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4-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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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조, 뭘 알아야 할까?
    상조는 이미 필수품이 됐습니다. 자연과 사회와 사람은 서로 영향받으며 함께 변화한다니, 이렇게 논의할 정도면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이겠지요.그렇다면 상조(장례)와 관련해 어떤 근거로 판단해야 할까요? 평생 손으로 꼽을 정도의 일을, 얼마나 정확하고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우선 그 일을 하고 있는 주체(업체)부터 알아봅시다. 장례에 전문성을 갖고 있으며 적절한 조건으로 대행한다고 내세우는 곳은 크게 나눠 세 곳입니다.첫째가 선불식(할부거래) 상조입니다. 현재 알려져 있는 상조 대부분이 여기 해당됩니다. 그 다음이 장례식장입니다. 식장 건물이 크고, 호사스럽다고 할 만큼 잘 꾸며 놓았지요. 끝으로 후불식 상조입니다. 최근 공격적인 홍보 등을 통해 알려지고 있습니다.세 곳에 대해 상조의 장점을 기준으로 판단해봅시다.상조의 장점 중 하나가 편리성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장례 행사를 상조(회사)가 한꺼번에 처리해 준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장례의 과정과 절차 그리고 쓰는 물품도 포함돼 있습니다. 즉 의식이나 용품을 사안마다 비교하고 결정하는 번거로움과 곤란이 해결된다는 것이지요.위에 거론한 세 곳 가운데 어떤 것이 그 장점에 가장 맞을까요? 장례식장은 모든 내용을 상황이 발생한 다음 선택해야 합니다. 즉 ‘큰일’을 당해 황망하기만 한데 수십 가지 절차와 물품을, 가성비 따져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편리하겠습니까? 아니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후불제 상조도 비슷합니다. 후불제 상조는 ‘값이 싸다’고 주장하지요. 그런데 제시한 가격과 물품·용역을 살펴보면, 빠져 있는 것이 많습니다. 필요한 부분을 다 갖추면 오히려 비싸지곤 하지요.특히 후불제상조는 선불제상조가 ‘제도권’에서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과 ‘방문판매법’ 등으로 심한 규제를 받는 데 비해, 어떤 법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도입 초기 상조의 문제점이 재현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장례식장과 후불제상조의 큰 단점은 그들이 제시하는 용역과 물품이 적절한지 여부를 사전에 검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필요한 것을 일괄 처리하지도 못하지요. 법령이 제정되고 규제가 강화되면서 제공 내역과 가격을 고시하기도 합니다만, 용역과 물품 전체가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행사 진행 중은 물론이고 끝난 뒤에도 정확한 내용을 알기 어렵고 알게 돼도 대부분 그냥 넘어갑니다. 장례 즉 죽음을 가능한 한 멀리하고 싶으니까요. 이런 기피 심리를 노린 모호(模糊)함이 상조와 관련한 문제의 대부분입니다.선불식 상조는 제공하는 용역과 물품이 전부 공개돼 있습니다. 고객은 더하고 빼는 등 조정하면 됩니다. 어느 경우건 상조회사 관계자와 의논해 바가지나 속임수를 피할 수 있다는 것도 선불식 상조의 큰 이점입니다.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큰일’을 맡길 상조의 얼개를 대강이라도 “알았다!”는 생각이 드시나요?주성식/금호라이프 홍보부장 sesank@naver.com
    • 기획.연재
    2021-04-13
  • 하얀옷과 붉은 피로 우금치 계곡을 물들이다
    평양전투와 황해해전 1894년 7월 말에 경기도 성환에서 승리한 일본 육군은 북상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서의 전투는 9월 5일부터 9월16일까지 벌어졌다. 청군의 병력은 1만 2000명, 일본군은 1만 7000명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평양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청군은 통솔하는 원수가 없고 장수들의 직위가 서로 같아 호령도 한결같지 않았고, 군대는 기강이 문란했다. 청군은 간음과 약탈을 자행하여  평안도민들의 원망이 컸다. 반면에 일본군들의 명령은 매우 엄하였다. 사람을 살해하거나 촌락을 약탈하는 일이 없어 청군과는 크게 달랐다.이때 평양 감사 민병석은 시국이 바뀌어 모든 민씨 척족들이 쫓겨나자 무슨 죄명이 내려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김만식이 평양감사로 부임해 온다는 말을 듣고 당황하며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양대신 이홍장의 전문을 받고 그는 김만식에게 감사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다.“이홍장이 평양감사 민병석에게 보낸 전문은 이렇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조선왕이 일본인의 협박을 받고 있고 명령도 모두 일본인이 한다고 하는데 그들의 명령은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그리고 본 대신은 많은 병력을 인솔하고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평양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평안도의 민병석에게 옛날과 같이  직책을 완수하도록 하고, 또 그가 청군과 함께 중요한 임무를 맡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서울에서 다시 새 감사를 파견하려고 하면, 미리 각 총수에게 알려 새 감사를 신관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본 대신이 모든 일을 주관할 것이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이러자 김만식은 평양서윤 서병수와 함께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들어가 40일 동안 나오지 못했다. 평안도 사람들은 ‘민병석은 청나라 감사이며, 김만식은 일본의 감사’라고 불렀다.” (황현 지음 ·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06, p 210-2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역 매천야록 제2권)청일전쟁통에 평안감사가 둘이라니. 어이가 없다.   한편 청군과 일본군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승기를 잡자 갑자기 섭지초가 지휘하는 청군이 백기를 내건 후 도주하였다. 이러자 일본군은 더욱 기세를 올려 청국 장수 조보귀를 포함하여 2000명을 죽였다. 일본군의 압승이었다. 일본군 전사자는 162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더 많이 처참히 죽은 사람들은 평양의 조선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주둔하고 있던 청군의 갖은 요구에 시달린 끝에, 지원부대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청군이 쏜 유탄에 맞거나 일본군의 총알 세례를 받아 죽었다. 청군이 물러간 후 김만식은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참혹한 전투를  치른 뒤여서 평양성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였고, 선화당 청판(廳板) 밑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시체들은 성 밖으로 끌어내어 모두 불에 태웠으나 열흘 동안을 태워도 다 타지 않았다.이 전투를 실제 목격했던 이인직은 소설 <혈의 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북문 밖 넓은 들에 철환 맞아 죽은 송장과 죽으려고 숨넘어가는 반송장들은 제각각 제 나라를 위하여 전장에 나와서 죽은 장수와 군사들이라.… 땅도 조선 땅이요 사람도 조선 사람이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싸움에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는가.”이윽고 9월 17일에 청국의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구의 대동구(大東溝)에서 일본함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 군함 11척이 순식간에 청국 군함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을 가하여 청국 군함 4척을 침몰시켰다. 해군 제독 정여창은 가까스로 여순항으로 도주하였다. 이렇게 평양과 압록강 하구의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중국 본토에 대한 공략을 서둘렀다. 제2차 동학농민봉기  일본이 평양과 황해전투에서 압승했다는 소식을 듣자 전봉준은 척왜 (斥倭)를 외치면서 전주에서 2차 봉기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4000명의 동학농민군은 10월 12일에 논산에 도착했다. 최시형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손병희도 15일에 북접 동학군을 이끌고 논산에 합류하였다. 전봉준은 10여 일간 논산에 머물면서 수만 명의 농민군을 모은 후 공주로 향했다.16일에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창의영수’ 전봉준은 논산에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관군도 항일에 동참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박제순은 아예 대꾸조차 안했다.  개화파 정권은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하고 관군을 공주로 내려보냈다. 최신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대 1개 대대도 진압군에 합류하였다.   10월 21일에 동학군은 충청도 목천 세성산에서 관군과 처음 접전을 벌여 수백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이어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공주를 눈앞에 두고 10월23일부터 25일까지 잇따라 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승패가 확연히 갈린 것은 아니었지만 동학군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경천으로 물러났다. 전열을 가다듬은 동학군은 11월8일과 9일에 공주 문턱의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수만 명의 동학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관군 2500명과 일본군 200명 등 2700명이 산봉우리 고지대에서 진을 치고 있는 우금치 계곡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동학군은 선두에 몇백 명이 화승총을 가졌고, 나머지는 창을 들고 있었다. 동학군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하지만 동학군은 대포와 연발총 그리고 미제 스나이퍼 소총과 무라다 소총 등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을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동학군은 선봉이 섬멸되자 잠시 공격을 중지했다가 다시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이러자 대포와 연발총과 소총이 다시 불을 뿜었고 동학군은  쓰러졌다. 잠시 뒤에 동학군이 다시 돌격하기를 무려 50여 차례. 계곡은 온통 하얀 옷과 붉은 피로 덮였고, 적진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전봉준은 마침내 전투를 멈추고 후퇴했다. 