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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 원목(原牧)과 원정(原政)을 짓다
    다산 정약용은 원목(原牧)과 원정(原政) 글을 지었다. 원목은 ‘목(牧)이란 무엇인가?’를 캐묻는 글이다. “목민자(牧民者)가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자를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쌀과 옷감을 생산하여 목민자를 섬기고, 또 수레와 말과 하인을 내어 목민자를 전송·환영도 하며, 또는 고혈(膏血)을 짜내어 목민자를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이 과연 목민자를 위하여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다산은 ‘목민자는 백성을 위하여 있다’고 결론부터 낸다.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 무슨 목민자가 있었던가? 백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한 사람이 이웃과 다투다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을, 공정한 어른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가서 해결을 보고 감복한 나머지 그를 추대하여 이정(里正)이라 하였고, 또 여러 마을 백성들이 자기 마을에서 해결 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식견이 많은 어른을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그를 추대하여 당정(黨正)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고을 백성들이 자기 고을에서 해결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어진 이를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그를 추대하여 주장(州長)이라 하였고, 또 여러 주(州)의 장(長)들이 한 사람을 어른으로 모시고는 국군(國君)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나라의 군(君)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방백(方伯)이라 하였고, 또 사방(四方)의 백(伯)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그를 황왕(皇王)이라 하였다. 따지자면 황왕의 근본은 이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목민자는 백성을 위하여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해결사로 추대된 자가 지금 같으면 반장, 이장, 통장, 읍·면·동장, 시 ·군수·구청장, 도지사. 대통령이다. 글은 이어진다.  ”그때는 이정이 민망(民望 백성들의 요망)에 따라 법을 제정한 다음 당정에게 올렸고, 당정도 민망에 따라 주장에게 올렸고, 주장은 국군에게, 국군은 황왕에게 올렸었다. 그러므로 그 법들이 다 백성의 편익을 위하여 만들어졌었는데, 후세에 와서는 한 사람이 스스로 황제가 된 다음 자기 아들ㆍ동생 그리고 가신들까지 모두 제후(諸侯)로 봉하는가 하면, 그 제후들은 자기 측근을 주장(州長)으로 세우고, 주장은 또 자기 측근을 당정ㆍ이정으로 세우고 있다. 따라서 황제가 자기 욕심대로 법을 만들어서 제후에게 주면, 제후는 자기 욕심대로 법을 만들어서 주장에게 주고, 주장은 당정에게, 당정은 이정에게 법을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그 법이라는 것이 임금은 높고 백성은 낮으며, 아랫사람 것을 긁어다가 윗사람에게 붙여주는 격이 되어, 얼핏 보기에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있는 꼴이 되고 있다. 지금의 수령은 옛날로 치면 제후들인데 그들의 궁실(宮室)과 수레와 말ㆍ의복과 음식 그리고 좌우의 최측근과 시종들이 거의 국군(國君)과 맞먹는 상태인데다, 그들의 권능이 사람을 경사롭게 만들 수도 있고 그들의 형벌의 위세는 사람을 겁주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거만하게 스스로 높은 체하고 태연히 혼자 좋아서 자신이 목민자임을 잊어버리고 있다. 한 사람이 다투다가 해결을 위하여 가게 되면 곧 불쾌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왜 그리 시끄럽게 구느냐 하고, 한 사람이 굶어 죽기라도 하면 ‘제가 스스로 잘못해서 죽었다.’하며, 곡식이나 옷감을 바쳐서 섬기지 않으면 매질이나 몽둥이질 하여 피를 보고야 말 뿐 아니라, 날마다 돈 꾸러미나 세고 글을 첨삭 수정을 일기 삼아 기록하여 돈과 베를 거두어들여서 논밭과 저택이나 장만하고, 권문귀족ㆍ재상에게 뇌물을 쓰는 것을 일삼아 후일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란 말이 나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디 이치에 맞기나 하는가.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목민자가 백성 위에 군림하다니 이치에 맞기나 하나? 지금은 어떤가?  다음은  원정(原政)이다. ‘정치란 무엇인가?’를 캐묻는 글이다.  “정(政)의 뜻은 바로잡는다[正]는 말이다. 첫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가장 질 좋은 토지를 소유하여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좋은 토지를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것인가. 이 때문에 토지를 개량하고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 그것을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둘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풍요로운 땅이 많아서 남는 곡식을 버릴 정도이고, 누구는 척박한 땅도 없어서 모자라는 곡식을 걱정만 해야 할 것인가. 이 때문에 배와 수레를 만들고 저울과 되의 규격을 정립하여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셋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제멋대로 삼켜서 커지고, 누구는 연약한 위치에서 자꾸 빼앗기다가 멸망해 갈 것인가. 이 때문에 죄 있는 자를 성토하여 세대가 끊긴 자는 이어가게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넷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상대를 업신여기고 불량하고 악독하면서도 육신이 멀쩡하게 지내고, 누구는 온순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착하면서도 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가. 이 때문에 형벌로 징계하고 상으로 권장하여 죄와 공을 가려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다섯째,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멍청하면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악(惡)을 전파하고 있고, 누구는 어질면서도 아랫자리에 눌려 있어 그 덕(德)이 빛을 못 보게 할 것인가. 때문에 붕당(朋黨)을 없애고 ‘공공의 도덕(公道)’을 넓혀 어진 이를 기용하고 불초한 자를 몰아내어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다산은 위 5가지의 불공정과 불합리를 바로 잡는 것이 정(政)이라고 논한다. 글은 이어진다.   “하나, 밭도랑을 준설하고 수리(水利) 시설을 함으로써 장마와 가뭄에 대비하고, 둘, 소나무ㆍ감나무ㆍ밤나무 등속을 심어서 궁실(宮室)도 짓고, 관곽(棺槨)도 만들고, 또 곡식 대신 먹기도 하고, 셋, 소ㆍ염소ㆍ닭ㆍ돼지ㆍ개 등을 길러 군대와 농민을 먹이기도 하고, 노인들 봉양도 한다. 넷, 우인(虞人 산림을 맡은 벼슬)은 시기를 정하여 산림에 들어가서 짐승과 새들을 사냥함으로써 해독을 멀리하기도 하고, 또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기도 하며, 다섯, 공인(工人)도 계절따라 산림에 들어가서 금ㆍ은ㆍ철과 보옥(寶玉)을 캐다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하고, 또 모든 쓰임에 공급도 하며, 여섯, 의사는 병리(病理)를 연구하고 약성(藥性)을 감별하여 전염병과 요절을 미연에 방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왕정(王政)인 것이다.  그런데 왕정(王政)이 없어지면 백성들이 곤궁하기 마련이고, 백성이 곤궁하면 나라가 가난해지고, 나라가 가난해지면 조세 거두는 것이 번거롭고, 조세 거둠이 번거로우면 인심(人心)이 이산(離散)되고, 인심이 이산되면 천명(天命)도 가버린다. 그러므로 급히 서둘러야 할 것이 정(政)이다.” 백성이 곤궁하면 민심(民心)이 이산되고, 민심이 떠나면 천명(天命)도 가버린다. 문득  <맹자>의 글이 생각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가 가장 하찮다.”  - <맹자> ‘진심 하’ ※원목과 원정의 저술연도는 알 수가 없다. 박석무는 ‘다산이 벼슬하는 동안의 저술’로 보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다산학의 인문학적 가치와 미래 2019.11.15. 기조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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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4
  • 정약용, 형 정약전에 편지 “나라가 썩은 지 오래
