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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진주 성주 김시민 모과나무
- 용장이자 맹장인 충무공 김시민은 1592년 4월 조선 해협을 건너와 7년여 미쳐 날뛰던 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592년 10월, 조선을 장악한 왜가 호남의 곡창을 탐낼 때이다.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왜의 호남진출을 막아 조선을 지키고, 약탈과 살육의 고통에서 백성을 지켰다. 그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탄을 맞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다 눈을 감으니 서른여덟이었다.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김시민이 병사들에게 한 말이다. ‘나는 마땅히 충의를 맹세하고 진주를 지켜 국가 중흥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 싸우면 천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나의 엄지는 이미 떨어지고, 식지와 장지로 활을 당기다 남은 세 손가락마저 떨어질 때까지 싸우리라.’ 김시민은 1554년 충청도 목천현 갈전면 백전촌(충남 천안시)에서 아버지 김충갑과 어머니 창평 이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이다. 김시민은 마을의 가축들에게 해를 입히는 큰 뱀을 활로 쏴 죽였다.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믿었다. 1578년 훈련원의 무과에 급제해 병기 제조 관아인 군기시에서 일했다. 1583년 항복한 여진족인 니탕개가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토벌하였다. 1584년 별시 무과에 급제 종 6품 훈련원 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병조판서에게 군사력 강화를 건의하였으나 ‘평화 시기’라며 꾸짖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때 김시민은 모자를 벗어 발로 밟으며 ‘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받을 수 있는가?’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뒤 종5품인 군기시 판관으로 복귀했다가 1591년 진주목 판관으로 부임했다. 1592년 왜란이 터지고, 선조는 한양을 버렸다. 이때 진주 목사 이경은 성을 떠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곧 병사했다. 그러던 중 김성일이 경상도 초유사로 온다는 소식에 김시민은 진주성으로 나왔다. 임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와 왜의 침략이 없다면서 영남의 성곽 수축을 반대한 김성일은 그 뼈아픈 실책을 반성하듯 맡은 일에 열성을 다했다. 이듬해인 4월 29일 갑자기 병사할 때까지 영남의 관군과 의병을 조율하고 유격전으로 왜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렇게 김성일의 독려로 김시민은 곤양 군수 이광악, 의병장 이달, 홍의장군 곽재우 등과 함께 왜적을 격파했다. 고성, 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며 용맹을 떨치니 이름만 들어도 왜병이 벌벌 떨었다. 1592년 7월 26일 진주 목사로 승진하여 총통과 화약을 만들고 성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또 왜장 평소태를 사로잡은 공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겸했다. 1592년 10월,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 등 3만여 왜병이 진주성으로 몰려왔다. 이에 김시민이 3800여 병사로 물리쳤으니 바로 진주대첩이다. 또 이 전투는 왜군 정예병의 패배였다. 왜병은 김시민을 ‘모쿠소 판관’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모쿠소는 김시민의 직책인 목사의 왜 발음이다. 조선군 맹장 김시민을 가리키는 이 ‘모쿠소’를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알게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진주성을 함락시키라 했고, 이듬해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남강의 핏빛 물이 남해까지 흘렀던 그 날은 이제 지나갔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일본과 주변 강대국의 틈새에서 국토의 허리는 동강 나고, 평화를 위협하는 목소리도 높다. 웅장하고 장엄한 촉석루 현판 앞 담장 곁 모과나무가 한여름 볕에 눈부시게 푸르다. 이 햇살과 남강 바람으로 나무는 단단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날 이곳에서 스러져간 선열들을 기리며 모과나무를 바라본다. 금세라도 김시민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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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진주 성주 김시민 모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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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혁신·걷기 좋은 광산 만들기 역점 추진"
- 구정 목표 ‘상생과 혁신으로 광산을 새롭게 시민을 이롭게!' ‘광주형 일자리 시즌2’ 추진… 지속가능성장 경제특구 조성 ‘광주형 일자리’의 설계자로 꼽히는 박병규 광주 광산구청장이 민선 8기 취임 1년을 앞두고 있다. 광산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연일 현장중심의 활동을 펼치며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는 박 구청장. 그에게 민선 8기 1년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그리고 향후 구정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에 대해 들어본다. <편집자 주> ■취임 1년이 다가온다. 소회, 평가는? =광산에 좋은 변화,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2022년은 광산의 해였다. 정부, 광주시 등이 주관한 각종 대외평가에서 무려 60여 개 수상 실적을 올렸다. 주거복지 대통령상, 자치구 종합경쟁력 지수 전국 2위, 재난안전관리평가 국무총리 표창, 보육정책 복지부 대상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상을 휩쓸었다. 이 흐름이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제10회 다문화 정책대상에서 최고상인 행정안전부 장관 대상을 탔다. 5월에는 비만예방에 기여한 공로로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게 광산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 공직자들의 노력과 헌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동네 구청장’으로 불린다. 경청, 소통을 강조하며 현장 중심의 남다른 행보가 눈에 띄는데 =민선8기 광산구정 목표가 ‘상생과 혁신으로 광산을 새롭게 시민을 이롭게!’다. 핵심 가치인 상생, 혁신을 실현하는 것은 경청, 소통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곧 광산구정이 시민 삶에 더욱 깊숙이 녹아들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취임 1호 결재인 ‘찾아가는 경청 구청장실’을 시작으로 21개 동 현장으로 광산구청을 옮기는 ‘동 주민과의 대화’, 시간을 내기 어려운 시민을 위한 ‘구청장 직통 문자민원’, 민선8기 주요 정책을 놓고 시민과 소통하는 ‘광산시민에게 길을 묻다’ 타운홀 미팅 등 광산구는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소통행정을 강화해 왔다. 찾아가는 경청 구청장실의 경우 지금까지(2023년 5월15일 기준) 총 49회를 운영해 543건의 경청건수를 접수했고, 구청장 직통 문자로도 785건(2023년 5월12일 기준)에 달하는 생활 불편, 구정 제안 등이 들어왔다. 민원, 제안 등에 대해 해당 부서가 적극 검토해 결과와 처리 상황을 제안해 준 시민과 바로 공유한다. 책임 있고, 신속하게 답하는 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점차 이러한 노력이 빛을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찾아가는 경청 구청장실 참여 시민 조사 결과 만족도가 97%로 매우 높았는데, 많은 시민이 광산구 행정을 신뢰하게 됐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더 주목할 것은 시민이 피부로 체감하는 다양한 변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청장 직통 문자로 도움을 호소한 분이 광산구 통합돌봄 1호로 선정돼 지원을 받게 되고, 한 장애인이 보내주신 문자에 청각·언어 장애인을 위한 소통 창구가 만들어지는 등 시민의 소리가 곧 광산구의 정책, 사업이 되고 있는 것이다. ■광산구와 밀접한 광주 현안이 많은데, 최근 들어 잇따라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오랜 기간 표류하던 어등산 관광단지 개발이 속도를 내고 있고, 광주의 가장 큰 현안인 광주 군공항 이전 문제도 국가지원을 강화하는 특별법이 국회 통과를 통과하며 첫 단추를 잘 꿰었다. 여기다 지난 3월에는 광주가 102만 평 규모 미래차 국가산단을 유치했는데, 이 산단이 광산구에 삼도, 오운동 일대에 조성된다. 미래차 국가산단 조성은 광산의 경제 지도를 바꿀 ‘역사적 사건’이다. 2030년까지 소재, 부품, 장비 등 미래차 핵심부품 산업을 집약한 클러스터가 광산구 오운동 일대에 만들어지는데, 광주시가 발표한 경제효과만 고용 창출 27만237명, 생산 유발 10조255억 원에 달한다. 광주글로벌모터스가 있는 빛그린산단, 진곡산단과의 연계나 각종 인프라 구축, 수많은 기업 유치 등 실제 광산구에 미칠 파급효과는 더 클 거라고 예상된다. ‘단군 이래’라 해도 될 정도로 광산구가 가장 좋은 발전·도약의 기회를 맞게 된 셈이다. 광산이 광주 발전의 중심, 광주의 미래라고 했던 말이 현실이 됐다. 광산 곳곳에 심어진 광주 미래의 새로운 씨앗이 잘 싹을 맺고, 쑥쑥 클 수 있도록 정부, 광주시, 지역사회 등과 적극 협력하고, 힘을 보태겠다. 한편으로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이전은 조금 부침을 겪고 있는데, 최근 직접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을 찾아가 노사와 차례로 간담회를 가졌다. 시민들 더 걱정하시지 않게 조속히 돌파구를 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 ■광주형 일자리 설계자로, 광산에서 ‘광주형 일자리 시즌2’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핵심인 지속가능성장 경제특구인데, 어떤 정책인지 소개와 함께 추진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망국병으로 불리는 한국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안이 좋은 일자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향을 가지고 민선8기 광산구정은 좋은 일자리를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미래 혁신 운동으로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다. 