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1-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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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 정약용, 전간기사 6수를 짓다
    1810년에 다산 정약용은 전간기사(田間紀事) 6편을 지었다. 즉 다북쑥, 뽑히는 모, 메밀, 보리죽, 승냥이와 이리, 오누이 시이다.전간기사 6편에는 다산의 서문이 적혀 있다. “기사년(1809년)에 나는 다산초당에 머물고 있었다.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어 지난 해 겨울부터 봄을 거쳐 금년 입추에 이르기까지 붉은 땅이 천리에 연했다.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고 6월초에는  유랑민들이 길을 메워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참상이어서 살 의욕마저 잃어버린 것 같았다.나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몸이라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는 처지이기에 오매초(烏昧草)에 관하여 아뢸 길이 없고, 은대(銀臺)의   그림 한 장도 바칠 수 없었다.그래서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로 적었다. 그것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와 더불어 풀밭에서 슬피 우는 것과 같은 시들이지만, 성정(性情)의 올바른 것을 구해서 화기(和氣)를 잃지 않으려 했다. 오랫동안 써 모은 것이 몇 편 되기에 ‘전간기사(田間紀事)’라 이름하였다.”여기에서 오매초는 고사리의 이칭(異稱)이고, 은대(銀臺)는  신선이 사는 곳인데, 모두 백성의 굶주림과 관련 있다. 그러면 전간기사 제1수 ‘다북쑥’ (채호)을 음미해보자.다산은 원주(原註)에서 이렇게 적었다. “다북쑥은 흉년을 슬퍼한 시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기근이 들어 들에 푸른 싹이라곤 없었으므로 아낙들이 쑥을 캐어다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1.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양떼처럼 떼를 지어           저 산등성이 오르니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붉은 머리 숙이고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눈물만 쏟아지네.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다북쑥만이 자라서               무더기를 이뤘기에             말리고 또 말리고           데치고 소금 절여          된 죽 묽은 죽 쑤어 먹지달리 또 무엇하리.       2.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네.           명아주도 비름나물 다 시들었고     자귀나물은 떡잎은 나지도 않아    풀도 나무도 다 타고샘물까지도 말랐네. 논에도 우렁이 없고바다엔 조개도 없다네. 높은 분네들 살펴보지도 않고기근이다 기근이다 말만 하면서 가을이면 다 죽을 판인데봄이 와야 구휼이네 유랑 걸식 떠난 남편그 누가 묻어줄까 오호라 하늘이여어찌 그리도 무정하시나이까. 3.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캐다가 보면 들쑥도 캐고 캐다가 보면 쑥 비슷한 것도 캐고캐다가 보면 다북쑥을 캐네. 푸른 쑥이랑 흰 쑥이랑미나리 싹까지 무엇을 가릴 것인가모두 캐도 모자란데 그것을 뽑고 뽑아바구니에 쓸어 담고 돌아와서 죽을 쑤니아귀다툼 벌어졌네. 형제간에 서로 뺏어온 집안이 떠들썩하네. 서로 원망하고 욕하는 꼴들이마치 올빼미들 같네.  여기서 올빼미란 아귀다툼하는 간악한 사람을 비유한다. 하기야 배고프면 나만 살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닌가.전간기사 제2수는 ‘뽑히는 모(拔苗)’이다. 다산은 이렇게 적었다. “모가 말라 모내기를 할 수 없게 되자 농부들은 그것을 뽑아 버리는데, 모를 뽑으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온 들판에 가득했다. 어떤 아낙네는 너무 억울해서, 자식 하나를 죽여서라도 비 한 번 쏟아지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벼 싹이 나올 때면         연한 녹색에 짙은 황색     한 폭의 비단같이        푸른빛 은은하네.         어린 자식 보살피듯         아침저녁 돌보아서         주옥처럼 보물로 여겨      보기만 해도 흐뭇했네.     쑥대머리 한 여인이   논바닥에  주저앉아  방성통곡을 하면서       저 하늘 향해 호소하네.   차마 어이 정을 딱 끊고  이 벼 싹 다 뽑다니     오뉴월 한여름에         슬픈 바람이 쓸쓸하네.   우거진 나의  모를       내 손으로 다 뽑다니    무성한 나의  모를 내 손으로 죽이다니 우거진 나의  모를   잡초처럼 뽑아내고   총총한 나의  모를 화톳불 놓듯 태우다니   뽑아서 묶어서저 웅덩이에 두었다가 행여 비가 내리면 고인 물에나  꽂아볼까 내 자식 셋이 있어  젖도 먹고 밥도 먹는데 그 중 하나를 죽여서라도이 어린 모 살렸으면 이어서 전간기사 제3수는 메밀이다. 메밀은 현령(縣令)을 풍자한 시다. 조정에서는 메밀종자를 나누어 주도록 영을 내렸는데도 현령은 그 영은 따르지 않고 백성들에게 메밀만 심으라고  독촉만 한다.  넓고 넓은 논에 먼지만 풀풀 날리는데 어린 볏모 뽑아버리고 메밀 대신 심으라네. 집안에 없는 메밀 시장에 가도 살 수 없어 주옥은 구할지라도 메밀 종자 살 수가 없네. 현령이 통첩을 내려 ‘메밀종자 걱정 말라 내 장차 너희 위해 감영 통해서 구해주마’ 우리는 그 말만 믿고 논 갈아엎었는데 메밀은 주지 않고 우리들만 독촉하면서 “메밀 심지 않으면  나는 벌을 내리리니 흰 몽둥이 붉은 곤장에 너의 살점 떨어지리.”오호라  하늘이시여 왜 이다지 못 살피시나요. 메밀이나마 심지 않으면우리는 살 길이 없는데 우리 탓만 하며 호령이 벽력같네. 고기 쌀죽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벌 줄 것인가 메밀종자 주라는  나라 분부 내렸건만 그 분부는 안 따르고 우리 임금을 속이다니 조정에선 메밀 종자 나누어주라고 영을 내렸건만 현령은 종자는 안 나누어주고 메밀 심으라고 백성만 들볶고 있다. 이게 나라인가?    한편 전간기사 제4수는 보리죽이다. 다산은 원주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거 역시 흉년 걱정이다. 가을 추수 가망이 없어 부잣집들도 모두 보리죽을 먹는 형편이고,  신세가 고단한 자들은 보리죽도 먹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앞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리죽을 먹고 있었는데, 나도 가져다 먹어보았더니 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되어 먹고 나면 속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동쪽 집이 들들들   서쪽 집도 들들들   보리 볶아 죽 쑤려고  맷돌소리 요란하네.   체로도 치지 않고     기울도 까불지 않고   그대로 죽을 쑤어     주린 창자 채운지만   썩은 트림 신트림에 눈앞이 어질어질     해도 달도 빛을 잃고 천지가 빙빙 돈다네.  아침에도 보리죽 한 모금   저녁에도 보리죽 한 모금    이것마저 잇기 어려운데     배부르기 바랄쏜가.   있는 물건 모두 팔아     보리를 사려 해도         내 물건은 팔리지 않아   기와조각 자갈이요     파는 곡식은 날개 돋쳐  옥 같고 구슬 같네.   보릿자루 하나 나면         모여든 자 수 백 명 이네. 내 보기엔 보리죽도     마을에서  부자나 먹네. 으리으리한 집에다가  정원 수목 우거져서    소나무 대나무에     감나무에 돌밤나무 옷걸이엔 명주옷   찬장에는 놋그릇   외양간에는  소 누웠고홰에서는 닭이 자고   말 잘하고 권력도 있고  수염도 멋지더라.      극심한 가뭄에도 부자들은 보리죽이라도 먹는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보리죽도 못 먹는 신세이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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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4
  • ‘쥐와 야합한 고양이’ 시를 짓다.
    1810년에 다산 정약용은 ‘고양이[?奴行]’시를 지었다. 시를 읽어보자. 남산골 한 늙은이 고양이를 길렀는데       해묵고 꾀 들어 요사하기 늙은 여우로세    밤마다 초당에 둔 고기 뒤져 훔쳐 먹고.    항아리며 단지며  술병까지 다 뒤지네.       어둠 타고 살금살금 못된 짓 다하다가      문 박차고 소리치면 그림자도 안 보이나     등불 켜고 비춰보면 더러운 자국 널려 있고  이빨자국 나 있는 찌꺼기만 낭자하네.       해묵고 요사한 고양이는 쥐 잡을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주인 집 고기를 훔쳐 먹고 항아리를 엎는 등 못된 짓을 하고 있다.  늙은 주인 잠 못 이뤄 근력은 줄어가고      백방으로 생각해도 나오느니 긴 한숨뿐      생각하면 고양이 죄 극악하기 짝이 없어      당장에 칼을 뽑아 목을 치고 싶지마는       하늘이 너를 낼 때 무엇에 쓰려고 했던가.     너 보고 쥐를 잡아 백성 피해를 없애라 했지.  들쥐는 구멍 파서 벼 싹 물어다 쌓아두고   집쥐는 이것저것 안 훔치는 물건 없어    백성들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하고       기름 말라 피 말라 피골이 상접이라     그래서 너를 보내 쥐 잡이 대장 삼고     마음대로 찢어 죽일 권력 네게 주었으며  황금같이 반짝이는 두 눈도 네게 주고    칠흙같은 밤중에도 올빼미처럼 벼룩도 잡을 만큼 두 눈 밝혔지.  보라매같이 예리한 발톱 네게 주고       호랑이처럼 톱날 같은 이빨도 네게 주고  펄펄 날고 내리치는 날쌘 용기까지 네게 주어  쥐들이 너를 한번 보면 옴짝달싹 못하고 몸을 바치게 않았더냐.                                         쥐 잡으라고 고양이에게 온갖 권한을 주었는데 엉뚱한 짓 하고 있으니  늙은 주인은 한숨만 나온다.   날마다 백 마리씩 쥐 잡은들 누가 말리랴         보는 이들 네 기상 뛰어나다고 연거푸 칭찬만 할 텐데  그래서 팔사제(八?祭)에도 네 공로 보답하려고   누런 의관 차리고 큰 술잔에 술을 부어 제사 않더냐. 팔사제(八?祭)는 매년 농사가 끝나고 농사에 관계되는 여덟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여덟 신은 신농씨(神農氏 농사를 처음으로 가르쳤다는 중국 전설의 황제)  후직(后稷 농사를 관장하는 장관), 농(農), 우표철 (郵票? 권농관이 농민을 독려하기 위해 밭 사이에 지었다는 집), 고양이, 제방, 도랑, 곤충이다. 이렇게 고양이는 농사 신(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너는 지금 한 마리 쥐도 잡지 않고       도리어 네 놈이  도둑질을 하다니              쥐는 원래 좀도둑이라 피해도 적지마는          너는 지금 힘도 세고 세도 높고 맘씨까지 거칠어  쥐들이 못하는 짓 제멋대로 행하여        처마 타고 뚜껑 열고 담 벽 무너뜨리니     그러니 쥐떼들이 꺼릴 것이 없어            구멍 밖에서 껄껄대고 수염을 흔드네.       쥐들은 훔친 물건 모아다가 너에게 뇌물로 주고 태연히 너와 함께 돌아다니니                 쥐들은 고양이에게 뇌물을 주고, 고양이 비호아래 물건을 훔친다.   호사자들 때때로 너를 그리는데            무수한 쥐떼들이 하인처럼 너를  호위하고   나팔 불고 북치고 떼를 지어서는      대장기 높이 들고 앞장 서 가네.       네 놈은 큰가마 타고 교만  부리면서   쥐들의 떠받듦만  좋아하고 있구나.    내 이제 붉은 활에 큰  화살 메워 네놈 직접 쏴 죽이리.              만약에 쥐들이 행패부리면 차라리 무서운 개 불러내리라.                                               다산의 대표적인 우화시(寓話詩)이다. 그러면 남산골 늙은이 그리고 고양이와 쥐는 누구일까? 남산골 늙은이는 백성, 쥐는 도둑, 고양이는 도둑 잡는 포도군관(捕盜軍官)이다. 도둑을 잡아야할 포도군관(捕盜軍官)이 도둑의 뒷배인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     다산은 1818년 봄에 지은 『목민심서』 <이전(吏典) 6조 / 제2조 관속들을 통솔함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무릇 포도군관은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모두 큰 도둑이다. 포도군관은 도둑질하는 무리들과 결탁하여 장물(贓物)을 나누어 먹고, 마음대로 도둑질하게 하는 한편 도둑질 방법을 일러 준다. 수령이 도둑을 잡으려 하면 기밀을 누설하여 도적으로 하여금 멀리 도망가게 하고, 수령이 도둑을 죽이려 하면 슬며시 옥졸(獄卒)을 사주하여 옥졸로 하여금 도적을 고의로 놓치게 한다. 그들의 갖은 죄악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한편  『목민심서』 <형전(刑典) 6조 / 제6조 제해(除害 : 피해를 제거함)>에는 갈의거사(葛衣居士 : 칡넝쿨로 만든 옷 한 벌만 입고 지내는 거사) 이야기가 나온다.   “갈의거사는 남쪽의 호걸이었다. 일찍이 쌍교(雙橋)의 거리를 지나다가 군관이 한 도둑을 잡아서 포승으로 결박하고 뒤로 고랑 채우고 가는 것을 만났다. 갈의거사는 앞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엉엉 울면서 위로하여 말하기를 ‘원통하다 자네여! 어찌하다 이런 욕을 보게 되었는가?’ 하니, 온 저자 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둘러싸고 구경하였다. 군관이 크게 놀라며 군졸을 명하여 갈의거사를 함께 결박하라고 하니, 갈의거사가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결박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들과 같이 도둑질을 하였다는 말인가? 