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17 (일)

기획.연재
Home >  기획.연재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하늘 기둥 천태산 비자나무
    화순군 도암면에 개천산(497.2m)과 조금 낮은 천태산(497m)이 어깨를 나란히 형제처럼 서있다. 멀리서 보면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이라고도 부르는 데 개천산이 더 뾰족하다. 또 이른 봄, 노루귀며 괭이눈, 바람꽃 등이 어느 곳보다 먼저 지천으로 피어나는 산이다.개천산은 하늘을 연 산이고 천태산의 그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니 이름으로만 하면 이보다 큰 산이 또 있을까 싶다. 또 개천산의 물은 춘양천이 되어 지석천으로 가고 천태산의 물은 대초천이 되어 지석천으로 가니 잠시 헤어졌다 다시 한 몸이 된다.천태산 꼭대기 바위 벼랑에 도선국사의 철마방아 흔적이 있다. 당나라 일행선사가 우리나라 명산의 영기를 모두 끊어버렸다. 이에 도선이 천태산 봉우리에 철마방아를 얹었다. 매일 철마방아를 찧으니 당나라 큰 인물이 한 명씩 죽었다. 이에 일행선사가 명산의 영기를 다시 이었고, 도선국사도 철마방아를 없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어쨌든 통쾌하고 어깨를 으쓱 편다.개천산 중턱에 커다란 돌거북 한 마리가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개천사 뒤쪽 300여 m 즈음인데,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듯싶다. 이 거북이 산에 오르면 국태민안의 새 세상이 된다고 한다. 그게 두려웠던지 일제강점기에 왜인이 거북이의 목과 발을 잘라버렸다. 다행히 2000년도 들머리에 잘라낸 머리와 발을 일부 찾아 복원해놓았다.스님들이 먹을 밥을 지으면 쌀뜨물이 20여 리 떨어진 춘양면의 지석천까지 흘러내렸다는 개천사의 천불전(千佛殿)은 6·25 때 불에 타 연기로 스러졌다. 이제 다시 복원되어 이웃 고을 운주사의 천탑과 함께 천불천탑의 옛 이름을 잇고 있다.이곳 개천산과 천태산 비자나무 숲은 11만8800㎡로 1982년 전남도기념물 제65호였다가 2007년 8월 9일 천연기념물 제483호가 되었다. 300여 그루의 300년 넘은 비자나무와 450살이 되어가는 비자나무 한 그루는 바라보기만 해도 경이롭다. 더하여 여기 울울창창한 대나무는 기묘사화로 낙향한 학포 양팽손의 화제였다. 그의 먹으로 그린 4점의 대나무 첫 그림이 ‘천태연간’(天台鍊簡)이니, 곧게 뻗은 대나무는 갈고 닦아 하늘의 별이 되고자 하는 선비의 절개이자 희망이었다. 또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의 ‘절죽’(折竹), 희망의 새봄을 품은 죽순의 ‘신죽’(新竹), 바람이 흔들어도 굴하지 않고 허리 곧추세우는 ‘풍죽’(風竹)이 비자나무와 함께 늘푸른 짙푸름으로 하늘을 열고 떠받치고 있다.500살이 되어가는 이곳 비자나무를 만나기 위해 개천사 대웅전 앞을 지나 천태산으로 오르는 대숲에서 학포를 만나고 그 정신을 되새긴다.학포(學圃)는 포은 정몽주를 따른다는 것이며, 학문의 밭을 일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학포 양팽손(1487~1545)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자 서화가이다. 1510년 27살에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했다. 1519년 기묘사화에 조광조는 능주에서 사약을 받았고, 다섯 살 아래 양팽손이 그의 주검을 고향 마을 중조산에 잠시 거뒀다.그 뒤 양팽손은 학포당을 짓고 은거하며 그림을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산수도가 대표작이고, 묵죽도는 그의 3남인 양응정이 가지고 있다가 정유재란 때 왜병에게 약탈 당했다. 일본 히로시마현 대원사에 있는데, 1597년 후손들이 사진으로 촬영해 왔다.어느 날 마음이 답답하고 외롭다면 개천과 천태의 산으로 가자. 외롭고 답답한 학포를 달래준 울창한 대나무와 부드러우나 비늘줄기의 잎끝이 따끔하게 느껴지는 비자나무 숲을 거닐며 500살을 바라보는 비자나무도 만나볼 일이다.(김 목/동화작가)
    • 오피니언
    2021-10-14
  • 만민공동회 투쟁… 17명 독립협회 지도자 석방
    1898년 11월 4일 박정양 내각은 독립협회에 공문을 보내어 11월 5일까지 25명의 중추원 의관을 선출하여 명단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11월 5일에 독립관에서 중추원 민선의관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그런데 11월 4일 밤에 ‘익명서(匿名書)’가 서울 광화문과 시내 곳곳에 게첨되었다. ‘익명서’에는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목적은 황제를 몰아낸 후, 대통령 박정양 · 부통령 윤치호 · 내부대신 이상재 등을 내세워 공화제 국가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는 의정부 찬정 조병식,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 법부협판 이기동 등이 꾸민 ‘익명서 조작 사건’이었다.   그런데 조병식 등은 고종에게 ‘익명서’를 보이면서 독립협회가 황권을 폐하고 공화제 국가를 만들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익명서’를 읽은 고종은 즉각 독립협회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독립협회 간부 20명의 체포령을 내렸다. 아울러 고종은 ‘헌의 6조’에 서명한 박정양 등을 파면시키는 동시에 친러수구파인 조병식을 의정부 참정 겸 법부대신 임시서리로, 민종묵을 외부대신 겸 내부대신 임시서리로, 박제순을 농상공부대신으로, 김정근을 경무사로 임명했다. 조병식과 김정근은 11월 4일 밤중부터 11월 5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이상재(독립협회 부회장), 정교, 남궁억, 이건호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체포했다. 다행히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와 최정덕, 안영수는 체포당하기 직전에 도피하였다.아펜젤러 집으로 피신한 윤치호는 11월 5일의 일기에 고종 황제에 대한 배신감과 러시아·일본의 배후세력 흉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오늘의 관보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해임시킨 칙령을 공포했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 노예 유기환과 친러 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 없이 모종의 알짜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를 지원하고 있다.저주받을 왜놈들! 그들이 대한의 마지막 희망인 독립협회를 분쇄시키는 데 러시아인들을 돕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을 나는 참으로 희망한다” (윤치호, 윤치호 일기, 1898년 11월 5일)실제로 일본공사 대리는 ‘대한제국 황제가 독립협회 해산에 사전 동의했다’고 일본 외무성에 보고하였다. 삽시간에 서울 시내에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었으며, 박정양 내각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러자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동요했고, 맨 먼저 배재학당 학생들이 경무청 문 앞에 도착하여 항의 시위를 하였다. 