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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 그림 그 자체가 신앙고백
    # 카톨릭 옹호자 루벤스루벤스 그림 감상을 마무리하면서 성상(聖像)과 성화(聖畵)에 대하여  공부한다.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과 밀접하여 관련되어 있다. 종교개혁 2세대 칼뱅(1509~1564)은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성상과 성화에 대해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보였다.성화와 성상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 무엇과도 비슷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서 구절에 따라 하느님의 영광을 그릇되게 표현하고 변질시킨다는 것이다. 칼뱅은 성찬식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빵과 포도주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한편 플랑드르 지방 안트베르펜은 일찍부터 루터파의 거점이었으나 1550년부터 칼뱅파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560년경에 칼뱅주의는 겐트·발랑시엔 등 프랑드르 지방 전체로 확산되었고, 1566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1566년 8월 인구 10만 명의 상업도시 안트베르펜 밖 벌판에 2만5000명의 군중들이 칼뱅파의 노천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일부 극렬주의자들이 ‘성상(聖像) 파괴 난동’을 일으켰다. 이 난동은 8월 10일 서부 프랑드르 지방에서 시작하여 2주일도 안 되어 17개 지방에 퍼졌다. 8월 20일과 21일 사이엔 안트베르펜의 30개 교회가 약탈당하고, 8월 22일에는 헨트가 약탈당했다. 성상이 파괴되고 성화가 불태워졌고, 성상 파괴운동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자 프랑드르 지방을 통치하고 있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1527~1598)는 1567년에 강력 진압을 통하여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이후 종교전쟁이 일어났고 1588년에 프랑드르 북부 지역 7개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안트베르펜을 위시한 남부 플랑드르 지역은 펠리페 2세에 의해 다시 가톨릭 지역이 되었고, 반종교개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안트베르펜의 지역 유지들은 교회에 성상 및 성화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이는 1563년에 채택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종교미술에 대한 결의문에 고무된 것이었다. 결의문은 이렇다.“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의 성상들은 교회에서 반드시 형상화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합당한 존경심이 주어져야 한다.”한편 루벤스는 로마에 가서 미술수업을 하고 1609년에 안트베르펜에 돌아왔다. 그는 프랑드르 섭정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종교화 제작에 분주했다. 루벤스는 1610년에 산타 발부르가 교회의 세 폭 제단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을 그렸다. 1612년에는 병기제조업자 조합이 의뢰한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세 폭 제단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다. 1619년에 루벤스는 예수회 성당의 제단 장식을 위해 세 폭 제단화와 39점의 천장화를 주문받았다. 예수회는 스페인의 기사이자 수사인 로욜라 성 이냐시오가 1534년에 파리에서 창설한 수도회로 1540년 교황 바울로 3세의 승인을 얻은 후 교황에 대한 절대충성을 맹세하는 전위대가 되었고, 폴란드·아시아·신대륙 등지에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루벤스가 예수회로부터 주문 받은 그림 중 유명한 그림이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는 예수회 신부로서 1542년에 인도 고아에 도착하여 포교 활동을 했으며 1549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에서 전도했다. 1551년에 전도를 위해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1552년에 11월에 광동성 근처에서 열병으로 선종했다. 그는 1622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모든 선교사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성 바울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교에 입교시켰다고 알려져 있다.루벤스는 1620년까지 무려 63점이나 되는 종교화를 그렸다. 그의 공방에는 수백 명의 견습생이 지원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는데, 안톤 반다이크도 루벤스 공방에서 일했다. 아울러 루벤스의 종교화는 판화로 만들어져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한마디로 루벤스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었다. 바로크(Baroque)는 ‘일그러진 진주’ 또는 ‘불규칙하게 생긴 진주’라는 뜻이다. 바로크 미술은 로마 가톨릭 옹호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했다. 신자들의 시선을 압도할 만한 극적이고 화려하면서 교훈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가톨릭 교리를 강건히 하였고, 미술 그 자체가 신앙고백이었다.# 램브란트 방이제 예르미타시 박물관 투어 마지막 코스인 렘브란트 방(254호)에 들어섰다. 네델란드 미술의 거장 렘브란트(1606~1669)는 초년엔 부와 명성을 얻고 화려하게 살다가 아내가 죽은 후에 파산까지 당하고 쓸쓸하게 죽은 화가이다.  먼저 본 그림은 ‘플로라 옷차림을 한 사스키아’이다. 1634년 작품인데 28세의 렘브란트는 이 해에 20세의 사스키아와 결혼했다. 그림 감상에 앞서 렘브란트의 초기 생애부터 살펴보자.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은 1606년에 암스테르담에서 40km 떨어진 문화도시 레이덴에서 9형제 중 8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라인 강 근처에 풍차 돌리는 방앗간을 가진 제분업자였는데 ‘반 레인’이란 가문이름도 ‘라인 강가의’라는 뜻이다. 네델란드의 상징 3가지는 풍차와 나막신, 그리고 튤립이다. 풍차와 나막신은 낭만이 아닌 ‘네델란드(Netherlands 저지대란 뜻)’의 생존을 위해 물을 다스리기 위한 산물이었다. 렘브란트는 부유해진 부모 덕분에 기술 교육을 받은 형제들과는 달리 7살에 라틴어 학교에 들어갔고 1620년에는 레이덴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런데 그는 학과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화가 야코프의 도제로 들어간다. 그는 야코프에게 3년간 배우다가, 1624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라스트만 아틀리에에서 6개월간 조수로 일한다. 1625년부터 레이덴에서 독립화가가 된 렘브란트는 1628년에 ‘자화상’을 그렸다.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고, 오른쪽 볼과 귀 부분만이 밝다. 역시 ‘빛과 그림자의 화가’다운 터치이다. 이 해에 행운이 찾아왔다. 네델란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 콘스탄테인 하위헌스(1596~1684)가 그의 작업장을 찾아 온 것이다. 오란녀의 왕자 프레데릭 헨리의 비서이자 외교관이며 시인인 하위헌스는 렘브란트의 필치에 감명 받아 형제들의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고 미술계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1631년에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화상(畵商) 헨드릭 반 윌렌부르흐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1632년에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하였다. 이 시기에 네델란드는 1618년부터 스페인에 맞서 종교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칼뱅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은행과 주식시장 등 자본주의가 꽃피었다.이는 2006년 11월13일부터 11월 24일까지 중국 CCTV-2를 통해 방송된 12부작 역사 다큐멘터리 ‘세계를 호령하는 강대국의 패러다임, 대국굴기’의 제2부 ‘유럽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 세계를 움직이다’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는 EBS에서 2007년 1월과 6월에 2회 방송했다.)대국굴기 제2부 네델란드 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7세기는 황금시대였다. 네덜란드는 일약 세계의 경제 중심이자 해운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처음에 네덜란드인들은 농업과 청어가공으로 큰 부(富)를 거두게 되었다. 그 뒤 영국과의 무역 경쟁 와중에서 네덜란드는 상선을 가장 저렴하게 건조하고, 운송료를 낮추는 해상운송의 혁신을 이루어 ‘바다의 마부’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1602년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1619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점령하였다. 1621년에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1626년에 미국에 뉴 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나중에 영국이 이곳을 점령하자 이름을 뉴욕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1609년에는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와 암스테르담 은행을 창립하고, 신용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새로운 경제와 상업체계는 네덜란드의 부의 열쇠였고, 지금도 경제의 핵심 축을 이루는 존재이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의 절반을 점유하였다.” 한편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는 인맥이 넓은 화상 읠렌부르크의 중개로 부유한 상인과 직업전문가의 초상화 주문에 바쁜 시간을 보냈다.1631년에 그린 ‘니콜라스 루츠의 초상화’는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는 암스테르담 부자 상인 루츠를 그린 것이다. 1632년에는 외과의사 길드 회원들의 주문으로 단체 초상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그렸는데, 이 그림으로 렘브란트는 하루아침에 명성을 날렸다.