기업, 또는 정부가 만들어내는 일자리는 한계에 봉착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는 사회적 대화와 합의를 통해 새로운 길을 찾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를 보여준 것이 광주글로벌모터스로 실현된 광주형 일자리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선 안 된다. 새로운 일자리 개혁 실험이 더 많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 일을 광산구가 먼저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그 핵심 줄기 중 하나가 지속가능성장 경제특구다. 노사가 상생을 결정해 실천하고 지역사회가 뒷받침하는 시스템을 광산구 지역 전반에 적용해 좋은 일자리 전환을 끌어내고, 확산하는 모델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조직 개편을 통해 만들어진 지속성장일자리과가 이 일을 전담하게 된다. 최근 노동·산업 등 각계 전문가를 모아 자문단을 출범하고, 기본 방향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앞으로 전문가 토론회를 열고 다양한 의견, 지혜를 모아 기본 계획, 로드맵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여기에 더해 민선8기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일터혁신이다. 좋은 일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존 일자리를 더 좋게,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광산구는 기업의 생산성과 노동의 질을 동시에 높이는 다양한 일터혁신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본 사업에 앞서 지난해 10월부터 세 달 동안 시범적으로 ‘성장지원 멘토링’ 사업을 했는데, 깜짝 놀랄만한 성과를 만들어냈다. 6개 소기업에 맞춤컨설팅을 했더니 생산성, 매출액이 최대 30% 오른 것이다. 이를 발판 삼아 올해는 좀 더 고도화되고, 세분화된 사업을 통해 일터혁신과 좋은 일자리 창출을 뒷받침하겠다. ■걷기 좋은 광산, 찾고 싶은 명소 만들기도 핵심 사업인데 =예전부터 광주시민들께서 쉴 곳, 가고 싶은 곳, 놀 곳이 없다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이런 열망을 제대로 풀어내는 것은 광산구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황룡강, 장록습지, 어등산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자원들이 묵혀 있다는 느낌이 있다. 아무리 좋은 구슬도 꿰어야 한다고, 좋은 자원을 꿰는 일을 해야 할 때다. 역점 공약으로 추진하고 있는 명품 30리길 조성 사업이 그것이다. 송산근린공원부터 장록습지, 영산강과 황룡강이 만나는 동곡 두물머리까지가 약 12km, 30리 정도 된다. 이 구간을 광주를 대표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소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구청장 보좌기관으로 명품길추진단이라는 전담 부서도 신설했다. 광주하면 광산구 명품 30리길이 가장 먼저 떠오르도록 반드시 사업을 성공시키겠다. ■올해 광산구가 가장 강조한 것이 ‘민생’이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로 인해 민생이 도처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더 큰 위기가 닥쳐오기 전에 문제를 예방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철저한 준비와 대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광산구는 올해 초부터 전 부서가 민생 안정 정책을 발굴하고, 10대 중점 분야의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든든한 경제 생태계 조성과 두텁고 촘촘한 복지 강화가 2대 핵심 방향이다. 취약계층 난방비 지원부터 1만3000여 개 사회적 일자리 창출, 외국인주민 긴급생계 지원, 이웃살핌 등 계층별 맞춤형 지원 정책을 속도감 있게 실행하고 있다. ■5·18민중항쟁 43주기다. 오월정신 계승을 위해 광산구가 하고 있는 노력은? =정부 기념식에 앞서 지난 11월 간부 공직자들과 함께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윤상원 열사 생가를 찾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80년 5월로부터 43년이 지나면서 광주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왜곡되지 않고 미래세대로 온전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광산구는 역사적 현장을 주목하고, 재조명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광산구는 5·18 역사의 흔적이 남은 장소가 많다. 하지만 광주의 5·18민주화운동 사적지는 총 29곳 중 광산구는 단 한 곳도 지정된 곳이 없다. 이에 광산구는 각 장소에 대한 증언, 자료를 수집해 5·18사적지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여러 후보 중 광주송정역, 광산경찰서 두 곳은 상당한 자료가 모여 조만간 사적지 지정 절차가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5·18정신의 상징인 윤상원 열사의 정신과 뜻을 계승하기 위한 천동마을 민주커뮤니티센터 건립도 순항하고 있다. 그동안 진입로 확보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었는데,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공사가 속도를 내고 있다. 센터에는 전시 공간은 물론 주민과 마을공동체를 위한 공간이 마련된다. 올해 안에 문을 열어 윤상원 열사를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시민께 한 말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변화, 위기, 그리고 기회들이 우리 앞에 있다. 시민에 이로운, 새로운 광산을 만들기 위해 많은 정책,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시민 참여다. 민선8기 광산구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은 두 가지가 일자리, 그리고 사회안전망이다. 이 일은 결코 저나 행정의 힘만으로는 해낼 수 없다. 광산시민이 참여해 지혜를 모아 길을 찾고, 함께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한 사회적 대화를 본격 시작하고자 한다. 동네, 공원, 경로당 어디서든 주민 누구나 더 나은 광산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겠다. 끊임없이 시민에게 먼저 다가가고, 가까이서 함께 하는 노력으로 광산시민이 구정의 주인을 넘어 당당한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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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혁신·걷기 좋은 광산 만들기 역점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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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여는 미래, 탄탄한 전남교육’ 대전환 실현”
-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적용 ‘책 읽는 전남교육’ 적극 추진중 전남학생교육수당 임기내 실현 전남교육의 변화를 바라는 도민들의 강력한 희망과 지지 속에 탄생한 민선 4기 김대중 전남교육감이 취임 1주년을 앞두고 있다. 지난 2022년 7월 1일 취임 이후 그동안 공약했던 정책 실현을 위해 노심초사 달려왔다. 본지는 김대중 교육감에게 전남교육의 현안과 지난 1년여 동안 추진하고 있는 공약 실천 현황을 물었다. 특히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농어촌 지역 소규모학교 폐교와 통폐합 등 어려워지고 있는 교육환경에서 ‘전남교육의 희망과 교육 대전환을 위한 학교 현장의 변화’를 직접 들었다. (편집자 주) 대담= 문철호 전남도 취재본부장 -먼저 지역 소멸이라는 위기가 전남교육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전남교육의 대전환’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도민에게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 이후 이러한 정책공약의 이행과 교육 현장의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 지난 1년여 동안 쉼 없이 달려온 점에 높은 점수를 드린다. 정말 바쁘게 지나간 것 같다. 지난 1년여 전남교육이 나아갈 방향과 비전과 도전과제는 어느 정도 설정했다. ‘전남교육 대전환’의 큰 목표를 향해 ‘함께 여는 미래, 탄탄한 전남교육’이라는 비전을 세웠다. 학교 현장에서는 ‘질문·탄성·웃음의 공부하는 학교’ ‘상상·도전·창조의 미래교육’ ‘참여·협력·연대의 교육공동체’ ‘공정·안전·존중의 신뢰행정’으로 실현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아이들을 ‘미래를 가꾸는 창의적이고 포용적인 사람’으로 키워내겠다. 앞으로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추진해가면서 도민과 전남교육 가족들이 바라는 변화를 느끼도록 하겠다. - 주요 정책공약 추진을 통해 학교 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취임 후 교실 수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 교육력을 끌어올리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학생들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권이 어우러진 교실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공존교실(공부하고 존중받는 교실)’ 사업을 시작했다. 우선 올해 도내 중학교 86곳을 ‘공존교실’ 사업 학교로 선정해 수업 지원인력(94명)을 지원하고 있다. 전남교육청은 이를 통해서 수업이 가능하고 존중받는 교실로 만들 것이다. 이와 함께 효과적인 진단과 평가로 학습력을 높여나갈 계획이며, 일제고사 방식의 줄 세우기 평가가 아닌, 학생 개개인의 학습 수준을 진단하고 평가해 맞춤형 지도가 가능하도록 하겠다. 아직 초기여서 두드러진 변화를 느끼기 어렵지만 정책이 본궤도에 오르면 교실 분위기가 확 달라지고 모두가 바라는 ‘공부하는 학교’가 실현될 것이라 확신한다. -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적용을 앞두고 있다. 이에 앞서 일부 일반계고(자사고. 특목고 포함)를 대상으로 연구 선도학교를 지정 운영하고 있는데, 고교학점제가 운영되면 향후 전남교육에 어떤 변화가 예상되는가? 고교학점제는 학생 스스로 진로와 적성에 따라 다양한 과목을 선택 이수해 누적 학점이 기준에 도달하면 졸업을 인정받는 교육과정 이수 운영 제도이다. 그러나 도시와 농산어촌 학교들의 교육 격차가 지금보다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학생에게 수업 선택권을 보장하려면 학교가 다양한 수업을 개설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학생 수가 적은 농산어촌 학교들은 다양한 과목 개설 및 교사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 전남교육청은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시행에 앞서 2018년부터 고교학점제 연구·선도학교를 지정·운영하고 있으며, 전남지역 모든 일반고를 연구·선도학교로 확대 지정해 운영 중이다. 또 단위학교의 학점제 운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일반계 고교 교원 68명으로 현장지원단을 꾸려 운영하고 있다. 