휘하의 군사를 점검해보니 두 차례 접전 후 1만 명 중 3000명만 남았고, 다시 접전 후에는 500명에 불과했다. 완전 참패였다. 전봉준은 남은 동학군을 데리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마치 해충을 박멸하듯 동학군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여 버리기 위해 집요하게 추격했다. 전봉준은 퇴각하며 기회다 싶으면 돌아서서 싸우고 또 싸웠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그는 순창군 피노리에 숨어 있다가 12월 2일 밤에 동료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이미 체포된 김개남은 전주에서 즉시 처형되었고, 전봉준 일행은 일본군 제19대대가 주둔하는 담양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나주로 옮겨졌다. 당시 나주는 호남농민군 토벌의 총본부가 있었고 초토사는 나주목사 민종렬이었다. 나주의 일본 순사청 감옥에 갇혔던 전봉준은 1895년 1월에 손화중 · 최경선·김덕명 등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1월 24일에 일본영사관 순사청 감옥에 갇혔다.전봉준과 성두한·손화중·김덕명·최경선 등은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법무아문 권설재판소로 넘겨졌다. 심문은 6차례 이루어졌다. 1895년 3월 29일(양력 4월 23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사형이었다. 그리고 이날 전봉준 등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전봉준(1855~1895)은 죽기 전에 다음 시를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가니 영웅도 어찌하지 못하는구나.백성 사랑하는 정의(正義) , 나 실수 없었어요,나라를 위한 단심(丹心) 그 누가 알아주리.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運去英雄不自謀  운거영웅부자모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爲國丹心誰有知  위국단심수유지(이이화, 전봉준 혁명의 기록, 생각정원, 2014,  신순철· 이진영 지음,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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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2
  • 정년퇴직 앞둔 경찰 간부, 낙도 주민 생명 구해
    <김원익 경감> 신안군 압해읍 고이도에서 최근 정년퇴직을 3개월 앞둔 목포경찰서 압해파출소 센터장 김원익 경감이 심폐소생술로 의식불명이 된 마을주민을 구조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주민들에 따르면 밭에서 일하는 남편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아내가 동네 주민들에게 연락을 하자, 마을 주민들이 119구급대에 연락하고 서둘러 환자를 차량에 싣고 고이도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김 경감도 연락을 받고 즉시 선착장으로 출동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 주위로 마을 이장 등 주민 7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당황해 했다.  김 경감은 눈에 초점이 없고 맥박이 아주 약하게 뛰는 환자의 모습을 보고 긴박한 상황으로 판단되어 바로 심폐소생술을 했다. 얼마 후 전혀 의식이 없던 환자는 호흡이 돌아오고 주변 사람을 알아보는 등 의식을 되찾았다. 환자는 119구급대를 통해 목포의 한 병원으로 후송되어 입원 치료 중이다.환자 부인은 "담당 의사 선생님이 조금만 늦었어도 생명을 잃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며 "센타장님 덕분에 남편 목숨을 살렸다'며 고마워 했다.김원익 경감은 "경찰관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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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4
  • 김연수·오정숙에서 이어지는 동초제 바디
    봄기운이 완연한 3월 동초제 춘향가 보유자 방성춘 명인을 만났다. 방 명인은 사단법인 동초제 판소리진흥회 이사장으로, 방성춘 판소리 전수관을 운영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제 16호(2000년 5월 16일) 동초제 춘향가 보유자이기도 하다. 편집자 注▲여러 관련 자료와 발표회 리플렛, 13회째 이어져오고 있는 서봉 전국국악경연대회를 면밀히 살펴보고 민간단체를 이끌어 오면서도 내실있고 참신한 활동에 깜짝 놀랐습니다. - 동초제소리는 쉽게 득음이 안 되고 어렵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다른 소리와 달리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라고나 할까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런 큰 울림의 소리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득음(得音)과정이 상당히 힘들고 어렵다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 국악계에서 득음에 도달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득음이란 선천적으로 목구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고 수많은 세월 속에서 하염없는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과 훈련과정을 거쳐야만 겨우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지금까지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1960년 13살에 어머니(제애돌)의 권유로 박채선 선생을 무작정 찾아가 ‘춘향가’를 배우면서 판소리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로부터 5년 후인 1965년에 공대일(孔大一)선생에게 ‘흥보가’, 1970년 무렵에 정광수(丁珖秀)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익혔습니다. 1975년도로 기억됩니다만 동초 김연수 선생의 이수자로 동초제 소리를 이어 받고 있는 오정숙(吳貞淑) 선생께서 광주시 동구 불로동 소재 학생회관에서 공연을 하신다는 걸 알고 처음 동초제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 공연이 제 인생을 갈라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소리 공부를 했듯이 무언가 홀린 듯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오정숙(吳貞淑) 선생과 동고동락하면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를 전수받았지요. 이후 동초제 소리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를 국립 서울중앙극장에서 완창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소리를 배운지 21년인 1981년에 마침내 전주대사습에서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차지해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저의 소리를 인정받기에 이르렀지요. 이후 전남대, 광주예고 전주예고 등에 출강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전남도립국악단 창악부 수석 단원으로도 운신(運身)의 폭을 넓혀 17년간이나 활동을 이어갔으니 이 지역의 산물인 동초제로 국악 진흥에 정성껏 봉사했다고 자부합니다. 특히 동초제 공연은 1997년 제17회 대한민국 국악제 초청 공연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마다 보폭을 넓혀갔습니다.1998년 전남 낙안 남도음식문화축제 국내·해외 75회 공연과 1999년 해상왕 장보고 세종문화회관 2회, 국내·해외 87회 공연, 2000년 경주 해외문화엑스포 국내·해외 52회 공연을 가졌습니다.특히 2000년을 잊지 못하는 건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는 것이지요.이렇게 제가 부르는 춘향가는 김연수(金演洙) 선생에서 오정숙 선생으로 이어지는 바디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마 제가 처음으로 한 국제 공연이 프랑스 파리 2001년 제 130차 BIE 정기 총회 공연과 독일 파견 노동자 위문 공연일겁니다. 특히 독일 파견 근로자와 간호사 위문 공연 야외 가설극장식 공연무대에서 판소리가 끝나자 관객 중 파견 근로자 1명이 일어나 갑자기 만세 삼창을 하는 겁니다. 깜짝 놀라 당시 전남도청 인솔과장이 다가가 그 사연을 묻자 독일에 체류하면서 노래를 불러보라는 현지인들의 요구에 독일에서 배운 노래만 반복해 불렀는데 그때마다 독일인 동료가 하는 말이 ‘너희 나라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으나 한 소절도 제대로 못 불러 항상 불만이었다는 게지요. 그러다가 이렇게 훌륭한 판소리 무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벅찬 감격으로 만세 삼창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구만요. 우리 소리가 이렇게도 감동을 주고 한편으로는 아주 훌륭한 것이라는 걸 대변하는 것이지요. 해외공연도 공연이지만 동년 2001년 국내 공연 활동도 결코 게을리 하지 않고 무려 80회가 넘게 공연을 펼쳤습니다.이어 2002년 문화제 합동 공연 국내 해외 78회 공연, 2003년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수궁가 완창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판소리선정 축하무대 및 국내 해외 101회 공연을 쉼 없이 가졌지요. 그러던 중 2004년 에는 전라남도 도립국악원 창악부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항상 공연은 숙명적으로 따라왔어요.특히 2007년 9월 문화예술회관에서 5시간 동안의 적벽가 완창은 문화계 전반에 동초제 소리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지요. 이를 계기로 동초에서 오정숙 선생의 바디로 직접 나서서 동초제를 보급시켜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자발적으로 생기는 단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그 해 2007년도 이후 지금까지 13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동초제 서봉 판소리 국악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으며 지난해도 코로나-19로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온텍트시대에 맞춰 포스트 코로나로 어김없이 13회 동초제 전국국악경연대회를 무사히 끝마쳤던 기억도 새롭습니다.▲동초제의 ‘김연수(金演洙) 선생에서 오정숙 선생으로 이어지는 바디’라고 하셨는데 명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나의 목구성에 대해 전문가들의 평가를 보면 ‘여자지만 중앙성이 좋고, 수리성에 굵은 목구성을 지녔다’고 말하고요, 특히 춘향가 가운데 ‘이도령이 춘향집 찾아가는 대목’의 잉애걸이나 완자걸이, ‘사랑가’나 ‘옥중가’의 비성(鼻聲)과 ‘이별가’의 타루치는 목 등은 탁월하게도 자주 구사하는 붙임새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을 탁월하게도 잘 응용하고 각 단 또는 마디마다 조화롭게 소리를 잘 구사한다고들 말합니다.▲한마디로 ‘대단한 소리꾼’이라는 말씀이겠지요. 그러면 김연수 소리와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판소리가 있을까요?- 가장 쉽게 구분되는 소리는 아름다운 소리로 일컬어지는 임방울(林芳蔚) 선생의 소리이지요. 