    다산의 3리(三吏) 시 중 마지막 시는 ‘해남리(海南吏)’이다.  다산은 해남에서 도망 나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에도 세금 독촉을 하는 혹독한 아전이 세금을 걷어가고 있었다.   해남리도    두보의 ‘동관리(潼關吏)’ 시를 차운하였다. ‘동관리’ 시는 동관의 성을 쌓는 병사들의 고초를 적은 시이다. 759년 9월 곽자의를 비롯한 9명의 절도사들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상주에 있는 안사의 난의 주모자 안경서를 포위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될 무렵 상주성은 양식이 바닥나서 큰 위기가 왔다. 그러나 안사의 난의 또 다른 주동자 사사명의 원군이 오고, 포위군 측은 지휘계통이 안 서고 군기가 해이해져서 3월의 싸움은 관군의 패전으로 끝났다.   곽자의는 장안에 이르는 요충인 동관에 성을 쌓아 적의 진격을 방어하려 했다. 마침 이곳을 지난 두보는 동관의 병사들의 고충을 시로 적었다. 그러면 ‘동관리’를 읽어보자. 병사들은 이 무슨 고생인가?   동관 길목에 성을 쌓고있네.      큰 성은 철옹성 보더 견고해 보이고  작은 성은 만여 장 더 되는 높이!   동관 관리에게 물어보니           관문 만들어 오랑캐 침입에 대비한다고               나를 굳이 말에서 내리게 하여  산의  산모퉁이 가리키는데   늘어선 방책 구름에 닿아 정녕 나는 새도 넘지 못할 듯     ”오랑캐가 와도 지키면 될 뿐 어찌 장안 걱정 할 일  있으랴 저기 저 요새를 보시오 수레 하나 겨우 지날 좁은 길   전쟁 나면 긴 창 휘둘러 만고에 한 사람이면 지키지요.”  슬프도다, 도림에서의 전투여 백만 대군 물고기 밥이 되었으니     이 관문 지키는 장수여, 부디가서한의 흉내는 내지 마시라 그러면  해남리(해남의 아전)시를 읽어보자. 나그네 한 사람 해남에서 달려와      무서운 것 피해 오는 길이라면서      한참 되어도 가쁜 숨 가라앉지 않고   아직도 겁에 질린 기색이네           이 사람 승냥이나 이리를 만난 것이 아니면  오랑캐 족속을 만난 게 분명하네.           “세금 독촉 아전들이 마을에 나타나     이리저리 다니면서 마구 짓밟고             신관 사또 명령은 더욱 엄해서               정해진 기한을 넘길 수가 없다고 하네     주교사의  만곡선이                        정월에 서울 떠나                         주교사(舟橋司)란 전국의 조운(漕運)을 관장하고 부교를 놓는 관청이고,  만곡선(萬斛船)은 지방에서 거둔 세미(稅米)를 조창(漕倉)에서 서울로 운반하는 배이다.   더 이상 지체하면 모가지가 날아감은     종전부터 있어 왔던 예이기에             여기 저기 통곡소리 시끄럽지만         그것으로는  뱃사공 끄떡도 안하네.       나는 지금 맹호를 피해왔으나             바짝 마른 물고기를 그 누가 구해주리.”  두 줄기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며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쉬네.              재해가 심하여도 세금만 걷어가는 조정, 그리고 지방 수령과 아전이 너무 원망스럽다. 이게 나라인가?                                                          한편 정약용은 1810년경에 흑산도에 유배 중인 둘째 형 정약전(1758∼1816)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는 썩어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편지에는 요순시대의 정치가 가장 모범인 것은 고적제 즉 인사고과제도에 있음을 토로했다. 그러면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최근 몇 년 사이에 저는 요순시대의 나라 다스리던 법을 깨달았습니다. 후세와 비교해 보면 훨씬 엄혹(嚴酷)하고 빈틈없이 짜여져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요순의 정치는 순박하고 태평하여 천하가 저절로 조화된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치로서 매우 어리석은 견해라 하겠습니다. (중략) 공자(孔子)께서 항상 말씀하시길, ‘요순시대는 희희호호(熙熙??)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순박하고 태평스럽다 뜻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희희(熙熙)는 ‘밝다’는 뜻이고 호호(??)는 ‘희다’는 뜻이니, ‘희희 호호’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일이 다 사리(事理)에 의해 잘 다스려져 밝고 환하여 티끌 하나 터럭 하나라도 악(惡)을 숨기고 더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세속에서 말하는 ‘밤이 낮 같은 세상'이란 것이 바로 요순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순시대가 그렇게 되어진 까닭을 살펴보건대, 그것은 오직 고적(考績 인사고과)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고적제도는  요즘 세상의 여덟 글자로 된 제목(題目)만 있는 고적 제도처럼 소루(疏漏)하거나 조략(粗略:엉성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본인으로 하여금 직접 임금 앞에 와서 얼굴을 맞대고 자기 입으로 말을 하게 하였으니 잘못한 것을 거짓으로 꾸밀래야 꾸밀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 이어서 편지는 순임금에게 신하들인 우(禹), 고요(皐陶), 익(益)직(稷)이 자기의 치적을 거짓 없이 아뢰는 모습을 편지에 적는다.  “무릇 전(典)이란 나라를 통치하는 법이요, 모(謨)란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입니다. 그 법과 정책은 고적제도 보다 더 나은 게 없으니, 이것이 바로 요순(堯舜)의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순임금께서는 그냥 옷소매를 드리우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진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점잖이 앉아 있었는데도 천하가 자연히 태평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하는 썩어 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요즈음 관리를 포폄(褒貶 포상과 징계)하는 제목(題目)에 적혀 있길 ‘이욕의 생각이 없고 편안하고 단아하게 정치를 하여 다스림으로 온 경내가 평온하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사람을 순 임금의 어전에 올라가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도록 한다면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다고 아뢸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렇게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요순시대 통치와 정책의 근간은 고적을 떠나서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직접 진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고적법이요, 차선책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공적 사항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더러운 세상에서는 만약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도록 하는 법을 시행케 한다면, 고을의 수령(守令) 된 자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기의 책임을 다한 것처럼 꾸미려고, 하지도 않는 일들을 만들어 자기의 공적 사항을 뚜렷하게 꾸미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지는 것이 어찌 이 정도로까지 심하기야 하겠습니까. 오호, 슬프기만 합니다. 그 누가 있어 백성을 위해 이 막된 세상의 참모습을 아뢴단 말입니까?” *다산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는 <다산시문집(한국고전종합D/B)에 17통이 실려있고, 박석무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도 13통이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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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9
  • 정약용, 아전을 고발하는 시 3편을 쓰다
    1809년과 1810년 두 해에 걸쳐 전라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유랑민들이 길을 메웠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넘 쳤다. 전염병마저 창궐하여 시신(屍身)들이 언덕을 메웠다.     이러함에도 탐관오리들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수탈만 일삼았다. 다산은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탐학만 일삼는 아전을 고발하는 <용산리(龍山吏)> · <파지리(波池吏)> · <해남리(海南吏)>, 소위 3리(三吏) 시를 지었다.  <용산리>는 당나 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석호리(石壕吏)>, <파지리>는 <신안리(新安吏)>, <해남리>는 <동관리(潼關吏)> 시를 차운하였 다.    그러면  3리(三吏) 시를 살펴보자. 먼저 <용산리>이다. 1810년 6월에 지은 이 시는 용산촌에 들이닥친 아전의 횡포를 고발한 시 이다. 강진군 도암면 용흥리 용산마을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용산촌인 것 같다. 다산은 두보의 <석호리> 시의 운을 차운하여 <용산리>시를 지었다.  두보는 안녹산의 난이 한창인 759년에 낙양에서 돌아오면서 석호촌(石壕吏)에 하룻밤 묵었는데, 하양의 역사(役事)를 위하여 징발에 끌려가는 할머니를 목격하고 시를 지었다. 그러면 <석 호리> 시부터 감상하자. 시는 5언 4구, 6수이다.     석호 마을에서 해질녘 석호촌에 투숙했는데    한 밤중에 사람 잡는 관리들    영감은 담장 넘어 도망치고     할멈 있어 대문 열고 내다보는데 관리는  어째서 화내는고?      할멈은 또 얼마나 섦게 우는가          할멈이 앞에 나가 사정하는 말 들으니. “세 아들이 업성에서 수자리 사는데    한 아들이 편지 부쳐왔네          두 아들이 새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산 사람이야  모진 삶 살겠지만      죽은 자는 다시 못 돌아오네.        집안엔 사나이는 하나도 없고         오직 젖먹이 손주만 있어            손주의 어미는 아직 남아있지만       멀쩡한 나들이 옷 조차 없습죠.       이 늙은이 기력은 떨어졌지만      이 밤에 나으리를 따라가             급히 하양의 부역에 응하면           아침밥은 지을 수 있을 것이외다”                                          밤이 깊자 말소리가 끊어졌는데       흐느껴 우는 소리 잠결에 들은 듯.    날이 밝아 내가 길 떠날 때에는      늙은 영감 혼자와만 작별하네.       그러면 다산의 <용산리>시를 읽어보자. 용산리(龍山吏) 두보(杜甫) 운에 차운함. 경오년(1810) 6월  아전들이 용산촌에 들이닥쳐서      소 뒤져 관리에게 넘겨주는데     그 소 몰고 멀리멀리 사라지는 걸   집집마다 문에 기대어 보고만 있네. 사또님 노여움만 막으려 하니   그 누가 백성 고통 알아줄 건가. 유월에 쌀 찾아 바치라 하니                    모질고 고달프기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일)보다 더하네. 좋은 소식은 끝내 오지 않고          만 목숨 서로 포개고 죽을 판이네     제일 불쌍한 건 가난한 백성이라     죽는 자가 오히려 팔자 편하네        남편 없는 과부와                  손자 없는 늙은이들                  빼앗긴 소 바라보며 엉엉 우는데     눈물 떨어져 베적삼을 다 적시네     촌마을 모양새가 이렇게 피폐한데    아전 놈 왜 가지 않고 앉아있을까    쌀독은 바닥난 지 이미 오랜데     무슨 수로 저녁밥 짓는단 말인가   죽치고 앉아 남 못살게 구니      온 동네 사람들 목메어우네.         소 잡아 포를 떠서 세도가에 바치면 재주꾼 솜씨가 이로써 드러나네.     