고교학점제 도입 대비 농어촌 소규모 학교 학생의 과목 선택권 보장을 위해 ‘교과 순회교사제’ ‘교원겸임 등을 활용한 교원 배치 방안’을 마련하고 있으며, 학교 밖 강사 인력풀확보를 위해 지역기관 및 대학과 MOU를 체결하여 학점제형 과목 개설을 위한 고교학점제 강사 인력풀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또한 온라인 공동교육과정, 꿈키움캠퍼스 등을 통해 선택과목 및 전문 교과 개설을 지원하고 있으며, 다과목 지도에 대한 교원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고교 선택과목 연수 및 부전공 연수도 실시중이다. - 학령인구 감소로 전남 도내 특히 읍면지역에서는 교육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매우 높다. 전남교육의 미래를 위해 대안을 제시한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미래교육’이 시대적 화두이다. 미래 교육 준비를 위해 여러 전문가들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래교육이 결코 거창하거나 멀리 있지 않고, 교육의 기본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미래역량을 길러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해력이 중요하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능력을 말하며 학습의 기초가 된다. 우리 교육청은 올해부터 ‘책 읽는 전남교육’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우선 초·중·고 학교급에 따라 독서를 기반으로 실천적 탐구 활동을 할 수 있는 ‘전남독서인문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초등학교는 인물, 중학교는 세계, 고등학교는 미래를 주제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다. 특히 학생들이 독서와 문화교류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도록 국외체험 프로그램도 실시할 계획이다. 독서인문교육 지원체계 구축을 위해 본청 내에 독서인문교육 전담팀을 신설했다. 이와 함께 교육 현장의 책 읽는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학생들이 수업 시작 전 교실에서 교사·학부모와 함께 30분 간 독서를 하는 ‘책으로 여는 아침’을 운영중이다. 또 ‘학생과 학부모, 교원들의 독서인문동아리’ 운영으로 자발적인 독서문화 형성을 유도할 계획이다. - 주요 정책공약 중 하나인 ‘전남학생교육수당’ 지급이 언제부터 지급될 예정인지. 교육만큼은 전남이 책임지겠다는 생각으로 ‘전남학생교육수당’을 추진하고 있다. 전남도민들은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영유아 보육·교육비 지원 확대’를 가장 필요한 정책으로 요구하고 있다. 전남에서 아이를 키우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매달 학생교육수당을 지급하려고 한다. 하지만 예산 상황 등으로 인해 모든 학생에게 동시에 지급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우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급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정부와 지급대상, 사용처 등에 대해 사회보장서비스를 협의중에 있다. 사회보장서비스 협의가 완료되면 조례제정 등을 신속히 추진하여 반드시 ‘전남학생교육수당’을 임기 내에 실현하겠다. -전남교육청이 지난해 청렴도 기준 평가에서 하위 등급을 받았다. 청렴도 개선을 위한 대안은? 청렴은 구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문화로 정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선 3기까지는 부패 취약 분야 개선에 노력하였다고 보면, 민선 4기는 ‘청렴한 조직문화 조성’에 노력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예측 가능하고 공정한 인사 제도 개선과 주기적인 피드백을 통해 인사만족도 향상에 노력하겠다. 특히 최근 문제시되고 있는 조직내 갑질문제에 대한 가이드라인 마련과 갑질근절을 위한 공감대를 확산하는 등 청렴한 조직문화 조성에 더욱 관심을 갖고 개선하겠다. 또한 각종 제도 개선과 신뢰와 소통,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청렴도가 향상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도민과 교육가족들에게 보다 신뢰받는 전남교육을 만들도록 하겠다. -취임 이후 지난 1년 동안 주요 정책 공약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에 대해 다시 한번 도민의 한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 수업이 가능하고 존중받는 교실을 만들고, 학생 개개인의 학습 수준을 진단하고 평가해서 맞춤형 지도와 소규모 학교 학생교과목 선택권 보장을 위한 교원 겸임 및 순회 교사제 도입과 인력풀확보를 위해 지역 대학과 MOU를 체결해서 학점제형 과목 개설을 위한 강사 인력풀 구축 등 공부하는 학교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정책이 앞으로 교육 현장에서 큰 밑거름이 되었으면 한다. - 일선 교육지원청을 순회하면서 1일 교육감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시군교육청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 전남은 22개 교육지원청이 있다. 그런데 본청은 남악에 있다 보니 교육장이나 교육 가족들과 직접 소통하는 문제나 혹은 민원 발생 시 원거리에 있다 보니 쉽게 올 수 없는 문제도 있고 해서 형식적인 방문이 아닌 1주일에 한 번씩 아예 지역 교육청으로 출근을 해서 근무한다. 순회 교육감실 운영은 어려운 민원사항도 처리를 하기때문에 교육감에게도 현장 소통에 도움이 되고, 또 퇴근할 때까지 회의도 참석하고 각종 프로그램 참여와 꼭 필요한 학교는 방문하고, 정책이 현장에서 전달되는 효과와 교육청에서 즉시 처리되는 민원 등으로 본청에서도 신속한 업무수행 연계와 상황 파악이 가능한 점 등이 지역 교육청에서 반응이 매우 좋고 결국은 전남교육 정책이 학교 현장에 정확하게 전달되는 효과가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초·중·고생 실천적 탐구 활동을 위한 ‘독서 인문학교 운영’과 관련해 구체적인 설명을 한다면. ‘독서 인문학교 운영’은 기존의 전남민주시민토론학교와는 과정이 다르다 독서는 매우 중요하다. 미래 교육은 오히려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는 능력보다는 독서를 통해 사고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이다. 따라서 독서 인문을 강화해야 하는데, 사실 현재 도교육청은 독서인문을 전담해서 추진하는 부서가 그동안 없었고, 지금까지는 학교장의 철학이나 교사들의 여러 가지 토론 운영계획 또는 도서관 프로그램 활동 등 집중적이지 못하고 분산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전남민주시민토론학교 운영은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주시민역량을 갖추고 실천하는 ‘민주시민의 육성’에 있다면, ‘독서인문학교 운영’은 독서토론을 집중적이고 지속 가능한 종합적인 ‘독서인문 토론 과정을 기반으로, 실천적 탐구 활동을 할 수 있는 국내외 독서토론 융합프로그램’이다. ‘독서인문학교’는 본청에 전담부서를 설치, 전문가(장학관, 장학사, 실무 등)로 구성된 전담 팀을 꾸려서, 초중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중점적으로 독서 토론 교육을 주관하는 것이 ‘독서인문학교 운영’의 주된 골격이다. 초·중·고생을 인물, 세계, 미래를 주재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될 예정인 ‘독서인문학교’의 세계와 미래를 향한 프로그램은, 이전 민선 2기 때 운영되었던 ‘독서토론열차’ 운영과 맥락이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에 오래전 한인들이 이주했던 쿠바, 하와이 등을 비롯 튀르키예 등 재난으로 어려운 나라 등과 상호교류를 통해 학생들을 우리나라로 유학 올 수 있도록 교육지원 기틀을 마련하고, 세계 속 ‘한민족의 인물 탐구와 역사조명’ ‘역사현장 방문’ 등 글로벌시대 국내외 방문을 통해 교육 문화 역사 탐방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또 다민족 시대의 전남은 다문화 가족의 분포도가 높기 때문에 전남의 다문화 자녀들이 엄마 나라의 방문을 통해 직접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체험하고, 본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엄마 나라 교육문화역사공유 프로그램’ 운영을 6월에 진행할 예정으로 있다. -학교 현장의 교사 인권과 교권 보장과 관련해서 어떤 대책을 시행하고 있는지. 교권과 관련해서는 학교 현장에서 사실 수업이 어려울 정도로 교권이 무너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따라 제도적 개선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교실 수업환경 개선방법을 적용, 교사의 인권과 교권을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매우 필요하다. 그래서 전남도교육청은 우선 수업을 못 할 정도로 어려운 교실을 지원하기 위해 공부하고 존중받는 ‘공존교실’을 운영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해 중학교는 거의 한 학교당 수업 지원인력 1명씩을 채용, 선생님들의 수업을 도우면서 ‘교사들의 인권과 교권을 보장하는 공존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교육 대전환의 사명을 가지고 전남교육의 변화와 발전 그리고 우리 전남 학생들의 꿈과 희망을 키우고,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학교 현장에서 교권이 무너지면 결과적으로 이러한 큰 과업을 성취할 수가 없다. 따라서 교사가 학교 수업에 있어 책임성과 책무성을 가지고 교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교사의 정당하고 소신 있는 수업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돌봐주고 해결하기 위해 교사를 지원하는 정책들이 이미 수립되어 있고 실행 중인데 아직은 현장의 변화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이제는 그런 부분을 잘 살펴서 민선 4기 취임 2년 차부터는 학교 현장에서 실질적인 변화가 많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현장에서 지원하고 정착되도록 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교육청 이동 일일 교육감실 운영을, 앞으로는 2일 정도 늘려서 학교 현장으로 확대, 교육감이 직접 학교 근무를 하면서 선생님들의 현실적 어려운 점도 직접 듣고 현장을 점검하면서 교권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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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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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여는 미래, 탄탄한 전남교육’ 대전환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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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농협, 농가소득·농업인 삶의 질 향상 '온 힘'