단가 ‘호남가’와 ‘춘향가’ 중 ‘쑥대머리’는 임방울 선생의 대표적인 소리로 알려져 있답니다. 임방울 선생은 국창(國唱)답게 선생이 태어난 이곳 광주에서 전국대회로 매년 개최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비교한다면 그렇지만요, 아까 맹키로 말하자면 동초 김연 수선생께서는 동편제와 서편제를 다아우르고 융합시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판소리라고 정의해 ‘우리나라에서는 역시 동초제 소리로구나’ 하면서 아주 중요한 판소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각별히 신경 써줬으면 좋겠습니다.거듭 한 가지만 더 강조해 말씀드리자면 동초제 판소리는 가사전달이 시대에 맞게 직역(直譯)되어 전달되는 반면 여타의 판소리는 문어체식의 표현을 구어체로 말하듯 뜻과 의미전달이 애매한 부분이 있다는 게 감히 비교우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국악 애호인들에 한말씀 하신다면.- 일제강점기에 농악(農樂)이라고 천시받던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음악이 이렇게 머물러서는 결코 안 되지요. 우리나라 대중음악만 봐도 세계로 뻗어가는 방탄소년단이 지구촌을 제패하면서 이젠 K-POP이 전 세계적으로 대세이잖는가요? 거기에 우리 지역에서는 G-POP이 매년 꾸준하게 경연을 통해 이 지역의 스타를 양성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랄만한 사건인가요? 정작 우리 것의 소중함이 더 각인되도록 K-POP, G-POP과 함께 잘 버무러진 다양한 퓨전국악이 나왔으면 합니다. 김연수 창시 ‘동편제’… 가사와 문학성 중시동초제는 국창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가 창시한 판소리 유파이다. 1930년대 초 여러 명창들의 소리 중 좋은 부분만 골라 도입해 자신이 소화해 내여 만들어 낸 김연수는 소위 ‘창극 판소리’라는 창법으로 판소리계에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동초제는 가사와 문학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설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너름새(동작)가 정교하고 부침새(장단)가 다양하다. 또한 경상도 동편제(東便制)의 우람함과 전라도 서편제(西便制)의 아련함이 융합된 동초제는 호남의 소리로 재편(再編)되어 맺고 끊음이 분명한 특징이 있다. 동초 김연수는 생전에 늘상 동편제를 아버지 소리로, 서편제를 어머니 소리로 표현하면서 “이 두 소리의 장점만을 취합해 아우르는 소리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소리가 동초제”라고 말했다.특히 김연수는 심청가와 춘향가에서 각 과정이 튼실해야 하면서 사설과 언어구사, 표현방법 등을 현대에 맞춰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일반인 시선에서 바라봤고 항상 뿌리가 튼튼한 나무가 가지가 많듯이 판소리에서도 뿌리의식을 자주 강조했다.동초제 판소리 춘향가는 정정렬제(丁貞烈制) 판소리 춘향가를 토대로 한다. 그러나 정정렬제 춘향가는 ‘적성가’ ‘산세타령’ 같은 이름난 옛 명창들의 더늠 대신 새로 짠 소리를 포함시켰다는 흠이 있다. 그래서 김연수는 옛 명창들의 더늠을 살리고 신재효(申在孝)의 사설을 참고하여 동초제 춘향가를 새로 짰다. 이것은 동초 김연수에서 오정숙을 거쳐 현재 동초제 춘향가의 기능보유자인 방성춘에게 전수되었다. 동초제 춘향가는 크게 백년가약에서 이별로, 이별과정에서 수난과정, 수난과정에서 재상봉 장면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다른 춘향가와 달리 처음부터 ‘기산영수’ 대신 정정렬제 더늠인 ‘꿈 가운데 어떤 선녀’로 시작하고, 정정렬제에는 없는 ‘기산영수(箕山潁水) ‘ ‘신세타령’ 등 옛 명창들의 더늠을 넣어 더 풍부하고 일반인으로 하여금 쉬운 이해를 도왔다. 여기에 일반인들의 삶이 재조명되는 과정 등으로 공연 시간이 8시간이 넘어가는 대작(大作) 춘향가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또 춘향가에서 춘향이는 관기인 어머니 월매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사대부의 처첩으로 그리면서도 춘향이가 이미 사서오경에 달통한 한집안의 규수 이상의 문장가로 표현했으며 이몽룡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꿈속의 태몽에서 용을 상징하는 풀이로 소리를 들으면 이미 그림같이 그려지는 이미지화법으로 더 감칠맛을 더했다는 특징이 있다.◆ 서봉 방성춘 명인 약력 1947년 광주 광산구 비아동 출생1960년 박채선 선생 사사1965년 공대일 선생을 사사 (흥보가)1970년 정광수 사사(흥보가, 수궁가)1975년 오정숙 선생으로부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전수1976년 이후동초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완창 발표회(국립 서울중앙극장)1981년전주대사습 판소리 명창부 장원대통령상 수상1982년 이후전남대, 광주예고, 전주예고 등 출강1983년 이후전남도립국악단 창악부 수석 단원 17년간 활동2020년제13회 동초제 서봉 판소리 국악대회 개최    
    • 기획.연재
    2021-03-31
  • 망국의 원인 규명 앞서 역사적 사실 인식부터
    # 연재를 시작하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단재 신채호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망할 수 없다.”- 박은식 ‘한국통사(韓國痛史)’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4블록 입구 ‘대한제국 망국사(大韓帝國 亡國史)’를 연재한다. 자주·독립국을 대내외에 천명한 대한제국은 1897년(고종 34년) 10월 12일에 탄생하였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고종, 순종 2대 황제가 통치하다가 12년 10개월 만인 1910년 8월 29일에 망했다.  왜 대한제국이 망했나?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기번은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을 내부에서 찾았다. 2012년에 발간된 ‘로마 멸망사’의 저자인 영국의 역사학자 골즈워디는 로마 멸망의 원인을 내부 요소는 물론 외부 요소들도 살폈다.  이처럼 대한제국 망국(亡國)의 원인도 내부와 외부 요인 등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망국의 원인 규명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역사적 사실(팩트)’을 제대로 아는 일이다. 진실보다는 흥미에 치중하는 역사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 그리고 소설은 종종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킨다. 이 연재는 조선왕조실록(고종·순종실록)과 국사편찬위원회의 각종 사료, 황현의 ‘매천야록’,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 등과 한국 근대사 관련 저서들을 참고하여 ‘역사적 사실’ 전달에 충실할 것이다.   공자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뒤돌아보라(告諸往 而知來者 : 논어 학이편)”고 한 말을 되새기면서 연재를 시작한다.   # 대한제국 탄생 전야   고종은 1863년부터 조선을 통치했는데 가장 큰 격변은 1894년 동학 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었다. 1895년 10월 8일에 민왕후(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자 고종은 사실상 감금 상태였다. 이러자 이범진 등 친러파는 웨베르 러시아 공사의 도움을 받아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을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1896년 4월 7일에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7월 2일에는 독립문 건립을 위해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자주독립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자 환궁에 대한 요구도 거셌다.  1897년 2월 20일에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각국 대사관이 몰려 있는 정동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경운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이곳에 거처했다. 경복궁, 창덕궁 등이 불탔기 때문이다.   그러면 격변의 1894년부터 살펴보자. 1894년엔 두 가지 큰 사건, 동학 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1864년에 동학교주 최제우가 처형된 이후, 2대 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삼남·경기지방에서 동학 교세가 확장되었다. 1893년 3월에 동학교도 2만 7000 명은 보은에서 모여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당황한 조정은 3월 25일에 어윤중을 양호 선무사로 삼아 내려보냈다. 이날 고종은 어전회의를 열어 청나라 군대 파병을 거론하였으나 대신들은 반대했다. 그런데 어윤중이 동학교도들을 설득하자 뜻밖에도 동학교도들은 4월 3일에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강경파들은 전라도 금구에서 반봉건 · 반외세 집회를 별도로 열었다. 1894년 음력 1월 10일 밤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노하여 전봉준(1854~1895)이 주도한 농민들이 봉기했다. 11일 새벽에 고부 관아를 점령했는데 조병갑은 도망하고 없었다.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는 사태수습은커녕 주모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잠시 피신한 전봉준은 음력 3월 20일에 무장에서 봉기하여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고 3월 25일에 백산에서 8000 명이 모여 ‘보국안민’을 기치(旗幟)로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를 창설한 후에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여세를 몰아 음력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러자 고종은 동비(東匪)를 빨리 토벌하지 못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극도로 불안했다. 더구나 민왕후는 초토사 홍계훈이 급히 보낸 동학군의 편지를 보고 대원군이 동학군을 배후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학군의 편지엔 “국태공(대원군)에게 올립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윽고 민왕후가 병조판서 민영준(나중에 민영휘로 개명)을 불러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라고 하였다. 민영준은 난색을 표했다. 당시 조정은 동학농민군의 개혁안을 적극 검토하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민영준은 천진조약에 따라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면 일본군도 들어올 것이므로 형세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고종실록 1896년 9월 27일의 민영준의 해명 상소)  민왕후는 홍계훈이 보낸 동학군의 편지를 내보이면서 크게 꾸짖었다. “못난 놈! 내 차라리 왜놈의 포로가 될지언정 다시는 임오년의 일은 당하지 않겠다. 여러 말 하지 말라!”이러자 민영준은 음력 4월 29일에 원세개를 만나 파병을 요청했고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급히 전보를 띄워 알렸다. 