흉년에 먹을 것도 없는 마을에 들이닥쳐 세금 안 낸다고 소마저 끌고 가는 아전. 죽치고 앉아 밥 얻어먹고 가려는 아전. 이런 승냥이의 횡포에 분노가 치민다.                    이어서 <파지리(波池吏 파지촌의 아전)> 시를 살펴보자. 이 시는 아전들이 파지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에 농부라고는 없는데 애꿎 은 고아와 과부를 결박하여 성 앞에 세워놓았다.  또한 도망 못 간 선비 한 사람을 잡아서 나뭇가지에다 거꾸로 매달고 마을 사 람들에게 세금 독촉을 하고 있다.   <파지리>는 두보의 신안리(新安吏 신안 마을) 시의 운을 차운하여 지었다. 두보는 759년 안사의 난 때 관군이 장안과 낙양을 수복한 후에 사공참군으로서 낙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안마을(하남성 신안현)을 직접 목격한 것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 는 반란군에게 대패한 관군이 신안 마을에서 보충병을 뽑아 출정시키는 장면을 적은 시이다. 먼저 두보가 지은 <신안리>의 주요 구절을 읽어보자 우연히 신안 마을을 지나가는 길 떠들썩한 병사의 점호를 보다.그 고장 관리에게 연유 물으니 “ 저들 나이 어리고 체구 작거니그 어찌 낙양성을 지켜 낼꼬? 관군이 상주를 수복한다기 얼마나 기다렸나. 평정할 그 날 그러나 반군의 세력이 커서패하여 도망쳐 돌아올 줄이야!  (후략) 그러면 다산의 <파지리> 시를 읽어보자.      파지리(波池吏 파지촌의 아전) 아전들이 파지촌에  들이닥쳐        시끄럽고 소란하기 군대 점호같구나. 역병에 죽은 시체에 굶어 죽은 시신 뒤섞여    마을에 농부라고는 한 명도 없어           애꿎게 고아, 과부 결박하여         등에다 채찍질, 앞으로 끌고가니      개처럼 욕먹고  닭처럼 몰리어       사람들 행렬이 성(城)까지 이었구나. 그 중에 가난한 선비 한 사람       가장 수척하고 외로워 보이는데     하늘을 우러러 죄 없음을 호소하는  구슬픈 원망소리 끝없이 이어지네.   하고 싶은 말일랑 감히 못하고     눈물만 비오듯 쏟아지는데         아전 놈 화내며 멍청하다고        욕보여 다른 사람 겁을 주려고      높은 나뭇가지 끝에 거꾸로 매달아    상투를 나무뿌리에 닿게 하고는       “소견없는 놈아 무서운 줄 모르고    네가 감히 상부의 명령을 거역해     글을 읽었으면 의리를 알 터이니       왕세는 서울에다 바쳐야 할 것 아닌가.  너에게 유월까지 말미 준 것만 해도    너를 적잖게 은혜 베푼 일인데         포구에 묵고 있는 큰 배가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     아전 위세 부리는 건 바로 이때라   이리저리 지휘하는 아전들이란.    전라도 아전이 오죽이나 탐학했으면, 매천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조선 3대 폐단 중 하나라고 적었을까. “조선에는 세 가지 커다란 폐단이 있으니 ‘충청도 사대부, 평안도 기생과 전라도 아전이 그것이다’.(황현 지음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2006, p 60)   
    • 기획.연재
    2020-02-24
  • 다산 정약용 ‘파리를 조문하는 글’을 짓다
    1809년과 1810년(순조 10) 두 해에 걸쳐 전라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유랑민들이 길을 메웠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 거리에 넘쳤다. 전염병마저 창궐하여 시신(屍身)들이 언덕을 메웠다.     1810년 여름에 정약용은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 조승문)’글을 지었다. 이 때에 파리가 극성하여 온 집안에 득실거리고 점 점 번식하여 산과 골짜기까지 가득하였다. 파리들은 일찍이 동사(凍死)하지 않더니 술집과 떡 가게에 구름처럼 몰려들고 윙윙거 리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라 하고, 소년들은 소탕전을 폈다. 그리하여 혹은 대나무 통발통을 설치하여 거기에 걸려 죽게 하고, 혹은 독약을 쳐서 약 기운에 마취되어 전멸하게 하였다.  이에 다산이 말하였다. “아! 이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는 굶주려 죽은 자의 변신이다. 아! 기구하게 사는 생명이다. 애처롭게도 지난해 큰 기 근을 겪고 또 겨울의 혹한을 겪었다. 그로 인해서 염병이 돌게 되었고 게다가 또 다시 가혹한 징수까지 당하여 수많은 시체가 길 에 즐비하였고, 그 시체를 버린 들것은 언덕을 덮었다. 수의도 관도 없는 시체에 훈훈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높아지자, 그 피부가 썩어 문드러져 옛 추깃물과 새 추깃물이 고여 엉겨서 그것이 변해 구더기가 되어 항하(恒河)의 모래보다도 만 배나 많았는데, 아! 이 구더기가 날개를 가진 파리로 변해 민가로 날아 드는 것이다.  아! 파리가 어찌 우리의 유(類)가 아니랴.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만들어 널리 청해와 모이게 하자. 서로 기별해 모여서 함께 먹도록 하자.” 이어서 다산은 ‘파리를 조문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 “파리야, 날아와서 이 음식 소반에 모여라. 소북이 담은 흰 쌀밥에 국도 간 맞춰 끓여 놓았고, 무르익은 술과 단술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도 겸하였으니, 그대의 마른 목구멍과 그대의 타는 창자를 축이라. 파리야, 날아와 훌쩍훌쩍 울지만 말고 너의 부모와 처자를 모두 거느리고 와서 여한 없이 실컷 먹어라. 그대의 옛집을 보니, 쑥 대가 가득하고 뜰은 무너지고 벽과 문짝도 그러졌는데, 밤에는 박쥐가 날고 낮에는 여우가 운다. 또 그대의 옛 밭을 보니 가라지 만 길게 자랐다. 마을엔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가 되었다. 파리야, 날아와 이 기름진 고깃덩이에 앉아라. 살진 소 다리와 초장에 파도 쪄놓고, 농어 생선회도 갖추어 놓았으니, 그대의 굶 주린 창자를 채우고 얼굴을 활짝 펴라. 그리고 또 도마에 남은 고기가 있으니 그대의 무리에게 먹이라. 그대의 시체를 보니 이리저리 언덕 위에 넘어져 있는데, 옷도 못 입고 모두 거적에 싸여 있다. 장맛비가 내리고 날씨가 더워지자 모두 이물(異物)로 변하여, 꿈틀꿈틀 어지러이 구물거리면서 옆구리에 차고 넘쳐 콧구멍까지 가득하다. 이에 허물을 벗고 변신하 여 구속에서 벗어나고, 송장만 길가에 있어 행인이 놀라곤 한다. 그래도 어린아이는 어미 가슴이라고 파고들어 그 젖통을 물고 있다. 마을에서 그 썩는 시체를 묻지 않아 산에는 무덤이 없고, 그저 움푹 파인 구렁 창을 채워 잡초가 무성하다. 이리가 와 뜯 어 먹으며 좋아 날뛰는데, 구멍이 뻐끔뻐끔한 해골만이 나뒹군다. 그대는 이미 나비 되어 날고 번데기만 남겨 놓았구나.” 썩은 시체는 묻지 않아 길가에 나둥그러져 있고 파리는 휘날린다.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다산의 조문은 계속된다. “파리야, 날아서 고을[縣]로 들어가지 마라. 굶주린 사람만 엄격히 가리는데 서리(胥吏)가 붓대 잡고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대 나무처럼 빽빽이 늘어선 사람 중에 다행히 간택된다 하여도 물 같이 멀건 죽 한 모금 얻어 마시면 그만이다. 그런데 묵은 곡식에 서 생긴 쌀벌레는 위아래로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돼지처럼 살찐 건 위세 부리는 아전들인데 서로 부동하여 공로를 아뢰면 가상히 여겨 견책하지 않는다. 보리만 익으면 진장(賑場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임시 구호소)을 거두고 연회를 베푸는데, 북소리와 피리소리 요란하며, 아리따운 기생들 은 춤추며 빙빙 돌고 교태를 부리면서 비단부채로 가린다. 비록 풍성한 음식이 있어도 그대는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단다. 파리야, 날아서 관(館)으로 들어가지 마라. 깃대와 창대가 삼엄하게 나열하여 꽂혀 있다. 돼지고기, 쇠고기 국이 푹 물러 소담하 고 메추리구이와 붕어 지짐에 오리국, 그리고 꽃무늬 아름다운 약과를 실컷 먹고  즐기며 어루만지고 구경하지만 즐기지만, 큰 부채를 흔들어 날리므로 그대는 엿볼 수도 없단다. 호랑이 같은 문지기는 철통같이 막아서서 애처로운 호소를 물리치면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한다. 안에선 조용히 앉아 음식 먹 으며 즐기고 있고 아전 놈은 주막에 앉아 제멋대로 판결하면서 역마를 달려 백성들이 잘 있다고 보고하면서, 길에는 굶주린 사람 없고 태평하여 걱정이 없다고 한다. 파리야, 날아와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지 말라. 지각없이 영원토록 흔흔한 그대를 축하한다. 죽어도 앙화(殃禍)는 남아 형제에게 미치게 되니, 6월에 벌써 조세를 독촉하는 아전이 문을 두드리는데, 그 호령은 사자의 울음 같아 산악(山岳)을 뒤흔든다. 가마와 솥도 빼앗아가고 송아지와 돼지도 끌어간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관가로 끌고가서 볼기를 치는데 그 매를 맞고 돌아오면 기진맥진 하여 염병에 걸려서 풀 쓰러지듯 죽어 가지만, 천지 사방 어느 곳에도 호소할 데가 없고 백성이 모두 사지에 놓여도 슬퍼할 수가 없다. 어진 이는 위축되어 있고 뭇 소인배가 날뛰니 봉황은 입을 다물고 까마귀가 짖어대는 격이다. 파리야, 날아가려거든 북쪽으로 날아가라, 북쪽 천리를 날아가 구중궁궐에 가서 그대의 충정(衷情)을 호소하고 그 깊은 슬픔을 진달하라. 천둥벼락같이 울려 하늘의 위엄을 감격시키면 곡식도 잘되어 풍년을 이룰 것이다. 파리야, 그 때에 남쪽으로 날아오라 .” 이렇듯 다산은 백성들의 참상에 마음 아파하면서 부패한 관료와 아전을 질타했다. 1818년 봄에 다산초당에서 다산은 『목민심서』를 완성했다. 그는  「이전(吏典)」 ‘아전을 다스림(束吏)’에서 이렇게 적었다.   “백성은 토지로 논밭을 삼지만,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을 농사짓는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징수하는 것을 수확으로 삼는다.  이것이 습성이 되어서 당연한 짓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 기획.연재
    2020-02-10
  • 승냥이와 이리 같은 수령과 아전을 비판하다