- 농촌 일손돕기·로컬푸드 직매장 운영·미생물 배양액 무상 공급 조준성 조합장 “농협의 존재 이유는 농민…농업-농촌 발전 최선" 화순농협(조합장 조준성)이 시장개방 확대, 농가 생산비 증가, 기후변화와 노령화 등 국내외 농업여건이 어려운 시기에 농가 소득증대와 농업인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보다 나은 농업기술과 환경을 보급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특히 화순농협은 농촌일손돕기, 로컬푸드직매장 운영을 통한 농가소득증대, 지역인재 양성 장학기금 기탁, 미생물 배양액 무상 공급, 농기계 무상수리 순회 봉사 활동, 조합원 지원·복지사업 등 도농 복합도시로서 젊은 농학도의 희망적인 삶의 터전 조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조준성 조합장은 “농협의 존재 이유는 농민이다. 농민들을 위해 화순군만의 특색 있는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농업정책을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며 “특히 귀농인들의 안정적 정착과 함께 기존의 농업인이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능력을 농업-농촌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수확기 농작업 대행 호응 화순농협은 조준성 조합장을 필두로 가을걷이와 봄 파종 등 바쁜 농사철에 농가의 일손을 덜어주고자 전 직원들이 평일 야간작업은 물론 공휴일도 반납하며 콤바인 작업으로 벼 수확 작업 등 농가의 일손을 돕고 있다. 조준성 조합장은 “농사짓기 힘든 농가들에게 도움이 돼 보람이 크다. 화순농협 직원들이 이 사업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고 솔선수범하기에 이 사업이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앞으로도 고령의 농가나 여성 농가들이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화순농협은 매년 농사철이 시작되면서부터 마칠 때까지 못자리, 로타리 치기, 모 이양작업, 병충해 방제, 수확까지 요청한 농가를 대상으로 원스톱 농작업대행사업을 하고 있어 농가들의 호응이 높다. ■화순농협의 효자 하나로마트 로컬푸드직매장 화순농협은 인근 대도시인 광주와 가까워 지역 농업인들을 위해 신용업무와 함께 하나로마트와 로컬푸드 직매장을 개장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농가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화순농협은 본점 로컬푸드직매장과 서부지점 하나로마트 로컬푸드직매장을 개장해 운영 중에 있다. 특히 본점 로컬푸드직매장을 찾는 소비자는 하루 평균 2~3천명으로 지난해 기준 연 340억의 매출을 달성하고 있다. 이곳에 납품하는 농산물은 농민 스스로 포장하고 가격책정까지 직접 해야 한다. 넓은 매장에 그 종류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상품들이 깔끔한 포장상태로 진열되어 있어 이곳 화순농협 로컬푸드직매장은 전남도 군단위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화순농협 로컬푸드직매장은 봄철에는 딸기, 여름철 복숭아, 가을철 방울토마토, 단감, 겨울철 배추, 무 등 채소류가 많이 팔린다. ■매년 지역인재 양성 장학기금 기탁 화순농협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화순농협 임직원, 하나로마트 직원이 정성을 모아 장학기금을 마련해 화순군에 기탁하고 있다. 조 조합장은 “화순농협의 장학기금 기탁, 사회공헌 활동 등 나눔 활동이 지역사회에 널리 퍼져 나눔 문화가 확산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한 지원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미생물 배양액 무상 공급 화순농협은 농약사용을 줄이고 땅심을 높이기 위해 화순농협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보급하고 있는 ‘젤라틴키틴 미생물 배양액(GCM)을 조합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있다. 특히 조 조합장은 당초 배양액은 조합원들이 직접 농협으로 찾아와 가져갈 수 있도록 했으나 조합원들이 고령인데다 차량이 없어 가져가고 싶어도 가져가기 어려운 모습을 보면서 더 많은 조합원들에게 배양액을 나눠주려 직접 운전하며 마을 곳곳에 전달해주고 있다. 조합원들의 반응도 좋다. GCM은 농작물 피해를 일으키는 선충과 곰팡이, 해충의 애벌레 표피, 알껍데기 등에 있는 젤라틴과 키틴을 분해하는 미생물로 농작물의 생육을 돕고 병충해를 예방하는 미생물배양액이다. ■농기계 무상수리 순회 봉사 활동 화순농협은 봄철 영농기를 앞두고 농기계 무상수리 순회 봉사 활동을 펼쳤다. 농기계 무상 수리 순회 봉사활동은 화순읍과 이서면 각 마을을 순회하며 경운기, 예초기, 기계톱, 관리기 등 농가에서 소유하고 있는 고장난 농기계를 집중 점검하고 수리해준다. 화순농협 농기계 순회수리봉사는 화순읍 76개, 이서면에 15개 등 찾아가야 하는 마을만 91개, 그 현장에 조준성 조합장이 함께 하며 직접 농기계를 수리한다. ■조합원 지원사업·복지사업에도 앞장 화순농협은 조합원의 실익을 위해 복지사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매년 조합원을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으며, 마을 경로당 난방비 지원, 조합원 자녀 장학금 지원 등 수많은 지원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조합원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어 여성 농업인이 소외 받지 않고 핵심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여성조직 육성에 힘쓰고 있다. 조 조합장은 농업인 조합원들의 영농편익지원 사업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효과적인 병충해방제를 위한 무인헬기 항공방제사업과 농약대와 방제료 지원, 벼 육묘용 상토구입지원사업 등 영농자재도 함께 지원했다. 조 조합장은 "화순농협은 지속성장을 위해 만연사 입구 교차로 부지에 금융과 하나로마트가 결합된 복합센터로 신동부지점을 신축중에 있다"며 "이곳은 화순을 접근하는 외곽도로 요충지로 관광객과 화순전대병원을 찾는 시 도민들의 접근성이 좋아 농산물판매 거점의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화순농협은 신용사업 상호금융대상 그룹 1위를 하고 상호금융자산 5000억원 달성탑도 수상했으며, 전국상호금융대상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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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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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농협, 농가소득·농업인 삶의 질 향상 '온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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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고흥 발포성 이순신 오동나무
- 이순신이 어린 시절에 살던 한양 마른내골은 건천동이다. 이곳에 사대부 자제의 교육기관인 네 개의 사학 중 동학이 있었다. 이곳에 살게 된 것은 아버지 이정의 희신, 요신, 순신, 우신 등 네 아들에 대한 향학 염원으로 여겨진다. 건넛마을은 구리개이다. 지금의 을지로 들머리인 이곳은 흙빛이 누런 구리색의 얕은 언덕이었다. 이 구리개 동현마을에 조선 시대 병사들의 무술 및 병서, 전투대형 등을 가르치던 훈련원이 있었다. 이순신의 해박하고 능숙한 글솜씨, 어린 시절 병정놀이를 지휘하던 대장이었던 것은 이 두 마을의 영향이리라. 이순신은 29살이던 1573년 별시 무과는 뜻하지 않은 낙마로 낙방했다. 3년을 더 기다려 1576년 2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여 어린 시절 놀러 다녔던 구리개 훈련원의 견습관원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종9품 동구비보권관으로 함경도에서 2년여의 국경 근무를 한 뒤, 1579년 2월에 종8품 한성훈련원봉사가 되어 훈련원으로 돌아왔다. 이때 상관이던 정4품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의 친지를 특별 승진시키려 하자, 이순신은 ‘규정 위반’이라며 반대했다. 이에 서익은 10월에 이순신을 충청도 해미 병영으로 보내 버렸다, 다음 해인 1580년에 이순신의 둘째 형 이요신이 세상을 떠났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던지라 이순신은 몹시 슬퍼하였다. 이해 7월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진의 종4품 수군만호가 되었다. 당시로는 파격의 인사였다. 이에 전라감사 손식이 능성(화순)으로 이순신을 불렀다. 이때 이순신이 제갈량의 ‘팔진법’ 당나라 이정의 ‘육화진법’을 잘 설명하였다고 한다. 그 발포성 관사에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있었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이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군관을 보냈다. 이순신의 대답은 "관청 객사의 나무는 관가, 즉 정부의 소유물이다. 사적인 명령은 따를 수 없다"였다. 이 성박의 후임은 이용이었다. 이용은 자신의 관할 지역 5곳 진을 불시에 점검하며 발포에 이르렀다. 다른 곳보다 우수했지만, 발포진을 콕 집어 근무 태만으로 전라감영에 보고했다. 이때 임진왜란의 의병장인 조헌이 전라감영의 도사였다. 조헌은 이순신의 억울함을 알고 평가를 바로 잡았다. 하지만 어떻게든지 이순신을 내치려고 벼르고 있던 서익은 이때다 싶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으로 발포진을 둘러보고 또다시 근무 태만이란 거짓 보고를 올렸다. 결국, 이순신은 파직되었다가 그해 5월에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여기 발포진은 1439년에 설치되어 1490년 성을 쌓았고 1894년에 폐성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좌수영 산하의 중요한 수군 기지였다. 이곳 바닷가 바위벼랑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이순신의 해전에 참전했던 황정록 발포만호는 정유재란의 칠전량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 황정록의 부인 송 씨는 ‘남편이 왜놈 총탄에 죽임을 당하였는데, 우리만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며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로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이다. 또 이곳 석문처럼 생긴 신비로운 활개 바위는 조선시대 조운선이 큰바람이 불면 쉬어 가는 곳이다. 이순신 함선의 훈련 모습이 마치 돛대가 ‘활개 치듯 하다’해서 얻은 이름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여기 발포성의 상징은 오동나무이다. 그때의 나무가 아닌 아직 어린나무지만, 마른내골이나 구리개를 생각하면 이 어린 오동나무의 가르침이 수많은 이순신을 키워낼 것임이 틀림없다. 김 목/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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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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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고흥 발포성 이순신 오동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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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우리를 버리니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 비 쏟아지는 칠흑같은 새벽 선조, 도망치듯 궁궐서 나와 선조, 서도(西道)로 파천하다 1592년 4월 28일 서울에 이일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인심이 흉흉하였다. 