    • 기획.연재
    2021-01-18
  • 2021년부터는 고교무상교육이 전면 실시된다. 또한 저소득 구직자 등 취업 취약계층 40만명에게 최대 300만원의 구직촉진수당이 지급된다.새해부터 달라지는 제도와 정책을 요약한다.   ■고등학교 전 학년 무상교육 2021년부터는 고등학교 전 학년 무상교육이 완성돼 1인당 약 160만원의 부담을 덜게 된다. 저소득층 학생의 부교재비와 학용품비를 지원하는 교육급여도 모두 인상돼 초·중·고 공교육비 부담이 줄어들게 된다.기획재정부가 발간한 '2021 이렇게 달라집니다' 책자에 따르면 고등학생들은 올해부터 전학년 수업료와 입학금, 학교운영지원비, 교과서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 고등학생 1인당 연간 160만원의 학비 부담이 경감된다.지난 2019년 2학기 고3부터 도입해 2020년 고2, 고3 대상으로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시행했고 올해 고1까지 전면 확대된다.대상학교는 초·중등교육법상 고등학교와 마이스터고, 각종학교 등이다. 그러나 입학금과 수업료를 학교장이 정하는 자율형사립고나 외국어고 등 일부 특목고는 제외된다.정부는 이 같은 고교무상교육 예산으로 9431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2021년 3월부터는 저소득층(중위소득 50% 이하) 가구 학생을 대상으로 부교재비와 학용품비를 지원하는 교육급여의 고등학생 지원금액이 전년 대비 평균 24% 인상된다. 초등학생은 올해 20만6000원에서 28만6000원으로, 중학생은 29만5000원에서 37만6000원으로, 고등학생은 42만2200원에서 44만8000원으로 각각 오른다.2020년까지는 부교재비와 학용품비로 나눠 지원했지만 2021년부터는 학생 교육 수요에 따라 교육활동 지원비로 통합해 지원해야 한다. 교육급여가 필요한 가구는 학부모가 읍면동 주민센터를 방문하거나 '복지로' 홈페이지(www.bokjiro.go.kr)에서 신청하면 된다. 자세한 사항은 보건복지 콜센터 129를 통해 문의하면 된다. ■종합부동산세율 0.1~2.8%p 인상 새해부터는 주택분 종합부동산세율이 0.1~2.8%포인트(p) 오른다. 장기보유특별공제 적용 요건 등 다주택자 양도소득세제도 바뀐다.정부에 따르면 1주택자의 종부세율은 0.1~0.3%p 인상된다. 과세 표준액 3억원 이하 주택은 0.5%에서 0.6%로, 3억~6억원 주택은 0.7%에서 0.8%로 각각 0.1%p씩 인상된다. 6억~12억원(1.0→1.2%), 12억~50억원(1.4%→1.6%), 50억~94억원(2.0→2.2%)은 각각 0.2%p씩, 94억원 초과(2.7→3.0%)는 0.3%p 인상된다.법인 보유 주택은 과세 표준액과 관계없이 개인 최고 세율인 3.0%가 단일로 적용된다.3주택 이상자나 조정대상지역 2주택자는 인상 폭이 더 크다. 3억원 이하(0.6→1.2%)는 0.6%p, 3억~6억원(0.9→1.6%)은 0.7%p, 6억~12억원(1.3→2.2%)은 0.9%p, 12억~50억원(1.8→3.6%)은 1.8%p, 50억~94억원(2.5→5.0%)은 2.5%p, 94억원 초과(3.2→6.0%)는 2.8%p 인상된다.법인은 6.0% 단일 세율 적용이다.조정대상지역 2주택자의 세 부담 상한(전년 대비 당해 연도의 종부세·재산세 합산 세액 증가 한도)은 200%에서 300%로 인상되고, 법인의 세 부담 상한은 폐지된다.법인 종부세 과세 표준을 산정할 때 적용하던 6억원 기본 공제는 폐지된다.고령 1주택자의 세액 공제율은 구간별로 10%씩 인상된다. 60~65세 세액 공제율은 10%에서 20%가, 65~70세는 20%에서 30%가, 70세 이상은 30%에서 40%가 된다. 고령 1주택 세액 공제율과 장기 보유 공제율(20~50%)을 합해 적용하는 합산 공제율 한도는 70%에서 80%로 10%p 인상된다.1주택자의 실거래가 9억원 초과 주택에 적용되는 장기보유특별공제 요건에는 거주 기간이 추가된다. 3~4년 보유 시 24%였던 장기보유특별공제율은 '보유 12%+거주 12%' 체계로 바뀐다.2년 미만 보유 주택(조합원 입주권·분양권 포함) 및 조정대상지역 다주택자 양도세율은 1년 미만 보유 시 40%에서 70%로 30%p, 1~2년 보유 시 기본 세율에서 60%로 인상된다. 분양권은 2년 이상 보유해도 60%의 중과세율이 적용된다. 이는 내년 6월1일 이후에 양도하는 주택부터 적용된다. ■저소득 구직자에 최대 300만원 지급 저소득 구직자 등 취업 취약계층 40만명에게 최대 300만원의 구직촉진수당이 지급된다. 최저임금은 시급 기준 8720원으로 인상된다.우선 1월부터 '한국형 실업부조'인 국민취업지원제도가 본격 시행된다.국민취업지원제도는 15~69세 저소득 구직자, 청년 등 고용안전망 사각지대의 취업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구직활동 의무를 이행할 경우 1인당 월 50만원씩 최대 6개월간 구직촉진수당을 지급하는 것이다.취업지원 서비스와 구직촉진수당을 같이 제공하는 Ⅰ유형과 기존의 취업지원 프로그램 '취업성공패키지'가 통합·운영돼 취업지원 서비스를 중심으로 제공하는 Ⅱ유형으로 운영된다. 지원 규모는 각각 40만명, 19만명이다.이 중 Ⅰ유형의 지원대상 요건을 보면 소득은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 이하여야 한다. 이는 내년 기준으로 1인 가구는 약 91만원, 4인 가구는 약 244만원 이하에 해당하는 것이다.재산 요건은 3억원 이하다. 토지나 건축물, 주택을 기본으로 분양권, 자동차 등도 포함해 고액 자산가 등은 구직촉진수당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취업경험 요건은 2년 이내 100일 또는 800시간 이상으로 정했다. 다만 요건 충족은 못했어도 구직 의사가 있는 이들도 지원받을 수 있도록 40만명 중 15만명은 별도로 선발해 지원한다. 올해부터는 30~299인 사업장의 근로자도 '빨간날'로 불리는 관공서의 공휴일을 유급휴일로 보장해야 한다. 이는 2018년 3월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른 것이다. 개정법은 올해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관공서 공휴일의 민간부문 적용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5~ 29인 사업장은 2022년부터 적용된다. 최저임금은 시급 기준 8720원으로 인상된다. 인상률은 지난해 대비 1.5%로 월급으로 환산하면 182만2480원이다. 소정 근로시간 주 40시간에 주휴시간을 포함한 월 근로시간 209시간을 적용한 결과다.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영세 사업주의 경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가 근로자의 임금 일부를 지원해온 '일자리안정자금'의 지원 수준은 최저임금 인상률이 1.5%에 그친 점을 고려해 소폭 하향 조정된다. ■우수 대중문화예술인 입영 연기 가능 방탄소년단(BTS) 등 우수 대중문화예술인들은 30세까지 입영을 연기할 수 있다. 온몸에 문신이 있거나 중학교까지만 졸업한 남성은 내년부터는 보충역이 아닌 현역으로 입영한다.기획재정부가 새해부터 달라지는 제도와 법규사항 등을 정리한 '2021년부터 이렇게 달라집니다' 책자에 따르면 6월부터는 입영연기 대상의 범위에 우수 대중문화예술인이 추가된다.그간 대학생·대학원생, 체육 분야 우수자는 징집이나 소집을 연기할 수 있었던 반면 대중문화예술 분야 우수자는 연기 대상에서 제외돼있었다.이에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며 국가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우수한 대중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보장하고자 병역법이 개정됐다.2월부터는 학력 사유 병역처분기준이 폐지된다.그간 고등학교 중퇴 이하 학력자는 현역(1~3급) 판정을 받아도 보충역 처분을 받았고 본인이 원할 경우에만 현역병 입영 대상으로 처분됐다.앞으로는 학력에 관계없이 현역(1~3급) 판정을 받은 사람은 모두 현역병입영 대상이 된다. 이를 통해 형평성 논란과 학력 차별 논란을 해소하겠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2월부터 현역병 입영자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신체등급 판정기준이 바뀐다.문신을 한 사람의 경우 사회적으로 부정적 인식이 감소함에 따라 4급 기준이 폐지되고 모두 현역(1~3급)으로 판정된다.또 현역병 입영적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강화했던 체질량지수(BMI), 굴절이상(근시, 원시) 등 현역 판정기준이 2014년 이전 수준으로 환원된다. 이를 통해 현역병 입영 대상이 늘어난다. ■소득하위 70% 기초연금 30만원 기초연금 최대금액인 30만원 지급 대상자가 소득하위 70%까지 확대된다. 기존에는 소득하위 40% 이하에게만 월 최대 30만원을 지급했었다. 장애인연금은 2021년부터 전체 수급자에게 월 최대 30만원을 지급한다. 장애인연금은 2018년 9월부터 월 최대 25만원을 지급했고 2019년 4월부터는 생계·의료급여 수급자 대상으로 월 최대 30만원 인상을 했다. 생계급여 수급권자 가구에 노인·한부모가 있는 경우 부양의무자 기준은 적용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향후 약 15만 가구에 대해 생계급여를 신규 지원한다. 통계원 변경과 산출방식 개편을 적용해 기준중위소득이 4인 기준 약 3% 인상될 예정이다. 복지제도 적용 대상의 소득기준이 상승함에 따라 더 많은 수급자에게 혜택이 돌아갈 예정이다. 저소득층 청년들의 저축을 유도하고 자산형성을 지원해 자립기회를 제공하는 청년저축계좌는 지원규모를 1만3400명으로 확대하고 종전 2회였던 가입기회를 4회로 늘린다. 기존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은 차세대 사회보장정보시스템으로 개편하고 내년 9월부터 기존 복지수급자를 대상으로 맞춤형 사회보장급여 안내를 우선 시행할 예정이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에 따라 2021년 상반기에는 흉부(유방), 하반기에는 심장 초음파 검사에 건강보험이 확대 적용된다. 그간 초음파 검사는 높은 비용 효과성에도 불구하고 재정부담 등으로 4대 중증질환자(암, 심장,뇌혈관, 희귀난치) 등을 중심으로 보험이 적용됐으나, 앞으로는 의사의 의학적 판단 하에 해당 부위에 질환이 있거나 질환이 의심돼 검사가 필요한 경우 건강보험을 확대할 예정이다.원추각막, 무뇌수두증 등 68개 희귀질환과 중증 아토피성 피부염이 산정특례 대상 질환으로 신규 지정됨에 따라 해당 질환 진료비 본인부담률이 입원치료 기준, 기존 20%에서 10%로 인하된다. 또 현재 일반건강검진 결과 고혈압, 당뇨병 질환 의심자에 대해, 진찰료, 검사비용 본인부담금액이 면제되던 것에서 결핵 유소견자에게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경찰 '수사종결권'…자치경찰 도입 새해부터는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폐지되고 경찰에게도 수사 종결권이 부여되게 된다. 또 자치경찰제도 전면 도입될 예정이다.개정된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에 따르면 검사는 경찰에 수사지휘를 할 수 없게 되고 경찰은 자체적인 수사종결권을 갖게 된다.만일 검사가 부당하게 영장을 불청구할 경우 경찰은 '영장심의위원회'를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경찰은 1차적이고 일반적인 수사주체로, 검찰은 2차적이고 제한적인 수사주체로 역할이 각각 변경될 예정이다.또 같은날부터 자치경찰제가 도입된다. 경찰은 자치경찰과 국가경찰, 수사경찰 체계로 분리돼 각각 다른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자치경찰은 학교폭력과 여성, 아동 관련 범죄, 교통법규 위반 단속 등 민생치안 업무를 주로 담당하게 된다. 우선 1월1일부터 준비가 된 시도부터 순차적으로 운영된 후 다음해 7월 1일부터는 전국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 기획.연재
