다. 그 대신 날렵하고 빠르게 움직여 조선의 남해와 서해를 제집 드나들 듯했다. 명종 10년인 1555년 5월이다. 왜선 60여 척에 탄 4000여 명의 왜구가 전라도 해남 북평의 달량포에 들어왔다. 전라병사 ‘원적’이 급히 달량포성으로 달려갔지만, 왜구의 위세에 놀란 대부분의 관군이 이미 성을 넘어 도망쳐버린 뒤였다. 이때 장흥 부사 한온은 가리포로 가던 중 원적을 만나 달량포성으로 들어왔다. 원적은 겁에 질려 한온에게 ‘적이 강하니 지탱하기 어렵소. 어찌하면 좋겠냐’며 벌벌 떨었다. 이에 한온은 ‘주장이 흔들리면 누가 힘이 나겠소. 당신은 남문을 지키시오. 나는 북문에서 죽으리다’면서 장흥의 의병 안언방, 백민걸 등과 함께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였다. 원적은 기세등등 성을 넘어오는 왜구에게 항복의 뜻으로 갑옷을 벗어 보내 목숨을 구걸했으나,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3일간 항전 끝에 달량포성은 함락되었다. 왜구는 포로로 잡힌 영암군수 이덕견에게 ‘지금 즉각 한양으로 진격해 도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편지를 주어 조선 조정에 보냈다. 이어 거칠 것 없이 난포(어란포), 마도(강진), 장흥부병영(강진군 병영), 가리포(완도)를 짓밟아 살상과 노략질을 했다. 이에 강진과 장흥의 수령들은 서둘러 성을 포기했고, 두 고을의 물자는 고스란히 왜구들의 차지가 되었다. 발칵 뒤집힌 조정은 중앙군을 파병키로 하고 도순찰사 이준경과 경상좌병사 조안국, 좌·우 방어사 남치근과 김경석을 파견했다. 이준경은 나주에 이르러 왜구 토벌을 시작했다. 그렇게 왜구들이 해남, 완도, 강진, 장흥 일대에 흩어져 분탕질을 치고 다닐 때의 영웅이 해남 현감 변협이다. 변협은 해남군민과 병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수축하고 복병을 배치하여 사방이 왜구로 둘러싸인 해남성을 지켰다. 어느 날 왜구 10여 명이 가까이 왔다가 겨우 1명만 살아서 줄행랑친 뒤부터는 감히 다시 경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변협을 특진시켜 장흥부사로 삼았다. 변협의 본관은 원주이고 아버지는 중추부경력 변계윤이며, 어머니는 참판 최자반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용맹이 뛰어났으며 1548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555년(명종 10)에 해남현감이 되었다. 해남군청의 수성송은 변협이 장흥부사로 영전할 때 이를 기념하여 심고 ‘수성송’(守城松)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데서 유래한다. 곰솔이라고도 하는 이 해송은 겨울눈이 붉은색인 육송과 달리 회백색이다. 두 아름이 넘는 이 500살 수성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라와 내 가족을 누가 어떻게 지켜왔는지를 알 수 있으니, 이는 또 백성의 생목숨을 지켜 준 수생송(守生松)이고 그 마음마저 지켜준 수성송(守性松)이다. 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6-09
  • 120만 독립왕국이 저항 한번 못한 채 강점당해
    1905년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1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공사가 조인한 늑약은 명칭도 붙이지 못했고, 조인 날짜는 11월 17일로 하였다. 1905년 11월 17일의 「고종실록」에는 을사늑약 체결 기록이 실려 있다.   “한일협상 조약(韓日協商條約)이 체결되었다.〈 한일협상 조약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주의(利害共通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실지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이 목적으로 아래에 열거한 조관(條款)을 약정한다.제1조일본국 정부는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통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監理指揮)할 수 있고 일본국의 외교대표자와 영사(領事)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제2조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한다.제3조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면서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궁중에 알현하는 권리를 가진다.