궁중에서는 이미 파천(播遷)할 뜻이 있었는데 밖에서는 알지 못했다. 이 날 선조는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삼았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28일 4번째 기사) 29일 저녁에 전립(氈笠)을 쓴 세 사람이 숭인문으로 달려 들어왔다. 성안의 사람들이 다투어 가며 군중(軍中)의 소식을 물었다. “나는 순변사 신립 군관과 부하들이요. 어제 순변사는 충주에서 패하여 죽고 모든 군사는 무너져 흩어졌소. 우리들은 간신히 탈출하여 집안 식구들이나 피난 시키려고 오는 길이요.” 이들 듣고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얼마 안되어 성안은 떠들썩하고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선조는 서도(西道 황해도·평안도)로 파천을 결정했다. 세자는 임금의 행차를 따르고 여러 왕자는 각 도에 보내 근왕병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가도록 하였다. 아울러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삼고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한강에 주둔하게 하였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29일) 그런데 이날 밤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궁문(宮門)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금루(禁漏)는 시간도 알리지 않았다. 4월 30일 새벽에 비가 쏟아지고 밤은 칠흑 같았다. 선조가 창덕궁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선조와 세자 광해군은 말을 타고 중전 이하는 뚜껑있는 교자를 탔다. 어가가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나와 사현(沙峴 홍제동 무악재)에 이르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뒤돌아 성을 바라보니 검은 연기와 불길이 공중에 솟구쳤다. 난민(亂民)들이 먼저 공사노비(公私奴婢) 문서가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우고, 내탕고(왕실 금고)에 들어가 금과 비단을 가져가고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을 불태워버렸다. 춘추관(春秋館)에 있던 실록(實錄)과 창고에 있던 사초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그런데 비는 더욱 세차게 왔다. 궁인(宮人)들은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100 명도 되지 않았다. 사현(沙峴)을 넘어 석교(石橋 홍제원 근처에 있던 돌다리)에 이르자 비가 더욱 심해졌다. 일행들이 달아나면서 질서가 없었으며 서로 부르짖었다. 경기도 관찰사 권징이 뒤쫓아 와서 어가를 모시면서 비옷을 바치니 임금이 그것을 입었다. 임금이 벽제관(碧蹄館 고양시 덕양구 일대)에 이르자 일행들이 모두 비에 젖어서 갈 수가 없었다. 역사(驛舍)에 들어가 쉬면서 점심을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세자는 반찬도 없었다. 병조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도 관찰사 권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혜음령(惠陰嶺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평탄면 사이 고개)을 지나자 큰 비가 물 퍼붓듯 하였다. 궁녀들은 푸르고 흰 천으로 머리와 낯을 가리고 울부짖으며 따라갔다. 마산역(馬山驛 파주시 교하. 개성으로 가는 역원)을 지나자 어떤 사람이 밭두렁에 있다가 어가를 바라보고 통곡하며 소리쳤다. “나라에서 우리를 버리고 떠나시니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저녁에 선조 일행은 임진강 나루에 닿았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선조는 시신(侍臣)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임진강을 건너자 선조는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또한 선조는 나루터 남쪽에 있는 승청(丞廳 나루터를 관리하는 관청)을 불태우도록 명했다. 왜군이 승청을 허물어 나무를 취하여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밤 8시에 동파역(경기도 장단군 일대 역참)에 이르니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간단히 수라상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호위하던 사람들이 종일 굶었던 참이라 마구 부엌으로 들어와 음식을 훔쳐 먹었다. 임금께 올릴 음식이 모자라게 되자 허진과 구효연은 문책이 두려워 달아나 버렸다. # 이순신, 경상도 출전 명령서를 받다. 4월 20일에 이순신은 출전 준비를 하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 사이에 원균은 율포만호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우리에게는 각자 책임을 맡은 구역이 있는데 조정의 명령도 없이 어떻게 내 마음대로 경상도로 출전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한마디로 거절했다. 원균은 5, 6차례나 이영남을 보내어 간절히 요청했지만 이순신은 거절했다. 이영남이 이순신에게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통곡했다. 4월 26일에 이순신은 좌부승지 민준의 서장을 받았다. 4월 20일에 작성된 서장에는 “일본군의 후방 교란을 위해 신중하게 출전하되,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현지 지휘관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경상도에 공문을 보내 서로 의논하여 조치하라”는 다소 애매한 명령이었다. 이러자 이순신은 마음대로 처리하기가 어려우므로 전라관찰사 이광, 전라방어사 곽영, 전라병마절도사 최원에게 알리는 한편, 경상도 순변사 이일·경상 관찰사 김수·경상우수사 원균에게도 경상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이기로 한 약속장소와 적선의 수, 현재 정박하고 있는 곳 등 여러 가지 기밀을 급히 회답해 달라고 통보했다. 이어서 이순신은 각 관포에도 출전 준비를 철저히 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27일 새벽 4시에 선전관 조명이 가져온 좌부승지의 서장을 또 받았다. 서장은 23일에 작성된 것이었다. “원균의 장계를 본즉 각 관포의 수군을 이끌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라고 하니, 원균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니,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 리 밖이라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반드시 명령에 구애받지는 말라.” 이순신은 5관 5포에 4월 29일까지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명령하였다. 4월 29일 밤 12시에 이순신은 원균의 회신을 받았다. “적선 500여 척이 경상도 연해를 거의 다 점령하였으며 경상우수영(거제도 소재)도 이미 점령되었습니다. 두 도가 합세하여 적선을 공격하면 상륙한 왜적들이 후방을 염려하여 사기가 떨어질 것이니 당포 앞바다로 급히 나와야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이순신은 4월 30일 새벽 4시에 출전하기로 하고 수군을 다음과 같이 편성하였다.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전부장(前部將 전방 부대장) 흥양현감 배흥립 중부장(中部將) 광양현감 어영담 유군장(遊軍將) 발포가장(假將:임시지휘관)이며 영군관(營軍官)인 훈련봉사 나대용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한후장(후방 경계부대장) 영군관 최대성 참퇴장(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부대장) 영군관 배응록 돌격장 영군관 이언량 이어서 이순신은 ‘4월 30일 새벽 4시에 출전할 예정이므로 경상우도 소속이면서 본영과 이웃하고 있는 진 남해현 미조항·상주포·곡포·평산포 네 진의 현령·첨사·만호들에게 전선을 정비하여 중간까지 나와서 기다리라’는 비밀 공문을 4월 29일 새벽에 전령에게 주어 급히 보냈다. 그런데 29일 오후 2시경에 전령으로 보냈던 본영의 진무인 순천 수군 이언호가 급히 돌아와서 보고했다. “남해 고을 성안의 관아와 민가들이 모조리 텅 비었고, 성안의 군사들이 왜적이 가까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도망가 버렸고 심지어 현령과 진장까지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망연자실했다. 더구나 남해가 비었다는 소문만으로 진중에 도망자가 두 명이나 생겼다. 이순신은 이들을 잡아와서 효수하여 군중(軍中)에게 보이게 함으로써 군사들의 동요를 막았다. 4월 30일 오후에 이순신은 ‘경상도로 출전을 잠시 미루는 장계’를 조정에 급히 올렸다. “경상도로 나아가 싸우는 사정이 급박하기는 하지만, 남해의 평산 등 네 진의 진장과 현령이 적의 얼굴도 보기 전에 먼저 달아나 버렸습니다. 전라좌수군은 경상도 물길을 잘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해 줄 배도 없고, 작전에 호응해줄 장수도 없으므로 가벼이 출동하는 것은 걱정이 됩니다. 더구나 전라좌수군 전선 30척 만으로는 세력이 약합니다. 전라관찰사 이광도 이런 사정을 알고 이미 전라우수사에게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라고 지시했으니, 전라우수군이 오면 함께 출전하겠습니다.” 이순신은 장계 뒷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흉악한 무리들이 벌써 조령을 넘어 곧 서울을 육박하게 되어 본도 관찰사(이광)이 홀로 분발하여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곧 서울로 향하여 왕실을 보호할 계획이라 하는바, 신은 이 말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칼을 어루만지며 혀를 차면서 탄식하고, 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서울로 달려가 먼저 육지 안으로 들어간 적을 꺾으려고 하나, 한 지역을 지키는 신하의 몸으로써 함부로 하기 어려워 부질없이 답답한 채 분함을 참고 스스로 녹이며 엎드려 조정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같이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해전에서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상도 연해안 고을에는 깊은 도랑과 높은 성으로 튼튼한 곳이 많은데, 성을 지키던 비겁한 군졸들이 소문을 듣고 간담이 떨려 모두 도망갈 생각만 품었기 때문에 적들이 포위하면 금방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번 부산 및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만 하더라도 배들을 잘 정비하여 바다에 가득 진을 치고 습격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알맞게 병법대로 진퇴하여 적을 육지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매 분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순신 저·조성욱 역, 임진장초,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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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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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우리를 버리니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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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강진 백운동천 이담로 뽕나무