    2020-12-30
  • 막달라 마리아가 두손으로 예수의 발을 잡다’
    루벤스 방에서 젊은 여자가 두 손이 묶인 늙은이에게 자신의 젖을 먹이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이 그림은 로마의 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기억할 만한 공적과 격언들’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제목이 ‘로마인의 자비(Roman Charity)’이고 부제는 ‘시몬(Cimon)과 페로(Pero)’이다. 노인 시몬은 젊은 여자 페로의 아버지다. 시몬은 역모죄로 아사형(餓死刑)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아버지를 면회한 페로는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자신의 젖을 물린다. 그러자 간수들은 딸의 효성에 감동하였고, 딸의 효심을 전해 들은 로마 법정은 시몬을 석방한다. 이렇게 루벤스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젖을 물리며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려는 젊은 여인의 헌신적 사랑을 표현했다. 한편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도 루벤스의 ‘로마인의 자비’ 그림이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예르미타시 박물관 그림보다 훨씬 선정적이다. 늙은이가 두 젖이 다 나온 젊은 여인의 젖 하나를 애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외설이라는 비난도 일었는데, 예술과 외설의 기준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게 한다.  이윽고 한쪽 벽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루벤스의 걸작인 이 그림은 비극적이지만 엄숙하다. 예수는 머리를 뒤로 하고 새하얀 천에 휘감겨 있는데 손과 발에 박힌 못 자국이 선연하다. 예수의 시신 주변에는 6명이 있다. 남자가 4명, 여자가 2명인데 한 남자는 예수를 손으로 잡고 있는데 얼굴이 안 보인다.나머지 5명은 요셉과 니고데모, 사도 요한,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림 가운데에 두건을 두르고 있는 이는 요셉이다. 의회 의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 총독에게 청하여 예수의 시신을 인수받았다. 왼편의 수염을 기른 남자는 니고데모인데 천으로 예수를 감싸고 있다.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니 니고데모는 눈물을 참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 편에 진홍색 옷을 입은 이는 사도 요한인데, 두 발을 사다리 위 올려놓고 두 손으로 예수의 등을 받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열두 제자 중 그 곁을 지켰던 사람은 요한뿐이었다.한편, 왼편에 자주색 옷을 입고 예수의 옆구리를 만지고 있는 여인은 성모 마리아이고, 한 발을 꿇고 예수의 두 손을 잡고 있는 분홍 드레스의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런데 신약성서를 보면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렸을 때 같이 있던 사람은 6명만이 아니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자.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있었다.”(요한복음 19장 25-26)여자만 4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도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요셉은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그리고 언젠가 밤에 예수를 찾아 왔던 니고데모도 침향을 섞은 몰약을 백 근 쯤 가지고 왔다. 이 두 사람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요한복음 19장 38-41)그런데 벨기에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그림에는 예수 곁에 8명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세 폭의 제단화 중의 하나인데, 루벤스는 1612년에 중앙 패널에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고, 나머지 좌우 패널 ‘마리아의 방문’과 ‘성전에 아기 예수의 봉헌’은 1614년에 완성하였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초점은 어둠 속에서 예수의 시신을 휘감고 있는 하얀 수의이다. 예수 곁에는 남자가 5명 여자가 3명이 있다. 붉은 모자를 쓴 요셉은 흰 천을 잡고 있고, 니고데모는 두 발을 사다리에 올리고 있다. 진홍색 옷을 입은 사도 요한은 한 다리를 사다리에 걸치고 있다. 사다리 꼭대기에는 한 남자가 흰색 천을 이빨로 물고 있고, 웃통을 벗은 남자는 흰 천을 잡고서 예수를 내리고 있다.한편 청색옷의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만지려고 손을 뻗었고, 살색 블라우스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는 두 손으로 예수의 발을 잡고 있다. 그 옆에도 한 여자가 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가 의연하다. 실신한 마리아를 그린 다른 화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반면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베이덴(1399~1464)이 1435년경에 그린 ‘십자가 강하’에는 성모 마리아가 실신하여 성 요한과 한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다. 바로 옆방인 렘브란트(1606~1669) 방에서 본 그림도 성모 마리아가 실신 상태로 두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다. (렘브란트가 1634년에 그린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의 컬렉션이었다가 알렉산드르 1세가 1814년에 구입했다.)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이처럼 다를까? 어떤 종교사학자는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루벤스의 그림은 가톨릭의 반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다.그러면 종교개혁부터 알아보자.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이며 신학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城)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를 항의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붙였다.수도사 테첼은 면죄부를 팔면서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해준다고 약속했다. 면죄부 판매 대금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자금이었는데, 이는 로마 교황청의 타락의 전형이었다.루터는 ‘95개조의 논제’ 중 제36조에서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은 면죄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죄를 사면 받을 권한을 가진다”라고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에 정면 도전했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것이다. 루터의 반박문 95개조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퍼졌다.위기를 느낀 로마 교황청은 1520년 11월에 루터를 파문했다. 그러자 루터는 12월 10일 비텐베르크 광장에서 교황의 파문장과 교회 법전 등을 불태웠다. 1521년 4월에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 소환되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감금 직전이었던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 공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그는 1522년에 독일어판 신약성서를 출간하여 대중에게 보급시켰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었다. 이후 루터파 교회는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그런데 종교개혁의 주동자는 2세대인 장 칼뱅(1509~1564)이었다. 1536년에 칼뱅은 제네바에서 ‘기독교 강요(綱要)’를 출간해 ‘예정설’을 주장하고 노동과 금욕을 중시하였고, 신에 의해 이미 결정된 소명 즉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칼뱅주의가 시민들에게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자극시키자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스위스·프랑드르 지방·영국·스코틀랜드 등지로 확산되었다.한편 가톨릭은 신교의 종교개혁에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1563년)를 통한 교리의 정립, 무능하거나 타락한 성직자에 대한 처벌과 규제, 예수회의 활발한 선교와 교육 사업, 그리고 기존의 교리와 성찬식 고수, 성상(聖像)과 성화(聖畵)의 유지 등을 통하여 신교의 도전에 정면 대응했다. 이른바 ‘반종교개혁’이었다.