일본국 정부는 또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을 두는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밑에 종래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職權)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 사무를 장리(掌理)할 수 있다.제4조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의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제5조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이상의 증거로써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 정부에서 상당(相當)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記名) 조인(調印)한다.광무(光武) 9년 11월 17일외부 대신 박제순 명치(明治) 38년 11월 17일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가 본 을사늑약  주한미국공사관 부영사 윌러드 스트레이트는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밤의 광경을 미국공사관 담 너머로 모두 보았다. 수옥헌(漱玉軒, 지금의 중명전)은 미국공사관과 맞붙어 있었다.윌러드는 러일전쟁 취재차 일본에 온 AP 기자였다. 그런데 그는 1905년 6월에 덜컥 주한미국 공사관 부영사로 임명되었다.1905년 6월 26일에 윌러드는 고종을 수옥헌에서 알현하였다. 당시에 고종은 1904년 4월에 경운궁이 불타서 이곳 2층에서 지내고 있었다.1905년 7월 2일에 윌러드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이봐, 황제의 궁전이 바로 옆이야. 우리가 공사관 뜰로 들어왔더니 황제가 침대 의자에 앉아서 우릴 쳐다보더라고. 도대체 이런 나라를 상상할 수 있겠어!”한편 윌러드는 11월 17일 밤 을사늑약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했다.“나는 공사관 창문을 통해 궁궐 안으로 일본 군대 및 경찰이 몰래 잠입하는 것과 매우 불안한 표정을 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조선 대신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순간 창백한 얼굴을 한 고종과 왕자가 창문 커튼을 옆으로 밀고 살짝 밖의 동정을 살폈다. 이것이 바로 몇 시간 후면 조인될 보호조약의 긴장된 장면이었다.그날 밤 10시 소란한 소리와 함께 일본군은 떠나고 있었으나 아직도 궁궐 내에는 일본 경찰들로 꽉 차 있었으며 관복을 입은 한국 관리들은 나라를 잃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불과 100여m 앞에서 한 나라의 운명이 맥없이 절단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나는 그저 망연할 뿐이었다. 특히 1200만명의 독립왕국이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이렇게 무기력하게 강점당하는 모습에 침통함을 느낀다. (백성현·이한우 지음,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2006, p 372-373)윌러드는 친구 블랜드에게 보내는 11월 29일의 편지에도 이렇게 적었다.“새벽 두 시에 잔디밭에서 수옥헌을 보니 건물 주변은 물론 베란다까지 일본인들이 가득했다. 뒤편 프랑스 공사관 통로에도 가득했다. 황제가 여차하면 거기로 도망갈까 예상하는 듯 했다.이곳 상황은 참 놀랍다. 왕관을 쓴 자들 가운데 최악으로 비겁한 황제는 궁전 속에 움츠리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으로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황제는 외부대신에게 조약에 서명하라고 지시하고서는 자기가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또 지시했다. 그래서 외부대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참정대신 한규설은 회담장에서 쫏겨났다. 황제명령을 어기고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한규설은 그 파란만장한 밤에 엄비 방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엉겁결에 황제에게 대신들로 하여금 나라를 배신하지 말게 하라고 간청해버린 것이다. 