어찌 내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결박하려 하는가?’ 하였다. 군관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거사가 말하기를 ‘지금 온갖 도둑이 이 땅 위에 가득 찼다. 토지에서는 재결(災結)로 도둑질하고, 호구(戶口)에서는 부역을 도둑질하고, 기민 구제에서는 양곡을 도둑질하고, 창고에서는 이익을 도둑질하고, 송사에서는 뇌물을 도둑질하고, 도둑놈에게서는 그 장물을 도둑질한다. 그런데도 안찰사와 병사ㆍ수사가 서로 짜고서 숨겨 주고 들추지 않는다. 그 지위가 높을수록 도둑질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그 녹이 후할수록 도둑질의 욕심은 더욱 커진다. 이들은 향락을 누리고 훔친 좀도둑만이 큰 욕을 되니 슬픈 일이 아닌가? 내가 이래서 우는 것이지, 다른 일이 아니다.’ 하니, 군관이 말하기를 ‘선생의 말이 옳습니다.’ 하고, 술을 권하며 사과하여 보냈다.” 그런데 고양이를 감사(監司)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산은 『감사론(監司論)』에서 감사야 말로 가장 큰 도둑이라 하였다.  “밤에 담 구멍을 뚫고 문고리를 따고 들어가서 주머니를 뒤지고 상자를 열어 의복ㆍ이불ㆍ제기(祭器)등을 훔치기도 하고 가마솥을 떼어 메고 도망하는 자가 도적인가? 아니다. 이는 굶주린 자가 배고픈 나머지 저지른 것이다. (중략) 그렇다면 누가 큰 도적인가? 토호(土豪)와 간사한 아전들이 도장을 새겨 거짓문서를 만들고 법률 조문을 멋대로 해석하여 법을 남용하여도 “이것은 연못 속의 물고기이니 살필 것이 못 된다.”하면서 감싸 숨겨준다. (중략) 수령이 곡식을 판매하고 부세(賦稅)를 도적질한 데도 용서하여 그냥 둠은 물론, 고과를 제일 좋게 매겨 임금을 속이니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도적은 야경꾼도 감히 심문하지 못하고, 의금부에서도 감히 체포하지 못하고, 어사(御使)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재상도 감히 성토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감사가 멋대로 난폭한 짓을 해도 아무도 힐문하지 못하고, 엄청난 전토를 차지하여 종신토록 안락하게 지내지만 아무도 이러쿵저러쿵 헐뜯지도 못하니 이런 자가 어찌 큰 도적이 아니겠는가.”
    • 기획.연재
    2019-12-30
  • 대학교수 정년퇴직 후 11년 외길 ‘인생2막’
    ‘홍익인간’ 생활철학…‘아무도 하지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인생의  목표  ‘Korea-W.Timor문화교류센터(KTCC)’ 설립…소수민족 지원사업 추진       '사람이 일흔살까지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는 뜻의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백세시대를 맞아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관심거리다. 유엔 기준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한다. 우리나라는 2017년 고령인구 14.2%대를 넘어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향후 8년안에 초고령사회 진입이 예측된다.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비전을 갖고 행동해야 할까.팔순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불구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마음으로 인생2막을 설계하고 실천하는 전직 대학교수를 만나보았다. ‘잘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물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물론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에게도 삶의 지표가 될성 싶어서다.    <김홍 학장 프로필> * 영암출생(1943년생)* 학력 및 경력 - 광주교육대학 졸업 - 조선대학교 법정대학(법학사) - 전남대학교 경영대학원(경영학 석사) - 전주대학교 대학원(경영학 박사) - 전남일보사 편집국 기자 - 동강대학교 교수 정년퇴임(35년) - 홍조근정훈장 포상 - 제5회 전남문학 신인상(수필) 수상 - 남도문학회 회장 역임 - 광주 YWCA 소비자고발센터 자문위원 역임 -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이사 역임 - 유네스코 광주·전남협회 이사 역임  - 영암군노인대학장 역임  - 호남일보 논설위원장(현재) - Korea-W.Timor 문화교류센터(KTCC)총재(현재) - 대한호스피스 웰다잉협회 부회장(현재) - 사)대한노인회 전라남도연합회 노인지도자대학장(현재)   ■노인대학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동기는?=어렸을 때 할아버지 슬하에서 밥상머리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어르신에 대한 경외감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년퇴직 후, 고향인 영암군노인대학장으로 활동 해달라는 권유가 있어 ‘고향에 진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학장에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영암군노인대학장 취임 후 활동상황이 궁금합니다. =영암군노인대학은 특별히 ‘찾아가는 노인대학’을 운영합니다. 2개읍 9개 면으로 11개 노인대학 총학생수 1700여명으로 교육에 필요한 비용을 영암군에서 충분히 지원함으로써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취임 초(2011년)에는 영암군 9개 분회에 컴퓨터를 기증하여 컴맹퇴치교육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영암군노인대학장 재직(2011.7.1-2019.2.28) 8년간 노고를 인정받아 1만4000여 노인회원들로부터 공로패(영암군노인지회 김소은 회장)를 받았고, 현재는 사)대한노인회 전라남도연합회 배기술 회장으로부터 전라남도 22개 시군 노인대학을 총괄하는 부설 노인지도자대학 학장으로 위촉(2019.5.14) 받아 재직중입니다.    ■컴퓨터를 기증하고 컴맹퇴치 교육을 시켰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2011년 당시에는 카페와 블로그가 유행했던 때입니다. 재능기부 차원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카페와 블로그를 제작하여 공급해 드렸습니다. 영암군노인대학을 비롯해 다른 지역 노인대학 학생들에게 ‘컴퓨터는 내친구’라는 타이틀로 어르신들이 쉽게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강의도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커져가는 외로움을 컴퓨터를 통해 해소시킬 목적이었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SNS시대에 컴퓨터와 핸드폰은 필수적인 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에 ‘컴퓨터는 내친구’라는 개념의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웰빙과 웰다잉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복지, 안녕, 행복’을 뜻하며, 우리말로는 ‘참살이’라고 번역됩니다.웰빙은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말하지요. 한 세기 이전부터 선진외국에서는 웰빙과 더불어 웰다잉이 부각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웰빙에 이어 웰다잉이 소개되었지만, 웰빙에만 관심이 있지 웰다잉은 그 개념마저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요. 이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웰다잉의 실천을 삶에서 직접 보여주고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무소유의 삶을 통해 웰다잉이 추구하는 바를 보여 주신 법정 스님의 열반은 웰다잉의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웰빙과 웰다잉의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중시하며, 그것의 조화를 통해 삶의 질을 높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웰빙이고, 웰다잉은 인간으로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소망을 전제로 삶의 내면을 풍요롭게 가꿔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웰다잉이 추구하는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의 반대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 웰다잉이 품은 뜻은 ‘잘 죽어가는’이란 진행형이므로 역설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 완결의 의미를 추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웰빙 또한 웰다잉과 다름 아니지만, 웰다잉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꿔 실천함으로 죽은 이후 영원한 기억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더욱 중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웰다잉의 한 방편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하여 말씀해 주십시요.=생명의 연장을 위한 특정 치료 방법 여부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서면으로 미리 밝힌 공적 문서를 말합니다. 의학적 치료에 관한 의사 결정 능력이 있을 때 자신의 연명 치료에 대한 의향을 미리 남겨, 죽음을 앞두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2016년 2월 3일 공포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약칭 ‘연명의료결정법’)에 의해 법제화되었습니다.19세 이상인 사람이 자신의 연명의료중단등결정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사를 직접 문서로 작성한 것. 전자문서를 포함합니다. 죽음에 임박한 상황이 되었으나 본인의 의사가 불분명한 경우, 가족이나 의료진은 현존하는 의학기술을 동원하여 생명을 연장해야 한다는 윤리적인 압박으로 인위적인 생명의 연장을 위해 노력하게 되지요. 이 경우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인위적인 생명 연장 장치에 의존하게 되어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미리 자신의 의료 방향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한 문서입니다.사)대한노인회 전라남도연합회 부설 노인지도자대학에서는 앞으로, 정규 교육과정을 통하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 대한 소양교육을 실시할 것입니다.   ■‘Korea-W.Timor문화교류센터(KTCC)’ 설립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지요.=‘Korea-W.Timor문화교류센터(KTCC)는 2008년 8월 인도네시아 서티모르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40여일간 체류한 후, 문화교류의 필요성을 느껴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12월 서티모르 우카와웨(UKAW)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동생 김용 교수(Dr, Kim Yong, Prof of English)를 비롯한  관계자 4명의 교수와 문화교류 방안을 의논한 후, 2013년 8월 전남 나주시 금천면 원곡리 산야초 연구원에서 회원 25명이 참석하여 KTCC 재단설립을 위한(‘Korea-W.Timor문화교류센터) 발기인 모임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그동안 소수민족의 예술(민속춤, 민속놀이, 의상, 공예)과 생명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쿠팡에서 소왜까지’ 사진 책자 발간(From Kupang To Soe : Indonesia Timor in Photos)을 비롯한 장학금 지원, 컴퓨터와 재활용 의류 보내기 등 문화교류를 해 왔습니다.이에 본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2018년 1월 창립총회에서 정관을 채택하고 임원을 선출하여 광주광역시에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하고, 광주광역시장으로부터 ‘비영리민간단체등록증’(2019.11.14)을 발급 받았습니다.   ■미래의 ‘Korea-W.Timor문화교류센터(KTCC) 사업계획 내용은 무엇입니까?=광주광역시장(제2019-0-광주광역시-19호)이 발급한 ‘비영리민간단체등록증’에 명기된 바와 같습니다. 첫째, 코리아-인도네시아 서티모르 문화학술 교류사업. 둘째, 서티모르 소수민족 생필품 지원사업과 봉사활동. 셋째, 소수민족 문화체험 및 연구, 교육출판 사업, 다문화 가정 문화교실운영. 넷째, 기타 목적사업에 부합하는 사업입니다. 이와 같은 사업목적을 구현하기 위하여 뜻을 함께한 KTCC 운영위원(위원장 천길홍) 28명은 지난 2014년부터 정기적으로 월례모임을 갖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우의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11일 오전11시에 광주광역시 남구 제석로 대영빌딩 2층에 ‘Korea-W.Timor문화교류센터’ 사무실을 이전하고 개소식을 했습니다. 앞으로 KTCC는 대한민국과 서티모르와 문화교류를 위해 민간외교 차원에서 양쪽의 명문대학과 MOU를 체결하고 유대를 강화하는데 가교 역할을 할 계획입니다.     ■학장님의 생활철학인 ‘홍익인간의 정신’과 ‘인생2막’의 궁극적 목표인 ‘아무도 하지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함은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한국의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이지요. 홍익인간의 이념에는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과학기술과 통신의 발전으로 지구상 온 인류가 쉽게 왕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지구촌이 되었습니다. 이제 지구촌 사람들은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원 고갈, 국가 간 갈등과 전쟁, 빈부의 격차, 난민 문제, 지구 온난화와 사막화 등의 환경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아갈 책무를 가지고 다 같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합니다.홍익인간의 첫 글자 홍은 내 이름과 같아서 어렸을 때부터 ‘홍익인간’에 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아무도 하지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인생2막의 긍극적 목표를 세우게 된 것은 경상남도 거창고등학교의 ‘직업선택 10계’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후였습니다.‘대안학교’처럼 자율적인 분위기로 운영되고 있는 남녀공학인 거창고등학교는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가르치기 위해 지난 1980년대 초에 ‘직업선택 10계’를 창안하여 지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거창고등학교의 ‘직업선택 10계’와 같은 비경쟁적인 ‘블루오션(Blue Ocean)’전략은 100세시대를 살아가는 인생2막의 노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지도자대학장으로서 보람스럽던 일과 앞으로의 계획은? =2019년 12월3일, 38기 노인지도자대학 졸업식날 나상묵(84세) 어르신 가족들과 친지들이 함께 축하하면서 기념촬영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2019년 5월14일 (사)대한노인회 전라남도연합회 노인지도자대학 학장으로 부임하여 노인지도자대학 제38기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38기생의 자긍심과 단결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삼팔광땅’의 위풍당당한 기운을 넣어드리려고 나름대로 애썼습니다. 건배사 때는 빠짐없이 “우리는 삼팔” “광땅이다”를 선후창으로 외쳐 일체감과 단결력을 과시했습니다. 건배사는 타이밍이 맞아야 하고, 센스 있는 건배사는 분위기를 조화롭게 하고 동질성을 자아내게 할 테니까요.? 앞으로 노인지도자대학 교육의 방향은 웰빙도 중요하지만, 웰다잉 쪽에 비중을 두고 교육프로그램을 편성할 계획입니다. ‘노노케어 소통관리교육’ 등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삶의 마무리를 위해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는 웰다잉 교육에 중점을 둘 계획입니다.    ■정년퇴직 후 11년간 사회활동을 다양하게 하시는데,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싼다고나 할까요. 건강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같습니다. 아무리 늦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더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간단한 운동을 합니다. 최근에는 건강테스트 겸해서 무등산 중머리재를 주말에 연 3주 다녀왔는데, 무리였던지 감기에 걸려 며칠간 혼났습니다. 과욕은 금물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 기획.연재
    2019-12-30
  • 정약용, 1808년 봄부터 다산초당에서 기거하다
    강진 백련사에서 능선 하나를 넘으면 다산(茶山)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야생차가 자라는 산이라 하여 다산(茶山)이라고 했는데,   정식 명칭은 만덕산(萬德山)이고 높이가 412미터이다. 이 산 밑에는 귤동(橘洞)마을이 있다. 가을이면 유자가 노랗게 익어가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인데 귤동은 해남윤씨 집성촌이었다. 여기엔 윤단(1744∽1821)의 초당인  다산초당이 있었다.   1808년 3월16일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놀았다. 7언 율시 두수가 전해진다. 시의 제목부터 살펴보자.     삼월 십육일 윤문거의 다산서옥(茶山書屋)에서 놀았는데 공윤도 병을 치료하며 거기에 있었다. 어찌 하다 보니 열흘이 넘게 그곳에서 묵고 있었는데 점차 이렇게 일생을 마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두 수를 읊어 공윤에게 보였다.  윤문거는  귤림처사 윤단의 큰 아들 윤규노(1769∽1837)이다. 윤단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로  행당 윤복(1512∽1577)의 후손이다. 윤효정의 아들인 윤복은 안동 대도호부사 시절에 퇴계 이황(1501∽1570)과 교류했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을 다산서옥이라고 칭했다. 아마도 초당에 책들이 있었나 보다. 한편 공윤은 윤종하인데, 고조부가 공재 윤두서(1668∽1715)였다.  다산의 외증조부가 공재이니 정약용과 윤종하는 친척 간이었다.  이는 다산이 쓴 ‘또 공윤에게 주다[又贈公潤]’ 시 첫 머리에 나온다.  나로서는 증외조부가 그대로선 바로 고조부이시지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1수 사는 곳 일정치 않게 안개 노을 따라다니는 몸    더구나  다산이야 골짜기 마다 차나무로다.          하늘 멀리 바닷가 섬엔 수시로 돛이 뜨고         봄이 깊은 담장  안에는 여기저기 꽃이로세.      싱싱한 새우무침 병 앓는 자 입에 맞고            연못과 누각 초라해도 이만하면 살만하지          흡족한 마음에도 근심은 있지만 내 분수엔 넘치니       여기서 노닐며 서울 사람에게는 자랑하지 않으리.     2수 숲이 짙고 산이 깊어 몸놀림이 느긋하고     조용하게 감상하는 맛 떠드는 곳에 댈 것인가  조수는 봄빛처럼 왔다가는 다시 가고         꽃은 나라 권세같이 성했다가 곧 시들지.    송시(宋詩)를 슬슬 보며 골라볼까 생각하고     조용히 주역 들고 이 마음 의탁한다네.   단 한 가지 두고두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연못에 가득 푸르게 연을 심지 않은 것이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열흘 넘게 윤종하와 함께 묵었다. 그동안 다산은  동문 밖 주막집과 보은 산방 그리고 제자 이청의 집을 전전하던 터라 이곳이 너무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윤규노에게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비치었다. 윤규노는 부친 윤단과 상의하여 정약용에게 초당에서 지내라고 하였다. 그 대신 윤단의 손자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가르친 18제자 중에 윤단의 손자가 6명이나 된다.  1808년 4월 초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며칠 안 되어서 정약용은 5언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적막한 숲 속의 집이요                졸졸졸 베개 아래 샘물 소리네        이틀 사흘 지나고 났더니             귀에 익어 잠자는 데 방해가 안 되네.  샘물 소리도 잠결에 들리는 적막한 숲속의 집. 시중유화(詩中有畵)다. 다산초당으로 옮긴지 20여일 지난 4월20일에 다산의 둘째 아들 학포 정학유(1786∽1855)가 찾아왔다. 큰아들 학연(1783∽1859)은 1802년에 찾아왔지만 학유는 팔 년 만에 처음 온 것이다.    사월 이십일 학포(學圃)가 왔다. 8년 만에 만났다. 얼굴 생김새는 내 자식 같은데          수염이 자라서 딴사람 같구나.          집안 편지 가지고 왔건만              틀림없는 내 아들인지 잘 모르겠네.     둘째와는 16세 때 헤어져 24세에 만났으니 처음에는 아들인가 알아보기도 어려웠다는 다산의 시는 눈물겹다.  5월11일에 다산은 윤문거와 아들 학유과 함께 용혈로 뱃놀이를 하면서 모처럼 휴식을 즐겼다.                                       한편 다산초당의 모습은 정약용의 후손 정규영이 1921년에 지은 『사암선생연보』에 잘 나와 있다.   “1808년 (순조 8, 무진) 47세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거처했다. 다산은 강진현 남쪽에 있는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서 윤단의 산정이다. 공이 다산으로 옮긴 뒤 대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 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고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두자를 새겼다. 이때에 다산은 여러 제자들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다산초당의 모습은 ‘다산 4경’시 4수,  ‘다산팔경사 (茶山八景詞)’ 8수 그리고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에도 잘 나타나 있다.  먼저 다산 4경은 다조(茶?), 약천(藥泉), 정석(丁石), 석가산(石?山)이다. 다조는 초당 앞마당에 있는 우람한 너럭바위인데 이곳에서 차를 끓였다. 약천은 초당 뒤 약수가 흐르는 샘이고, 정석은 초당 왼편 석벽(石壁)에 새긴 정석(丁石)글씨인데 다산이 썼다. 석가산은 연못 안에 돌로 쌓은 산이다. ‘다산팔경사’는 다산초당 주변의 풍경 8곳을 노래한 것이다.  산허리엔 담장이 둘러져 있고, 담장에는 산 복숭아나무 가지가 바람에 일렁인다. 초당 주렴에는 버들 그림자가 어리고, 따뜻한 날에는 꿩 소리가 들린다.  단풍나무는 비단 바위위에 얽혀 있고, 국화는 연못에 그림자를 비친다. 언덕에는  대나무가 푸르고, 작은 시냇가에는 소나무가 우뚝 서있다.  이중 제1수를 읽어보자. 산허리를 경계로 널따랗게 쳐진 담장    붓으로 그린 듯 봄빛이 그대로네     봄비가 내린 뒤라  산골짜기 더욱 사랑스럽고 산 복숭이  몇 가지엔 붉은 꽃이  예쁘네.   한편 다산은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도 지었다.  제1수는 초당 전경이다.  귤동 마을  서편에 깊숙하고 그윽한  다산      천 그루 소나무 속에  시냇물 한줄기           시냇물이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               깨끗한 바위 사이에 조용한 집 있다네.        2수는 연못 모습이고, 3수는 초당 생활이다. 제3수를 읽어보자. 대밭속의 부엌살림 중(僧)에게 의지하니         가엾은 그 중 수염이며 머리털 날마다 길어지네. 이제 와선 불가 계율 따윈  모조리 팽개친 채   싱싱한 물고기 마구 잡아 국까지 끓인다오.     정약용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초기엔  산정에 식사준비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는 젊은 중 한사람을 보내어 다산의 밥 시중을 들게 했다. 제4수 이후 제17수 까지는 꽃과 나무에 관한 시이다. 근처에 있는 복숭아꽃, 차나무, 모란꽃, 작약, 치자, 백일홍, 해바라기, 국화 등이다.   이어서 제18수는 다산이 직접 재배한 미나리 밭이고, 제19수는 초당의 모습이다. 마지막 제20수는 다산의 삶이다.  하늘이 나를 보내 이 동산에서 살게 하니      이 봄에 자고 또 취하느라 문마저 열지 않네.  산속 뜨락 온 마당에 이끼 푸른데         때때로 지나가는 사슴 발자국 뿐.         다산은 하늘이 이 동산에서 살게 했다고 흡족해 한다. 이제 다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기획.연재
    2019-12-10
  • 다산 정약용과 혜장선사의 아름다운 인연