이에 이홍장은 청군 파병을 허락했다. 여기서 조정이 원세개에게 청군 파병을 요청한 글을 읽어보자. “본국 전라도 관할 태인, 고부 등은 백성이 흉하고 사나워 본래부터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요즘 동학에 붙은 동비(東匪) 1만여 명이 무리 지어 공격하여 10여 군데 고을을 빼앗고 전주성을 함락했습니다. 조정은 군대를 보내 진정시키려 했지만 동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여 우리 군대를 격파시켰습니다. 이처럼 흉측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을 피우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다시 서울로 북상하도록 놓아둔다면 그 피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군대는 신생 조직이고 숫자도 적고 전투를 안 해본 군인이어서 그들을 섬멸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흉악한 무리들을 오랫동안 놓아둔다면 중국에까지 우려를 끼치는 바가 많아질 것입니다.  지난 임오년(1882년)과 갑신년(1884년) 두 차례의 내란 때도 모두 청군에 의지해서 진정시킬 수 있었듯이, 이번에도 귀 총리(원세개)에게 원군을 간청하오니 속히 북양대신에게 전보를 쳐서 군대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속히 와서 우리 군대 대신 소탕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현 지음 ·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상), P 340-342)아니, 이럴 수가? 박은식은 ‘한국통사’ ‘제2편 27장  청군을 요청한 전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임금과 왕비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 군대를 불러서 자기 백성을 진압하려 했으니 이게 제정신인가?” 한편 고종의 요청에 의해 청군 3000명이 6월 8일(음력 5월 5일)에 아산에 도착했다. 일본군 8000명도 6월 9일에 1885년에 청·일간에 맺은 천진조약에 따라 인천에 들어왔다.이러자 6월 11일(음력 5월 8일)에 외세 개입을 우려한 전봉준은 전주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화약(和約)후 자진 해산했다. 사태가 진정되자 고종은 청·일 양군의 동시 철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고 7월 23일 (음력 6월 21일)에 경복궁을 점령했다.  7월 25일에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아산만 앞바다 풍도에서 청나라의 함정을 기습 공격하여 청군 1100여명을 익사시켰다.일본군은 7월 30일에 아산·공주·성환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동안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에서 청나라에 패배한 이후 군비 확충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1883년부터 1893년까지 10년간 군함 55척을 보유하여 청나라 해군력과 필적하였고, 육군은 병력증강과 신무기로 무장하였다. 8월 1일에 메이지 천황은 청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다.전쟁의 명분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며 내정에 간섭하고 있는 청과 싸워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의(底意)는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함이었다.  한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과 청의 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뉴욕 타임즈의 청일전쟁 기사이다.  “이 전쟁은 흔히 동양과 서양문명 사이의 충돌이라고 불리지만, 문명과 야만 사이의 싸움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것 같다.”  뉴욕 트리뷴도 이렇게 썼다. “지금의 전쟁은 한국이 앞으로 독립국으로 존재할지 아닐지를 포함해 많은 것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과는 한국이 일본과 함께 문명으로 가는 큰길로 행진해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중국과 함께 반(半)미개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든가 둘 중 하나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제임스 블래들리 지음·송정애 옮김, 임페리얼 크루즈, 프리뷰, 2010, p 206-207)
    • 기획.연재
    2021-03-28
  • 1905년 궁전광장…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
    고독한 자아(自我),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그림 앞에서 렘브란트(1606~1669)의 생애를 되씹어 본다. 그의 인생은 1642년에 아내 사스키아와 사별한 후부터 꼬였다. 그는 9개월 된 아들 티투스를 양육하기 위해 농부의 아내였던 과부 헤이처 드릭스를 유모 겸 가정부로 고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렘브란트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그런데 1647년에 헨드리케 스토헬스가 티투스의 가정교사로 들어오면서 헤이처와의 관계는 끝났다. 1649년에 헤이처는 결혼 약속 위반으로 렘브란트에게 소송을 걸었고 법원은 렘브란트에게 매년 2000 길더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러자 렘브란트도 헤이처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녀를 정신병자 수감원으로 보냈다. 한편 헨드리케는 1654년에 딸을 낳았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의 유언 때문에 헨드리케와 결혼할 수 없었다. 사스키아는 그가 재혼하면 4만 길더나 되는 유산을 행사할 수 없도록 유언장에 적었다. 당시 렘브란트는 수입에 비해 지출이 너무 많아 사스키아의 유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654년 6월에 헨드리케는 개혁교회 평의회에 나가 매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도덕적으로 엄격한 칼뱅주의자들은 렘브란트와 헨드리케의 동거를 극히 불온한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주요 고객들을 잃었고 더욱 곤궁해졌다. 이즈음 렘브란트는 헨드리케를 모델로 하여 그림 세 점을 그렸다. 첫째는 ‘플로라 옷차림의 헨드리케’이다. 렘브란트는 ‘플로라 옷차림의 사스키아(1634년)’도 그린 바 있다. 둘째는 ‘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인’이다. 영국 런던 네셔날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한 여인이 속옷의 말단을 걷어 올리고 냇가로 걸어들어간다. 엷은 미소는 장차 있을 목욕의 즐거움 때문이다. 셋째는 ‘다윗왕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이다. 목욕하고 있는 밧세바는 다윗의 편지를 받고 당혹한 표정이다. 그녀는 이미 우리아 장군과 결혼한 몸이었다. 그림은 향후 진행될 후반부를 예고하고 있다. 소위 ‘탈맥락화’이다. 나중에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전사하게 만들고, 밧세바는 솔로몬을 낳는다. 한편 1656년에 렘브란트는 파산 선고를 당했고 1658년에는 저택이 헐값에 경매되자 빈민가로 이사했다. 1663년에 사랑하는 여인 헨드리케가 죽었다. 헌신적인 여인 헨트리케를 잃은 렘브란트는 좌절했다. 1664년에 그는 ‘루크레티아의 자살’을 그렸다. 로마의 정숙한 부인 루크레티아는 그녀를 탐낸 귀족의 모함에 빠져 몸을 망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루크레티아는 헨드리케의 모습이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추모한 것이다. (로베르타 다다 지음·이종인 옮김, 렘브란트, 예경, 2008) 1666년에도 그는 ‘루크레티아의 자살’을 그렸는데 단도로 자신을 찌른 후의 모습이다. 흰 옷에 피가 배어있다. 1667년에 렘브란트는 유대인 신부(이사악과 리브가)를 그렸다. 이 그림도 아들 부부를 모델로 한 것이다. 1668년 2월에 외아들 티투스는 사스키아의 조카인 막달레나 반 로(Loo)와 결혼했다. 결혼 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그해 9월 티투스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는 좌절했다. 1669년 3월 렘브란트는 손녀딸의 세례식에 참석했다. 이 불행한 아이는 곧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겪었다. ‘자화상’이란 용어도 없던 시대에 렘브란트는 유화 40여점, 동판화 3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말년의 렘브란트 자화상을 보면 렘브란트의 궁핍과 초라함을 금방 알 수 있다. 빈민가에서의 생활, 그리고 식사는 빵과 치즈, 절인 청어가 전부였다. 1669년 10월 4일에 렘브란트는 63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젤에는 ‘아기 그리스도를 안은 시몬’이 미완성인 채로 걸려 있었다. 유족이라곤 15세의 딸과 1살도 채 안된 손녀뿐이었다. 10월 8일에 ‘고독한 자아(自我)’ 렘브란트는 조문객 없이 암스테르담의 서쪽 베스테르케르크 묘지에 쓸쓸히 묻혔다.이제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나온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별관에 있는 인상파·입체파의 그림들을 못 본 점이다. 르누아르·고호·고갱·피카소·마티스의 그림들 말이다. 궁전광장 궁전광장으로 나왔다. 궁전광장 중앙에는 높이 47.5m, 직경 4m, 무게 600t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기둥이 있다. 이 기둥이 바로 ‘알렉산드르 원주 기둥’인데 러시아가 1812년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34년에 세워졌다. 기둥 꼭대기에는 알렉산드르 1세 (재위 1801~1825)의 얼굴을 한 천사가 십자가를 붙잡고 뱀을 누르고 서 있다. 천사는 알렉산드르 1세이고 뱀은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것이리라.그런데 궁전광장은 러시아 역사 현장이다.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 그리고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아침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조용히 길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할 생각으로 궁전을 향했다. 행렬의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가폰(1870~1906)이 있었다.1903년 봄에 가폰은 ‘공장 노동자 클럽’을 만들었다. 모임의 주된 내용은 친교와 명사 강연이었다. 클럽은 활기를 띠어 1904년 가을에는 회원수가 9000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904년 12월 말에 1만2000명의 노동자를 가진 최대 금속기계 회사인 푸틸로프 공장에서 가폰의 클럽 회원 4명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노동자들은 연일 집회를 열어 해고자 복직을 요구했고 1905년 1월에는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확대되어 450여 공장의 근로자 11만명이 동조파업을 했다. 