- 월출산이 영암의 산이냐, 강진의 산이냐? 영암에서 아름답냐, 강진에서 더 아름답냐? 는 말은 그저 월출산의 아름다움과 신령스러움을 말이나 글로써 다할 수 없음이다. 그뿐인가? 천황봉에서 사해를 눈에 두면 지리산 끝자락과 바다 건너 한라산이니 바로 제황의 위엄이다. 백두대간의 돛대인 지리산에서 광주의 무등산과 순천의 조계산, 그리고 영암의 월출산을 이어보면 마치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또 지리산이 머리이고 무등산과 조계산이 두 젖무덤이니, 당연히 월출산은 두 젖이 키운 용이다. 이 용이 달을 여의주로 입에 물고 한반도 남서해에서 대양을 향해 날아오른다. 더하여 월출산은 달을 낳는 산이고 달이 오르는 산이다. 맑거나 운무가 흐르고 구름이 가려도, 비 흩뿌리고 눈 날려도, 봄, 여름, 갈, 겨울, 어느 때에도 달을 낳는다. 산과 들, 못과 강에 마음과 눈길이 닿으면 달이 오른다. 그렇게 누구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기기묘묘한 산자락을 사방 백 리가 툭 트인 들판 위에 얹어 놓았다. 이 산 남쪽 구지봉이 마치 무명베를 길게 늘어놓은 듯 우아하게 물줄기를 펼치니 바로 금릉(金陵) 경포대(鏡布臺)이다. 금릉은 강진의 옛 이름이 되었고, 이 물이 만든 산 아래 남쪽 너른 터의 절은 ‘월남사’이다. 이 고려 사찰의 빈터에 지금은 석공이 돌이 된 아내로 만들었다는 삼층석탑만 동그마니 남았다. 이 탑과 이어지는 월출산 옥판봉에 눈길이 닿으면 그저 ‘아!’ 소리에 숨이 잠시 멎는다. 채우는 게 소소한 보람이면 비움은 장엄함이고 승화되어 거룩함이다. 여기 텅 비어 넉넉한 월남사지의 삼층석탑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지침이다. 또 경포대 맑은 물이 산 아래의 녹차를 키워 1천 년의 전통을 이으니 ‘옥판차’이다. 더하여 호남 제일의 풍광 별서정원 백운동천을 만들었다. 백운동은 ‘흐르는 물이 다시 운무가 되는 마을’이니, 가히 신선이 인간과 함께 하는 곳이다. 이곳의 백운동천은 조선 중기 이담로(1627~1701)의 별서정원이다. 금릉의 물이 그냥 안개와 구름이 되는 게 아쉬워 계곡에 정자를 앉힌 것이다. 이곳의 꽃과 나무와 집, 병풍으로 두른 옥판봉은 보는 대로 그림이 되고, 그 그림은 눈길을 옮기는 대로 살아서 움직인다. 강진 유배 11년이던 1812년 9월 12일이다. 쉰 살의 정약용은 스물여섯 살의 초의 등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둘러보고 백운동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때 정약용은 초의에게 ‘백운동도’와 ‘다산초당도’를 그리게 하고 자신은 시문을 지어 20쪽짜리 ‘백운첩’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담로의 고증손자인 이덕휘에게 주었다. 이 백운첩이 2001년 강진의 원주 이씨 문중에서 발견되고 백운동천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백운동도 속 12경은 ‘옥판봉’이 끌어오는 월출, 한겨울의 동백꽃 ‘산다경’, 홍매 100그루의 향기 ‘백매오’, 단풍 계곡의 물방울 ‘홍옥폭’. 여섯 구비 물 위의 술잔 ‘유상곡수’, 푸른 절벽 붉은 글씨 ‘창하벽’, 늘푸른 용 비늘 솔 ‘정유강’, 모란 꽃담 ‘모란체’, 고즈넉한 작은 방 ‘취미선방’, 붉은 단풍 가림막 ‘풍단’, 신선이 머무는 ‘정선대’, 울울창창 왕대 숲 ‘운당원’이다. 여기 한 그루 뽕나무가 여섯 구비 유상곡수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다. 누에를 만나 비단이 되고, 입 궁금한 아이들 입술을 검게 물들이는 오디나무이다. 그 오디뽕나무가 이 험한 세상에서 허리 꼿꼿이 눈 부라리지 않고 흐르는 술잔을 건져 두 손 모아 공손히 길손에게 올린다. 여기서 오디뽕나무가 권하는 술 한 잔을 마시고도 아쉬우면 달 아래 월하마을에 들리면 된다. 이곳 ‘월출산방’은 ‘공수래 끽다거’이니 ‘빈손으로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도예가 강승원 주인장의 옥판차를 마시면 여기 사람은 다 인간이자 신선이구나 할 것이다. 김 목/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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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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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강진 백운동천 이담로 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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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적에게 나라를 내준다
- 신립 기병과 고니시 조청대 격돌 탄금대 전투, 왜군의 일방적 승리 신립, 탄금대에서 싸우다 자결하다. 1592년 4월 20일에 삼도순변사 신립은 한양 도성을 떠날 때 선조를 접견했다. 선조는 보검을 내리면서 전교했다. “이일 이하 영(令)을 듣지 아니하거든 이 칼을 쓰라.” 이윽고 선조가 “왜적이 어떠냐?”고 물으니 신립은 왜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에 선조는 “변협은 매양 왜인은 가장 대적하기 어렵다 하는데, 경(卿)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라고 말했다. 신립이 나간 뒤에 선조는 “변협은 진실로 훌륭한 장수이다. 내가 항상 그를 잊지 못한다. 변협이 있었던들 내가 어찌 왜적을 걱정할까?”라고 했다. 이때 변협(1528~1590)이 죽은 지 2년이었다. 신립은 1583년 온성부사 시절에 함경도 종성에 쳐들어온 여진족 족장 이탕개의 1만여 군대를 물리친 맹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왜적과 싸운 적이 없었음에도 왜인을 왜노(倭奴)라고 가볍게 여겼다. 임진왜란 발발 12일 전인 1592년 4월 1일에 류성룡은 신립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류성룡이 조총(鳥銃)을 지닌 왜적을 경계하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새도 잡는다’는 조총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선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나온 신립은 빈청(賓廳)에 들러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섬돌을 내려오는데 머리 위의 사모가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한편 신립은 용인에 이르러 “적세가 심히 성해서 실로 막아낼 일이 어려우니 오늘의 일은 민망하고 딱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장계를 보냈다. 그런데 장계에 서명(署名)을 빠뜨렸다. 사람들은 그의 마음이 어지러워진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류성룡, ‘징비록’). 4월 26일에 신립이 충주에 들어왔다. 충청도 여러 고을에 있는 군사들을 모으니 8000 명이었다.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과 함께 조령(鳥嶺 문경새재) 시찰에 나섰다. 신립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김여물 : 아군의 수가 열세이고 적은 세력이 지극히 크니 교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령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적이 골짜기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양쪽 언덕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공격하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 공격을 당하지 못하겠다면 물러나서 한양을 호위하는 것도 한 가지 계책입니다. 이종장 : 벌판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 불리할 듯합니다. 이곳의 험한 산세에 의지해 많은 깃발을 꽂고 연기를 피워 적을 산란하게 만들어 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신립은 생각이 달랐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벌판에서 기병으로 짓밟으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또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되었으니 배수진을 쳐야 한다.” 충주 단월역(丹月驛)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신립은 상주 전투에서 패한 이일을 만났다. 신립이 이일에게 왜적에 대해 묻자 이일이 말했다. “이번의 왜적은 1570년 경오년과 1555년 을묘왜변과 견줄 게 아닙니다. 또 북쪽 오랑캐처럼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한양을 지키십시오.” 이러자 신립이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패장이니 목 베어야 마땅하나 이번에 공을 세워 속죄하라.” 신립, 독선적이다. 종사관 김여물·충주목사 이종장과 상주에서 패한 이일의 의견을 아예 무시했다. 신립은 조령을 버리고 단월역에 진을 쳤다. 한편 고니시의 왜군 1만8000명은 4월 25일에 상주에서 이일의 군대를 괴멸시키고 26일에 문경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지고 현감 신길원은 홀로 말을 타고 산기슭으로 피해 갔는데 적이 쫓아가서 항복하라고 했다. 신길원이 분연히 꾸짖고 굴하지 않으니 적이 그의 사지를 잘라 죽였다. 고니시는 처음에 조령 입구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山勢)를 보고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 여러 차례 정찰했다. 그러나 조선 군사가 한 명도 없음을 알자 좋아하면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나중에 명나라 도독 이여송이 조령을 지나다가 이런 험한 곳을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총병(申摠兵 신립)은 지모가 없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19번째 기사,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2014, p 84) 4월 27일 밤에 순찰을 나간 군관 한 사람이 적병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했다. 이러자 신립이 홀연히 성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러자 군중(軍中)이 소란스러웠는데 신립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서 신립은 몰래 객사(客舍)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신립은 순찰 군관이 망언해 여러 사람을 현혹시켰다며 목을 베어 군사들에게 조리돌렸다. 이윽고 신립은 적병이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는 고니시의 왜군이 10리 가까이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4월 28일에 신립은 달천을 뒤에 두고 탄금대(彈琴臺 가야 출신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그곳은 좌우로 논이 많고 물풀이 뒤섞여 있었고 며칠 전에 비가 내려서 말이 달리기에 불편했다. 