    정약용(1762∼1836)은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와서 1818년 여름에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시 마재 마을로 돌아갔다.    다산은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정하기까지 세 번 거처를 옮겼다. 1801년 11월23일경 유배객 정약용을 모른 척한 상태에 서 고맙게도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배려로 정약용은 주막집 토담 방에서 기거하였고, 그곳이 사의재였다. 1805년 겨울에는 백련 사 주지 혜장선사(1772∼1811)의 도움으로 큰 아들과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에서 머물렀다. 다산은 아들 학연이 서울로 올라가자 다시 사의재로 내려가 지냈다. 1806년 가을부터는 아전의 아들인  제자 이청(李晴)의 집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정약용은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와 자주 어울렸다.  정약용은 1805년 4월18일에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에 나들이 하다가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1772∼1811)를 처음 만났다. 그는 다산 보다 10살 어린 학승이었다. 혜장은 처음에는 정약용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나절 대화를 나누었는데, 늦게야 알아보고 같이 잠을 잤다. 그날 밤 다산과 혜장은 주역을 논했는데 혜장은 다산 앞에서 자기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다가 다산의 ‘곤초육수(坤初六數 )’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뒤로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시면서 정성을 다했다.   1805년 겨울에 다산이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도 혜장이 도운 것이다. 다산과 혜장은 자주 어울렸고, 둘 사이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같다. 다산이 1806년 3월에 지은 시가 이를 말해준다.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 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 (산으로 가자꾸나. <山行雜謳> 20수 중 제15수) 1807년 4월에 정약용은 “사월 초하룻날 혜장이 와서 함께 백련사에 가서 놀고 싶어 했는데 제반 준비물 때문에 그만두기로 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읊었다”란 시를 지었다.   부드러운 술과  향기로운 안주로  하룻밤을 놀려고  했더니 녹음 덮인 관도(官道)에 갈 길이 멀고머네. 이틀 뒤인 4월3일에 정약용은 혜장이 주지인 백련사에서 놀았다. “사월 삼일 백련사에서 놀다”란 시를 음미해보자.   앓고 일어나 가볍게 차리고 새벽 노을  헤치면서    말을 타고 모래밭 가 어부 집을 지나가네.        밀물 때라 들판에도  잔물결이 일고 있고          봄은 갔어도 산에는 아직도 때 늦은 꽃이 있네.      시를 보면 제자 이청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 다산은 앓다 일어나  말을 타고 백련사로 갔나 보다.   폐물이기에 남이 다 버려도 달게 여긴 지 오래이나  청광(淸狂)만은 세상에다 내놓고 자랑하네.            구름 시내 한 굽이를 간신히 지나치고              지팡이 짚고 누대 오르니 석양 이전이네.           1808년 봄에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처음에는 산정에 식사를 준비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혜장은 젊은 중 하나를 보내어 다산의 밥 시중을 들게 했다. “대밭속의 부엌살림, 중(僧)에게 의지하니가엾은 그 중 수염이며 머리털 날마다 길어지네.이제 와선 불가 계율 모조리 팽개친 채싱싱한 물고기 잡아다가 국까지 끓인다오.”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중 제3수, 1808년) 다산초당에서 다산이 기거하면서 혜장과의 교류는 더욱 잦아졌다. 혜장은 다산을 만난 후 주역과 논어 등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 불경은 오직 수능엄경과 대승신기론 만을 좋아하고 염불이나 기도를 하지 않아 다른 승려들의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집이 세고 굽히지 않는 성격의 혜장이었다. 한번은 다산이 혜장에게 ‘자네는 너무 고집이 세니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라고 충고하자 혜장은 스스로를 아암(兒菴)이라고 불러 다산의 뜻을 따랐다. 그런데 불법(佛法)에는 의욕을 잃고 시나 쓰고 주역, 논어를 논하다가 술에 잔뜩 취하여 세월을 보낸 아암은 1811년 가을 어느 날 병이 들어 40살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 다산은 혜장 선사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컸다. 입적한 날, 다산은 만시(輓詩)를 지었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라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 책 자주 읽었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푸른 산 붉은 나무 싸늘한 가을 희미한 낙조 곁에 까마귀 몇 마리 가련타 떡갈나무 숯 오골(傲骨:오만방자한 병통)을 녹였는데 종이돈 몇 닢으로 저승길 편히 가겠는가.  관어각 위에 책이 천권이요 말 기르는 상방에는 술이 백병이네. 지기(知己)는 일생에 오직 두 늙은이 다시는 우화도 그릴 사람 없겠네.” 한편 1812년 겨울에 혜장의 두 제자가 그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다산을 찾아왔다. “우리 스승님의 탑(塔)을 세워야 하는데, 선 생께서 그 명(銘)을 지어주십시오”하므로, 다산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지은 글이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이다. 다산은 비문에서 혜장의 탄생과 불교에의 귀의, 혜장과 첫 만남, 보은산 방과 다산초당에서의 교류, 아암이란 호에 대한 내역, 아암이 죽은 해에 쓴 자작시를 소개하고 명(銘)으로 끝맺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빛나는 우담발화 (燁燁優鉢)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시들었네(朝華夕衰) 펄펄 나는 금시조(翩翩金翅) 잠깐 앉았다가 곧 날아갔네(載止載騫). 우담발화(優曇鉢華)는 3천 년 만에 한 번 꽃이 핀다는 무화과의 일종으로 아주 드물게 있는 일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비범한 인 물 혜장이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것을 애도하는 표현이다. 금시조는 인도의 전설에 나오는 용을 잡아먹는다는 새이다. 슬프다, 이 아름답고 깨끗함이여 (哀玆都潔)지은 글 있어도 전할 사람 없어라(有書無傳) 그대와 더불어 함께  갔다면(與爾偕征) 오묘한 진리, 깊은 이치도 열어젖힐 수 있었으리(手啓玄鍵) 조용한 밤에 낚시 거두니(靜夜收釣) 밝은 달이 배에 가득했네(明月滿船) 지난봄에 입을 다무니(殘春緘口) 산 속 동네가 너무 쓸쓸하도다(山林寂然). 이름 역시 나이든 아이였는데도(是名壽童) 하늘은 그 나이에 인색하였네(天嗇其年) 이름이야 스님인데 행실은 유자(儒者)이네(墨名儒行) 군자가 어여삐 여긴 바로세.(君子攸憐). <주역>·<논어> 등에 빠진 유학자 같은 승려 혜장선사. 그가 너무 빨리 저 세상으로 간 것을 아쉬워하는 다산의 마음이 애잔하다. 한편 혜장선사의 ‘아암장공탑’은 해남군 대흥사 부도(浮屠) 밭에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부도 밭이 있는데, ‘아암장공탑’은 정문 입구의 청허당 서산대사와 조선 차(茶)의 중흥을 이끈 초의(草衣 1786∼1866) 대종사 탑 사이에 세워져 있다. 탑비는 ‘동방제십ooo대사’라고 적혀 있고, 비문 글씨는 너무 희미하다. 그렇지만 찬찬히 읽어 보면 ‘아암’이란 글자가 여러 번 나온다. 비의 왼쪽 맨 아래쪽엔 ‘정약용선(丁若鏞 撰)’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 다산 정약용과 혜장선사를 다시 생각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아름다우면서도 애달프다.    
    • 기획.연재
    2019-11-25
  • 정약용, ‘수심에 쌓여 (憂來)’ 시 12수를 짓다
    정약용이 1804년에 지은 ‘여름날에 술을 마시다’ 시의 마지막은 신분제도의 모순에 대한 탄식이다.    산악이 영재를 만들어낼 때에      씨족을 가려서 만들 리 없고       한 가닥 좋은 기운이 반드시        명문가 최씨와 노씨의 뱃속에만 있으리란 법 없지  솥은 솥발이 뒤집혀야 좋고       난초도 깊은 골짝에서 나는 법   송나라 위공은 비천한 집 출신이었고     송나라 범중엄도  의붓아비 밑에서 자랐네.   명나라 대신 구준도 먼 변방에서 났지만  재주와 지모가 모두 빼어났거늘  어찌하여 등용 길이 그리도 좁아       사람이 움츠려 기를 펴지 못 펴나.   오직 제일골(第一骨 신라시대 귀족)만 발탁해 쓰니         나머지 골품은 노예와 같은 신세   서북 사람들 언제나 얼굴 찡그리고    서얼들은 원통해 통곡소리 드높네.     위세 당당한 수십 가문이           대대로 국록을 먹어치우니            그들끼리 패가 서로 갈리어           엎치락뒤치락 죽이고 물고 뜯어       약자의 살을 강자가 먹고는           대 여섯 집 호문(豪門)만 살아남아서     이들 만이 경상(卿相 정승)이 되고       이들 만이 악목(岳牧 판서와 감사)이 되고  후설(喉舌 승정원 관원) 맡은 자도 그들이고    이목(耳目 감찰 관원) 노릇도 그들이 다 하며   이들만이 모든 관직 다 해먹고            이들만이 옥사를 감독하네.              먼 시골 백성이  아들 하나 낳았는데         빼어난 기품이 난곡(鸞鵠) 새와 같고                 팔 구세 되어서는                   의지와 기상이 가을철 대나무 같아               아비 앞에 꿇어앉아 여쭙는 말이“제가  지금 구경(九經)을 다 읽고            경술이 누구보다 으뜸이오니             홍문관에 들어갈 수 있겠지요”     구경(九經)은 시경 · 서경 · 역경 ·효경 ·춘추 ·예기·논어·맹자 ·주례이다.   그 아비 하는 말 “너는 지체가 낮아             임금을 곁에서 모실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하는 말 “제가 이제 큰 활을 당길 만하고             무예가 춘추시대 진나라 장수 극곡과 같으니               오군영의 장수나 되어 말 앞에다 대장기를 꽂으렵니다. 그 아비 하는 말 “ 너는 지체가 낮아        장군 수레 타는 것도 허락 안 할 것이다”    자식이 다시 하는 말 “제가 이제 관리 일 공부했으니  애민하는 순리(循吏) 한나라 공수와 황패의 뒤를 이어받아 그냥 군부(郡符)를 허리에 차고 죽도록 고량진미 실컷 먹으렵니다.  그 아비 하는 말 “너는 지체가 낮아 애민의 순리도 가혹한 혹리(酷吏)도 너에겐 상관 없은 일” 이 말 듣고 자식 놈 발끈 노하여 책이고 활이랑 던져버리고 쌍륙놀이와 골패놀이 마작놀이 공차기놀이로 허랑방탕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늙어서는 시골구석에 파묻혀버리네. 권세 있는 집안도 자식 하나 낳았는데 사납고 교만하기 천리마 같고 그 아이 팔구세가 되어   예쁘장한 옷을 입고 다니면 객들이 하는  말이 “너는 걱정 없다 너희 집은 하늘이 복 내린 집이고네 벼슬도 하늘이 정해놓아서청관 요직 마음대로 될 것이니 부질없이 헛고생 해가면서 매일 같이 글공부 할 필요 없으리. 때가 되면 좋은 벼슬은 저절로 오리니편지 장이나 쓸 줄 알면 족하리.” 그 아이 이 말 듣고 깡총깡총 좋아하고 다시는 서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작이며 골패라든지 장기바둑 쌍륙에 빠져허랑방탕하여 인재 되지 못하건만 높은 벼슬 차례로 밟아 오르네. 먹줄 한 번 못 맞아본 나무가 어떻게 큰 집 재목 될 것인가 두 집 자식 다 자포자기하고 말아 세상천지에 어진 자라곤 없어졌다네.곰곰 생각하면 속만 타기에 부어라 다시 또 술이나 마신다네. 다산은 묻고 있다. 평민 자제들은 실력이 있어도 왜 출세할 수 없는가?권세가 자제들은 놀면서도 어떻게 출세하는가? 지금은 어떠한가?   사진 1  2012년 유네스코 기념인물로 선정된 정약용 이어서 1804년에 정약용은 ‘수심에 쌓여(憂來)’ 시 12수를 지었다. 강진읍 동문 밖 주막집 토담 방에서 지낸 정약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시이다.  이 중에서  몇 수를 읽어보자.  1. 어려서는 목표가 성인이었다가     중년에 와 현자라도 바랐는데      늘그막엔 우하(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달게 여기나 수심에 쌓여 잠 못 이루네(憂來不得眠) 2. 복희 시대에 살지 못하여    복희에게 물을 길이 없고     중니(仲尼 공자) 시절에 태어나지 못해   중니에게도 물을 길이 없네.   이 시의 원주에는 ‘이때 《주역(周易)》 전(箋)을 쓰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정약용은 1803년 겨울부터 주역을 읽기 시작하여 1804년 여름에 초고를 완성했다. 정약용이 주역을 공부하였다는 것은  같은 해에 쓴 시 ‘근심을 달래며’ 12수중 2수에도 나타나 있다. “천하의 책들을 모두 삼키고 마지막에 주역을 토해 내려 했는데 하늘이 그 인색함을 풀고자 하여 나에게 삼년 귀양 내리셨도다.”  5. 취하여 북산에 올라 통곡하니        통곡소리 하늘에 사무치건만        옆 사람 그 속도 모르고           나더러 신세가 궁하여 운다고 하네.   6. 천 명이 술에 취해 떠드는 속에선비 하나 의젓하게 있고 보면그 천 명 모두가 손가락질하며그 한 선비 미쳤다고 한다네.  이게 바로 정약용의 심사였는데, 이 시는 복원된 강진군 사의재 팻말에 적혀 있다.  사진 2.  강진군 사의재에 있는 한시 팻말    7. 어쩔 수 없이 늙고                  어쩔 수 없이 죽지                  한번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인간 세상을 천상으로 여기다니        8. 실날같이 어지러운 눈앞의 일들        바르게 되는 일 하나도 없지만           바르게 정리할 길이 없기에            생각하면 혼자 가슴만 쓰릴 뿐이네     9. 마음이 육신의 노예 되었노라고       도연명도 스스로 말한 바 있지만       백 번 싸워야 백 번 다 지니            이 몸은  왜 이리 멍청할까              10. 태양이 소리같이 빨리 질주하여   총알도 따르기 불가능하네.      그를 잡아맬 길이 없어             그것을 생각하면 슬프기만 하네.   11. 호랑이가 어린 양을 잡아먹고는         붉은 피가 입술에 낭자하건만          호랑이 위세가 이미 세워진지라            여우와 토끼는  호랑이를 어질다 찬양하네. 호랑이는 봉건지배층, 어린 양은 힘없는 백성들, 여우와 토끼는 지배층에 빌붙어서 이익을 챙기는 아첨꾼들이다. 정약용은 우화시 로 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12. 예쁘장하고 작은 복사나무        봄철이면 가지가지 꽃이지만     해 저물어 이리저리 꺾이고 나면 쓸쓸하기 옛 몰골이 아니지       혹시, 복사나무의 몰골이 유배지의 정약용 모습이었을까?     