이 행동으로 한규설은 3년 형을 받았다. (중략)가장 어이없는 일은, 저들은 무슨 일이 닥칠지 벌써 경고가 돼 있었고 그래서 늦기 전에 이 사태가 오지 않도록 충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저들은 마치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에 처박고 사태를 똑바로 보려 하지 않았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2020, p 325-326, 355)그랬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서 고종이 맨 먼저 한 일은 참정대신  한규설을 파면한 일이다. “조령(詔令)을 내렸다. 의정부 참정대신 한규설은 황제의 지척에서 행동이 온당치 못하였으니, 우선 본직을 면직시키라.”(고종실록 1905년 11월 17일 2번째 기사)그나마 한규설은 윌러드의 편지 내용과 달리 3년 유배는 면했다.# 이근명, 이상설의 상소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날인 11월 19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이 상소를 올렸다. “신은 어제 정부가 조약을 체결한 일에 대해 너무나 놀랍고 의심스러워 줄곧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입니까? 조정에 물어서 협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바로 한 밤중에 대궐에서 그 누가 알까 두려워하면서 부랴부랴 회의를 열어 이렇듯 체결하여 일을 크게 그르쳤습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사람들의 울분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실로 천하의 영원한 죄인으로 되었으며 또 국법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상(皇上)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그날 회의한 모든 대신(大臣)들을 모두 법에 따라 처벌하심으로써 온 나라의 한결같은 울분을 풀어 주소서.”이에 고종은 널리 양해하라고 비답하였다. (고종실록 1905년 11월 19일)이것이 바로 고종의 이중성이었다. 고종은 조약 체결에 반대한 총리대신 한규설을 면직시키고서, 11월 18일에 사직상소를 올린 법부대신 이하영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사직상소는 반려한 상태였다. 한편 1905년 11월 1일에 의정부 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된 이상설(1870∽1917)은 11월 18일 오전 2시에 참정대신 한규설이 풀려나자 참정대신과 손을 맞잡고 통곡하면서 망국을 슬퍼했다. 즉시 그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11월 19일에 이상설은 고종의 비준 절차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엎드려 아뢰옵나이다. 신이 어제 새벽 정부에서 일본과 약관을 체결하여 마침 조인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르기를 천하 대사를 다시 어찌할 수 없구나 하고 사저로 돌아와 다만 슬피 울고 힘써 자정(自靖)하기를 도모하고자 상소 진정하여 면직을 바랐습니다. 이제 듣자오니 그 약관이 아직 주준(奏准)을 거치지 아니하였다 하니 신의 마음에 위행(慰幸)이 가득하고, 국가를 위해 계책을 아직 세워볼 만하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대제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하지 않아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사직을 위해 죽는다.(殉社)’는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역대 조종이 폐하에게 맡기신 무거운 임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중략) 폐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그르다고 여기시거든 곧 신을 베어서 여러 도적에게 사과하시고, 신의 말이 옳다고 여기시거든 곧 여러 도적을 베어서 국민에게 사과하소서. 신의 말은 이뿐이오니 다시 더 말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박민영 지음, 이상설 평전, 신서원, 2020, p 78-79)이상설은 고종에게 노골적으로 분사(憤死)하라고 상소하였다. 조약을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하여도 나라는 또한 망하니, 이럴 바에는 황제가 차라리 죽음을 택하여 저항하라고 주청했다. 이처럼 신하가 임금에게 사직을 위해 죽으라는 상소는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러자 11월 24일에 「대한매일신보』는 ‘이상설의 상소문(讀李參贊疏)’을 신문에 게재하고 ‘자고로 난세를 당하여 직신(直臣)의 간언은 있었지만 막중한 군부의 죽음을 끊는 순사직(殉社稷)을 간한 신하는 이상설에게만 있었던 충언’이라고 극찬하였다.