    1810년에 다산이 지은 「전간기사」 6수 중 제5수는 ‘승냥이와 이리(시랑(豺狼)’이다. 정약용은 원주에서 이렇게 적었다. “시랑(豺狼)은 백성들의 이산(離散)을 슬퍼한 시다. 남쪽에 두 마을이 있는데 하나는 용촌(龍村)이고 또 하나는 봉촌(鳳村)인데, 용촌에는 갑이라는 자가, 봉촌에는 을이라는 자가 살고 있었는데 서로 장난삼아 때린 끝에 을이  병들어 죽었다. 두 마을 사람들은 관청의 검시(檢屍)가 두려워서 갑에게 자살 할 것을 권했더니 갑은 그것을 흔연히 자기 목숨을 끊어 마을을 평안하게 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에 아전들이 이를 알고 두 마을의 죄상을 캐면서 돈 3만 냥을 토색질 해 갔다. 두 마을은 그것을 마련하느라 베 한 치, 곡식 한 톨도  남은 것이 없어 그 지독함이 흉년보다 더했다. 그리하여 아전들이 돌아가는 날 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 떠나고 오직 어느 부인이 혼자 남아 현령(縣令)에게 그 사정을 호소했더니, 현령이 하는 말이 “네가 나가서 찾아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승냥이여, 이리여!          우리 송아지 이미 채갔으니  우리 양일랑 물지 말라     장롱엔 속옷 없고        시렁엔 치마도 없다.      항아리엔 남은 소금도 없고   쌀독엔 남은 식량도 없단다.  큰 솥 작은 솥 다 앗아가고  숟가락 젓가락 다 가져간 놈  도둑놈도 아니면서           왜 그리 못된 짓만 하느냐 사람 죽인 자는 죽었는데  또 누굴 죽이려느냐.      도둑도 아닌데 누가 숟가락, 젓가락까지 다 가져갔는가? 이것을 가져 갈 사람은 관아 사람들이다. 이미 사람 죽인 자는 죽었는데 마을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관아에서 백성들의 모든 것을 가져갔으니 어이가 없다. 수령과 아전의 토색질이 여실히 드러난다. 수령이 이리라면 아전은 승냥이다. 시는 이어진다. 이리야, 승냥이야 !       삽살개 이미 잡아갔으니  닭일랑 잡아가지 말라    내 자식은  이미 팔았지만  내 아내야 누가 사가랴     내 살가죽을  네가 벗기고  내 뼈까지 부순 네놈       우리의 논밭을 바라 보아라.    그 얼마나 크나큰 슬픔이더냐. 가라지 풀도 나지 않는데     쑥인들 있겠느냐.            사람 죽인 자는 이미 죽었는데  또 누굴 해치려느냐.           백성들은 관아의 처사를 원망한다. 검시 안 한 것을 이유로 두 마을을 초토화시켰으니 이런 도둑들이 어디 있을까?     다산은 『목민심서』 <이전(吏典) 6조>에서 ‘아전 단속’을 강조했다. “백성은 토지로 논밭을 삼지만,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것을 경작(耕作)하는 일로 여기고,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을 수확으로 삼는다. 이것이 버릇이 되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 승냥이여 호랑이여!  말한 들 무엇 하리.   금수  같은 놈들이여 나무란들 무엇하리.   부모가 있다지만      역시 믿을 수가 없네.  달려가 호소도 해보았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네. 우리 전답을 바라보라 그 얼마나 참혹한가. 백성들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시궁창 구덩이를 가득 메우네. 아버지여,  어머니여!    고량진미 먹으면서       방에 기생까지 두고 있는데 그 얼굴 연꽃 봉오리 같네. 아전들은 백성을 트집잡아 유랑민으로 만들어 놓고 기생까지 끼고 고량진미를 먹고 있다. 분노가 치민다.  「전간기사」 6수 중 마지막 시는 ‘오누이’다. ‘오누이(有兒)’는 1809년부터 1810년까지 2년 내리 흉년이 들어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어머니는 자식을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지은 시이다. 일곱 살 난 계집아이가 자기 동생을 데리고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시를 읽어보자 오누리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네.      누이는 묶은 머리, 동생은 쌍상투     누이는 이제 겨우 말 배우고        묶은 머리 동생은 머리만 더벅더벅  어미 잃고 울면서               갈림길에서 헤매네.          애들을 붙들고 까닭을  물었더니 목이 메어 더듬는 말이           “ 아버지는 집 떠나고                 어머니는 짝 잃은 새가 되었는데  쌀독이 바닥나서                사흘을 굶었네요.              엄마하고 나하고 흐느껴 울어    눈물 콧물 구 빰에 얼룩졌네요.   동생은 젖 달라고 울지만        엄마 젖은 이미 말라붙었지요.    우리 엄마 내 손을 잡고       젖먹이 저 애와 함께           저기 저 산촌 마을 돌아다니며   구걸해서 우리를 먹었다오.     어촌 장에 이르러서는       엿도 사서 먹였는데          길 너머로 데려와서                 어미 사슴 새끼 품듯 껴안고 재워서  아이는 포근히 잠이 들고        나도 죽은 듯 잠들었는데        잠이 깨어 이리저리 살펴보니  어머닌 여기에 없었답니다.”  이렇게 말하다가  또 울다가 눈물 콧물이 범벅이네      해 지고 어두워지면        뭇 새들도 자기 집 찾건만. 떠도는  두 남매        찾아갈 집이 없네.       불쌍하다. 이 백성들      천륜마저 다 잃었구나.   부부 사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어미도 제 자식 돌보지 못하네.    옛날 내가 암행하던       그 해가 갑인년이었는데  정조 임금은 1794년(갑인년) 10월28일에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경기북부 지역 4개 고을을 암행하도록 했다. 그 지역은 적성(파주시), 연천(연천군), 삭녕 · 마전(두 곳은 북한지역)이었다. 정약용은 곧바로 현장에 가서 샅샅이 민정을 살피고 11월15일에 정조에게 복명했다. 그는 적성 현감 이세윤과 마전군수 남이범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복명하면서, 연천 전 현감 김양직과 삭녕 전 군수 강명길의 탐학스런 행위를 고발했다.  김양직은 궁중의 어의(御醫)로 권세가 막강했고, 강명길은 임금 가족 묏자리를 잡는 지관(地官)으로 왕실과의 끈을 이용해 토색질을 했다. 하지만 그간 암행어사의 처벌 요구가 있었지만 대신들이 가로막고 이들을 옹호했다. 다산은 이들을 처벌하라고 강력하게 정조에게 보고했다.(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 2003, P 173-180) 임금님 당부가 고아들을 보살펴 고생 없이 하라고 부탁했건만   모든 목민관들은              감히 그 분부 어기지 말아야지 흉년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안타깝게도, 흉년에는 천륜도 인륜도 다 무시된다. 그런데 『전간기사』 6수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들로부터 시를 얻어 읽어본 이백진이  경상도 김해에서 귀양 사는 사촌 아우 이학규에게 편지와 함께 시를 필사하여 보냈다. 이백진은 편지에서 “정약용은 당대의 사백이다. 그의 시에는 사람을 깨우치는 뜻이 있다. 두보의 수노별(垂老? 병사로 나가는 노인의 할멈과의 이별)· 무가별(無家? 가족도 없는 고향과의 이별) 이후 이런 시는 없었다.”고 썼다. 다산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은 이학규는 1810년에 『己庚紀事(기경기사)』를 완성했다.  이학규는 정약용과 가까이 지내던 후배로 그 역시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1801년 신유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민음사, 2014, p 470)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20-01-29
  • 다산 정약용, 전간기사 6수를 짓다
    1810년에 다산 정약용은 전간기사(田間紀事) 6편을 지었다. 즉 다북쑥, 뽑히는 모, 메밀, 보리죽, 승냥이와 이리, 오누이 시이다.전간기사 6편에는 다산의 서문이 적혀 있다. “기사년(1809년)에 나는 다산초당에 머물고 있었다.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어 지난 해 겨울부터 봄을 거쳐 금년 입추에 이르기까지 붉은 땅이 천리에 연했다.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고 6월초에는  유랑민들이 길을 메워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참상이어서 살 의욕마저 잃어버린 것 같았다.나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몸이라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는 처지이기에 오매초(烏昧草)에 관하여 아뢸 길이 없고, 은대(銀臺)의   그림 한 장도 바칠 수 없었다.그래서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로 적었다. 그것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와 더불어 풀밭에서 슬피 우는 것과 같은 시들이지만, 성정(性情)의 올바른 것을 구해서 화기(和氣)를 잃지 않으려 했다. 오랫동안 써 모은 것이 몇 편 되기에 ‘전간기사(田間紀事)’라 이름하였다.”여기에서 오매초는 고사리의 이칭(異稱)이고, 은대(銀臺)는  신선이 사는 곳인데, 모두 백성의 굶주림과 관련 있다. 그러면 전간기사 제1수 ‘다북쑥’ (채호)을 음미해보자.다산은 원주(原註)에서 이렇게 적었다. “다북쑥은 흉년을 슬퍼한 시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기근이 들어 들에 푸른 싹이라곤 없었으므로 아낙들이 쑥을 캐어다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1.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양떼처럼 떼를 지어           저 산등성이 오르니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붉은 머리 숙이고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눈물만 쏟아지네.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다북쑥만이 자라서               무더기를 이뤘기에             말리고 또 말리고           데치고 소금 절여          된 죽 묽은 죽 쑤어 먹지달리 또 무엇하리.       2.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네.           명아주도 비름나물 다 시들었고     자귀나물은 떡잎은 나지도 않아    풀도 나무도 다 타고샘물까지도 말랐네. 논에도 우렁이 없고바다엔 조개도 없다네. 높은 분네들 살펴보지도 않고기근이다 기근이다 말만 하면서 가을이면 다 죽을 판인데봄이 와야 구휼이네 유랑 걸식 떠난 남편그 누가 묻어줄까 오호라 하늘이여어찌 그리도 무정하시나이까. 3.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캐다가 보면 들쑥도 캐고 캐다가 보면 쑥 비슷한 것도 캐고캐다가 보면 다북쑥을 캐네. 푸른 쑥이랑 흰 쑥이랑미나리 싹까지 무엇을 가릴 것인가모두 캐도 모자란데 그것을 뽑고 뽑아바구니에 쓸어 담고 돌아와서 죽을 쑤니아귀다툼 벌어졌네. 형제간에 서로 뺏어온 집안이 떠들썩하네. 서로 원망하고 욕하는 꼴들이마치 올빼미들 같네.  여기서 올빼미란 아귀다툼하는 간악한 사람을 비유한다. 하기야 배고프면 나만 살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닌가.전간기사 제2수는 ‘뽑히는 모(拔苗)’이다. 다산은 이렇게 적었다. “모가 말라 모내기를 할 수 없게 되자 농부들은 그것을 뽑아 버리는데, 모를 뽑으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온 들판에 가득했다. 어떤 아낙네는 너무 억울해서, 자식 하나를 죽여서라도 비 한 번 쏟아지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벼 싹이 나올 때면         연한 녹색에 짙은 황색     한 폭의 비단같이        푸른빛 은은하네.         어린 자식 보살피듯         아침저녁 돌보아서         주옥처럼 보물로 여겨      보기만 해도 흐뭇했네.     