    • 기획.연재
    2019-11-11
  • 정약용, 환곡과 과거제도의 폐단을 통탄하는 시를 짓다
    정약용은 1804년에 지은 ‘여름에 술을 대하다[夏日對酒]’에서 환곡의 폐해를 지적한다. 시를 읽어보자     농가엔 반드시 식량을 비축하여           삼년 농사지으면  일년 치 비축하고        구년 농사지으면  삼년 치 비축하여       검발하여 백성 먹여 살리는 건데           사창이 한 번 시작된 후로                불쌍히도 수많은 목숨 떠돌이 됐지        검발(檢發)이란 법으로 단속하고 창고에 있는 곡식을 풀어내는 일이다.  사창(社倉)이란 쌀 저장 창고인데 사창이 환곡(還穀)으로 변했다.      빌려주고 빌리는 건 양쪽이 다 원해야지   억지로 강행하면 그건 불편한 거야        천하 백성이 다 머리 흔들 뿐         군침 흘리는 자는 한 명도 없네.     봄철에 좀먹은 것 한 말 받고         가을엔 온전한 쌀 두 말을 갚는데     게다가 좀먹은 쌀값 돈으로 내라니    온전한 쌀 팔아 돈을 바칠 수밖에     봄에 좀 먹은 쌀 한 말 받고, 가을에는 품질 좋은 쌀 두말을 갚는데 그것도 돈을 내라고 하니 이는 이중삼중  착취이다. 그것도 수령과 아전이 대놓고 하니 어이가 없다.   남는 이윤은 간교한  관리 살찌워         한번 벼슬길에 천경(千頃) 논이 생긴다네.  쓰라린 고초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돌아가니  긁어가고 벗겨가고 걸핏하면 매질이라       큰 가마솥 작은 솥을 모두 다 가져가고      자식은 팔려가고 송아지마저 끌려가네.    이런 수탈이 어디 있는가? 이게 수령과 아전들이 할 일인가?   군량미 비축한다 말도 말게나.                 그 말은 교묘하게 둘러맞추는 말일 뿐          섣달그믐 임박해서 창고 문 닫아걸고           새봄도 되기 전에 창고 곡식 다 비우니         곡식 쌓아둔 기간은 겨우 몇 달뿐이요          일 년 내내 창고 속은 텅텅 비어 있는 꼴이네  군량미 조달 할 일 불시에 생기는데           그때는 탈 없으란 법 있다던가.               군량미조차도 환곡으로 둔갑되었으니 참담하다. 이를 참다못해 1862년 2월29일에 진주민란이 일어났다. 경상우병사 백낙신이 사복을 채운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남지방 70여 고을로  민란이 들불처럼 번졌다. 농가 양식 대준다는 말 하지도 말게         너무도 자애로워 오히려 지나치네.          자녀들이 제각기 살림을 났으면            부모도 자녀에게 맡겨 두는  법            헤프거나 아끼거나 각자에게 맡겨야지      죽 먹어라 밥 먹어라 간섭이 웬 말인가.    모든 일 부부가 의논해서 결정하지         지나친 부모 간섭 원하지 않네.            상평의  법이 원래 좋았는데               아무런 까닭 없이 버림당하고 말았네.      정조 때에  환곡제를 폐지하고 상평창 제도로 개편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두어라 말아라. 술이나  마시자.           백 병 술이 장차 샘물같이 되리라         정약용은 술이나 마신다. 속만 상하니 술로 화를 푼다.  한편 정약용은 『목민심서』 ‘호전(戶典)6조’, 제3조의 ‘환곡의 장부’에서 이렇게 적었다.  “환곡은 사창(社倉)이 변한 것으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줬다가 추수기에 거둬들이는 조적도 아니면서 백성의 뼈를 깎는 병폐가 되었으니, 백성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일이 바로 눈앞에 닥쳤다.” 사진 1. 다산 정약용 선생 상(像)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정약용 유적지)                                                    이윽고 정약용은 과거제도의 문제점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해마다 춘당에서 과거시험 보이는데         수많은 사람이 한 자리에서 겨루니           이루(離婁)같이 눈 밝은 자가 백 명 있어도   낱낱이 감시하기 못하는 일이지             춘당은  창덕궁에 있는 대(臺)이다.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치렀다. 이루(離婁)는 중국 전설상의 황제시대 때 살았다는 눈이 비상하게 밝은 사람이다. 되는 대로 적당히  채점하고              당락은 오로지 시관 손에 달렸다네.       높은 하늘에서 별똥 하나 떨어지니        만명의 눈이 모두 똑같이 쳐다보네.       법을 무너뜨리고 요행심만 길러주니      온 세상이 모두 미친 것 같네.             정약용은  과거시험에 부정이 많았음을 탄식하고 있다. 정약용은 원주(原註)에서 “이상은 대과(大科)에 대해 논한 것이고, 이 아래는 소과(小科)에 대하여 논한 것”이라고 적었다.  대과는 과거시험의  ‘문과’를 말하고,  소과는  생원과 진사시험을 말한다. 식자들 지금도 따져 말하길       변계량의 허물을 아직도 탓하네.   변계량(1369~1430)은 세종 때 20여 년간이나 대제학을 지내면서 국가 중요 문서를 도맡아 처리했으며 과시(科詩) 체제를 처음으로 정비한 인물이다.  과시(科詩)의  격조가 원래 비루하여  끼친 해독을 크고 넓어 엄청나구나.   마을마다 앉아 있는 선생들이        한과 당의 것은 가르치지 않고       어디서 온 것인지 백련구(百聯句)만          읊고 외우느라 방 안이 가득하고     백련구(百聯句)는 시골 서당의 초보 교과서인 백련초해(百聯抄解)에 나오는 시구이다. 이 백련초해는 초학자에게 한시를 가르치기 위해 칠언고시 중 연구(聯句) 100개를 뽑아 풀이한 한시입문서인데, 장성군 필암서원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1510∽1560)가 편찬했다고 전해진다. 항우와 패공의 옛날 고사 만        장마다 편마다 지리하게 연해있네.  항우는 초패왕이고, 패공은 한나라의 유방이다. 시골 서재에서 출제(出題)하는 것들이 모두 초한(楚漢)시절 고사 뿐 이다.  강백은 입부리가 호탕했고         노긍은 기교한 표현 잘했는데      강백은 조선후기의 시인으로 과시(科詩)에 능했으며 시풍(詩風)이 호탕했다. 노긍(1738~1790)도 역시 과시에 능했다. 한평생 공부하여 성인을 닮자 하나     소동파와 황정견도 엿보지 못해        소동파(蘇東坡)는 소식(1036~1101)의 호이다.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당송팔대가였다. 그는 「적벽부」시로 유명하다. 황정견(1045∽1105)은  소동파 문하에서 배운 시인이다. 시골에선 비록 내노라 할지 몰라도     시체문(時體文)도 어두워 캄캄하다네.    대대로 이름 한번 날리지 못하건만      그래도 농사일은 하지를 않네.          과거에 뽑히고는 고사하고            문자도 아직은 미개한 상태            글 조금 안다고 농사일 안 하는 허세꾼들이 아니꼽다.  어떡하면 대나무 만 그루 묶어다가      천 길 되는 빗자루를 만들어서         쭉정이 먼지 따위 싹싹 쓸어서         바람에 한꺼번에 날려버릴꼬.          정약용은 허세들을 대나무 비로 싹 쓸어버려야 한다고 끝맺는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19-10-29
  • 정약용, 1804년 여름에 술 마시며 세속을 개탄하다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은 강진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내준 토담집 방에서 지냈다. 정약용이 이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모기 한 마리가 왱하고 날아다니면서 물어뜯었다. 견디다 못해 정약용은 ‘얄미운 모기[憎蚊]’ 시를 지었다.    맹호가 울밑에서 으르렁대도   나는 코골며 잠잘 수 있고  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있어도 누워서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 모기 한 마리 왱하고 귓가에 들려오면 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단다. 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넣느냐 베 이불을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으면 금방 새 울퉁불퉁 혹이 돋아 부처 머리처럼 돼버리고제 뺨을 제가 쳐도 헛치기 일쑤이며 넓적다리 급히 만져도 그는 이미 가고 없어 싸워봐야 소용 없고 잠만 공연히 못 자기에 여름밤이 지루하기 일 년과 맞먹는다네. 몸통도 그리 작고 종자도 천한 네가 어찌해서 사람만 보면 침을 그리 흘리느냐 밤으로 다니는 것 도둑 배우는 일이요 제가 무슨 현자라고 혈식을 한단 말인가. 생각하면 그 옛날 대유사에서 교서할 때는 집 앞에 창송과 백학이 줄서 있고 유월에도 파리마저 꼼짝을 못했기에 대자리에서 편히 쉬며 매미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흙바닥에 볏짚 깔고 사는 신세 내가 너를 부른 거지 네 탓이 아니로다. ‘지금은 흙바닥에 볏짚 깔고 사는 신세(如今土床薦藁?)’라는 마지막 구절은 정약용이 기거한 토담집 방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의 강진 사의재는 너무 호사스럽다. 이 시 구절을 고증삼아 좀 더 누추하게 복원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인데. 흙바닥은 아니라도 볏짚이라도 깔아 놓았더라면 훨씬 실감 날 것인데. 그런데 이 시에서 모기는 ‘백성을 가렴 주구하는 탐관오리’로 비유된다.  일종의 우화시(寓話詩)이다. 한편 1804년 여름에 정약용은 ‘여름날 술을 마시며 [夏日對酒]’ 시를 지었다. 이 시는 1060자에 달하는 장편 고시(古詩)이다. 이 시에는 전정(田政) ·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삼정(三政)문란,  과거제도 · 신분제 등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이 낱낱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나라 임금이 토지를 소유함은  비유컨대 부잣집 영감 같은 것 영감 밭이 일백 두락이고 아들 열이 제각기 분가하여 산다면 한 집에 열 두락씩 주어 먹고 사는 형편을 같게 해야 마땅한데 약은 자식이 팔구십 두락 삼켜버리니 어리석은 자식의 곳간은 늘 비어 있네. 정약용은 임금이 토지를 불평등하게 분배한 것을 한탄하고 있다.  이런 한탄은 정약용의 산문 ‘원정(原政)’ 첫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정(政)의 뜻은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다 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남들 것 까지 아울러 가져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것인가.” 시는 계속된다.   약은 자식은  비단옷이 찬란히 빛나는데     어리석은 자식은 가난에 시달리네.  영감마님 눈을 들어 이 지경을 보면      불쌍하고 속이 쓰리겠지만             그대로 맡기고 직접 정리를 하지 않아  서쪽 동쪽으로  뿔뿔이 굴러다니네.    부모 밑에 똑같이 받은 뼈와 살인데             부모의 사랑이 왜 이다지 불공정한가.        근본 강령이 이미 무너졌으니         만사가 꽉 막혀 불통인 것이지.       한밤중에 책상 치고 벌떡 일어나      탄식하며 높은 하늘을 우러러 보네     이렇듯 세상은 불공평하다. 다 같은 백성인데 나라가 차별대우를 하고 있고, 다 같은 자식인데 부모가 불공정하게 대우하고 있다. 이러니 아무리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해도 무엇 하나? 가문과 혈통이 삶을 좌지우지하니. 지금은 어떤가. 한국사회는 정의롭고 공정한가? 현대판 신분제인 금수저와 흙수저는 없나? 정약용의 시는 이어진다.   많고 많은 저 백성들    모두 똑같이 백성들인데     마땅히 세금을 거둬야 한다면    부자들에게나 거둘 일이지    어찌하여 유독 힘없는 백성에게만 피나게 긁어가는 정사(割政)를 하는가.  조세 불공평에 대한 탄식이다. 그런데 정약용의 시대만 그런가? 월급쟁이는 원천징수로 꼬박꼬박 세금 내는데, 전문직· 임대업자 · 기업인들은 세금을 제대로 내고 있나? 군보(軍保)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이다지 모질게 법을 만들었나. 일 년 내내 힘들여 일을 해도     제 몸 하나도  가릴  길이 없고         뱃속에서 갓 태어난 어린 것도    백골(白骨)이 진토가 된 사람도           그들 몸에 요역(?役)이 모두 부과되어      하늘  곳곳마다 울부짖는 소리. 양근(陽根)까지 잘라버릴 정도니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정약용이 1803년에 지은 애절양(哀絶陽) 시가 다시 생각난다. 정약용은 군정의 폐단, 즉 황구첨정 · 백골징포를 통탄하고 있다.    호포법은 논의 있는 지 오래되어 그 뜻은 균등하고 타당했는데  작년에 평양 감사 이 법 시행해 봤지만  수 십일도 되지 않아 그만두었네. 호포법 시행 논의도 흐지부지되고 마는 현실. 이는 몇 십 년 후인 1862년에 삼정문란으로 일어난  임술민란 이후 삼정이청정의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만인이 산에 올라 통곡하거니     무슨 재주로 임금의 뜻을 펼 수 있으리.  먼 곳 가려면 가까운 데서 시작하고  낯선 사람 다스리려면 가까운 친척부터 하는 법  어찌하여 굴레와 다리 줄을 가지고  야생마부터 먼저 길들이려 드는가. ‘장자’ 책에는 백락이 야생마를 길들이는 글이 나온다. 그는 말머리를 묶는 가죽 굴레와  말의 앞발을 가지 못하게 묶는 줄이다.    놀라서  손을 빨리 빼는 것은 물이 끓기 때문이니 어떻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 서쪽 백성들 오랜 세월 억눌려 지내  십세(十世) 동안  벼슬 길 막혀 버려서  겉으로야 공손한 체 하지만      가슴속은  언제나 사무친 원한     서쪽 백성은 서도(西道), 즉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을 말한다. 이들 마음속에는 원한이 사무쳐 있다.  지난번에 왜놈들 쳐들어 왔을 때     의병들 곳곳에서 일어나 활약했지만   서쪽 백성들은 유독 수수방관한 것은  진실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이지. 그랬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 회령에서 국경인은 피난중인  선조의 큰 아들 임해군과 셋째 아들 순화군을 잡아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준 부역자였다. 이에 의병장 정문부(1565~1624)가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을 무찌르고 함경도를 탈환했다. 이 전투가 북관대첩이다. 한편 다산이 이 시를 쓴 지  7년이 지난 1811년에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  서북인에 대한 차별이 폭발한 것이다.  이윽고 정약용은 ‘분노가 끓어서 술이나 진탕 마시노라’고 시를 끝맺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속이 끓어올라        술이나 진탕 마시고(痛飮) 진(眞)으로 돌아가리.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19-10-17