이어서 영어학교와 일어학교 학생들도 경무청 앞으로 밀려왔고, 뒤이어 독립협회의 회원과 시민들 그리고 황국중앙총상회 회원들과 한국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贊襄會) 회원들도 합류하였다.11월 5일 오전, 경무청 문 앞에는 삽시간에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하였고 자연스럽게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만민공동회에서 시민들은 임병길 등 5명을 총대 위원으로 선출하여 경무사 김정근에게 독립협회 지도자 체포를 항의하고 사건 경위의 해명을 요구하였다. 시민들은 분개해서 다투어 연설을 한 다음 ‘체포와 투옥을 자원’하기로 결의하고, 체포당한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자기들도 체포해 달라고 다투어 요구하였다. 경무사는 당황하여 시민들은 체포대상자 명단에 없으므로 체포할 수 없으니 해산해 줄 것을 종용하였다.그러나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았고, 오후에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종로의 시전상인들도 철시하여 고종 황제와 수구파 내각의 처사에 항의하였다.수구파 내각은 경찰 무력으로 시민을 해산시키고자, 순검을 내보내어 칼을 뽑아서 시민을 위협했다. 그런데 시민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으므로 순검들이 놀라 경무청 안으로 도망하여 들어왔다. 경무청 문 앞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수구파 내각은 다급하여 시민들을 설득시켜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완강히 해산을 거절하고 모닥불을 피워 놓고 철야농성을 시작하였다.밤은 깊어 가는데 곳곳에 핀 모닥불이 일대를 대낮같이 밝힌 속에서, 만민공동회를 연 서울 시민들은 ‘독립협회 회원 석방’ 아니면 ‘자원취수’해 줄 것을 소리 맞춰 외쳤다. 서울의 외국인들도 낮부터 나와서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국민들의 애국적 의기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이날 밤 만민공동회에는 각 곳에서 의연금과 의연물이 답지하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은 장국밥 3백 그릇을 보냈고, 시민과 상인들이 은화를 보내어 온 것은 다 셀 수 없으며, 외국인들까지도 성원을 보냈다. 이날 밤 시민들은 일치단결하여 경무청 문 앞에서 밤을 세웠다. 만민공동회 2일째인 11월 6일에는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모두 철시하고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였고 시민들은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했다. 11월 7일 아침 6시경에 경무청은 이상재 등 17명을 고등재판소로 이송하였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고등재판소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이날 외부대신 민종묵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는 것에  양해를 구하기 위해 각국 공사관을 순방하였다. 그런데 영국 총영사와 미국 공사가 군대 동원에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만민공동회는 고등재판소장에게 이상재 등 17명의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이날 오후 경무사가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만민공동회는 “17명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하고 물러가지 않았고, 고등재판소 문 앞에는 시민들이 더욱 많아졌다. 특히 각 학교 학생들은 학부(學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수 참가하였는데, 11세의 소학교 학생 장용남의 “피를 토하는 연설”이 화제였다. 이처럼 만민공동회 참가자가 수만 명에 이르자, 고종과 수구파는 크게 당황했다.  11월 8일엔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다. 시민들은 찬비를 맞으면서도 고등재판소 문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철야했다. 고종은 이날 중추원 의장 한규설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장에 임명하여 정책 전환의 조짐이 보였다. 11월 9일 오전 9시경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은 군대 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 탄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친위대 2개 중대 병력을 투입해서 탄압을 획책했다가 실패하였다.이날 구경나온 외국인들은 만민공동회의 시위와 시민의 호응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외국공사·영사들도 외부(外部)를 방문해서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다.뿐만 아니라 보초를 선 군인들까지도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했으며, 이날 밤 만민공동회를 포위하고 있던 200명의 군인들은 스스로 해산하여버렸다.심지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나온 한성부 관리들까지도 수구파 정부의 모략을 개탄하고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하였다.한편 전 승지 윤길병 등이 상소를 올렸다. “이상재 등 17인을 경무청에 가두었다가 곧 법부에 넘겼습니다. 신 등이 삼가 생각건대 저와 같이 잡힌 17인은 바로 신 등과 일체 공적도 같고 일체 죄를 지은 것도 같습니다. 때문에 모두 자수하여 옥에 갇히려고 법부의 문 앞에서 4, 5일간 풍찬노숙하고 있습니다.그러던 차에 경무사 신태휴가 신등을 타이를 때 소매 속에서 익명의  투서를 꺼내서 보이고, 또 이름을 적은 목록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 투서가 간사한 무리들이 음모를 꾸며 모함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가만히 생각건대 이 글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백성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터인데 유독 한 사람만이 먼저 보고서 임금에게 보고하였으니 너무나 의아합니다.  아래에서 재판을 받게 하소서”(고종실록 1898년 11월 9일) 이날 밤도 시민들은 추위와 찬비 속에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철야했다. 만민공동회 6일째인 11월 10일에 대세는 결정적으로 만민공동회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시위가 계속되자 고종은 조병식·민종묵·유기환 등을 해임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법부대신 한규설을 불러들여 독립협회 17명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가 묻고 재심까지 끝났다는 대답을 듣자, 즉시 돌아가 판결해서 마무리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윽고 법부 대신 한규설이 피고 이상재 등 17명은 대신을 위협하고 재판을 강청한 죄가 있으므로 17명 전원을 태형 40대에 처한다고 선고했다고 아뢰자, 고종은 칙임관·주임관으로서 실직(實職)이 있는 사람만 속전(贖錢)을 물도록 하고 나머지는 속전도 면제한다고 제칙을 내려 17명 전원을 즉각 석방하였다. (고종실록 1898년 11월 10일)  이로써 만민공동회의 6일간의 투쟁으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석방되었다. 시민들은 감격에 넘쳐 서로 붙들고 울며 만세를 소리쳐 불렀다.