쑥대머리 한 여인이   논바닥에  주저앉아  방성통곡을 하면서       저 하늘 향해 호소하네.   차마 어이 정을 딱 끊고  이 벼 싹 다 뽑다니     오뉴월 한여름에         슬픈 바람이 쓸쓸하네.   우거진 나의  모를       내 손으로 다 뽑다니    무성한 나의  모를 내 손으로 죽이다니 우거진 나의  모를   잡초처럼 뽑아내고   총총한 나의  모를 화톳불 놓듯 태우다니   뽑아서 묶어서저 웅덩이에 두었다가 행여 비가 내리면 고인 물에나  꽂아볼까 내 자식 셋이 있어  젖도 먹고 밥도 먹는데 그 중 하나를 죽여서라도이 어린 모 살렸으면 이어서 전간기사 제3수는 메밀이다. 메밀은 현령(縣令)을 풍자한 시다. 조정에서는 메밀종자를 나누어 주도록 영을 내렸는데도 현령은 그 영은 따르지 않고 백성들에게 메밀만 심으라고  독촉만 한다.  넓고 넓은 논에 먼지만 풀풀 날리는데 어린 볏모 뽑아버리고 메밀 대신 심으라네. 집안에 없는 메밀 시장에 가도 살 수 없어 주옥은 구할지라도 메밀 종자 살 수가 없네. 현령이 통첩을 내려 ‘메밀종자 걱정 말라 내 장차 너희 위해 감영 통해서 구해주마’ 우리는 그 말만 믿고 논 갈아엎었는데 메밀은 주지 않고 우리들만 독촉하면서 “메밀 심지 않으면  나는 벌을 내리리니 흰 몽둥이 붉은 곤장에 너의 살점 떨어지리.”오호라  하늘이시여 왜 이다지 못 살피시나요. 메밀이나마 심지 않으면우리는 살 길이 없는데 우리 탓만 하며 호령이 벽력같네. 고기 쌀죽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벌 줄 것인가 메밀종자 주라는  나라 분부 내렸건만 그 분부는 안 따르고 우리 임금을 속이다니 조정에선 메밀 종자 나누어주라고 영을 내렸건만 현령은 종자는 안 나누어주고 메밀 심으라고 백성만 들볶고 있다. 이게 나라인가?    한편 전간기사 제4수는 보리죽이다. 다산은 원주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거 역시 흉년 걱정이다. 가을 추수 가망이 없어 부잣집들도 모두 보리죽을 먹는 형편이고,  신세가 고단한 자들은 보리죽도 먹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앞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리죽을 먹고 있었는데, 나도 가져다 먹어보았더니 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되어 먹고 나면 속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동쪽 집이 들들들   서쪽 집도 들들들   보리 볶아 죽 쑤려고  맷돌소리 요란하네.   체로도 치지 않고     기울도 까불지 않고   그대로 죽을 쑤어     주린 창자 채운지만   썩은 트림 신트림에 눈앞이 어질어질     해도 달도 빛을 잃고 천지가 빙빙 돈다네.  아침에도 보리죽 한 모금   저녁에도 보리죽 한 모금    이것마저 잇기 어려운데     배부르기 바랄쏜가.   있는 물건 모두 팔아     보리를 사려 해도         내 물건은 팔리지 않아   기와조각 자갈이요     파는 곡식은 날개 돋쳐  옥 같고 구슬 같네.   보릿자루 하나 나면         모여든 자 수 백 명 이네. 내 보기엔 보리죽도     마을에서  부자나 먹네. 으리으리한 집에다가  정원 수목 우거져서    소나무 대나무에     감나무에 돌밤나무 옷걸이엔 명주옷   찬장에는 놋그릇   외양간에는  소 누웠고홰에서는 닭이 자고   말 잘하고 권력도 있고  수염도 멋지더라.      극심한 가뭄에도 부자들은 보리죽이라도 먹는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보리죽도 못 먹는 신세이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20-01-14
  • ‘쥐와 야합한 고양이’ 시를 짓다.
    1810년에 다산 정약용은 ‘고양이[?奴行]’시를 지었다. 시를 읽어보자. 남산골 한 늙은이 고양이를 길렀는데       해묵고 꾀 들어 요사하기 늙은 여우로세    밤마다 초당에 둔 고기 뒤져 훔쳐 먹고.    항아리며 단지며  술병까지 다 뒤지네.       어둠 타고 살금살금 못된 짓 다하다가      문 박차고 소리치면 그림자도 안 보이나     등불 켜고 비춰보면 더러운 자국 널려 있고  이빨자국 나 있는 찌꺼기만 낭자하네.       해묵고 요사한 고양이는 쥐 잡을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주인 집 고기를 훔쳐 먹고 항아리를 엎는 등 못된 짓을 하고 있다.  늙은 주인 잠 못 이뤄 근력은 줄어가고      백방으로 생각해도 나오느니 긴 한숨뿐      생각하면 고양이 죄 극악하기 짝이 없어      당장에 칼을 뽑아 목을 치고 싶지마는       하늘이 너를 낼 때 무엇에 쓰려고 했던가.     너 보고 쥐를 잡아 백성 피해를 없애라 했지.  들쥐는 구멍 파서 벼 싹 물어다 쌓아두고   집쥐는 이것저것 안 훔치는 물건 없어    백성들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하고       기름 말라 피 말라 피골이 상접이라     그래서 너를 보내 쥐 잡이 대장 삼고     마음대로 찢어 죽일 권력 네게 주었으며  황금같이 반짝이는 두 눈도 네게 주고    칠흙같은 밤중에도 올빼미처럼 벼룩도 잡을 만큼 두 눈 밝혔지.  보라매같이 예리한 발톱 네게 주고       호랑이처럼 톱날 같은 이빨도 네게 주고  펄펄 날고 내리치는 날쌘 용기까지 네게 주어  쥐들이 너를 한번 보면 옴짝달싹 못하고 몸을 바치게 않았더냐.                                         쥐 잡으라고 고양이에게 온갖 권한을 주었는데 엉뚱한 짓 하고 있으니  늙은 주인은 한숨만 나온다.   날마다 백 마리씩 쥐 잡은들 누가 말리랴         보는 이들 네 기상 뛰어나다고 연거푸 칭찬만 할 텐데  그래서 팔사제(八?祭)에도 네 공로 보답하려고   누런 의관 차리고 큰 술잔에 술을 부어 제사 않더냐. 팔사제(八?祭)는 매년 농사가 끝나고 농사에 관계되는 여덟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여덟 신은 신농씨(神農氏 농사를 처음으로 가르쳤다는 중국 전설의 황제)  후직(后稷 농사를 관장하는 장관), 농(農), 우표철 (郵票? 권농관이 농민을 독려하기 위해 밭 사이에 지었다는 집), 고양이, 제방, 도랑, 곤충이다. 이렇게 고양이는 농사 신(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너는 지금 한 마리 쥐도 잡지 않고       도리어 네 놈이  도둑질을 하다니              쥐는 원래 좀도둑이라 피해도 적지마는          너는 지금 힘도 세고 세도 높고 맘씨까지 거칠어  쥐들이 못하는 짓 제멋대로 행하여        처마 타고 뚜껑 열고 담 벽 무너뜨리니     그러니 쥐떼들이 꺼릴 것이 없어            구멍 밖에서 껄껄대고 수염을 흔드네.       쥐들은 훔친 물건 모아다가 너에게 뇌물로 주고 태연히 너와 함께 돌아다니니                 쥐들은 고양이에게 뇌물을 주고, 고양이 비호아래 물건을 훔친다.   호사자들 때때로 너를 그리는데            무수한 쥐떼들이 하인처럼 너를  호위하고   나팔 불고 북치고 떼를 지어서는      대장기 높이 들고 앞장 서 가네.       네 놈은 큰가마 타고 교만  부리면서   쥐들의 떠받듦만  좋아하고 있구나.    내 이제 붉은 활에 큰  화살 메워 네놈 직접 쏴 죽이리.              만약에 쥐들이 행패부리면 차라리 무서운 개 불러내리라.                                               다산의 대표적인 우화시(寓話詩)이다. 그러면 남산골 늙은이 그리고 고양이와 쥐는 누구일까? 남산골 늙은이는 백성, 쥐는 도둑, 고양이는 도둑 잡는 포도군관(捕盜軍官)이다. 도둑을 잡아야할 포도군관(捕盜軍官)이 도둑의 뒷배인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     다산은 1818년 봄에 지은 『목민심서』 <이전(吏典) 6조 / 제2조 관속들을 통솔함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무릇 포도군관은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모두 큰 도둑이다. 포도군관은 도둑질하는 무리들과 결탁하여 장물(贓物)을 나누어 먹고, 마음대로 도둑질하게 하는 한편 도둑질 방법을 일러 준다. 수령이 도둑을 잡으려 하면 기밀을 누설하여 도적으로 하여금 멀리 도망가게 하고, 수령이 도둑을 죽이려 하면 슬며시 옥졸(獄卒)을 사주하여 옥졸로 하여금 도적을 고의로 놓치게 한다. 그들의 갖은 죄악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한편  『목민심서』 <형전(刑典) 6조 / 제6조 제해(除害 : 피해를 제거함)>에는 갈의거사(葛衣居士 : 칡넝쿨로 만든 옷 한 벌만 입고 지내는 거사) 이야기가 나온다.   “갈의거사는 남쪽의 호걸이었다. 일찍이 쌍교(雙橋)의 거리를 지나다가 군관이 한 도둑을 잡아서 포승으로 결박하고 뒤로 고랑 채우고 가는 것을 만났다. 갈의거사는 앞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엉엉 울면서 위로하여 말하기를 ‘원통하다 자네여! 어찌하다 이런 욕을 보게 되었는가?’ 하니, 온 저자 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둘러싸고 구경하였다. 군관이 크게 놀라며 군졸을 명하여 갈의거사를 함께 결박하라고 하니, 갈의거사가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결박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들과 같이 도둑질을 하였다는 말인가? 어찌 내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결박하려 하는가?’ 하였다. 군관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거사가 말하기를 ‘지금 온갖 도둑이 이 땅 위에 가득 찼다. 토지에서는 재결(災結)로 도둑질하고, 호구(戶口)에서는 부역을 도둑질하고, 기민 구제에서는 양곡을 도둑질하고, 창고에서는 이익을 도둑질하고, 송사에서는 뇌물을 도둑질하고, 도둑놈에게서는 그 장물을 도둑질한다. 그런데도 안찰사와 병사ㆍ수사가 서로 짜고서 숨겨 주고 들추지 않는다. 그 지위가 높을수록 도둑질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그 녹이 후할수록 도둑질의 욕심은 더욱 커진다. 이들은 향락을 누리고 훔친 좀도둑만이 큰 욕을 되니 슬픈 일이 아닌가? 내가 이래서 우는 것이지, 다른 일이 아니다.’ 하니, 군관이 말하기를 ‘선생의 말이 옳습니다.’ 하고, 술을 권하며 사과하여 보냈다.” 그런데 고양이를 감사(監司)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산은 『감사론(監司論)』에서 감사야 말로 가장 큰 도둑이라 하였다.  “밤에 담 구멍을 뚫고 문고리를 따고 들어가서 주머니를 뒤지고 상자를 열어 의복ㆍ이불ㆍ제기(祭器)등을 훔치기도 하고 가마솥을 떼어 메고 도망하는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굶주린 자가 배고픈 나머지 저지른 것이다. (중략) 그렇다면 누가 큰 도적인가? 토호(土豪)와 간사한 아전들이 도장을 새겨 거짓문서를 만들고 법률 조문을 멋대로 해석하여 법을 남용하여도 “이것은 연못 속의 물고기이니 살필 것이 못 된다.”하면서 감싸 숨겨준다. (중략) 수령이 곡식을 판매하고 부세(賦稅)를 도적질한 데도 용서하여 그냥 둠은 물론, 고과를 제일 좋게 매겨 임금을 속이니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도적은 야경꾼도 감히 심문하지 못하고, 의금부에서도 감히 체포하지 못하고, 어사(御使)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재상도 감히 성토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감사가 멋대로 난폭한 짓을 해도 아무도 힐문하지 못하고, 엄청난 전토를 차지하여 종신토록 안락하게 지내지만 아무도 이러쿵저러쿵 헐뜯지도 못하니 이런 자가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 기획.연재