    • 기획.연재
    2020-12-30
  • 루벤스, 헬레나와 결혼 10년 생명력 불살랐다
    루벤스방에서 ‘바쿠스(Bacchus)’를 감상한다. 이 그림은 ‘땅과 물의 만남’과 같은 벽에 있다. 바쿠스는 로마 신화의 포도주와 황홀경의 신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이다. 그림은 한마디로 ‘부어라 마셔라’이다. 술잔을 든 바쿠스는 여인이 따르는 술을 받고 있고, 그 밑에서 한 아이가 떨어지는 술을 받아 마시고 있다. 바쿠스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병나발을 불고, 아이는 오줌을 싸고 있다.이 그림은 루벤스(1577~1640)가 1637년에 그린 것인데 이 시기는 루벤스에게 제2 황금기였다. 루벤스는 1626년에 첫 번째 부인 이사벨라 브란트와 사별하고 1630년에 37세나 어린 헬레나 푸르망과 재혼했다. 1608년 12월 초에 루벤스는 8년간의 이탈리아 생활을 마치고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다. 종교 전쟁을 치렀던 안트베르펜은 1609년 5월 9일의 12년 휴전 협정으로 평온을 되찾았고, 전쟁으로 파괴된 성상과 성화 복원이 시급했다. 이런 일감은 예술가들에겐 호재였다.1609년 10월 초에 32세의 루벤스는 21세의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 계급 출신으로, 그녀의 아버지 얀은 법률가로 안트베르펜시의 서기관이었고, 인문주의자였다.결혼식은 산 미켈레 수도원 교회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교회는 루벤스의 어머니 마리아가 묻힌 곳이었다. 루벤스 어머니는 1608년 10월19일에 안트베르펜에서 작고했는데 루벤스는 임종을 보지 못한 불효자였다. 루벤스는 이사벨라와 결혼한 직후에 ‘이사벨라 브란트와 함께 있는 자화상’을 그렸다.루벤스와 이사벨라의 모습이 대부분인 이 그림에는 애정이 가득하다. 루벤스 부부는 우아한 모자를 쓰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정원에 앉아 있다. 이사벨라는 몸을 남편 가까이 둔다. 그녀의 손은 루벤스의 팔목을 잡고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루벤스는 한 손을 칼의 손잡이에 얹은 채 관중을 향해 시선을 던진다.그런데 루벤스 부부에 불행이 닥쳤다. 이사벨라와의 결혼에서 태어난 세 명의 자식중 장녀인 클라라 세레나가 1623년 8월에 갑자기 죽은 것이다. 이어서 1626년 6월에는 아내 이사벨라가 죽었다. 당시 남부 플랑드르를 할퀴고 간 흑사병 때문이었다.루벤스는 실의에 빠졌다. 그는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외교 활동에 전념했다. 1629년에 루벤스는 외교관으로 스페인과 영국 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영국에 갔다. 영국에서 루벤스는 찰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화이트홀 궁전 연회장 장식화 제작 주문도 받았다. 아울러 루벤스의 외교적 활동이 결실을 맺어 1630년에 스페인과 영국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1630년 12월에 53세의 루벤스는 16세의 헬레나 푸르망과 재혼했다.헬레나 푸르망은 비단과 태피스트리 상인 다니엘 푸르망의 11번째 막내딸이었다. 1622년경에 루벤스는 그녀의 언니 수잔나 푸르망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이 때 헬레나는 8살이었다. 한편 루벤스는 1630~1631년에 16세의 헬레나 푸르망과 결혼 직후에 결혼의상을 입고 있는 초상화를 그렸다. 한마디로 헬레나는 아프로디테였다. 1639년에 추기경이자 왕자인 페르디난트는 형 펠리페 4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헬레나를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언급하였다. 초상화의 그녀는 행복해 보이지만 앳된 모습에 수줍음이 내비친다. 루벤스가 1630~1632년에 그린 또 다른 초상화 ‘헬레나 푸르망’은 풍만한 외모에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1631년에 루벤스는 ‘정원에서 헬레나와 함께 있는 루벤스’를 그렸다. 이 그림은 아내 헬레나가 루벤스와 함께 안트베르펜 저택의 정원을 지나 현관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노란 모자를 쓰고 손에 부채를 든 헬레나 옆에는 검은 모자와 검은 옷을 입은 루벤스가 있다. 헬레나 옆에는 이사벨라 브란트가 낳은 아들 니콜라스(12세)가 있다. 이들 앞에는 공작새가 있다. 제우스신의 부인 헤라(Hera)는 결혼과 가족의 수호신인데, 공작새는 헤라의 상징물이다.1632~1633년에 루벤스는 ‘사랑의 정원’을 그렸다.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이 그림은 정원에서 선남선녀들이 사랑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운데엔 다양한 의상을 한 여인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고, 왼편엔 모자 쓴 남자가 어린 천사가 등을 밀고 있는 젊은 여인과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이 바로 루벤스와 헬레나이다. 그 옆에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오른편 맨 위에는 돌고래 위에 앉아 있는 여인상의 가슴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이는 사랑과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하늘에선 천사들이 꽃과 비둘기로 축복하고 있고, 뒤편에도 은밀한 사랑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펠리페 4세가 특히 좋아한 작품이었다.1632년 1월에 루벤스와 푸르망 사이에 첫 딸 클라라 요한나가 태어났다. 1633년 7월에는 큰 아들 프란츠가 태어났다. 너무 기쁜 나머지 루벤스는 헬레나와 아이의 그림을 여러 장 그렸다. 루벤스는 1635년경에 ‘큰 아들 프란츠를 안고 있는 헬레나 푸르망’을 그렸다. 헬레나가 집의 테라스에서 알몸의 프란츠를 안고 있다. 1636년에는 ‘클라라 요한나, 프란츠와 함께 있는 헬레나 푸르망‘ 그림을 그렸다. 특히 이 그림은 루벤스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화실에 놓여 있었다.루벤스는 헬레나에게서 5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막내딸은 그가 죽은 후 8일 후에 태어났다.한편 1635년에 루벤스는 메헬렌 근처의 스텐 성을 구입했다. 그는 이 성에서 헬레나와 함께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헬레나를 모델로 그림을 여러 장 그렸다. 마지막 불꽃을 태운 것이다.1636년부터 1638년까지 루벤스는 ‘미의 세 여신 (三美神)’를 그렸다. 삼미신은 비너스를 모시는 세 여신이 정원에서 서로 회동하고 모습을 담은 그림인데 삼미신은 아글라이아(미), 에우프로시네(은총), 탈레이아(풍요)이다. 풍만하고 아름다운 세 여신은 장미 넝쿨 아래서 나신으로 서로 안고 있다. 루벤스는 늘 키 크고, 붉은 뺨의 풍만한 금발 여인을 그렸는데, 그 모델은 다름 아닌 아내 헬레나 푸르망이었다. 필자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았는데 복제품을 한 장 샀다. 루벤스는 1636~1638년까지 ‘파리스의 심판’을 그렸다. 여기에도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하는 데 벌거벗은 아프로디테의 모델이 역시 젊은 아내 헬레나였다. 그런데 루벤스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그림은 1638년경에 그린 ‘욕실에서 나오는 헬레나 푸르망’이다. ‘모피를 걸친 헬레나 푸르망’이란 제목으로도 불린 이 그림은, 헬레나가 거의 벗은 채 어깨를 휘감은 모피만 걸치고 진홍 카펫 위에 서 있다. 갓 목욕하고 나온 헬레나의 몸매는 유백색(乳白色)으로 빛나고 있는데 에로틱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그림은 루벤스가 가장 아껴 늘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유언장에서 경매목록에서 제외하고 헬레나 소유로 남긴다.루벤스는 1640년 5월30일 통증으로 심장발작이 일어나 별세했다. 그는 헬레나와 결혼한 1630년에서 1640년까지 10년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의 그림도 놀라운 생명력으로 불탔다.