  • OWHC-AP 동아리 몽골 세계유산 탐방기
          동아리 대표학생 화순이양고 2년 김보아참여 학생-화순고 2년 나진석, 1년 김한결, 김지성, 조우석, 하영민, 이명룡맨토교사 화순고등학교 진로진학상담교사 윤학근 우리는 OWHC-AP 세계유산 도시기구 동아리로 첫 시작을 했다. 우선 OWHC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세계유산은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이를 후손에게 전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가 있으므로 이를 위하여 세계유산 도시기구가 창립되었으며, 회원도시들의 문제에 관해서 논의의 장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활동을 하며 많은 부족함과 한계에 부딪혀왔다. 학생이기에 경제적인 이유로, 학생이기에 시간적인 여유로. 이러던 와중에 전라남도 교육청에서 주관한 이 프로젝트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의 포기와 실패를 도전과 성공으로 마주하기 위해 우리 앞에 기적같이 찾아왔다. 하지만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첫 단계는 면접을 통한 우리의 포부를 밝히는 것 이었다. 3가지의 질문만으로 우리의 모든 것과 우리들의 다짐들을 다 보여주기는 어려웠지만 다른 큰 문제없이 1차 면접 심사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1차 심사를 마치고 이제부터 우리의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여행을 위한 도전이 아니라 도전을 위한 도전인 것이다’ 생각 하며 머릿속에 매번 되새겼다. 이번 과제는 8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고 그 안에 우리의 계획을 비롯한 모든 것을 드러내야만 했다. 주말에 모이고 방과 후 수업이 끝난 후에도 모여 회의를 하고 도전을 외쳤다. SNS를 통해 실재 몽골인들과 소통을 하며 몽골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서 배웠으며, 많은 여행사와 투어 가이드를 찾으며 합리적인 가격과, 예산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인터넷 조사와 심지어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TV 프로그램까지 같이 찾아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저절로 가까워졌고 가족이 되었다.면접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불안과 부담은 날로 증대했고, 드디어 면접 날이 왔다. 모든 팀원이 일심동체로 파이팅을 외쳤고 브리핑실에 들어간 우리는 모두 낙담과 한숨을 뱉으며 브리핑실을 나왔다. 끝나고 나서는 왜 이렇게 아쉬움만 남는 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림밖에 없었다. 드디어 발표 날이 다가왔고 기적처럼 성공이 우리에게 안겼다. 우리 팀은 다른 팀과는 달리 국내형 프로젝트를 더해 제주도로 세계유산탐방을 다녀왔다. 아무래도 몽골이란 국가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더욱 철저히 아는 것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아리 이름에 걸맞게 성산일출봉, 만장굴, 한라산백록담의 세계유산과 제주 항몽유적지를 방문했다. 항몽유적지 답사를 통해 고려시대의 삼별초가 토벌되기까지의 거점으로 한국과 몽골의 역사적인 관계를 잘 알 수 있었다. 제주 탐방을 마친 우리는 차근차근 몽골을 재조사하며 준비를 시작했다. 도전일이 다가왔고, 7월 17일부터 7월 26일까지(9박10일) 우리는 몽골의 세계유산 차강 살라 암각화, 포타니 빙하, 호이트 쳉헤르 동굴, 테를지 국립공원 네 곳의 세계유산과  칭기스칸 박물관, 말 동상, 바얀을기 제5번 학교, 국영 백화점, 자연 박물관 등을 탐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2019년 7월 17일 새벽 5시 30분, 설레는 마음으로 무안 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다들 피곤했는지 차에서 잠이 든 우리는 7시 무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호화로운 여행이 아닌 지금까지 성장 배경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과 마주하고픈 마음을 머릿속에 그리며 10시 30분, 몽골 울란바토르에 위치한 칭기스칸(Чингис Khан) 공항 행 비행기를 탑승했다.14시 30분, 몽골에서 가장 큰 칭기스칸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몽골에서 다른 소도시의 공항과는 달리, 이곳은 도시의 명칭 대신 몽골 역사에서 가장 큰 전성기를 누린 왕, 바로 칭기스칸을 기념하기 위해 칭기스칸 국제공항이라 등록되었다고 한다.17시 30분, 몽골의 시내 모습을 구경하며 테를지 국립공원(Terelj үндэсний цэцэрлэгт хүрээлэн)에 도착했다. 테를지 국립공원 입구에는 우리나라의 돌탑과 비슷하지만 훨씬 큰 ‘어워’라고 불리는 무속신앙 품이 있었다. ‘어워’는 길이 험난한 몽골에서 만든 풍습과 같은 것으로 무사히 도착함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고, 앞으로의 여정 또한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신앙적으로 자리 잡혔다. 우리 또한 ‘어워’주변을 세 바퀴 돌며 돌멩이 3개를 ‘어워’에 던졌다. 테를지 국립공원은 1년 내내 개방하는 국립공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과 기암괴석, 숲, 초원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18시, 테를지 국립공원 내부 승마 체험장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우리 또래의 학생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만 보던 멋진 카우보이들 같았다. 몽골은  대부분의 관광객들을 위한 승마교육이 아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몽골의 국가 행사인 나담축제 역시 성인 어른의 말 경주가 아니라 더 가벼워 빨리 달리기 위한 목적으로 아이들의 말 경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광활한 초원에서 승마는 마치 세상에 우리만이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불러왔다. 우린 국적과 성장배경 모두 달랐지만, 눈과 마음으로 소통하며 첫 몽골인과의 교류는 성공적이었으며, 한 시간 동안의 승마가 10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20시, 테를지 국립공원에 위치한 게르 캠프에 도착하였다. 게르는 나무로 만든 뼈대에 가축의 털로 짠 두꺼운 천이나 가죽을 씌운 몽골의 전통 가옥이다. 유목 생활을 해온 몽골의 초원 지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가옥 구조가 단순하여 쉽게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어 이동 생활이 편리한 게르에서 생활해왔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게르에서 생활하고 있다. 우리 역시 몽골의 전통가옥, 게르에서 하루를 보냈다. 게르 내부는 우리의 걱정보다 따뜻하고 쾌적했다.20시 30분, 저녁 식사로는 게르 캠프에서 준비한 특식 허르헉 [Khorkhog (양고기)]를 먹었다. 허르헉은 달궈진 돌로 양고기를 당근과 감자 등 야채와 함께 찌는 요리이다. 원래 몽골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었으나, 현대로 들어서며 몽골 사람들에게도 어느 순간 특식이 되었다고 한다. 7월 18일 기상 후 10시 30분, 우리는 뒷산을 산책했다.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곳에는 에델바이스, 서양채꽃, 패랭이, 노란색의 꽃양귀비 등 수 많은 종류의 야생화가 만발하고 있었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다음 장소 또한 큰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12시 30분, 점심식사로는 닭고기 스테이크(Тахианы махан стейк)를 먹었다. 산책으로 허기진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해치웠다.13시 30분, 몽골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인, 거북이바위를 관람했다. 옛날 몽골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몽골의 왕이 그 바위 밑에 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남아있다고 한다. 14시 30분, 몽골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칭기스칸을 기념하기 위한 동상과 박물관을 관람했다. 이 동상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말 동상으로, 칭기스칸의 가장 좋은 친구인 버르치와 함께 놀던 중 채찍을 주운 장소라고 한다. 몽골에서 채찍을 줍는다는 것은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징조로, 칭기스칸과 버르치 역시, 미래 우리의 일이 잘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칭기스칸 기마 동상은 고향 쪽을 향하고 있으며 마주보는 저 멀리에는 칭기스칸의 어머니 동상이 보인다. 7월 19일 4시 20분, 바얀울기 아이막의 아랄톨고이, 차강골 위쪽 계곡, 차강살라 암각화등 세계유산 답사를 위해 우리는 한 번 더 칭기스칸(Чингиc Xaан)공항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바얀울기 공항으로 이동했다.6시 20분, 바얀울기 공항에 도착했다. 이쪽은 북쪽으로 많이 치우쳐있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거센 바람이 우리를 반겼다.마중 나온 베이스캠프의 스테프 직원 2명과 2대의 러시아산 푸르공 이라는 승합차를 타고 7시 20분, 캠프에 도착하였다.8시, 캠프에서 조식으로 ‘반시태 슐’ 이라는 한국에서 찐만두국과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 걱정과는 달리 음식이 우리 입에 잘 맞았다. 12시 30분, 차를 타고 세계유산 알타이 암각화(차강 살라 암각화)를 답사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 점심식사를 위해 물가 근처에 정차했다. 이후 우리는 의자와 식탁을 조립하고 음식을 기다렸다. 점심은 잘게 썬 밀가루 반죽과 다진 고기가 들어간 볶음면 이었다. 18시 40분, 암각화를 보고난 후, 실제 유목민이 사는 게르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매우 추운지역이라 여름에도 난로를 피워야한다. 하지만 땔감을 많이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말린 야크의 대변을 연료로 사용한다. 또한, 몽골에서는 말의 젖을 많이 먹기 때문에 밖에서는 마유를 말리고, 집안에서는 수태차를 끓인다. 우리에겐 수태차 냄새가 친숙하지 않아 게르안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힘들었다.14시 30분, 암각화 탐방(차강살라 암각화Саган Сала Петроглиф)을 위해서 차만 8시간 타고 달렸다. 끝내 우리는 차강살라 암각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옛날 몽골인들이 목축과 사냥의 기원을 위해 여러 가지 동물들의 그림을 새겨놓았다. 우리나라도 옛 사람들이 농사와 사냥의 풍요를 위해 여러 가지 동물들의 그림을 새겨놓았다는 점에서 정말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알타이 산맥은 몽골과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하는 고지대 오지이다. 요즘 들어 이곳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하나로 학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특히 몽골 알타이의 암각화들이 시대성과 다양성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일단 정보에 의존해 찾아 나서기는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길다운 길이 없고, 안내판 하나가 없었으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막성 지형물들이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초원과 사막을 지나고 산을 넘어 만나는 암각화들은 그야말로 보물찾기였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나는 그것들은 보석처럼 다가왔다. 염소와 양, 사슴, 소, 그리고 사람 등등이 그려져 있는 암각화는 마치 현대인들의 회화를 보는 듯했다. 