이럼에도 사업주들은 완강했고 노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1월 22일에 가폰은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나섰다. 청원서에는 해고자 복직 요구를 사업주가 거절했다는 내용과 함께 8시간 노동제, 노동권 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오후 2시에 궁전광장에는 20만 명이 넘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였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갑자기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1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죽었고 4000명 이상이 부상 당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잔혹한 학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노동자들이 항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1월 한 달 동안 동맹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44만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지난 10년 동안에 파업 참가자수 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국민들은 차르는 노동자 편이 아니며 지주 및 자본가들과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르는 물러가라. 공화국 만세.”이런 구호는 전국 도처에 퍼졌으며 집회와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당시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만주로 진입하여 1904년 9월에는 랴오양을 점령하였고 여순도 위협했다.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은 발틱 함대였다. 10월 15일에 니콜라이 2세는 발틱 함대를 라트비아 리예파야 항구에서 출발시켰다. 하지만 발틱 함대는 1902년에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220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해 대한해협에 도착했다. 전투준비를 끝낸 일본해군은 1905년 5월 27일에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무참하게 궤멸시켰다. 9월 5일에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중재아래 러·일간에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일본은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했고 1910년 8월29일에 조선을 강제 병탄했다. 한편 1917년 10월 25일 네바강에서 정박 중인 순양함 오로라 호에서 한 발의 공포탄이 울렸다. 이를 신호탄으로 공산혁명 지도자 레닌(1870~1924)은 겨울궁전을 습격하여 임시정부 카렌스키를 몰아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정권이 탄생한 순간이었다./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 기획.연재
    2021-03-08
  • “호기심과 질문이 가득찬 교실로 변화 중”
    지난 2019년 교육감에 취임, 3년째를 맞고 있는 장석웅 전남도교육감이 학교운영과 현장교실 수업운영 궤도 수정 등 코로나 펜데믹 현상에 잘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 수 감소로 인한 학교 통폐합과 폐교 등으로 교육환경이 갈수록 어려운 환경에서  선제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장석웅 전남도교육감에게 전남교육의 현장을 들었다.                                             -편집자 주 ▲전남교육청의 주요 성과를 꼽는다면? 코로나 19로 인해 지난해 1학기 등교수업 인원이 제한된 상황속에서도 작은 학교가 많은 전남은 수도권에 비해 등교일수가 4~5배 가량 많았다.효과적인 방역과 선제적이고 창의적인 정책을 추진, 농산물 꾸러미사업 추진을 통해 학생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농가를 위한 농산물꾸러미 배송사업 추진과 정부의 2차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에서 제외된 고등학생과 학교밖 청소년에게 비대면 학습지원금을 1인당 15만원씩 지급했다.전남교실ON 닷컴 등 원격수업대비 수업플랫폼을 전남교사들이 독자적으로 개발, 온라인 교육을 통해 전국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또한 코로나19 극복 국가우수사례로 선정되어 기획재정부에서 편찬한 코로나19 극복 경험편에 실리는 등 전남교육청의 역량과 능력을 전 세계에 알리는 쾌거를 거뒀다. 교실내 무선망 구축으로 원격수업기기 보급과 함께 통신비 지원과 취약계층 학생들에게 PC 150대 무상제공과 함께 6500 세대에 인터넷통신비를 지원하고 있다.작은 학교 살리기를 통한 농어촌지역 정주여건 개선으로, 농산어촌 유학프로그램과 미래형 통합학교를 운영하고 있다.이에 따라 서울의 초·중학생 82명이 전남의 소규모 학교로 전학해 6개월 이상 생활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에 신청해왔다. 소규모학교를 폐교하는 것보다는 초·중 또는 중·고를 통합해 정부가 구상하는 ‘그린 스마트 스쿨’과 연계해 공간을 혁신하고 학교를 생태적으로 재구성, 지속가능한 미래학교로 육성하고 있다.또 전국 최초로 기초학력 전담교사제 도입을 통한 학습안전망을 구축하고, 기초학력이 부족한 초등 1,2학년을 조기에 발견해 1대1 맞춤형 지원을 하고 있다. 정부계획보다 2년 앞선 무상교육 실시와 친환경 무상급식과 안전한 먹거리제공 등 ‘한아이도 포기하지 않은 교육복지’를 실현하고 있다.1987년 개관 이후 시설이 노후화하고 규모가 협소해 도서관 기능 수행에 한계를 노출, 이설 필요성이 지역민을 중심으로 제기되어 오던 영암공공 도서관이 영암읍 회문리 일원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6600㎡ 부지에 연면적 3900㎡, 570석 규모로 모두 170억(국비 50억, 도교육청예산 70억, 군비 50억) 사업비를 투자해 공공도서관을 신축, 오는 2024년 3월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영암공공도서관은 지역민의 의견을 수렴, 1층에 어린이·배려계층 전용시설, 2층은 청소년·성인 시설, 3층에는 교육·문화·커뮤니티 시설로 구성해 지역민과 소통하는 지역공동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취임 3년이 다가온다. 그동안 학교 현장은 어떻게 달라졌는가취임 후 학생의 올곧은 성장과 올바른 인성함양, 스스로의 변화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수업과 교육행정의 혁신을 통해 미래의 인재로 키우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상초유의 온라인 개학이란 큰 위기를 맞았고 대면수업과 비대면 수업을 오가는 혼란스러운 학교 현장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등 혼란 스러운 상황이지만 교육가족 모두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가면서 전남교육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동안 학교현장은 권위주의와 보신주의가 팽배하던 조직문화가 민주적 조직으로 바뀌었고 학생과 교실이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취임하면서 도민과 교육가족에게 약속했던 ‘학교다운 학교. 교육다운 교육’이 어느 정도 실현되어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한지 2년째 접어들었다. 각급 학교는 등교방식과 학교수업 방식이 바뀌면서 비대면 수업과 대면 수업을 오가며 현장수업은 혼란스럽기만 하고, 지속적인 변이바이러스가 발생하는 등 여전히 진행형 이다.  이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은 무엇인가?코로나19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일상이 탄생했다. 그중에서도 교육 분야의 변화는 더욱 빠르고 강력하다. 미래가 서둘러 와버렸다. 미래가 지구를 급습했다고 하는데 이는 교육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코로나 19가 끝나면 학교에서 교실 수업하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은 빚나갔다. 지금까지 200년 이상 지탱해온 근대학교의 유효기간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집단적 효율성이 강조된 교실공유 교육시대는 가고 개인의 개성과 욕구가 특화된 인공지능, 원격교육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당연히 기존 교육의 패러다임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교육과정은 물론이고 수업과 평가 교육행정 등 모든 면에서 온라인 환경에 맞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우리 전남교육청은 코로나19 국면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교육을 준비하고 실천했다. 그동안 온라인 개학과 원격수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며 특히 전남교사들이 만든 원격학습 플렛폼인 ‘전남교실ON.com’ 은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다. 더불어‘포스트코로나 시대’ 교육 대전환을 위해 도교육청에 포스트코로나 전담팀을 구성, 5개 정책과제에  대한 연구와 관련 TF를 꾸려 전남미래교육 종합발전계획을 마련했다. ▲학교와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교직원 및 일반직, 공무직 등의 감소요인도 지속적으로 발생함에 따라 향후 학교운영 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전남의 학생수는 지난 1978년 93만명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현재는 19만명 수준이며, 1982년 이후 통.폐합 정책으로 인해 농어촌 학교 828개가 사라졌다.지속적인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로 전남 학교의 생존이 크게 위협받고 있으며 소규모학교가 꾸준히 늘어 도내 전체 초·중·고교 877교 가운데  43.3%인 380개 교가 학생 수 60명이 채 안된다. 향후 5~6년 뒤에는 절반이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 이는 필연적으로 교직원 감소를 부르고 학교운영에 있어서도 변화가 불기피하다.전남교육청은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소규모 학교의 교육력을 강화하기 위해 학교 급이 다른 2개 학교를 통합해 인적·물적 자원을 공유·활용하는 ‘전남형 통합학교’를 운영하고 있다.이른바 초중, 중고 통합운영 학교인데 현재는 전남도내 12개 학교가 운영중이며 향후 소규모 학교  증가 추세를 감안하면 이를 더 확대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전국최초로 시군 교육지원청에 학교지원센터를 구축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학교지원센터의 역할이 교사의 행정업무 경감 외 학교폭력 등 현장에서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처가 요구되고 있는데 향후 계획은?