    2019-12-30
  • 대학교수 정년퇴직 후 11년 외길 ‘인생2막’
    ‘홍익인간’ 생활철학…‘아무도 하지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인생의  목표  ‘Korea-W.Timor문화교류센터(KTCC)’ 설립…소수민족 지원사업 추진       '사람이 일흔살까지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는 뜻의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백세시대를 맞아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관심거리다. 유엔 기준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한다. 우리나라는 2017년 고령인구 14.2%대를 넘어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향후 8년안에 초고령사회 진입이 예측된다.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비전을 갖고 행동해야 할까.팔순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불구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마음으로 인생2막을 설계하고 실천하는 전직 대학교수를 만나보았다. ‘잘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물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물론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에게도 삶의 지표가 될성 싶어서다.    <김홍 학장 프로필> * 영암출생(1943년생)* 학력 및 경력 - 광주교육대학 졸업 - 조선대학교 법정대학(법학사) - 전남대학교 경영대학원(경영학 석사) - 전주대학교 대학원(경영학 박사) - 전남일보사 편집국 기자 - 동강대학교 교수 정년퇴임(35년) - 홍조근정훈장 포상 - 제5회 전남문학 신인상(수필) 수상 - 남도문학회 회장 역임 - 광주 YWCA 소비자고발센터 자문위원 역임 -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이사 역임 - 유네스코 광주·전남협회 이사 역임  - 영암군노인대학장 역임  - 호남일보 논설위원장(현재) - Korea-W.Timor 문화교류센터(KTCC)총재(현재) - 대한호스피스 웰다잉협회 부회장(현재) - 사)대한노인회 전라남도연합회 노인지도자대학장(현재)   ■노인대학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동기는?=어렸을 때 할아버지 슬하에서 밥상머리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어르신에 대한 경외감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년퇴직 후, 고향인 영암군노인대학장으로 활동 해달라는 권유가 있어 ‘고향에 진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학장에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영암군노인대학장 취임 후 활동상황이 궁금합니다. =영암군노인대학은 특별히 ‘찾아가는 노인대학’을 운영합니다. 2개읍 9개 면으로 11개 노인대학 총학생수 1700여명으로 교육에 필요한 비용을 영암군에서 충분히 지원함으로써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취임 초(2011년)에는 영암군 9개 분회에 컴퓨터를 기증하여 컴맹퇴치교육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영암군노인대학장 재직(2011.7.1-2019.2.28) 8년간 노고를 인정받아 1만4000여 노인회원들로부터 공로패(영암군노인지회 김소은 회장)를 받았고, 현재는 사)대한노인회 전라남도연합회 배기술 회장으로부터 전라남도 22개 시군 노인대학을 총괄하는 부설 노인지도자대학 학장으로 위촉(2019.5.14) 받아 재직중입니다.    ■컴퓨터를 기증하고 컴맹퇴치 교육을 시켰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2011년 당시에는 카페와 블로그가 유행했던 때입니다. 재능기부 차원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카페와 블로그를 제작하여 공급해 드렸습니다. 영암군노인대학을 비롯해 다른 지역 노인대학 학생들에게 ‘컴퓨터는 내친구’라는 타이틀로 어르신들이 쉽게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강의도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커져가는 외로움을 컴퓨터를 통해 해소시킬 목적이었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SNS시대에 컴퓨터와 핸드폰은 필수적인 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에 ‘컴퓨터는 내친구’라는 개념의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웰빙과 웰다잉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복지, 안녕, 행복’을 뜻하며, 우리말로는 ‘참살이’라고 번역됩니다.웰빙은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말하지요. 한 세기 이전부터 선진외국에서는 웰빙과 더불어 웰다잉이 부각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웰빙에 이어 웰다잉이 소개되었지만, 웰빙에만 관심이 있지 웰다잉은 그 개념마저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요. 이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웰다잉의 실천을 삶에서 직접 보여주고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무소유의 삶을 통해 웰다잉이 추구하는 바를 보여 주신 법정 스님의 열반은 웰다잉의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웰빙과 웰다잉의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중시하며, 그것의 조화를 통해 삶의 질을 높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웰빙이고, 웰다잉은 인간으로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소망을 전제로 삶의 내면을 풍요롭게 가꿔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웰다잉이 추구하는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의 반대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 웰다잉이 품은 뜻은 ‘잘 죽어가는’이란 진행형이므로 역설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 완결의 의미를 추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웰빙 또한 웰다잉과 다름 아니지만, 웰다잉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꿔 실천함으로 죽은 이후 영원한 기억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더욱 중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웰다잉의 한 방편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하여 말씀해 주십시요.=생명의 연장을 위한 특정 치료 방법 여부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서면으로 미리 밝힌 공적 문서를 말합니다. 의학적 치료에 관한 의사 결정 능력이 있을 때 자신의 연명 치료에 대한 의향을 미리 남겨, 죽음을 앞두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2016년 2월 3일 공포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약칭 ‘연명의료결정법’)에 의해 법제화되었습니다.19세 이상인 사람이 자신의 연명의료중단등결정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사를 직접 문서로 작성한 것. 전자문서를 포함합니다. 죽음에 임박한 상황이 되었으나 본인의 의사가 불분명한 경우, 가족이나 의료진은 현존하는 의학기술을 동원하여 생명을 연장해야 한다는 윤리적인 압박으로 인위적인 생명의 연장을 위해 노력하게 되지요. 이 경우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인위적인 생명 연장 장치에 의존하게 되어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미리 자신의 의료 방향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한 문서입니다.사)대한노인회 전라남도연합회 부설 노인지도자대학에서는 앞으로, 정규 교육과정을 통하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 대한 소양교육을 실시할 것입니다.   ■‘Korea-W.Timor문화교류센터(KTCC)’ 설립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지요.=‘Korea-W.Timor문화교류센터(KTCC)는 2008년 8월 인도네시아 서티모르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40여일간 체류한 후, 문화교류의 필요성을 느껴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12월 서티모르 우카와웨(UKAW)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동생 김용 교수(Dr, Kim Yong, Prof of English)를 비롯한  관계자 4명의 교수와 문화교류 방안을 의논한 후, 2013년 8월 전남 나주시 금천면 원곡리 산야초 연구원에서 회원 25명이 참석하여 KTCC 재단설립을 위한(‘Korea-W.Timor문화교류센터) 발기인 모임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그동안 소수민족의 예술(민속춤, 민속놀이, 의상, 공예)과 생명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쿠팡에서 소왜까지’ 사진 책자 발간(From Kupang To Soe : Indonesia Timor in Photos)을 비롯한 장학금 지원, 컴퓨터와 재활용 의류 보내기 등 문화교류를 해 왔습니다.이에 본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2018년 1월 창립총회에서 정관을 채택하고 임원을 선출하여 광주광역시에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하고, 광주광역시장으로부터 ‘비영리민간단체등록증’(2019.11.14)을 발급 받았습니다.   ■미래의 ‘Korea-W.Timor문화교류센터(KTCC) 사업계획 내용은 무엇입니까?