    • 기획.연재
    2022-06-07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광주 절골 박상 소나무
      박상은 1474년인 성종 5년에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에서 태어났다. 충청도 회덕에서 살던 아버지 박지흥이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벼슬길을 포기한 뒤, 처가인 하동 정씨 마을로 이거 했기 때문이다. 호가 눌재인 박상은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선비이자,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정의로운 공직자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연산군 시절이다. 이때에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한 관리로 채홍준사가 있었다. 연산군 11년인 1505년 6월에 이계동을 전라도, 임숭재를 경상도·충청도 채홍준사로 임명한 게 처음이다. 그 뒤 이들을 각지로 파견하며 우수한 실적을 올리는 자에게는 작위와 토지, 노비를 주었고, 간택된 여자 집에도 특혜를 주었다. 이때에 나주에 쇠부리, 또는 우부리라 불리는 자가 있었다. 바로 이 자의 딸이 채홍사의 눈에 띄어 연산군의 후궁이 되었다. 이에 우부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며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했다. 하지만 종2품인 전라관찰사도, 정3품인 나주 목사도 우부리의 못된 짓을 그저 눈치만 보고 있어야 했다. 이걸 알고 박상은 정5품으로 지방의 관리를 감찰하는 전라도사에 자원하여 나주에 들렀다. 나주목의 이방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보려 했으나, 박상은 곧바로 우부리를 체포해 오라고 했다. 결국, 우부리는 나주목 관아에서 곤장형을 받았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이러니 우부리 집안에서는 장례도 치르지 않고 한양의 딸에게 달려가고, 박상도 연산군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러 가게 되었다. 박상이 장성갈재에 이르렀을 때다. 연산군의 사약을 가지고 오는 금부도사와 한양으로 가는 박상이 이곳에서 길이 엇갈렸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박상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다른 샛길로 안내한 것이다. 그리고 곧 중종반정이 일어나 우부리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때의 인연으로 박상이 고양이 제사를 위해 광산구 하남면 오산리의 40여 두락 전답을 금강산 정양사의 묘답으로 두었으나, 일제강점기 주인이 없는 역둔토라 하여 국유화되었다. 이어 1506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시절이다. 중종의 첫 부인인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 때의 좌의정으로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신 씨도 왕비가 되지 못하고, 반정 7일 만에 쫓겨났다. 그리고 10년 뒤인 1515년 둘째 비인 장경왕후 윤 씨가 훗날 인종이 되는 왕자를 낳고 또 일주일 만에 죽었다. 이때 담양부사이던 박상이 새 중전을 뽑지 말고 폐위된 신 씨를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렸다. 순창 강천산의 삼인대가 이때의 유적지로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 등 세 사람이 이곳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 놓고 신 씨를 왕비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결의하고 맹세했다. 이 일로 중벌의 위기에 처한 박상은 조광조 덕분에 1년여 남평 유배형으로 그쳤다. 또 이런 인연으로 1519년 기묘사화에 능주로 유배 가는 조광조를 광주 학동 원지교에서 만났다.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받은 조광조의 시신이 이듬해에 달구지에 실려 고향으로 갈 때다, 박상은 다시 원지교로 나갔다. 그 한탄을 ‘뒷날 저승에서 다시 만나면…’이라는 시로 남겼다. 조선 선비의 기개와 정신의 표본인 박상의 묘는 그가 태어났던 절골 마을 뒷산에 있다.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진 숲을 오르면 몇 그루 소나무가 그를 향해 경배하듯 서 있다. 오래된 소나무로는 보이지 않지만, 선비의 기개, 무늬만이 아닌 진정으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한 눌재 박상의 기상을 닮았다. 감히 머리 숙여 말없이 누워 계시는 선생을 뵙는다. 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2-06-02
  • 김대중 전남교육감 후보 “교육 확 바꿔 전남 살릴 것!”