그동안 일선교육청은 ‘지원보다는 관리의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실질적으로 학교행정업무를 지원하고 경감시켜 교사들이 학생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운영 중심의 학교를 만드는데 있다.22개 시·군 교육지원청에 구축 운영하고 있는 학교지원센터는 일선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폭력예방 및 이에 따른 사안처리, 기간제교사채용 등 19가지 이상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학교업무가 특정시기에 집중되어 있어 학교수가 많은 일부 시단위 지역은 지원업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이에 학교지원센터에서는 협의를 거쳐 제한 또는 단서 없이 즉시 지원하고 있으며 연차적으로 확대하는 학교업무표준안을 마련했다. 학교와 협업체계를 만들어나가면서 현장에서의 다양하고 심화된 요청에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강화해나가고 있다.그러나 교사가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는 여전히 많고 실질적인 업무경감을 체감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겠지만 현장에서는 이미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학교폭력 예방강화와 함께 크고 작은 학교폭력에 있어 일선학교에서 대응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학교폭력 발생은 여전히 심각한 후유증과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근본대책은 무엇인가?   먼저 학교 폭력사건은 일어나서도 안 되고 있어서도 결코 안 되는 일이다. 전남교육청은 학교폭력의 유형을 살펴 재발방지는 물론 다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학교폭력의 양상도 시대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요즘은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모바일과 온라인으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의 학교폭력이 일회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었다면 지금은 지속적이고 상습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다니기 때문에 사이버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점점 어려지는 추세이다.학교폭력은 처벌이나 사후처리로는 해결할 수 없다. 학생 혼자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학생 스스로의 노력과 함께 주변인들 특히 가정과 학교에서의 협력이 적극적으로 더해져야 환경이 바뀌고 사전예방이 가능하다.  가정에서의 지속적인 격려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자녀는 외부의 공격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자존감을 지니기 마련이다. 동시에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집중적인 상담과 괴롭힘을 방지하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또 아이들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고 분노 조절 등 감정조절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결국 학교폭력 예방은 친구 또는 교우 들 간의 우정, 스승과 제자와의 신뢰, 가족 간의 사랑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 ▲민선3기 전남교육의 핵심가치인 ‘민주’‘혁신’‘미래’ 라는 3대 가치 실현을 위한 정책은 무엇인가?주민직선 3기 전남 교육은 ‘민주주의’‘혁신’‘미래’라는 3대 가치를 바탕으로 ‘모두가 소중한 혁신전남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삶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원리이며 혁신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에서 시작해 교육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건설적 노력이다.전남 교육은 이를 바탕으로 미래사회를 함께 여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데 교육적 책무를 다할 것이다.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학생이고 우리아이들의 미래가 교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교실이 변해야 우리아이들이 미래사회의 인재로 커갈 수 있다. 살아 숨 쉬는 교실에서 이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다.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호기심과 질문이 가득 찬 교실, 배움과 성장이 일어나는 교실, 협력하며 스스로 배워가는 교실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 기획.연재
    2021-03-04
  • 회개와 용서를 그린 렘브란트 불후의 명작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가 1634년에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림은 알렉산드르 1세가 1814년에 구입한 나폴레옹 황제의 부인 조세핀의 컬렉션 중 하나이다. 그림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비추고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다. 오른편에 있는 성모 마리아는 실신 상태로 두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다. 1632년에 렘브란트는 네델란드 총독 오라네 공 프레데릭 헨드릭으로부터 헤이그 궁 개인 예배당에 걸릴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오라네 공은 프랑드르 미술 특히 루벤스에게 심취하였는데 렘브란트는 1633년에 안트베르펜 성당에 걸린 루벤스의 그림(1612년 작)을 참조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다.따라서 미술평론가 화이트는 이 그림을 ‘렘브란트가 루벤스에게 보내는 경의(敬意)’라고 비평했다. (화이트 저, 영혼을 비추는 빛의 화가 렘브란트, p 64)  하지만 렘브란트 그림은 루벤스의 그림과 사뭇 다르다. 루벤스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는 이탈리아 전통에 따라 인체 비례에 맞는 근육질인데 비하여 렘브란트가 그린 그리스도는 축 늘어져 있다. 또한 루벤스의 성모 마리아는 의연하게 그리스도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 반면에 렘브란트의 성모 마리아는 아예 실신하여 땅에 누운 상태이다.한편 오라네 공은 렘브란트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 흡족하여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를 추가로 주문했다. 이에 렘브란트는 1636년에 그림을 완성했다. 이후 렘브란트는 1646년까지 오라네 공을 위해 그리스도 수난 관련 연작 5점을 더 그렸다. ‘그리스도 승천(1636년)’ ‘그리스도의 매장(1639년)’ ‘그리스도의 부활(1639년)’ ‘목동들의 찬양’ ‘예수 할례제 (인멸되었으나 사본이 남아 있음)’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레이던 시절부터 친한 오라네 공의 비서 콘스탄테인 하위헌스의 도움과 중재가 컸다. 렘브란트가 하위헌스에게 보낸 일곱 통의 편지가 이를 말해준다.그리스도 수난 연작 그림들은 뒤셀도르프의 팔라틴 선제후에게 흘러들어갔다가 나중에 독일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에 안착했다. 이윽고 ‘돌아온 탕자’ 그림 앞으로 가면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천사와 늙은이와 알몸의 청년이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렘브란트가 1635년에 그린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일 줄이야.그림은 구약성서 창세기 22장에 충실하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이 100살, 부인 사라가 91세에 낳은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위에 올려놓고 칼로 이사악을 막 내려치려는 찰나에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손을 잡고 소리쳤다.“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도다.”(창세기 22장 9-13절) 그렇다. 아브라함은 행동하는 믿음이었다. (야고보서 2장)그림에는 이사악을 베려던 휘어진 단도가 떨어지며 공중에 멈추고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직도 왼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고, 빛은 이사악의 알몸에 집중되어 있다. 역시 영혼을 비추는 빛의 화가답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거장 카라바조를 닮았다. 또한 스승인 종교화가 라스트만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이 그림이 주문 제작인지 아니면 고객이 화가의 공방을 구경하다가 사들였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신교의 나라 벨기에는 칼뱅주의 교리로 인하여 종교화가 그리 성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는 생애에 걸쳐 종교화를 여러 장 그렸고, 별세 직전인 1668-1669년에 그린 ‘돌아온 탕자’는 불후의 명화였다.예르미타시 박물관 투어의 마지막 그림은 불후의 명작 ‘돌아온 탕자’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방문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1606~1669)가 죽기 직전인 1668~1669년에 그렸는데,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1668년에 갓 결혼한 외아들 티투스가 27세의 나이에 죽었다. 렘브란트는 1663년에 사랑하는 여인 헨트리케와 사별한 후 1668년에 외아들마저 잃었다. 더구나 그는 1656년에 파산 선고를 당하여 초라한 집으로 이사하였고 식사는 빵과 치즈 그리고 절인 청어가 전부였다. 렘브란트에겐 가난과 초라함 그리고 절망의 말년이었다. 그림 주문자도 끊어졌다. 예카테리나 여제(재위 1762~1796)가 1767년에 프랑스 파리 아메쥬네 백작으로부터 구입한 ‘돌아온 탕자’는 신약성서 누가복음 15장에 근거한다. 많은 세리(稅吏)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죄인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는 것에 못 마땅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로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백 마리 양에서 다시 찾은 양 한 마리 비유이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사람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한다. 둘째 비유는 은전 열 닢 중 되찾은 한 닢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셋째 비유는 돌아온 탕자이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을 미리 받아서 고향을 떠났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흉년까지 들어 알거지가 되어 남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는 못 견디고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라고 말하며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누가복음 15장 11-25절)그러면 그림을 자세히 보자. 