    • 기획.연재
    2021-10-13
  • 사람 사이 상식이야기/돼지와 부처
    최근 돼지가 세간의 화제랍니다. 한 유력 정치인이 상대 진영에 대해 한 말 때문이라네요. 경쟁 상대(들)를 돼지에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동물(짐승)이다’라거나 ‘동물 같다’라고 하면 대개 욕설(辱說)이 되지요. 개를 ‘아이’ ‘애기’라고 애지중지하며 방 안에서 함께 자고 밥 먹으며 키우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개 나으리’도 있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개(돼지) 같다’라고 하면 썩 좋아할 것 같지는 않네요.사람한테 돼지라고 한 것은 오래 전 사례가 있습니다. 이씨조선 태조(이성계)가 무학(無學)이라는 (불교) 승려와 이야기하면서 무학을 ‘돼지 같다’라고 했고, 무학은 이성계를 ‘부처 같다’라고 했다는 것이지요.이 일화는 이성계가 비난 혹은 욕한 것에 대한 무학의 반격이 ‘훌륭하다’는 측면에서 인용되곤 합니다. 평범한 처세훈부터 심오한 종교·철학적인 견해까지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딱히 실생활과 연관시키자면,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역량(금도(襟度) 포용력)이 어떤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겠습니다. 무학의 종교와 관련해, 모든 것은 ‘무등등(無等等)’이니 ‘너나 잘 해’라는 깨우침의 표현이라고 내세울 수도 있겠네요. 결국 돼지 같은 심성이나 자질을 가진 사람은 대상을 돼지라고 보고, 부처도 마찬가지라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정도 될까요?고답(高踏)적인 논의나 재치문답 같은 말장난 빼고, 돼지와 부처 이야기의 핵심은 뭐겠습니까? 최근 화제가 된 돼지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부처는 돼지를 보고도 “부처로구나!” 합니까? 도둑·강도·사기·횡령·배임 등 범죄자들에게도 “부처님!” 하며 받드나요? 후안무치한 인격 파탄자를 고상한 선비로, 파렴치범을 훌륭한 사회 활동가로 모십니까? 그래야 부처인가요? 그런 부처가 어디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돼지 소동의 실상은 뚜렷하지요. 상대편을 ‘돼지’라고 한 정치인은 자신이 돼지라는 것을 자백하고 확인한 것입니다. 저 말의 가장 단적인 의미는 동류(족)끼리 서로 잘 알아본다는 것일 테니까요. ‘말’로 업(業)을 삼는 자가 이런 정도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니 진부한 비유로 논점을 흐리게 하는 교활한 술수를 남발한다는 의심까지 받는 것이지요. 끔찍한 일입니다. 돼지와 부처 사이에서 삶의 잡답(雜沓)을 견디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니, 과연 무슨 길이 있기는 하겠는지요!  
    • 기획.연재
    2021-10-12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해 뜨는 들모실 느티나무
    화순군 이서는 광주광역시의 주산인 무등산의 뒤쪽이 아닌 앞쪽이고 해 뜨는 동쪽이다. 뒤가 튼튼한 것도 좋지만 앞이 든든한 것은 더 좋다. 뒤로 지나가는 시간도 살펴보지만, 현실은 앞으로 가는 시간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뒤는 그저 역사가 되지만, 앞은 그 역사의 희망이자 그걸 이루는 소망이다.화순군 이서면 야사리는 무등산 동쪽의 이서천, 장복천, 안심천을 젖줄로 살아가는 마을이다. 이서천은 무등의 3대 폭포인 세 무지개가 뜨는 시무지기에서 내려온다. 장복천은 서석대, 입석대와 더불어 무등산 3대 주상절리인 광석대에서 내려온다. 여기 규봉암은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며 보조국사 지눌, 그의 제자 진각 등 여러 국사가 도를 이룬 곳이다. 또 지공과 나옹도 거쳐 갔다. 안심천은 무등산 자연휴양림인 편백나무숲에서 흘러온다.그렇게 이서천은 아름다운 무지개를 품은 물이고 장복천은 불경으로 도를 닦은 물이다. 더하여 안심천은 편백향기 가득한 물이니, 이 물을 마시고 손발을 담그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신선이라고 해도 넘치는 말이 아니다.이 천혜의 땅에 연산군 6년인 1500년경에 사람이 들어왔으니, 야사는 우리 말로 들 마을인 ‘들모실’이다. 이걸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평사, 금사, 사촌, 사천이라 하다가 야사라고 하니, 들모실이 들모래가 된 셈이다. 그렇다고 물이 거꾸로 흐르진 않을 거다.또 이 물이 흘러가 동복천이 되는데, 이곳의 4대 적벽이 절경이다. 이 적벽은 기묘사화에 이곳으로 유배 온 신재 최산두가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먼저 물염적벽의 물염정은 조선 중종때 풍기군수를 역임했던 물염 송정순이 건립한 정자이다. 이 물염은 속세에 물들지 않겠다는 뜻이니 가히 신선이 사는 마을의 정자 이름이다.창랑리의 창랑적벽은 높이 약 40m에 길이가 100m 가량 이어지며 펼쳐지는 병풍절벽으로 그 느낌이 웅장하다. 한 여름의 붉은 베롱꽃, 뭉실뭉실 피어나는 하얀 뭉게구름을 담고 찰랑찰랑 흘러가는 물결은 한 폭의 살아있는 그림이다.노루목 적벽은 장항적벽의 우리말 이름이다. 이곳에 삿갓 선생이라 부른 김병연의 시가 남아있다. ‘무등산고송하재, 적벽강심사상류’, 그러니까 ‘무등산이 높아도 소나무 가지 아래이고 적벽강이 깊어도 모래 위로 흐른다’이니, 자연의 순리를 담아 인간의 교만함을 경계했다. 또 이 노루목 적벽이 동복호가 되기 전에는 불꽃놀이를 했던 곳이다. 불붙은 풀짚단이 적벽 위에서 떨어지고, 강물에서 올라오는 불꽃 그림자가 푸른 물결에서 합쳐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이어 보산적벽을 보고 동복천을 따라가면 평양의 만경대와 비슷한 만경대이고, 연둔리 둔동마을에 이른다. 이곳 아름다운 물마을 건너편 구암마을이 삿갓 선생이 숨을 거둔 종명지이다.전라남도 기념물 제235호인 해 뜨는 마을 야사리의 느니타무 나이는 400살쯤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 두 그루를 할머니 나무로 모시고 마을 앞 논가의 할아버지 나무와 함께 당제를 지냈다. 하지만 할아버지 나무는 고사되어 이제 그 자리에 손자뻘 나무가 있다.이 해 뜨는 느티나무는 옛 이서중학교 운동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 따라서 축구도 마음대로 못했지만 나무와 아이들은 평생 친구였다. 그러다 2008년 2월 일곱명의 졸업생과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느티나무만 옛 학교터를 지킨다.하지만 가까이 있는 천연기념물 제303호인 500살 은행나무와 함께 늠름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으니, 우린 그저 산천과 인걸이 변함없이 의구하기만을 기원할 따름이다.김 목/ 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10-07
  • “그늘진 어르신들의 삶, 따스한 ‘살핌’으로 채워드려요”