    • 기획.연재
    2020-12-22
  • 광주 서구, 올해 상복 터졌다
    <서대석 광주 서구청장> 광주 서구(구청장 서대석)의 행정이 외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각종 평가에서 눈에 띄는 수상 실적을 거두고 있다.정부의 핵심정책인 주민자치, 복지, 안전, 환경, 보건 등 다양한 분야의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행정력을 입증하는 성과를 낸 것.최근 서구는 제19회 전국주민자치박람회에서 농성1동과 치평동이 주민조직네트워크 분야와 주민자치 분야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풍암동 및 화정3동은 우수상을 수상했다.또 학습공동체 분야에서 화정1동이 우수상을, 제도정책 분야에서는 자치 분권상을 수상, 5년 연속 우수사례 전국 최다 선정 지자체라는 영예를 안게 됐다.더욱이 지난해 금호1동에 이어 금년에는 농성1동이 대상 후보에 오르며 2년 연속 대상 후보를 배출해 내는 저력을 보여줬다.지난해 서구는 대상을 비롯해 최우수상 1개, 우수상 3개와 장려상 4개로 전국 최다 우수사례 수상의 영예를 안으며 주민자치 선도 지자체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서구는 또 행정안전부가 주최하는 ‘제9회 대한민국 지식대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대한민국 지식대상은 민간과 공공부문의 지식행정·경영 우수사례의 발굴·확산을 취지로 제정된 이 분야 최고 권위의 상이다. 서구는 주민 및 공무원 대상 제안제도, 아이디어 공모전, 서구청 SNS 그리고 청년정책 참여단 등을 운영해 지식기반 활동을 활발히 펼친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이 뿐만 아니다. 거버넌스 지방정치대상 공모대회 조직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2020 거버넌스 지방정치 대상’ 에서 ‘자율과 참여, 마을과 현장중심 자치공동체 실현’을 주제로 참여해 자치분권 강화 분야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복지부문에서도 서구의 행정력은 빛을 발했다.지난 18일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2020년 지역복지사업 평가에서 3개 분야에서 대상 및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기관 표창과 함께 4000만원의 포상금을 받기도 했다.전국 229개 지자체 가운데 서구는 ‘찾아가는 보건복지서비스 제공 분야’ 대상, ‘민관협력 및 자원연계 분야’, ‘지역사회 통합돌봄 서비스 제공분야’에서 각각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다.평가에서 서구는 올 한해 코로나19 속에서도 취약계층의 심리적 안정과 소통, 생활 안정을 위해 추진한 긴급 이웃살피미운동, 각종 꾸러미 제작과 75세 이상 어르신들에 대한 전수조사를 통한 맞춤형 통합돌봄서비스 실시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코로나19 사태와 폭우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가중된 가운데 서구는 재난 대비한 평가에서도 좋은 결실을 맺었다.얼마전 행전안전부가 ‘2020년도 여름철 자연재난 대책 평가’를 통해 서구를 우수기관으로 선정, 특별교부세 2억원을 지급한 것.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한 평가에서 서구는 여름철 자연재난 사전대비 기간에 재해 우려지역 안전 및 인명보호 계획을 수립하고, 선제적 비상상황 관리를 추진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이밖에도 서구는 풍수해 보험 가입률 제고를 위해 광주시에서 실시하는 풍수해보험사업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020년 민방위 업무 평가에서는 우수상을 받는 등 안전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환경 분야에서도 서구는 다양한 친환경 정책 도입과 선도적인 실천운동 등을 통해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대응에 기여한 점을 높게 평가 받아 녹색환경대상에서 종합대상인 환경부장관상을 수상했다.올해 서구는 화정3동과 화정4동 지역에 태양광, 태양열 377개소를 보급하고, 사회복지시설 및 취약계층 가구 414개소에 LED등을 설치했으며친환경 저녹스 보일러 2315대를 지원하는 등 소나무 35만 그루 식재 효과를 거두게 됐다. 또 도시 불투수 면의 증가로 인한 홍수, 지하수 고갈, 도시열섬 악화 등 물 문제 가중 현상을 줄이기 위해 비점오염 및 우수유출 저감을 위한 ‘그린빗물인프라 조성사업’을 광주 자치구 가운데서는 최초로 추진하기도 했다.일자리 및 보건 분야에서도 서구는 가시적인 성과를 이뤄냈다.보건복지부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지원사업 평가대회에서 광주 서구 시니어클럽이 최우수상, 식중독 예방관리에서 식품의약품 안전처장상, 비만 예방관리사업에서 보건복지부장관상, 자치구 출산정책평가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것.특히 최근에는 광주시가 주관하는 규제개혁 자치구 평가에서 정부합동평가 지표, 인증제 진단 6개 지표를 평가한 결과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으며, 한국거버넌스학회와 언론사에서 실시한 행정대상·의정대상에서 행정혁신부문 행정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이처럼 올해 서구청은 각종 평가에서 45건의 수상을 했으며, 정부 부처와 광주시 주관 각종 공모 사업에서도 잇따라 선정되며 다급한 현안사업비를 확보했다.대표적인 공모사업으로 지난 9월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에너지공단의 공모에서 2021년 신재생에너지 융복합지원 사업에 선정, 32억 6000만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이 사업비는 상무1,2동, 화정1동, 금호1동 등 436개소에 2MW 규모의 태양광발전 설비 설치, 10개소에 태양열 온수설비, 1개소에 연료전지 발전 설비비로 투입될 예정이다.이밖에도 서구는 행정안전부의 2021년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사업 공모에서 10억 7000만원, 보건복지부 보건복지 전달체계 강화 시범사업 공모에서 4억 2000만원, 지역사회 통합돌봄 선도사업 특화사업 공모에서 1억6000만원, 고용노동부 지역산업 맞춤형 일자리창출 지원사업에서 3억4000만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또 광주시가 주관하는 2021년 전통시장 및 상점가 시설현대화 사업비24억 4000만원, 사회적기업 일자리창출 사업 8억 5000만원 등을 비롯해 75건의 공모사업에서 총 143억 여원의 사업비를 확보함으로써 열악한 구 재정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게 됐다.서대석 청장은 “모든 공직자들이 협업을 바탕으로 적극 노력한 결과 여러 가지 대내외 평가와 공모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며 “확보한 사업비를 효과적으로 집행해 현안사업들이 차질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연재
    2020-12-20
  • 광주고총동문회 '2020 자랑스러운 光高人의 밤' 성료
    김낙현 회장 "코로나19 어렵지만 광고인 역량으로 극복하자" 광주고등학교총동문회(회장 김낙현·24회)가 지난 12일 ‘4·19민주혁명역사관’에서 ‘2020 자랑스러운 광고인의 밤’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기노석(20회·의학박사·흉부외과 전문의·금호라이프 회장) 동문에게 '광고인 영예대상', 그리고 김명민(10회·前 광주시의회 의원) 동문 등 8명에게 ‘자랑스러운 광고인상’이 수여됐다.광주고총동문회는 정부 시책에 따라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등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참석하지 못한 다수 동문을 위해 유튜브 생방송으로 행사를 실시간 중계했다.광주고총동문회는 매년 10월 ‘光高동문체육대회’를 모교에서 개최해 왔으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규모를 대폭 축소해 이날 행사로 대체했다.