빛은 아버지와 돌아온 탕자에 집중되어 있다. 소위 렘브란트 조명이다. 돌아온 탕자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 누더기 옷을 입고 닳아진 신발 뒤축으로 물집 잡힌 시커먼 발바닥을 드러낸 아들의 모습은 오갈 데 없는 처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붉은 망토를 두른 늙은 눈 먼 아버지는 아들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앞으로 몸을 굽히고 아들의 등과 어깨에 두 손을 대고 있다. 아버지 모습에는 부정(父情)과 관용이 느껴진다. 또한 아버지와 탕자의 옷 색상은 비슷하여 화합과 일치를 보여준다.한편 그림 맨 오른편에 붉은 망토를 하고 두 손에 지팡이를 집고 서 있는 사람은 큰 아들이다. 그는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가 매우 못 마땅한 표정이다. 누가복음 15장 29-32절에는 큰 아들의 항의와 아버지의 대답이 실려 있다.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에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 잔치를 베풀다니요!” 큰 아들의 투덜거림에 아버지는 말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그림에는 또 다른 세 명이 어둠 속에서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다. 앉아서 가슴을 치고 있는 모자 쓴 남자, 뒤 쪽에 서있는 여자, 그리고 컴컴한 어둠속에 너무나 희미하게 보이는 여인. 이들의 모습은 담담하다.‘돌아온 탕자’의 주제는 회개와 용서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탕자인 렘브란트는 신부님에게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그가 그동안 살아온 63년간의 세월을 고해하고 있는 것이다./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  
    • 기획.연재
    2021-02-17
  • 렘브란트, 제우스의 여인 ‘다나에’에 빠지다
    렘브란트가 1634년에 그린 ‘플로라 옷차림을 한 사스키아’를 감상한다. 렘브란트는 이 해에 사스키아와 결혼했는데, 그는 사스키아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다. ‘밀짚모자를 쓴 사스키아 (1633년)’, ‘베일을 쓴 사스키아(1633년)’, ‘모자 쓴 사스키아(1635년)’ 등이다.렘브란트가 20세의 사스키아 반 읠렌부르흐를 만난 것은 화상(畵商) 헨드릭 반 윌렌부르흐의 집에서였다. 그녀는 윌렌부르흐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레이우바르던의 시장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사스키아는 고향을 떠나 암스테르담에서 살았다. 화사하면서도 다소 수줍음 많은 그녀는 곧 렘브란트와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두 사람은 1633년 6월5일에 약혼했다. 이어서 둘은 1634년 7월 22일에 사스키아의 고향 프리슬란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사스키아는 결혼 지참금으로 무려 4만 길더를 가져왔다. 제분업자의 아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와 결혼으로 사회적 신분이 급격 상승했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를 제피로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서풍의 신)의 부인 플로라(봄과 꽃의 여신)로 그렸다. 사스키아의 머리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꽃으로 치장한 지팡이를 들고 있어 마치 봄의 여신 같다. 옷의 우아한 자수는 일본풍으로 화려하며 얼굴은 소녀같이 붉다. 당시 네델란드는 일본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일본 나가사키에는 네델란드 상관(商館) 데지마가 있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직원 하멜 일행도 1653년에 제주도에 표류하여 13년간 조선에서 지내다가 1666년에 여수에서 나가사키로 탈출했다. 1668년에 하멜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하멜보고서’를 출간했다.그런데 사스키아의 옷과 몸을 보면 그녀가 임신 중임을 암시한다. 그녀는 1635년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2개월 만에 사망했다. 한편 렘브란트가 꽃장식을 한 아내를 그린 것은 17세기 네델란드의 튤립 열풍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튤립 열풍은 집단광기였다. 튤립은 숙련된 장인이 버는 연간 소득의 10배보다 더 많은 값으로 팔려 나갔다. 그중에는 고급 품종 튤립 구근 하나로 대 저택을 사는 사람도 생겼다. 이러자 1633년에는 상류층은 물론, 기술자·하녀에 이르기까지 앞 다투어 선물거래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튤립을 재배하거나 꽃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격 상승을 목적으로 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튤립 열풍은 1636년에 절정에 달하였고, 1637년 2월 마침내 공황을 일으켜 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튤립 파동(Tulip mania)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투기로 인한 거품 경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튤립 버블은 네덜란드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절제, 금욕을 취지로 하는 칼빈주의적 미덕관이 부활하였고, 튤립 투자자들은 로마 신화의 여신 플로라에 비유하여 ‘욕심 많은 플로라에게 바치는 바보들’ 로 묘사되었다.한편 렘브란트는 1636년에 그린 ‘행복한 부부(일명 선술집의 방탕아)’에서 자신을 묘사했다. 완전한 행복을 묘사한 이 그림은 결혼의 기쁨을 유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미술 평론가들은 이 그림의 제목을 ‘선술집의 방탕아’로 부르고 있다. 술집에서 창녀들과 놀아나며 아버지로부터 미리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한 신약성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1642년에 렘브란트는 단체 초상화 ‘야경(민병대장 반닝 코크의 화승총 부대)’을 그려 네델란드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아내 사스키아가 1642년 6월에 3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3명의 아이를 잃은 다음에 1641년에 아들 티투스를 낳은 후 산후병과 결핵이 겹쳤다. 이후 렘브란트는 몰락하기 시작했다.이어서 렘브란트 방에서 ‘다나에(Danae)’ 그림을 보았다. 다나에는 화가들이 좋아하는 주제였다. 렘브란트 이전에는 티치아노(1490~1576)가 그렸고 20세기에는 ‘키스’의 화가 클림트(1862~1918)가 그렸다. 먼저 다나에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다나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국왕 아크리시우스의 딸이다. 아크리시우스는 다나에가 아들을 낳으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믿고 딸을 청동 탑에 가둔다. 그런데 다나에의 미모에 반한 바람둥이 제우스는 황금 소나기로 변신하여 청동 탑 안으로 들어와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열 달이 흘러 다나에는 페르세우스를 낳았다. 아크리시우스가 페르세우스를 죽이려하자, 다나에는 제우스의 핏줄이라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러자 아크리시우스는 딸과 외손자를 궤짝에 넣어 바다에 버렸다. 궤짝은 세리포스섬에 닿았고 페르세우스는 그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테스는 다나에를 아내로 맞고자 흉계를 꾸며 페르세우스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페르세우스는 모험 끝에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왔다. 그가 메두사의 머리를 자루에서 꺼내 폴리덱테스에게 보이자마자 폴리덱테스는 돌로 변해 버렸다.한편 다나에와 함께 아르고스로 돌아온 페르세우스는 원반던지기 경기에 참가했는데 그가 던진 원반이 우연히 아크리시우스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아크리시우스가 외손자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이 들어맞은 것이다.그러면 먼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전성기를 이끈 베네치아의 화가 티치아노 그림부터 살펴보자. 티치아노가 1553년에 그린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제우스는 황금비로 변신하여 다나에를 만나는데 황금비는 금화처럼 동글납작한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다나에 옆에 있는 노파가 앞치마를 펼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금화를 받고 있는 점이다. 탐욕의 상징이다.렘브란트는 티치아노의 ‘다나에’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제우스를 황금 햇살로 변신시킨다. 침대에 누워있는 나체의 다나에는 황금 햇살이 신(神)임을 느끼고 오른 손을 들어 맞이한다. 특이한 것은 다나에의 머리위에 있는 황금 조각이다. 이 조각은 에로스의 동생 안테로스인데 양손이 묶인 채 울고 있다. 어떤 평론가는 안테로스를 응답 없는 사랑의 상징으로 보고, 이 그림의 주제를 ‘아브라함을 기다리는 사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렘브란트 그림에도 노파가 나오는데 노파는 커튼 뒤에서 가만히 엿보고 있다.다나에는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렘브란트는 다나에를 1636년에 그렸는데 1654년까지 오랫동안 가필했다. 엑스레이 분석결과 광범위한 수정 흔적이 나온 것이다. 그는 이 그림을 애지중지했다. 1656년에 작성된 재산목록에도 다나에가 들어 있었다. 한편 에로티시즘의 대명사 클림트도 다나에를 그렸는데 다나에는 에로틱하다. 붉은 머리칼을 풀어헤친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자는 듯 꿈꾸는 듯 몽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나체의 다나에 허벅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황금비이다. 황금비는 씨앗이고 허벅지 사이는 관능과 잉태의 상징이다. 다다에는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를 드러낸다. 뺨의 붉은 홍조와 입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또한 젖무덤 사이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황홀경에 빠진 그녀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준다.이렇게 다나에는 서양미술사에서 다양한 해석과 표상을 이끌어냈다. 순수와 탐욕, 금지된 사랑, 환희와 쾌락 등 다나에만큼 여러 해석을 낳은 주제도 드물 것이다.여담이지만 렘브란트의 그림 다나에는 수난을 당했다. 1985년 6월 15일에 러시아 출신 한 남자가 다나에 그림에 염산을 뿌리고 칼로 두 번 난도질하여 다나에의 팔과 다리, 그리고 얼굴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림은 오랫동안 전시에서 철거돼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2년간에 걸친 복원작업을 하여 1998년 봄에 다시 전시됐다.