    목이 불편한 최봉길씨와 다리가 불편한 이희영씨는 LH 광주동남권지사에서 활약하고 있는 ‘홀몸어르신 살피미’다. 몸은 불편하지만 홀몸 어르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사명감으로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홀몸어르신 살피미’로 따뜻한 사랑을 펼치고 있는 이들의 활약을 살펴봤다.남다른 소명감으로 홀몸어르신을 살피다LH 광주동남권지사에서 ‘홀몸어르신 살피미’로 활동하고 있는 최봉길씨.그가 남다른 소명감으로 정성을 쏟고 있는 이 일은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광주지사에서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 패키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적합한 직무로 추천받은 것이다. 광주천주교수도회에서 노인심리상담교육을 이수한 것을 비롯해 심리상담사자격증(1. 2급)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봉사활동을 많이 해왔기에 LH 채용에서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다. 단 6개월의 짧은 기간이지만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어르신 보호와 살핌 서비스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애로사항을 지원해주는 메신저 역할그는 동료 이희영씨와 함께 활동을 진행하면서 홀몸어르신에게 전화를 하고 직접 방문도 하면서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모두 챙겨보고 있다. 늘 함께하며 어르신을 살피는 업무에 정성을 쏟다보니 가족 같은 끈끈한 애정으로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홀몸어르신 살피미 활동을 직접 해보니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란 걸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이 제도가 LH 임대주택공급자에게서만 아니라 범국가적으로 확산되어 어르신들께서 행복한 삶을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홀몸어르신 살피미’는 말 그대로 그늘진 어르신들의 삶을 따스한 ‘살핌’으로 채워주며, 특히 홀로 사시는 80세 이상 어르신에게 말벗이 되어줌으로써 외로움을 해소시키고 우울증을 치유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말벗을 통해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무연고 사망 등 사고를 예방하고 사회적 소외감을 해소시켜 주는 것이 이들의 중요한 역할이다.단순히 말벗서비스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전화 및 방문을 통해 임대료·관리비납부 지원, 각종 복지제도안내, 생활민원접수 등 다양한 살핌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애로사항을 지원해주는 메신저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주민센터에서 청소와 식사 제공 등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사각지대도 있어요. 방문해서 대화를 나눠보고 혜택을 못 받으시거나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주민센터에 연결해 드리고 있어요.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애로사항이 해소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화와 방문으로 ‘살핌’ 활동업무는 먼저 어르신에게 안부전화를 돌려 현황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전화를 해보면 받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전화 연결이 되지 않으면 여러 차례 다시 해보는데 대부분 병원에 있거나 전화가 와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방문 시에는 먼저 전화로 ‘살핌’ 활동을 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후 방문한다. 안타까운 부분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방문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전화 안부 위주로 ‘살핌’ 활동을 하면서 수차에 걸쳐 살핌 전화를 드려도 전화를 받지 않는 어르신을 우선적으로 방문하고 있다.“어르신들을 안 모시려고 하고 자녀들이 안 오니까 우울해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복지관 같은 데 나가고 싶어도 몸이 힘들어서 못 가시고 이웃과도 단절된 채로 계신 거죠.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그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며 다음 세대를 위해 많은 역할을 하신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어르신들의 행복한 삶을 소망‘홀몸어르신 살피미’ 최봉길·이희영씨는 어르신과의 직접 대면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고 전한다. 빌라에 홀로 거주하시는 81세 어르신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눈물을 글썽이시던 모습에 안타까웠다고 한다.“자녀들은 있지만 자주 못 보고 홀로 외롭게 산다고 하시는데 경로당이나 복지관 프로그램에도 몸이 아파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절대 늙어서는 안되니 늙지 말라고 계속 말씀하시며 본인의 아픈 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셨죠. 늙지 않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세월이 비켜가지도 않는데 어찌 늙지 않을 수 있겠어요.”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장애어르신도 있다. 연락이 닿지 않아 확인해보니 병원에 입원하여 발목수술을 하고 치료 중에 있었다고 한다.다행히 주민센터에서 식사와 청소를 지원해 드리고 있어 집안은 비교적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이 어르신은 3층에 거주하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1층에 내려가지를 못하며 최근 다리수술을 앞두고 수술비 걱정이 컸다고 한다.“주민센터에 어르신의 어려운 사정을 전하고 지원 방안을 요청했더니 사정을 파악한 후 동 복지위원회를 개최해 수술비 지원과 토·일요일 도시락을 집배달로 지원해주는 조치를 해준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어르신께서 너무 고마워 하셨어요. 전남대학교 병원에서는 수술비를 지원했다고 들었어요. 또 LH에서는 휠체어로 자유로이 이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1층 임대공급 주택이 생기면 계약을 변경 우선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홀몸어르신 살피미’로 따뜻한 사랑을 전하고 있는 최봉길·이희영씨는 어르신들이 더 편안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복지와 고용을 동시에 ‘홀몸어르신 살피미’홀몸어르신 살피미 사업은 LH가 매입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홀몸어르신 가구의 주거 서비스 강화를 위해 2018년부터 운영해 오고 있다.‘홀몸어르신 살피미’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와의 협업을 통해 개발한 사업으로,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취업이 어려운 장년장애인을 채용하여 신규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관내 홀몸어르신에게 서비스를 제공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특히, ‘홀몸어르신 살피미’는 척박한 취업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장년장애인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홀몸어르신의 삶의 질 제고를 위한 주거복지 서비스를 강화하여 고용과 복지를 동시에 달성한 모범사례로 평가받고 있다.이러한 평가에 힘입어 작년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선정한 ‘장애인 고용우수사례’와 기획재정부가 주관하는 ‘공공기관 혁신 우수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LH는 다양한 기관과 협력하여 공공임대주택 입주민 수요에 맞춘 다양한 주거서비스를 발굴하고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일자리 확대에도 기여할 계획이다.