수천년 전의 목동들에 의해 그려졌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히 느껴졌으며, 주로 산 아래쪽 어두운 색깔의 편평한 돌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 바위들에 틈이 생겨 우리나라 제주도에 있는 주상절리와 같은 기둥모양으로, 기울어진 절리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암각화는 1만 2000년 전쯤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 까마득한 시절의 그들은 바로 암각화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평지에 고대 묘지군이 있는데 ‘키릭수르’라 말하는 수십개의 돌무지와 ‘쿠누 초도’라 말하는 사람 모양의 돌비석이 서 있는 곳이다. ‘쿠누 초도’는 마치 우리 고장 전남 화순 운주사의 석인상과 아주 흡사하다. 운주사의 석인상을 검색하면 ‘쿠누 초도’가 나올 만큼 매우 흡사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암각화들이지만 안내판은 물론이고 홍보와 정보 제공의 수단, 특별 보호장치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이 점은 OWHC-AP세계유산 도시 기구 동아리 활동을 하며 의논할 계획에 있다. 아마 암각화 표면에 코팅 처리한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래서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일까. 어쩌면 수천년의 세월을 이렇게 지내왔듯이, 알타이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이렇게 자연스레 굴러가는 것일지도 모른다.7월 20일 9시 30분, 조식으로는 빙(Bing)이라는 튀긴 밀가루 반죽을 먹었다. 가이드 분들이 큰 천막을 쳐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었는데 바삭바삭하게 잘 튀겨서 식감을 높여 주었다.13시, 포타니 빙하(Портани мөсөн гол)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날씨가 좋아 빙하가 선명하게 보였다. 운전기사분도 이렇게 선명히 잘 보인적은 없다며 우리가 운이 매우 좋다고 하셨다.14시 40분, 포타니 빙하(Портани мөсөн гол)에 도착하였다. 날씨상황이 갑작스럽게 좋지 않아져 사진만 찍고 내려가야만 했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뒤에 만년설이 가까이서 선명하게 볼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쉬웠다. 더 있고 싶었지만 날씨가 안 좋아서 더 있다간 내려가기 힘들 수도 있다는 말에 서둘러 차를 타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7월 21일 아침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걸쭉하고 달달한 수프인 ‘킷츠라이스’를 먹었다. 다른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하며 게르에서 함께 지냈던 정이 든 유목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사진을 같이 찍고, 점심식사도 했다. 한국에서 챙겨간 사탕과 볼펜 등 작은 선물을 나누어 주고, 게르에서 간단히 수테차를 함께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5시간을 달려 암각화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자연환경을 감상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 ’ 하며 매순간 감탄을 자아냈다. 암각화에 도착하여 수천 년이 지나도 뚜렷한 암각화의 형상을 보며 지워지지 않은 암각화가 신기하기도 하였고,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가축의 종류를 통해 현재의 몽골보다 더 춥고 건조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차강살라 암각화보다 더 다양한 형태의 암각화를 볼 수 있었다. 보존보다는 개방의 형태로, 관광객들이 바위위에 또 다른 그림들을 새기는 등 보존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점은 몽골의 세계유산을 지키기 위한 필요점으로 보인다.암각화를 감상한 후, 물가 근처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낼 준비를 했다.저녁에는 가이드님, 기사님들과 함께 캠프파이어를 했다. 해가 지고, 캠프파이어를 하는 중 하늘을 보니 별이 우리에게 쏟아질것만 같았다. 책에서만 보던 북두칠성이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선명히 있었고, 그 옆에는 카시오페이아자리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린 아름다운 은하수와 별에 취해 춤도 추고, 음악도 들으며, 의미 있게 하루를 마무리 했다.   7월 22일 아침에 일어나 우리가 잤던 텐트를 우리가 개고 이동할 준비를 한 후 맛있는 밥을 먹고 울기 게르로 이동을 하였다. 이동을 하던 도중 몽골에 대한 애국심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듯한 게르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있었다. 엄청나게 거대하고 무거워 보이는 독수리가 발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생각도 잠시 독수리를 팔위에 올리고 사진을 찍는다는 소리를 듣고는 겁이 나기도 했다. 독수리를 우리의 팔위에 놓고 사진을 찍으니 팔이 많이 무거웠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한 후 저녁을 먹었다. 밀가루와 고기, 당근, 감자를곁들인 음식으로 비시파르마흐를 먹었다. 맛이 독특했다.저녁을 먹은 후, 몽골 전통악기를 가지고 공연을 해주시는 분이 찾아왔다. 우리를 위해 베이스 캠프 사장님께서 준비해주신 것이었다. 노래도 불러주시고, 러시아, 영어, 몽골어로 된 노래들을 불러주시니 뜻깊었다. 7월 23일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우리의 운전기사 분들이 학교 선생님들이어서 학교를 방문했다. 학교는 초,중,고 모두 같이 다니는 학교인데 매우 작아보였지만, 학생 수는 2000명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다닌다. 학교가 우리나라와 많이 달라서 영화를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학교를 방문한 뒤 점심을 먹고 박물관을 갔다. 박물관에서 몽골의 동물들과 생활양식들을 볼 수 있었다. 4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이었는데 층별로 역사, 동물, 전통문화, 전통의상이 있었다. 몽골에 대해 한층 더 이해할 수 있었다.기사님들이 몽골 친구들을 불러주셨다. 몽골 친구들이 약 8명 정도 왔는데 운동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몽골 또래들과 두 번째 교류였는데 평생 추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피자도 같이 먹으러 갔는데 몽골 피자가 처음이었지만 지금까지 먹은 몽골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음식이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7월 24일 10시, 깔끔한 현대식 숙소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해주고 몽골 전통 악사들이 즐겁게 우리를 맞이해준 울기 유목민 숙소에서 떠난다니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계속 들었다. 또한 울기 일정동안 동행하며 우리 팀의 밥을 책임져 주시는 두 분과도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포옹을 하며 작별인사를 하고 다음 일정인 홉드로 출발하였다.6시, 거친 초원의 몽골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울란바토르행 비행기가 있는 홉드 숙소에 도착하였다. 홉드로 오늘 길에 몽골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산들도 보고 주변에 많은 호수들을 보면서 왔다. 호수인데 바다처럼 크기도 하지만 파도도 쳤다. 또한 검은색으로 된 호수도 있었다. 홉스에 숙소는 다른 게르와 달리 냄새도 나지 않고 주변에 암석으로 된 산들이 있어서 위엄한 자연환경 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8시, 가지고 있던 모든 한국 반찬과 몽골 음식을 푸짐하게 먹었다. 밥이 더 없어서 아쉬울 정도였다. 한국 반찬을 몽골 가이드 분들과 나누어 먹는 행복한 저녁식사였다. 저녁을 먹은 후, 가이드 및 기사님 송별회를 시작했다. 이곳 울기-홉드일정의 마지막 밤이었다. 때문에 이번 울기 일정의 이동을 책임져 주시는 기사님들과도 마지막 밤이었다. 거칠고 험하고 힘든 길을 직접 운전하시면서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기사님들을 위해 우리가 간단히 음료와 간식을 대접하면서 송별회를 준비했다. 이번 밤이 마지막이라서 씁쓸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좋은 만남은 좋은 이별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있는 노래방 기기를 이용하여 서로 노래를 부르며 다 같이 춤추며 즐거운 송별회를 보냈다. 이번 송별회로 언어의 장벽이 있더라도 서로 진실한 마음만 있으면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7월 25일 9시, 상쾌한 공기를 맡으며 일어났다. 게르 문 밖을 나가보면 그곳에서 유목하는 소, 양들 등 다양한 가축들과 그 뒤에 펼쳐진 아름다운 산들이 펼쳐졌다. 숙소에 있는 샤워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조식을 먹고 근처에 있는 고르왕 셍헤르 아고이 동굴로 출발할 준비를 하였다.11시, 호이트 쳉헤르 동굴 및 암각화 관람했다. 고르왕 셍헤르 아고이 동굴은 몇 만 년 전  몽골인들이 안에서 생활한 동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굴 안에는 2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까지 수 만년전의 생활모습과 그 시대의 생물까지 알 수 있는 암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동굴은 러시아의 지질학자가 발견하였고, 동굴안의 송아지가 부근 50km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오른쪽으로 연결되어있는 굴이 50km이상 이어져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안에는 많은 먼지와 새똥으로 가득해서 걸을 때마다 숨을 쉬기 힘들었지만. 동굴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낙타. 나무, 사람의 암각화와 말 발자국 등 다양한 흔적이 있었다. 동굴 등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그곳에 사는 몽골인들의 지혜를 엿 볼 수 있었다.3시, 숙소에서 홉드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가면서 호수를 보았는데 주변에는 게르등 다양한 숙박 시설이 있었다. 그곳에서 사진도 찍고 물수제비도 하며 잠시 쉬었다. 또 한국어를 할 줄 아시는 몽골 분을 만났는데, 지금까지 몽골이란 나라 속에 다양한 한국 문화들이 속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이 정말 자랑스러웠다.4시, 비행기를 타기 전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 홉드 시내에 있는 호텔에 들려 피자를 먹었다. 그곳에서도 미국 관광객들을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몽골에 와서 몽골인 뿐 만 아니라 다양한 외국 관광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 거 같아 뜻깊은 경험이었다.하지만 그 때 울란바트의 기상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비행기가 지연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는 12시간이나 지연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남은 시간 동안 홉드 시내를 관광하기로 하였다.홉드는 울기보다 큰 도시라고 가이드 선생님이 말씀 해 주셨다. 광장, 주택가 등 다양한 홉드 시내를 차로 둘러보다가 비행기가 또 지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일행은 홉드 안에 있는 호텔로 떠났다. 생각보다 호텔은 그리 좋지 않은 시설 이였지만 우리 일행을 배려해 주신 가이드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호텔에서 나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일본의 다이소 등 다른 여러 나라의 가게들도 많이 보고 아파트 단지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도 보았다. 또한 이곳에서 조깅하는 뉴질랜드에서 온 관광객들을 만났는데, 초면인데도 영어로 몽골 여행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7월 26일  1시 10분, 12시간이나 지연이 된 비행기를 타러 갔다. 타기 전에는 계속 지연되어서 결국 못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다행히 새벽이라도 비행기를 탈 수 있어서 안심되었다. 전날 밤이 기사님들과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했지만 비행기 지연으로 이번 밤까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일정이 끝났는데도 끝까지 우리 일행과 같이 이동해 주신 기사님들의 책임감 때문에 한 번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비행기 탈 때 쯤 기사님들과 마지막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인사하고 소정의 선물도 드렸다. 또한 팀 원 중 한명이 태극기를 건네줄 때 기사님이 ‘I love korea’라고 말씀 해 주셨는데 그 때 정말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새벽 4시 울란바트에 도착하여 늦은 새벽이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에서 숙면을 취했다. 