=광주광역시장(제2019-0-광주광역시-19호)이 발급한 ‘비영리민간단체등록증’에 명기된 바와 같습니다. 첫째, 코리아-인도네시아 서티모르 문화학술 교류사업. 둘째, 서티모르 소수민족 생필품 지원사업과 봉사활동. 셋째, 소수민족 문화체험 및 연구, 교육출판 사업, 다문화 가정 문화교실운영. 넷째, 기타 목적사업에 부합하는 사업입니다. 이와 같은 사업목적을 구현하기 위하여 뜻을 함께한 KTCC 운영위원(위원장 천길홍) 28명은 지난 2014년부터 정기적으로 월례모임을 갖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우의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11일 오전11시에 광주광역시 남구 제석로 대영빌딩 2층에 ‘Korea-W.Timor문화교류센터’ 사무실을 이전하고 개소식을 했습니다. 앞으로 KTCC는 대한민국과 서티모르와 문화교류를 위해 민간외교 차원에서 양쪽의 명문대학과 MOU를 체결하고 유대를 강화하는데 가교 역할을 할 계획입니다.     ■학장님의 생활철학인 ‘홍익인간의 정신’과 ‘인생2막’의 궁극적 목표인 ‘아무도 하지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함은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한국의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이지요. 홍익인간의 이념에는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과학기술과 통신의 발전으로 지구상 온 인류가 쉽게 왕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지구촌이 되었습니다. 이제 지구촌 사람들은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원 고갈, 국가 간 갈등과 전쟁, 빈부의 격차, 난민 문제, 지구 온난화와 사막화 등의 환경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아갈 책무를 가지고 다 같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합니다.홍익인간의 첫 글자 홍은 내 이름과 같아서 어렸을 때부터 ‘홍익인간’에 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아무도 하지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인생2막의 긍극적 목표를 세우게 된 것은 경상남도 거창고등학교의 ‘직업선택 10계’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후였습니다.‘대안학교’처럼 자율적인 분위기로 운영되고 있는 남녀공학인 거창고등학교는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가르치기 위해 지난 1980년대 초에 ‘직업선택 10계’를 창안하여 지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거창고등학교의 ‘직업선택 10계’와 같은 비경쟁적인 ‘블루오션(Blue Ocean)’전략은 100세시대를 살아가는 인생2막의 노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지도자대학장으로서 보람스럽던 일과 앞으로의 계획은? =2019년 12월3일, 38기 노인지도자대학 졸업식날 나상묵(84세) 어르신 가족들과 친지들이 함께 축하하면서 기념촬영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2019년 5월14일 (사)대한노인회 전라남도연합회 노인지도자대학 학장으로 부임하여 노인지도자대학 제38기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38기생의 자긍심과 단결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삼팔광땅’의 위풍당당한 기운을 넣어드리려고 나름대로 애썼습니다. 건배사 때는 빠짐없이 “우리는 삼팔” “광땅이다”를 선후창으로 외쳐 일체감과 단결력을 과시했습니다. 건배사는 타이밍이 맞아야 하고, 센스 있는 건배사는 분위기를 조화롭게 하고 동질성을 자아내게 할 테니까요.? 앞으로 노인지도자대학 교육의 방향은 웰빙도 중요하지만, 웰다잉 쪽에 비중을 두고 교육프로그램을 편성할 계획입니다. ‘노노케어 소통관리교육’ 등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삶의 마무리를 위해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는 웰다잉 교육에 중점을 둘 계획입니다.    ■정년퇴직 후 11년간 사회활동을 다양하게 하시는데,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싼다고나 할까요. 건강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같습니다. 아무리 늦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더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간단한 운동을 합니다. 최근에는 건강테스트 겸해서 무등산 중머리재를 주말에 연 3주 다녀왔는데, 무리였던지 감기에 걸려 며칠간 혼났습니다. 과욕은 금물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 기획.연재
    2019-12-30
  • 정약용, 1808년 봄부터 다산초당에서 기거하다
    강진 백련사에서 능선 하나를 넘으면 다산(茶山)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야생차가 자라는 산이라 하여 다산(茶山)이라고 했는데,   정식 명칭은 만덕산(萬德山)이고 높이가 412미터이다. 이 산 밑에는 귤동(橘洞)마을이 있다. 가을이면 유자가 노랗게 익어가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인데 귤동은 해남윤씨 집성촌이었다. 여기엔 윤단(1744∽1821)의 초당인  다산초당이 있었다.   1808년 3월16일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놀았다. 7언 율시 두수가 전해진다. 시의 제목부터 살펴보자.     삼월 십육일 윤문거의 다산서옥(茶山書屋)에서 놀았는데 공윤도 병을 치료하며 거기에 있었다. 어찌 하다 보니 열흘이 넘게 그곳에서 묵고 있었는데 점차 이렇게 일생을 마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두 수를 읊어 공윤에게 보였다.  윤문거는  귤림처사 윤단의 큰 아들 윤규노(1769∽1837)이다. 윤단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로  행당 윤복(1512∽1577)의 후손이다. 윤효정의 아들인 윤복은 안동 대도호부사 시절에 퇴계 이황(1501∽1570)과 교류했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을 다산서옥이라고 칭했다. 아마도 초당에 책들이 있었나 보다. 한편 공윤은 윤종하인데, 고조부가 공재 윤두서(1668∽1715)였다.  다산의 외증조부가 공재이니 정약용과 윤종하는 친척 간이었다.  이는 다산이 쓴 ‘또 공윤에게 주다[又贈公潤]’ 시 첫 머리에 나온다.  나로서는 증외조부가 그대로선 바로 고조부이시지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1수 사는 곳 일정치 않게 안개 노을 따라다니는 몸    더구나  다산이야 골짜기 마다 차나무로다.          하늘 멀리 바닷가 섬엔 수시로 돛이 뜨고         봄이 깊은 담장  안에는 여기저기 꽃이로세.      싱싱한 새우무침 병 앓는 자 입에 맞고            연못과 누각 초라해도 이만하면 살만하지          흡족한 마음에도 근심은 있지만 내 분수엔 넘치니       여기서 노닐며 서울 사람에게는 자랑하지 않으리.     2수 숲이 짙고 산이 깊어 몸놀림이 느긋하고     조용하게 감상하는 맛 떠드는 곳에 댈 것인가  조수는 봄빛처럼 왔다가는 다시 가고         꽃은 나라 권세같이 성했다가 곧 시들지.    송시(宋詩)를 슬슬 보며 골라볼까 생각하고     조용히 주역 들고 이 마음 의탁한다네.   단 한 가지 두고두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연못에 가득 푸르게 연을 심지 않은 것이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열흘 넘게 윤종하와 함께 묵었다. 그동안 다산은  동문 밖 주막집과 보은 산방 그리고 제자 이청의 집을 전전하던 터라 이곳이 너무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윤규노에게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비치었다. 윤규노는 부친 윤단과 상의하여 정약용에게 초당에서 지내라고 하였다. 그 대신 윤단의 손자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가르친 18제자 중에 윤단의 손자가 6명이나 된다.  1808년 4월 초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며칠 안 되어서 정약용은 5언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적막한 숲 속의 집이요                졸졸졸 베개 아래 샘물 소리네        이틀 사흘 지나고 났더니             귀에 익어 잠자는 데 방해가 안 되네.  샘물 소리도 잠결에 들리는 적막한 숲속의 집. 시중유화(詩中有畵)다. 다산초당으로 옮긴지 20여일 지난 4월20일에 다산의 둘째 아들 학포 정학유(1786∽1855)가 찾아왔다. 큰아들 학연(1783∽1859)은 1802년에 찾아왔지만 학유는 팔 년 만에 처음 온 것이다.    사월 이십일 학포(學圃)가 왔다. 8년 만에 만났다. 얼굴 생김새는 내 자식 같은데          수염이 자라서 딴사람 같구나.          집안 편지 가지고 왔건만              틀림없는 내 아들인지 잘 모르겠네.     둘째와는 16세 때 헤어져 24세에 만났으니 처음에는 아들인가 알아보기도 어려웠다는 다산의 시는 눈물겹다.  5월11일에 다산은 윤문거와 아들 학유과 함께 용혈로 뱃놀이를 하면서 모처럼 휴식을 즐겼다.                                       한편 다산초당의 모습은 정약용의 후손 정규영이 1921년에 지은 『사암선생연보』에 잘 나와 있다.   “1808년 (순조 8, 무진) 47세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거처했다. 다산은 강진현 남쪽에 있는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서 윤단의 산정이다. 공이 다산으로 옮긴 뒤 대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 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고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두자를 새겼다. 이때에 다산은 여러 제자들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다산초당의 모습은 ‘다산 4경’시 4수,  ‘다산팔경사 (茶山八景詞)’ 8수 그리고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에도 잘 나타나 있다.  먼저 다산 4경은 다조(茶?), 약천(藥泉), 정석(丁石), 석가산(石?山)이다. 다조는 초당 앞마당에 있는 우람한 너럭바위인데 이곳에서 차를 끓였다. 약천은 초당 뒤 약수가 흐르는 샘이고, 정석은 초당 왼편 석벽(石壁)에 새긴 정석(丁石)글씨인데 다산이 썼다. 석가산은 연못 안에 돌로 쌓은 산이다. ‘다산팔경사’는 다산초당 주변의 풍경 8곳을 노래한 것이다.  