    • 기획.연재
    2021-10-06
  • 사람 사이 상식이야기/“먹었으면, 좋겠다?”
    최근 대한민국 국력이 강해지고 경제적 영향력도 커지는 데 따라 한글을 배우려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연예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라네요.한글은 세계 여러 문자 중 가장 과학적이라고 합니다. 또 배우기 쉬워, 어떤 언어를 쓰는 무슨 나라 어느 민족이건 초등학교 수준의 학력만 있으면 한나절 만에 배울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요. 특히 컴퓨터가 일상화되고 이동통신기기가 보편화되면서 ‘기계화’에 가장 적합한 언어로서 각광 받고 있답니다. 문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완벽하지 않은 국가와 민족들이, 한글을 자기네 문자로 쓰려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요. 우리 글 즉 한글이 우리뿐 아니라 전 인류에게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다니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옳고 바르게’ 쓰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중요한 사안이겠지요. ‘상식 이야기’가 시시콜콜한 것까지 꼬치꼬치 따진다는 지적에 변명하려는 것입니다. 소중한 지면(紙面)을 낭비하는 도로(徒勞)만은 아니리라고 자위(自慰)하는 것도 되겠지요. 너그럽게 헤아려 주시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오늘은 ‘~으면 ~겠다’라는 쓰임을 살펴보지요. ‘~으면’은 과거에 발생한 일과 관련해 가정(假定)할 때 사용합니다. 즉 과거 시제(時制)인데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으면’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예를 들어 “이번 선거에 아무개가 당선‘됐으면’ 좋겠다”라는 식입니다. 선거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때라면 “당선되면 좋겠다”라고 해야 하고, 지난 선거에 관해서라면 “당선됐으면 좋았겠다(좋았을 것이다)”라고 해야 맞겠지요. 시제(時制)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일의 원인과 결과가 애매해집니다. 후회와 희망 사항, 문제와 해법이 뒤섞여 혼란을 피할 수 없게 되지요. 그리고 그 시끄러운 곳에 도둑이 들어옵니다. 구걸하듯 자리를 차지한 다음, 어찌어찌 그럴 수 있는 것이 되고, 마침내 ‘유일하게 옳은 것’이 되고 말지요. 인간은 생각한 것을 말하고, 글로 쓰기도 합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요. 그러니 실생활의 법에 앞서 말과 글의 문법이 중요합니다. 잘 지켜야지요.‘좋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쓰는데 좋은 세상이 될 리 없습니다. ‘좋은 세상이 되면 좋겠다’라고 해야, 옳게 원하고 바르게 이룰 가능성이 생길 거예요. 말글 생활은 물론이고 우리 삶의 절대 전제가 시간입니다. 어찌 중요하지 않겠어요!  
    • 기획.연재
    2021-10-05
  • 삶, 숨, 쉼터, 나무이야기
    식영정의 높은 솔이 사는 곳은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산 75-1번지이다. 정자 정(亭)자는 언덕 위의 집을 가리킨다, 그 언덕 위의 집 식영정의 높은 솔들은 나이가 어리면 200살, 300살이다.이 식영정은 김성원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별뫼라 불리는 셩산 기슭에 터를 닦아 명종 임금의 1560년에 지었으니, 가장 나이가 많은 소나무는 400살, 500살도 되었을 것이다.식영정 이웃 마을 소쇄원의 530살쯤 되는 소나무가 10여 년 전 고사하였는데, 이곳 식영정의 500살 높은 솔은 아직 청청하니 그나마 고마운 일이다.소나무는 크게 육송, 곰솔, 외래종으로 구분한다. 야산에 흔한 리기다는 북미산이고, 곰솔은 해송이니 바닷가 소나무이다. 내륙 소나무인 육송은 적송, 금강송, 반송, 처진소나무 등 색깔이나 형태로 나눈다. 그런데 붉은소나무를 적송이라 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말 말살에 따른 이름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냥 송이나 송목이라 했다. 그리고 송진은 각종 도료나 의약품, 화학제품의 원료이고, 하얀 속껍질은 보릿고개의 구황식품이었다.이 귀한 높은 솔이 있는 식영정은 그림자가 쉬어간다는 곳이다. ‘장자’의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던 바보 이야기가 그 유래이다. 그러니까 그림자가 두려운 바보가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달아나다, 문득 그늘에 들어가서야 자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여기서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이다. 옛 선인들은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 쉬는 곳을 ‘식영세계’라 했다. 임억령이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산보, 김성원, 정철, 고경명, 백광훈 등과 교우했던 이곳 식영세계는 부용당, 서하당, 연못, 성산사가 한 울타리에 있는 전통원림이다.부용당은 피어나는 연꽃 못에 그림자를 던져놓고 쉬는 쉼터이며, 삶터를 벗어나 노는 집인 서하당은 숨터이다. 성산사는 여기 머물던 식영인들의 영혼을 모신 곳이니 삶터이자, 숨터, 쉼터이다. 그러니 부용당, 서하당, 성산사를 지키는 높은 솔의 위상이 어떠할지 짐작이 된다.그럼에도 양산보가 은거하던 이웃 마을 소쇄원이나, 식영인들이 어린 시절 공부하던 창계천 건너 이웃인 환벽당은 그저 그렇지만, 그중에 취가정만큼은 사뭇 마음이 쓰인다.