이를 본 광흥주부(廣興主簿) 이운룡이 “이것은 죽을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울며 말하면서 말렸다. 그러나 신립은 “망령된 말로 일을 그르친다”며 곤장 30대를 쳤다. 이운룡은 흐르는 피를 씻은 뒤 전투대열에 합류했는데 군사가 패하자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죽었다. 종사관 김여물도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아들 김류에게 편지를 썼다.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이르는 사람이 없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될 뿐이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나는 여기서 죽을 터이니 가족들은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계시는 곳)로 달려가고 다른 곳으로는 피난하지 말도록 하라.” 김여물은 편지를 종에게 주어 집안에 전하게 했는데 이미 왜적이 사방에 이르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4월 28일에 고니시의 왜군은 단월역에 도착했다. 고니시는 달천 벌판에 조선군이 배수진을 쳤다는 첩보를 접하고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고니시가 7000명으로 중앙군을 맡고, 소 요시토시가 5000명으로 좌군, 시게노부는 3000명으로 우군을 맡았다. 후방은 하리노부가 맡았다. 고니시의 왜군은 충주 땅에 들어오면서 마을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정오경에 그들은 탄금대로 내달아 삼면을 완전히 포위했다. 조선군과 왜군은 달천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신립의 군대는 8000명, 고니시는 1만 5000명이었는데, 두 지휘관의 전술은 달랐다. 여진족을 정벌한 조선 최고의 명장인 신립은 기병이 주특기였고 고니시는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주력이었다. 먼저 신립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충주목사 이종장이 지휘하는 조선군 기병 1000명이 돌격했다. 왜군은 조선군의 활에 맞고, 말에 짓밟혀 죽었다. 고니시의 중앙군이 밀린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신립은 2차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2000명의 기마대가 돌격해 나갔다. 왜군은 둘로 갈라져 단월역 쪽으로 잠시 후퇴하다가 곧이어 달천강을 따라 아래에서 쳐들어온 좌군(左軍)과 산을 돌아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넌 우군(右軍)이 합류했다. 소 요시토시의 좌군 조총부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3열 연속으로 총을 쏘며 전진했고, 우군도 가세했다. 게다가 조선군의 말이 습지에 빠져 허덕이자 조총의 표적이 환히 드러났고, 말과 병사가 한꺼번에 거꾸러졌다. 왜적의 총소리는 땅을 뒤흔들었고, 조선군의 쌓인 송장이 산과 같았다. 신립은 어쩔 줄 모르다가 혼자서 말을 타고 두 번이나 적진으로 쳐들어갔으나 전진할 수 없었다. 신립이 도로 강가로 달려오는데 마침 김여물이 여울 앞에 있었다. 신립은 김여물을 부르면서 “그대는 살기를 원하는가?”하였다. 그러자 김여물이 웃으며 “내가 어찌 목숨을 아낄 사람이요?” 하고 도로 탄금대 밑으로 달려가 신립과 더불어 왜적 수십명을 죽였다. 이때 왜적들이 바짝 추격해오니 두 사람은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신립은 46세, 김여물은 44세였다. 한편 이일은 동쪽 골짜기를 따라 산으로 도망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서울 도성에 가서 치계(馳啓)하였다.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은 망연자실이었다. 탄금대 전투는 기병대 보병, 말과 조총의 대결이었는데 왜군의 일방적 승리였다. 왜군 종군 승려 덴케이는 ‘서정(西征)일기’에 “왜군은 3000개의 수급을 취했고 수백명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했다. 한편 조선군 대군이 온 것을 믿고 피난하지 않은 충주의 백성들과 관속(官屬)들은 다른 고을보다 심하게 죽음을 당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18번째 기사) 신립의 패인(敗因)은 오만과 무지이다. 부하의 의견들을 아예 무시했고, 조총으로 무장한 훈련된 왜군을 하찮게 보았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신립은 날쌔고 예리하기로 당대에 이름이 있었지만, 계책과 계략에는 서툴렀다. 옛사람이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적에게 나라를 내주게 된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만 훗날을 위해 경계(警戒)로 삼아야 할 일이기에 여기에 덧붙여 써 둘 따름이다.”(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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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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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적에게 나라를 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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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로 여는 아침/단짝-김방순
- 함께 놀고 빵 터지게 웃어대고 재미난 이야기 솔솔 어깨동무 그 모습 해님도 바람도 응원한다 주고받는 이야기꽃 콧노래 흥얼흥얼 단짝 친구 부러워 그림자도 어깨동무하고 따라온다 <김방순 작가 약력> -강원시조 동시조 신인상 -자서전 ‘내 삶이 햇살처럼’ -시집 ‘마음의 쉼표’ <해설> 산에 처음 갔을 땐 그리메만 보이더니, 두 번째에 나무와 꽃이 보이고, 세 번째에 새와 벌레가 보였다. 네 번째에 숨소리가 들리고, 다섯 번째에 마음이 느껴졌다. 자꾸만 가니 함께 산이 되었다. 김방순 시인의 ‘단짝’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너와 나 사이에서 시작하는데 차츰 그 간격이 줄어든다. 처음엔 둘 사이가 공간이지만 단짝이 되면 관계가 된다. 함께 산이 되니 이체동심이다. 단짝 친구 부러워 그림자도 어깨동무로 따라온다잖는가? 김 목/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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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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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로 여는 아침/단짝-김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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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제1 상조업체 위상 굳힐 것”
- 기노석 금호라이프 회장 코로나19 이후 크루즈여행 등 보복 소비 발빠른 대응 “고객과의 약속 지키는 것이 목표” 신뢰 경영 ‘한 길’ “직원이 첫째 고객” 대부분 장기근속, 회사발전 토대 성공한 개업의가 상조회사 창업 “사회문제도 치유” 다양한 수익사업 통해 이익 창출, 임직원 복지 진력 암·요양전문 원도병원 건축, 금년 하반기 개원 예정 코로나19 상황이 끝나가면서 세상은 다시 한 번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세계적인 돌림병에 짓눌리고 갇힌 상황에 제기됐던 다양한 가능성들이,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양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상조(업)는 우리 사회에 알려진 초기만 해도, 업무(장례)의 희소성과 특수성에 전문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차츰 장례에만 머물지 않고 일상생활 전 분야로 영역을 확장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 생활의 전 분야에서 수요에 대응한다는 것이었다. 개인이 처리하기에는 시간·자금·전문성 등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사안에 대해, 상조업계는 조직력을 앞세워 선제(先制)적으로 대응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극적(劇的)이었다. 그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여행이다. 특히 크루즈 여행은 현지 방문과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여행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각광을 받았다. 과도한 일정 등으로 인해 단체 관광 참여 후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여유로운 휴식’을 지향하는 크루즈 여행의 장점과 매력은 인기를 끌었고 빠르게 확산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여행 수요는 전반적으로 위축돼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마무리되면서 반작용이라고 할 ‘보복 소비’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특히 크루즈 여행에서 거의 폭발적인 상황이다. 관련 업계는 노선과 일정을 설계하고, 선편(船便)을 구하고, 고객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호남 제1 상조업체’를 지향하며 위상을 굳히고 있는 기노석 금화라이프 회장은, 코로나19의 극심한 침체 상황에서도 계속 흑자를 달성해 상조업계는 물론 지역 경제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기노석 회장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정도경영과 멈추지 않는 노력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상조업(계) 정착 과정의 혼란을 견디고, 최근 3년여 세계적 돌림병의 난관을 이겨낸 끝에, 고객의 평생을 관리하기 위한 새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기노석 회장을 만났다. -코로나19 상황이 마무리되는 국면이다. 업계 상황과 금호라이프의 대응에 대해 알려달라. 상조업이 국내에 알려지고 나서 숱한 곡절이 있었다. 일부 몰지각한 사업자들로 인해 (상조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은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법령이 제정되고 규정이 정비됐으며 정부 기관의 관리·감독도 철저해졌다.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상황을 호전시키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다만 현재의 규제가 지나친 것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상조업은 정부 부처 여러 곳이 감독한다.