     교사·목포시의장·교육감 비서실장 등 여러 경험이 장점 “기술혁명·지역소멸, 전남교육 현안 해결 가능” 자신감  “수업권·학습권 확보해 수업이 가능한 교실 만들겠다!”전남은 사라지고 있다. 각종 유인책이 쏟아지지만 인구 유출은 뚜렷하고, 각 시군은 지는 해를 붙잡는 듯한 도로(徒勞)에 지쳐가고 있다. 대도시의 1개 동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구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어, 복지 등의 각종 행정 역량이 제 구실을 하기도 쉽지 않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노령화다. 절대 인구수가 급감하는 데다 노인 인구 비율이 급증하는 만큼, 사회 모든 부문에서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젊은 층은 떠나고 신규 전입은 끊긴다. 김대중 전남 교육감 후보는 이 악순환을 끊겠다고 선언한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수영법을 강의하거나 텅 빈 골짜기에서 큰 소리로 교과서를 읊어대는 식의 교육과 학습의 한계를 지적한다. 교육은 결국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 사람이 모인 다음에라야 가르치거나 배우거나 선악(善惡)과 선후(先後)를 따지고 살필 일이라는 것이다. 깐깐한 교사, 품 넓은 정치인, 착실한 행정가로서 전남 교육감에게 필요한 자질과 경륜을 모두 갖췄다며 출마한 김대중 후보를 만나, 전남교육의 미래에 대해 들었다.-출마 계기는? 나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는 기회도 되지만 위기이기도 하다. 특히 전남은 인적·물적 토대가 취약한 만큼 위험의 측면이 더 크다.앞으로 4차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서 현재 직업의 60%가 사라진다.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전남 17개 군은 가장 먼저 소멸할 위험지역으로 분류될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 즉 아이들이 사라지고, 학교가 없어지고, 인구가 줄고, 마을이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절실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남을 구하기 위해 출마했다. 전남교육 대전환을 통해 교육을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남 전체의 활로도 열어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아이들의 불확실한 미래와 지역소멸을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교육뿐이다. 교육과 정치와 행정을 두루 경험한 나 김대중이 전남교육을 바로 세우고 전남을 살려내야 한다는 각오로 출마를 결심했다. 나 김대중이 할 수 있다. 꼭 해내겠다.-교육감에게는 어떤 자질, 덕목이 필요한가?교육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겸손함이다. 말하기보다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독선적이고 독단적 행정은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린다. 덕목이라면 다양한 경험, 오랜 과정을 거쳐 검증된 능력, 청렴함 등이 중요할 것이다.- 현 전남 교육(감)의 문제는?상대 후보를 직접 평가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지난 4년 전남교육의 추락은 여러 객관적 지표가 웅변하고 있다.면학 분위기가 최악으로 떨어진 결과 수능 성적은 꼴찌로 하락했다.또 고위 간부를 포함해 직원들이 잇따라 비리 혐의로 구속되고, 교육감 부인이 관용차를 개인 용도로 쓰고, 공무원이 교육감 부인을 수행하고, 비서실 직원이 근무평점을 조작하는 등 청렴도도 역대 최하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상황인데도 원인을 밝히고 대책을 수립해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남 탓’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자기 자랑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해법은 있는가? 우선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권을 회복해 ‘수업이 가능한 교실’을 만들어야 한다. 디지털에 기반한 맞춤형 교육으로 학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공정한 인사와 투명한 행정으로 청렴도를 향상시켜야 한다. 즉 코드 인사를 중단하고, 역량과 성실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인사를 실현함으로써 교직원들의 근무 의욕과 사기를 높여야 한다.조달·구매 관련 불·탈법이 많은 만큼, 제도를 개선해 계약 투명성을 향상시켜야 한다. 내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최근 현수막 게시 논란의 실체와 입장은? 사건의 발단은 ‘학력과 청렴도 꼴찌’를 지적한 현수막이 게시된 것이었다. 지난 4년간 전남교육 행정에 대한 도민들의 평가였다고 본다. 내용은 모두 공공 기관의 발표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확인된 객관적 지표였다.그런데 장석웅 후보 측에서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이념 공세를 펼쳤다. 그 현수막을 게시한 단체가 보수정당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당사자들이 언론을 통해 해명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공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지지율이 역전되고 격차가 커지자, 다급한 마음에 흑색 선전을 하는 것 아닌지 의문이다. 