취가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총사령관이었던 김덕령(1568~1596) 장군을 기리기 위해 1890년에 세웠으니 이곳 정자들의 막내이다. 취가정이란 이름은 권필의 꿈과 관련이 있다.어느 날 권필이 꿈을 꾸는데 술 취한 김덕령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노래를 불렀다. 잠에서 깬 권필이 이를 옮겨 썼으니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듣는 사람 없네./ 나는 꽃과 달에 취함도 바라지 않고/ 나는 공훈을 세움도 바라지않네./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네./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아는 사람 없네./ 내 마음은 장검으로 명군께 보답만 하고 지고 .’이다. ‘취시가’라는 제목이 붙여진 연유이기도 하다.또 마음 쓰이는 것이 있다. 원효계곡에서 발원하여 흘러온 창계천을 이곳에서는 자미탄이라 한다. 식영정의 석병풍 아래로 이어지며 피어난 백일홍이 물결에 여울져 흘러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서 얻은 이름이다. 신작로가 나며 그 석병풍은 흔적만 남았고, 또 2018년 폭우에 300살 소나무 아우가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용트림하듯 하늘 향해 솟은 식영정 높은 솔을 우러르며 삶과 숨과 쉼을 이야기한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9-30
  • 1만여명 참석 관민공동회… 백정 출신 개막연설
    1898년 10월 15일에 독립협회는 의정서리 박정양과 회담을 갖고 잡세 혁파와 중추원 관제 개정을 통한 의회 설립을 협의하여 박정양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이러자 수구파의 조종을 받은 황국협회 회원들은 16일에 박정양의 집에 몰려가서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다 같은 민회인데 어째서 독립협회만 상대하냐며 항의하고 박정양의 사임을 요구했다.10월 20일에 고종은 토론은 정치문제 이외에만 허용하고, 집회는 한 장소에서만 하도록 하는 이차집회(離次集會: 장소를 옮겨서 집회를 여는 것) 금지 조칙을 내렸다. 10월 21일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규탄을 받고 물러난 윤용선을 의정부 의정에 독립협회에 비판적이었던 최익현을 의정부 찬정에 임용했다.  이러자 독립협회는 10월 22일부터 정해진 장소인 독립관이 아닌 경무청 앞에서 집회를 열고, 칙명을 위반했으므로 처벌을 받겠다는 뜻으로 철야 농성을 하였다. 아울러 독립협회와 시위군중들은 신임 의정 윤용선의 집 앞에서 시위 집회를 열어 윤용선으로부터 자진 사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독립협회는 고종의 집회 금지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회를 계속했다. 이러자 10월 23일에 고종은 의정부 찬정 박정양을 참정(參政 총리)으로 승진시키고, 중추원 의장에 한규설, 부의장에 윤치호를 임명하였다. 아울러 고종은 중추원 관제를 중추원 의장·부의장과 협의해서 개정하라는 조칙을 내렸다.이에 독립협회는 이상재 등이 마련한 중추원 개정안을 정부에 제출했는데, 이 안에는 의관 50명 가운데 관선과 민선을 25명씩으로 하고 민선 25명은 독립협회가 회원 중에서 투표로 선출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의회설립운동이 일단 성공하자, 독립협회는 이를 관철하기 위해 10월 28일에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키로 결정했다. 그런데 정부 대표는 집회 장소가 독립관이 아닌 종로라는 이유로 불참을 통고했다. 하지만 독립협회는 10월 28일 오후 1시부터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독립협회 회원들 약 4000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윤치호는 (1) 황제와 황실에 대한 불경한 언행  (2) 외국에 대한 모독 (3) 회원간 및 전·현직 관료에 대한 비방 (4) 사회 개혁적 발언 엄금등 4개 조항의 대회 진행 규칙을 제시했다. 이는 황제권을 인정하고, 개혁적인 박정양 정부와 협력하여 점진적 내정개혁을 추진한다는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독립협회에 대한 고종과 정부는 물론이고 외국인과 수구파의 오해와 불신을 해소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러자 정부 대표는 고종 황제의 허락을 받고 대회 이튿날인 10월 29일에 관민공동회에 참가하였다. 10월 29일 오후 2시에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민간에서는 독립협회뿐만 아니라 독립협회 계열의 모든 자매 단체들이 참석하였고, 수구파 행동대인 황국협회까지도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다. 또한 의정부 참정 박정양, 법부대신 서정순, 농상공부대신 김명규, 탁지부대신서리 고영희, 중추원 의장 한규설, 원임 대신 김가진, 민영환·민영기·심상훈·이재순·정낙용, 한성판윤 이채연 등 정부 인사도 참석하였다.이렇게 관민공동회에는 정부 인사· 시민· 지식인·학생·노동자·상인·승려·백정 등 각계각층이 참석하였고, 그 수는 1만여 명을 넘었다.오후 3시에 시작된 관민공동회에서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가 먼저 인사를 하였다. 이어서 정부 측에서 의정부 참정 박정양이 등단하여 개막연설을 하였고, 민간 측에서 백정 출신 박성춘이 등단하여 개막연설을 하였다.