몽골의 좌측 끝에 있는 울기-홉드라는 곳에서 보낸 일정이 끝이라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한국으로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마음 때문에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8시, 부족한 숙면 때문에 피곤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서양식 호텔 조식을 먹고 다음 일정을 준비하였다.9시, 국영백화점을 가는 길에 잠시 울란바토르 시내 투어도 하였다.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오래전에 건설된 다리도 보고, 러시아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다양한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러시아식 건물들 때문에 유럽에 온 듯한 느낌도 받았다.10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국영백화점에 갔다. 국영백화점은 1924년 세워진 몽골의 가장 큰 백화점이다. 5층 건물로 식재료, 몽골 기념품, 의류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11시 30분. 캐시미어 공장에 갔다. 몽골은 인구 수 보다 가축의 수가 배로 많아, 캐시미어가 굉장히 알려져 있다. 몽골의 특징을 이용한 캐시미어 사업은 개인 뿐 아니라 국가적인 측면으로도 다양한 이점을 가져올 것 같았다.12시 30분, 모든 몽골 일정을 끝내고 대한민국행 비행기를 타러 칭기스칸 공항에 도착하였다. 9박10일의 일정을 함께 해 주시고 우리 팀원들을 위해서 배려해 주시고 책임감 있게 이번 일정을 잘 마치게 도와주신 가이드 선생님과도 아쉬운 작별인사를 건네고 우리 팀원들은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번 미래도전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몽골의 위대한 자연환경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도전을 하게 한 여정이었다. 단순히 즐겁고 편안한 여정이 아닌 음식이나 씻는 문제 등 불편하고 힘든 경험을 통해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는 도전의 기회를 만든 것 같았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점이나 감사함, 도전 정신 등 얻어가는 점이 정말 많았던 것 같다. 1시 30분, 한국에 도착하였다. 입국 절차를 따르고 청주에서 광주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유성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했다. 처음에는 이곳이 한국인가 하는 의구심도 약간씩 들었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말소리, 간판 등을 보며 한국에 드디어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조한 몽골 날씨와는 다르게 한국은 장마철이여서 덥고 습한 날씨였다. 때문에 몸의 찝찝한 느낌 때문에 피곤함이 배가 되는 것 같았다. 6시 10분, 입국 절차에서 공황 측 실수로 버스를 놓쳐 일정이 지연되었지만 곧 화순으로 간다는 마음에 마냥 힘들지는 않았다.7시 10분, 유성에 도착하고 광주로 가는 버스에 탑승 하였다. 2시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팀원들과 화순에서 도착해서 할 활동을 간단히 얘기하고 지친 몸을 잠시 쉬었다.8시 30분, 드디어 익숙한 곳,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팀원들 가족 분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이번 프로젝트를 잘 완수할 수 있었던 점 중에 하나가 팀원들 가족들의 아낌없는 지원도 한 몫 했다고 생각했다.11시 30분, 드디어 우리가 여정을 출발한 화순에 도착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화순은 느낌이 새로웠다. 새벽 12시 30분, 간단하게 팀원들과 선생님, 팀원 가족 분들과 저녁식사를 하였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한식은 역시 맛있고 그리웠다. 또한 이번 도전을 완수한 소감을 팀원들끼리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 그동안 힘든 도전을 같이 잘 버티고 서로 도와준 든든한 팀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미래도전프로젝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 반성할 수 있었고, 몽골인 외에도 러시아인, 북한인, 캐나다인, 미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기회가 만들어진 것 같아 뜻깊은 경험이었다. 특히, 한국어를 구사하는 몽골분이 계셨는데 몽골이란 나라 안에서 여러 익숙한 한국 문화가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류의 열풍이 큰 것으로 보인다. 암각화를 보면서는 수천 년이 지나도 뚜렷한 암각화의 형상을 보며 지워지지 않은 암각화가 신기하기도 하였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가축의 종류를 통해 현재의 몽골보다 더 춥고 건조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보존보다는 개방의 형태로, 관광객들이 바위위에 또 다른 그림들을 새기는 등 보존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점은 몽골의 세계유산을 지키기 위한 필요한 점으로 보인다.   청소년 미래도전 프로젝트란?학생 자발적으로 팀을 구성하여 원하는 활동을 기획하고 일정기간 실행ㆍ평가ㆍ성찰하는 과정을 거쳐 진로탐색 및 꿈에 대한 도전을 통해 미래역량을 기르는 전남형 학생중심 프로젝트 기사 작성자 전라남도청소년미래도전 GAD대표 화순이양고등학교 2학년 김보아  
    • 기획.연재
    2019-09-30
  • 정약용, 솔잎 먹어치우는 송충이 시를 짓다.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은 강진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내준 토담집 방 한 칸에서 지냈다. 1802년 초봄에 주막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아전의 자식들이 정약용에게 배우러 찾아왔다. 황상, 손병조 등 네 사람이었다. 다산은 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그도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1803년에 정약용은 주막의 토담집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었다. 「사의재기(四宜齋記)」를 읽어보자.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 때 거처하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단정히 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말이 많다면 빨리 그쳐야 한다 .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으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의 이름을 ‘사의재’라고 하였다. 마땅하 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과 학업이 쇠퇴하여 가는 것이 슬퍼 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때는 가경(嘉慶) 8년 (1803, 순조 3) 겨울 12월 신축일 초열흘임. 동짓날이니, 갑자년(1804, 순조 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周易)》건괘(乾卦)를 읽었다.” 사진 1  동문 주막집  사진 2  사의재 편액 정약용은 1803년(순조3) 가을에  ‘애절양 (哀絶陽)’ 시를 지었다. 이어서 정약용은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치우다 [蟲食松]’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소나무를 선량한 백성으로, 송충이를 탐관오리로 상정하고 읊은 우화시(寓話詩)이다.  그러면 시를 읽어보자.   그대 보지 않았던가아니 보았던가, 천관산 가득 메운 소나무를                                         君不見天冠山中滿山松천 그루 만 그루가 뭇 봉우리마다 다 뒤덮었네   千樹萬樹被衆峯울창하고 굳굳한 노송뿐만 아니라  豈惟老大鬱蒼勁어여쁜  어린 솔도 총총히 돋았는데  每憐穉小羅丰茸 천관산은 전남 장흥군에 있는 산이다. 장흥과 강진은 인접해 있다.   하룻밤 새 해충이 온 천지를 가득 메워      一夜沴蟲塞天地뭇 주둥이가 솔잎을 떡 먹듯 하였다네.      衆喙食松如餈饔 갓난 때도 살 빛 검어 볼썽사납더니         初生醜惡肌肉黑노란 털에 붉은 반점 자랄수록 흉측하네.     漸出金毛赤斑滋頑兇 처음에는 잎을 갉아먹어 진액을 말리더니     始????葉針竭津液살갗까지 파고들어 옹이가 되게 하지         轉齧膚革成瘡癰                                          가지하나 까닥 못하고 소나무 점점 말라붙어   松日枯槁不敢一枝動곧추서서 죽는 모습 어찌 그리 공손한가.      直立而死何其恭 연주창에 문둥병 걸린 가지 줄기 처량하니     瘰柯癩幹凄相向상쾌한 바람 울창한 숲을 어디 가서 찾으리오.  爽籟茂樾嗟何從 하늘이 솔을 낼 때 깊은 생각 있었기에         天之生松深心在사시사철 보살피고 한겨울에도 푸르지.         四時護育無大冬뭇 나무들 다 제치고 가장 높은 사랑받았는데   寵光隆渥出衆木복사꽃 · 오얏꽃과 화려함을 다툴손가.          況與桃李爭華穠 태실과 명당이 만약에 무너지면              太室明堂若傾圮들보되고 기둥되어  조정에 들어왔고         與作脩梁矗棟來朝宗 왜놈이나 유구가 만약에 덤벼올 때엔           漆齒流求若隳突큰 배를 만들어 적의 예봉 꺾었지            與作艨艟巨艦摧前鋒 소나무는 대들보로 쓰였고, 판옥선을 만드는 자재였다. 판옥선은 삼나무로 만든 왜선보다 튼튼했다.   한편 유구는 오키나와이다. 1879년에 일본은 유구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네 욕심만 채우느라 지금 이리 죽여 놨으니   汝今私慾恣殄瘁말하려니 내 기가 받쳐 오르네.               我欲言之氣上衝 어찌해야  번개 같은  벼락도끼를 얻어다가   安得雷公霹靂斧네 족속들 모조리 잡아 이글대는 용광로에다 처넣어버릴까                                            盡將汝族秉畀炎火洪鑪鎔 벼락 도끼로 찍어서 이글대는 용광로에 처넣고 싶은 것이 어찌 송충이 뿐일까? 선량한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탐관오리는 모 두  송충이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 사회를 좀 먹는 송충이들은 없나?     1803년에 정약용은  황칠(黃漆)시도 지었다. 이 시에서 정약용은 공납(貢納)의 폐해를 지적했다. 공납은 백성이 그 지방의 토산물 을 조정에 바치는 것인데 황칠도 공납 대상이었다. 시(詩)를 읽어보자.  그대 아니 보았던가. 궁복산(弓福山)에 가득한 황칠을  금빛 액 맑고 고와 반짝반짝 빛이 나지        껍질 벗기고 즙 받기를 옻칠 받듯 하는데    아름드리 나무애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     궁복산이 어디인가? 강진 근처 어디 일 것이리라. 황칠나무는 해발 700m 이하의 전라도 · 제주도 해안지대에서 야생한다.   상자에 칠을 하면 붉고 푸른 색을 뺏어       잘 익은 치자물감 어찌 이와 견줄손가.       서예가의 경황지로는  더더욱 좋아서납지(蠟紙) 양각(羊角) 모두 그 앞에선 쪽도 못쓰네.    경황은 경황지(硬黃紙)를 말하는데 당지로 노란 물감을 들인 종이이다. 서예지로는 최고이다. 납지는 밀이나 백랍을 먹인 종이이 고, 양각은 양각등(羊角燈)으로 염소 뿔을 고와 얇고 투명한 껍질을 만들어서 씌운 등이다. 그런데 다산은 황칠은  납지, 양각보 다 단연 뛰어남을 강조한다.   황칠(黃漆)은 금빛을 띠면서도 투명해 나무 바탕의 나뭇결을 생생하게 나타내어 목칠공예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고려도경〉에는 황칠이 조공품이라고 적혀 있고, 〈계림유사〉에도 고려의 황칠이 섬에서 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나무 명성이 온 천하에 알려져서         박물지에 왕왕   그 이름을 올라있네           공물로 지정되어 해마다 공장에게 실려 가는데 징구하는 아전들 농간을  막을 길이  없어     지방민들 그 나무를 악목이라 이름하고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방납의 폐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지방 주민들이 황칠나무를 베었을까? 나무가 없어지면 공물로 바칠 이유도 없지 않는가.  지난 봄에 임금님이 공납 면제하였더니    영릉복유 되었다니 이 얼마나 상서인가     영릉복유(零陵復乳)는 당나라의 문장가 유종원(773∽819)의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영릉(零陵)에 서 생산되는 석종유(石鍾乳)를 공물로 바치는데, 그것을 채취하기가 너무 힘이 들고 게다가 정당한 보상도 없어 지방민들이 석종 유가 다 없어졌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최민이 자사(刺史)로 와서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은 감복하여 석종유가 다시 생겨났다고 보 고하였단다. 바람 불어 비가 오니 죽은 등걸 싹이 돋고    가지가지 죽죽 뻗어 푸르름이  어울리네.     공납의 폐해를 없애니 황칠 나무가 잘 자란다. 민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정부가 규제하거나 간섭하면  민생은 위축된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기획.연재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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