산허리엔 담장이 둘러져 있고, 담장에는 산 복숭아나무 가지가 바람에 일렁인다. 초당 주렴에는 버들 그림자가 어리고, 따뜻한 날에는 꿩 소리가 들린다.  단풍나무는 비단 바위위에 얽혀 있고, 국화는 연못에 그림자를 비친다. 언덕에는  대나무가 푸르고, 작은 시냇가에는 소나무가 우뚝 서있다.  이중 제1수를 읽어보자. 산허리를 경계로 널따랗게 쳐진 담장    붓으로 그린 듯 봄빛이 그대로네     봄비가 내린 뒤라  산골짜기 더욱 사랑스럽고 산 복숭이  몇 가지엔 붉은 꽃이  예쁘네.   한편 다산은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도 지었다.  제1수는 초당 전경이다.  귤동 마을  서편에 깊숙하고 그윽한  다산      천 그루 소나무 속에  시냇물 한줄기           시냇물이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               깨끗한 바위 사이에 조용한 집 있다네.        2수는 연못 모습이고, 3수는 초당 생활이다. 제3수를 읽어보자. 대밭속의 부엌살림 중(僧)에게 의지하니         가엾은 그 중 수염이며 머리털 날마다 길어지네. 이제 와선 불가 계율 따윈  모조리 팽개친 채   싱싱한 물고기 마구 잡아 국까지 끓인다오.     정약용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초기엔  산정에 식사준비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는 젊은 중 한사람을 보내어 다산의 밥 시중을 들게 했다. 제4수 이후 제17수 까지는 꽃과 나무에 관한 시이다. 근처에 있는 복숭아꽃, 차나무, 모란꽃, 작약, 치자, 백일홍, 해바라기, 국화 등이다.   이어서 제18수는 다산이 직접 재배한 미나리 밭이고, 제19수는 초당의 모습이다. 마지막 제20수는 다산의 삶이다.  하늘이 나를 보내 이 동산에서 살게 하니      이 봄에 자고 또 취하느라 문마저 열지 않네.  산속 뜨락 온 마당에 이끼 푸른데         때때로 지나가는 사슴 발자국 뿐.         다산은 하늘이 이 동산에서 살게 했다고 흡족해 한다. 이제 다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기획.연재
    2019-12-10
  • 다산 정약용과 혜장선사의 아름다운 인연
    정약용(1762∼1836)은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와서 1818년 여름에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시 마재 마을로 돌아갔다.    다산은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정하기까지 세 번 거처를 옮겼다. 1801년 11월23일경 유배객 정약용을 모른 척한 상태에 서 고맙게도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배려로 정약용은 주막집 토담 방에서 기거하였고, 그곳이 사의재였다. 1805년 겨울에는 백련 사 주지 혜장선사(1772∼1811)의 도움으로 큰 아들과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에서 머물렀다. 다산은 아들 학연이 서울로 올라가자 다시 사의재로 내려가 지냈다. 1806년 가을부터는 아전의 아들인  제자 이청(李晴)의 집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정약용은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와 자주 어울렸다.  정약용은 1805년 4월18일에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에 나들이 하다가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1772∼1811)를 처음 만났다. 그는 다산 보다 10살 어린 학승이었다. 혜장은 처음에는 정약용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나절 대화를 나누었는데, 늦게야 알아보고 같이 잠을 잤다. 그날 밤 다산과 혜장은 주역을 논했는데 혜장은 다산 앞에서 자기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다가 다산의 ‘곤초육수(坤初六數 )’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뒤로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시면서 정성을 다했다.   1805년 겨울에 다산이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도 혜장이 도운 것이다. 다산과 혜장은 자주 어울렸고, 둘 사이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같다. 다산이 1806년 3월에 지은 시가 이를 말해준다.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 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 (산으로 가자꾸나. <山行雜謳> 20수 중 제15수) 1807년 4월에 정약용은 “사월 초하룻날 혜장이 와서 함께 백련사에 가서 놀고 싶어 했는데 제반 준비물 때문에 그만두기로 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읊었다”란 시를 지었다.   부드러운 술과  향기로운 안주로  하룻밤을 놀려고  했더니 녹음 덮인 관도(官道)에 갈 길이 멀고머네. 이틀 뒤인 4월3일에 정약용은 혜장이 주지인 백련사에서 놀았다. “사월 삼일 백련사에서 놀다”란 시를 음미해보자.   앓고 일어나 가볍게 차리고 새벽 노을  헤치면서    말을 타고 모래밭 가 어부 집을 지나가네.        밀물 때라 들판에도  잔물결이 일고 있고          봄은 갔어도 산에는 아직도 때 늦은 꽃이 있네.      시를 보면 제자 이청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 다산은 앓다 일어나  말을 타고 백련사로 갔나 보다.   폐물이기에 남이 다 버려도 달게 여긴 지 오래이나  청광(淸狂)만은 세상에다 내놓고 자랑하네.            구름 시내 한 굽이를 간신히 지나치고              지팡이 짚고 누대 오르니 석양 이전이네.           1808년 봄에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처음에는 산정에 식사를 준비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혜장은 젊은 중 하나를 보내어 다산의 밥 시중을 들게 했다. “대밭속의 부엌살림, 중(僧)에게 의지하니가엾은 그 중 수염이며 머리털 날마다 길어지네.이제 와선 불가 계율 모조리 팽개친 채싱싱한 물고기 잡아다가 국까지 끓인다오.”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중 제3수, 1808년) 다산초당에서 다산이 기거하면서 혜장과의 교류는 더욱 잦아졌다. 혜장은 다산을 만난 후 주역과 논어 등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 불경은 오직 수능엄경과 대승신기론 만을 좋아하고 염불이나 기도를 하지 않아 다른 승려들의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집이 세고 굽히지 않는 성격의 혜장이었다. 한번은 다산이 혜장에게 ‘자네는 너무 고집이 세니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라고 충고하자 혜장은 스스로를 아암(兒菴)이라고 불러 다산의 뜻을 따랐다. 그런데 불법(佛法)에는 의욕을 잃고 시나 쓰고 주역, 논어를 논하다가 술에 잔뜩 취하여 세월을 보낸 아암은 1811년 가을 어느 날 병이 들어 40살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 다산은 혜장 선사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컸다. 입적한 날, 다산은 만시(輓詩)를 지었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라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 책 자주 읽었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푸른 산 붉은 나무 싸늘한 가을 희미한 낙조 곁에 까마귀 몇 마리 가련타 떡갈나무 숯 오골(傲骨:오만방자한 병통)을 녹였는데 종이돈 몇 닢으로 저승길 편히 가겠는가.  관어각 위에 책이 천권이요 말 기르는 상방에는 술이 백병이네. 지기(知己)는 일생에 오직 두 늙은이 다시는 우화도 그릴 사람 없겠네.” 한편 1812년 겨울에 혜장의 두 제자가 그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다산을 찾아왔다. “우리 스승님의 탑(塔)을 세워야 하는데, 선 생께서 그 명(銘)을 지어주십시오”하므로, 다산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지은 글이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이다. 다산은 비문에서 혜장의 탄생과 불교에의 귀의, 혜장과 첫 만남, 보은산 방과 다산초당에서의 교류, 아암이란 호에 대한 내역, 아암이 죽은 해에 쓴 자작시를 소개하고 명(銘)으로 끝맺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빛나는 우담발화 (燁燁優鉢)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시들었네(朝華夕衰) 펄펄 나는 금시조(翩翩金翅) 잠깐 앉았다가 곧 날아갔네(載止載騫). 우담발화(優曇鉢華)는 3천 년 만에 한 번 꽃이 핀다는 무화과의 일종으로 아주 드물게 있는 일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비범한 인 물 혜장이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것을 애도하는 표현이다. 금시조는 인도의 전설에 나오는 용을 잡아먹는다는 새이다. 슬프다, 이 아름답고 깨끗함이여 (哀玆都潔)지은 글 있어도 전할 사람 없어라(有書無傳) 그대와 더불어 함께  갔다면(與爾偕征) 오묘한 진리, 깊은 이치도 열어젖힐 수 있었으리(手啓玄鍵) 조용한 밤에 낚시 거두니(靜夜收釣) 밝은 달이 배에 가득했네(明月滿船) 지난봄에 입을 다무니(殘春緘口) 산 속 동네가 너무 쓸쓸하도다(山林寂然). 이름 역시 나이든 아이였는데도(是名壽童) 하늘은 그 나이에 인색하였네(天嗇其年) 이름이야 스님인데 행실은 유자(儒者)이네(墨名儒行) 군자가 어여삐 여긴 바로세.(君子攸憐). <주역>·<논어> 등에 빠진 유학자 같은 승려 혜장선사. 그가 너무 빨리 저 세상으로 간 것을 아쉬워하는 다산의 마음이 애잔하다. 한편 혜장선사의 ‘아암장공탑’은 해남군 대흥사 부도(浮屠) 밭에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부도 밭이 있는데, ‘아암장공탑’은 정문 입구의 청허당 서산대사와 조선 차(茶)의 중흥을 이끈 초의(草衣 1786∼1866) 대종사 탑 사이에 세워져 있다. 탑비는 ‘동방제십ooo대사’라고 적혀 있고, 비문 글씨는 너무 희미하다. 그렇지만 찬찬히 읽어 보면 ‘아암’이란 글자가 여러 번 나온다. 비의 왼쪽 맨 아래쪽엔 ‘정약용선(丁若鏞 撰)’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 다산 정약용과 혜장선사를 다시 생각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아름다우면서도 애달프다.    
    • 기획.연재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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