“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에 이롭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매우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조(國祚)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합시다”이러자 군중들은 박성춘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박성춘은 1895년에 곤당골 교회에서 무어로부터 세례를 받는 기독교 신자였다. 1892년에 한국에 온 새뮤얼 무어(1846~1906 모삼열) 목사는 1893년에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중간쯤에 있었던 곤당골에다 장로교회를 열었다. 그는 고종의 어의인 에비슨과 함께 백정들에 대한 차별 철폐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런 무어 목사의 행동은 양반 신자와 선교사들로부터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0월 30일에 의정부 참정 박정양은 관민공동회에서 채택된 헌의 6조를 고종에게 보고했다.    “이달 29일에 백성들이 종로 거리에 크게 모여 ‘관민공동회’라 일컬으며 나라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의논하여 제거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의정부의 여러 신하들이 함께 모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 여섯 가지 조항의 강령으로 된 의견을 올린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다 일제히 좋다고 외쳤으며 또한 신들에게 이것을 상주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신들이 생각건대 그 여섯 가지 조항은 바로 나라의 체면을 존중하고 재정을 정돈하며 법률을 공평하게 하고 규정을 따르는 문제로서 모두 응당 시행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아룁니다.첫째, 외국인에게 의존하지 말고 관리와 백성들이 동심협력하여 전제 황권(皇權)을 굳건히 한다. 둘째, 광산, 철도, 석탄, 산림 및 차관(借款), 차병(借兵)과 정부와  외국과의 조약은 각 부의 대신들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하여 서명하고 날인한 것이 아니면 시행할 수 없다.셋째, 전국의 재정은 어떤 세금을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다른 부(府)와 부(部) 및 사적인 회사에서 간섭할 수 없으며, 예산과 결산을 인민들에게 공포한다.넷째, 이제부터 중대한 범죄에 관계되는 것은 특별히 공판(公辦)을 진행하되 피고에게 철저히 설명해서 마침내 피고가 자복한 후에 형을 시행한다.다섯째, 칙임관은 대황제 폐하가 정부에 자문해서 과반수의 찬성에 따라 임명한다.여섯째, 장정을 실천한다. 이상입니다.”보고를 받은 고종은 “의정부로 하여금 조처하도록 하겠다.”고 비답하였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30일  2번째 기사)   이어서 고종은 전제 황권을 견고케 한다는 ‘헌의 6조’에 만족하여, 10월 31일 새벽에 ‘조칙(詔勅) 5조’를 반포함으로써 관민 공동회에 대한 지지의 뜻을 표시하였다.‘조칙 5조’는 아래와 같다. 1. 간관(諫官)을 폐지한 후 언로가 막혀 상하가 힘쓸 것을 권하고 가다듬을 것을 깨우치는 뜻이 없게 된 만큼 중추원에서 빨리 장정을 개정하여 실시할 것이다.1. 각 항 규칙은 일정한 것을 말한 것이 있는데, 각 회와 신문 역시 방한(防限)이 없을 수 없다. 회규(會規)는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명하여 시의를 참작해서 제정하도록 하고, 신문 조례는 내부와 농상공부에서 각 국의 규례에 의거하여 제정하여 시행할 것이다. 1. 관찰사 이하 지방 관리와 지방 부대 장관들은 현직에 있건 교체되었건 간에 관청의 재물을 공짜로 가진 자가 있으면 장률(贓律)에 관한 법조문에 따라 시행하며,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은 자는 법률에 의거 징계 처결할 것이다.1. 어사나 시찰원 등이 폐단을 빚어낸 것에 대해서는 본 고장의 백성들에게 내부와 법부에 가서 고소하도록 해서 사실을 조사하고 징계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1. 상공학교를 설립하여 백성들의 산업을 장려할 것이다.”(고종실록 1898년 10월 30일)   이렇게 고종은 중추원의 의회로의 개편을 사실상 승인하였다. 근대국가로 나가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11월 2일에 고종은 칙령(勅令) 제36호, 〈중추원 관제 개정 건(中樞院官制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중추원은 아래에 열거한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議定)한다. 1. 법률, 칙령의 제정과 폐지 혹은 개정하는 것에 관한 사항 2. 의정부에서 토의를 거쳐 임금에게 상주하는 일체 사항 3. 칙령에 따라 의정부에 문의하는 사항 4. 의정부에서 임시 건의하는 것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항 5. 중추원에서 임시 건의하는 사항 6. 백성들이 의견을 올리는 사항. 중추원의 직원은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관(議官) 50인, 참서관(參書官) 2인, 주사(主事) 4인으로 정한다. 의장은 대황제 폐하가 글로 칙수(勅授)하고, 부의장은 중추원에서 공천에 따라 폐하가 칙수하며, 의관은 그 절반은 정부에서 나라에 공로가 있었던 사람을 회의에서 상주하여 추천하고, 또 절반은 인민협회(人民協會 독립협회) 중에서 27세 이상 되는 사람이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를 투표해서 선거할 것이다. (고종실록 1898년 11월 2일)이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의회 개설만 남았다. 그러나 11월 4일에 변고(變故)가 일어났다.