    • 기획.연재
    2020-12-14
  • 다빈치,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다
    #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에서 리졸리의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그림을 보았다. 리졸리는 1508년에서 1549년 사이에 밀라노에서 활발히 활동했는데, 이 시기는 다빈치나 라파엘로가 활동한 때였다. 이 그림은 패널에 유화로 그린 작은 그림인데 마리아 막달레나가 두 손을 모으고 누구인가를 쳐다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나간 여인이었다. 누가복음 8장에 나온다. 그런데 59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다고 강론한 이후에 그녀는 1400년 가까이 매춘부로 낙인찍혔다. 이는 로마 가톨릭에 의한 조작이었다. 1988년 8월 15일 ‘마리아의 해’에 즈음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인의 존엄과 소명에 관한 ‘여성의 존엄’ 16항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녀를 ‘사도들의 사도’로 격상시켰다. 한편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 곁에 있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고 (마태복음 27:56, 마가복음 15:40-41),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며 (마가복음 15:47) 부활절 아침 무덤에 갔던 세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마가복음 16:9-11, 요한복음 20:1-18). 여기에서 마가복음 16장의 관련 구절을 읽어보자. ‘일요일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막달라 여자 마리아(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인)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는 예수께서 일찍이 일곱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던 여자였다. 마리아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이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20장은 더 자세하다.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예수는 마리아와 대화를 하고 형제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그녀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알려주신 말씀을 전했다.막달라 마리아는 2003년에 댄 브라운이 출간한 ‘다빈치 코드’ 추리소설, 그리고 톰 행크스가 출연한 같은 이름의 영화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2018년에는 ‘막달라 마리아 : 부활의 증인’ 영화도 나왔다. # 라파엘로 회랑이윽고 라파엘로 회랑(227번 홀)을 걷는다. 이 회랑은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라파엘로 로지아’를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1783년에 예카테리나 2세의 주문에 따라 11년간 작업 끝에 완성되었다. 천재 화가 라파엘로(1483~1520)는 1516년에서 1518년까지 바티칸에 한쪽 벽면이 탁 트인 복도인 로지아를 만들었다. 로지아가 설치된 건축물의 외관은 기둥과 기둥이 아치로 되어 있어 고대로마의 건축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이 로지아는 바티칸에 지어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가장 대표하는 건축물로 손꼽힌다. 또한 넓이 4m에 길이 65m나 되는 넓고 긴 복도에는 13개의 아케이드가 줄 지어 있는데 아케이드 천장은 프레스코화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아울러 13개의 아케이드에는 구약과 신약성서 이야기가 52장면 그려져 있는데 일명 ‘라파엘로 성서’라고 부른다.그런데 교황으로부터 신임을 받은 라파엘로는 많은 업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천장화 작업을 직접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기본계획만 구상하고 그림은 그의 제자들이 그렸다.예카테리나 2세는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바티칸의 라파엘로 로지아를 그대로 본 따서 만들도록 했다. 특이한 점은 에르미타시 박물관에는 바티칸과 같이 라파엘로의 성서 이야기 그림들이 그대로 그려져 있지만, 문장(紋章)만은 바티칸이 아닌 로마노프 왕조의 쌍두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러시아의 정체성(正體性)에 신경을 쓴 것이다. # 루벤스 방 다시 루벤스 방(247번 방)으로 옮긴다. 벽에는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다. 그런데 풍경화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베네치아 화가 카날레토(1697~1768)가 그린 ‘프랑스 대사의 접견 1726~1730’ 이라는 걸작이다.이 그림은 1726년 11월 2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두칼레 광장 입구에서 열린 프랑스 대사 랑구에의 환영 행사를 그린 것이다. 배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두칼레 광장과 멀리 산타마리아 살루테 성당 그리고 항구 등 베네치아 중심가의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두칼레 광장 발코니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베네치아 주요 인사들까지 세밀히 묘사했다는 점이다.예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역사 현장을 마치 사진처럼 정확하게 재현한 베네치아 화가 카날레토. 그의 그림은 사진이 없었던 시절에 세밀화로 각광을 받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루벤스(1577~1640)의 그림을 감상한다. 루벤스는 렘브란트와 함께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두 사람의 차이는 루벤스는 인생을 가장 멋지고 화려하게 살았고, 렘브란트(1606~1669)는 초년엔 화려하다가 두 아내와 사별하고 파산까지 당하여 너무 초라하게 죽었다. 루벤스 방 벽에도 그림이 여러 장 걸려 있다.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그림, 알 수 없는 그리스 로마 신화 그림들이다. 눈에 띄는 그림은 ‘땅과 물의 만남’이다. 1618년에 그린 이 그림은 뿔을 들고 있는 땅의 여신 키벨레와 삼지창을 들고 있는 바다의 신 넵튠(그리스 신화는 포세이돈)이 서로 손을 잡고 있다. 항아리에는 물이 넘쳐흐르고, 두 아이가 헤엄치고 있다. 키벨레 위에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월계관을 들고 있고, 물 아래에는 트리톤이 고동 나팔을 불고 있다.그런데 이 그림에는 ‘스헬데와 안트베르펜’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618년 무렵에 플랑드르 도시 안트베르펜은 스헬데강을 통해 바다로 나가는 항로가 차단당했다. 루벤스는 이 그림을 통해 땅과 물이 만나듯이 항로가 열려 안트베르펜이 번영하길 기원하고 있다.그러면 안트베르펜에 대하여 살펴보자. 1560년경 안트베르펜은 인구 10만 명의 국제적인 경제중심지였다. 독일 ·포르투갈·영국·이탈리아 출신의 외국 상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그런데 1517년에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안트베르펜(지금의 벨기에 도시)은 루터파의 거점이 되었고, 1550년부터는 칼뱅주의가 교세를 확장하여 1560년경에는 칼벵교는 겐트·발랑시엔 등 프랑드르 지방 전체로 확산되었다. 1566년에 칼뱅교도들은 안트베르펜에서 성상(聖像)을 파괴하고 성화(聖畵)를 불태웠다.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이러자 프랑드르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1527~1598)는 1567년에 강력 진압을 하였고 이후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펠리페 2세의 공포정치는 열렬한 칼뱅주의자인 루벤스의 아버지 얀 루벤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재판관인 얀 루벤스는 1568년에 안트베르펜을 떠나 종교적 관용이 보장된 독일 쾰른으로 이사했다.쾰른에서 얀 루벤스는 오라녜 공 빌렘 1세의 부인인 작센의 안나 공주의 법률 고문이 되었다. 그런데 얀 루벤스는 안나 공주의 연인이 되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얀은 투옥되었다. 다행히도 아내 마리의 중재로 얀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루벤스 가족은 독일 지겐에 유배되었다. 1574년에 지겐에서 형 필립이 태어났고 1577년에는 루벤스가 태어났다. 1587년에 아버지가 죽었다. 이러자 원래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는 다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다.1588년에 신교를 옹호한 프랑드르 북부 지역 7개 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안트베르펜을 위시한 남부 플랑드르는 펠리페 2세에 의해 가톨릭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1600년 초부터 프랑드르 북부 7개 주와 스페인 간에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안트베르펜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바닷길이 봉쇄된 것이다.
    • 기획.연재
    2020-12-07
  • 예수의 수난 예감하듯 애절한 성모의 눈빛
    ‘게오르기’ 홀(St George Hall 198호실)은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의 공식 행사가 열리는 ‘대 옥좌관’으로 우리나라 같으면 경복궁 근정전 같은 곳이다. 황제(짜르)의 옥좌 바로 위의 하얀 벽에는 ‘말을 타고 긴 창으로 용을 찔러 죽이는 성 게오르기’ 부조가 새겨져 있다. 2000년 12월 20일에 공식 제정된 러시아 국가 문장은 그 원형이 러시아 제국 문장이다. 국장에는 빨간색 방패 안에 세 개의 금색 왕관을 쓴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금색 독수리가 그려져 있으며 왼쪽 발톱에는 금색 홀을, 오른쪽 발톱에는 금색 구를 잡고 있다.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빨간색 작은 방패 안에는 백말을 탄 성 게오르기가 창으로 용을 찔러 죽이는 형상이 그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의 문장도 ‘용을 물리치는 성 게오르기’이다. ‘성 게오르기’는 영어로는 ‘성 조지(St. George)’이다. 필자는 1997년에 영국에서 유학할 때 ‘용을 찔러 죽이는 성 조지’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성 조지는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이다. 흰 바탕에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잉글랜드 국기는 성 조지의 깃발이다.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기담집 ‘황금 전설’(The Golden Legend)에는 초기 기독교의 순교성인인 성 조지가 악룡(惡龍)을 무찌르고, 이교도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프리카 리비아의 한 호수에는 포악한 용이 살고 있었는데 매일 두 마리의 양을 먹어치웠다. 그런데 양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처녀들이 제물이 되었다. 처녀들도 모두 죽자 외동딸 공주까지도 용의 먹이가 될 처지에 놓였다. 이런 즈음에 성 조지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성 조지는 호수로 가는 공주의 행렬의 앞에 서서 악룡과 싸웠다. 용은 독을 뿜어내며 성 조지를 죽이려 했지만, 그는 긴 창으로 용의 입속을 찔러 용을 제압했다. 이후 성 조지는 공주의 허리띠로 용을 묶어 개 끌듯 수도로 데리고 왔다. 용을 무찌른 성 조지는 개종하겠다던 약속을 지키라고 말했다. 이에 이교를 믿던 리비아인들은 모두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 한다. 그런데 성 조지는 잉글랜드 말고도 독일과 스페인 카탈루냐, 러시아 등 유럽 여러 지역에서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여담이지만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도 ‘용을 찔러 죽인 성 조지’ 조각상을 본 적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용은 동양에서는 상서로움, 제왕(帝王)의 권력을 상징하고, 임금의 옷이 곤룡포인데 반하여, 서양에서는 사악함과 이교도(異敎徒)의 상징이다. 이것이 동서 문화의 차이인가? 이어서 게오르기 홀을 자세히 들러보면서 사진을 연거푸 찍었다. 벽의 문양들은 담백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흰색 바탕의 간결함 속에 황금으로 도금된 인테리어, 현란한 샹들리에도 러시아 황실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한다.게오르기 홀(198호실)을 지나서 가는 곳은 파빌리온 홀(204호실)이다.