    • 기획.연재
    2021-02-03
  •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 그림 그 자체가 신앙고백
    # 카톨릭 옹호자 루벤스루벤스 그림 감상을 마무리하면서 성상(聖像)과 성화(聖畵)에 대하여  공부한다.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과 밀접하여 관련되어 있다. 종교개혁 2세대 칼뱅(1509~1564)은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성상과 성화에 대해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보였다.성화와 성상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 무엇과도 비슷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서 구절에 따라 하느님의 영광을 그릇되게 표현하고 변질시킨다는 것이다. 칼뱅은 성찬식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빵과 포도주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한편 플랑드르 지방 안트베르펜은 일찍부터 루터파의 거점이었으나 1550년부터 칼뱅파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560년경에 칼뱅주의는 겐트·발랑시엔 등 프랑드르 지방 전체로 확산되었고, 1566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1566년 8월 인구 10만 명의 상업도시 안트베르펜 밖 벌판에 2만5000명의 군중들이 칼뱅파의 노천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일부 극렬주의자들이 ‘성상(聖像) 파괴 난동’을 일으켰다. 이 난동은 8월 10일 서부 프랑드르 지방에서 시작하여 2주일도 안 되어 17개 지방에 퍼졌다. 8월 20일과 21일 사이엔 안트베르펜의 30개 교회가 약탈당하고, 8월 22일에는 헨트가 약탈당했다. 성상이 파괴되고 성화가 불태워졌고, 성상 파괴운동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자 프랑드르 지방을 통치하고 있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1527~1598)는 1567년에 강력 진압을 통하여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이후 종교전쟁이 일어났고 1588년에 프랑드르 북부 지역 7개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안트베르펜을 위시한 남부 플랑드르 지역은 펠리페 2세에 의해 다시 가톨릭 지역이 되었고, 반종교개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안트베르펜의 지역 유지들은 교회에 성상 및 성화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이는 1563년에 채택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종교미술에 대한 결의문에 고무된 것이었다. 결의문은 이렇다.“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의 성상들은 교회에서 반드시 형상화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합당한 존경심이 주어져야 한다.”한편 루벤스는 로마에 가서 미술수업을 하고 1609년에 안트베르펜에 돌아왔다. 그는 프랑드르 섭정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종교화 제작에 분주했다. 루벤스는 1610년에 산타 발부르가 교회의 세 폭 제단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을 그렸다. 1612년에는 병기제조업자 조합이 의뢰한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세 폭 제단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다. 1619년에 루벤스는 예수회 성당의 제단 장식을 위해 세 폭 제단화와 39점의 천장화를 주문받았다. 예수회는 스페인의 기사이자 수사인 로욜라 성 이냐시오가 1534년에 파리에서 창설한 수도회로 1540년 교황 바울로 3세의 승인을 얻은 후 교황에 대한 절대충성을 맹세하는 전위대가 되었고, 폴란드·아시아·신대륙 등지에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루벤스가 예수회로부터 주문 받은 그림 중 유명한 그림이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는 예수회 신부로서 1542년에 인도 고아에 도착하여 포교 활동을 했으며 1549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에서 전도했다. 1551년에 전도를 위해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1552년에 11월에 광동성 근처에서 열병으로 선종했다. 그는 1622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모든 선교사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성 바울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교에 입교시켰다고 알려져 있다.루벤스는 1620년까지 무려 63점이나 되는 종교화를 그렸다. 그의 공방에는 수백 명의 견습생이 지원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는데, 안톤 반다이크도 루벤스 공방에서 일했다. 아울러 루벤스의 종교화는 판화로 만들어져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한마디로 루벤스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었다. 바로크(Baroque)는 ‘일그러진 진주’ 또는 ‘불규칙하게 생긴 진주’라는 뜻이다. 바로크 미술은 로마 가톨릭 옹호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했다. 신자들의 시선을 압도할 만한 극적이고 화려하면서 교훈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가톨릭 교리를 강건히 하였고, 미술 그 자체가 신앙고백이었다.# 램브란트 방이제 예르미타시 박물관 투어 마지막 코스인 렘브란트 방(254호)에 들어섰다. 네델란드 미술의 거장 렘브란트(1606~1669)는 초년엔 부와 명성을 얻고 화려하게 살다가 아내가 죽은 후에 파산까지 당하고 쓸쓸하게 죽은 화가이다.  먼저 본 그림은 ‘플로라 옷차림을 한 사스키아’이다. 1634년 작품인데 28세의 렘브란트는 이 해에 20세의 사스키아와 결혼했다. 그림 감상에 앞서 렘브란트의 초기 생애부터 살펴보자.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은 1606년에 암스테르담에서 40km 떨어진 문화도시 레이덴에서 9형제 중 8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라인 강 근처에 풍차 돌리는 방앗간을 가진 제분업자였는데 ‘반 레인’이란 가문이름도 ‘라인 강가의’라는 뜻이다. 네델란드의 상징 3가지는 풍차와 나막신, 그리고 튤립이다. 풍차와 나막신은 낭만이 아닌 ‘네델란드(Netherlands 저지대란 뜻)’의 생존을 위해 물을 다스리기 위한 산물이었다. 렘브란트는 부유해진 부모 덕분에 기술 교육을 받은 형제들과는 달리 7살에 라틴어 학교에 들어갔고 1620년에는 레이덴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런데 그는 학과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화가 야코프의 도제로 들어간다. 그는 야코프에게 3년간 배우다가, 1624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라스트만 아틀리에에서 6개월간 조수로 일한다. 1625년부터 레이덴에서 독립화가가 된 렘브란트는 1628년에 ‘자화상’을 그렸다.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고, 오른쪽 볼과 귀 부분만이 밝다. 역시 ‘빛과 그림자의 화가’다운 터치이다. 이 해에 행운이 찾아왔다. 네델란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 콘스탄테인 하위헌스(1596~1684)가 그의 작업장을 찾아 온 것이다. 오란녀의 왕자 프레데릭 헨리의 비서이자 외교관이며 시인인 하위헌스는 렘브란트의 필치에 감명 받아 형제들의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고 미술계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1631년에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화상(畵商) 헨드릭 반 윌렌부르흐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1632년에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하였다. 이 시기에 네델란드는 1618년부터 스페인에 맞서 종교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칼뱅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은행과 주식시장 등 자본주의가 꽃피었다.이는 2006년 11월13일부터 11월 24일까지 중국 CCTV-2를 통해 방송된 12부작 역사 다큐멘터리 ‘세계를 호령하는 강대국의 패러다임, 대국굴기’의 제2부 ‘유럽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 세계를 움직이다’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는 EBS에서 2007년 1월과 6월에 2회 방송했다.)대국굴기 제2부 네델란드 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7세기는 황금시대였다. 네덜란드는 일약 세계의 경제 중심이자 해운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처음에 네덜란드인들은 농업과 청어가공으로 큰 부(富)를 거두게 되었다. 그 뒤 영국과의 무역 경쟁 와중에서 네덜란드는 상선을 가장 저렴하게 건조하고, 운송료를 낮추는 해상운송의 혁신을 이루어 ‘바다의 마부’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1602년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1619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점령하였다. 1621년에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1626년에 미국에 뉴 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나중에 영국이 이곳을 점령하자 이름을 뉴욕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1609년에는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와 암스테르담 은행을 창립하고, 신용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새로운 경제와 상업체계는 네덜란드의 부의 열쇠였고, 지금도 경제의 핵심 축을 이루는 존재이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의 절반을 점유하였다.” 한편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는 인맥이 넓은 화상 읠렌부르크의 중개로 부유한 상인과 직업전문가의 초상화 주문에 바쁜 시간을 보냈다.1631년에 그린 ‘니콜라스 루츠의 초상화’는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는 암스테르담 부자 상인 루츠를 그린 것이다. 1632년에는 외과의사 길드 회원들의 주문으로 단체 초상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그렸는데, 이 그림으로 렘브란트는 하루아침에 명성을 날렸다.
    • 기획.연재
    202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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