특정 허위 사실 유포와 이념 공세로 내 지지도를 하락시키려는 것 같은데, 결국 무리수가 될 것이다. 청렴도와 학력 꼴찌에 대해 도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진보 정치권 경력이 상당하다. 이번 논란 때 왜 밝히지 않았나?교육감 후보는 정당을 표방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을 명확히 밝히기가 조심스러웠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창당한 정당에서 목포시의회 의장을 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함께했던 정당의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뼛속까지 진보다. 선거 승리가 절실하겠지만, 나에게 보수의 굴레를 씌우려는 것은 비열한 정치적 작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본인의 경쟁력, 약점은?내 경쟁력이라면, 교육·정치·행정을 두루 경험했다는 점일 것이다. 또 강한 추진력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목포시의원으로 활동하던 2000년 무상급식을 주장했다. 그때 아무도 실현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무상급식은 지금 현실이 됐다. 지금도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한다.약점은 광역(권) 선거는 처음이라, 아직은 인지도가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거리에서도 알아보는 분들이 많다. 이제 됐다 싶다.-교육은 궁극적으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교육은 아이들에게 미래를 주는 것이다. 결국 그 아이들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교육은 단순히 교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남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지금 전남은 지역 소멸 상황에 처해 있다. 엄중한 상황이다. 아무나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교육과 정치, 행정을 모두 경험한 내가 전남교육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겠다.-전 세계적 교육 환경 변화에 대책이 있다면?미래사회의 특징은 불확실성이다. 전남교육 대전환으로 미래를 대비하겠다. 구체적 실행 방안의 첫째는 전남형 교육자치, 둘째는 미래 교육이다. 전남형 교육자치는, 지역사회와 함께 전략산업에 기반한 일자리를 만들고, 그 일에 적합한 인재를 맞춤형 교육으로 키우는 것이다. 전남 아이들이 전남에서 배우고, 전남에서 일하게 하는 개념이다. 일선 시·군별로 농·수산업 외의 일자리까지 파악해, 우리 학생들이 여건에 맞는 공부를 하고 취업까지 연결하겠다는 것이다.미래 교육은, AI(인공지능) 등을 활용해 교육의 새로운 경지를 여는 것이다. 예전에는 지식 습득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인터넷 등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래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더 이상 암기하는 지식 위주가 아니다. 창의력, 자기주도학습능력 등 미래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량을 키워야 한다. 나는 인공지능과 디지털에 기반한 맞춤형 학습을 통해, 아이들이 필수적인 미래 역량을 갖추도록 가르칠 것이다. -신조나 좌우명이 있다면?‘조금 부족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부족하면 채워야 하고, 채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러면 겸손해진다.-끝으로 하나 더, 이름 덕을 본다고 생각하나?이름 뿐인가. 실제 ‘그 분’이 도와주신다고 ‘절감’한다.(웃음)           김대중 후보는 올해 초 출마 뜻을 밝혔을 때만 해도 거의 무명이었다. 차츰 이름이 알려지면서 ‘차기를 노리고 밑바닥을 다지는 정도’라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부터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울림이 끈질기게 그리고 넓게 퍼져나갔다.아마 ‘전남 소멸’을 막겠다는 김대중 후보의 간절한 뜻이 작용했을 것이다. 교육 때문에 해마다 4500여 명이 전남을 떠난다. 소외와 차별의 피해자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존재가 사라질 위기가 닥치고 있다. 그 전남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 교육 복원이며, 전남교육은 대전환을 통해 바로 설 수 있다는 절박한 깨우침이 있을 것이다. 호남지역은 아예 정치 부재라는 폄훼(貶毁) 아니 적시(摘示)에 갇혀 있다. 그래서 김대중 후보가 교육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당당하게 지적하는 것이 돋보인다. 그렇다. 정치가 부끄럽게 기피해야 할 것이라면 왜 투표 따위로 일꾼을 뽑을 것인가! 부인(중등교사 명예퇴직)과 사이에 3녀. 10년 이상 매일 새벽 5시 유달산 등산을 시작으로 하루 1만보(萬步)를 걷고 있다. 취미는 독서, 걸으면서 음성 책을 듣기도 한다. 종교 기독교. 저서로 ‘김대중의 전남교육대전환’이 있다.
    • 기획.연재
    20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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