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정원이 딸린 이 홀은 1850~1858년에 만들어졌다. 엔틱과 르네상스, 동방 양식이 조화를 이루도록 꾸며졌고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하얀 대리석과 모자이크 그리고 금장식이 매우 인상적이다.이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특별한 물건은 황금 공작시계이다. 이 시계는 1770년 영국 런던의 제임스 콕스사가 제작한 것으로 태엽을 감으면 부엉이가 먼저 잠에서 깨고, 종이 울리면 가운데 공작새가 꼬리를 활짝 펴고 한 바퀴 돌면서 자태를 뽐내고 이어서 닭이 운다. 지금도 황금공작시계는 매주 수요일 오후 1시에 작동한단다. 아쉽게도 시계가 작동하는 것은 못 보았지만 황금 공작시계를 본 것만으로도 황홀하다.파빌리온 홀에서 네바 강을 바라보면서 통로를 걸으니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214호 실)이 나온다. 이곳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를 비롯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인 다빈치 그림을 감상한다니 설렌다. 먼저 ‘베노아(Benois)의 성모’부터 보았다. 그림은 49.6×31.5㎝로 매우 작다. ‘베노아의 성모’는 1914년에 러시아 건축가 레온티 베노아(Leonty Benois)로부터 구입한 것이라서 그리 이름 붙여졌는데, ‘꽃을 쥐고 있는 성모’로도 알려져 있다.이 그림은 다빈치가 1478년 피렌체에서 그린 초기작인데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다. 1452년에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마을 빈치에서 공증인 세르 피에르 다빈치의 사생아로 태어난 다빈치는 1469년에 베로키오의 문하생으로 피렌체로 갔는데 1475년에는 독자적으로 공방을 마련했다.베노아의 성모 그림은 어둠침침하다. 창문도 하나뿐이고 휑하다. 성모와 아기 예수의 머리 위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원이 그려져 있다. 성모는 이마가 훤히 드러나고 다갈색 머리카락은 길게 땋아 왼쪽 어깨로 드리웠으며 목에는 주름이 잡혀 있다. 브로치가 있는 성모의 옷은 겉감은 어두운 청색 벨벳이고 안감은 주황색이다.성모의 무릎에 있는 아기 예수는 머리가 반질반질하고 한 손에 노리개를 쥐고 있다. 그런데 성모와 아기 예수의 시선은 성모가 쥐고 있는 꽃잎이 네 개 달린 꽃에 맞추어져 있다. 이 자그맣고 하얀 꽃은 십자화과에 속한 것으로 십자형 모양과 쓴 맛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네 개의 꽃잎도 예수가 걸어갈 ‘십자가의 길’을 암시한단다.다음은 ‘리타의 성모’이다. 이 그림은 1865년에 밀라노의 안토니오 리타 공작으로부터 구입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졌는데, 다빈치가 1490년경에 밀라노에서 그렸다. 다빈치는 1482년에 밀라노에 간 후에 궁정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최후의 만찬(1495~1498)도 이 시기에 그렸다. 패널에 템페라로 그린 ‘리타의 성모’는 42×33㎝로 매우 작지만 윤택이 나고 색깔도 화려하다. 템페라 기법은 안료를 달걀노른자와 물에 풀어 그리는 방법인데, 부드럽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섬세한 음영을 사용해 마치 안개에 쌓이듯 윤곽선을 서서히 용해시키는 스푸마토 기법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귀족적 취향으로 우아한 느낌이 물씬 난다.‘리타의 성모’는 성모 마리아가 두 손으로 아기 예수를 받치고 손수 젖을 먹이는 모습이다. 배경은 어두운데 두 개의 창문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하늘에는 파란 뭉개 그림이 떠 있다. 성모가 입은 속옷은 진홍색이고 겉옷은 파랑 천에 테두리는 금색으로 둘러져 있다. 금발 머리는 잘 빗겨져 있고 머리위에 수건이 늘어져 있다.성모의 시선은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성모의 눈빛은 예수의 수난을 예감하듯 애절하다. 곱슬머리 아기 예수의 한 손은 성모의 젖무덤에 있고, 다른 한 손은 방울새를 쥐고 있다. 방울새는 앞으로 다가올 수난을 짐작케 한다. 한편 아기 예수의 시선은 관객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시선의 교감을 통해 관객은 그림의 내면으로 이끌려 들어가고 있다.베노아와 리타의 성모, 두 그림을 보면 다빈치의 피렌체와 밀라노 시대가 대비된다. 밀라노 시대의 아기 예수는 반질머리에서 곱슬머리로 변했고, 성모 마리아는 더 부드러운 모습이다. 더 원숙해진 다빈치는 탁월한 표현력을 발휘하여 영혼의 표정을 그렸다.
    • 기획.연재
    2020-11-23
  •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 실패로 ‘몰락의 길’ 걷다
    마침내 예르미타시 박물관 입구를 통과하여 겨울 궁전에 들어왔다. 앞에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요르단(Jordan) 계단이 보인다. 흰색 계단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 있고, 금장 장식과 조각들, 그리고 천장의 그림에 압도당한다. 탄성(歎聲)이 절로 나온다.‘요르단 계단’이란 이름도 흥미롭다. 요르단은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유다 광야의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강 이름이다.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란 찬송가 구절도 생각난다.요르단 계단은 1월 19일 예수 세례 대축일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날 네바강에서 강물로 세례를 받는다.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뚫은 얼음 구멍 이름이 ‘요르단’이었다.이제 요르단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통로를 따라가니 ‘야전 사령관 방’이 나온다. 이곳에는 러시아 장군들 초상화가 여럿 있다. 특히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 때 러시아 총사령관 쿠투조프(1745~1813) 초상화는 인상적이다.또한 1709년 7월 폴타바 전투가 끝난 후, 스웨덴 군사들이 표트르 대제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그림은 러시아의 위상을 한껏 과시하고 있다.이어서 ‘표트르 대제 방’으로 들어갔다. 진홍색 벽에는 쌍두독수리 문장이 새겨져 있고, 옥좌 뒤에는 ‘표트르 대제와 미네르바’는 그림이 걸려 있다. 다음은 ‘1812년 전쟁 갤러리’를 지나 ‘궁전 안 정교회’를 둘러보았다. 정교회의 금색 장식들이 화려하면서도 장엄하다. 다시 ‘1812년 전쟁 갤러리’로 돌아왔다. 방 좌우에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한 장군 332명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이 갤러리는 알렉산드르 1세의 지시로 1826년 12월25일에 개관했는데, 초상화는 영국화가 다우이(Dawe)가 그렸다. 그러면 ‘1812년 전쟁’을 자세히 살펴보자. 1812년 6월12일 밤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프랑스군 15만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12개국의 지원군으로 구성된 약 60만 대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진격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대륙 봉쇄령에 대한 러시아의 제재위반 때문이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참패한 나폴레옹은 1806년에 영국 봉쇄를 단행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영국 상품이 중립국 국기를 게양한 선박에 의해 수송되는 경우 러시아 항구 입항을 허용했다. 결국 양국의 관계는 1811년에 깨졌다. 1812년 8월 초에 러시아는 스몰렌스크 외곽에서 지연작전을 폈다. 러시아군은 청야작전을 폈다. 가축, 곡물, 가옥 등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병력을 매복시켜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2만 명 이상 희생되었다.이 시기에 알렉산드르 1세는 이미 은퇴한 67세의 쿠투조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귀족과 장교 그리고 백성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9월7일에 쿠투조프는 모스크바에서 120㎞ 떨어진 보로디노에서 격전을 벌였다. 러시아군은 13만2000명, 프랑스군은 13만5000명으로 군사력은 비슷했다. 이들은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싸웠는데 프랑스군 6만 명, 러시아군 4만4000명이 전사한 끝에 나폴레옹이 간신히 이겼다. 패배한 쿠투조프는 군대를 보전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떠났다. 모스크바 시민들도 군대를 따라 떠났다. 9월14일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무혈 입성했다. 그런데 모스크바에 도착한 날 밤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후 화재는 4일동안 계속되어 모스크바의 대부분을 불태웠다. 한마디로 모스크바는 유령 도시였다. “모스크바를 잃은 것이 곧 러시아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라는 쿠투조프의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프랑스 군대는 숙영할 집도 없고 식량도 모자랐다. 게다가 추위는 예년에 비해 혹독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와 협상을 3번이나 시도했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전혀 응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 이러자 러시아 기마병들이 기습 작전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혔고, 계속되는 혹한과 배고픔에 떠는 프랑스 병사들은 죽은 전우의 옷을 겹쳐 입고 쓰러진 말의 고기를 먹으며 퇴각해야 했다. 12월 말에 나폴레옹은 파리에 돌아왔을 때는 60만 대군 중 겨우 5만 명만 살아남았다. 쿠투조프는 ‘전쟁은 적군의 괴멸로 끝났다’고 차르에게 보고하고 1813년 1월에 네바강을 건넜다. 1814년 3월18일에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파리를 점령했고,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실패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한편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1812년에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을 중심으로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작 ‘전쟁과 평화’를 썼다. 당초에 톨스토이는 당초 1825년 청년 귀족 장교들이 니콜라이 1세에 대항해 벌인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대해 쓰려고 했지만, 역사를 넓혀 1805년 러시아의 황금시대부터 나폴레옹 전쟁, 1825년 12월 혁명까지 다루었다. ‘전쟁과 평화’는 보르콘스키 가, 로스토프 가, 쿠라긴 가의 인물들과 피에르 베주호프 백작 등을 중심으로 전쟁 속에서 인간의 운명을 그려 낸 작품인데 등장인물만 해도 599명에 달한다. 톨스토이는 수 많은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묘사하여 인물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한 대작을 창작해 냈다.한편 ‘1812년 전쟁갤러리(197호실)’ 바로 옆은 ‘게오르기 홀(St George Hall)’이다. 이 홀(198호실)은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의 공식 행사가 열리고 있어 ‘대옥좌관’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같으면 경복궁 근정전 같은 곳이다. 게오르기 홀은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1787년부터 1795년까지 만들어졌다. 그런데 1837년에 화재로 불타버렸다. 이러자 니콜라이 1세(재위 1825년-1855년)는 홀을 완전히 흰 대리석으로 꾸미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백색 대리석과 16종류의 나무를 사용하여 1841년에 다시 만들어졌다. 먼저 차르의 옥좌부터 보았다. 옥좌는 진홍색 바탕인데 등에는 쌍두 독수리가 새겨져 있다. 의자 걸이도 황금 칠한 독수리 모양이다. 옥좌 뒤는 적색 바탕이다. 여기에도 커다란 쌍두 독수리와 왕관이 있다.쌍두독수리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 연관이 있다.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는 형상의 독수리는 제국의 주권과 동·서양을 초월한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상징한다. 그런데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1000년 정도 유지된 비잔티움 제국이 1453년에 오스만 튀르크에게 멸망하자 모스크바 대공국은 동로마 제국과 동방정교회의 계승자로 자처했다. 1472년에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동로마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소피아와 결혼했다. 이어서 그는 동로마 제국의 문장인 쌍두독수리를 모스크바 대공국 문장으로 삼았고, 스스로 차르(황제)라 칭했다.