    • 기획.연재
    2021-09-28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충효리 왕버들
    무등산은 광주사람들에게 아리랑과 같은 말이다. 먼 나라에서 아리랑 노랫가락에 눈물 흘리듯, 먼 곳에 다녀오다 바라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어머니의 품 같은 산이기 때문이다.이 무등에 눈이 세 번 내리면 빛고을에서도 펄펄 날리는 첫눈을 맞이한다. 그렇게 무등은 또 영험한 산이니 희망이요 민주, 인권, 평화의 상징이다.이 무등을 바라보며 식영정의 늘푸른 높은 솔이 지키는 광주호 상류로 올라가 화순 동복 가는 갈림길에서 환벽당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그렇게 무등의 품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충효동 1021번지에 장승처럼 서 있는 대여섯 아름의 왕버들나무 세 그루를 만난다.충효리 왕버들 이름은 김덕령(1567~1596) 장군과 관련이 있다. 김덕령은 1593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익호(翼虎), 충용(忠勇) 장군이란 칭호를 들으며, 이순신 장군과 장문포에서, 곽재우 의병장과 의령에서 왜를 크게 물리친 조선의병총대장이었다.어릴 적에는 효자로 아우 덕보와 함께 화순 동복의 석교천(남면)까지 수십 리 길을 걸어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고, 진주의 명의 김남신에게 약을 구하러 수백 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그러나 1596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운봉까지 진군하였음에도 적과 내통하였다 하여,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모진 국문에 숨졌다.그의 형 덕홍도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장군의 처 흥양 이씨도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순절하였다. 천만다행으로 아들 광옥은 고모와 함께 전북 익산의 용안현으로 피란했고, 왜란이 지난 뒤, 평안도 숙천군의 북도 방어사인 외숙 이인경에게 의탁했다. 그 뒤, 평안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에 정착, 용안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또 천만다행으로 숙종 임금 때에 장군의 억울함은 신원 되었고, 정조 임금 13년에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 시호를 충장공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충효리란 이름은 장군과 그의 가족의 우국,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이름이고, 광주의 중심거리인 충장로는 장군의 시호이다.여기 빛고을 광주의 삶터를 일군 충효리의 옛 지명은 석저촌이고, 이곳에 장군의 쉼터였던 옛 집터가 있다. 정려비각은 마을 앞 길가에 있고, 세 그루의 왕버들나무가 마주 보고 있다.왕버들은 4월에 꽃이 피고 5월에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이곳 충효리 왕버들은 석저촌 사람들이 1580년 무렵에 마을의 상징으로 일송(一松), 일매(一梅), 오류(五柳)로 심은 것이다. 굳이 손가락 꼽아보지 않아도 장군이 열 살 무렵에 심어진 나무가 아닌가 싶다.세월과 함께 소나무와 매화는 사라지고, 왕버들도 세 그루만 남았으나, 이 왕버들이 가까이 거느리는 정자와 원림이 여럿이다. 창계천으로 내려가면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고, 냇가 건너 왼쪽 언덕의 식영정과 그 일가들, 오른쪽의 소쇄원 등이 그것이다.환벽당은 명종 임금 때 나주 목사를 지낸 김윤제가 지었다. 취가정은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인 김만식과 친족들이 지었다. 정자의 이름 취가정은 조선 중기의 문인 권필이 자신의 꿈에서 술에 취한 김덕령과 서로 시를 나누고 억울하게 죽은 장군의 혼을 달래기 위해 읊은 ‘취시가’에서 유래한다.식영정은 1560년 김성원이 그의 장인이자, 스승인 임억령을 위하여 서하당과 함께 지었다. 또 소쇄원은 조선 중종 임금 때 학자 양산보가 1519년 기묘사화에 스승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하기 위해 지은 별서정원이다.이들 정자와 정원 이야기는 식영정의 소나무에게 더 자세히 들어볼 생각이다.<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9-26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만연사 전나무
    <만연사 전나무>   해는 눈이 부셔서 바라보기 어렵고, 짙푸른 바다는 깊어서 다 들여다볼 수 없다. 한 그루의 나무를 다 볼 수 없으니 바로 화순읍 동구리 179번지에 사는 진각국사 전나무이다.이 키다리 나무는 백두산에 가면 끝없이 펼쳐지는 숲에서 만날 수 있다, 1713년 1월, 종5품인 홍문관의 부교리 홍치중이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고 숙종 임금에게 보고했다."무산에서 어활강(두만강의 지류)을 건너 산 밑에 이르니 인가 하나 없는 넓은 땅이 나타났습니다. 구불구불한 험한 길을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 보니 산이 아니고 바로 들판이었습니다. 백두산과 어활강의 중간에는 삼나무(杉樹)가 하늘을 가리어 해를 분간할 수 없는 숲이 거의 300리에 달했습니다. 거기서 5리를 더 가서야 비로소 비석을 세운 곳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이 보고에 나오는 삼나무는 일본 삼나무가 아니라 전나무의 옛 이름이다.이렇듯 전나무는 백두산 부근의 고산지대를 비롯하여 동쪽으로는 시베리아를 거쳐 동유럽, 서쪽으로는 알래스카와 캐나다까지 추운 곳에서 더 잘 자라는 한대지방을 대표하는 나무이다.또 전나무는 백두산의 가문비나무, 잎갈나무와 어깨를 겨루면서, 환경변화에 적응력이 높아 한반도 남쪽 끝까지 내려와 그 큰 키를 자랑한다.전나무는 젓나무라고도 한다. 잣나무에 잣이 열리듯 ‘전나무의 어린 열매에서 흰 젓이 나오므로 젓나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훈몽자회’, ‘왜어유해’, ‘방언유석’ 등 옛 문헌에도 젓나무라 쓰여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전봇대처럼 보여 전봇대나무라고 부르기도 했으니, 이름이야 어떻든 오늘은 만연사 전나무를 보러 간다.이곳 만연사는 1208년(희종 4)에 선사 만연(萬淵)이 세운 집이다. 만연이 광주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다가 지금의 만연사 나한전이 있는 골짜기에서 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고 한다.십육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역사의 꿈을 꾸고 주위를 둘러보니 눈이 내려 온 누리를 덮었는데, 그가 누웠던 곳만은 눈이 녹아 김이 났다고 한다. 만연은 조계산으로 가는 걸 멈추고, 김이 나는 자리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면서 만연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이 만연사 전나무가 임진·정유의 왜란을 어떻게 견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집은 6·25에 전소되는 아픔을 치렀다고 한다. 또 여기 만연사의 동림암은 정약용이 젊은 시절에 학문을 익히던 곳이다. 부친이 화순 현감으로 부임하던 해에 함께 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명창 임방울도 이곳에서 피나는 연습으로 국창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그렇게 한눈에 다 볼 수 없는 만연사 일주문 앞의 전나무는 당시 조계산 수선사 주지로 있던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창건 기념으로 심었다고 한다. 손가락 계산으로도 나이가 800살에 이름을 알 수 있다.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무 꼭대기 부분이 잘려있고, 펼친 가지들도 생육이 수월하지 못해 보인다.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귓가에 새소리, 풀벌레 소리보다 더 큰 딱딱딱 소리가 들린다. 오색딱따구리다. 덩치가 큰 나무와 작은 딱따구리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 관계이리라. 전나무는 몸을 내주고 딱따구리는 해충을 잡아 앞으로도 많은 세월을 함께 쌓아갔으면 한다.전나무는 한대성 나무지만, 온대에도 적응하고, 다른 키 큰 나무처럼 뿌리가 약하지도 않으니, 우리 민족의 기상에 맞는 강인하고 늠름한 나무이다. 한 번쯤 만연사에 들려 전나무를 바라보며 세월의 무게와 삶의 깊이를 훌훌 털어도 좋고, 더 단단히 차곡차곡 채워도 좋으리라.<김 목/동화작가>
    • 기획.연재
    2021-09-1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