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까닭에 업계의 건전한 발전에 장애물이 되고, 소비자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는 상황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영업이 극도로 제한되는 등 상조업 전체가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며 꾸준히 활동한 업체에게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금호라이프는 코로나19 기간 중에도 5년 이상 흑자를 기록하는 등 내실을 다지면서,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체질을 강화해왔다.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 상조 관련 규제가 강화되고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휴·폐업 업체가 속출했다.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나? 금호라이프는 창립 이래 ‘신뢰’를 최고·최선의 가치로 삼았다. 회사는 이윤 추구가 목적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고객의 만족을 우선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금호라이프의 영업 등 모든 활동의 바탕에는 언제나 ‘고객과의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회사가 존립하고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신념일 뿐 아니라 임직원 모두가 공감하고 합의한 것으로, 금호라이프의 안정과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금호라이프의 장점과 특색이 있다면? 앞의 ‘성장 비결’과 연관되는 내용이겠다. 금호라이프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대단한 수단이나 비결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예로, 업계의 여러 회사가 결합상품 등 편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인책을 쓰고 있지만, 금호라이프는 오로지 상품의 경쟁력만으로 고객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것이 장점이라고 하겠다. 또 특징을 꼽자면 임직원 대다수가 10년 전후의 장기 근속자라는 점이다. 구성원들이 여러 면에서 안정돼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고, 쉽게 계량(計量)하기 어려운 큰 효과를 내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장점과 특징이 서로 이름만 다른 것 같다.(웃음) -흑자 경영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 투자한다는데? 상조업의 특성 상 흑자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회사를 견실하게 운영한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두고 있다. 상조업이 고객의 비판을 받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방만한 투자’였다. 투자라는 명목으로, 고객(가입자, 회원)들의 선납금을 자기 주머니 돈처럼 함부로 써버렸던 것이다. 극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다. 나는 인천 한림병원장례식장을 내 개인 자금으로 설립했다. 회사 자금을 투입했을 때의 실패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흑자를 낸 다음 금호라이프 자산으로 이관했다. 금호라이프는 이런 ‘신중한’ 과정을 거쳐 (투자한) 태양광발전 등에서도 수익을 내고 있다. 현재는 암 요양전문병원(원도병원)을 신축 중인데 금년 하반기에 개원할 것이다. -흉부외과 전문의(의학박사)라는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상조업에 투신한 계기는? 국내에 상조업이 도입됐을 무렵, 부산에서 열린 흉부외과 학회에 참석했다가 상조(업)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말도 많고 탈도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시의적절하고 꼭 필요한 업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적지 않은 상조업체 가운데 광주 등 호남을 근거로 한 곳은 전혀 없었다. 평소에 지역의 사회적 소외와 경제적 침체를 절감하고는 있었지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장례(葬禮)까지 다른 동네에 맡겨?’라는 오기(傲氣) 비슷한 생각이 들었고, 바로 당시 운영 중이던 병원(기노석흉부외과) 지하에 사무실을 열고 사업을 시작했다. -이익 창출보다는 사회 기여 측면이 더 강한 듯하다. 나는 본디 의사다. 사람의 질병을 고치고 다스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이 모여 이룬 사회의 병증(病症)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돈벌이나 한 몸의 안락만을 원했다면, 보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일 만나고 부대끼는 이웃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가능한 한 여건도 만들고 싶었다. 앞에서 거론한 다양한 수익사업도, 금호라이프 임직원들에게 보다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또 벌써 5년 넘게 계속하고 있는 회원(가족) 장례 조문이나, 지역 인재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2022년 시작) 등도, 사회가 한 뼘 한 걸음이라도 바람직한 쪽으로 움직이게 하려는 뜻이 반영된 것들이다. -지난 해 큰 선거를 연거푸 치른 이후, 내전(內戰) 상황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특히 지역문제 등과 관련한 견해는? 의사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치유를 기다리거나 대증요법으로 해결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환부(患部)를 도려내거나 잘라내는 수술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는 구성원이 많고 견해가 다양하다는 점 말고도 모든 변수를 정확하게 헤아리기는 힘들다. 국제적 경기(景氣)나 자연 상황의 변화를 감안하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나는 이런 모든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최대 다수의 공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지역과 관련해, 지적(知的)이고 합리적인 토론(논의)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나는 우리 각자가 다시 있을 수 없는 절대(絶對)한 존재라는 점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서로 존중하고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찾아 꾸준히 함께 갈 수 있기를 염원하고,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확신한다. -앞으로 계획은? 우선 코로나19 상황이 종식되는 데 따라, 영업 활성화가 최우선 과제이며 목표이다. 돌림병 유행으로 인해 억눌려 있던 여행 수요가 ‘보복 소비’라고 할 만큼 폭발적으로 분출하고 있다. 특히 ‘안락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원하는 추세에 따라 크루즈 여행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만큼, 효율적인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앞서 거론한 여러 수익 사업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려고 한다. 금호라이프 임직원들의 은퇴 후 복지까지 고려하면서 적절한 방안을 구상하고 실천해나갈 것이다. 내 개인에 관해서는 지난 삶을 돌이켜보고 그 가운데 혹시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한다. 졸저(拙著) ‘목숨값’(2017년 간행)의 증보판이나 회고록 같은 형식도 가능할 것이다. 섣부른 일반화나 고답(高踏)적 훈계조가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데 의미를 두겠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구슬인지 그냥 흙먼지인지는 내가 결정할 부분이 아니다. 소중히 꿰어서 보배를 만들건, 서둘러 바람에 흩날려버리건 내가 상관할 것도 아닐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열심히 바쁘게 살아온 한 삶을 일별(一瞥)하는 것으로 다시 없을 깨우침을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신조(信條)나 좌우명 등이 있다면? “어떤 일이건 열심히 하자”는 것이다. (의학) 공부야 그냥 열심히 하면 됐다. 그러나 병원을 개업하는 것이나, 금호라이프를 창업해 운영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었다. 법률을 비롯해 사회 모든 분야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상황에, 관련 전문가를 총동원해도 해법이 없(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혼자(!) 책이나 자료를 찾아보고, 밤을 새우면서 궁리하고, 끝내 방법을 찾아내 난관을 극복했다. 그렇게 이 자리까지 왔다. 사실 성공 여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중요하지도 않다. 그 ‘열심’이라는 마음가짐과 과정이 자연스럽게 목표를 제시하고, 동력을 제공해 어디론가 이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도착지는 완성을 향한 또 하나 탄탄한 도약대가 됐던 것 같다. 기노석 회장은 부인과 슬하에 2남을 뒀는데, 모두 의사로 근무하면서 원도병원 설립을 주도하고 있다. 기 회장이 체득해 늘 실천하고 있는 건강법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하는 것이다. 취미는 거의 직업선수 수준인 골프부터 수불석권(手不釋卷)의 독서 그리고 유단자인 검도(劍道)까지 다양하다. 세상에는 훌륭한 사람이 많고 자칭 인물(!)도 넘쳐난다. 범인(凡人)을 뛰어넘는 자질과 능력을 드러내고 돋보이는 부류들도 흔하다. 그러나 혹시 화려한 치장과 눈부신 조명으로 눈을 속이고, 낯 뜨거운 찬사를 요구하며 알뜰하게 잇속을 챙기는 경우는 없을까? ‘되(升)글 가지고 말(斗)글로 써먹는다’ 따위가 대단한 처세술이요 능력인 것처럼 내세우며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은 많고 문제(질병)는 넘쳐나며 해결(치료)법은 지천(至賤)으로 흔하다. 또한 난(生) 것은 반드시 늙고 아프고 죽는 것, 존재는 결국 과정(過程)일 뿐이다. 헛된 근원을 따지고 잠꼬대 같은 귀일(歸一)만을 노릴 것이 아니라면, 하루 그리고 한 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생(天生) 의사」인 기노석 회장의 평범한 일상이 돋보인다. 그는 늘 배우고 어떻게든 그것을 실천한다. 흉부외과 전문의로서 환자의 아픔을 치료한 것에서 그 근본이 드러났고, 금호라이프를 창업해 (지역)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겠다는 발심(發心)과 경영 과정에 실체가 밝혀졌다. 그렇게 그는 궁벽하게 소외된 고향에서 ‘함께 잘 사는 삶’을 추구하며 처방을 찾고 있다. 어떤 질병이건 꼭 낫게 하고, 무슨 문제건 반드시 풀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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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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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제1 상조업체 위상 굳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