    • 기획.연재
    2020-11-08
  •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
    # 궁전광장 1712년에  러시아 표트르 대제(1672~1725)는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문화예술의 도시이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예르미타시 박물관이 있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란 시로 유명한 푸시킨(1799~1837)이 결투하다가 죽은 곳이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소설 ‘죄와 벌’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2018년 4월 하순에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관람했다. 관광버스는 궁전광장 앞에 섰다. 궁전광장 왼편에 예르미타시 박물관이 있고 오른편은 구(舊) 해군 참모본부이다. 구 해군 참모본부 중앙에는 개선 아치가 있는데, 그 위에는 마차를 모는 승리의 여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궁전광장 중앙에는 높이 47.5m, 직경 4m, 무게 600t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기둥이 있다. 이 기둥이 바로 ‘알렉산드르 원주 기둥’인데 러시아가 1812년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34년에 세워졌다. 기둥 꼭대기에는 알렉산드르 1세 (재위 1801~1825)의 얼굴을 한 천사가 십자가를 붙잡고 뱀을 누르고 서 있다. 천사는 알렉산드르 1세이고, 뱀은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것이리라.그런데 궁전광장은 러시아 역사 현장이다.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 그리고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아침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조용히 길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할 생각으로 궁전을 향했다. 행렬의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가폰(1870~1906)이 있었다.1903년 봄에 가폰은 ‘공장 노동자 클럽’을 만들었다. 모임의 주된 내용은 친교와 명사 강연이었다. 클럽은 활기를 띠어 1904년 가을에는 회원수가 9000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904년 12월말에 1만2000명의 노동자를 가진 최대 금속기계 회사인 푸틸로프 공장에서 가폰의 클럽회원 4명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노동자들은 연일 집회를 열어 해고자 복직을 요구했고, 1905년 1월에는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확대되어 450여 공장 11만 명이 동조파업을 했다. 이럼에도 사업주들은 완강했고 노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1월22일에 가폰은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나섰다. 청원서에는 해고자 복직 요구를 사업주가 거절했다는 내용과 함께 8시간 노동제, 노동권 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오후 2시에 궁전광장에는 20만 명이 넘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였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갑자기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1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죽었고, 4000명 이상이 부상 당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잔혹한 학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노동자들이 항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1월 한 달 동안 동맹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44만 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지난 10년 동안에 파업 참가자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국민들은 차르는 노동자 편이 아니며 지주 및 자본가들과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차르는 물러가라. 공화국 만세.”이런 구호는 전국 도처에 퍼졌으며 집회와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당시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만주로 진입하여 9월에는 랴오양을 점령하였고, 여순도 위협했다.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은 발틱 함대였다. 1904년 10월15일에 니콜라이 2세는 발틱 함대를 라트비아 리예파야의 발틱 항구에서 출발시켰다. 하지만 발틱함대는 1902년에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220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해 대한해협에 도착했다. 전투준비를 끝낸 일본해군은 1905년 5월27일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무참하게 궤멸시켰다. 9월5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중재 아래 러·일간에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일본은 11월17일에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고, 1910년 8월29일에 조선을 강제병탄했다. 한편 1917년 10월 25일, 네바강에 정박 중인 순양함 오로라호에서 한 발의 공포탄이 울렸다. 이를 신호탄으로 공산혁명 지도자 레닌(1870~1924)은 겨울 궁전을 습격하여 임시정부 카렌스키를 몰아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정권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예르미타시 박물관 예르미타시 박물관 본관은 러시아 황제가 지낸 겨울궁전이다. 에메랄드 색의 화려한 건물은 1762년부터 1904년까지 러시아 황제들이 거주한 공간이다. ‘예르미타시(The Hermitage)’란 이름은 프랑스어로 ‘은둔지(place of solitude)’란 의미인데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에카테리나 2세(1729~1796, 재위 1762~1796)이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예카테리나 2세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남편 표트르 3세를 186일 만에 폐위시킨 여제(女帝)란 점이다. 표트르 3세(1728~1762, 재위 1761~1762)는 표트르 1세의 외손자인데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일에서 살면서 1745년에 엘리자베타 여제(1709~1761, 재위 1741~1761)가 간택한 프로이센 한 지역의 공주 소피아(나중에 예카테리나 2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표트르는 아내와 관심이 없었고 공개적으로 외도했다. 또 아내를 모욕주고 폭력도 휘둘렀다.엘리자베타 여제가 후손 없이 1761년 12월25일에 죽자 표트르 3세가 황제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7년간의 전쟁 끝에 프러시아를 거의 멸망시켜 1760년 9월에 베를린에 입성하고 1761년에는 콜베르 요새를 점령하여 프러시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표트르 3세는 황제가 되자마자 프러시아에 대한 군사작전을 중지하고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표드르 3세의 반 국익적 행위로 인해 군인과 귀족들은 큰 불만을 가졌다. 이어서 표트르 3세가 모든 러시아 정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해버렸고, 성직자들에게 수염을 깎고 루터교의 목사처럼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자, 성직자들마저 등을 돌렸다. 이러자 예카테리나는 남편과 달리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여 국민들의 환심을 샀고 궁정 귀족들과 친위대 장교들의 존경을 받았다. 1762년 6월28일 아침에 장교복장을 한 예카테리나는 말을 타고 친위대 병영에 도착하여 표트르 3세의 반 러시아적 정책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궁정혁명이었다. 이에 친위대는 에카테리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표트르 3세를 체포하여 구금했다. 이후 표트르 3세는 구금 상태에서 1주일 만에 살해되고 말았다. (문명식 편역, 러시아 역사, 294-295)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역사도 예카테리나 2세의 개인 컬렉션에서부터 시작된다. 1764년에 예카테리나 2세는 베를린 상인 고츠콥스키의 부채를 탕감해주면서 그 대신 225점의 그림을 받았다. 이 그림들에는 루벤스, 렘브란트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그녀는 1769년에 티치아노 등의 그림 600점, 1772년에는 라파엘 푸생 등의 그림을 더 구입하여 컬렉션이 더욱 풍성해졌다. 그녀는 은둔의 방에서 극히 한정된 사람과 은밀하게 환담하면서 소장품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림을 전시할 공간이 부족하자 1771~1778년에 궁전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속 그림을 사 모아 그녀가 죽을 당시에는 3996점이나 되었다.한편, 에르미타시 박물관은 1852년에야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이곳은 고대 이집트와 스키타이 황금 유물, 그리스-로마의 조각,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등은 물론 고흐, 마티스, 피카소, 루벤스, 렘브란트, 로댕 등 유명 화가·조각가들의 그림과 조각 작품들이 270만 점이나 있다.이 작품들을 1분씩만 보아도 5년이 걸린단다. 박물관을 모두 둘러보려면 27㎞를 걸어야 한다니 두 시간 정도의 관람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나 다름없다.  
    • 기획.연재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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